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여름 아침/김수영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여름 아침/김수영

    여름 아침/김수영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 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취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른다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진 햇살이 산 위를 걸어 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우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 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비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수영, 잘 지내나요? 그곳도 여름 아침이 오는가요? 여긴 눈이 많이 오고 당신이 모르는 바이러스의 이름이 세상 곳곳을 횡행해요. 가난한 이들은 은행 문을 두드리거나 저녁의 거리에서 울며 시를 쓰곤 해요. 햇볕 좋은 날 무씨를 뿌리던 고향 생각을 하죠. 산언덕 능선에 핀 무꽃이 얼마나 사랑스러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ceremony/이수진· 주전자/에쿠니 가오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ceremony/이수진· 주전자/에쿠니 가오리

    주전자/에쿠니 가오리 1 주전자를 보고 있었지 집이란 불가사의함 속에서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어 평화롭고 햇살은 따스하고 행복하다 해도 좋은데 그저 주전자를 보고 있었어 텅 빈 몸으로 집이란 불가사의함 속에서 2 내가 주전자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당신은 아는 줄 알았어 창밖에 하얀 눈 오는 날 난로 위의 주전자 보는 것을 좋아했지요. 주전자의 작은 코에서 따뜻한 수증기가 퐁퐁 솟아오르면 방 안 공기가 음악처럼 촉촉해져요. 창에는 물기운이 어룽댑니다. 손가락으로 쓰고 싶은 글자들을 쓸 수 있지요. 엄마, 기적, 선물, 사랑해, 눈사람, 시…. 좋아하는 단어를 하나씩 적어 가는 동안 세월도 한 페이지씩 늘어났겠지요. 어린 시절은 마법처럼 사라지고 난로 위의 주전자도 볼 수 없게 됐지요. 아세요? 연인들은 가장 사소한 순간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는 것을. 주전자를 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마음 안에선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그걸 모르는 순간 난로도 주전자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는 것을.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랑탕 계곡에서 생긴 일/서홍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랑탕 계곡에서 생긴 일/서홍관

    랑탕 계곡에서 생긴 일/서홍관 히말라야의 아침을 맞아 동네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돌로 담을 쌓던 아주머니가 나를 부른다 어디서 왔소? 한국이오 아, 그렇다면 우리 아들이 한국에서 돈 벌고 있는데 갸가 보낸 돈으로 집을 이렇게 짓고 있다고 사진을 보여줄 수 있겠소? 아 그러다마다요 집을 짓는 여인네와 집터를 잘 찍고 아예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더니 여동생은 물까지 묻혀서 머리를 다시 빗었다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라줄 라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 전화번호는 결번이오니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2000년 1월 1일 생각납니다. 네팔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히말라야 능선 환하게 보였습니다. 옆자리의 미국인 아낙이 20년 전 남편과 히말라야 트레킹을 했다고, 지금 혼자 그 길을 간다고 했습니다. 왜 히말라야에 가느냐? 내게 물었지요. 글 쓰느라 지쳤다고 말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라 하더군요. 맞습니다. 호강에 초쳤지요. 트레킹 마을에는 한국에 일하러 간 사람들 많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할지 짐작하고 남음 있습니다. 랄리구라스꽃 환한 농가에서 미국인 아낙 다시 만났습니다. 이곳 사람들 모습 설산에 핀 꽃과 닮았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다나 쓰나 이탁주濁酒 좋고 대테 매온 질병들이 더욱 좋아 어른자 박구기를 둥지둥지 띄워 두고 아이야 절이 김치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채유후(蔡裕後·1599~1660) 채유후 어르신의 시조 한 수 신축년 아침 햇살 아래 펼칩니다.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어르신인데 시조의 내용 소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탁주는 쌀로 빚은 술, 요즘의 막걸리쯤 되겠지요. 질그릇이 깨지지 말라고 대나무로 테를 묶었습니다. 술안주는 절이 김치 한 가지입니다. 이 시조의 중장을 좋아합니다. 박구기는 박으로 만든 술국자를 이름이지요. 어른자는 감탄사입니다. 어기야 술국자 둥실둥실 띄워 두고 이 동무 저 동무 다 모여 한 잔씩 들이켭니다. 이보다 사랑스런 세상 있겠는지요. 신축년은 하얀 소띠 해입니다. 소는 부지런함의 상징이지요. 하얀색에서 구도의 냄새가 나는군요. 심우도에 나오는 소 흰빛이지요. 올 한 해 우리의 삶에서 하얀 소를 찾으라는 신들의 따뜻한 충고를 생각합니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눈 나린 길/박남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눈 나린 길/박남수

