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김선우
가출이 아닌 출가이길 바란다 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돌아갈 집 없이 돌아갈 어디도 없이 돌아간다는 말을 생의 사전에서 지워버린 집을 버린 자가 되길 바란다
매일의 온몸만이 집이며 길인,
그런 자유를……
바란다, 나여
매혹을 위하여/문정희
꽃아, 어지럽지?
피는 순간
사라져 가는 매혹
괜찮아, 그것을 보아버린
오묘한 눈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소멸에 이르는
절박한 피, 충동이자 충돌인
야성의 절벽
거기 내가 나를 던지는
덧없는 황홀
꽃아, 뿌리도 씨도 생각하지 마
온몸으로 하늘을 한번 깨보는 거야
타올라 보는 거야
참깨꽃들에게/권혁재
우리 이제 부끄러워하지 말자
더 이상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지 말자
우리는 한낱 좁쌀만한 씨앗에도
서로를 낯 뜨겁게 붙들고
바람처럼 지나가고
비처럼 지나오기도 하였다
저 건너편 어느 밭에서는
우리보다 큰 씨앗을 품었던
엉터리꽃과 잡초들이 되려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물러터진 세상을 흔들어댔다는데,
우리 이제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말자
잘 생긴 뽀얀 얼굴을
땅바닥으로 숙이지도 말자.
꽃과 가시/강원호
누구나 하나씩
가시를 품고 산다
가장 행복한 때라도
갑자기 눈물나게 하는
가시를 품고 산다
누구나 하나씩
꽃을 안고 산다
가장 슬플 때라도
눈물보다 아름다운
꽃을 안고 산다
누구라도 한 병씩
눈물을 품고 산다
꽃이 가시에 찔리어
흘린 진액을 모아
가슴에 안고 산다
벌레 먹은 나뭇잎/서정연
나뭇잎이 떨어져 내린다
온몸에 무늬가 새겨져 있다
누군가 머물렀던 온기
삶의 뒤꼍 같은 길
누가 지워지지 않는 길
새겨놓았을까
누군가는 살기 위해서
훑고 지나간 흔적이다
반쯤 물든 잎사귀는
댓바람을 피하려는 서랍처럼
웅크리고 있다
나도 따라 걸음을 멈추고
오도카니 들여다본다
거기,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고양이/조은
고양이가 골목에서 마주친 나를
강렬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피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삶과 대면하는 듯…
계속된 한파에 움츠러든 나는
머플러 속에 얼굴을 묻으며
고양이를 외면하고 걸었다
고양이는 찬바람이 부는 골목에서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렸던지
작심한 듯 나를 뒤쫓아왔다
내가 멈추면 따라 멈추고
걸으면 따라 걸었다
이상한 생각에 뒤돌아봤을 때
축 늘어진 젖무덤이 보였다
삶의 생살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기막힌 암흑!
나는 집으로 달려가 밥솥을 열었다
나 혼자 자라겠어요/임길택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아요.
소나 돼지나 염소나 닭
모두 시시해요.
그러나, 다람쥐는
볼수록 신기해요.
어디서 죽는 줄 모르는
하늘의 새
바라볼수록 신기해요.
길러지는 것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볼품없어요.
나는
아무도 나를
기르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나 혼자 자라겠어요.
유목민의 눈/김형술
평원의 사람들은 멀리 본다
거침없이 먼 지평선이 지척이다
구름의 속도
비상하는 매의 숨겨진 발톱
초원에 갓 핀 꽃잎 속 이슬 한 방울이
그들 눈 속에 있지만
그것은 시력이 아니다
발 닿는 곳 모두 길이자
머무는 곳 모두 집으로 가진
무심 무욕
선한 영혼의 힘
아무것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바람을 낳아 방목하는
천진한 힘으로
천 리 밖 비를 헤아리고
만 리 밖 별을 읽는
아득히 푸른 저 유목민의 눈
바람으로 오라/김후란
저 나무 잔가지가
춤을 춘다
바람의 장난이다
오늘은 이 마음도 산란하다
흔들림이 있다는 건
살아 있음의 증거
하면 차라리 태풍으로 오라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님을
소리쳐 알려주는
거친 바람으로 오라
모든 것은 사라진다
사라지기 전에 서로의 손길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