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가족 이야기/황영성 · 가족/고이케 마사요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가족 이야기/황영성 · 가족/고이케 마사요

    가족 이야기/황영성 캔버스에 아크릴, 97x162㎝ 조선대 명예교수. 국전 문공부 장관상·이인성 미술상 수상.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가족/고이케 마사요 여자가 부엌에서 혼자 조용히 콩깍지를 까고 있다 블랙아이드피라는 이름의 콩이다 프라이팬에 볶아 먹는다 이름 그대로 검은 눈 같은 작은 콩이다 딸이 그 옆을 지나간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딸도 콩깍지를 깐다 심심한 손녀가 부엌에 들어온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손녀도 콩깍지를 깐다 남편이 출장지에서 지쳐 돌아온다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고 남편도 콩깍지를 간다 아들이 애인을 데리고 돌아온다 네 사람의 모습을 보고 그들도 콩깍지를 깐다 정신이 들자 조용히 콩깍지를 까고 있는 여섯 명의 가족 테이블 위에는 조용한 콩깍지의 산 “우리가 왜 콩깍지를 까는 거지?” 그리고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가장 조용한 의문 하나가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살짝 테이블 앞에 앉는다 어릴 적 마을의 이발소에는 엄마 젖을 빠는 새끼 돼지들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판화가 이철수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네 그림이 이발소 돼지 그림만큼 쉬웠으면 좋겠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김경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김경주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 보고서야 알았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 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 한 팬티 한 장 어머니 볼에 문질러 보네 안감이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 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도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이었네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네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네 빨래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송이 몇 점 다가와 물드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꽃물이 똑똑 떨어지네 눈덩이만 한 나프탈렌들과 함께 일생을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그 드물고 정하다는,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나니 ============================== 세상 사람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뉴올리언스 고담시에서 재즈는 어떻게 유행하게 되었나/리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뉴올리언스 고담시에서 재즈는 어떻게 유행하게 되었나/리산

    뉴올리언스 고담시에서 재즈는 어떻게 유행하게 되었나/리산 사랑스런 원숭이 한 마리와 불 켜진 다락방이 있다면 우울한 밤하늘을 날아다니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들 말하지만 양털로 짠 슬리퍼와 다락방 하나쯤은 내게도 있지, 비밥바룰라 창밖으로는 영하의 바람이 불고 폭설로 뒤덮인 거리를 뒤뚱이며 지나는 사람들 지붕위의 풍향계가 얼어붙는 밤이면 몇 알의 양파를 머리맡에 걸어놓으며 잠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잠 안 오는 밤이란 이젠 없지 야훼가 그를 여자의 손으로 죽일 거야, 비밥바룰라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가는 자동차들 나는 새벽 세 시를 날아다니네 머리가 헝크러진 너에겐 빠른 비트로 날아다니는 법을 가르쳐줄게 울음을 그치렴 몇 개의 열쇠를 쩔렁이며 커다란 모자 속의 얼굴을 기웃거리며 또 다른 이미지를 찾지만 결국은 다 그게 그거지 깊은 밤이면 점령군의 말과 그림으로 가득한 종이를 눈처럼 찢으며 외곽으로 가는 사람들 눈 내리는 들판엔 꿈꾸는 난민들 너와 나는 사랑하는데 우리는 사랑하지 않네, 비밥바룰라 내게도 돌아갈 다락방 하나는 있지 오, 순정한 세상 =========================== 첫 줄을 읽을 때부터 이 시가 좋았다. 사랑하는 이와 알전구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느릅나무에게/김규동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느릅나무에게/김규동