    눈 나린 길/박남수 겨울 밤, 눈 나리는 밤 하아얀 눈을 밟으며 밟으며 가신 이가 누구일까 머얼리 발자최 조고만 발자최 건넌 마을로 건너갔고나 한 줄기 입김에도 흐려지는 유리창 앞에 호올로 호올로 금붕어처럼 직히며 흰 눈 나려, 나려서 쌓이는 이 아츰 우편배달부가 지날 상한 아츰 행여 돌아올 리 없을 이 그이를 그리 그리며 내 마음은 자릿자릿 설였다 태고 적 서름이 서린 이 아츰에 알지도 보지도 못한 이 가신 길에 어찌하여 조고만 발자최에 슬픈 전설을 맺으려는 걸까 눈 오는 날은 옛 생각이 납니다. 1989년 겨울,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 마을에서 하룻밤 잤습니다. 여관은 난방이 없었습니다. 옷을 있는 대로 껴입고 침낭과 이불 속에서 이를 덜덜 떨었지요. ‘잉크병 얼어붙는 밤’, 김기림의 시 구절 절로 생각났지요.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창틀을 덮었습니다. ‘눈 나린 길’은 1940년 출간된 시집 ‘초롱불’에 실린 작품입니다. 어릴 적엔 초롱불을 켜고 저녁을 먹었지요. 식구들의 얼굴 그림자가 황토벽에 어룽거렸습니다. 80년 전의 우리말 읽는 느낌 어떤지요? 지금보다 다정하지 않은지요? 눈 쌓인 들판 너머 우리가 그리워한 세상 있을 것만 같습니다. 곽재구 시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Eraser1/홍지연 · 이 도시의 트럭들/나희덕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Eraser1/홍지연 · 이 도시의 트럭들/나희덕

    이 도시의 트럭들/나희덕 돼지들은 이미 삶을 반납했다 움직일 공간이 없으면 움직일 생각도 사라지는지 분홍빛 삶이 푸대자루처럼 포개져 있다 트럭에 실려가는 돼지들은 당신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가 짝짓기 직전 개들의 표정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의 눈망울에서 당신은 어떤 비애를 읽어내는가 아니, 그 표정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 도시의 트럭들은 너무 많이 싣고 너무 멀리 간다 엿가락처럼 휜 철근들과 케이지를 가득 채운 닭들과 위태롭게 쌓여 있는 양배추들과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원목들을 싣고 트럭들은 무엇을 실었는지도 잊은 채 달린다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 죽음 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 첫눈이 왔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이 착해지네요. 눈 덮인 하얀 세상을 바라보는 것 겨울이 준 축복입니다. 길들 지붕들 가로수들 택배 오토바이들 위에 눈이 수북이 쌓입니다. 빨간 십자가를 켜고 눈을 맞는 교회당의 모습도 춥지 않군요. 이런 날 시골집 아랫목에 앉아 할머니가 구워 준 고구마 먹으며 눈 덮인 들판을 바라본다면, 낙원이겠지요.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이 왜 꿈이 돼 버렸는지. 시 속의 풍경 끔찍합니다. 이 도시의 트럭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봉함엽서/이상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봉함엽서/이상희

    봉함엽서/이상희 세상에 나와 이로운 못 하나 박은 것 없다 못 하나만 잘 박아도 집이 반듯하게 일어나고 하다못해 외투를 걸어두는 단정한 자리가 되는 것을 나는 간통을 하다 생을 다 보냈다 시를 훔치려고 소설을 훔치려고 외람된 기호를 가장했다 아, 나는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뿐이었던 세상을 살다 간다 가난한 눈물로 물 그림을 그리던 책상은 긍지처럼 오래 썩어가게 해 달라 단 하나 내 것이었던 두통이여, 이리로 와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막아 다오 그리고 떳떳한 사랑을 하던 부럽던 사람들 곁을 떠나는 출발을 지켜봐 다오 봉함엽서를 쓰던 시절이 있었지요. 엽서를 다 쓴 뒤 봉함을 하게 되니 그 안에 무슨 글을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봉함엽서 안에 단풍잎이나 껌 사진을 넣을 수도 있었지요. 불법이지만 그 무렵 집배원이나 우체국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한 시절이었지요. ‘가난한 눈물로 물 그림을 그리던 책상’이 내게도 있었습니다. 밤새 엎드려 쓴 글을 아침에 사보나 잡지에 팔아 쌀도 사고 감기약도 짓고 전기세를 냈지요. 밤에 쓴 글은 아침 어물전의 생선 같아요. 그 글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막았으니 끝내 사랑할밖에요. 좋아하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가을, 그리고 겨울/최하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가을, 그리고 겨울/최하림

