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방짜 유기-놋주발/이강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방짜 유기-놋주발/이강산

    방짜 유기-놋주발/이강산 눈코입과 살과 뼈 육신이 투명해지도록 두들겨 맞고 비로소 밥 한 그릇 담는다 저 금빛 피멍 점묘화처럼 빈틈없이 찍힌 흉터 그러나 저들의 매질, 눈여겨보면 그건 단순히 밥그릇의 성형이 아니다 제 몸의 담장 허무는 일이다 내 놋주발에 밥 한 그릇 제대로 담지 못해 아침마다 숟가락 거머쥐는 것은 아직 매 덜 맞은 때문 손이 발이 되고 발바닥이 입이 되는 저 무한 경계의 사랑 이루지 못한 때문이다 ‘시란 무엇인가?’라고 물어 오는 이가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이도 있다. 얕은 생의 이력으로 이 질문들에 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방짜 유기는 육신이 문드러지도록 매를 맞은 뒤 비로소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담아낸다. 아름답고 철학적인 삶 아닌가? 시인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 앞에서 ‘제 몸의 담장 허무는 일’을 생각한다. 손이 발이 되고 발바닥이 입이 되는 무한 경계의 사랑을 생각한다. 삶이란, 시란 이 경계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혼신의 힘 아니겠는가. 점묘화처럼 빈틈없이 찍힌 흉터 아니겠는가.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미닫이에 얼비쳐/박용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미닫이에 얼비쳐/박용래

    미닫이에 얼비쳐 /박용래 호두 깨자 눈 오는 날에는 눈발 사근사근 옛말 하는데 눈발 새록새록 옛말 하자는데 구구샌 양 구구새 모양 미닫이에 얼비쳐 창호지 안에서 호두 깨자 호두는 오릿고개 싸릿골 호두 눈 오는 날이면 동치미 국물에 삶은 고구마를 먹었다. 살얼음이 둥둥 뜬 동치미 국물과 고구마의 ‘케미’를 경험하지 않은 이는 알 수 없다. 잣눈이 푹푹 쌓이면 뒷산에 꿩덫을 놓았다. 천지가 하얗고 먹을 것이 없어지면 꿩은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속을 헤매다 덫에 치인다. 꿩 고기 육수를 내린 떡국은 산마을의 진수였다. 눈발이 새록새록 옛이야기하는데 산비둘기는 구구구 울고 창호지 안에서 싸릿골 호두를 깬다면…. 이곳이 낙원 아니겠는가. 꼴머슴 살 때 수수떡을 건네던 누이가 있었다. 수수떡 안에서 호두 알갱이가 박하사탕처럼 씹혔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Blue Night 625/정영주 · 삭주 구성/김소월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Blue Night 625/정영주 · 삭주 구성/김소월

    Blue Night 625 / 정영주 145.5×112㎝, 캔버스에 한지, 아크릴릭, 2016 서양화가, 한지를 활용해 입체화를 그리는 작가 삭주 구성 / 김소월 물로 사흘 배 사흘 먼 삼천리 더더구나 걸어 넘는 먼 삼천리 삭주 구성은 산을 넘은 육천리요 물 맞아 함빡히 젖은 제비도 가다가 비에 걸려 오노랍니다 저녁에는 높은 산 밤에 높은 산 삭주 구성은 산 너머 먼 육천리 가끔가끔 꿈에는 사오천리 가다오다 돌아오는 길이겠지요 서로 떠난 몸이길래 몸이 그리워 임을 둔 곳이기에 곳이 그리워 못 보았소 새들도 집이 그리워 남북으로 오며 가며 아니합디까 들 끝에 날아가는 나는 구름은 밤쯤은 어디 바로 가 있을 텐고 삭주 구성은 산 너머 먼 육천리 1932년 간행된 조선 신지도 앞에 앉아 있다. 돋보기를 쓰고 삭주 구성을 찾는다. 구성은 찾았는데 삭주는 보이지 않는다. 구성의 옛 이름이 삭주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월은 정주 사람이다. 정주에서 청천강을 따라 동으로 100리를 조금 더 오르면 영변 약산이 나오고 정주에서 진북으로 100리를 채 가지 못해 구성이 나온다. 삭주 구성은 산 너머 먼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기차가 들어오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11월/허수경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기차가 들어오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11월/허수경

