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엘레지의 추억/손성진 수석논설위원

    한국인의 피에는 한(恨)이 녹아 있다. 슬픈 분위기의 전통가요, 엘레지(elegy)는 한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 우리의 부모 세대가 엘레지를 좋아한 것은 한 많은 그들의 인생이 노래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혼의 엘레지’, ‘용두산 엘레지’ ‘해운대 엘레지’…. 1960년대는 애절한 곡조가 심금을 울리는 엘레지 전성기였다. “황혼이 질 때면 생각나는 그 사람 가슴 깊이 맺힌 슬픔 영원토록 잊을 길은 없는데….” 가수 이미자의 ‘황혼의 부르스’라는 엘레지를 알게 된 것은 어릴 적 모친을 통해서였다. 흥얼거림을 자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락이 귀에 익게 됐다. 가끔은 노래방에서 부를 정도의 애창곡이 된 것도 순전히 모친 덕이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가 데뷔 55주년 기념 콘서트를 얼마 전에 열었다. 원곡 가수의 목소리로 ‘황혼의 부르스’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동백 아가씨’라는 한 맺힌 노래를 부른 불세출의 가수는 건재했다. 그래도 이제 칠십대 중반의 노년이고 모친은 내년이면 팔순이 된다. 노래는 변함이 없는데 세월은 무심히도 흘렀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호저(豪猪) 딜레마’/정기홍 논설위원

    지인에게 작은 부탁을 했더니 세상 돌아가는 물정도 모르냐는 말투다. 한마디를 더했다. 그의 직장에서는 서로 간에 부탁하지 않는 게 오랜 분위기란다. 농번기에 품앗이하던 순정의 시절도 아니고 이권에 개입돼 망신당하기 십상인 요즘이다. 다소 매정했지만 그의 지적이 신선하게 다가선다. 고슴도치와 비슷하게 생긴 호저(豪猪)의 무리들은 한밤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의 체온을 느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잠을 잔다고 한다. 꼭 껴안고 자고 싶지만 몸에 난 가시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만든 것이다. 가까울수록 어렵게 대해야 한다는 ‘호저 딜레마’란 철학적 우화로 더러 인용된다. 논어에도 ‘군주를 섬기고 벗을 사귀면서 너무 잦으면 욕된 일을 당하거나 멀어진다’는 경구가 있다. 허물없다며 거리낌없이 말하는 그때 친구는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다. 한 젊은 지방의원이 친구에게 자신이 돈을 빌린 채권자를 살인해 달라고 한 사건이 연일 귓전을 때린다. ‘살벌한’ 이해관계가 득실한 세태다. 나의 부탁을 거절한 그와의 ‘이인동심’(二人同心)이 오래갈 듯하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민심/오승호 논설위원

    과음을 한 다음날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하는데 60대 기사의 품평이 마음에 와 닿는다. 11억원짜리 아파트 분양 현수막 문구를 보더니 비판 일색이다. 우리나라에 돈 많은 사람이 많지 않다면서 핵가족 시대인데 큰 아파트가 왜 필요하냐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 달라진 가족 풍속도까지 동원했다. 결혼한 자녀가 부모 집에 들러도 잠을 자지 않고 가버리는 게 요즘 세태이니 20평대면 충분하다면서 분명히 미분양될 거란다. 지하철로 출퇴근할 때마다 시민들의 생활이 팍팍하다는 점을 느낀다. 차량에서 승객들이 다 내리기도 전에 먼저 타는 이들을 본다. 지하철역 계단에는 ‘좌측 보행’, ‘우측 보행’ 표시가 있지만 출근 시간대에는 유명무실하다. 계단 밖으로 나오는 인파가 전부 점령해 버리기 일쑤다. 질서의식을 따지기 이전 ‘얼마나 마음의 여유가 없고 삶이 각박하면 저럴까’라고 생각해 본다. 퇴근시간대엔 술이 얼큰하게 취한 승객들이 위정자들을 나무라는 소리도 종종 들린다. 교통비도 아끼지만 노력하지 않고도 민심을 읽을 수 있어 좋다. 그 어느 때보다 민심의 가치를 귀하게 여길 시기인 것 같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길섶에서] 7월의 잡초 제거/문소영 논설위원

