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함양/이시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함양/이시영

    함양/이시영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함양은 전라남도 구례의 북쪽이다 구례에서 함양을 가려면 오륙백 미터가 넘는 험준한 팔량치 고개나 육십치 고개를 넘어야 한다. 철도나 자동차 길이 없던 아득한 시절, 그러나 이곳에 지리산 곰들이 닦아놓은 혼도婚道가 있었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구례 쪽 곰이 함양으로 넘어가 함양 곰이 되듯 내 어릴 적 함양에서 시집온 바지런한 함양댁들이 구례들엔 넘쳐났다 그리고 60년대 초반까지 구례중학교 운동장에선 구례-함양간 축구 정기전이 열렸다. 코스모스가 피고 오색기가 휘날리는 운동장을 달리는 곰의 아들들은 눈부셨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이 혼도는 끊기고 더 이상 정기전도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함양은 함양, 구례는 구례. 두 곳을 이어주는 젊은 함양댁들도 들녘엔 없다. 다만 가을 어스름녘 구례 쪽에서 어슬렁어슬렁 산마루턱에 오른 늙은 곰이 볕들의 고향인 함양 쪽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외로 꼬고 앉아 그 옛날을 모두 잊었다는 듯 무연한 명상에 잠길 뿐. - ‘혼도’(婚道)라는 말 따뜻하군요. 지리산 곰들이 서로 만나 사랑하고 아기 곰을 낳습니다. 구례 곰은 함양으로 넘어가 새초롬한 함양 색시를 맞이하고, 함양 곰은 구례로 넘어가 번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흰 밤에 꿈꾸다/정희성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흰 밤에 꿈꾸다/정희성

    흰 밤에 꿈꾸다/정희성 좀처럼 밤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해가 지지 않는 사흘 밤 사흘 낮 시베리아 벌판을 바라보며 어떤 이는 징키스칸처럼 말달리고 싶다 하고 어떤 이는 소떼를 풀어놓고 싶어 하고 어떤 이는 감자 농사를 짓고 싶다 하고 어떤 이는 벌목을 생각하고 또 어떤 이는 거기다 도시를 건설하고 싶은 눈치였다 1907년 이준 열사는 이 열차를 타고 헤이그로 가며 창밖으로 자신의 죽음을 내다봤을 것이다 이정표도 간판도 보이지 않는 이 꿈같이 긴 기차 여행을 내 생전에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데 누군가 취한 목소리로 잠꼬대처럼 “시베리아를 그냥 좀 내버리면 안 돼?” 소리치는 바람에 그만 잠이 달아났다 더 바랄 무엇이 있어 지금 나는 여기 있는가? 좀처럼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가까스로 밤에 이르렀지만 아침이 오지 못할 만큼 밤이 길지는 않았다 ** 시베리아 횡단열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직통으로 달리면 7박8일 걸린다 하죠. 1995년 가을 모스크바의 벼룩시장에서 낡은 지갑 하나를 샀습니다. 흑백사진 엽서 한 장이 들어 있었지요. 한 소녀의 모습이 찍힌 흑백사진 뒤에 몇 줄의 글이 적혀 있었지요. 우리 가족 모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항구의 아침/박서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항구의 아침/박서영