    기차가 들어오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11월 / 허수경 집시들은 아직 떠나지 않았고 텐트 바깥에 걸어 놓은 빨래가 안개에 젖는데 기차는 들어오고 다리를 다친 새는 날아가지 못한다 두 손 안에 다친 새를 넣고 기차가 들어오던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11월 이 철길에 며칠 전에 아주 젊은 청년이 몸을 던졌다 아내와 딸이 있는 청년이었다 기차를 몰고 가던 사람은 마치 커다란 검은 새가 창에 부딪힌 것 같았다고 울었다 기차가 길게 지나가는 길에는 우울증에 걸린 고양이와 개, 산돼지와 청년 실업자와 창녀와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보지 못한 가장이 있었지 그들의 영혼이 이렇게 안개의 옷을 입고 조용히 조용히 한 번도 추어 보지 못한 춤을 추는 것 같은 11월의 오후 마지막 순간에 텅 빈 항아리를 보는 것 같은 깊고도 깊은 검은 겨울을 바라보는 것 같은 11월의 오후 집시들은 아직 머물러 있고 새는 손안에서 따뜻한데 빨래는 흐느끼며 11월의 안개,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안개의 공기 속에서는 땅에서 썩고 있는 사과 냄새가 나고 새가 파닥이는데 기차는 떠나는데 어서 집으로 가야 한다 새를 치료하러 작은 종소리가 나오는 은은한 심장을 치료하러 ***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광천 어리굴젓/조양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광천 어리굴젓/조양상

    광천 어리굴젓/조양상 나보다 10분 먼저 태어난 친형이 있었다 나는 그를 형이라 부르기 억울해 아버지 앞에 있을 때만 엉아라 불렀다 엉아는 부친이 일찍 먼 걸음 하시자 책가방 집어 던지고 농사를 지었다 매년 농사를 지으면 쌀과 김장거리를 형제들에게 광천역 수화물로 보내주기도 했다 내가 거제도에 살 때는 주소를 거지도로 써 보냈는데도 쌀은 바다 건너 잘 왔다 그런데도 홀몸으로 천수답과 팔 남매 거두시던 어머니에게 효자 소리는 내 차지였다 식구들 논밭에 나가 일할 때 엉아는 시험공부 하라며 내 몫까지 도맡아 했다 성적표를 받는 날 식구들 중 엉아가 나보다 더 우쭐거렸다 엉아는 경운기에 손가락 두 개를 잃더니 큰 콤바인을 농협 대출로 샀다가 아버지께 물려 밭은 땅과 집까지 경매로 몽땅 날렸다 가끔 고향 가면 이빨과 눈이 아프다는 엉아에게 진통제 사다 주다 오서산 다람쥐였던 엉아가 이상해 큰 병원에 데려갔더니 뇌종양 말기였다 형수와 논밭 잃고 시름시름 지낸 5년 동안 얻은 병이다 절대 수술 않겠다고 우기던 엉아가 가장 환하게 웃었던 날은 나에게 속아 수술날짜가 잡힌 날이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욕을 시켜주고 면도까지 해주자 엉아는 살고 싶은지 웃다 울었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14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서용선 · 소야곡/민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14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서용선 · 소야곡/민영

    14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서용선 143.5×230.5㎝, 캔버스에 아크릴릭, 2010 전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제26회 이중섭미술상 소야곡 / 민영 하모니카가 지나간다 야심한 시간 11시 35분 손님이라곤 없는 전동차 안에서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하모니카 소리가 지나간다 한 손에는 동냥 그릇 또 한 손에는 악기를 들고 비실비실 뒤뚝뒤뚝 앞 못 보는 하모니카가 하루의 노동으로 곯아떨어진 승객들 사이로 소야곡을 울리며 지나간다 하늘이 파랗고 구름은 하얗다. 예전엔 이즈음을 독서의 계절이라 불렀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핍진해도 나무 벤치에 앉아 책 한 권 읽는 것이 영혼을 위한 소슬한 공양이었다. 늦은 밤 귀갓길, 전동차에 앉아 책을 읽는 이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럴 때 하모니카를 불며 지나가는 이가 있다. 눈 감고 하모니카 소리를 들으며 인생이란 한없이 쓸쓸하면서도 얼마나 우아할 수 있는가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 독서의 계절이란 말은 사라지고 없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 모두 핸드폰에 골몰한다. 평생 핸드폰을 바라보다 관에 들어가는 것, 인생의 정의일지 모른다. 곽재구 시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윤슬/동길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윤슬/동길산