    텃밭을 일구는 재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7~8월 잡초 제거하는 재미도 끝내준다. 혹시 분노 관리에 문제가 있다면 유기농 하는 농부네를 찾아서 잡초 뽑기 자원봉사라도 권유하고 싶은 수준이다. 7월의 잡초는 4~5월 잡초와 달리 땅에 깊게 뿌리박는다. 6월 망종 무렵 벼 모내기 철에 내리는 초여름 비를 맞고 자란 잡초이기 때문이다. 가뭄을 뚫고 견딘 끈질긴 잡초이자 생존의 요령도 잘 보여준다. 잡초 중 참비름과 쇠비름 부류는 잡아채면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듯 줄기가 뚝뚝 끊어져 뿌리를 보존한다. 그러나 바랭이와 볏과의 잡초들은 깊게 뿌리를 내리면 위아래로, 좌우로 마구 흔들어 흙이 얼굴에 튈 정도까지 흔들어 뽑아야 하는데, 근육통이 생겨 허리를 잘 펴지 못할 때도 있다. 힘을 쓰다가 엉덩방아를 찧기도 한다. 이렇게 진땀을 빼면서 잡초를 뽑고 나면 기분이 개운해진다. 낫을 쓰지 않고 힘을 쓰는 이유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쌓이는데 정치가 이를 개선해 주지 않으니 주말마다 텃밭의 잡초를 뽑으면서 화를 삭인다. 언제쯤 덤덤해질 것인가.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주머니 속 몽당연필/박찬구 논설위원

    몽당연필을 잃어버렸다. 새끼손가락에서 손톱 하나 더한 길이의 몸피다. 뒤지고 훑어도 헛일이다. ‘오호통재(痛哉)라’까지는 아니어도 저리고 짠한 상실감은 어쩔 도리가 없다. ‘너’는 바지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손바닥만 한 스프링 수첩과 단짝이었다. 검은 스프링들이 만든 반원형의 공간 속에 머문 지 반년이 넘었다. 느닷없는 ‘너’의 부재로 수첩은 생뚱맞은 객(客)의 처지가 돼 버렸다. 한적한 샛길을 걸을 때나, 비좁은 전철에서 앉아가는 호사를 누릴 때나, 나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들어앉은 몽당연필은 순간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단상을 수첩에 옮기곤 했다. 글이 직업인지라 기록은 문장이 되고 글감이 되고 주제가 됐다. 명징하지 못한 의식이 비뚤어지게나마 온전할 수 있었다. 40쪽이 넘도록 수첩에 손때를 남기는 사이 갈색 연필의 표면은 낡고 바랬다. 하릴없다. 필통에 들어 있는 다른 연필을 만지작거린다. 어색하지만 다시 정을 붙일 수밖에…. 그리 마음먹고도 기억은 낯을 가린다. 뜸을 들이며 뒤를 돌아본다. 그는 언제쯤 ‘너’가 될 수 있을까. 박찬구 논설위원 ckpark@seoul.co.kr
  • [길섶에서] 농활/박홍환 논설위원

    지난 주말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충북 충주의 한 마을에서 농활 중인 대학생들을 만났다. 4박5일 일정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옥수수와 복숭아 수확기를 맞아 일손이 크게 부족한 농촌 마을에 어설픈 손길이나마 보태겠다는 생각이 기특했다. 취업준비, 스펙쌓기 등에 바쁜 학생들이 외면한다고 해서 농활의 명맥이 끊긴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돌아와 찾아보니 올해도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의 여름방학 농활이 한창이라고 한다. 수만명의 젊은 학생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노동의 가치, 농촌의 현실 등을 어슴푸레 깨닫는 소중한 시간을 갖고 있을 터다. 겨울의 혹독한 눈바람 속에서도 싱그러움을 잃지 않는 상록수처럼 건강한 청춘들이다. 그런데 1980~90년대의 전투적이고 치열했던 농활과는 사뭇 다른,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이색적이다. 학생들이 저녁 무렵 마을 작은 내에서 잡아온 피라미들을 내놓으며 “매운탕 좀 끓여 주세요”라고 애교 넘치게 부탁한다. 민폐를 끼쳐선 안 된다며 정성껏 가져온 부침개조차도 사양했던 경직된 농활에 비해 얼마나 인간적인가. 박홍환 논설위원 stinger@seoul.co.kr
  • [길섶에서] 언쟁의 뒤끝/정기홍 논설위원

