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여름/강지이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여름/강지이

    19살 때 수도원에 입회했다가 깨달음의 한계에 부딪혀 6년 뒤 수도원을 나와 이탈리아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이번 전시에선 뒷모습의 풍경을 그린 회화를 선보이며 가장 본질적이며 인간적인 행위를 설명한다. 서울 종로구 갤러리 마리에서 9월 30일까지. 여름/강지이 그곳에 영화관이 있었다 여름엔 수영을 했고 나무 밑을 걷다 네가 그 앞에 서 있기에 그곳 에 들어갔다 거기선 상한 우유 냄새와 따뜻한 밀가루 냄새가 났다 너는 장면들에 대해 얘기했고 그 장면들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어두워지면 너는 물처럼 투명해졌다 나는 여름엔 수영을 했다 물 밑에 빛이 가득했다 강 밑에 은하수가 있었다 매해 여름을 살지만 같은 여름은 아니다. 일생 사랑을 하지만 당연히 같은 사랑은 아니듯이. 물속에서 자맥질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여름은 일 년 중 가장 깊고 넓은 생활의 무대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왜 물속이 궁금할까? 생애의 여름인 청춘이면 인간은 왜 사랑이라는 영화관이 궁금할까? 거기에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상영이 끝나면 ‘물처럼 투명해’지는 ‘너’라는 영화관! ‘물 밑에 가득한’ ‘빛’을 보느라고 ‘여름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는 약해/이근화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는 약해/이근화

    나는 약해/이근화 고작 숲이야 고래야 발이 젖었어 나는 버스야 굴러가는 바퀴야 알록달록해 나는 언제나 나는 그러나 쓰러지고 말 거야 기어가고 말 거야 집이 잠긴다 창문이 녹는다 골목길이 터진다 나의 실핏줄이 파도야 흘러가는 봄이야 멈추지 않는 손이야 감기지 않는 눈이야 고백 같은 시가 있는가 하면 독백 같은 시가 있습니다. 고백이 타인을 향한 말이라면 독백은 자신에게 건네는 혼잣말입니다. 이 시는 독백처럼 들립니다. 시인이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상상해 봅니다. ‘언제나’, 혹은 ‘그러나’라는 말에 걸려 마음을 깊게 베인 날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외바퀴를 타는 사람처럼 위태로워 보입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듯 울퉁불퉁한 이미지의 리듬을 따라가 봅니다. 숲과 고래와 젖은 발, 실핏줄처럼 터지는 환상과 흘러간 봄을요. 이상하지요. ‘나는 약해’, ‘나는 약해’ 중얼거리고 나면 자신에게만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뜨겁게 녹아내린 시간이 차갑게 식어 가도록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미나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못다 한 말/박은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못다 한 말/박은지