    느릅나무에게/김규동 나무 너 느릅나무 50년 전 나와 작별한 나무 지금도 우물가 그 자리에 서서 늘어진 머리채 흔들고 있느냐 아름드리로 자라 희멀건 하늘 떠받들고 있느냐 8ㆍ15 때 소련병정 녀석이 따발총 안은 채 네 그늘 밑에 누워 낮잠 달게 자던 나무 우리 집 가족사와 고향 소식을 너만큼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이제 아무 데도 없다 그래 맞아 너의 기억력은 백과사전이지 어린 시절 동무들은 어찌되었나 산목숨보다 죽은 목숨 더 많을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옛날처럼 조용조용 지나간 날들의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무, 나의 느릅나무. ===================================== 선생과 청진동에서 해장국 한 그릇 먹은 적 있다. 돌아가시기 전 4ㆍ27 남북 정상회담을 보았다면 마음이 좀 편해지셨을까. 판문점 회담 4개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답답함과 깊은 갈증을 느낀다. 미국이 말한다. 너희가 가진 것 주머니 속 먼지까지 다 털어내고 실밥을 확인한 후 종전선언도 하고 경제제재도 풀겠다. 협상이란 상대방을 배려하는 정신이 기본이다. 얼간이가 아니라면 북이 동의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정물/도상봉 · 수박/허수경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정물/도상봉 · 수박/허수경

    정물/도상봉 24x34㎝, 캔버스에 유채 전 숙명여대 교수. 1964년 예술원상 수상. 1970년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수박/허수경 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저물어 가는 저녁이었어요 수박 한 통 사들고 돌아오는 그대도 내 눈동자,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지요 태양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영원한 사랑 태양의 산만 한 친구 구름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울적한 사랑 태양의 우울한 그림자 비에게 말을 걸었어요 당신은 나의 혼자 떠난 피리 같은 사랑 땅을 안았지요 둥근 바람의 어깨가 가만히 왔지요 나, 수박 속에 든 저 수많은 별들을 모르던 시절 나는 당신의 그림자만이 좋았어요 저 푸른 시절의 손바닥이 저렇게 붉어서 검은 눈물 같은 사랑을 안고 있는 줄 알게 되어 이제는 당신의 저만치 가 있는 마음도 좋아요 내가 어떻게 보았을까요,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떡방아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떡방아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세요/

    떡방아간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세요/김선우 차가운 무쇠기계에서 뜻밖의 선물 같은 김 오르는 따뜻한 살집 같은 다정한 언니의 매촘한 발목 같은 뜨거운 그리운 육두문자 같은 배를 만져주는 할머니의 흰 그림자 같은 따스한 눈물의 모음 같은 너에게 연결되고 싶은 쫄깃한 꿈결 같은 졸음에 겨운 하얀 양 눈 속에 부드럽게 흰 느린 길 같은 노크하자 기다랗게 뽑아져 나오는 잃어버린 시간 같은 가래떡이 나오네 차갑고 딱딱한 무쇠기계에서 나오는 것이긴 칼이나 총알이 아니라 이렇게 말랑 고소한 떡이라는 게 별안간 고마워서 두 손에 덥석 받아들고 아, 아, 목청 가다듬네 말랑하고 따뜻한 명랑한 웅변처럼 별안간 프러포즈를 하네 저기요… 떡방아간에서 우리 만날까요 차가운 기계에서 막 빠져나온 뜨끈한 가래떡 한 줄 들고 빼빼로 먹기 하듯 양끝에서 먹어 들어가기 할까요 그러니까 우리 한번쯤 만나도 좋은 때까지 말랑하고 명랑하게 한번 달려 볼까요 =================================== 어릴 적 떡방아간 앞에 서 있을 적이 있었다. 명절 준비로 떡방아간에서는 떡을 찌는 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고 가래떡 기계에서는 하얀 가래떡이 이어져 나왔다. 떡방아간 아줌마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울라부 하우게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울라부 하우게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울라부 하우게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 내가 대신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 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 준다 사과나무가 휘어졌다가 돌아와 설 때는 온 몸에 눈을 맞는다 얼마나 당당한가 어린나무들은 바람 아니면 어디에도 굽힌 적 없다 바람과의 어울림도 짜릿한 놀이일 뿐이다 열매를 맺어본 나무들은 한 아름 눈을 안고 있다 안고 있다는 생각도 없이 ============================= 아름다운 시를 읽고 있으면 첫눈 속에 서 있는 것 같다. 세상이 눈송이의 춤에 안기고 숲속의 오막살이 집 하나가 노란 등불을 켜고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두막의 문을 열면 난로 위에 주전자의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나이 든 집주인이 ‘어서 오오’ 하며 손을 잡아 준다. 좋은 시란 자아와 세계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시다. 울라브 하우게는 노년에 정원사로 일했으며 시는 한 손에 도끼를 든 채 숲속에서 썼다고 한다. 시인은 30여년을 정신병동에 갇혀 지냈으며 전기 충격을 받았다. 그 상태를 이기고 태어난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인식론/진은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인식론/진은영