    항구의 아침/박서영 페루의 민물거북이 휴식을 취할 때 기다렸다는 듯이 나비떼가 날아와 거북의 눈물을 핥아 먹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서로의 눈동자를 씻겨 준 적이 있지요 그때 당신이 내 눈의 아름다운 맛을 다 갖고 떠났지요 애틋함과 행복 같은 것들 말이에요 한때 수많은 나비들이 날아와 내 눈물의 맛을 보고 함께 울어 주기도 했어요 고맙게도 이제 내 눈물은 쏘가리 은어 빠가사리 모래무지, 민물고기의 다른 이름 살을 발라내고 버려두어도 뼈 혼자 헤엄쳐 가지요 눈물이 헤엄쳐 간 곳 소금기가 흩날리는 항구의 아침 내 눈물은 잃어버린 맛을 찾아갔지요 슬픈 포식자처럼 국물 속의 흐물흐물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간을 맞추지 않아도 서로에게 잘 맞았던 시간들을 생각합니다 나비의 겹눈처럼 서로의 무늬를 들여다보며 나는 점점 아침의 단어들을 잃어가고 있어요 이 항구엔 한 집 건너 대구탕 집이 즐비합니다 담장 위에 넝쿨장미 꽃들 환합니다. 시는 장미 넝쿨 위 햇살 같은 존재일 때 빛이 납니다. 삶의 진실이 새겨진 뜨거운 말도 진부함 속에 펼쳐지면 빛을 잃지요. 쏘가리 은어 빠가사리 모래무지와 같은 민물고기의 다른 이름이 눈물이라는 것, 처음 알았습니다. 살을 다 발라낸 민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박각시 오는 저녁/백석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박각시 오는 저녁/백석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방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박각시는 저물 무렵 박꽃에 날아오는 나방이다. 주락시 또한 나방일 것이다. 박각시와 주락시를 본 적 없다. 백석 또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 영혼의 텃밭 어딘가에 박꽃이 하얗게 피고 박각시와 주락시들이 붕붕 날아오는 것 같다. 백석이 하얗게 웃는 모습도 보인다. 백석 시의 장함은 조선 사람 외에는 이 아름다운 시를 읽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북관 사투리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 마음 안에 훼손될 수 없는 파라다이스가 펼쳐진다. 돌우래와 팟중은 땅강아지와 같은 곤충의 이름이다. 언젠가 백석의 손을 잡고 산등성에 올라 콩꽃처럼 피어나는 별밭을 볼 것이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돼지엄마/김경민 · 구멍 뚫린 양말/장선자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돼지엄마/김경민 · 구멍 뚫린 양말/장선자

    돼지엄마 /김경민 50×20㎝, 청동에 아크릴릭, 2008 조각가. MBC 한국구상조각대전 대상 수상. 구멍 뚫린 양말 /장선자 이모 집에 심부름을 갔는데 모르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나와 선볼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이 맘에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구멍 뚫린 양말 사이로 보이는 하얀 엄지발가락이 갑자기 멋있어 보이고 맘이 갔습니다 우리는 맘에 들어 자주 만났습니다 하루는 둑길을 걸어 광양까지 갔습니다 그 사람이 자장면을 먹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메뉴판을 보더니 나가자고 해서 다시 걸어서 집으로 왔습니다 나중에 돈이 모자라서 그랬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자장면 한 그릇 못 사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순천의 할머니들이 글을 배워 그림도 그리고 시도 썼습니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라는 멋진 책을 냈지요. 장선자 할머니의 글, 시일까요, 아닐까요. 시는 은유라고 믿는 전통적인 평론가들에게 이 글은 시가 아닐지 모릅니다. 내 눈에는 시군요. 구멍 뚫린 양말 사이 하얀 엄지발가락이 너무 멋져 보입니다.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한 존재(발가락)가 보석의 광휘를 얻게 되는 순간입니다. 궁핍을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푸른 초상/서정태 · 개종 2/황인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푸른 초상/서정태 · 개종 2/황인찬

    푸른 초상 / 서정태 160×160㎝, 장지에 채색 서라벌예술대학 미술과 졸업. 제2ㆍ3회 중앙미술대전 특선 개종 2 / 황인찬 물탱크가 있다 환기구가 있다 창문이 있다 5층의 건물이 있다 간판이 있다 전신주가 그 앞에 있다 내가 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내가 있다 무작정 올라갔더니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지나가면 옥상이 있다 거기에는 물탱크가 있다 푸른 물탱크가 있다 시 수업 시간에 발표할 학생 둘이 오지 않았다. 어디서 꽃 보고 술 먹을 거라 생각했다. 저물 무렵 둘이 찾아왔다. 어젯밤 시 쓰러 강의 동 옥상(8층)에 올라갔다 별이 좋아 담요 둘러쓰고 잠들었다 한다. 시 3편 쓴 것보다 잘했다고 했다. 시는 다음에 쓸 수 있지만 담요 쓰고 별을 본 추억은 오래 남을 테니. 그 옥상 문 잠겼다. 종이비행기처럼 날아간 한 영혼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탱크가 있는 옥상에 올라간 영혼이 있다. 그도 종이비행기가 되고 싶었다. 푸른색의 물탱크를 만나고 당황한다. 물탱크 안에 출렁일 푸른색의 물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는 종이비행기가 되겠다는 생각을 접는다. 이 개종 참 따스하다. 곽재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두부/유병록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두부/유병록

