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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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사랑을 배우며

    할머니는 혼잣말을 잘하셨다. 봄비 마당에 두꺼비가 엎드렸으면 대문을 활짝 열어 “잘 가소”. 감자 알이 잘 영글라고 감자꽃을 따내면서 “미안하네”. 그까짓 벌레먹은 대추알을 주우면서도 “익어 오느라 고생하셨네”. 잘 익은 대추알을 보면 우리 할머니처럼 인사를 해줘야 하나, 웃음이 난다. 이별할 일이 겁나서 인연을 엮지 말자, 기를 쓰는 편이다. 어쩌다 떠맡은 강아지가 한솥밥을 먹은 지 여덟 해. 마뜩잖던 첫 마음은 날마다 녹아서 내 마음속에 요 녀석은 작은 우주가 됐다. 뾰족한 모퉁이를 돌 때는 내가 앞장서고, 뙤약볕 쟁글대는 땅바닥에 내 손바닥을 먼저 대보고, 아무것도 없는 저쪽 하늘을 저를 따라 나도 올려보고. 이 나이를 먹고도 나는 물어본다. 잘생긴 것 없이 심심하고 별 볼 일 없는 이 마음들은 사랑일까. 아무 맛도 아무 냄새도 없는데 사랑일까. 자꾸 물어본다. 견뎌 볼 길밖에는 없는 초라한 저녁. 떨어지는 나뭇잎 한 장처럼 아무 말없이 가만히 곁에 앉아 있어 주는 일. 조그만 녀석한테 그 사랑을 배운다. 팔 년을 배워도 모자라서 저물도록 둘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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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옮겨진 동상

    서울의 북촌 화동에 살던 초등학교 시절 안국동의 민영환 동상은 꽤 친숙했다. 지금도 안국동이라면 선생이 먼저 생각난다. 그런 동상이 어느 날 사라졌다. 거리를 넓히는 공사 때문이었다고 한다. 동상은 돈화문 앞으로 갔다가 다시 안국동 우정총국 곁으로 옮겨졌다. 동상이 선생의 시호에서 이름을 딴 충정로에 자리잡은 것은 2022년이다. 남산에 오르다 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김유신 장군 동상이 보인다. 애초 어디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록을 보니 숭례문과 서울광장 사이 태평로의 중앙분리대에 1969년 건립됐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장수 동상이 서울 한복판에 있으니 고구려와 백제 지역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닐까. 계백 장군 동상은 백제지역에만 있다. 온갖 상상을 해 본다. 김유신 동상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어받아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뜻으로 북쪽을 향했다고 한다. 이순신 동상과는 마주 보고 있었다. 1972년 남산으로 옮긴 것은 지하철 1호선 공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세파에 많이도 시달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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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홈플러스 재개장 이후

    한 달 전쯤 영업을 재개한 홈플러스에 가끔 간다. 집에서 다소 멀지만 마음이 쓰인다. 갈 때마다 손님들이 있어 반갑지만 매장 진열대는 여전히 낯설다. 어떤 공간은 비어 있고, 안내판과 다른 물건이 있고, 같은 제품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곤 한다. 주변 매장 일부는 닫혀 있다. 상권 중심인 대형마트가 한동안 문을 닫아서다. 그 와중에도 몇몇 손님은 뭔가를 꼭 사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홈플러스는 삼성 계열사로 시작했다. 외환위기 이후 영국 유통업체 테스코로 넘어갔다. 본사의 분식회계 여파로 급매물이 됐고 2015년 사모펀드 MBK에 인수됐다. 인수대금 일부를 인수되는 기업 자산을 담보로 대출받는 차입매수(LBO), 점포 매각 후 재임대(세일앤드리스백) 등 논란이 되는 기법들이 쓰였다. 유통환경까지 온라인 중심으로 바뀌며 회생절차를 밟고 있다. 홈플러스 정상화에는 많은 난관이 있고 시간이 다소 걸릴 듯하다. 당장 매대가 정상화되려면 납품·협력업체와의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손님이 중요하다. 멀지만, 때론 뭘 살까 고민되지만 자꾸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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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가을에는 독서를

