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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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대추야, 대추나무야

    이즈막 시골집을 다녀오면 속앓이를 한다. 시골집 마당이 날마다 보고 싶다. 실바람 한 줄기만 지나가도 그 마당은 소란스럽다. 대추알 붉은 것들은 제풀에 지쳐 떨어지고, 못다 붉은 것들은 한나절을 더 머뭇거리고. 순정한 생의 질서는 아침에 점심에 저녁에 보고 또 보아도 심심할 새가 없다. 마흔 살을 먹어 가는 대추나무, 그 옆에 삼십 년째 잘 늙은 무화과나무, 그 옆에 제 나이를 잊어버리고 늙는 석류나무, 그 아래 동백나무, 생강나무. 나이테는 들쭉날쭉, 키는 제멋대로. 그 마당에서 일류 조경사는 무슨 소용이며, 베테랑 정원사는 무슨 소용이람. 화날 일도 없이, 바쁠 것도 없이 늙은 나무들은 늙으신 어머니한테 기대어 어린애처럼 나이를 먹어 간다. 살아갈수록 겁이 나는 일은 무얼까. 벌레 먹혀 떨어진 대추알, 풀모기에 발목을 뜯기며 그까짓 대추알을 호호 불며 줍는 어머니. 문종이처럼 얇은 그 뒷등을 볼 수 없을 어느 시월의 저녁. 이런 생각에 겁이 나면 시골집 대추나무하고 편먹고 싶어진다. 한편이 되어서 물어보고 싶어진다. 너도 겁나지, 대추야 대추나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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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금메달리스트의 “엄마”

    두 번을 연거푸 넘어졌다. 이제 남은 기회는 한 번. 마지막 시도 끝에 어려운 동작을 성공시켰고 한국 스케이트보드 사상 첫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확정됐다. 그 순간 열일곱 살 소년은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연신 외쳤다. “엄마, 엄마!” 명장면을 담은 쇼츠에는 감동의 댓글이 이어졌다. “왜 내가 다 울컥하냐”, “금메달리스트가 아니라 그냥 아들이네”, “귀엽고 찡하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방금 전까지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루던 비장한 카리스마는 어디로 갔는지, 천생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이 터지면서도 코끝이 시큰해졌다. 사실 경기 내내 엄마는 소년이 거센 중압감을 버텨낼 수 있도록 붙잡아 준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계속 미끄러져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에도, 관중석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엄마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그는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반세기 전 한 권투선수가 세계 챔피언에 오른 뒤 생방송에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고 외쳤듯, 승리의 감격을 이보다 더 꾸밈없이 보여 주는 장면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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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완벽한 집’

    ‘완벽한 집’을 만났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서도호 개인전에서다. 투명한 폴리에스터 천과 스테인리스 스틸로 길이 12.37m, 폭 5.75m, 높이 4.55m 규모의 집을 재현한 설치미술이다. 작품명은 ‘완벽한 집: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서울’(2024). 작가는 영국 런던 자택 내부를 실물 크기로 구현하고, 과거 살았던 집들의 문손잡이와 자물쇠, 전등 스위치, 콘센트 등을 천으로 제작해 구조물 곳곳에 꿰매 붙였다. 매일 손길이 닿았던 일상의 물건들을 통해 집을 ‘기억의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작가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서울 집값이 뛰고, 전월세도 급등하면서 집의 의미를 새삼 곱씹게 되는 요즘이다. 무주택자에게 ‘내 집 한 채’는 평생의 숙제이고, 내 집 마련에 성공해도 영끌로 샀다면 남은 인생의 짐이 된다. 정부는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이라며 실거주 정책을 강조하지만 둘의 경계가 무 자르듯 단순명쾌한 것만은 아니다. 현실이 너무나도 답답해서일까. 언제든 착착 접어서 어디에나 가져갈 수 있는 서 작가의 ‘완벽한 집’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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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부캉이의 편지

