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라일락 꽃 속의 연인들/김송이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라일락 꽃 속의 연인들/김송이

    라일락 꽃 속의 연인들/김송이 누가 우주에서 이쪽을 향해 손전등을 켜고 있어 늪으로 푹푹 쏟아지는 빛에 등을 맞댄 채 우리는 젖지도 않고 익사를 맹세했네 그럴 때 우리, 헐렁한 서로의 옷에 핀을 찌르며 웃었지 바짝바짝 꽃이 튀네 붉은 라일락이 맨 등을 문지르고 우리가 뒤집힌 낙하산에서 잠을 잤다는 사실을 빨래줄에 달랑 널어놓은 속옷처럼 들키고 싶었네 배 위로 물뿌리개가 지나는 동안 어둠이 수평선에 휘발유를 부으며 지나가는 동안 우리의 섬은 점점 솟아오르며 멀어져가지 사다리로부터 층계로부터 라일락, 라일락, 빵처럼 부풀던 둥근 밤에 샤갈의 그림, 사랑스럽고 신비합니다. 어떤 고통의 순간도 사랑과 신비함으로 해석해 낼 수 있다면 그 시는 독자의 마음을 훔칠 것입니다. 시 속의 연인, 라일락 꽃 덤불 속에서 봄밤을 지샜군요. 낙하산을 뒤집어쓴 것처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으나 자랑처럼 들키고도 싶었지요. 지나가는 배 위에 소나기 내리고 수평선에 휘발유를 부으며 동이 터 오릅니다. 당신, 한때 봄꽃나무 아래 밤을 새워 본 적 있는지요? 없다면 잘못 살았군요. 그래요, 이번 주말 봄꽃나무 아래 랜턴 세우고 앉아 헤세나 릴케, 동주나 백석을 읽음은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장미/김재학 · 희망/김규동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장미/김재학 · 희망/김규동

    희망/김규동 일정 때 두만강변 회령 경찰서 취조실에서 흘러나오던 그 사나이 비명은 어째서 아직도 내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는지 6ㆍ25 때 한강을 헤엄쳐 건너온 백골부대의 한 병사가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던 일은 어째서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는지 지난날 38선을 넘을 때 안내꾼에게 준 할아버지의 회중시계는 아직도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지 해체된 풍경 속에 잃어버린 것은 스승과 눈물과 후회뿐인 줄 알았더니 추락하여가는 내면의 눈에 번개같이 스치는 것은 깨끗한 한 개의 희망이다 스산한 나뭇가지에 빛의 다른 한쪽이 머무는 것을 보고 무서운 경이를 느낀다 그것은 내일을 향한 순간의 전율 푸른 공간의 전락을 뒤로 부서져 내리는 차가운 유리조각 오, 희망을 위하여는 비참한 것을 넘어서야 한다 동천을 따라 걷습니다. 냉이 민들레 제비꽃 꽃다지 금창초…. 강변의 꽃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산수유 벚꽃 목련 개나리 골단초 꽃들 정신없습니다. 강변에 앉아 햇볕 쬐며 담소 나누는 동무들 모습이 보입니다. 평범한 이 시간 얼마나 소중한지요. 한때 봄꽃들 절망으로 바라본 시절 있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는 너다 182/황지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는 너다 182/황지우

    나는 너다 182/황지우 비오는 날이면, 아내 무릎을 베고 누워, 우리는 하 염없이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젤 좋아하는 노래는 강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 바다로 간다 는 동요이다 그 방주 속의 권태롭고 지겨운 시절이, 이제는 이 지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었던 지복한 틈이었다니! 넓은 세상 보고 싶어라 화엄의 넓은 세상 들어가도, 들어가도, 가지고 나올 게 없는 액체의 나라 나의 오물을 지우는, 마침내 나를 지우는 바다 지상에서 처음 마련한 차, 르망 스페셜이었다. 시쟁이 그림쟁이 다섯 타고 성철 스님 다비식 갔다. 돌아오는 비포장 길 펑크가 났다. 핸드폰 없던 시절. 한 시쟁이가 공구함을 꺼내 타이어 교체를 시작했다. 땀 뻘뻘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는 모습 보기 좋았다. 지복인 줄 모르고 스쳐 보냈던 순간들. 그 순간이 문득 화엄의 순간으로 다가오는 때 있다. 들어가도 들어가도 가지고 나올 게 없는 액체의 나라. 나의 오물을 지우고 마침내 나를 지우는 나라. 차체 아래 들어가 타이어의 나사를 조이던 시쟁이, 그 무렵 이 시를 썼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젤로 좋은 때는, 숨/김청미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젤로 좋은 때는, 숨/김청미