    윤슬/동길산 바다가 반짝이는 건 해와 바다 사이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기 때문 기차 끊긴 동해남부선 기찻길이 반짝이는 건 해와 기찻길 사이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기 때문 나와 당신 사이 무엇으로 가로막으려 하는가 아무것도 놓이지 않아 더 반짝이는 당신 *** 해질 무렵 와온 바다의 윤슬은 아름답다. 저녁놀이 바다 위에 치자 꽃물을 들이고 작은 파도들이 인상파의 그림처럼 반짝이며 고깃배들과 마을들을 평화로움 속에 머물게 한다. 와온의 윤슬을 보는 순간 외로운 여행자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다. 나 또한 그러했다. 달빛이 만든 밤바다의 윤슬은 낮의 윤슬과 다른 아늑함과 정결함을 준다. 만파식적의 순간이 다가온다. 와온 밤바다의 윤슬을 보며 맨발로 해안선을 따라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쭉 가면 의주에 이르고 동쪽으로 가면 청진에 이른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종이로 만든 마을/윤희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종이로 만든 마을/윤희상

    종이로 만든 마을/윤희상 일찍이 이 마을에는 종이로 만든 하늘이 있었고 종이로 만든 땅이 있었다 종이로 만든 사람들은 종이로 만든 집을 짓고, 종이로 만든 아이를 낳고 살았다 종이로 만든 나무도 있고 종이로 만든 숲도 있었다 당연히 종이로 만든 새도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더러 종이로 만든 새소리를 들었다 그렇지만 종이로 만든 장애인 학교는 세우지 않았다 종이로 만든 쓰레기 시설을 만드는 것도 싫어했다 종이로 만든 화장터를 짓는 것도 싫어했다 이미 알고 있듯이, 이 마을 사람들은 아프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결국 죽지도 않았다 ***시를 읽는 동안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많이 부끄러웠다. 이 마을 사람들은 종이로 집을 만들고 숲과 새소리와 아이까지 다 만들 수 있었다. 황금만능주의의 세상에서 돈이면 불가능할 것이 없었다. 단지 장애인학교와 쓰레기 처리장과 화장터를 만드는 것은 결사적으로 반대한다. 인류는 왜 태어났을까?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절실하고 절박한 이 화두에 답하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생을 영위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종이를 거부하자. 진실로 만든 꽃과 바람과 새와 종소리를 사랑하자.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장미 가족/프로스트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장미 가족/프로스트

    장미 가족/프로스트 장미는 장미 언제나 장미 하지만 요즘 생각에는 사과도 장미 배도 장미입니다, 하여 오이도 장미가 됩니다 다음엔 무엇이 장미가 될지 아무도 몰라요 당신은, 물론 장미이지요 언제나 장미였거든요 *** 당신에게 장미는 누구인가요? 당신에게 장미는 무엇인가요?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 내게도 장미가 찾아왔지요. 밤하늘의 은하수, 탱자 울타리에 핀 꽃, 판자 울 밖으로 날리던 라면 냄새, 처음 만난 커피 향, 만주로 가던 밤기차, 짜장면 집에 앉아 기다릴 때 날아오던 파리, 반찬 접시 위 고추 물 든 깍두기, 벽돌색 줄이 쳐진 원고지, 얼어붙은 겨울밤의 잉크병, 아침 햇살, 자두꽃 향기…. 모두가 다 장미였지요. 그 모든 장미를 사랑해요. 장미가 곁에 있으니 세상은 꽃밭이네요. 어젯밤은 흑흑 울었지요. 그 눈물도 다 장미예요.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처자/고형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처자/고형렬

    처자/고형렬 주방 옆 화장실에서 아내가 아들을 목욕시킨다 엄마는 젖이 작아 하는 소리가 가만히 들린다 엄마는 젖이 작아 백열등 켜진 욕실에서 아내는 발가벗었을 것이다 물소리가 쏴아 하다 그치고 아내가 이런다 얘 너 엄마 젖 만져 봐 만져도 돼? 그러엄. 그러고 조용하다 아들이 아내의 젖을 만지는 모양이다 곧장 웃음소리가 터진다 아파 이놈아! 그렇게 아프게 만지면 어떡해! 아프게 만지면 어떡해 욕실에 들어가고 싶다 셋이 놀고 싶다 우리가 떠난 먼 훗날에도 아이는 사랑을 기억하겠지 *** 엄마가 아이를 무릎 위에 뉘어 놓고 동화책을 읽어 주는 모습. 인간사에서 가장 따뜻한 풍경이라 여겼다. 이 시를 읽는 순간 생각이 바뀐다. 아이가 엄마가 함께 목욕하다 엄마 젖을 가만히 만진다. 아파 이놈아! 엄마의 함박꽃 웃음소리가 욕실 밖으로 쏟아진다. 뒷산 숲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애비는 끼어들어 셋이 함께 놀고 싶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뻐꾸기가 사는 숲에는 흰색과 보라색 파란색의 꽃들이 함께 어울려 핀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안녕 아저씨/임철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안녕 아저씨/임철우