    못다 한 말/박은지 설원을 달렸다 숨이 몸보다 커질 때까지 숨만 쉬어도 지구 반대편 사람을 만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는 너를 보는 게 좋았다 여기 너무 아름답다 우리 꼭 다시 오자 겨울 별자리가 가고 여름 별자리가 올 때까지 녹지 않는 것이 있다 장마가 지나갔다고 한다. 어김없이 한 해를 보내기 위한 필수 과정. 올해도 사춘기를 지나고 청년기를 지나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다. 문득 들리기 시작한 참매미 소리가 오래전, 여러 겹의 여름 기억을 불러온다. 부채를 들고 마당에 나오면 눈은 하늘로 향한다. 하늘을 보는 일은 ‘영원’을 보는 일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거기 ‘여름 별자리’들이 또 어김없이 옮겨 와 있다. 그렇게 오래전과 먼 후일까지 하늘의 운행은 끝이 없을 것인바 먼 시간 저편의 이규보나 정약용, 정지용이나 윤동주가 보던 별자리를 지금 내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하늘도 이마 앞의 것인 듯 다정한 사물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힘겨운 ‘숨’들을 내쉬었던가. 아무것 없이 깨끗하기만 한 ‘설원’에서부터 우리는 이 찬란한 여름 숲 앞에 당도했으니 다만 ‘너’가 있어서 ‘아름다운’ 여정! 말로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행복을 위한 기도II/최현주 ·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가네코 미스즈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행복을 위한 기도II/최현주 ·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가네코 미스즈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놓인 평범한 사물을 통해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킨다. 8월 5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마리.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가네코 미스즈 내가 두 팔을 펼쳐도 하늘은 조금도 날 수 없지만 날 수 있는 작은 새는 나처럼 땅 위를 빨리 달리지 못해 내가 몸을 흔들어도 고운 소리는 낼 수 없지만 저 울리는 방울은 나처럼 많은 노래를 알지 못해 방울과 작은 새 그리고 나 모두 다르지만, 모두 좋다 ‘새’는 하늘을 날 수 있고, ‘나’는 땅 위를 달릴 수 있고, ‘방울’은 고운 소리를 냅니다. 시인은 그 모습이 서로 달라서 좋다고 말합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인간에게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수직으로 뻗은 세상의 기준을 회전시켜 평등하게 둡니다. 이 시의 놀라움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서열의 높낮이를 재지 않으므로 방울도, 작은 새도, 사람도 같은 높이에 나란히 자리합니다. 쉽게 지나칠 법한 일상의 순간도 시인의 동심을 거쳐 맑고 깊은 시가 되었습니다. 같은 높이에서 생명을 다정히 살피는 마음이 없다면 ‘차이’도 보이지 않겠지요. 사랑은 ‘다름’을 알아보는 일, ‘차이’를 받아들이고 기꺼이 좋아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물桶/김종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물桶/김종삼

    물桶/김종삼 희미한 풍금(風琴)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廣野)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물 긷는 일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없어진 일이 되었을 줄 안다. 이웃들과 더불어 우물물을 먹던 시절 물 긷는 일은 고된 일이었고 허드렛일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물’은 어떤 물건이던가. 모든 생명 현상의 근본 바탕이고 오염된 모든 것을 깨끗이 하자는 일의 매개물이다. 이 시는 저승길의 시다. 장례식의 ‘풍금 소리’를 뒤에 둔 한 영혼이 먼 길을 간다. ‘머나먼 광야 한복판’ ‘영롱한 날빛(햇빛)’이 영혼에게 묻는다. 이제 곧 올라갈 ‘얕은 하늘 밑’이다. ‘따(땅) 우에선’ 무엇을 하였느냐는 질문이다. ‘영롱한’ 질문이었으리라. ‘(목마른) 인간(人間)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桶)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답한다. 이 구절은 겸사(謙辭)의 언어이지만 슬픔이 가득하다. 뜻 있는 삶이란 미리 죽음의 자리에 가서 ‘지금’을 바라본다. 그러면 사는 의미가 보인다. 김종삼에게 ‘물통’은 ‘시’였으리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뒤처진 새/라이나 쿤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뒤처진 새/라이나 쿤제

    뒤처진 새/ 라이나 쿤제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낸다 나도 심하게 뒤처진 새였다. 태어나고 자랄 무렵 내 곁에 뒤처진 새들이 참 많았다. 그러니 뒤처졌다고 불행하지 않았다. 앞서 날아간 새, 누구였을까. 생각나지 않는다. 불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만이 아는 부끄러운 순간들이 있다. 살면서 부끄러운 시간들은 더 쌓여 갔다. 삶이란 부끄러움을 쌓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세월이 흘러 부끄러움을 조금씩 닦아 가는 것이 삶이라고 비로소 생각하게 되었을 때 지푸라기를 붙드는 느낌이 있었다. 제일 늦게 날아가지만 결국은 산맥을 넘어가는 새. 남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새. 인쇄소에서 막 나온 원고지의 첫 줄 같은 그 영혼에 향기 있기를!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신과 나/하피즈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홀리 / 왕선정 · 내가 국경이다 / 이문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홀리 / 왕선정 · 내가 국경이다 / 이문재