    젤로 좋은 때는, 숨/김청미 게으름 피지 말고 부지런히 내쉬면 되지라 그것이 뭣이 어렵다고 그라고 엄살이오 워메 이 양반이 어째 말을 이라고 험하게 해부까 나라고 그리 안 해봤겄소 그것이 암상토 안 할 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쉽지라 가슴이 쑤시고 씀벅거림서부터 요상시럽게 안 되야 시상사가 다 그렇지만 소중헌 줄 모를 때가 질로 좋은 때여라 그때 챙기고 생각허고 애껴줘야 해 한번 상하면 돌리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 넘치고 썽썽할 땐 모다 모른단 말이오 요로케 되고 본께 숨 한번 지대로 쉬는 것이 시상에 질로 가볍고 무거운 것이여 시골 약국에 노인 손님이 찾아와 약사에게 말한다. 숨쉬기가 힘드오. 약사가 말한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부지런히 쉬면 되지 무슨 엄살이오. 약사와 손님은 오랜 구면일 것이다. 위아래 집에 사는지도 모른다. 사실 손님은 꼭 약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폭폭증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약사는 그 내력을 안다. 그래서 손님의 이야기를 다 받아 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다 받아 주는 것. 그보다 더 좋은 약이 있을 것인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 소중한 줄 모를 때라고 숨쉬기 힘든 손님은 이야기한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앵두나무와의 가위 바위 보/심재휘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산앵두나무와의 가위 바위 보/심재휘

    산앵두나무와의 가위 바위 보/심재휘 동네 입구 꽃집 구석에는 잔가지들을 함부로 거느린 나무가 있어서 오고 가는 길에 볼품없더니 산앵두나무란다 산을 버리고 꽃집 구석의 화분에 발목도 없이 웅크리고 앉아 제 몸을 파는 산앵두나무 한철 노숙을 제 얼굴에 드리우고 있어서 많이 야위었다 여기었더니 삼월 어느 저녁엔 나를 불러 연두 주먹을 내보인다 이내 주먹을 펴 보인다 다음엔 필경 분홍의 무언가를 낼 심사인데 나는 연두도 분홍도 못 되는 기껏 빈 손바닥을 쳐다보다가 무엇을 내도 필패이려니 싶어 그냥 그 나무 옆에 집 없는 사람처럼 서 있다가 왔다 젊은 시인은 꽃집 구석에서 만난 산앵두나무와 가위바위보 하려다 멈춥니다. 처음엔 꽃 아직 안 핀 산앵두나무가 어리숙해 보여 가위바위보를 하면 이길 것 같았지요. 그 순간 자신의 삶 생각합니다. 집, 사랑, 결혼, 직장, 여행…. 모든 싸움에서 이긴 적 없습니다. 산앵두나무와의 가위바위보 또한 필패하지 않겠는지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궁핍과 사랑. 젊은 날 시인이 운명적으로 사랑하고야 말 덕목 아니겠는지요. 나 가위바위보 하면 꼭 져 줄 착한 물앵두나무들 꽃피는 마을 알고 있지요. 오세요, 봄에 그곳에서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숲 13/허수영 · 진주/한용운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숲 13/허수영 · 진주/한용운

