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봄/유희경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봄/유희경

    봄/유희경 겨울이었다 언 것들 흰 제 몸 그만두지 못해 보채듯 뒤척이던 바다 앞이었다 의자를 놓고 앉아 얼어가는 손가락으로 수를 세었다 하나 둘 셋, 그리 熱을 세니 봄이었다 메말랐던 자리마다 소식들 닿아, 푸릇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제야 당신에게서 꽃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오는 것만은 아니고, 오다 오다가 주춤대기도 하는 것이어서 나는 그것이 이상토록 좋았다 가만할 수 없이 좋아서 의자가 삐걱대었다 하나 둘 셋, 하고 다시 열을 세면 꽃 지고 더운 바람이 불 것 같아, 수를 세는 것도 잠시 잊고 나는 그저 좋았다 겨울을 견디며 서 있는 나무들의 인내는 심오하고 철학적이었다. 어느 날 그 나무들이 가지마다 꽃을 토해 냈다. 만개한 벚꽃이 비바람에 다 지고, 메말랐던 가지엔 신록이 짙어 간다.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에도 막 돋아난 연초록 잎은 꽃보다 더 눈부시고 어여쁘다. 나무들은 대지가 기르는 신생의 아기들이다. 아기들이 까르륵거리는 세상이 곧 천국이다. 우리는 이 천국에서 씨 뿌리고, 거두고, 뛰고, 걸으며, 사랑하고, 속을 끓이고, 아이를 키운다. 밀턴은 ‘실낙원’에서 “어느 쪽으로 달아나도 지옥, 내 자신이 지옥이니”라고 했다. 그 지옥을 버텨 내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최명란/달콤한 소유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최명란/달콤한 소유

    달콤한 소유/ 최명란 찢어진 내 청바지에 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게도 꽃들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 활짝 핀 꽃대 위에 달콤한 비가 내릴 것이다 개구리는 지천에서 베이스 톤으로 울고 장대비는 꽃들을 흠뻑 적시고 짱짱히 일어설 것이다 돌담을 붙잡고 일어서는 담쟁이처럼 나도 장대비를 붙들고 비를 따라 일어설 것이다 건조한 목구멍을 비에 촉촉 적시며 아직 눈뜨지 못한 새끼들을 오글오글 키울 것이다 걸음 서툰 노인이 눈앞으로 지나가도 늙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해져가는 햇빛에 희망을 걸 것이다 사랑하는 우리 흐르는 강물을 함께 바라볼 것이다 결혼식 날 소란 속에 열렬한 노래를 부를 것이다 슬픈 터널 같은 겨울을 통과하자 봄은 난만(爛漫)하다. 뒤뜰 앵두나무는 흰꽃을 피우고,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는 분홍꽃을 피웠다. ‘개구리는 베이스 톤으로 울고’, 벌들은 잉잉대며 벌통으로 꿀을 나르느라 바쁘다. 밤마다 별들은 찬란하고, 깊은 강물들은 고요하게 웃는다. 미래의 기쁨을 빌려다 오늘을 사는 당신은 우리 집 꽃핀 뒤뜰의 여왕이다. 당신은 ‘아직 눈뜨지 못한 새끼들을 오글오글 키울’ 테다. 아, 당신 마음이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사과우체통/김응교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사과우체통/김응교