    가을, 그리고 겨울/최하림 깊은 가을 길로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집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 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세석細石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음으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오래된 마을에 첫눈이 내릴 때, 마을의 낡은 지붕들과 나무들, 꽃이 진 화단 위에 누군가 커다란 붓으로 흰색의 페인트를 바르기 시작할 때, 우두커니 서 있는 교회당의 첨탑 위 붉은 십자가가 외롭게 반짝일 때. 골목 모퉁이 붕어빵을 굽는 이가 우두커니 하늘을 볼 때, 연인들이 붉은 벙어리장갑 안에 함께 손을 넣을 때, 서로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해가 질 때 뜨는 해/김호균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해가 질 때 뜨는 해/김호균

    해가 질 때 뜨는 해/김호균 그때가 2015년 2월 18일 오후 5시 56분이었어 바간, 쉐산도 파야에는 세계 경향 각지에서 몰려든 여행객이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어 모두 다 강 건너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핸드폰과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지 어떤 사람들의 입은 자꾸 벌어지고 넋 빠진 채 황홀한 표정까지 짓는 이들조차 있었어 아름다움에 눈 멀어 해가 저문다고만 생각했을지 모르지 그러나 그건 아주 잘못된 편견이었어 이쪽의 대지에서 해가 지고 있을 때 저쪽의 바다에는 해가 뜨고 있는 거였어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이 고동칠 수도 잿빛 어스름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 곰곰 생각해 봐 저 해가 질 때 뜨는 해를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동네에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다. 언덕 위로 해가 돋는 모습이 신비했다. 해가 뜨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엔 누가 살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내 큰 관심이었다. 그 시절 나는 비행기 설계도를 그리고 부품들을 모아 직접 비행기를 만들어 날고 싶었는데 동무들은 내가 태양의 나라로 갈 거라 하니 모두 좋아하며 자금 모집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사를 가면서 해 뜨는 언덕이 없어지고 유년 시절은 지나갔다. 해가 뜨는 모습을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무제/박인혁 · 기러기표/서정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무제/박인혁 · 기러기표/서정춘

    기러기표/서정춘 나는 안다 이웃집 옥탑방에 걸려 있는 양말 한 짝이 바람 불어 좋은 날 하릴없이 펄럭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누군가가 안쓰러워진 양말짝에 기러기표 부표를 달아주면 구만리장천으로 날려 버릴 바람이 불어올 것이라는 것을 순천 아랫장에서 토종 귀리를 발견하고 반가웠다. ‘해정한 모래부리 플랫폼에선/ 모두들 쩔쩔 끓는 구수한 귀리차를 마신다’ 백석의 시를 처음 읽을 때, 언젠가 함남 도안에 가서 꼭 귀리차를 마시고 싶었다. 귀리 한 됫박을 사 들고 동천 강변을 따라오는데 철새들이 강물 위에 오붓이 모여 있다. 청둥오리도 가마우지도 하얀 물새들도 있다. 징검다리에서 벗어난 바위 위에 귀리를 반 됫박 붓는다. 새벽녘 인적이 없을 때 식사하세요. 철새들이 튼실한 알곡으로 아침 식사할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빨랫줄에 걸린 양말 한 짝에 시인은 기러기표 상표 하나를 달아 주고 싶다. 기러기처럼 훨훨 날게 해 주고 싶은 것이다. 생명 없는 허름한 존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시인의 마음, 따뜻하고 우아하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엎어말아국수/박상률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엎어말아국수/박상률