    숲 13/허수영 45.5×53cm, 캔버스에 유채, 2018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과. 광주신세계미술제 대상 진주/한용운 언제인지 내가 바닷가에 가서 조개를 주웠지요 당신은 나의 치마를 걷어 주셨어요 진흙 묻는다고 집에 와서는 나를 어린아이 같다고 하셨지요 조개를 주워다가 장난한다고 그리고 나가시더니 금강석을 사다 주셨습니다, 당신이 나는 그때에 조개 속에서 진주를 얻어서 당신의 적은 주머니에 넣어드렸습니다 당신이 어디에 그 진주를 가지고 계셔요, 잠시라도 왜 남을 빌려 주셔요 조개 줍는 이의 치마를 걷어 주는 일,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살아가는 일, 꿈의 역사이지요. 오늘은 꿈을 먹고 내일은 꿈을 찾습니다. 찾다가 필경 좌절을 만나지요. 광활한 생의 바다에서 우리는 매 순간 진주조개를 찾습니다. 살 속에 아픈 진주를 기르고 있는 조개를 찾아서는 당신의 주머니에 은빛 진주를 넣어드리지요. 우리 생이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때. 진주를 찾는 당신 곁에 머물며 남빛 치마 걷어 주는 때. 인간이, 시가 꿈꾸는 시간 아니겠는지요? 그런데 만해 선사는 어쩌자고 당신이 진주를 누군가에게 빌려준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인간 냄새가 납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우리 좋은 날/이영지 · 동행/윤석진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우리 좋은 날/이영지 · 동행/윤석진

    우리 좋은 날 /이영지 60×60cm, 장지에 분채, 2017 한국화가. 성신여대 대학원 동양학과 석사. 개인전·그룹전 다수 동행 /윤석진 저기, 저 비행하는 새들을 보아라 저들이 대열을 이루는 것은 외로워서가 아니다 길을 몰라서도 아니다 함께했던 고단한 수만 리의 시간들 저들은 몸으로 기억한다 기나긴 여로, 같은 운명을 선두를 다투지 않는 누가 낙오하는 것도 원치 않는 저 새들, 날아가다 지치면 맨 뒤로 자리 바꿔 동료들이 만든 상승기류에 날개를 얹는다 천적이 나타나면 제 살길 찾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더 견고하게 대열을 짓는 천년만년 한가지로 변함이 없는 더 빨리 더 오래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는 저들의 비행 보아라 내 사랑이여 내가 사는 강변 마을에서 시오리 걸으면 바다가 나온다. 이십 년 전에는 동무들과 술 한잔하고 새벽녘에 걸어서 그 바다에 이르곤 했다. 갈대밭이 우거진 바다는 철새들의 천국이다. 재두루미나 고니 같은 아름다운 새들도 볼 수 있다. 저물 무렵 철새들은 군무를 춘다. 송이눈이 내릴 때의 군무는 신비하다. 어느 아침 이어폰을 낀 한 서양 할머니를 만났다. 뭐 하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두 개의 그림자/유희경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두 개의 그림자/유희경

    두 개의 그림자/유희경 그래서 당신, 어둠과 그림자를 감춘 창문 앞에 함부로 당신의 슬픔을 담은 몸을 세워 놓고 낱낱이 살펴보려고 할 때, 나누어진 어떤 것, 정신이기도 하고 폐허이기도 한 정적이 망막을 통과해 더 깊은 안쪽으로 사라지려는 것을 보았는지 외투 입은 겨울과 그 겨울이 끌고 온 추억과 딱딱한 사람 그는 당신이 아니다 어찌해도 당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쏟아진 그늘이다 그늘이 가린 어떤 사람의 사라진 어깨다 창문은 너무 많은 것을 담고 흔들린다 바람이 부는 것이다 당신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갈라진 검은 흔적이 매달려 다시 이곳은 고요 그러니 비와 바람이 몰아치고 창은 흔들린다. 창 곁에 선 검은 영혼의 그림자 하나. 한때 우리 모두는 어두운 창 곁에 선 영혼의 수인이었다. 덜컹거리는 창문의 소리를 뼈에 새기며 정신이기도 하고 폐허이기도 한 그 무엇과 뜨거운 악수를 한다. 눈물이 습한 뼈에 덜컹거리는 소리를 새길 때 우리는 비로소 창밖의 세계와 조우할 수 있다. 창. 신과 인간의 약속. 아무리 흔들려도 고요는 온다. 그러니 그러니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아름다운 태양 아래로 가라/사라 키르시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아름다운 태양 아래로 가라/사라 키르시