    사과우체통/김응교 부탁할 것 딱 하나 있소 주소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시죠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자식놈이나 아내한테, 만약 편지가 오면, 토요일에 갖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냉장고나 베란다, 볕 잘 드는 서재가 없더라도 개집이라도 좋으니 그저 우체통 달린 데서 사는 것 지금 내 삶의 목표입니다 우체통은 위대한 존재 아침마다 나는 우체통이기를 소망한다 어느 날 내 몸이 빠알간 사과우체통으로 환생하더라 풀숲이 풀벌레 감추듯 파탄 난 과거 품어주는 우체통이 되었더라 왕년의 비밀이든 신음 소리든 너그럽게 삼키며, 마침내 헤어졌던 부부가 입맞춤할 때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는, 빠알간 능금우체통 뺨이었더라 어른이 되면, 내 꿈은 단 하나, 우체통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딴 욕심은 없었다. ‘우체통 달린 데서 사는 것’이 삶의 목표라니. 나는 벼락 맞은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사이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았다. 그런데도 늘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저 초심에서 멀어진 탓이다. 소박함을 잃은 탓이다. 지금도 ‘사과우체통’으로 환생하기를 꿈꾸는 이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것이다.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쁜 짓들의 목록/공광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쁜 짓들의 목록/공광규

    나쁜 짓들의 목록/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세상 정의를 다 가진 듯 당당한 사람, 늘 옳은 소리만 외치는 사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다. 자기가 얼마나 나쁜 짓을 저지르는 걸 모르니 저토록 당당하다. 개미를 밟고, 풀잎을 꺾고, 꽃을 따고, 돌멩이를 옮기고, 도랑을 막아 물길을 돌렸다. 다 나쁜 짓이다. 만물이 한 몸으로 연결된 생명공동체, 세월 인연으로 얽힌 인드라망 속에 있는데, 오직 사람만이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하현/박완호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하현/박완호

    하현/박완호 어제의 달을 오늘에게 또 달아주었다 전깃줄에 줄지어 앉았던 검은 새들이 남몰래 한 점씩 떼어가는 걸까 달의 모서리가 한층 수척해 보였다 달빛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의 그림자도 날마다 조금씩 야위어갔다 느티나무 아래 앉아 있던 허옇게 서리 내린 여자가 티 나지 않게 오랫동안 휘어온 하현의 허리를 일으켜 세운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선 슬며시 기운을 보태주려는데 그새 더 수척해진 달이 괜한 짓 말라며 한사코 손을 내젓는다 오늘 달빛은 가만히 내버려둬도 되겠다 하현은 모서리가 깎이고 야위어 수척해진 달이다. 하현은 기우는 달이다. 가난한 달이다. 패배한 달이다. 시인은 어쩔 수 없이 야위고, 휘어져 기울며, 가난한 것들을 향해 마음을 나눈다. 야윈 것들, 휘어져 기우는 것들, 가난한 것들은 다 애잔하다. 그 애잔한 것들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 그것들에 손을 내밀고 기운을 보태 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살 만해진다. 저 혼자만 잘사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울음의 순서/유진목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울음의 순서/유진목

    울음의 순서/유진목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본 적 없는 여자의 몸속에 있었다 몇 차례 진통이 있은 뒤에 만삭의 여자는 산부인과로 갔다 참 바람을 쐬어도 이마에 맺힌 땀이 식지 않았다 불어난 몸을 지탱하느라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층계참에 서서 남은 계단의 숫자를 세어 보았다 다시 계단을 내려올 때는 아이와 함께라는 것을 생각했다 신기한 일이다 어느 날 몸속에 아이가 생기더니 이제는 몸 밖으로 나오려는 것이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고 아랫도리가 찢어지도록 힘을 주었다 창밖에는 공중에 매달린 사내가 뒤엉킨 가로수의 가지를 베고 있다 일순 날카로운 빛이 쏟아진다 기억에 없지만 나는 울었을 것이다 나를 울게 하는 일을 생각한다 계단을 내려온 여자는 자신의 옷자락을 세게 움켜쥔 아이를 품에 안고 한참을 서 있었다 ===================== 만삭의 여자가 난간을 붙잡고 천천히 층계참을 오른다. 산부인과 병원으로 가는 중이다. 어제까지 모르던 여자의 몸속에서 꼬물거리던 아이는 여자의 생살을 찢고 나온다. 빛이 왈칵 쏟아지는 세상에 도착하자마자 터뜨린 아이의 첫 울음은 이 세계에 입성했다는 신고식이다. 이 첫 울음은 앞으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식물들의 외로움/임동확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식물들의 외로움/임동확