    엎어말아국수/박상률 젊은 날 내 살았던 도시 환란을 겪은 뒤 서남해안 어느 산골 암자에 스며들어 가부좌 틀고 중님 흉내 냈지 그 암자에 방부 들인 진짜 중님 절 아래 마을 식당에서 엎어말아국수 주문했단다 위에는 국수 아래는 고기! 엎어말아국수가 서양에도 있었으니 이탈리아 수도승이 머리를 감추기 위해 쓴 모자 이름이 카푸치노였다네 나중에 그게 커피를 덮은 우유 이름이 되었다 하니 역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바람 속 가을 냄새 깊어진다. 델리의 파하르간지, 작은 빵집 생각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훅 끼치는 계피 냄새. 계피 향 속에 여행자들이 모여 여행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좋았다. 시나몬 빵과 계피 가루를 얹은 카푸치노를 천천히 음미하고 있으면 ‘철학적인 지옥’이라 불리는 인도의 풍경들이 사랑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엎어말아국수. 이름 속에 독한 리얼리즘이 들어 있다. 엎을 것인가 말 것인가. 먹물 옷의 수도자는 번민한다. 국수 아래 고기가 들어 있다. 바람에 노란 은행잎이 날린다. 파하르간지 빵집의 계피 향이 바람 속에 스며 있다. 지나간 시간, 사랑할 만하지 않았는가. 엎어도 은행잎은 날리며, 엎지 않아도 카푸치노 향은 가을을 적실 것이니. 곽재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세상/박경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세상/박경리

    세상/박경리 아이들이 간다 쫑알쫑알 지껄이며 간다 짧은 머리 다풀거리며 간다 일제히 돌아본다 아이들 얼굴은 모두 노인이었다 노인들이 간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간다 백발, 민들레 씨앗 깃털 같은 머리칼 지팡이 짚고 돌아본다 노인들 눈빛은 갓난아기였다 박경리 선생이 시집 ‘못 떠나는 배’를 펼친 해가 1988년이었다. 시 속의 아이들, 청춘들이라 하자. 80년대 청춘들은 모두 노인 같았다.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반미, 야학, 징집 거부, 분신…. 10년 사이 한 세기의 고통을 살아버린 애늙은이 청춘들. 그 청춘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없을 것이다. 한때 청춘인 그들 모두 지금은 노인이 되어 있다. 노인의 삶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어린 아기의 눈빛을 지녀야 한다. 슬프다. 내 주위의 친구들. 노인이 된 지난날의 청춘들. 어린 아기의 눈빛을 지닌 이 없다. 선생의 시에서 노인들은 모두 갓난아기 눈빛을 하고 있다. 삶은 한없이 힘들어도 꿈은 살아 숨 쉬던 그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돌탑을 받치는 것/길상호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돌탑을 받치는 것/길상호

    돌탑을 받치는 것/길상호 반야사 앞 냇가에 돌탑을 세운다 세상 반듯하기만 한 돌은 없어서 쌓이면서 탑은 자주 중심을 잃는다 모난 부분은 움푹한 부분에 맞추고 큰 것과 작은 것 순서를 맞추면서 쓰러지지 않게 틀을 잡아 보아도 돌과 돌 사이 어쩔 수 없는 틈이 순간순간 탑신의 불안을 흔든다 이제 인연 하나 더 쌓는 일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잔돌 괴는 일이 중요함을 안다 중심은 사소한 마음들이 받칠 때 흔들리지 않는 탑으로 서는 것 버리고만 싶던 내 몸도 살짝 저 빈틈에 끼워 넣고 보면 단단한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층층이 쌓인 돌탑에 멀리 풍경 소리가 날아와서 앉는다  나 사는 강 마을 가까이 선암사가 있다. 10월 초중순의 선암사는 은목서의 꽃향기로 천국이 된다. 은목서는 만리향으로 불리는데 꽃향기가 만리 밖 마을까지 날아간다는 비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은목서 꽃향기 속에 앉아 ‘풀의 향기’라는 책을 한 시간쯤 읽다 계곡에 작은 돌탑을 쌓는다. 돌탑을 쌓을 때 작은 돌마다 지극정성을 다하면 돌탑에서 향기가 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벌어진 틈마다 잔돌 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순 너머의 일이거니와 한번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서낭당나무와 돌장승/장재민 · 고용/니르거라즈 라이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서낭당나무와 돌장승/장재민 · 고용/니르거라즈 라이