    아름다운 태양 아래로 가라/사라 키르시 아름다운 태양 아래로 가라, 기교를 부리지 말고 죽어라, 집을 무너뜨려라 망설이지 마라 나의 회색빛 돌고래는 저편 해안으로 헤엄쳐 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돌고래는 자기 앞으로 바다를 불어내었고, 갖은 재주를 피우며 헤엄쳤다 물결이 철썩였다 이제 돌고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해안은 소금딱지로 변했고 텅 비었고 돌고래를 잃어버렸다는 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제 출구를 알지 못한다 - 사라 키르시는 분단 시절 동독의 시인이다. 분단의 아픔을 밝고 투명한 상상력의 언어로 노래했다. 독일이 한 몸이었을 때 돌고래는 끝없는 해안을 따라 헤엄쳐 갔다. 물살을 타는 몸짓은 자유로웠고 물을 뿜는 휘파람 소리는 아름다웠다. 파도의 집을 무너뜨리고, 기교를 부리지 않고 살아도 좋았다. 한순간 독일의 해안은 소금딱지로 변했고 돌고래의 춤은 사라졌다. 어느 누구도 출구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이 찾아온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그렇다. 돌고래의 춤은 사라지고 사랑 잃은 허탈한 사람들이 반도의 좁은 땅 안에서 헛기침을 한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쾰른 성당/김민정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쾰른 성당/김민정

    쾰른 성당/ 김민정 우리 둘의 이름으로 초를 사서 우리 둘의 이름으로 초를 켜고 우리 둘을 모두 속에 섞어놨어 우리가 우리를 몰라 신은 우리를 알까 우리 둘은 우리 둘을 알까 모두가 우리가 우리인 줄 알겠지 우리 둘도 우리가 우리 둘인 줄만 알겠지 양심껏 2유로만 넣었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할 때. 세상이 우리 둘인 줄만 알 때, 우리 빼곤 세상이 다 시시해질 때, 인간은 무명에서 벗어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바보 같은 명제에서 벗어나는 순간 순명의 시간이 온다. 둘이 있으니 참 좋은 것. 둘 둘 둘 모여 서로 좋아하니 시냇물 같고 무지개 같은 것. 세상의 모든 둘이 좋으면 그곳이 천국인 것. 다른 둘을 상처 내지 않고 다른 둘의 빵과 물을 빼앗지 않고, 둘 둘 둘 서로 어깨를 걸고 하늘 높은 곳으로 오르는 것. 인간의 심연에 따뜻한 햇살의 바다를 펼치는 것.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한 잔의 서울을 들이마시오/신현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한 잔의 서울을 들이마시오/신현림

    한 잔의 서울을 들이마시오/신현림 나무마저 없다면 이곳은 딱딱한 피자 한 덩이요 삭막하오 요즘 사람들은 폭탄 같소 성이 나 있소 마음 못 다스리는 나도 죄인이지만 부익부 빈익빈 골짜기를 더 깊게 만든 그대들의 죄업도 심각하오 “사람들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카뮈의 말을 실감하오 잘못을 인정하는 솔직함도 어둠 속에 길을 내는 건데 마음은 코끼리 가죽처럼 두꺼워지고 뻔뻔해지오 당신은 성실한 의사예요 토요일까지 일하고 일요일 하루 쉬지요. 그래 강남에 30억 집 샀지요. 축하해요. 참 잘했어요. 이런 게 인생이지요. 힘들게 공부해서 사시에 합격한 당신 밤낮으로 재판정 드나들고 전관우대 받으며 강남에 번듯한 집 마련했지요. 축하해요. 이런 게 인생이고 말구요. 학생운동 출신인 당신, 출세한 정치가 되어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한 덕에 강남에 집 샀지요. 국회의원이라고, 장관이라고 강남에 살면 안 되나요. 장관도 가족이 있고 인생이 있는 거지요. 힘든 연습생 시절 7년을 보내고 당신은 아이돌 스타가 되었죠. 행사비, 저작권 사용료, 광고료가 무럭무럭 쌓여 강남북 부동산들 사 모았죠. TV가 당신의 재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설날 아침에/김남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설날 아침에/김남주