    식물들의 외로움/임동확 한사코 어미의 품에서 떼쓰는 아이들처럼 찰진 논바닥에 도열한 벼들. 낱낱이면서 하나인, 또 하나이면서 낱낱인 식물들의 일생을 좌우하는 건 결코 내부의 의지나 선택이 아니다. 홀연 태풍처럼 밀려왔다가 그 자취를 감추고 마는 낯선 동력. 누구에게나 단호하고 거침없는 죽음 같은 바깥의 힘. 필시 하나의 정점이자 나락인, 끝없는 나락이자 정점인 푸른 줄기마다 어김없이 같으면서도 같지 않을 외로움의 화인(火印)이 찍혀 있는, 여럿이면서 홀로인 벼 포기들이 끝내 제 운명의 목을 쳐 내는 낫날 같은 손길에 기대서야 겨우 고단한 직립의 천형을 벗어나고 있다. 논바닥에 도열한 벼들을 무심코 논바닥에 도열한 별들이라고 잘못 읽었다. 논바닥이 밤하늘이라면 저 푸른 벼들이 별이 아닐 까닭은 없을 테다. 6월의 무논에 늠름하게 서 있는 저 벼들은 혼자이면서 여럿이다. 벼들의 푸른 줄기는 정점이자 나락인데, 시인은 벼들의 푸른 줄기 안쪽에 찍힌 “외로움의 화인(火印)”을 투시해 낸다. 이 식물의 외로움은 제 운명이 타인의 손에 달려 있다는 점에 있다. 운명은 제 선택이나 의지의 일이 아니라 “죽음 같은 바깥의 힘”에 달려 있다. 벼들은 제 “고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비정규/최지인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비정규/최지인

    비정규/최지인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잠잘 때 조금만 움직이면 아버지 살이 닿았다 나는 벽에 붙어 잤다 아버지가 출근하니 물으시면 늘 오늘도 늦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골목을 쏘다니는 내내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께 당신의 귀가 시간을 여쭤본 이유는 날이 추워진 탓이었다 골목은 언젠가 막다른 길로 이어졌고 나는 아버지보다 늦어야 했으니까 아버지는 내가 얼마나 버는지 궁금해 하셨다 배를 곯다 집에 들어가면 현관문을 보며 밥을 먹었다 어쩐 일이니라고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외 근이라고 말씀드리면 믿으실까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는 체하지 않도록 누런 밥알을 오래 씹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아버지는 오함마로 벽을 철거하는 노동을 한다. 아들은 비정규직이다. 두 사람은 비좁은 방에서 함께 잔다. 좁은 방에서 자다 보니 조금만 뒤척일 때마다 살이 닿는다. 그래서 아들은 벽에 바짝 달라붙어 잔다. 밥 먹고 잠자는 게 사는 것의 전부는 아니지만 사람은 밥 먹고 잠자야 산다. 이 시는 생존의 최소한도를 이루는 밥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박상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박상순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박상순 여기, 철문으로 만든 얼굴이 있다. 철문을 뜯어서 만든 얼굴이 있다. 작은 철문으로 만든 얼굴, 큰 철문으로 만든 얼굴 모두, 검게 칠한, 검은 얼굴들 처음에는 옥상에, 복도에 다음에는 문밖에, 거리에 이제는, 산에도, 바다에도 무거운 철문을 뜯어서 만든, 무거운, 딱딱한, 차가운, 너무 무거운, 여기,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이 쌓여 있다. 여기저기 철문으로 만든 얼굴들이 떠돈다. 그 얼굴들은 제가 저지른 범죄를 모르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정치가의, 경제인의, 예술인의 이름으로 알려진 그 검고 끔찍한 얼굴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숨이 막혀 비명을 지른다. “딱딱한, 차가운, 너무 무거운” 얼굴들이 내뱉는 말은 명쾌하고 화려하다. 그들은 늘 옳은 말로 남의 흠을 들춰내고 세상의 거짓들을 고발했다. 그들은 세상을 다 아는 듯이 판단하고 말하지만 정작 제 얼굴이 “철문을 뜯어서 만든” 건 줄을 모른다.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쳐다본다. 혹시 내 얼굴도 철문을 뜯어서 만든 얼굴은 아닐까 두려움에 떨며!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일곱 번째 작별 인사/김연아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일곱 번째 작별 인사/김연아