    안녕 아저씨 / 임철우 오늘밤 우리는 돌담 위에 셋이서 나란히 앉아 있어 이 자리에 걸터앉으면 당신 방 창문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 지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당신의 옆모습 이 창 너머로 빤히 들여다보여 당신은 오늘따라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고 열심히 책을 읽고 있네 난 그 책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알고 있어 그건 어떤 섬에 관한 이야기야 난 그 섬을 알아 아직 가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아느냐고? 그건 우리가 찾아가야 할 섬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섬이니까 어쩌면 오늘밤 우리는 마침내 그 섬에 도착할지도 모르거든 *** 소설이 시처럼 읽힐 때가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와 ‘메밀꽃 필 무렵’, 알퐁스 도데의 ‘별 이야기’를 처음 읽던 시절 마음이 뜨거워졌다. 언젠가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임철우가 제주 4·3사태를 다룬 마음 애틋한 소설 ‘돌담에 속삭이는’을 펴냈다. 그와 나는 동학혁명 60년 뒤의 같은 날 태어난 인연이 있다. 돌담 위에 앉은 세 어린 것의 이름은 몽희 몽구 몽선이다. 토벌대에 숨진 어린 영혼들이 자신들이 살던 돌담 집을 떠나지 못하고, 그 집에 이사 들어온 소설가와 교감하는 과정을 통해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문시 1/신동엽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문시 1/신동엽

    산문시 1 /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인가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뒤집어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 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레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놀이 안 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안나푸르나/김재학 · 여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황학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안나푸르나/김재학 · 여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황학주

    산-안나푸르나 / 김재학 227×145.5㎝, 캔버스에 오일, 2011 서양화가, 구상전 공모전 은상 여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 / 황학주 바람의 쇄골 선을 따라 흔들리며 바람이 불수록 언성을 낮추기 위해 땅에 갈고리를 거는 억새 다시는 당신에게 화를 내지 않게 당신에게 한 가지만 결심을 하게 만조한 내 인생에서 당신이지만 알려주는 게 좋겠다 당신의 손을 잡고 가다 당신을 더이상 떠올리지 못할 때 화를 내지 않을게 날리는 억새 아랫도리를 여며 주려 뜻밖에 붉은뺨멧새가 뛰어드는 바람이 먹고 얼룩지고 지워지며 지나는 여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 당신에게 화를 내기엔 약여히 당신을 살아본 적이 없다 덥다. 마날리 이야기를 할까. 마날리는 히말라야 산록의 산골 마을이다. 만년설이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수백 년 묵은 전나무 숲이 이어져 있고 마을의 돌담을 따라 사과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숲길 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두 손을 모으고 웃는 얼굴로 나마스테! 인사를 한다 숲길을 벗어나면 꽃밭 천지다. 수십 수백㎞의 산록이 꽃밭과 꽃향기로 이어진다. 이슬람의 한 시인은 ‘카슈미르여 신비한 꽃의 침대여’라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소식 좀 전해주렴/박현웅 · 불인(不忍)/정윤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소식 좀 전해주렴/박현웅 · 불인(不忍)/정윤천

    소식 좀 전해주렴 / 박현웅 불인(不忍) / 정윤천 사산 직전의 염소 새끼를 들쳐 메고 들어와 사람 병원의 응급실 앞에서 울음을 바치는 이가 있었다 시골 의사는 등가죽을 늘여 두 대의 링거를 염소의 몸 안으로 흘려 넣어 주었다 2001년 1월 26일 도쿄 신주쿠의 한 지하철역에서 술 취한 일본인이 선로에 떨어졌다. 한 한국인 청년이 그를 구하기 위해 철로에 뛰어내렸다. 열차가 달려온 시간 7초. 그는 철로에서의 탈출 대신 달려오는 열차를 손으로 막았다. 고려대 4학년 이수현군.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아키히토 일왕을 비롯한 전 일본이 추모했다. 일본 청년에게 없는 희생정신을 이 한국 청년이 지니고 있음을 일본 언론은 대서특필한다. 이수현군의 조부는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탄광 노동을 했다. 사산 직전의 염소를 위해 응급실의 의사는 두 대의 링거를 정성껏 흘려 넣어 준다. 불인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지도자들에게서 불인을 찾을 수 없다. 과거를 반성할 줄 모르는 축생의 얼굴. 호로상것들이라 할 것이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스툴/조항록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스툴/조항록