    1990년생 젊은 작가는 성서에서 규정한 일곱 죄악을 행하는 인간들을 지옥도로 형상화한다. 8월 6일까지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이호인ㆍ연진영과의 3인전 ‘저녁의 시간’. 내가 국경이다/이문재 공증받으러 간다. 딸아이 필리핀 보내기 위해. 영문으로 된 주민등록등본에 잘 아는 꽃집에서 빌린 천만 원 넣은 통장 들고 공증받으러 간다. 겨울, 광화문 한복판이다. 왼손잡이 장군의 동상 앞 자동차들이 교차로 안에서 꼬리를 물고 있다. 지하도로 내려서는데 20여 년 전 나보고 밀항하라던 연극부 선배가 떠올랐다. 파리로 가서 판토마임 학교에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아무도 유학을 꿈꾸지 못하던 시절, 국경을 넘어온 사람이 아무도 없던 시절, 우리들은 모두 섬에 갇혀 있었다. 밀항. 배 밑창. 섬의 바깥. 최전방에서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만나고 있었다. 최전방을 국토의 최북단으로 알고 있었다. 군사분계선, 섬의 북쪽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해구였다. 밀항을 하지 못해 늘 밀항을 꿈꾸던 우리들은 한없이 작아졌다. 내일 돌려줘야 하는 천만 원짜리 통장 사본 제출하고 유학 비자 받아 나오는 길, 어린 딸아이에게 필리핀 비행기 티켓을 쥐여 주는 손은 과연 누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엎드림/지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엎드림/지연

    엎드림/지연 비 그치고 새 소리는 실 한 줄 꽃잎이 열리는 소리는 실 네 줄 이쪽에서 저쪽으로 소리 매듭을 만들며 날아간다 바람이 솔잎 살갗으로 건너올 때 나는 몇 줄로 이 세상에 수를 놓고 있나 아무 색도 없이 방범창에 방울방울 그믐 숨소리로 흔들린다 실패에 감긴 실의 후회는 아무것도 아니리 살아 있는 순간은 아름다움을 내 귀에 꽂은 날이니 구름 솜에 꽂힌 녹슨 바늘이어도 좋다 오늘은 추리닝을 입고 물방울을 바라볼 일 산동네 골목 마을 입구에서 작은 책방을 보았다. 며칠 전까지 보지 못한 책방이다. A4 크기의 나무판에 ‘취미는 독서’라는 상호가 적혀 있다. 두 평 남짓 서가에 신간 시집과 그림책들이 놓여 있다. 도라지꽃을 닮은 주인에게 어떻게 이런 곳에 서점을 낼 생각을 했느냐 물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사흘 뒤 다시 서점에 들렀다. 개업 후 다섯 권은 팔았느냐는 질문에 영업비밀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살아 있는 순간은 아름다움을 내 귀에 꽂은 날’이라는 아름다운 시 구절이 들어 있는 시집을 ‘취미는 독서’에서 구했다. 세상에는 꿈만 먹으며 낮게 엎드려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백합의 선물/최승자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백합의 선물/최승자

    백합의 선물/최승자 언젠가 한 점쟁이가 내게 말했었죠 “당신은 전생에서 이생으로 내려올 적에 길가에 난 백합꽃을 꺾었어. 백합꽃 꺾은 죄로 이생에서 이 고생을 하는 거라구” 가끔씩 힘들 때마다 “내려오다 백합은 왜 꺾어 이 고생이누, 아니 하필이면 내가 내려오는 그 길에 백합은 왜 피어 있었누” 라고 생각했지만, 그 참 이제 보니 그건 아름다운 상징일 수도 있다는 생각 드는군요 아니 상징이 아니라 어쩌면 필연이었다는 하필이면 거기에 백합이 피어 있었던 것도 하필이면 내가 그것을 꺾어 갖고 왔던 것도 어쩌면 필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고통이 정화된 그 자리에 백합 한 송이 피어나, 이제 비로소 그 존재를, 그리고 용도를 내게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내가 당신의 힘을 빌려 내 무수한 전생들 그리고 이생에서 보냈던 모든 시간들을 폐지해 버린 자리, 내 마음의 작은 빈터 안에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꽃, 백합꽃을 선물로 놓아 드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 한 송이 백합이 어느 날 넘실대는 환한 빛 덩어리로 풀려 버릴 수 있길 바라면서 백합은 초여름의 꽃이지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난 결심했어/메리 올리버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난 결심했어/메리 올리버

