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차서 벅차서 무거워서 땅이 되었다
새가 나무가
빗방울이 되었다 어느새 집에 갈 시간이 되었나?
진실한 사람에게 기대어
그를 베개 삼아 처음을 보냈다
진실한 사람? 사람이 어떻게 진실할 수 있나요?
그러해도 살아남을 수 있나요?
다음엔 낯선 얼굴들이 놀러 왔나요?
땅 좀 달라고 나무 좀
새나 빗방울 좀 달라고 말하던가요?
저리 가! 저리 가! 외치셨나요?
피가 다른데
함부로 얻어먹으면 죽을 수 있다고 말했나요?
당신은 혹시 아름다운 사람인가요? 뭐요?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요? 꽃처럼
수명이 짧다면 모르지만
사람의 아상(我相)이란 헛것이다. ‘나’를 우주의 중심으로 믿고 끌어안고 사는 것은 그림자놀이나 마찬가지다. ‘나’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낯설다.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 개체적 동일성으로 이루어진 ‘자아’는 헛것일 뿐만 아니라 실패의 궤적, 불우의 흔적, 소외의 리듬이다. 운명의 돛을 올리고 키를 잡고 방향을 가늠하며 어딘가로 데려가는 것은 ‘나’가 아니라 ‘나’를 구속하는 시간이다. ‘나’는 진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본디 그것이 헛것,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찰나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림자와 같은 것일 뿐.
장석주 시인
2018-06-1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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