    설날 아침에/김남주 눈이 내린다 싸락눈 소록소록 밤새도록 내린다 뿌리뽑혀 이제는 바싹 마른 댓잎 위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린다 더러는 마른자리 골라 눈은 떡가루처럼 하얗게 쌓이기도 하고 닭이 울고 날이 새고 설날 아침이다 새해 새아침 아침이라 그런지 까치도 한두 마리 잊지 않고 찾아와 대추나무 위에서 운다 까치야 까치야 뭐하러 왔냐 때때옷도 없고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 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좋은 소식 가지고 왔거들랑 까치야 돈이며 명예 같은 것은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나 죄다 주고 나이 마흔에 시집올 처녀를 구하지 못하는 우리 아우 덕종이한테는 행여 주눅이 들지 않도록 사랑의 노래나 하나 남겨두고 가렴 남주형, 경자년 새해 아침이에요. 그곳은 좀 살 만하신가요? 이곳은 여전해요.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내 몫 챙길 방법 찾느라 정신없어요. 민주화가 꿈이었던 80년대보다 더 황폐해요. 아니에요, 여기 너무 좋아요. 살 만해요. 덕종이도 장가갔구 말구요. 미안해요. 당신이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저녁길/정영주 · 화물자동차/김기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저녁길/정영주 · 화물자동차/김기림

    저녁길 / 정영주 91×65㎝, 캔버스 위에 한지, 아크릴. 2015 서양화가, 한지를 이용해 달동네 풍경 묘사 화물자동차 / 김기림 작은 등불을 달고 굴러가는 자동차의 작은 등불을 믿는 충실한 행복을 배우고 싶다 만약에 내가 길거리에 쓰러진 깨어진 자동차라면 나는 나의 노트에 장래라는 페이지를 벌써 지워버렸을 텐데 대체 자정이 넘었는데 이 미운 시를 쓰노라고 베개 가슴을 고인 동물은 하느님의 눈동자에 어떻게 가엾은 모양으로 비칠까? 화물자동차보다 이쁘지 못한 사족수四足獸 차라리 화물 자동차라면 꿈들의 파편을 거둬 심고 저 먼 항구로 밤을 피하여 가기나 할 터인데 나무는 한 자리에 서서 생애를 마친다. 겨울엔 흰 눈을 머리에 이고 봄이면 꽃을 피운다. 여름이면 무성한 잎과 그늘을 드리운다. 나뭇잎 속에서 밀화부리가 노래할 때 내 마음은 새로운 시의 꿈으로 뛴다. 가을이 되면 색색의 단풍이 물든다. 한 여행자가 걸음을 멈추고 배낭 속에서 피리를 꺼낸다. 시오리 떨어진 역에서 국경으로 가는 기차가 달려온다. 나무처럼 살았으면 싶다. 김기림에게 화물 자동차는 나무다. 평생 누군가의 짐을 나른다. 땀도 흘리지 않고 경사진 언덕을 올라갈 때 가끔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낡은 벽시계 / 고재종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낡은 벽시계 / 고재종

    낡은 벽시계 / 고재종 사회복지사가 비닐 친 쪽문을 열자 훅 끼치는 지린내, 어두침침한 방에서 두 개의 파란 불이 눈을 쏘았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산발한 노인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보이고, 노인의 게게 풀린 눈과 침을 흘리는 입에서 알 수 없는 궁시렁거림, 그 위 바람벽의 사진 액자 속에서 예닐곱이나 되는 자녀 됨 직한 인총들이 노인의 무말랭이 같은 고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마지막으로 모여들게 되는 그 무엇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이 귀착점에서 일주일에 세 번씩 고양이의 형광에 저항하며 노인의 극심한 그르렁거림을 지탱시키느라 사회복지사는 괘종시계 태엽을 다시 감는다 *** 인도 콜카타에 ‘파라곤’과 ‘마리아’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가 있습니다. 빈대가 바글거리고 유리창이 깨져 밤이면 비둘기가 방까지 들어오지요. 세상에서 가장 허름한 이 여행자 숙소는 콜카타 배낭여행자들의 성지로 불립니다. 여행자들의 다수는 이른 아침 빈대에 물린 살갗을 비비며 마더 데레사 하우스로 출근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이 임종을 맞이하는 장소지요. 젊은 여행자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모습,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삶이 궁핍하세요? 절망적이라구요? 두세 달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매화/박정만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매화/박정만