    며칠 전에 편의점에 들렀다가 중년의 여직원과 언쟁이 있었다. 사야 할 물건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저런 게 있는데, 그게 뭐더라…”라고 두어 번 말한 게 화근이 됐다. 대뜸 “반말하지 마세요. 내 나이 사십이오”라며 빤히 노려본다. 무심코 한 말이 염장을 지른 게 분명하고, 제대로 한 방을 맞았다. 그녀의 자존심이 강해 보인다. 흥분은 서로의 감정을 갈라 놓았다. “얼굴을 보고 한 말도 아니고, ‘물건 줄래’라고 한 것도 아니잖소.” 분위기는 이어졌다. 말을 높였더니 “그렇게 잘하면서…”라며 심기를 건드렸다. “손님에게 과하지 않으냐”고 했더니 “그럼 이렇게 해야 하나요?”라며 허리를 90도로 숙인다. 이쯤 되니 열불이 난다. 그녀를 꼬나보며 “40대이시니 아줌마라고 불러도 되죠”라고 말했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중년여성에게도 ‘아줌마’란 말은 함부로 써선 안 되는 금칙어라고 하지 않는가. 이날 오고간 말의 꼬리가 참으로 얄궂었다. 그녀의 오버일까 나의 잘못인가.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른 게 말인 것을…. 화해하겠다며 몇 번을 가게에 들르는데 그 자리에 그녀는 없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망각/오승호 논설위원

    출근할 때 저녁 약속이 있는 점을 고려해 가장 깔끔한 양복을 골라 입었다. 그런데 퇴근 무렵 배가 출출해지더니 ‘식사를 하면서 소주나 한 잔 같이할 사람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번개 모임으로 한 명을 구하고는 식당으로 가면서 서너명에게 연락을 했다. 추가 인원을 모집하는 데는 실패하고 둘이서 한 시간가량 소주잔을 주고받고 있을 무렵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야 왜 안 와?” 대학 선배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오피니언 리더들과의 선약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30분 이내에 와야 한다는 주문에 소주 한 병을 더 시켜 마시고는 헐레벌떡 뛰어가서 택시를 잡았다. 동료의 배려로 위기를 무사히 잘 넘겼다. 망각곡선이란 게 있다. 학습을 한 뒤 시간이 지나면서 얼마나 기억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한 시간 뒤에는 44%를 기억했는데 하루가 지나면 34%, 이틀이 지나면 28%만을 기억한다던가. 아침에 떠올렸던 선약이 10시간쯤 만에 기억에서 사라졌으니 나에게 망각곡선은 급강하한 셈이다. 망각은 삶에 필요하다고 하지만 약속을 잊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길섶에서] 변신/문소영 논설위원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191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변신’에 나오는 외판원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거대한 곤충으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업에 실패에 큰 빚을 진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며 헌신하던 잠자는 곤충으로 변신한 순간부터 직장은 물론, 가족에게 외면당한다. 사과를 던져 상처를 입히는 아버지와 ‘저 괴물을 오빠로 생각해선 안 된다’며 부모를 설득하는 무의도식 여동생, 그의 죽음을 홀가분하게 받아들이고 여행을 떠나는 가족에게 상당한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40, 50대 중 헌신한 조직에서 배신당했다고 한탄하는 직장인들이 많은데, 소설 변신에서 확인한 가족의 변심을 교훈 삼으면, 2차 집단인 조직의 변심과 배신은 놀랄 일도 아닐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 ‘수명 100세 시대’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 오랜만에 한 현직 교수와 연락을 취해 보니 3년 전부터 650평 규모의 블루베리 농장을 만들고, 올해 첫 출하를 했단다. 20평 텃밭지기에게 농장 경영은 멋진 미래다. 인생 2모작이 필요한 21세기에 가족에게 버림받지 않을 ‘변신’을 모색해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냉면 산업’/서동철 논설위원

