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들은 이미 삶을 반납했다
움직일 공간이 없으면 움직일 생각도 사라지는지
분홍빛 삶이 푸대자루처럼 포개져 있다
트럭에 실려가는 돼지들은
당신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가
짝짓기 직전 개들의 표정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의 눈망울에서
당신은 어떤 비애를 읽어내는가
아니, 그 표정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 도시의 트럭들은
너무 많이 싣고 너무 멀리 간다
엿가락처럼 휜 철근들과
케이지를 가득 채운 닭들과
위태롭게 쌓여 있는 양배추들과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원목들을 싣고
트럭들은 무엇을 실었는지도 잊은 채 달린다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 죽음 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
첫눈이 왔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이 착해지네요. 눈 덮인 하얀 세상을 바라보는 것 겨울이 준 축복입니다. 길들 지붕들 가로수들 택배 오토바이들 위에 눈이 수북이 쌓입니다. 빨간 십자가를 켜고 눈을 맞는 교회당의 모습도 춥지 않군요. 이런 날 시골집 아랫목에 앉아 할머니가 구워 준 고구마 먹으며 눈 덮인 들판을 바라본다면, 낙원이겠지요. 하나도 어렵지 않은 일이 왜 꿈이 돼 버렸는지. 시 속의 풍경 끔찍합니다. 이 도시의 트럭들은 너무 많은 소 닭 돼지들을 싣고 어디론가 달립니다. 무엇을 실었는지도 모른 채 달리는 트럭들도 있습니다. 적재함에 실린 비참한 가금류의 모습, 행선지도 모른 채 미친 듯 달리는 트럭들. 한때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던 인간의 모습 아닐까요.
곽재구 시인
2020-12-1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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