    난 결심했어/메리 올리버 난 산속에 집을 마련하기로 결심했어 추위와 정적 속에서 편하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저 높은 곳에 그런 장소에서는 계시를 발견할 수 도 있다고 하지 정신이 추구하는 걸, 정확히 이해하진 못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느끼게 될 수도 있는 곳 물론 천천히, 난 휴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냐 물론 그와 동시에 지금 내가 있는 곳에 머물 작정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 결심은 초여름 석양 무렵 불어오는 남풍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작으면서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꿈을 현실에 옮기는 거죠. 너무 큰 꿈은 태풍을 피하기 위해 요트를 혼자 선창에 올려놓는 일과 같죠. 그러니 결심은 작고 부드러운 일부터 하세요. 작은 결심들이 모이고 모여 언젠가 큰 결심의 순간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는지요. 산 높은 곳, 계시를 발견할 수도 있는 곳으로 잠시 떠나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있는 곳에 계속 머무를 거라는 사실이죠. 지금 내가 머무는 곳, 그래요, 모든 삶의 시작은 바로 이곳이지요. 누추하고 영혼의 핍박이 있는 곳. 그곳에서 생의 새로운 계시는 시작될 것입니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완전한 뜰/김유정 · 아리랑 도계/박잎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완전한 뜰/김유정 · 아리랑 도계/박잎

    프레스코화를 중심으로 식물의 힘, 생명과 문명의 관계를 성찰적으로 바라본다. 6월 12일까지 서울 송파구 KS갤러리. 아리랑 도계/박잎 시커먼 분진으로 뒤덮인 도계역 하늘은 무섭게 푸르르고 철로 변을 걷다 보면 저만치 걸어오는 장의사 집 겨울밤 나는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께 시린 이야기를 들었다네 산 사람 팔을 자를 수 있어? 그때 갱도가 무너질 때 내가 병갑이 팔을 잘랐으면 살 수 있었어 툭 투둑, 갱이 무너지고 난 차마 도끼를 들지 못했지 유언이 뭐였는지 알아? 마누라 재혼해서 잘 살라고 장성병원 영안실에서 네 살짜리 어린 아들은 제 엄마 소맷자락을 꼬며 웃고 있었어 진눈깨비 내리는 밤 아리랑 고개가 떠나간다 슬픔을 위로하는 법은 시가 지닌 주요한 기능 중의 하나입니다. 인생은 슬픔을 위로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지요. 하나의 슬픔을 극복하고 다가오는 불행을 극복해 나가는 동안 생은 민들레꽃 핀 들판과 호수를 만나게 되겠지요. 긴 꼬리를 단 열차가 무지개 핀 초원을 달리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주에게 쏟아 놓는 아픈 이야기는 삶의 회한입니다. 다시 같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채송화가 한창입니다/김영미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채송화가 한창입니다/김영미