    한 방송에 아동 두뇌 발달 전문가가 나와 열변을 토한다. “우리 아이들의 뇌가 미디어에 중독돼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고 문해력도 너무 없어요. 책을 읽혀야 합니다. 같이 독서를 하세요.” 소셜미디어(SNS) 중독에다 무엇이든지 인공지능(AI)에 물어보는 시대. 어른도 사고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뇌가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아이들은 오죽할까. SNS와 AI에 의존할수록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과 창의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독서 대신 휴대폰을 보고 있으니 문해력도 키울 수 없다. 경각심을 느낀 나라마다 대책이 쏟아진다. 호주, 인도네시아, 영국, 프랑스, 브라질 등은 16세 미만 SNS 사용을 제한했거나 추진 중이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운영사 메타는 청소년 SNS 중독을 유도했다며 미국 47개 주정부가 낸 소송에서 약 23조원을 내고 18세 미만 하루 2시간 제한에 합의했다. 뉴욕·LA는 초·중학교에서 생성형 AI 사용을 제한했다. 우리나라도 14세 미만 SNS 가입 제한 등을 검토 중이다.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자. 김미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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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냉장고 자석

    냉장고에는 작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제주 돌하르방, 오사카의 글리코상까지. 여행지에서 하나둘 사 온 자석들이다. 어디를 가든 기념품 가게에서는 한참 자석을 들여다보게 된다. 도시 이름이나 그곳을 단번에 알아볼 만한 풍경이 들어 있으면 그만이다. 대단한 기념품은 아니어도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남겨 두기에는 제법 괜찮다. 사진은 휴대전화 속 수천 장 가운데 묻히지만 자석은 눈에 띌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건드린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면 바르셀로나의 어느 골목이, 돌하르방을 보면 제주에서 맞은 바람이 떠오른다. 특히 오래 남는 것은 이름난 관광지의 모습보다 길을 잃었던 순간, 우연히 들어간 식당, 갑자기 쏟아진 비 같은 사소한 일들이다. 그곳에서 나눈 짧은 대화나 함께 웃었던 사람의 얼굴도 문득 떠오른다. 냉장고의 세계는 그렇게 조금씩 넓어져 왔다. 잊고 지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해주는 데 이만한 물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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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호박잎을 씻다가

    나들가게에 끝물의 호박잎 묶음들이 소복했다. 칠팔월 뙤약볕을 건너 용케도 보드라운 잎사귀를 품고 있었구나. 대견해서 덥석 안아 왔다. 호박잎을 다듬는데 낮에 본 길갓집 풍경이 떠올랐다. 늙은호박 넝쿨을 담장 위로 쓸어올려 주던 할머니. 뺨 붉은 시절, 귀밑머리 쓸어올린 손끝이 저랬을까. 할머니 떠나고 나면 가을은 서운해서 어찌 오려는지. 누가 있어 늙은호박들은 마음 터놓고 속을 익히려는지. 호박잎을 살살 달래며 씻다가 나는 왜 프랑시스 잠의 시가 생각났을까. 인간의 위대한 일이란 덜거덕거리는 베틀 소리와 올빼미와 한밤중 귀뚜라미 소리를 조용히 듣는 것. 밥물에 얹어 설지도 무르지도 않게 호박잎을 쪘다. 호박잎 푸른 물이 기적처럼 스민 밥 한 공기, 잘박한 강된장 종지. 저녁 밥상은 위대한 일로 가득하다. 미련한 내 귓가로 귀뚜라미 소리 환하게 걸어온다. 저 거기 있다고 밤 깊어 발을 동동 구르며 운다. 나는 마르는 풀처럼 낮아질 수 있을 것 같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풀벌레 울음을 천둥처럼 크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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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초보 식집사

    아침에 눈을 뜨면 거실 창가에 둔 화분부터 살핀다. 밤새 잎이 얼마나 자랐는지, 색이 변하지는 않았는지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집에 새 식구를 들인 지 두 달쯤 됐다. 식물 키우기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내가 큰 결심 끝에 데려온 반려식물이다. 동네를 산책하다 우연히 식물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화원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됐다. 키우기 쉽고, 공기정화 효과도 있는 스파티필름을 초보자 입문용으로 추천받았다. ‘세심한 사랑’, ‘평화’ 등의 꽃말도 마음에 들었다. 화분을 품에 안고 집으로 온 날, 나는 성실한 ‘식집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번만큼은 정말 잘 키우고 싶은 열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식물을 잘 키우는 능력자들을 ‘그린 핑거스’라고 부른다. 선인장조차 말려 죽이는 초보 식집사인 나로선 그저 존경스럽고 부러울 따름이다. 다행히도 식물과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미미하지만 변화를 느끼고 있다. 예전보다 조금은 자신이 생겼다고 할까. 반려식물과 더불어 나도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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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경조사와 SNS