    스툴 / 조항록 시야에 안개가 끼고 다리는 갈대처럼 흔들린다. 백기를 목에 두르고 나에게 손짓하는 자 누구인가? 피의 맛과 땀의 맛이 입안에 고인다. 미각으로 느끼는 야릇한 혼돈이 머릿속에 피안의 무늬를 그린다. 오래 단련한 근육은 수수깡같이 허무하고, 여차하면 숨이 까맣게 막히는 지옥이 있다. 누가 나에게 박수와 야유로 가학적 희망을 논하는가? 납덩이를 동여맨 발목이 흐느낀다 전 생애를 비틀거려 주저앉는 외딴섬 헐떡이는 심장을 가까스로 올려놓는 자그만 섬. 저기, 남은 라운드가 적적하다. ***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링 위에 외롭게 선 권투선수와 같다.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를 괴롭히고 일본은 등 뒤에 야비한 방식으로 칼을 꽂는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의 기관총에 맞서 장태(대나무로 엮어 볏짚을 채운 통)를 굴리며 죽창으로 싸웠다. 패전 뒤 동학 부역자라는 명목으로 살육을 당한 흰옷 입은 사람들의 피로 반도의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당신은 지금 권투선수의 스툴(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그날의 비극을 답습할 것인가. 마우스피스를 다시 끼고 벌떡 일어나 싸우자. 다시는 야만족에게 우리의 생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따뜻한 얼음/박남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따뜻한 얼음/박남준

    따뜻한 얼음 /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 겹 또 한 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 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 지어 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 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 겨울 이야기를 하자. 겨울이 깊어지면 매일 산책하는 강물이 얼어붙는다. 강물이 얼 때 걱정이 있다. 얼음 속 물고기들이 어떻게 겨울을 견딜까. 수달과 철새들이 어디서 먹이를 구할까. 어느 추운 오후 다리 아래 깊은 물길 속에 물고기들이 새까맣게 모인 것을 보고 놀랐는데, 다음날 강물이 얼어붙은 것을 보고 물고기들의 모임을 이해했다. 얼음은 겨울의 이데올로기이자 세계관이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쌀밥/장성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쌀밥/장성희

    쌀밥 / 장성희 얼마나 많은 시간을 먹었는데 아직도 그립다 하며 빈 수저를 핥는다 식욕을 물려받고 수저 쥐는 법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잊지도 않는다 나는 나의 아름답지 않던 모든 시절을 믿는다 당신의 손에는 너무도 많은 물이 담겨 있다 잡으려 할 때마다 파문이 일고 자리마다 검버섯이 자란다 기어코 손등까지 차오르던 고요 당신에게 건넬 말을 물고 오물대던 순간들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먹을 수 있을까 묻던 말만 가득 담긴 빈 그릇 빈 수저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말고 친척집에서 꼴머슴을 살았다. 소 풀을 뜯기고 나무하는 것이 일이었다. 갈퀴나무. 떨어진 솔잎을 갈퀴로 긁어모아 라면 박스 크기로 묶어 애기지게로 날랐다. 갈퀴나무는 화력이 참 좋았다. 바가지 하나의 분량이면 가마솥 밥을 할 수 있었다. 아궁이 속의 갈퀴나무가 환하게 불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엄마가 밥을 얹힐 때 손바닥을 쌀 위에 펴서 물을 맞추는 모습은 늘 신기했다. 당신의 손에는 너무나 많은 슬픈 물이 담겨 있다. 나는 나의 아름답지 않던 모든 시절을 믿는다는 시인의 잔잔한 목소리. 이 젊은 시인의 꿈이 꼭 이루어지기를.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무도회/박인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무도회/박인환