    안녕하세요. ‘부캉이’예요. 예, 맞아요. 부산 북항의 슈퍼스타 야생 상어예요. 저도 제가 어쩌다 이런 유명세를 타게 됐는지 어리둥절해요. 그냥 따뜻한 바닷물을 따라 헤엄쳐 온 것뿐인데….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돼 버렸네요. 그래도 저한테 귀엽다는 말은 자제해 주세요. 명색이 바다의 포식자인데 귀엽다니요. ‘가오’ 하나로 사는 저로서는 그런 표현이 오글거린답니다. 그리고 너무 ‘오버’하지 말아 주세요. 아무리 제가 유명하기로서니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부모님한테 인사 드리기도 전에 그 무거운 짐을 끌고 저를 보러 오시면 어떻게 하나요. 한국인들 성격 급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여러분이 왜 일면식도 없는 상어 한 마리를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지 생각해 봤어요. 세상이 각박할수록 역설적으로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더 커지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을 여러분의 이웃에게도 나눠 주는 것은 어떨까요. 여러분이 그렇게 안 하면 저 이번에 나가더라도 다시는 안 올 거예요. 김상연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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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매트 모기약

    가을 모기가 더 무섭다. 한여름에도 꺼두었던 매트 훈증기를 선선해진 뒤 다시 꺼냈다. 지난해 이 정도면 평생 쓰겠다 싶게 대량구매해 둔 리필 매트가 마침 며칠 전 똑 떨어졌다. 얼른 주문하려 온라인몰을 뒤지다 당황했다. 40년 가까이 매트 모기약 시장을 지배해 온 양대 제품이 동시에 자취를 감췄다. 처음 보는 브랜드의 리뷰를 보고 나서야 사정을 알게 됐다. 지난 7월 살생물 제품 승인제가 시행되면서 미승인 매트들이 퇴출된 것이다. 기존에 문제없이 팔리던 제품이라도 독성·효능 시험 결과를 첨부해 승인을 새롭게 받아야 했는데, 빅2 회사 모두 리퀴드와 에어로졸만 남기고 다른 제품군을 정리했다 한다. 기업에는 합리적인 판단이겠으나, 여러 제형을 거쳐 매트에 정착한 소비자들에겐 평화로운 여름밤이 무너지는 큰일이었다. 새 매트 제품 리뷰에서 다행히 기존 업체 훈증기와 호환이 잘 된다는 친절한 설명을 읽었지만 향과 성능이 어떨지 몰라 소량만 장바구니에 담았다. 평생 쓰겠다 싶었던 모기약을 여름이 물러난 길목에서 새삼 골라야 하는 번거로움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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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어느 아빠의 죄책감

    어릴 적 시골마을 앞집에 살던 동네 형님을 20여년 만에 우연히 만났다. 가난한 농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초등학교만 마치고 농사일을 하다가 부잣집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던 분이다. 기업도시가 들어서 이전해 온 회사에 근로자로 취직했고, 회사 지원 학자금으로 아들을 도내 한 국립대에 진학시켰다. 그런데 회사 규정을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등록금 지원이 안 되는 줄 알고 아들을 지방대에 보냈다고 했다. 그 결과 지방의 중소기업에 다니며 빠듯한 월급을 받고 사는 아들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는 것. “내가 까막눈이어서 아이를 지금까지 고생시키고 있다.” 모든 게 자신 탓이라고 했다. 하긴 비수도권에서 취업한 청년보다 수도권으로 이동해 취업한 청년의 연봉이 평균 560만원 더 많다는 국가데이터처 통계도 있다. 대를 이은 지방생활의 박탈감을 근거 없다고 하기는 어렵다. 지방에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기업들이 많이 들어서고 지방 청년들도 고루 취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성실히 사는 아빠들이 죄 없이 죄책감을 안고 살지 않도록.
  • thumbnail - [길섶에서] 추석과 중추절

    [길섶에서] 추석과 중추절

    명절 연휴를 앞두고 한과를 주문했더니 상자에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 크게 적혀 있다. 중추절을 추석의 다른 말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눈길이 갔다. 엔닌(794~864년)은 ‘입당구법순례행기’로 유명한 일본 승려다. 그는 당나라에서 귀국선에 올랐지만 풍랑에 떠밀려 적산촌에 이르게 된다. 적산촌엔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이 있었다. 엔닌은 이듬해까지 법화원에 머물렀다. 순례행기의 8월 15일 기록이 흥미롭다. 그는 ‘절에서 박탁(餺飩)과 병식(餠食)을 마련해 팔월 보름 명절을 지냈다. 이 명절은 다른 나라에는 없고 오직 신라국에만 있다’고 적었다. 박탁은 밀가루로 만든 떡, 병식은 쌀가루나 보릿가루로 찌거나 구운 과자류라고 한다. 중국에서 8월을 가리키는 중추(仲秋)라는 표현은 일찍부터 쓰였다. 그럼에도 8월 15일을 중추절이라는 이름의 명절로 즐기기 시작한 시기는 명확지 않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니 추석은 수없이 나오지만 중추절은 딱 한 차례뿐이다. 추석과 중추절은 구별해서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서동철 논설위원
  • thumbnail - [길섶에서] KTX ‘역(逆)빨대 효과’