    몇 주 전 생일을 맞아 쉬고 있는데 휴대전화에서 소셜미디어(SNS)가 계속 울렸다. 그동안 비공개로 해뒀던 생일이 갑자기 노출돼 지인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게 된 것. 일부는 SNS와 연계된 생일 선물 쿠폰까지 보내왔다. 머쓱해진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네요. 나이 먹어 생일은 무슨. 암튼 고맙습니다”라고 답장을 썼다. 기분은 업됐지만 SNS가 생일을 공개해 ‘선물 장사’를 하는 느낌도 들어 씁쓸했다. 최근 SNS를 통해 지인 두 명의 부고를 접했다. 그들이 속한 단체방에 올라온 부고를 보곤 마음이 아픈 상황에서 본인들의 SNS로 같은 부고장이 왔다. 아마도 고인의 가족이 보낸 것일 텐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들과 나눈 SNS는 부고장을 끝으로 멈췄지만 차마 삭제하지도 못하고, 다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남아 있다. 일각에서는 SNS 생일 알림과 청첩장·부고장이 일반화하면서 ‘생일이니 한번 보자’는 만남도 줄어들고 결혼식·장례식 참석도 SNS 답장·송금으로 대체되기도 해 안타깝다고 한다. 편리한 SNS 안부 시대, ‘진짜 인간미’는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미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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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아르고스의 꼬리

    얼마 전 본 영화 ‘오디세이’에서 짧지만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늙은 사냥개 ‘아르고스’였다. 거지 차림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알아본 아르고스는 꼬리를 치며 환대한 뒤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의 짠한 감정이 오래 여운으로 남았다. 아르고스를 연기한 노견은 올해 15세인 포르투갈의 ‘소이어’로, 퇴역한 연기 전문 견공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촬영 현장의 스태프들 사이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는 촬영 후기를 보면 사람과 견공 사이의 정서적 교감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네팔·티베트 국경의 대홍수 현장에서 수색견이 진흙더미를 훑으며 인명구조 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그 장면에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10여년 전쯤인가. 북한산의 바위틈을 오르내리며 발톱이 빠져 가면서도 실종자 수색에 몸을 아끼지 않던 소방대 소속 구조견이 새삼 떠오른다. 반려견이든 구조견이든 사람에게 기쁨과 도움을 주고 떠나는 견공들. 그들 모두 꼬리 인사를 남기고 영면한 아르고스처럼 오래오래 기억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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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사람의 글, AI의 글

    글쓰기는 밤하늘을 읽는 일과 닮았다. 첫 문장이 북극성처럼 중심을 잘 잡아야 글이 풀린다. 핵심 표현을 빛내려고 나머지의 명도를 일부러 낮추기도 한다. 비판할 때는 상대가 빠져나갈 웜홀을 슬쩍 열어 두는 것이 예의인데, 기사글에서는 이를 반론이라고 부른다. 생성형 AI가 별자리 그리는 수고를 덜어 주면서 이물질도 끼어들었다. ‘단순히 공간을 넘어선 경험’, ‘단순히 기술이 아닌 철학’ 같은 AI 어투들이다. AI 스타트업 페블러스에 따르면 ‘A가 아니라 B’ 패턴은 AI 산문에서 1000자당 5.8회, 사람 글에서는 0.6회로 9.2배 차이가 났다. 이 밖에 ‘심오한’, ‘본질적인’ 등의 부담스러운 형용사나 ‘패러다임’, ‘메커니즘’처럼 거창한 명사를 즐겨 쓰는 것도 AI 글 특유의 어투다. AI는 표현에 취해 내용을 왜곡하기도 한다. ‘단순히’라며 넘긴 게 실은 가장 중요한 문제일 때가 잦고, ‘본질적’이라 강조한 내용이 군더더기인 경우도 많다. 명도 조절 없이 모든 별을 같은 밝기로 켜 놓으면 밤하늘은 아무것도 보여 주지 못한다. 그래서 별의 밝기를 맞추는 사람의 몫은 쉬이 대체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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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GTX 경로석