    일곱 번째 작별 인사/김연아 스피릿이 간다, 화성의 혼이 되어 망가진 바퀴를 끌고 외로운 문장처럼 기우뚱거리며 분화구 가장자리를 따라간 흔적 너의 행성은 아직도 불 같은 땅과 어두운 바람을 섞고 있니? 하늘이 젖을 물리듯 여기는 봄눈이 내렸어 네가 빛을 향해 전지판을 펼쳤을 때 이곳의 모니터엔 너의 지평선이 나타났어 그곳은 답답하고 광활하고, 안이 없고 밖이 없지 내 종족의 언어로 만들어진 순례자 너는 쉬이 늙어가고 눈도 나빠졌지 더 이상 종료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데 네 눈은 지구의 밤으로 슬프게 열려 있다 지금은 너의 탯줄을 매달 시간 별빛이 너를 들어 올리는 시간 삼목 향기 가득한 언덕에서 지평선을 향한 너를 큰 소리로 부르고 싶어 나는 너를 나라고 불러본다 죽은 혼과 춤을 추는 부토 댄서처럼 내 몸에 너를 느끼며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릴 거야 자기가 아니라 다른 것을 가리키기 위해 거기 서 있는 이정표처럼 누군가 죽고 49일이 지났다. ‘일곱 번째 작별인사’를 한다. ‘사십구재’는 7일마다 일곱 차례 재를 지낸다고 해서 ‘칠칠재’라고도 한다. 사자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다. “지금은 너의 탯줄을 매달 시간/별빛이 너를 들어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혼자 가는 먼 집/조성천 · 소녀와 꽃의 사정/신영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혼자 가는 먼 집/조성천 · 소녀와 꽃의 사정/신영배

    혼자 가는 먼 집/조성천 26.2×26.2㎝, 종이에 PVC 대진대 서양화과 대학원 졸업. ‘리턴 투 네버랜드’ 등 다수의 개인전과 국내외 아트페어 참여. 소녀와 꽃의 사정/신영배 소녀가 그림자를 가지고 놀았다 소녀는 중얼거리고 그다음 사라졌다 계단은 아침에 짧아지고 저녁에 길어지네 소녀는 긴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문은 월요일에 짧아지고 화요일에 길어지네 소녀는 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꽃은 햇빛에 짧아지고 달빛에 길어지네 소녀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는 길고 긴 꽃 속을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달을 따라갔다 노란 돌을 주워 멀리 던졌다 강물이 노란 돌을 데려갔다 소녀는 강물을 따라갔다 먼 곳에는 아름다운 새가 있을까 새 모양의 귀를 달고 소녀는 길어지고 길어지고 달이 긴 소녀를 따라간다 강물이 길고 긴 소녀를 따라간다 소녀는 길고 긴 꽃 속을 걸었다 꽃이 계속 길어지는 이유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소녀 때문이었다 종일 제 그림자를 갖고 놀고, 아침에 짧아지고 저녁에 길어지는 계단을 내려가는 소녀라니! 소녀는 저 혼자 노는 일에 익숙하다. 소녀가 강물을 따라간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캐치볼/이승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캐치볼/이승희