    채송화가 한창입니다/김영미 ‘눈길이 멀면 명길 짧다’는 할머니 말씀이 피었다 노랑 저고리 분홍 치마 입으신 할머니 어린 눈에 할미가 하늘만큼 이뻤다 낮은 곳에 산 채송화 하늘이 멀었다 여름 속을 뛰어든 꽃씨 저 세상으로 든 그 저녁 씨 뿌리지 않은 마당에 안티푸라민 냄새가 나를 업었다 눈길이 멀면 명길이 짧다. 평범한 우리네 어르신들의 말씀입니다. 세상 사는 이치가 새록새록 스며 있습니다. 높은 뜻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이는 평탄한 삶을 꾸리기 힘듭니다. 대충 눈 감고 사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마음속에서야 어찌 ‘눈길이 먼 삶을 살아라’라고 말하고 싶지 않겠는지요. 채송화는 키가 작은 꽃입니다. 마당 앞이나 장독대 주위에 분홍색 노란색 빨간색 흰색으로 핍니다. 한국인 마음속의 색이지요. 키는 작아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싶은 꽃. 그래요, 눈길이 멀면 명줄이 짧다, 이 말은 눈길을 짧게 가지고 살라는 말이 아니라 몸집은 작아도 눈길만은 높고 길게 살라는 우리 어르신들 지혜의 말씀 아니겠는지요.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아버지, 거시기/김정숙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아버지, 거시기/김정숙

    아버지, 거시기/김정숙 그이의 등목을 해주다가 앙상하게 마른 아버지의 잔등을 지켜보네 쥐 잡듯이 자식들을 키우시던 아버지 걸핏하면 부리부리한 눈 부릅뜨시던 아버지, 세상에서 제일 무섭던 아버지 늙어 꼬부라진 뒤에는 내게 몸을 맡기셨지 내 몸 좀 씻겨다오 목욕 좀 시켜다오 목욕 다 마치도록 끝내 팬티는 못 벗으시다가도 아버지 괜찮아요 제게 맡기세요 그런 뒤부터는 며느리에게는 못 맡겨도 내게는 몸을 맡기시던 아버지, 거시기 이제는 아버지 거시기도 훠이훠이 저 세상으로 날아갔고, 오늘 욕실에서는 아버지 대신 그이의 등목을 해주네 그이의 여윈 등 자가격리 일주일 동안 걱정이 있었다. 비둘기 밥을 어떻게 하나? 성동교 다리에 사는 비둘기 한 쌍 새끼를 낳았다. 부모는 갈대 줄기를 물어다 둥지를 만들었다. 둥지 안에 아기 비둘기 둘 자라고 있다. 먹성 좋은 새끼들을 위해 부모 비둘기가 얼마나 부지런 떨어야 하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가격리를 마친 날 비둘기 둥지 앞에서 눈과 입을 크게 벌렸다. 한 주일 전 풋사과만 하던 새끼들의 몸집이 애호박만큼이나 커져 있던 것이다. 둘은 둥지에서 날개를 펴 보이며 날 준비를 하기도 했다. 모이를 주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새뱅이 찌개/신언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새뱅이 찌개/신언관

    새뱅이 찌개/신언관 가을 일 끝나고 얼음 얼기 전 이맘때 댕댕이넝쿨 바구니와 얼기미 들고 마른 억새 된서리 헤치며 논둑 따라 둠벙에 가면 방개가 저쪽 끝으로 도망가고 송사리 떼가 새까맣게 물을 튀기는데 가장자리 슬쩍 훑으면 톡톡 튀는 새뱅이 한 웅큼 올라온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송사리와 새뱅이 한 사발 내기 그리고 쌀방개 몇 마리 금세 바구니 가득 챙겨 젖은 발 시린 줄도 모르고 엄마한테 뛰어간다 열한 살 꽁꽁 언 발 아궁이 앞에서 녹이고 있으면 이듬해 먼 곳으로 가버린 엄마는 빨간 새뱅이찌개를 만든다 새뱅이찌개 새뱅이찌개. 혼자 중얼거리는데 기분이 좋아지네요. 음식 이름을 듣고 시가 좋아지기는 백석의 시 ‘국수’ 이후 처음입니다. ‘국수’를 읽고 있으면 내가 조선 사람이라는 의연한 자부심이 들지요. 새뱅이는 민물새우입니다. 어린 시절 고무신으로 새뱅이를 잡고 놀았지요. 새뱅이는 작고 귀엽고 살빛이 사랑스럽습니다. 새뱅이를 생각하니 나도 엄마 생각이 납니다. 새뱅이는 이 땅의 산하에 이 땅의 어머니들이 풀어놓은 하고많은 그리운 우리들의 얼굴인지도 모릅니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타임 피스/레베카 애크로이드 · 하얀 감꽃은 누이를 닮았다/정훈교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타임 피스/레베카 애크로이드 · 하얀 감꽃은 누이를 닮았다/정훈교