    두부 /유병록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 따뜻한 살갗 안쪽에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곧 잠에서 깨어날 것 같다 순간의 촉감으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부는 식어간다 이미 죽음을 여러 번 경험한 것처럼 차분하게 차가워지는 가슴에 얹었던 손으로 이미 견고해진 몸을 붙잡고 흔들던 손으로 두부를 만진다 지금은 없는 시간의 마지막을, 전해지지 않는 온기를 만져 보는 것이다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느낌, 영혼의 머뭇거림에 손을 얹는 느낌 이것은 지독한 감각, 다시 위독의 시간 나는 만지고 있다 사라진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리고 있다 *** 내 사는 가까운 바닷가 마을에 ‘옛날 손두부’ 집이 있다. 맷돌에 갈아 만든 따뜻한 두부에 묵은지(김치)를 내준다. 묵은지 손두부와 낭도 막걸리의 케미는 최고다. 낭도 막걸리 한 병과 묵은지 손두부 한 접시 달게 먹고 모르는 우리, 서로 눈인사를 한다. 시 속의 두부는 쓸쓸하다. 피가 식어 가고 숨소리도 멈췄다. 그 쓸쓸한 두부를 가만히 만진다. 당신은 여기 없지만 함께 두부를 먹던 오월의 시간들 영원하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버드나무/이용악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버드나무/이용악

    버드나무 / 이용악 누나랑 누이랑 뽕 오디 따러 다니던 길가엔 이쁜 아가씨 목을 맨 버드나무 백년 기대리는 구렝이 숨었다는 버드나무엔 하루살이도 호랑나비도 들어만 가면 다시 나올 상 싶잖은 검은 구멍이 입 벌리고 있었건만 북으로 가는 남도치들이 산길을 바라보고선 그만 맥을 버리고 코올콜 낮잠 자던 버드나무 그늘 사시사철 하얗게 보이는 머언 봉우리 구름을 부르고 마을선 평화로운 듯 밤마다 등불을 밝혔다 - 함경도라는 말보다 북관이란 말을 좋아한다. 북관이라고 말하면 키가 크고 광대뼈가 불끈 솟은 남정네들 생각이 난다. 두만강 건너 대륙으로 이어지는 초원의 향기도 난다. 내 남은 꿈은 북관까지 도보 여행을 하는 일이다. 해남 땅끝에서 걷기 시작해 반도를 종단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짚신 두 축을 메고 걷다가 해가 지면 마을의 느티나무 밑에 천막을 치고 별을 보다 잠이 들 것이다. 이용악은 북관 사내다. 일제강점기, 북으로 가는 남도치들이 길 걷다 버드나무 아래 잠드는 모습이 그에겐 안쓰러웠겠지만 내겐 꿈결처럼 느껴진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시냇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쓴 시/신위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시냇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쓴 시/신위

    시냇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쓴 시 / 신위 수레 대신 천천히 걸어 꽃을 찾아 나서네 황씨네 넷째 딸 집에 꽃이 막 피어나네 시 쓰겠노라 종이와 붓 찾지 말게 시냇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써 나가리니 尋花緩步當經車 黃四孃家花發初 覓句不須呼紙筆 溪邊怡好細沙書 - 추사의 절친 자하 신위의 시입니다. 꽃 핀 세상 이곳저곳을 걷다 문득 마주한 모래밭 위에 손가락으로 한 구절의 시를 쓸 수 있음이 얼마나 따뜻하고 우아한 일인지요. 남쪽 바닷가 마을에 꽃들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으로 시 한 구절 남길 모래밭 찾을 수 있습니다. 마음 어두운 당신, 오월엔 당신의 영혼을 위로할 작은 모래밭 하나를 찾아 길 떠나는 것 어떻겠는지요. 꽃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 오월의 기쁨 아니겠는지요. 산밭에 바람 불고 흰 보라 무꽃들 나비 부르는 시간에 씁니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근원-자연회귀 / 이상찬 · 자두나무 / 최두석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근원-자연회귀 / 이상찬 · 자두나무 / 최두석