    캐치볼/이승희 공을 던진다 어디에도 닿지 않고 그만큼 나의 뒤는 깊어진다 내가 혼자여서 나무의 키가 쑥쑥 자란다 내가 던진 공은 자꾸만 추상화된다 새들은 구체적으로 날아가다가 추상화되고 생기지 않은 우리 속으로 자꾸만 공을 던진다 거짓말처럼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오는 것들은 일렬로 내 앞을 지나간다 칸칸이 무엇도 눈 맞추지 않고 잘 지나간다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추상적이다 나는 불빛 아래에서 살았다 죽었다 한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가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여전히 공을 던진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캐치볼은 혼자 할 수 없다. 두 사람이 어우러져 공을 던지고 받는 게 캐치볼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 시에는 혼자 공을 던지는 소년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내가 혼자여서 나무의 키가 쑥쑥 자란다”는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소년의 고독한 성장사다. 공을 던지는 것은 무엇인가. 캐치볼은 인생의 쓸쓸함에 대한 은유인가. 캐치볼을 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캐치볼이라는 단순한 놀이에서 살아 내는 일의 추상을 기어코 봐 버린 시인의 돋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숨겨둔 말/신용목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숨겨둔 말/신용목

    숨겨둔 말/신용목 신은 비에 빗소리를 꿰매느라 여름의 더위를 다 써버렸다. 실수로 떨어진 빗방울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안개가 바닥을 어슬렁거리는 아침이었다. 비가 새는 지붕이 있다면, 물은 마모된 돌일지도 모른다. 그 돌에게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었다. 어느날 하구에서 빗방울 하나를 주워들었다. 아무도 내 발자국 소리를 꺼내가지 않았다. 빗소리가 나는 것은 비에 빗소리를 꿰매는 신이 있기 때문이라는 첫 줄의 수일한 이미지 때문에 이 시가 단박에 마음에 와 꽂힌다. 안개가 떠도는 것은 실수로 떨어진 빗방울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안개와 빗방울 사이의 엉뚱한 인과론을 꺼낼 수 있는 자가 바로 시인이다. 아마 비가 새는 지붕이 있는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시인은 강 하구의 돌밭에 자주 나갔나 보다. 강가에서 아름다운 돌 몇 개를 주워 다 책상 위에 올려놓았을 테다. 심심한 날 그 돌에 귀를 갖다 대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물은 마모된 돌”이니, 소년이 강가에서 주워 온 것을 무심코 빗방울이라고 썼는지도 모른다.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마가목/김상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마가목/김상혁

    마가목/김상혁 가을 동안 마가목 열매를 충분히 모았다면 십일월엔 술을 담글 수 있다. 유리병에 넣고 석 달을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두었다. 한겨울은 내내 흔들려서 아름다운 백색의 풍경일 테고, 십일월 같은 건 얼른 지나가버렸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광경과 마음을 잘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발로 나무를 차던 시절이 머릿속에서 하루씩 더 단단해지고, 어두운 유리병이 조금씩 더 붉어지고, 마가목의 날카로운 잎이 숙면에 도움이 된다. 물에 가라앉아 있는 십일월을 보내게 된다. 마가목은 하얀 꽃이 피고, 가을에 달리는 열매는 붉고 탐스럽다. 추운 곳에서 잘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거실에 마가목 열매를 넣고 독주를 채운 유리병이 있다. 밖은 눈 쌓여 아름다운 백색의 풍경일 테고, 실내에는 마가목 열매로 담근 술이 붉은빛으로 숙성 중이다. 붉은 열매로 담근 술이 익는 동안 “나무를 차던 시절”은 “머릿속에서 하루씩 더 단단해”진다. 나이테가 생기듯 우리는 겨울을 날 때마다 나이를 먹는다. 춥고 스산한 시절이 빨리 지나갔으면, 그리고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하고 조바심을 치는 소년의 모습이 얼핏 비친다.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리운 두런두런/정수자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리운 두런두런/정수자