    고용/니르거라즈 라이 나는 어느 회사의 직원입니다 우리 사장님은 이 도시에서 수많은 굶주림과 결핍의 신입니다 어느 날 사장님께 말했지요 사장님 당신은 내 굶주림의 신이시며 내 삶은 당신의 은덕입니다 그래서 생일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요 휴가를 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 내 덕분에 너는 오래 살 거야 이번에는 일이 많다 내년에 생일을 잘 보내도록 해라 나는 네라고 말했어요 어느 날 다시 사장님께 부탁을 했지요 사장님 당신은 굶주림의 신이십니다 당신의 자비로 집을 꾸며 주세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저에게 휴가를 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좋은 날들은 또 올 거야 이번에는 일이 많다 다른 길일에 결혼하도록 해라 나는 다시 네라고 말했어요 하루는 삶에 너무도 지쳐서 내가 말했어요 사장님 당신은 내 굶주림과 결핍을 해결해 주셨어요 당신에게 감사드려요 이번에는 나를 죽게 해 주세요 사장님이 말씀하셨어요 알았어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 그 일들을 모두 끝내도록 해라 그리고 내일 죽으렴! 이주 노동자의 삶을 다룬 이 시 읽을수록 부끄럽다. 불과 사오십 년 전 한국인들 또한 사우디로 이라크로 리비아로 서독의 광산 노동자로 팔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비의 향기/박형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비의 향기/박형준

    비의 향기/박형준 인도의 카나우지 지방에서는 미티 아타르라는 이름으로 비 향기를 담아 향수를 만든다 사람들에게 비가 오기 직전의 고향 땅의 풋풋한 흙내음을 사실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흙 향수 내 고향은 정우淨雨인데 맑은 비가 뛰어다니는 지평地平 마을이다 생땅을 갈아엎은 듯한 비에서 풍기는 흙내음 비 향기 진동하는 지평선 그 진동을 담은 시를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을까 수보르 생각이 난다. 수보르는 인도 산티니케탄에서 머물 때 만난 내 친구 이름이다. 수보르는 자전거 릭샤를 몰았다. 불가촉천민인 그는 마을의 꽃 이름을 다 알았고 마을 여인들의 이름 또한 다 알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은 내 집 앞에 릭샤를 세우고 나를 불렀다. 쫌빠다, 에쿤 하와, 발로 나!(쫌빠다, 비가 오니 얼마나 좋아!) 쫌빠다는 인도에서의 내 이름이다. 그와 나는 후드도 없는 릭샤를 타고 교외로 나간다. 그는 내게 비에 젖은 흙냄새는 고향의 냄새라며 사람은 그 흙냄새 때문에 이승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의 모든 꽃향기는 비에 젖은 흙에서 태어난다고도 얘기했다. 미티 아타르(miti attar), 비 냄새와 흙냄새가 버물린 향수.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향수를 쓰고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릇/안도현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그릇/안도현

    그릇/안도현 1 사기그릇 같은데 백 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말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 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그릇이 지닌 태생적인 빗금을 빙렬이라 한다. 그릇 자체의 하자임에 분명한 이 빙렬에 세월의 때가 깊게 스밀 때 명품이 태어난다.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이도다완도 그 투박한 외형에 곁들인 무심한 빙렬의 전개가 없었다면, 거기 스민 고즈넉한 삶의 때가 없었다면 지고의 미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삶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아쉬움과 그리움 절망과 좌절의 빙렬들이 무수히 모여 한 인간이 되는 것. 오늘 우리 가슴 안의 그릇이 지닌 때 묻은 빗금들을 가만히 살펴보자. 회한과 부끄러움의 빗금들이 가득 쌓인 그릇일수록 그릇은 조금씩 완성형에 가까워지는지 모른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Mask Series(KF94)/이승희 · 발칙한 플라스틱/정연홍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Mask Series(KF94)/이승희 · 발칙한 플라스틱/정연홍

    홍익대 대학원 동양학과 석사 과정. 10월 11일까지 온수공간 개인전 발칙한 플라스틱/정연홍 플라스틱을 먹는다 플라스틸 나물 플라식탁 밥 플 라식틱 국 플라숯틱 고기 플라 소틱 김치 플라수틱 물고기 플라스틱 밥상 플라숙틱 집 플라속틱 베개 플라순틱 이불 평생 나만 사랑해 주기로 약속한 플라술틱 애인 플라서틱 자동차를 타고 플라사틱 도시를 지나 플라ㅅ틱 사출공장 직원인 나 플라스틱 풀라스틱 푸라스틱 뿌라스틱 플라스 인생 플라스틱 인간 플라ㅅㅌ이 지구를 지배한다 플라스틱 우주 플라선틱 비행기가 날아간다 고래 배 속에서 드론이 발견되었다 2년 전 여름 가거도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을 만났다. 국적이 다른 8명의 청년. 둘은 여자였다. 낡은 요트를 몰고 세계여행을 하는 중 태풍을 피해 가거도로 입항한 것이었다. 돛을 펼치고 대해를 여행하는 그들의 꿈과 용기가 부럽고 가상했다. 더위를 타는 그들에게 아이스크림과 생수를 건넸는데 정중히 사양했다. 플라스틱 때문이었다. 그들이 세계를 여행하는 이유, 플라스틱 없는 세상을 위해서였다.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젓갈 한 점까지 깨끗이 비웠다. 플라스틱을 거부하지 않는 한 인류의 미래는 없다고 말하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난희에게/김옥종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난희에게/김옥종