    인식론/진은영 호랑이를 왜 좋아하는지 몰라요 작은 나무 의자에 어떻게 앉게 되었는지 몰라요 언제부터 불행을 다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는지 정원사가 가꾸지 못할 큰 숲을 바라보듯 말이죠 언제부터 너의 말이 독처럼 풀리는지 몰라요 맑은 우물은 여기부터 하나, 둘, 셋, 이 낡은 의자에서… 언제쯤 일어나게 될는지 몰라요 나의 둘레를 돌며 어슬렁거리는 녹색 버터의 호랑이들 대체 뭘 바라는 거죠? 몰라요 이 시를 몰라요 너를 몰라요 좋아요 ======================================== 모른다는 것. 무명(無明). 이보다 더 인간적인 말이 있을까.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돌아가는지? 왜 매일 같은 건물로 출입을 하는지? 무엇을 그리워하며 밥 먹고 싸우고 술 먹고 그러다 울며 집으로 돌아오는지? 무엇을 위해 정기적금을 들고 펀드에 가입하는지? 도대체 몇 년을 더 일해야 아파트 할부 금융은 끝나는지. 북의 젊은 지도자와 미국의 나이 든 지도자의 헤어스타일은 무엇을 뜻하는지? 평범한 시민이 옥류관에 가 냉면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시간은 언제 올는지. 진은영은 말한다. 모른다는 것, 거기서 맑은 우물이 시작된다고. 이 시를 모르고 너를 모르고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이원하 유월의 제주 종달리에 핀 수국이 살이 찌면 그리고 밤이 오면 수국 한 알을 따서 착즙기에 넣고 즙을 짜서 마실 거예요 수국의 즙 같은 말투를 가지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매일 수국을 감시합니다 저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혼자 살면서 저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 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제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 같은 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중략) 저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깐요 =============================================== 시 정신의 핵심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사랑이다. 핍진한 삶과 세상을 따뜻하고 우아하게 끌어안기. 세상에 이보다 힘든 화두는 없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화두에 몰입할 수 있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원형상(源型象)-무시(無始)/이종상 · 산에서 온 새/정지용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원형상(源型象)-무시(無始)/이종상 · 산에서 온 새/정지용

    원형상(源型象)-무시(無始)/이종상 69×60㎝, 동판에 유약 2014년 대한민국예술원 미술분과 회장. 서울대 동양화과 명예교수 산에서 온 새/정지용 새삼나무 싹이 튼 담 우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모자 쓰고 눈에 아름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이 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아침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나는 새삼나무를 모른다. 새삼나무에 핀 꽃이 무슨 색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길 걷다 어디에선가 꼭 이 나무를 만났을 것 같다. 만났는데 이름도 모르고 그냥 스쳐 지나간 것 같다. 새삼나무에서 우는 새. 이 새의 울음소리도 길 어디에선가 꼭 만났을 것 같다. 무슨 연유인가? 발 벗고 간 누이. 누이라는 말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가 스미어 있다. 울 밑의 봉숭아나 과꽃을 보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전선으로 끌려간 누이들 생각이 나고 폭압의 시절 세상 떠난 귀정이나 승희 같은 누이들 생각이 난다. 세상에는 지금도 슬픈 누이들 많다. 이른 아침 모르는 새소리를 듣거든 잠시 그 누이들 생각을 하자.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처음의 맛/임경섭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처음의 맛/임경섭