    매화 / 박정만 매화는 다른 봄꽃처럼 성급히 서둘지 않습니다 그 몸가짐이 어느 댁 규수처럼 아주 신중합니다 햇볕을 가장 많이 받은 가지 쪽에서부터 한 송이가 문득 피어나면 잇달아 두 송이 세 송이… 다섯 송이 열 송이 이렇게 꽃차례 서듯 무수한 꽃숭어리들이 수런수런 열립니다 이때 비로소 봄기운도 차고 넘치고, 먼 산자락 뻐꾹새 울음 소리도 풀빛을 물고 와서 앉습니다 먼 산자락 밑의 풀빛을 물고 와서 매화꽃 속에 앉아 서러운 한나절을 울다 갑니다 *** 금둔사 매화가 생각나는군요. 납월매라 불리는 이곳 홍매화는 눈 속에서 핍니다. 함박눈이 내려 쌓일 때 한 줌의 눈을 코에 대면 매화 향기가 은은합니다. 먹물 옷 입은 사내가 어디서 왔소? 물으며 차 한 잔을 내는군요. 어젯밤 함박눈 쌓이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사내는 말합니다. 함박눈 소복소복 쌓이는 소리. 겨울밤의 시 아니겠는지요. 이 몇 해 금둔사에 눈이 오지 않습니다. 눈 속에 피는 조선 홍매화를 보기 힘들게 되었지요. 새해에 흰 눈이 많이 내려 사람들의 마음 안에 매화 향기 소롯했으면 싶습니다.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엽서/성춘복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엽서/성춘복

    엽서/성춘복 어둔 눈에 호롱불 밝혀 놓고    늘    기    억 사    하 노    며 라 잘디잘게 써 보냈지    또 꽃씨마다 불 심지를 꽂아    앞    서 뒤    거 서    나 거      나 가슴 속 깊은 데 묻어두었지 *** 한 해가 저문다. 힘든 시간들과 싸우며 버텨낸 것 그 이상 중요한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올해 반도 안 8000만의 사람들 흔들리는 촛불처럼 살았다. 일본, 미국, 중국으로부터 차이고 까인 시간들 잊지 말자. 손바닥에 호호 입김을 불며 서로의 손을 따숩게 잡아 주자. 세월의 어둠 안에 작은 호롱불 밝혀두고 늘 기억하며 사노라, 사랑하는 이에게 엽서를 쓰자. 힘든 당신, 곁에 있으니 참 좋았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가을 밤 줍기/정춘자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가을 밤 줍기/정춘자

    가을 밤 줍기/정춘자 오늘 아침 산에 가서 밤을 주웠다 밤이 너무 너무 많았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주웠다 재미나서 힘든 줄도 몰랐다 점심 먹고 삼밭에 갔다 사반리 삼밭에 가서 지붕을 내리고 봉고 타고 대산 삼밭에 가서 지붕을 내리고 또 봉고 타고 나성 삼밭에 가서 또 지붕을 내렸다 사만 원 받았다 돈이 사람 죽인다 멀미 나서 죽을 뻔했다 저녁 먹고 학교에 왔다 *** 고창군 해리면의 바닷가에 나성리라는 마을이 있다. 비단 라(羅), 별 성(星). 별들이 비단처럼 펼쳐진 마을, 마음이 따스해진다. 이 마을의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에 서울에서 출판쟁이를 하던 부부가 내려와 책마을 도서관을 열었다. 정춘자 할머니는 이 도서관을 학교 삼아 글도 배우고 시도 쓰게 되었다. 봉고차에 몸을 싣고 이 마을 저 마을 삼밭을 쫓아다니며 지붕을 내리고 일당 4만원을 받는다. 돈이 사람 죽인다는 말 아프게 다가온다. 좋은 시는 망치와 끌로 마음 안 지석에 깊은 홈을 낸다. 나성리 곁 동호나 구시포에서는 서해의 노을을 보며 백합조개로 끓인 담백한 죽을 먹을 수 있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눈/구르몽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눈/구르몽