    지난주 일본기자 두 사람을 서울의 유명한 평양 냉면집으로 안내했다. 이들은 냉면이 처음이라고 했다. 맛집과 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기자들이니 품평이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냉면 그릇의 바닥이 반짝이도록 육수까지 깨끗이 비웠다. 한 마디로 맛있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에서도 냉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지만 먹어보니 상상했던 맛과는 달랐다고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맛있다는 뜻이었다. 평양냉면의 사리는 메밀을 주재료로 쓴다. 메밀국수(소바)를 즐기는 일본인들이니 냉면도 친숙했을 것이다. 냉면을 눌러서 뽑는다면 소바는 썰어서 만드는 것이 다를 뿐이다. 알고 보면 닮은 것은 더 있다. 냉면에 무김치를 곁들이듯 소바를 찍어 먹는 간장에도 무를 갈아 넣지 않는가. 무가 메밀의 독성을 완화시킨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터득한 공통의 지혜다. 그들은 도쿄에 이런 냉면집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집 수준의 냉면맛을 내는 집은 우리나라에도 열 곳이 될까 말까 하다. 고부가 가치 수출 산업으로 발전시키려면 국내 ‘냉면 산업’부터 부흥시켜야 할 것 같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농산물 선물/문소영 논설위원

    ‘시골 사는 시어머니가 농사지었다며 벌레 먹은 구멍이 숭숭 난 열무와 배추를 보냈다. 꾀죄죄하고 지저분하다’는 내용의 글이 수년 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농약 안 친 유기농이네요. 버릴 요량이면 택배비를 낼 테니 이 주소로 보내주세요”라는 댓글들이 달렸다. 필자의 의도는 ‘별볼일없는 농산물로 며느리를 욕보이는 시어머니’였겠지만 ‘소갈머리 없는 며느리’라는 비난이 난무했다. 대형마트에서 크고 깨끗하게 다듬어진 농산물만 접하는 도시 여성들은 ‘꾀죄죄한 농산물의 가치’를 잘 모른다. 텃밭을 시작하고서 그 비밀을 알게 됐다. 수경재배가 아닌 이상 수확한 채소는 흙이 묻는다. 깔끔 떤다고 수돗물에 씻거나 하면 쉽게 시들거나 상한다. 선물하기에 마땅치 않다. 이를테면 완두콩을 꼬투리째 선물할 것인지, 완전히 까서 완두콩만 선물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흙이 묻고 벌레 먹었는데 “유기농이야”하고 자랑하듯 내밀어도 상대방이 그 가치를 모르면 의미가 없다. 6월 말 텃밭에 고추, 하지감자, 상추 등 수확은 늘고 있고, 볼품없는 유기농산물을 어떻게 다 처치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이공계 입도선매/오승호 논설위원

    문·이과반 선택을 앞둔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대학을 쉽게 가고 나중에 취직을 잘하려면 이과를 가라”고 권유하곤 했다. 이공계의 대입 정원이 문과에 비해 훨씬 많았기 때문이리라. 자신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이과반을 택하기도 했다. 취업이 진로 선택의 척도였던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기업체들은 이공계 특정학과 출신들을 입도선매한다. 4학년 2학기 때는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 없을 만큼 졸업도 하기 전에 계약금을 주면서 ‘모셔가기’ 경쟁도 했다. 상경계 출신들도 취업률 100%를 기록할 만큼 몸값은 좋았다. 인문계 출신들이 기업체 신입사원 채용에서 홀대받고 있단다. 인문계 대졸 공채제도를 없앤 곳도 있다. 상경계의 명성도 위협받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정부도 대학 평가를 할 때 취업률을 따지다 보니 인문학이 설 땅은 좁아지기만 한다. 인문학의 부흥은 요원한가. 융합과 소통은 이 시대의 핵심 가치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나 비판적인 사고는 인문학에서 비롯된다. 학문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길섶에서] 바로미터/문소영 논설위원