    처음의 맛/임경섭 해가 지는 곳에서 해가 지고 있었다 나무가 움직이는 곳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엄마가 담근 김치의 맛이 기억나지 않는 것에 대해 형이 슬퍼한 밤이었다 김치는 써는 소리마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고 형이 말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것들을 구별할 수 없는 밤이었다 창문이 있는 곳에서 어둠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달이 떠 있어야 할 곳엔 이미 구름이 한창이었다 모두가 돌아오는 곳에서 모두가 돌아오진 않았다 ===================== ‘처음의 맛’이란 이것과 저것, 혹은 ‘너’와 ‘나’의 다름을 깨달을 때 선명해지는 법이다. 김치의 맛은 누가 담갔느냐에 따라서 다를뿐더러 그 써는 소리마저 다르다. 그런 분별이 생길 때 우리는 이별과 슬픔을 겪으며 나이를 먹는다. 형은 엄마가 담근 김치 맛이 기억나지 않아서 슬퍼하는데, 그것은 엄마와의 긴 이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 시는 분별과 나이 먹는 것의 슬픔에 눈떠 가는 성장 이야기를 전하는가? 그것만은 아니다.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걸린다. 왜 모두가 돌아오는 곳에서 모두가 돌아오지 않았을까. 여객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은 안산의 아이들이 기어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문성해/밤비 오는 소리를 두고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문성해/밤비 오는 소리를 두고

    문성해/밤비 오는 소리를 두고 바람에 나뭇잎들이 비벼대는 소리라 굳이 믿는 것이다 한창 재미나는 저녁 연속극을 끌 수가 없는 것이다 빨래가 널린 옥상을 괜히 한번 염두에 둬보는 것이다 뭔가에 환호할 나이는 지났다고 뭉그적거려보는 것이다 속는 셈치고 커튼을 열고 베란다 문을 여는 수고가 하기 싫은 것이다 누가 이기나 최대한 견딜 때까지 견뎌보는 것이다 손익 계산부터 해보는 것이다 =============================== 바깥에 나뭇잎들이 수런거리더니 밤비가 쏟아지는가 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몸을 일으켜 커튼을 열고 베란다 문을 열어 밤비를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 저녁 연속극을 끌 수도 없고, 몸이 말 안 듣는 사춘기 아들 같으니 뭉그적거리며 일어서지 않는 것이다. 괜히 양심의 명령 따위도 뭉개버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뭔가에 환호할 나이’는 벌써 지나고, 손가락조차 까딱하기 싫은 이 나태, 이 하염없는 자기 방기라니! 청승살이 두툼해지며 나이를 쌓아 간다는 징조다. 아무튼 인생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바람둥이 애인 하나 갖고 싶다/공혜경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바람둥이 애인 하나 갖고 싶다/공혜경

    바람둥이 애인 하나 갖고 싶다/공혜경 어느 날은 문득, 바람둥이 애인 하나 갖고 싶다 뭘 먹을까 어딜 갈까 뭐하고 싶니 묻지 않고도, 입속의 혀처럼 척척 감기는 그런 애인 하나 갖고 싶다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별을 따오고 손끝의 움직임만으로도 나를 발가벗겨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사람 음 그런 사람 그렇게 속이 뻥 뚫리게 후련해지는 바람둥이 애인 하나 갖고 싶은 날 있다 =========================== 사랑은 인류의 발명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 그 훌륭한 것을 주는 이가 바로 ‘애인’이다. 애인은 내 안의 허영, 욕정, 허물, 슬픔과 냉소까지도 다 용납하고 끌어안아 준다. 내 안이 텅 비었을 때 채워 주는 이,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알아주는 이, 내가 갈망하는 것을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갖다 주는 이가 애인이다. 나도 별을 따다 주는 애인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우울을 명랑으로 바꾸고, 죽은 시간에 생명을 불어넣어 불꽃으로 일으키고, 권태와 무료에 지쳐 진절머리 나는 나날을 정금(正金)같이 빛나는 세월로 바꿔 줄 그런 애인이. 장석주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는 내가 아닐 때가 더 좋다/박라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는 내가 아닐 때가 더 좋다/박라연

