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가을, 그리고 겨울/최하림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가을, 그리고 겨울/최하림

입력 2020-12-03 17:34
수정 2020-12-04 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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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리고 겨울/최하림

깊은 가을 길로 걸어갔다
피아노 소리 뒤엉킨
예술학교 교정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고
언덕과 집들 어둠에 덮여
이상하게 안개비 뿌렸다
모든 것이 희미하고 아름다웠다

달리는 시간도, 열렸다 닫히는 유리창도
무성하게 돋아난 마른 잡초들은
마을과 더불어 있고
시간을 통과해 온 얼굴들은 투명하고
나무 아래 별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슬픔으로
사물이 빛을 발하고 이별이 드넓어지고
세석細石에 눈이 내렸다
살아 있음으로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시간들이 가서 마을과 언덕에 눈이 쌓이고
생각들이 무거워지고
나무들이 축복처럼 서 있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언제나 저렇듯 무겁게
내린다고, 어느 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눈이 떨면서 내릴 것이다
등불이 눈을 비출 것이다
내가 울고 있을 것이다

오래된 마을에 첫눈이 내릴 때, 마을의 낡은 지붕들과 나무들, 꽃이 진 화단 위에 누군가 커다란 붓으로 흰색의 페인트를 바르기 시작할 때, 우두커니 서 있는 교회당의 첨탑 위 붉은 십자가가 외롭게 반짝일 때. 골목 모퉁이 붕어빵을 굽는 이가 우두커니 하늘을 볼 때, 연인들이 붉은 벙어리장갑 안에 함께 손을 넣을 때, 서로 만난 손가락들이 꼼지락거릴 때, 허리 굽은 한 사람 눈밭 위에 구둣발로 쓴다. 미안해 사랑해.

곽재구 시인
2020-12-0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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