    눈/구르몽 시몬 눈은 네 맨발처럼 희다 시몬 눈은 네 무릎처럼 희다 시몬 네 손은 눈처럼 차다 시몬 네 마음은 눈처럼 차다 눈발을 녹이던 뜨거운 키스 언 마음 녹이던 작별의 키스 눈은 소나무 가지 위에 쌓이고 네 이마와 머리카락 위에 쌓이네 시몬 눈은 고요히 뜰에 잠들었다 시몬 너는 나의 눈, 나의 자장가 *** 이발소에서 처음 이 시를 읽던 초등학교 시절, 이 시가 좋았다. 낡은 바리캉이 머리를 뜯어나갈 때 눈을 찡그리며 계속 이 시를 읽었다. 시몬이란 이름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영희, 숙자, 정님이 등 동네 아이들 이름과 느낌이 달랐다. 나중에 더 자라 뽀뽀를 하게 되면 영희나 숙자보다 시몬과 하는 게 가슴이 설렐 것 같았다. 그 시절 내 마음 안에 이국정서라는 개념이 싹텄는지 모르겠다. 이발소에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시도 걸려 있었다. 내가 별이 되었을 때 내 시의 하나가 어느 궁핍한 나라의 후미진 이발소에 붙어 있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곽재구 시인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도박/황순원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도박/황순원

    도박 / 황순원 간밤에 나는 밤새도록 꼬박 얼굴이 없는 한 사나이와 노름을 했다 따고 잃고 그러다가 그만 내 밑천이 다 나가고 말았다 예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밑천이 떨어지자 갓 결혼한 아내의 패물을 내다 처분했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의 도박을 통해 그간 적잖이 세상적인 것을 날려온 터라 이제 정년 퇴직금쯤 어렵잖게 들이대었다 땄다 잃었다 날이 샐 즈음해선 그 역시 깡그리 날려버리고 말았다 얼굴이 없는 사나이와 나는 쉬 다시 만나 한판 또 붙자고 악수를 나눈 뒤 헤어졌다 다음 밑천으론 내 아직도 연연해있는 마지막 세상적인 것을 몽땅 디밀 참이다 얼굴이 없는 사나이가 앉았던 자리에 내 데드마스크가 빙긋이 웃고 있었다 *** 추석이 지나고 첫서리가 내린 다음날 저녁 숟가락을 내린 뒤. 어머니는 내 생일을 이렇게 말했다. 전쟁 끝나고 1년 뒤. 물자는 부족했고 삶은 만만한 구석이 없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세상엔 별의별 일이 많았다. 기쁨보다 슬픔, 희망보다 절망, 그리움보다 고통. 탄식 속에서 살아온 이유, 이 시를 읽으며 문득 깨닫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얼굴 없는 사내와의 도박. 절대 승리할 수 없는 삶과의 대결. 세상적인 것을 몽땅 디밀며 펼치는 마지막 승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블루투스 기기 1개가 연결되었습니다/김은지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블루투스 기기 1개가 연결되었습니다/김은지

    블루투스 기기 1개가 연결되었습니다 / 김은지 영국은 외로움을 관리할 전담 장관을 뽑았다고 한다 파란빛이 도는 블루투스 문양을 따라 그린다 이런 무늬는 누가 만들었을까 바쁘시죠 내가 먼저 묻는 건 기꺼이 외로움을 선택하고 싶어서 혼자 밥을 잘 먹고 일기장을 버릴 수 있고 책에서 가붓하다라는 단어를 발견했을 때 메모장에 적어 두었지만 오늘은 듣고 싶었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담담하게 엄마가 돌아가신 얘기를 하며 이사해야 하는 사정을 말하는데 달빛이 드리우는 방에 산다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싶었다 두 시간씩 전철을 타고 와 후회를 털어놓고 요즘 듣는 노래를 물어보는 밤 켠 적 없는 블루투스가 연결되었다 ***낙엽이 바람에 날린다. 주위에 외로운 사람들 많고 많다. 영국처럼 외로운 이를 전담할 정부 부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동무여, 은행잎 날리는 벤치에 앉아 지난날 읽었던 시집을 꺼내 읽자. 동네의 작은 카페에서 소중한 이에게 손수레에서 산 구리반지 하나를 선물하자. 완행열차를 타고 산마을에 들어 밤하늘의 별을 보자. 그래도 외로울 것이다. 어찌하랴? 우리가 지닌 외로움, 생의 동무인 것을. 곽재구 시인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