    [길섶에서] KTX ‘역(逆)빨대 효과’

    KTX를 타고 동해에 가는데 청년들은 묵호역에서 많이 내렸다. 1박 2일 동해 여행에서 삼삼오오 여행 중인 청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택시 기사들은 지난해부터 청년들이 많이 온다며 반색했다. 묵호가 도보여행이 가능한 곳으로 소문나고, 인증샷 명소들이 알려지면서란다. 택시 기사들은 유명 관광지는 물론 동해, 묵호, 강릉 등의 행정구역 변화까지 상세하게 알려 줬다. 단체로 학습한 것처럼. KTX가 처음 개통되던 2000년대 지방의 인구, 쇼핑 수요 등이 서울로 이동해 지방이 위축되는 ‘빨대효과’가 우려됐었다. 일본에 고속철도인 신칸센이 1960년대 도입됐을 때 나타났던 현상이다. 국내에서 비수도권 환자들의 서울 대형병원 쏠림도 한 예다. 쇼핑 환경은 온라인 중심으로 바뀌었다. 소셜미디어(SNS)는 삶의 일부가 됐다. KTX를 타면 청량리역에서 묵호역까지 2시간 8분 걸린다. 묵호역에서 기차를 타고 7분 더 가면 동해역. 택시 기사들은 청년들이 계속 올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 답은 해당 지역에 달려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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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너무 잘하려 애쓰지 마’

    지난번 ‘길섶에서’ 코너에 ‘가을에는 독서를’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뒤 지인들이 “무슨 책을 읽고 있냐”고 물어왔다. 집 책상과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책들을 둘러봤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오디세이’의 원작 ‘오디세이아’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기사 쓰는 데 도움 되는 외교·안보 서적들도 보인다. 요즘 손이 자주 가는 건 ‘필사’를 할 수 있는 책들이다. 디자인도 일기장처럼 아기자기하다. ‘마음 근력 영어필사’로 좋은 영어 명문장을 익히고, ‘하루 한 장 성경 필사’로 성경 공부를 한다. 최근에는 ‘필사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와 ‘마음 놓고 쉬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 노트’를 보기 시작했다. 전자는 나태주 시인이 2022년 펴낸 시집의 필사본이고, 후자는 정신과 전문의가 엄선한 명문장 100개를 담았다. 둘 다 휴식과 멈춤, 회복의 글귀로 가득하다. 퇴근해서 읽고 쓰기에 딱 맞다. 나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유독 이 시집 한 권만 절판되지 않고 독자들 손에서 떠나지 않는 것을 봅니다. 필사 시집이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접근으로 독자들의 마음의 반창고가 되어 주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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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박수근미술관

    강원도 양구에서 뜻밖의 미술관을 만났다. 지인이 ‘박수근미술관’에 가자고 했을 때만 해도 큰 기대는 없었다. 지역 출신 유명인을 내세운 기념관이 사진 몇 장과 연표에 그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봐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구부터 생각이 달라졌다. 거친 화강석 건물은 박수근 그림의 질감을 닮아 주변 풍경과 꽤 잘 어울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더 놀라웠다. 기증품에만 기대지 않고 꾸준히 박수근 작품을 구입해 소장품을 늘려온 덕분에 전시도 제법 풍성했다. 그중에는 박완서의 등단작 ‘나목’의 모티프가 된 ‘나무와 두 여인’도 있다. 전쟁 때 미군 PX에서 박수근을 알게 된 작가는 훗날 그의 나무 그림에서 소설의 씨앗을 얻었다. 지금 열리는 ‘마티에르’전에는 최근 수집한 ‘목련’과 ‘비둘기’도 있어 전시의 밀도를 더한다. 유명인의 이름을 관광상품으로 소비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이름에 걸맞은 공간을 만들고 오래 채워가는 것은 다른 일이다. 양구에서 본 것은 박수근의 그림만이 아니었다. 작은 지자체도 문화사업을 이렇게 제대로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박상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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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인지적 항복