    나는 내가 아닐 때가 더 좋다/박라연 가득 차서 벅차서 무거워서 땅이 되었다 새가 나무가 빗방울이 되었다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 되었나? 진실한 사람에게 기대어 그를 베개 삼아 처음을 보냈다 진실한 사람? 사람이 어떻게 진실할 수 있나요? 그러해도 살아남을 수 있나요? 다음엔 낯선 얼굴들이 놀러 왔나요? 땅 좀 달라고 나무 좀 새나 빗방울 좀 달라고 말하던가요? 저리 가! 저리 가! 외치셨나요? 피가 다른데 함부로 얻어먹으면 죽을 수 있다고 말했나요? 당신은 혹시 아름다운 사람인가요? 뭐요?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요? 꽃처럼 수명이 짧다면 모르지만 사람의 아상(我相)이란 헛것이다. ‘나’를 우주의 중심으로 믿고 끌어안고 사는 것은 그림자놀이나 마찬가지다. ‘나’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낯설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 개체적 동일성으로 이루어진 ‘자아’는 헛것일 뿐만 아니라 실패의 궤적, 불우의 흔적, 소외의 리듬이다. 운명의 돛을 올리고 키를 잡고 방향을 가늠하며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은 ‘나’가 아니라 ‘나’를 구속하는 시간이다. ‘나’는 진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본디 그것이 헛것,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달항아리(201407-7)/강민수 · 백자의 숲/이상협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달항아리(201407-7)/강민수 · 백자의 숲/이상협

    달항아리(201407-7)/강민수 높이 64cm, 몸체 지름 63cm 단국대 도예과 대학원 졸업. 1998년 국제 공예공모전 입상 백자의 숲/ 이상협 불탄 목적지는 이해하기 쉽고 나는 도착하는 길이 계절마다 다릅니다 구운 흙은 울기 좋습니다 깨어질 듯 그러했습니다 밖에 누가 있나요 안에 누구 없습니다 나는 나의 작은 균열을 찾는 중입니다 금 간 서쪽 무늬를 엽니다 나는 획의 기울기를 읽는 데 온밤을 씁니다 중심은 맺혔다 사라집니다 나는 안팎이 없습니다 검은 모자 떼가 날아갑니다 불쏘시개로 흰 뼈를 깨뜨리고 경계에서 나는 태어납니다 몇 백도의 불을 견뎌야 차진 진흙 덩어리는 달항아리로 거듭난다. 백자는 구운 흙, 구운 몸이다. 불탄 목적지란 백자를 말하는 것일까? 백자를 불탄 목적지라고 말하는 거라면 이는 비범하다. 불의 고통을 겪었으니 백자는 울기 좋은 몸이다. 백자에 귀 기울이면 소리가 난다. 밖에 누구 있나요? 안에 누구 없습니다. 안과 밖에 아무도 없는데 그런 소리가 들린다.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가면 안팎이 따로 없다. 중심도 있다가 사라진다. 오늘도 나는 한자리에 머무는 데 실패한다. 다만 작은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유용주/묵언(默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유용주/묵언(默言)