    무도회 / 박인환 연기와 여자들 틈에 끼어 나는 무도회에 나갔다   밤이 새도록 나는 광란의 춤을 추었다 어떤 屍體를 안고   황제는 불안한 샹들리에와 함께 있었고 모든 물체는 회전하였다   눈을 뜨니 運河는 흘렀다 술보다 더욱 진한 피가 흘렀다   이 시간 전쟁은 나와 관련이 없다 광란된 의식과 불모의 육체…그리고 일방적인 대화로 충만된 나의 무도회   나는 더욱 밤 속에 가라앉아 간다 石膏의 여자를 힘있게 껴안고   새벽에 돌아오는 길 나는 내 전우가 전사한 통지를 받았다 6ㆍ25 동란 중에 쓰인 시. 시인은 무도회에서 밤새 춤을 추고 새벽녘에 전우의 사망 통지를 받는다. 외국인 병사들과 섞여 밤새 춤을 추지만 그 깊은 허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함께 춤추는 아름다운 여인은 시체이며 석고일 뿐이다. 순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에 대한 꿈. 절실한 생의 바이블. 요즘 한국인들 보기 흉하다. 뜨거운 것이 무엇인지 진실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삶의 예의는 사라지고 없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6년, 문득 포연 속의 그 시절이 그립다. 적어도 전쟁 속에서 몰려다니며 부동산 투기를 하고 위장 전출입을 하고 남의 논문을 카피하고 그 어떤 블랙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서울역에서 영등포역까지/윤재철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서울역에서 영등포역까지/윤재철

    서울역에서 영등포역까지/윤재철 출근길 전철 타고 이대로 끝 없이 갈 순 없을까 집도 절도 다 잊어버리고 이대로 끝없이 갈 순 없을까 스물다섯 술에 취해 에이 가버리자, 간다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떠났지만 영등포역에서 내리고 만 기억 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모험이더냐 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사상이더냐 이제 또다시 다 잊어버리고 이대로 끝없이 갈 순 없을까 서울역에서 영등포역까지 *** 젊은 날 에이 못 해먹겠다고, 떠나겠다고 다짐한 날들은 얼마나 많았는지. 현실을 떠나 마음의 자유를 얻자 무수히 다짐하면서도 떠나지 못했던 날들 기하였던가. 출판사에서 찾아온 젊은 편집자와 여수 바다를 걷는다. 바다의 맑음과 평화로움에 대해 감탄하던 그가 여기서 책방을 열고 살고 싶다 말한다. 좋은 꿈이네요, 꼭 그러세요.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들르지요. 책 많이 살게요. 그가 한숨을 쉰다. 저질러 놓은 일들이 저잣거리에 너무 많아요. 아파트 대출금 상환이며 애들 교육. 이 두 가지 목줄에 걸려 그도 평생 떠나지 못할 것이다. 언제 우리는 떠날 수 있을까. 햇살 환하고 꽃들 피고 새들 노래하는 곳. 보리밥에 물 말아 풋고추 된장에 찍어 먹는 곳. 돈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단오절/蒼氓人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단오절/蒼氓人

    단오절 / 蒼氓人 쟁피 저린 향근 물에 기름머리 공단스리 빗고 자지댕기 궁둥이로 단장한 安東땅이 본인 감나무집 처녀사야 달이 없어도 강둑에 나서면 무지개다리 밟던 노래 못 잊대면서 거네 뛰는 얘기를 곧잘 했다 갈밭같이 헝클어진 머리가 쟁피도 궁둥이도 소용이 없어 米軍이 간대는 소문만 노심이 되어 괴니 서글퍼진 빰빵 가스내사야 요즘은 찦도 퍽 적어졌드라 얘 아이참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이야기처럼 종알대곤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들 하폄만 뿜는다 ****************** 단기 4282년(1949년) 10월 육성사에서 출간된 시집 ‘잠자리’에 수록된 시다. 지은이 창맹인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시에서는 단오날 창포 대신 쟁피(젠피) 잎에 머리를 감는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은 추어탕이나 장어탕 먹을 때, 김치를 담글 때 젠피를 넣는다. 해방된 후 우리나라에서 미군의 인기가 크게 좋았다. 시골 아가씨들은 미군이 돌아간다고 노심초사한다. 나라를 해방시켜 주었으니 감사한 마음 크지 않겠는가. 자지댕기는 자줏빛 댕기, 거네는 그네, 빰빵 가스내는 뺨이 통통하고 복슬복슬한 가스내로 읽으면 될 것이다. 2차 대전 직후 미국과 미군은 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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