    며칠 전이었다. 형광펜이란 단어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인공지능(AI)에게 물었다. “특정 내용을 돋보이게 할 때 사용하는 펜을 뭐라고 하지?” 노화로 기억력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는 걸 체감하는 요즘이다. 대화 중에 ‘그게 뭐였지’, ‘그거 있잖아’ 같은 애매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럴 때 스무고개 하듯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짚는 수고로움 대신 AI가 금방 원하는 답을 찾아주니 얼마나 편한지. 그런데, 이래도 괜찮은 걸까. 굳어가는 뇌를 자극해 기억을 살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채 매번 AI에게 의존한다면 뇌의 노화는 더 빨라지는 게 아닐까. AI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생각의 ‘외주’를 넘어 생각의 ‘포기’를 의미하는 ‘인지적 항복’(cognitive surrender) 개념까지 등장했다. 미국 MIT AI사용 연구위원회는 최근 보고서에서 “학생들이 조금만 어려움을 느껴도 스스로 고민하는 대신 AI에게 답을 맡긴다”면서 실제로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배웠다고 느끼는 ‘학습의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나부터 당장 돌아봐야겠다. 이순녀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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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AI 상담사

    “고객님, 인공지능(AI) 상담사입니다.” 금융사의 마케팅 전화를 받았다. 그냥 흔한 ARS 스팸전화인데 ‘인공지능 상담사’라는 소개가 귀에 걸렸다. AI가 가장 먼저 사람 대신 자리를 꿰찬 쪽이 콜센터인 듯싶은데, AI랑 통화하며 일이 시원하게 풀렸던 기억이 별로 없다. AI와의 통화는 안내에 따라 버튼을 누르거나 음성으로 답하며 흘러간다. 예전에 ‘엘리제를 위하여’ 연결음을 세 번쯤 들으며 멍하니 기다리던 시간이 이제 AI의 질문에 응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답을 다한 뒤엔 보통 세 갈래 중 하나로 끝난다. AI가 제시한 보기 중 딱 맞는 항목이 없어 결국 상담사 연결로 이어지거나, AI가 전송한 링크를 눌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다. 아니면 AI의 질문에 음성으로 대답했다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답을 들으며 스스로의 발음을 점검한다. 이런 경험들이 쌓인 탓인지 해외에선 AI 상담사를 밀었다가 사람을 다시 뽑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사람 흉내 낸 목소리 대신 수화기를 댄 귀가 뜨거워질 때까지 들리던 ‘엘리제를 위하여’가 그리운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 thumbnail - [길섶에서] 항공모함 배멀미

    [길섶에서] 항공모함 배멀미

    오래전 한반도 인근에 들어온 미군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를 취재한 적이 있다. 서울에서 헬기를 타고 한 시간 넘게 날아가는데, 심한 멀미가 났다. 육지처럼 널따란 항모에 내리는 순간만을 고대했다. 그런데 웬걸, 그 큰 항모도 파도에 따라 뒤뚱뒤뚱 흔들렸다. 배멀미가 이어졌다. 속이 울렁거려 제공된 식사를 한 입도 먹지 못했다. 최악의 컨디션으로 항모 내부 취재를 마치고 갑판으로 올라가려는데, 좁은 계단으로 전투기 조종사 한 명이 뛰어 내려왔다. 보니 타일러의 노래 가사처럼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듯’(fresh from the fight)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내 관심은 그 짧은 항모 활주로에 어떻게 전투기들이 이착륙하는지에만 쏠려 있었다. 내가 탔던 그 링컨호가 지난해 말부터 무려 200일 넘게 중동에서 작전을 수행하느라 승조원들이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순간 그때 항모에서 마주친 그 조종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좀더 제대로 된 기자였다면, 항모에서 복무하는 이들의 실존에 대해서도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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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사랑에는 돈이 든다