    오랫동안 ‘바로미터’가 한글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영어 책에서 바로미터(barometer)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관피아 척결의 바로미터’라고 표현하듯이 ‘바로미터=잣대’로 이해했는데, 기압계라는 영어였다. 왜 이런 착각을 했을까. 처음엔 ‘영어실력이 부족했군’이라며 치워놓았다. 최근 원인을 찾아냈다. 1970년대에는 게임기나 컴퓨터 등 오락거리가 없었다. 읽을거리도 많지 않아 휘발유 냄새가 마음을 설레게 하는 조간신문 읽기가 최고의 오락이었다. 아빠가 읽고 치워둔 세로쓰기 조간신문을 사회면부터 왼쪽으로 넘기면서 1면 종합면까지 읽는데, 당시에 한자를 많이 섞어서 썼다. 한글도 갓 뗀 어린이는 요령껏 한자를 피해가 읽으며 어렴풋이 이해를 해나갔을 것이다. 그때 바로미터는 영어였기 때문에 한자로 표기할 수 없었다. 당시는 영어를 모르니 한자가 아니면 당연히 한글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영어를 남발하던 까마득한 선배 기자들 탓이었다. 문득 오해가 오해를 낳아서 잘못된 지식의 체계 위에서 착각하며 세상을 사는 게 아닐까 하고 걱정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회의/정기홍 논설위원

    싫든 좋든 조직인이면 단 하루도 건너뛰지 못하는 게 회의다. 이는 조직의 흔적이다. 회의 분위기와 참석자의 스타일은 다양하다. 처음부터 의견을 내는 이가 있고, 잠자코 있다가 말미에 툭 던지는 이도 있다. 회의 내내 말을 하거나 아예 안 하는 동료도 있다. 언제 입을 여는 것이 좋은 타이밍일까. 매사 그렇듯 시점은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데 중요한 포인트다. 심리 전문가가 일러준 진단이다. 관심 높은 안건에는 의견들이 나온 뒤에 요약식으로 말하는 것이 좋고, 관심이 적은 건 먼저 말한 뒤 가만히 있는 게 현명하단다. 중요도가 낮은 형식적인 회의라면 넓은 방에서,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는 브레인스토밍식 회의는 좁은 방에서 해야 많이 나온단다. 서로 가까이 앉으면 경쟁심이 유발된다는 논리다. 구글 등 IT업체에서 작은 회의공간을 만들어 놓은 것이 이 때문 아닌가 싶다. 역으로 굵직한 결정을 해야 하는 중역회의는 작은 방을 피해야 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럼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친밀도를 높이려면? 어둑해야 한다. 남녀 간에서도 증명되는 불멸의 공식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캠핑/박홍환 논설위원

    일상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무념무상, 번잡한 세상사를 잊는 것은 도시민의 로망이다. 하루나 이틀도 좋고, 정 시간이 없다면 한나절이라도 무방하겠다. 대자연과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재충전 효과는 충분하니까.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한다면 그 또한 큰 즐거움이다. 어떤 장애물도 없이 대자연과 마주할 수 있는 캠핑이 각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 캠핑장비 목록은 A형 스카우트 텐트와 코펠 등 식기류, 황동 석유버너 딱 세 가지였다. 여름방학이면 배낭을 둘러메고 친구들과 함께 바다며 계곡을 찾곤 했다. 소나무 숲은 비와 해를 피할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타프로 활용됐다. 야외 테이블이며 의자는 없어도 무방했다. 그렇게 소박한 캠핑을 즐겼다. 아들 녀석과 함께 낚시캠핑이라도 갈 요량으로 이것저것 장비를 챙겼다. 텐트와 타프, 가스버너, 코펠, 랜턴, 침낭, 매트…. 뭐 빠진 것 없나 궁리해가며 인터넷을 뒤져 몇 가지 장비를 더 사들였다. 짐이 한가득이다. 배낭 하나로는 어림도 없다. 새삼 학창 시절의 소박한 캠핑이 그리워진다. 박홍환 논설위원 stinger@seoul.co.kr
  • [길섶에서] 들풀의 깨우침/정기홍 논설위원