    그리운 두런두런/정수자 국으로 부엌에 드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간밤 술을 쥐어박는 어머니의 칼질 소리 그 사이 쇠죽은 다 끓고 워낭이 흠흠 웃고 눈이 제법 쌓이는 걸, 싸락싸락 싸리비 소리 불 담은 화롯전을 타닥 탁 터는 소리 그 사이 구들은 더 끓고 까치 두엇 희게 울고 그리운 고향은 저 멀리에 있고, 품안 자식들 다 뿔뿔이 흩어져 옛 고장에는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만 남아 밥을 끓이며 산다. 어머니, 오늘 아침엔 눈 쌓인 마당을 싸리비로 쓸고 계신가요? 아버지, 새벽에 허연 입김을 뿜으며 쇠죽을 끓이고 계신가요? 저는 언제 고향에 돌아가 소의 워낭 소리를 들으며 절절 끓는 아랫목에 등을 대고 잠들 수 있을까요. 아직 손에 쥔 게 없어서, 이룬 게 없어서, 보잘 것 없는 제 남루가 차마 부끄러워서 돌아갈 수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꼭 돌아갈게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살아 사셔야 해요.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겨울 적소(謫所)/유재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겨울 적소(謫所)/유재영

    겨울 적소(謫所)/유재영 밤새 내린 폭설에 팔뚝 선뜻 내어 준 깨끗해서 두려워라 허리 굽은 조선 솔, 찢어진 허공에 내건 얼어붙은 절명시(絶命詩)여 더 이상 갈 곳 없이 먹바위 벼랑 끝에 누군가 벗어 놓은 수직의 빙폭(氷瀑) 한 필, 막혔던 마음 문 열면 물소리도 들릴까 한 폭의 깨끗한 산수화 같은 시다. 폭설을 얹은 채 그 무게를 감당하느라 휜 소나무 가지, 벼랑 아래로 떨어지던 물은 꽝꽝 얼어붙었다. 물이 얼어붙자 물소리 그치고 세상천지는 적막할 따름이다. 먹잇감이 귀한 겨울철은 고라니며 너구리며 들쥐며 다람쥐 따위 산 짐승 식구에게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한다.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니 눈 속을 파헤쳐 먹이를 구한다. 눈 덮인 겨울 산천은 찬 기운을 품은 채 고요하고 스산하지만 그 풍경 어딘가에는 느슨한 마음을 바로 세우게 하는 매운 정신의 결기가 맺혀 있다.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무제/허명욱 · 미안하다/정호승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무제/허명욱 · 미안하다/정호승

    무제/허명욱 120×120㎝ 금속에 옻칠, 금박 서울과학기술대 금속공예디자인학과 졸업. 아라리오갤러리·조은숙아트앤라이프스타일 갤러리·우라소에시미술관 등 국내외 전시 다수. ======================================= 미안하다/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외로워서 사랑을 했는데, 여전히 외롭다. 불행해서 사랑을 했는데, 불행은 줄지 않았다. 사랑은 찬란한 빛으로 왔는데, 사랑하는 자는 외롭고 아프고 슬펐다. 사랑은 풀 수 없는 갈증인가, 가슴을 아리게 하는 기다림인가. 사랑이 크면 사랑의 아픔도 큰 법이다. 저기 사랑을 하는 자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있다. 내 마음을 다해 너를 사랑했는데 너는 아팠구나.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너를 외롭게 하고, 너를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아,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구나!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눈이 오는 날은 눈 밖의 소리가 다 보인다/장인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눈이 오는 날은 눈 밖의 소리가 다 보인다/장인수