    신문사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대선배와는 인연을 오래 이어 갔다. 시내에서 저녁자리가 끝나면 같은 동네에 살던 우리는 지하철도 함께 탔다. 만사에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분이었지만 한 가지, 지하철 경로석을 차지한 젊은이에게는 너그럽지 않았다. 오래전의 일이다. 이제 경로석에 앉은 젊은이가 있다면 아마 외국인 관광객일 것이다. 최근 ‘자격’을 딴 ‘초보 지공거사’로서 아직 일반 지하철 경로석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GTX는 다르다. 요금의 30%를 할인한다지만 65세 이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GTX에선 경로석으로 간다. 일반석에 앉으면 젊은이들의 자리를 빼앗는 것 같았다. 적어도 개통 초기에는 그랬다. 요즘 출퇴근 시간대 GTX는 달라졌다. 경로석이 젊은 세대로 빈자리 없이 채워진다. 대상자가 타지 않으니 기능을 잃어버린 자리라는 판단 때문일까. 이런 모습을 보면서 지하철과 달리 GTX의 경로석은 현실에 맞게 절반으로 줄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경로석에 앉은 ‘무자격자’들의 찜찜한 마음 부담도 덜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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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음식 포장 주문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근처에 피자 맛집이 있다. 도보 5분 거리라 전화로 주문하고 가서 찾아왔다. 앱으로 배달시켜 먹던 아들은 내 행동을 낯설어했다. 배달플랫폼으로 포장주문을 하면 소비자는 돈을 내지 않지만 음식점은 플랫폼에 중개수수료를 낸다. 부가가치세도 더해진다. 플랫폼을 통해 음식점을 소개하고, 주문을 실시간으로 식당에 알려주고, 결제도 대행하는 서비스에 대한 가격 책정이다. 배달플랫폼의 포장 주문 중개수수료는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디지털 플랫폼이 수익을 추구하며 사용자에게 점점 나쁘게 변하는 ‘엔시티피케이션’의 한 예다. 전화 주문한 피자집에서는 가격을 10% 할인해 줬다. 내 지불수단은 신용카드와 연계된 온누리상품권. 그 음식점은 온누리상품권 가맹점이다. 10% 할인할 때 사둔 상품권이니 내가 받은 할인은 총 20%인 셈이다. 디지털 플랫폼에 생활의 많은 부분이 종속돼 있지만 가끔은 벗어나야겠다. 플랫폼의 편리성은 공짜가 아니다. 편리성 거부의 대가가 나한테 이득일 수 있다. 동네 구경하며 걸은 것도 이득이다. 전경하 논설위원
  • thumbnail - [길섶에서] 어머니와 짜장면

    [길섶에서] 어머니와 짜장면

    유행가 가사처럼 어머니는 정말로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다. 기억도 까마득한 코흘리개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길을 걷다 중국집 앞을 지나치게 됐다. 참을 수 없이 매혹적인 짜장면 냄새에 어머니를 졸라 식당에 들어갔던 것 같다. 어머니는 짜장면을 한 그릇만 주문했다. 형편이 몹시 어려운 때였다. 짜장면을 정신없이 먹고 있는 나를 어머니는 그저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도 그때는 젊은 나이였는데, 얼마나 짜장면이 먹고 싶었을까. 그 장면을 떠올리면 마음이 저린다. 어머니는 지금도 장성한 아들에게 뭔가를 먹이는 게 지상목표다. 식사 때마다 당신 그릇 속의 고기를 아들 그릇으로 옮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러지 마시라고 화도 내보지만, 어머니의 퍼주기는 악화일로다. 알량한 효도를 한답시고 어머니를 고급 중식당에 모시고 가기도 한다. 그래도 어릴 적 그 짜장면에 얽힌 사무침은 도무지 해소가 안 된다.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옛날 그 중국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짜장면의 절반을 어머니에게 덜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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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뼈말라

    요즘 몇 달 만에 빼빼 마른 모습으로 나타난 연예인들 기사가 자주 보인다. 하나같이 식단 조절과 운동으로 살을 뺐다는 설명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얼마 전 서울대병원의 어느 교수가 유튜브 의학 채널에 나와 이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본인이 고도비만이라 직접 위고비와 마운자로를 맞으며 체중을 관리 중이라는 그 교수는 직설적으로 꼬집었다. “10년, 20년 동안 못 뺀 살을 어떻게 1년 만에 빼겠습니까.” 초등학교 저학년인 친척 아이는 벌써 또래 친구들끼리 “허벅지가 두껍네, 얇네” 하는 말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아직 한참 자라나야 할 때인데 벌써부터 ‘뼈말라’니 뭐니 하는 외모 기준에 신경을 쓰는 모양이라니. 미디어가 우리 삶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라지만, 어째 왜곡된 피사체만 자꾸 보여 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숫자 하나에 흔들리기보다 내 몸의 소리를 들으며 사는 게 당연해져야 할 텐데 현실은 여전히 억지스러운 기준에 쫓기기 바쁘다. 남의 눈에 맞춘 숫자가 아닌 각자의 온전한 몸을 있는 그대로 아껴 주는 그런 건강한 날이 과연 오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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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한강 라면’ 조리기