    근원-자연회귀 / 이상찬 73.5×60.5㎝, 동판에 칠보기법 한국화가. 전북대 예술대학 미술학과 명예교수 자두나무 / 최두석 어린 날 세상 모르고 행복했던 순간 나는 원숭이처럼 자두나무에 올라가 있었네 자줏빛으로 달게 익은 자두를 한 알 두 알 느긋이 골라서 따먹고 있었네 그때 나는 큰집에 맡겨 있었고 오래된 우물이 있는 큰집의 뒤란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두 그루의 자두나무를 옮겨 다니고 있었네 밥상머리에 늘 앉히고 먹이던 큰아버지는 사라호 태풍에 난파된 배를 타고 먼 길 가시고 큰어머니와 사촌 누나들이 함께 살던 집 들여다보면 우물 속 이끼처럼 우중충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는데 그때가 내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은 것이 자두나무가 요술을 부린 것처럼 기이하다네 그때 내가 품은 의문은 고작 손오공은 왜 자두가 아니고 복숭아를 따 먹었을까였다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에 호두나무가 있었다. 집주인 할아버지는 호두나무를 많이 사랑했다. 호두가 익을 무렵 할아버지가 집을 비우면 호두나무에 올라갔다. 손수레를 뒤집어 호두나무 둥치에 세우고 오르면 첫 가지가 손에 잡혔다. 어느 날 할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린 엄마/라빈드라나드 타고르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린 엄마/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어린 엄마 /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강변의 일꾼들이 벽돌을 구울 흙을 하루 종일 파고 또 팝니다 일꾼의 어린 딸 하나 매일 나루터에 나와 그릇을 닦고 빨래를 합니다 물을 긷고 밥을 하고 오두막 청소를 하느라 아이는 일개미처럼 허리가 휩니다 아이가 달려갈 때면 아이의 팔찌가 쇠그릇에 부딪는 소리가 납니다 아이의 남동생은 알몸의 까까머리, 진흙투성이가 되어 누나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그러다가 누나가 시키면 강둑에 앉아 풀 시계를 만들며 일이 끝나기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저녁이 오면 누나는 머리에 물 단지를 이고 오른손에 동생 손을 잡고 왼쪽 허리춤에 씻은 접시를 받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누나도 아직 아이지만 엄마가 없으니 누나가 어린 엄마입니다 *** 강변 풀밭 길에 꽃들 한창입니다. 냉이, 민들레, 금창초, 제비꽃, 광대나물꽃… 풀밭 길을 걷는다는 것은 꽃들 사이로 난 작은 길을 걸어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예요. 풀밭 곁 자전거길이 있습니다.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는데 시멘트의 벌어진 틈 사이에 제비꽃 한 송이가 피어 있군요. 허리 구부리고 안녕, 눈 맞추는데 보라색 꽃잎 뒤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 나옵니다. 등에 까만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사과꽃/도종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사과꽃/도종환

    사과꽃 / 도종환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피었습니다 보고 싶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피었습니다 하얀 사과꽃 속에 숨은 분홍은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살면서 가졌던 꿈은 그리 큰 게 아니었지요 사과꽃 같이 피어만 있어도 좋은 꿈이었지요 그 꿈을 못 이루고 갈 것만 같은 늦은 봄 간절하였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지고 있습니다 *** 어린 시절 사과꽃을 처음 보았지요. 경주로 가는 수학여행 버스 안이었습니다. 사과꽃이 날려 천지사방이 은빛의 비단 폭으로 술렁였습니다. 그 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나는 어디로 가는가 생각했지요. 살면서 내가 가졌던 꿈도 그리 큰 게 아니었습니다. 작은 섬마을 학교에서 국어 선생님을 하며 아이들과 함께 시 읽고 시 쓰며 살고 싶었습니다. 아침이면 떠오르는 햇살 속에 종이배를 접고 물살들이 종이배를 바다 가운데로 밀고 가는 모습 보고 싶었지요. 그 꿈 이루지 못했습니다. 해마다 사과꽃 피었다 집니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지금도 생각해요. 초라해지고 쓸쓸해집니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난쟁이와 저녁식사를/신현정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난쟁이와 저녁식사를/신현정