    유용주/묵언(默言) 누가 오셨나 마루에 비 오시는 소리 듣는다 개울물 소리 읽는다 나무에 스치는 바람 소리 건너간다 짐승 우는 소리에 귀 쫑긋 늘어진다 벌레들이 어디로 꼬이는지 살펴본다 풀을 깎고 뽑는다 나무를 껴안고 빙빙 돈다 밤에 몇 번이고 마당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릴 때처럼 별들이 흐르고 달이 이울고 뭉게구름이 떠 있고 수제비와 팥죽은 없다 아침이면 새소리에 잠을 깬다 가끔 텃밭을 고른다 감나무 잎이 소리 없이 진다 이빨 물고 깨어 있는 서리꽃을 밟아본다 눈물겹게 눈 내리시는 모습을 바라본다 꽁꽁 언 얼음장을 들여다본다 찬물 먹고 숨을 쉰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밥솥이 혼자 말한다 밥이 다 되었으니 잘 저어주라고 =========================================== 시골에서 혼자 지낼 때는 며칠씩 입을 다물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적도 있지만 대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간혹 개울물 소리를 읽고, 모란과 작약이 피는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헤어진 이는 멀리 있으니 굳이 안부를 물을 필요도 생기지 않았다. 가끔 마루까지 비가 들이닥쳐 내 안의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늘족/홍일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늘족/홍일표

    그늘족/ 홍일표 저들이 모르는 나라에는 오늘도 혼자 사는 아침이 있고 혼자 자라는 계단이 있다 공중에서 떼어낸 새들이 푸드덕거린다 몇몇 나비들이 그를 조상하고 어디엔가 다른 하늘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예언자들이 나무 꼭대기에 죽은 부엉이를 올려놓는다 내 안에서 누가 총을 쏜다 다연발 권총이다 퍽퍽 장미가 핀다 피의 수요일이다 벙어리가 된 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왔는데 발이 없다 나는 쓸쓸한 아침을 위로하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멸망한 제국이 박하사탕처럼 희어질 때까지 지저귀는 땅속의 새를 본다 가끔 돌 틈에서 꽃잎으로 진화한 새의 표정을 발견한다 두 다리를 만지면서 아침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나는 살냄새 가득한 즐거운 재앙 속으로 들어간다 혼자 잠 들고 혼자 잠깨는 ‘그늘족’이 혼자 사는 아침의 풍경이다. 그는 혼자 자라는 계단이 있고, 공중에서 떼어 낸 새들은 땅속에서 지저귀고, 죽은 부엉이를 나무 꼭대기에 올려놓는 예언자가 있는 곳에서 혼자 산다. 그를 ‘그늘족’이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늘족’이 맞는 아침에는 자라는 계단, 달아나는 얼굴, 장미꽃, 바다의 노령(老齡) 등이 성분으로 골고루 섞여 있다. 그의 안쪽에서 누군가 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꽃을 보는 여인(알제리)/김병종 · 콜롬비아산 커피/김백겸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꽃을 보는 여인(알제리)/김병종 · 콜롬비아산 커피/김백겸

    콜롬비아산 커피 / 김백겸 콜롬비아산 커피가 내 서재에 오기까지의 인연을 생각하네 콜롬비아 하늘과 검은 땅과 햇빛과 물과 바람이 이 커피 열매에 스며들었다는 생각 콜롬비아 검은 원주민의 땀과 노동과 석유 불길이 커피 열매를 말렸다는 생각 콜롬비아 트럭과 기차와 화물선과 무역상들의 욕심이 커피 열매를 한국에 실어 보냈다는 생각 기운을 북돋아 주는 커피 향이여, 그 불길이 꺼지지 않기를 기운을 북돋아 주는 커피 맛이여, 내 사유의 불꽃을 화려하게 꽃피우기를 기운을 북돋아 주는 카페인이여, 내 시의 불꽃을 축복하기를 커피는 험악한 산맥과 먼 바다를 건너서 온다. 나는 콜롬비아에 아직 가 보지 못했지만 서재에서 콜롬비아산 커피를 마신다. 비옥한 대지가 키운 커피나무 열매를 익힌 것은 콜롬비아의 햇빛과 비의 양(量)이다. 그것들이 의식을 깨우는 카페인에 뒤섞여 내 핏속으로 고스란히 흘러든다. 커피는 무료하고 지친 날의 외로움과 권태를 덜어 주는 벗, 빛나는 우애와 창조의 촉매제다. 우리는 햇빛이 나무 위로 흘러넘치는 게 좋아서, 또 다른 날은 비가 비둘기같이 걸어오는 게 좋아서 커피를 마셨다. 어느 심야, 커피를 마시며 쓴 내 시에는 분명 커피의 성분도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못, 준다/손현숙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못, 준다/손현숙

