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 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취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 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른다
차차 시골 동리 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진 햇살이 산 위를 걸어 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우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서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내려 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비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수영, 잘 지내나요? 그곳도 여름 아침이 오는가요? 여긴 눈이 많이 오고 당신이 모르는 바이러스의 이름이 세상 곳곳을 횡행해요. 가난한 이들은 은행 문을 두드리거나 저녁의 거리에서 울며 시를 쓰곤 해요. 햇볕 좋은 날 무씨를 뿌리던 고향 생각을 하죠. 산언덕 능선에 핀 무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 있죠. 연보라색 무꽃 밭에 바람이 일면 세상이 천국 같아요. 시간 나면 이곳에 놀러 와요. 와서 ‘거대한 뿌리’,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며’ 같은 씩씩한 시 한 편 눈 오는 거리에 뿌려요.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이곳에서 함께 웃으며 사진 찍어요.
곽재구 시인
2021-01-2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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