    난쟁이와 저녁식사를 / 신현정 난 이때만은 모자를 벗기로 한다 난쟁이와 식탁을 마주할 때만은 난 모자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것은 아주 높다란 굴뚝 모양의 모자였다 금방이라도 포오란 연기가 오를 것 같고 굴뚝새라도 살 것 같은 그런 모자였다 사실 꼭 이런 모자를 고집하자는 것은 아니다 식탁 위에서 모자는 검게 빛났다 오라, 모자는 이렇게 바라보기만 하여도 되는 것이구나 식사를 마친 우리는 벽난로에 마른 장작을 몇 개 더 던져 넣었으며 그리고 식탁을 돌았다 나, 난쟁이 이렇게 둘이서 문 밖에서 꽥꽥 하는 거위도 들어오라고 해서 중간에 끼워 주고는 나, 거위, 난쟁이 이렇게 셋이서 모자를 돌았다. 아끼는 모자가 있는가? 그 모자를 언제 벗는가? 신현정은 말한다. 난쟁이와 함께 밥 먹을 때만 모자를 벗는다고. 높다란 굴뚝 모양의 모자는 권위와 명예와 부의 상징이다. 난쟁이는 누구인가. 가난한 자, 병든 자, 삶에서 소외당한 소수자들의 이름이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그가 지닌 최고의 명예들, 권위들을 스스로 내려놓을 수 있다면 세상은 충분히 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식사가 끝나면 나와 난쟁이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동백꽃/조남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동백꽃/조남순

    동백꽃 / 조남순 기와 옹박지에다 물을 이고 오는데 발길만 돌에 톡 차이면 파사삭 깨져브러 집에는 또가리하고 바가치하고만 갖고 오네 어머니는 디지게 욕을 하는데 상윤이 머시매가 나를 똑똑 따라오네 *** 글을 배우고 처음 시를 쓰게 된다면 어떤 시를 쓰게 될까. 조남순 할머니. 산 좋고 물 맑은 섬진강 자락에서 나고 자랐으나 글공부할 세월의 부드러움을 지니지 못했다. 평생 산밭에서 허리 구부려 일하고 논에 물 대고 가을에 알곡을 거둬들여 살붙이들을 먹일 수 있으면 그것이 삶이고 행복이었다. 그가 글을 배워 처음 쓴 시, 사랑의 시다. 한때 당신도 누군가의 뒤를 가슴 설레며 따라간 적 있지 않은지.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가슴 두근거린 적 없지 않은지. 삶이란 자신이 지닌 시간의 수레에 설렘을 싣고 가는 먼 여행이다. 세월이 한 갑자 돌았음에도 상윤이 머시매의 발걸음 소리와 붉은 동백꽃은 기억에 남는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신현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신현림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신현림 그해 책이 가득 든 가방이 있었고 낙서판 같은 탁자마다 술이 넘쳐 흘렀네 괜찮은 사내며 계집이며 가까울수록 잃을까 불안한 심정이며 시대가 혼란스럽고 취직이 힘들수록 쟁기처럼 단단해져야 할 마음이며 ‘아침이슬’과 미칠 듯이 파고드는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를 들으며 몸 저리게 서러웠네 세월의 징검돌을 밟고 그들은 내 곁을 스쳐 갔네 다시 칠 년 다시 소독약보다 지독한 시간이여 청춘의 횃불이 꺼져 간다 괴로워야 할 치욕도 상처의 저수지도 잊어 가고 우리의 숙명인 열정도 식어 간다 근근이 살아가는 고달픔이란 너는 허기져 삽살개를 찹쌀개로 헛발음하고 시계 사준다는 말이 시체 사준다는 말로 들리고 혼자가 싫어 드라큐라라도 함께 있고픈 주말 사나운 날씨를 못 견뎌 헤매는 오후 네 시 울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 일개미가 제 덩치보다 10배나 큰 보리알을 물고 간다. 가다가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풀뿌리에 걸려 보리알을 놓치기도 한다. 끙끙거리는 신음소리가 들린다. 일개미는 목포를 출발하여 서울까지 가야 한다. 언제 도착할 수 있을까. 역사의 진보에 대해 생각한다. 일개미의 고난의 행군과 같다는 생각이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부부싸움/김막동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부부싸움/김막동