    동네 동물병원 대기실. 아내와 초면의 중년여성은 ‘냥이 집사’로서의 노하우를 화제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성은 집에서 16마리를 키우고 있다고 했다. 집 근처 길냥이들에게 밥과 물을 주고 눈비를 피할 곳을 마련해 주다가 어느 날 이사 온 이웃집 여성이 “길고양이들이 너무 싫다”며 관리사무소와 경비실에 항의했다는 것. 혹 길냥이들이 해를 당할까 봐 고심 끝에 전부 집에서 키우기로 했다고 한다. 고양이들 나이 들면 병원비도 적잖이 들겠지만, 밖에 두고 맘 아픈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했다. 며칠 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수의사는 “돈을 좀 들이면 살릴 수 있는데, ‘40만원 주고 사온 고양이를 100만원 수술비까지 써가며 살려야 하느냐’며 돌아서는 주인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반려동물을 고장 난 장난감 버리듯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는 수의사는 우울증 걸리기 십상이라고 한다. 진짜 ‘가족’이라면 아플 때도 책임을 다해야 한다. 사랑에도 돈이 든다는 것이다. 돈 없다면 사랑할 자격도 없다는 건 아니다. 끝까지 책임질 각오가 없다면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박성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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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사랑을 배우며

    할머니는 혼잣말을 잘하셨다. 봄비 마당에 두꺼비가 엎드렸으면 대문을 활짝 열어 “잘 가소”. 감자 알이 잘 영글라고 감자꽃을 따내면서 “미안하네”. 그까짓 벌레먹은 대추알을 주우면서도 “익어 오느라 고생하셨네”. 잘 익은 대추알을 보면 우리 할머니처럼 인사를 해줘야 하나, 웃음이 난다. 이별할 일이 겁나서 인연을 엮지 말자, 기를 쓰는 편이다. 어쩌다 떠맡은 강아지가 한솥밥을 먹은 지 여덟 해. 마뜩잖던 첫 마음은 날마다 녹아서 내 마음속에 요 녀석은 작은 우주가 됐다. 뾰족한 모퉁이를 돌 때는 내가 앞장서고, 뙤약볕 쟁글대는 땅바닥에 내 손바닥을 먼저 대보고, 아무것도 없는 저쪽 하늘을 저를 따라 나도 올려보고. 이 나이를 먹고도 나는 물어본다. 잘생긴 것 없이 심심하고 별 볼 일 없는 이 마음들은 사랑일까. 아무 맛도 아무 냄새도 없는데 사랑일까. 자꾸 물어본다. 견뎌 볼 길밖에는 없는 초라한 저녁. 떨어지는 나뭇잎 한 장처럼 아무 말없이 가만히 곁에 앉아 있어 주는 일. 조그만 녀석한테 그 사랑을 배운다. 팔 년을 배워도 모자라서 저물도록 둘이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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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옮겨진 동상

    서울의 북촌 화동에 살던 초등학교 시절 안국동의 민영환 동상은 꽤 친숙했다. 지금도 안국동이라면 선생이 먼저 생각난다. 그런 동상이 어느 날 사라졌다. 거리를 넓히는 공사 때문이었다고 한다. 동상은 돈화문 앞으로 갔다가 다시 안국동 우정총국 곁으로 옮겨졌다. 동상이 선생의 시호에서 이름을 딴 충정로에 자리잡은 것은 2022년이다. 남산에 오르다 보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김유신 장군 동상이 보인다. 애초 어디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록을 보니 숭례문과 서울광장 사이 태평로의 중앙분리대에 1969년 건립됐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장수 동상이 서울 한복판에 있으니 고구려와 백제 지역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아닐까. 계백 장군 동상은 백제지역에만 있다. 온갖 상상을 해 본다. 김유신 동상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어받아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뜻으로 북쪽을 향했다고 한다. 이순신 동상과는 마주 보고 있었다. 1972년 남산으로 옮긴 것은 지하철 1호선 공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세파에 많이도 시달렸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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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홈플러스 재개장 이후

    한 달 전쯤 영업을 재개한 홈플러스에 가끔 간다. 집에서 다소 멀지만 마음이 쓰인다. 갈 때마다 손님들이 있어 반갑지만 매장 진열대는 여전히 낯설다. 어떤 공간은 비어 있고, 안내판과 다른 물건이 있고, 같은 제품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곤 한다. 주변 매장 일부는 닫혀 있다. 상권 중심인 대형마트가 한동안 문을 닫아서다. 그 와중에도 몇몇 손님은 뭔가를 꼭 사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홈플러스는 삼성 계열사로 시작했다. 외환위기 이후 영국 유통업체 테스코로 넘어갔다. 본사의 분식회계 여파로 급매물이 됐고 2015년 사모펀드 MBK에 인수됐다. 인수대금 일부를 인수되는 기업 자산을 담보로 대출받는 차입매수(LBO), 점포 매각 후 재임대(세일앤드리스백) 등 논란이 되는 기법들이 쓰였다. 유통환경까지 온라인 중심으로 바뀌며 회생절차를 밟고 있다. 홈플러스 정상화에는 많은 난관이 있고 시간이 다소 걸릴 듯하다. 당장 매대가 정상화되려면 납품·협력업체와의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손님이 중요하다. 멀지만, 때론 뭘 살까 고민되지만 자꾸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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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가을에는 독서를