    한강변 편의점에서 그 기계를 처음 봤다. 전기레인지와 정수기가 붙어 있는 즉석 라면 조리기. 봉지라면을 뜯어 면과 수프를 용기에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 간단한 레시피인데 괜히 긴장되는 건 기계 옆에 안내문이 잔뜩 붙어 있어서다. ‘수프는 면과 함께 처음부터 넣으세요’라거나 ‘계란을 처음에 넣으면 바닥에 눌어붙어 탑니다’ 같은 경고성 안내문. “계란은 반숙” 같은 소신은 슬쩍 내려놓고 곁눈질로 조리해 본다. 한강에서만 이런 게 아니다. 구내식당 한쪽에 들어선 이 조리기를 쓸 때는 라면을 건네준 조리원이 제대로 끓이고 있는지 염려하는 시선이 느껴지고, 무인매장에서도 혹시 넘치진 않을지 3분 30초 조리 시간 동안 느긋하게 앉아 있질 못한다. 그래도 이런 긴장 덕분인지 면발에 탄력이 더 사는 듯하다. 한강 라면 조리기가 해외로 진출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인도 뉴델리에서 이 조리기를 설치하고 라면 체험 행사를 열었더니 1만 4000명이 왔다. 중국 칭다오에서 열린 판촉전도 성황이었다. 긴장이 더해져 더 맛있는 라면을 전 세계가 맛보면 좋겠다. 홍희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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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평양의 작별

    오래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취재하러 평양에 갔다. 남한 기자 한 명당 북한 안내원(감시원)이 한 명씩 붙었다. 내 ‘짝꿍’은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성이었다. 우리는 직업의식에 충실했다. 그는 남한 사정을 캐물었고, 나는 북한 사정을 캐물었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한번은 취재진을 태운 버스가 평양 시내를 달리다 잠시 정차했다. 장난기가 동한 나는 옆에 앉은 그에게 “내가 지금 버스에서 뛰어내려 도망가면 어떻게 할 거예요?”라고 물었다. 유치한 개그에 당황한 듯 그는 “아니, 그게…”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에이~ 농담이에요, 형.” 그는 멋쩍게 웃었다. 떠나는 날이 왔다. 순안공항까지 배웅 나온 그에게 나는 “다음에 또 봐요”라며 공갈빵처럼 허망한 약속을 건넸다. 고려항공 비행기 트랩을 오른 뒤 몸을 돌려 마지막으로 활주로를 내려다봤다. 그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손을 흔들어 답하는데, 울컥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 형은 울지 않았기를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바랐다.
  • thumbnail - [길섶에서] 조조영화

    [길섶에서] 조조영화

    조조영화를 청춘과 낭만의 상징으로 각인시킨 건 1996년 발표된 이문세와 이적의 듀엣곡 ‘조조할인’이다. 아마도 40대 이상이라면 제목은 잊었을지 몰라도 ‘그 시절 그땐 그렇게 갈 데가 없었는지 언제나 조조할인은 우리 차지였었죠’라는 노랫말을 기억하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데이트 비용을 아낀다는 핑계로 조금이라도 일찍 연인을 만나고 싶어 했던 화자의 풋풋한 설렘은 한 세대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싱그럽게 다가온다. 난데없이 추억의 노래를 소환한 이유가 있다. 청춘 시절 연애할 때조차 외면했던 조조영화를 얼마 전 반강제적으로 보게 됐기 때문이다. 장안의 화제작을 개봉 첫 주말에 보려고 일주일 전 예매 사이트에 접속했지만 낮과 저녁 시간대 좌석은 이미 매진이었다. 그나마 남은 건 오전 8시 30분 조조영화의 맨 앞줄뿐. 고민할 겨를도 없이 손가락은 어느새 결제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토요일 아침 만석인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기대 이상이었다. 청춘도 낭만도 없었지만, 잊고 있던 영화관의 매력을 다시 느끼게 해 준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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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AI에 밀린 검색창