    부부싸움 / 김막동 첫 애기 낳고 칠월백중에 놀았소 비석 치고 편을 갈라 갖고 금성댁네 집에서 여자 남자 쳤든가 몰라 남자하고 비석 쳤다고 남편이 뭐라 하네 오늘 저녁에 뭐라 하고 내일도 뭐라 해서 공동산 몬당에 죽어 블라고 갔네 긴그라 먹고 단것 먹으면 죽은단께 갔더니 뒤를 밟았는 갑써 목구멍에 피가 넘어오게 파내네 보둠고 파낸께 그 와중에도 왜 부끄란가 몰라 동네 탄금양반이 지나가네 섬진강 자락 곡성 산골 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우치고 평생 처음 시를 썼다. 그 시들이 ‘시집살이 詩집살이’라는 시집으로 나왔다. 백중날 젊은 아낙은 동네 남정들과 어울려 비석치기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계속 궁시렁거렸고 시달린 아낙은 죽으려고 공동묘지 언덕에 올라 농약을 마신다. 남편이 쫓아와 목구멍을 파내는데 보듬고 파내니 참 부끄러웠다. 동네 탄금양반이 지나가며 보니 이 일을 어쩌남. 인간 본성의 정직함과 순수함이 그대로 드러난 시. 사이비 수사와 진정성 없는 언어유희로 범벅이 된 오늘의 우리 시가 이 시 앞에서 참 부끄럽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늑대를 타고 달아난 여인/김승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늑대를 타고 달아난 여인/김승희

    늑대를 타고 달아난 여인 / 김승희 나는 새로운 것이 보고 싶었다 설거지가 끝나지 않은 역사 말고. 정말 새로운 것, 설거지감 냄새가 묻지 않은 그런 새로운 것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구마구 올라갔다 투명 유리 엘리베이터 창 아래로 하늘이 마구마구 내려갔다 믿을 수 없는 높이까지 내가 올라갔어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넝마 한 벌-하늘과 설거지감-산하, 환멸만큼 정숙한 칼이 또 있을까. 있음을 무자비하게 잘라 버리니까. 아아, 난 새로운 것을 보려면 그 믿을 수 없는 높이의 옥상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뛰-어-내-려? 뛰-어-내-려! - 하얀 늑대를 타고 달리는 여인을 본 적 있다. 갑부인 출판사의 대표가 여인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소설을 우리 출판사에서 내고 싶습니다. 필요한 액수를 적으세요. 대표가 백지 수표를 앞에 놓았다. 모두 침묵했다. 잠시 후 여인이 말했다. “내가 무명일 때 50만원 100만원의 계약금을 받은 출판사들이 있습니다. 그 출판사들에 원고를 준 뒤 대표님의 출판사와 계약하겠습니다.” 여인은 늑대를 타고 돌아갔다. 멋있었다. 출판사의 주간이 사전에 내게 일러 준 계약금은 2억이었다. 25년의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화단에서/나해철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화단에서/나해철

