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만/심천(深泉)(148×165㎝, 한지에 수묵, 2012)
전 홍익대 미술대학원장, 전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시야에 안개가 끼고 다리는 갈대처럼 흔들린다.
백기를 목에 두르고 나에게 손짓하는 자 누구인가? 피의 맛과 땀의 맛이 입안에 고인다.
미각으로 느끼는 야릇한 혼돈이 머릿속에 피안의 무늬를 그린다.
오래 단련한 근육은 수수깡같이 허무하고, 여차하면 숨이 까맣게 막히는 지옥이 있다.
누가 나에게 박수와 야유로 가학적 희망을 논하는가?
납덩이를 동여맨 발목이 흐느낀다 전 생애를 비틀거려 주저앉는 외딴섬
헐떡이는 심장을 가까스로 올려놓는 자그만 섬. 저기, 남은 라운드가 적적하다.
***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링 위에 외롭게 선 권투선수와 같다.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우리를 괴롭히고 일본은 등 뒤에 야비한 방식으로 칼을 꽂는다. 1894년 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의 기관총에 맞서 장태(대나무로 엮어 볏짚을 채운 통)를 굴리며 죽창으로 싸웠다. 패전 뒤 동학 부역자라는 명목으로 살육을 당한 흰옷 입은 사람들의 피로 반도의 산하는 붉게 물들었다. 당신은 지금 권투선수의 스툴(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에 앉아 있다. 그날의 비극을 답습할 것인가. 마우스피스를 다시 끼고 벌떡 일어나 싸우자. 다시는 야만족에게 우리의 생목숨을 건네지 말자.
곽재구 시인
2019-08-09 26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