    얼마 전 국방부 장관이 좌우명으로 소개했다는 ‘처변불경’(處變不驚)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기 위해 네이버와 구글을 검색했다. 각각 ‘인공지능(AI) 브리핑’과 ‘AI 개요’라는 문패 아래 그 뜻에서부터 유래, 최근 논란 배경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 줬다. 예전 같으면 관련 기사들을 하나씩 클릭해 내용을 확인하면서 사실관계와 논점들을 파악했을 것이다. 일일이 자료를 뒤져 내용을 비교·검증하기도 전에 AI가 제시하는 요약본의 포로가 돼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지난 10일 구글이 지난해부터 검색엔진에 ‘AI 개요’ 기능을 도입하면서 전통적인 뉴스 웹사이트들의 트래픽이 급감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의 ‘종합뉴스 언론 연합’은 구글의 AI 요약 기능이 언론사 트래픽을 감소시키고 있다며 프랑스 경쟁 당국에 제소했다고 한다. 언론사들로서는 뉴스 검색엔진 출현 초기 벌어졌던 신경전의 상대가 이제 AI로 확대된 셈이다. 그럼에도 콘텐츠의 원천 생산자로서의 언론과 지식인의 역할은 여전히 소중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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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부추꽃이 피어서

    지인이 시금치를 한아름 주고 갔다. 여름비에 장차게 뻗대는 속도를 감당 못하니 뽑아다 먹으라 했다. 풀 한 포기 뽑아 주지 않고 남의 밭을 휘젓기는 염치 없는 일. 그랬더니 아침 이슬 깨기도 전에 휘뚜루마뚜루 뜯어서는 놓고 갔다. 시금치를 다듬는데 목을 뽑아올린 꽃대궁이 보인다. 그래, 너도 꽃이었지. 줄기인지 분간이 안 되는 푸른 꽃. 고단하게 피는 꽃을 나는 잊고 살았네. 시금치꽃을 빤히 보는데 마음이 일렁거린다. 데치면 한 움큼이고 마는 것이 무엇하러 꽃을 피우자고 안간힘을 썼을까. 붉지도 희지도 못해 푸른 꽃, 꽃같지도 않은 꽃을. 모퉁이 텃밭에도 땡볕 아래 나물 꽃들이 피었다. 부추 흰 꽃, 돌나물 노란 꽃, 취나물 흰 꽃, 쑥갓 노란 꽃. 푸른 우주 속에 작은 별들이 총총 떴다. 겨우 풋나물 주제에 왜 하나같이 잔별 모양으로 꽃들은 피는지.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데 어째서 활짝 웃다가 가는지. 오래 보고 있으면 나는 너를 닮으려나. 부추 흰 꽃하고 나하고 백년해로 늙은 부부처럼 서로 보고 앉았다. 저하고 나하고 저녁 바람에 흔들리면서 오래 보고 앉았다. 황수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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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24시간 출렁이는 환율

    미국에서 몇 달 있는 아들에게 보낼 달러를 모으려고 인터넷 뱅크 외화통장을 개설했다. 아들의 외화통장으로 바로 보낼 수 있는데 환전 수수료는 물론 송금 수수료가 없어서다. 아들은 계좌와 연결된 체크카드로 결제한다. 환전과 송금은 아무 때나 가능하다. 지난달 6일부터 원달러 외환시장은 월요일 오전 6시부터 토요일 오전 6시까지 쉬지 않고 열린다. 뉴욕 서머타임이 적용되지 않는 겨울은 월요일 오전 7시부터 토요일 오전 7시까지 열릴 예정이다. 주말과 1월 1일을 제외하고는 공휴일까지 포함해 언제든 달러를 사고팔 수 있다. 환율이 출렁이면서 하루에도 10원 이상 때로는 30원 가까이 변하곤 한다. 조금 더 내릴 것 같아 기다리다가 상승으로 바뀌는 시점에 주로 산다. 더 오를 수 있다는 불안감에. 다행스럽게도 1600원대를 위협하던 환율이 이젠 1400원대 초반이다. 하락 기조이다 보니 행여 새벽에 잠이 깨면 환율 움직임을 확인하고 사기도 한다. 환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돼 새벽에도 별반 움직임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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