    화단에서 / 나해철 눈시울에 뜨는 그믐을 싸리 보라 꽃으로 가리우고 해마다 진 꽃들이 강 건너 외길을 하나 둘 세며 오는 강 마을 작은 등불을 보다 불빛 속에 숨진 꽃들을 일으켜 세워 자운영, 수수꽃다리 그해 시집가는 누님의 맨드람 얼굴도 빛나는 꽃잎을 펼치어 들고 자욱이 뿌려진 불꽃 아래 꽃, 송이끼리 아우러지는 다수운 慶事의 밭 눈시울에 뜨는 그믐을 꽃잎으로 가리우는 싸리, 뜨락에 고운 꽃보라, 기억의 겨울화단으로 늘 하나 둘 세며 오는 강 마을의 가물거리는 불빛이여 - 44년 전 스무 살이었던 청년이 있었다. 시를 사랑했던 청년은 의과대학에 갔다. 부모님의 뜻을 어길 수 없었다. 벚꽃이 환한 봄날 낡은 바바리코트를 입은 청년과 만났다. 우리 아버지가 어머니랑 연애할 때 입은 옷이야. 1940년대 초반의 옷. 그 옷을 입고 청년은 의과대학에 다니며 시와 연애했다. 어두운 시절 그는 내내 삶의 경사를 꿈꾸었고 마음속 강마을의 불빛을 셈하였다. 훗날 그는 세월호에서 숨진 304명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슬프고 아름다운 시집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을 냈다. 이 시는 청년이 스무 살에 ‘길목’이라는 동인지에 쓴 시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패랭이꽃/김해화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패랭이꽃/김해화

    패랭이꽃/김해화 기둥 넘어져 무너지는 스라브판과 함께 야윈 철근쟁이 한 명 늙은 목수 한 명 무너졌습니다 넘어진 기둥 일으켜 새로 온 젊은 목수들 합판을 깔고 튼튼한 철근쟁이들 몰려와 좀 더 튼튼하게 철근을 넣어도 무너진 사람들 일어서지 않습니다 살아남아 캄캄한 가슴으로 쓴 소주 마시던 사람들 가벼운 바람에 무재해 깃발 한 번 흔들리면 뜨거운 눈물로 피 묻은 이름 씻어 가슴에 묻습니다 휘어진 철근토막 부러진 나무토막 불도저 삽날에 밀려 피 묻은 여름도 함께 파묻힌 공사장 철근을 메다 말고 담배 한 대참 가을 서늘한 햇살에 젖는데 철근 야적장 옆 언덕 위 철 지난 패랭이꽃 붉습니다 -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 살다 보면 지옥은 꼭 있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타인의 몫을 빼앗는 이들이 죽은 뒤 천국에 간다면 정말 아닐 것 같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돌보라고 힘을 준 장관, 국회의원들이 자기 몫만 챙겼는데 천국에 간다면 신은 노망했거나 사탄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스무 살 비정규직 젊은 청춘들이 외주 공사장에서 죽어 간다. 그들이 지닌 낡은 가방 안에 공통적으로 컵라면이 들어 있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가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반딧불이 / 안재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반딧불이 / 안재찬

    반딧불이 / 안재찬 어머니에게 인사를 시키려고 당신을 처음 고향 마을에 데리고 간 날 밤의 마당에 서 있을 때 반딧불이 하나가 당신 이마에 날아와 앉았지 그때 나는 가난한 문학청년 나 자신도 이해 못할 난해한 시 몇 편과 머뭇거림과 그 반딧불이밖에는 줄 것이 없었지 너무나 아름답다고 두 눈을 반짝이며 말해 줘서 그것이 고마웠지 어머니는 햇감자밖에 내놓지 못했지만 반딧불이로 별을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자란 고향에서는 반딧불이가 사람에 날아와 앉곤 했지 그리고 당신 이마에도 그래서 지금 그 얼굴은 희미해도 그 이마만은 환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지 - 한때 나는 반딧불이가 색색의 별처럼 반짝이는 인도의 시골 마을에 살았다. 가로수들이 일렬로 선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밤길을 걷고 있으면 원주민 마을의 소녀가 캄캄한 풀숲 속에서 튀어나와 나마스테! 인사를 했다. 소녀의 눈도 반딧불이처럼 반짝였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벽에 걸어 둔 외투에 반딧불이가 앉아 반짝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이 이가 나를 따라왔을까. 밤은 동화처럼 푸르고 꿈길은 포근했다. 안재찬의 필명은 유시화다. 곽재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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