    독일 페레스프로젝트 갤러리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 중구에 분점을 열고 개관전 ‘스프링’을 개최한다. 5월 11일까지. 하얀 감꽃은 누이를 닮았다/정훈교 돼지 머릴 삶는 가마솥 위로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목소리는 낡은 옛집이 물에 잠기듯 어둑어둑하고 푹 고은 살과 뼈는 무릎처럼 허물어져 어둑어둑 잠기고 팔팔 끓는 이마를 짚어보다가도 이내 또 어둑어둑해지는 쇠죽을 쑤는 무쇠솥과 붉은 아궁이를 안으며 어둑어둑 당신이 온다 감나무에서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별 하나 지상으로 떨어진다 밤새 푹푹 잠기던 길은 마을 하나를 재우고서야 아득해지는 이 별에서 이별을 생각하는 당신이 더욱 아득해지는 아침 아궁이에 밀어 넣은 감자 하나가 어둑어둑 굴러 나온다 오늘따라 아랫목도 덩달아 어둑어둑해지는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군불을 더 넣으신다) 어릴 적 내 살던 마을에서는 감꽃을 감또개라고 불렀지요. 감또개가 피는 철엔 감나무 아래 모여 하루 내내 놀았습니다. 감또개는 촉촉하고 단맛이 있지요. 꽃잎 살이 통통해 식감이 좋았습니다. 한 줌 두 줌 따먹다 보면 횟배가 가라앉았지요. 감또개를 엮어 꽃목걸이를 만들기도 하고 꽃반지를 만들기도 했지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권누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권누리

    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권누리 나는 최선을 다해 최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차갑게 튀기는 빛을 헤치며 걷는 숲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환하고 포근한 풍경에 나는 꽤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같아 꼭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입 다물고 걸으면 금세 최악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많았다. 너도? 너도 여기 있었구나. 신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엾게 봐 주셔서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준 거야 우리는 몹시도 기쁜 마음으로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뜨거운 물로 잠깐 바짝 우려낸 차 하지만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최악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구나 그렇게 말했을 때 누군가,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이야기했고, 아니야, 우리는 이미 최악으로 와 있잖아, 그런데 여기보다 더 먼 곳이 있으면 어쩌지 그리고 저 멀리에서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최악으로 걸어오는 아는 얼굴들이 어른어른 보였다. 새벽 3시. 강 건너 아직 잠들지 못하는 집들이 있군요. 항상 같은 집 같은 창에 불빛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안쓰러운 느낌 들지요. 이 시각에 무얼 하시는지요. 심야 TV를 보시는지요. 시를 쓰거나 책을 읽으시는지요. 그냥 불면에 시달리는지요. 불면으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할머니 듀오/김영진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할머니 듀오/김영진

    할머니 듀오/김영진 목욕탕에 다녀오시나, 할머니 두 분 껍질 벗긴 삶은 계란마냥 하얗고 말간 얼굴로 서로 정담 나누시며 걷는다 동생, 이제 집에 가면 뭐 할랑가? 뭐 하긴요, 시장에나 갈라요 장에는 뭐 하러 갈라고 그란가? 영감 팔러 갈라 그라요 엥, 얼마에 팔라고 그란디? 오천만 원만 주면 팔라고 그라요 오메야, 팔릴랑가 모르것네 그란디 그 돈 받으면 어디따 쓸라고? 천만 원짜리 영감 있으면 바꿀라고 그라요 목욕 바구니 나란히 든 두 분 구부러진 등 위로 햇살이 깔깔깔 빛난다 목욕 가방을 든 해맑은 얼굴의 두 할머니. 봄 길 걸어가며 얘기 나누신다. 집에 가면 뭐 할 건가? 목욕탕에서는 서로 등 밀어 주고 요구르트도 먹고 찐 달걀도 먹고 세상 사는 이야기 참 좋았을 터였다. 집은 목욕탕보다 더 심심한 곳일지 모른다. 영감 팔러 시장에 간다는 답이 따른다. 평생 애를 썩인 영감은 오늘도 할머니의 속을 썩였을 것이다. 얼마에 파는데? 5000만원. 동무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팔리면 뭐할 텐데? 1000만원짜리 영감 있으면 바꿀 거다. 대화 속에서 메주 뜨는 눅진한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할머니는 장에 가서 속을 썩인 영감이 좋아하는 국을 끓이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책 없는 빈방을 꿈꾸다/장석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책 없는 빈방을 꿈꾸다/장석주