    한 방송에 아동 두뇌 발달 전문가가 나와 열변을 토한다. “우리 아이들의 뇌가 미디어에 중독돼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고 문해력도 너무 없어요. 책을 읽혀야 합니다. 같이 독서를 하세요.” 소셜미디어(SNS) 중독에다 무엇이든지 인공지능(AI)에 물어보는 시대. 어른도 사고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뇌가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아이들은 오죽할까. SNS와 AI에 의존할수록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과 창의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독서 대신 휴대폰을 보고 있으니 문해력도 키울 수 없다. 경각심을 느낀 나라마다 대책이 쏟아진다. 호주, 인도네시아, 영국, 프랑스, 브라질 등은 16세 미만 SNS 사용을 제한했거나 추진 중이다.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운영사 메타는 청소년 SNS 중독을 유도했다며 미국 47개 주정부가 낸 소송에서 약 23조원을 내고 18세 미만 하루 2시간 제한에 합의했다. 뉴욕·LA는 초·중학교에서 생성형 AI 사용을 제한했다. 우리나라도 14세 미만 SNS 가입 제한 등을 검토 중이다.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다.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자. 김미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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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섶에서] 냉장고 자석

    냉장고에는 작은 세계가 펼쳐져 있다.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제주 돌하르방, 오사카의 글리코상까지. 여행지에서 하나둘 사 온 자석들이다. 어디를 가든 기념품 가게에서는 한참 자석을 들여다보게 된다. 도시 이름이나 그곳을 단번에 알아볼 만한 풍경이 들어 있으면 그만이다. 대단한 기념품은 아니어도 그곳에서 보낸 시간을 남겨 두기에는 제법 괜찮다. 사진은 휴대전화 속 수천 장 가운데 묻히지만 자석은 눈에 띌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건드린다.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보면 바르셀로나의 어느 골목이, 돌하르방을 보면 제주에서 맞은 바람이 떠오른다. 특히 오래 남는 것은 이름난 관광지의 모습보다 길을 잃었던 순간, 우연히 들어간 식당, 갑자기 쏟아진 비 같은 사소한 일들이다. 그곳에서 나눈 짧은 대화나 함께 웃었던 사람의 얼굴도 문득 떠오른다. 냉장고의 세계는 그렇게 조금씩 넓어져 왔다. 잊고 지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해주는 데 이만한 물건도 없다.
  • thumbnail - [길섶에서] 호박잎을 씻다가

    [길섶에서] 호박잎을 씻다가

    나들가게에 끝물의 호박잎 묶음들이 소복했다. 칠팔월 뙤약볕을 건너 용케도 보드라운 잎사귀를 품고 있었구나. 대견해서 덥석 안아 왔다. 호박잎을 다듬는데 낮에 본 길갓집 풍경이 떠올랐다. 늙은호박 넝쿨을 담장 위로 쓸어올려 주던 할머니. 뺨 붉은 시절, 귀밑머리 쓸어올린 손끝이 저랬을까. 할머니 떠나고 나면 가을은 서운해서 어찌 오려는지. 누가 있어 늙은호박들은 마음 터놓고 속을 익히려는지. 호박잎을 살살 달래며 씻다가 나는 왜 프랑시스 잠의 시가 생각났을까. 인간의 위대한 일이란 덜거덕거리는 베틀 소리와 올빼미와 한밤중 귀뚜라미 소리를 조용히 듣는 것. 밥물에 얹어 설지도 무르지도 않게 호박잎을 쪘다. 호박잎 푸른 물이 기적처럼 스민 밥 한 공기, 잘박한 강된장 종지. 저녁 밥상은 위대한 일로 가득하다. 미련한 내 귓가로 귀뚜라미 소리 환하게 걸어온다. 저 거기 있다고 밤 깊어 발을 동동 구르며 운다. 나는 마르는 풀처럼 낮아질 수 있을 것 같다. 낮아지고 낮아져서 풀벌레 울음을 천둥처럼 크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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