    못, 준다/손현숙 연애 고수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잘 주고받기란다 피구 게임에서도 몸을 살짝 뒤로 빼면서 공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주고받기만을 잘하면 쇳덩이라도 가벼운 법이라는데, 나무껍질처럼 생긴 목수 아저씨 못 하나 입에 물고 한참을 중얼거린다 장미나무 찻장을 앞에 세워놓고 “꽃 줄게, 꽃 받아라” 문짝을 달랜다, 나무의 결 따라 못질한다 심하게 어깃장 놓던 장미 찻장이 거짓말처럼 부드럽다 못은 망치로 때려 박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당신아, 어쩌자고 우리는 몸을 주고받아 새끼를 나눠 갖게 되었을까 그나저나 눈 깜짝할 새 방바닥에 쓰러져서 돌아가신 아버지 어디 가서 도로 몸을 받아 오나 너를 덜어 나를 채우는 여기, 꽃잠이 밀려와 하품한다, 생글거리며 횡격막을 연다 사랑은 몸을 주고받는 일이다. 당신은 사랑스러운 표범이다. 사랑은 두 마리 표범으로 몸이 엉겨 몸을 주고받는 열락(悅樂)이다! 사랑은 피구 게임을 닮았다. 몸을 뒤로 빼면서 공을 받아야 한다. 목수는 오래 써서 뒤틀린 장미나무 찻장에 못을 박으면서 “꽃 줄게, 꽃 받아라”라고 말한다. 이 절묘한 은유에 무릎을 친다. 장미나무 찻장에 못 하나를 박으며 저토록 우아하게 속삭이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오유근/간국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오유근/간국

    오유근/간국 뚝배기 안, 토막 난 침조기가 제 몸을 우려내고 있다 벌건 고춧가루 밑에서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고 부글부글 웃고 있다, 남은 한쪽 눈으로 쭉쭉 빠는 눈을 올려다보고 있다 껍질은 너무 비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떠밀리는 거죽 밑을 뒤지며 한 점 한 점 떠내는 제 살을 바라보고 있다 식탁 끝 차가운 쇠그릇 속에서 식어 있는 제 뼈를 바라보고 있다 발목뼈가 옆구리에 붙고 머리뼈가 엉덩이에 붙는 순간순간을 골수 들어가는 입을 허연 눈알이, 끝까지 보고 있다 떠낸 거죽으로 눈알을 덮어두고 나는, 후― 후― 누군가의 거적을 들추고 있다 누군가 살아서 간국을 허겁지겁 떠먹는다. 누군가는 잡곡밥과 구운 고등어를 먹고, 누군가는 뚝배기 안의 투막 난 침조기 살점을 발라먹고, 고춧가루를 푼 국물을 떠먹는다. 먹는 것은 허기를 채우고 관능적 즐거움을 얻는 일이면서 몸이라는 신전(神殿)에서 드리는 신성한 의식이다. 인생의 대소사들, 즉 결혼, 출생, 장례, 생일 때 특별한 음식을 차려 먹는 것으로 그 특별한 의미를 새기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우리는 더도 덜도 아닌 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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