    책 없는 빈방을 꿈꾸다/장석주 모래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책이 홍수처럼 밀고 들어온다, 책이 내 발밑에, 욕조에, 내 식탁에, 당신과 사랑하는 침대 속에, 책의 문자들이 쏟아져 서걱거리는 방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책의 우울을 마시고 책의 슬픔을 덮고 잔다. 잠 속까지 막무가내로 쫓아 들어오는 까마귀 떼, 까마귀들은 내 피를 마시고 꿈마저 남김없이 쪼아먹는다. 책이 나를 학대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책을 이길 힘이 없고 몇 번의 실수를, 몇 번의 비리를 눈감을 수밖에 없었다. 저 무례한 책들을 무찌르고 순결한 이마로 이깔나무 숲에 나갔더라면 나는 지금보다 나은 인간이 되었으리라. 책 없는 빈방에 있었다면 아마도 훨씬 더 깨끗하고 멋진 인간이 되었으리라. 한때 집과 작업실을 책으로 채워 놓고 이곳에 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차를 타고 가며 책을 읽었고 설산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책을 읽었다 자운영 핀 언덕에 앉아 농부가 쟁기질하는 모습을 보며 책을 읽은 적도 있다. 부끄럽고 민망한 시절의 일이다. 우크라이나의 병원과 극장에 미사일이 날아와 터진다. 피난민들과 임산부와 아기들이 들어찬 건물이다. 학살에 나선 이들도 청춘 시절 꿈과 사랑의 책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찬란한 무지개/이유진 · 목단/이영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찬란한 무지개/이유진 · 목단/이영은

    물 위에 표류하는 이미지를 통해 타인에게 둘러싸여 살면서도 내면의 고립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정서를 담는다. 4월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본화랑. 목단/이영은 먼지 내린 옛집 뒷마루 앉아 겨울 햇살 비스듬히 메주콩을 가려낸다 보리밥 삶는 냄새 대나무 바구니 기둥에 걸린다 잔치상 한가운데 누구도 손대지 않는 맑고 가난한 동치미 한 그릇 엄마는 꽃이 되었을까 고사리 같은 그리움 지문으로 찍힌다 옛 마당 뜰 여느 해처럼 목단꽃 피어 엄마 냄새 맡는 오후가 지고 있다 목단꽃과 자운영 꽃은 함께 핀다. 보라색 꽃 무더기 사이를 걸어가며 내가 인간이기 이전을 생각하고 인간이 된 이후를 생각한다. 바람이 불면 보라색 꽃 무더기들이 해일처럼 달려든다. 꿈 같은 이 현실이 좋다. 인간이 된 이후 내가 꾼 꿈들을 더듬어 보는 시간이 부끄러운 것이다. 어디선가 보리밥 삶는 냄새가 나고 먹빛 소반 위에 맑은 동치미 한 그릇이 놓인다.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나도 이 세상도 없었을 것이다. 시도 사랑도 별도 눈물도 없었을 것이다. 봄날의 목단꽃밭 속에 사랑하는 세상이 있다. 파랑새가 날아가고 보랏빛 바람이 불고 지상의 소금이라고 믿는, 사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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