    눈이 오는 날은 눈 밖의 소리가 다 보인다/장인수 하얗게 함박눈이 내리는 마당은 잠실(蠶室), 누에방이다 누에방에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눈비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눈에 뽕잎을 먹을 때 내는 소리는 콩밭에 가랑비 내리는 소리 굵은 빗방울이 연잎에 듣는 소리 포목점에서 비단 찢는 소리 녹두알만한 누에똥이 후두기는 소리는 댓잎파리에 싸락눈 뿌리는 소리 섶에 올라 제 입의 명주실을 뽑아 하얀 고치의 적멸보궁을 짓는 소리는 끝없는 정적으로 들어가는 소리 눈이 오는 날은 눈 밖의 소리가 다 보인다 함박눈 내리는 날 세상은 적멸의 고요에 감싸인다. 놀라워라, 그 고요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세상은 작은 소리로 가득 차 시끄럽다. 그 소리를 귀로 듣는 게 아니 눈[目]으로 듣는데, 누에가 뽕잎을 갉을 때 내는 소리와 닮았다. 시인은 함박눈 내리는 마당을 누에방이라고 한다. 수천 마리 누에가 뽕잎을 갉고 누에똥을 누며 자라서 마침내 섶에 올라 누에고치를 짓는다. 아, 함박눈 내리는 날은 종일 일손을 놓은 채 눈곱재기창으로 마당을 내다보며 눈 쌓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다.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동심원/신철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동심원/신철규

    동심원/신철규 뿌연 공중에서 수많은 궁사들이 먹구름을 방패삼아 활을 쏘아댄다. 수면은 얼마나 많은 과녁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중심이 중심을 무너뜨리고 원이 원을 가둔다. 우리는 실수와 실패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다리 난간 아래 떨어지는 빗방울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물 위에 돋아나는 눈꺼풀들, 깜빡인다. 색색의 우산들이 팝콘처럼 터지며 펼쳐진다. 빗방울은 먹구름을 방패삼아 궁사들이 쏘는 활이고, 화살이 박히는 과녁은 강의 수면이다. 빗방울이 수면이 떨어질 때마다 수 만 개의 동심원이 그려진다. 강은 수많은 과녁을 감추고 있다. 빗방울로 생긴 동심원 과녁은 “원이 원을 가”두는 형상이다. 이 이미지는 다시 “물 위에 돋아나는 눈꺼풀들”로, 팝콘처럼 터져 펼쳐지는 “색색의 우산들”로 변주된다. 이 변주가 가능한 것은 이걸 바라보는 이의 상상력 때문이다. 오늘의 세계가 어제까지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상상력 마법 덕분이었다.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쾌청/김명인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쾌청/김명인

    쾌청/김명인 눈꽃 활짝 피운 아침의 산책길 푸드덕 까마귀 한 쌍 날아오릅니다 겨울 소나무 숲이 공손하게 받드는 하늘이 까마귀 두 점으로 더욱 화창합니다 쾌청은, 한둘 오(烏)점이 있어야 아뜩한 것 막장까지 비춰 내는 푸름이므로 바늘구멍, 그 한가운데가 우주의 중심이라도 가까이, 가까이로 꿰뚫고 싶습니다 까옥, 까까옥! 까마귀들이 하늘을 끌고 까마득히 솟구칩니다 겨울 소나무 숲이 공손하게 받드는 겨울 하늘은 쾌청! 차라리 쨍하고 금갈 듯 맑은 유리다. 거기 까마귀 두 점 떴다. 저 푸르고 맑은 겨울 하늘에 까마귀 떴으니 그게 오(烏)점 아니고 무엇이리. 저 깊은 겨울 하늘의 푸름이 주는 영감은 우리에게 높이 날고 까마득히 솟구칠 무대가 있다는 것이다. 하늘에는 수억 개의 별이 뜨고, 어둠이 걷히면 해가 높이 떠서 누리에 빛을 뿌린다. 하늘은 아직 가 닿지 못한 꿈과 동경의 세계다. 우리는 머리 위에 그런 세계를 이고 산다. 그러니 현실의 남루함 따위는 늠름하게 버텨 낼 수 있다. 하늘은 쾌청, 현실은 아직 꿈을 품고 살아 볼 만하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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