    난희에게/김옥종 감기를 옮길까 봐 등 돌린 당신의 폐에서 순록 떼의 마른 발자국 소리 들립니다 옮겨버리면 얼른 낫는다고 해서 입술로 덮습니다 차갑게 사랑하고 뜨겁게 헤어지고픈 그런 밤이었습니다 난희. 시인의 연인은 이름이 곱다. 이름에서 가을밤 숲 냄새가 난다. 환한 달빛 속에 난초 꽃 한 송이 바람에 흔들린다. 어쩌나? 연약하고 고운 연인이 독감에 걸렸다. 등 뒤에서 가만히 껴안으니 연인의 폐에서 순록 떼의 마른 발자국 소리 들린다. 연인의 입술 위에 시인은 입술을 포갠다. 대저 시인에게 입술의 용도란 이러한 것. 전장포 밤바다에서 처음 만나 입맞춤할 때 쏟아지던 달빛의 윤슬. 반짝반짝 빛나던 젖새우들의 춤. 함께 지낸 세월의 이끼 속에 피어나는 지순한 꽃 한 송이여. 시와 삶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조폭과 격투기 선수의 이력을 지닌 시인이 고향 이름을 딴 식당에서 요리를 하며 우리에게 묻는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무엇을 위해 시를 써왔나/유안진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무엇을 위해 시를 써왔나/유안진

    무엇을 위해 시를 써왔나/유안진 미국의 동서횡단철도 개통 20주년 기념 식장에서 종신 철도원으로 표창받는 남자에게 한 노동자가 다가와 인사했다 이봐 윌리, 나야 몰라보겠나? 20년 전에 우리 일당 5불을 위해 일했잖아 그랬나? 그때도 난 철도가 좋아 일했던 것 같은데 강을 따라 걸어가며 인사하기를 좋아한다. 흐르는 물에게, 줄지어 선 버드나무에게, 노랗고 하얀 꽃들에게,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에게. 안녕! 간밤에 좋은 일 없었어?라고 묻는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시가 나를 찾아왔다. 시가 좋았고 50년 세월이 흘렀다. 아둔해서 소월이나 백석 지용 닮은 시 한 편 쓰지 못했지만 시 곁에 머문 얼간이 같은 시간들이 좋았다. 강물 속 물고기에게 묻는다. 무엇을 위해 강물을 따라 흘러가나? 하하하! 물고기들이 웃는다. “멍청이 같은 이라구! 너는 왜 시를 써?”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믿었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살생/정완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살생/정완희

    살생/정완희 오늘 세 사람의 직원을 잘랐다 한 사람은 자식만 넷에 늙은 노모까지 일곱 식구의 힘겨운 가장이다 한동안 실업급여와 구직활동 서러운 세상의 차가운 바람 속을 헤맬 것이다 회의실에서 잠시 고성이 오가고 나서 서로 마주 앉아 눈시울을 붉혔다 남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슬프다 추위에 눈발 날리는 화단의 철 이른 수선화들도 고개 떨군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다음번에 내 차례가 될 수도 있다 일감이 없어 문을 닫을 수도 있다 몇 달째 잠들지 못했다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보고도 내 손에 피를 묻히는 꿈을 꾸었다 어느 중소기업의 인사 책임자는 과도한 스트레스로 저세상에 갔단다 정문을 지키는 복남이가 부러운 날이다 강변의 작은 카페가 문을 열었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코로나19 때문에 카페는 며칠 동안 문을 닫았습니다. 사장님 문 언제 열어요? 아침에 알바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는군요. 알바생을 위해 가게 문을 연 업주가 고마웠습니다. 커피 한 잔 들고 벤치에 앉아 강물 소리 듣습니다. 인류는 코로나19로부터 깊게 혼이 날 필요 있습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 절망 속에서 깨달았으면 싶습니다. 서울의 부동산값이 반 이하로 떨어져 가난한 이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