    히말라야를 찾은 여행객이 큰 산이 보일 때마다 “저 산의 이름이 뭐냐”고 안내원에게 물었다. “저건 산입니다.” 그의 대답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7000m 이상의 고봉이 많은 히말라야엔 그보다 낮은 산들이 지척에 널려 있다. 이곳 사람들에겐 이름 없는 언덕일 뿐이다. 하지만 히말라야의 작은 봉우리가 이들이 살아온 인생에 끼친 영향은 실로 컸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 ‘식물채집’을 많이 했다. 책갈피에 넣은 풀잎이 반듯하게 마르면 종이에 붙여 이름과 특징 등을 적어 개학 때 제출하던 방학숙제다. 이름을 몰라 어른들이 쓰는 단어(사투리)로 적어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잘못 알고 있는 게 적지 않다. 얼마 전에 이들을 ‘들풀’로만 남기기로 했다. 어설픈 식물채집이 오랜 기간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에서다.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법문했다. 산중 생활에서 비롯된 말씀일 것이다. 큰스님에게도 산과 물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안내원의 이야기와 들풀 채집 경험은 주위 환경이 무시될 수 없다는 소중한 가치를 일깨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노후 생활/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친구들을 만나면 퇴직 후에 무엇을 하며 여생을 보낼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화제에 오른다. 수명이 길어져서 직장 생활만큼이나 긴 노후 생활을 해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생계 걱정을 하면서도 전원생활에 대한 꿈을 대부분 갖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시골에 작은 집과 땅을 갖고 도시와 농촌을 오가는 ‘4도(都) 3촌(村)’ 생활이 이상적일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인의 은퇴 연령이 71.1세로 세계 2위인데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나 또한 그래야 한다면 자연을 가까이하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귀농생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대기업 간부를 하다 벌써 퇴직하고 농촌에 터를 잡은 친구가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은퇴 후 서울 근교에서 일본식 청국장 제조업을 하며 노후를 보내고 있는 선배는 가끔 메일을 보내 전원 소식을 전해온다. 엊그제엔 철을 모르고 일찍 핀 코스모스와, 같은 종자에서 작년과 다른 색깔의 꽃을 피운 접시꽃 이야기를 보내왔다. 글 속에 여유와 행복이라는 냄새가 폴폴 풍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진딧물/문소영 논설위원

    지난해 겨울 따뜻했던 탓에 애벌레나 알들이 얼어 죽질 않아 텃밭에 온갖 벌레가 너무 많다. 올해는 진딧물도 유난히 극성이다. 무농약 텃밭이라 칠성무당벌레들이 공격적으로 진딧물을 사냥하겠지만, 일손이 달리는 것 같다. 유기농 농부들은 진딧물 방제에 난황유 희석액을 사용한다. 목초액 희석액도 진딧물 제거에 좋지만, 무당벌레가 목초액을 싫어한다. 텃밭 5년째에 튼튼한 농작물에는 벌레가 덜 꼬인다는 걸 발견했다. 갓 모종해 뿌리내리기에 힘을 기울이는 호박이나 오이 잎사귀 뒤쪽에 새까맣게 진딧물이 꼬이지만,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잎사귀가 무성해지면 진딧물이 슬슬 떨어져 나간다. 암사자가 사냥하기 쉬운, 어리거나 건강 상태가 나쁜 초식 동물을 목표로 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건강한 농작물은 벌레들의 접근을 막는 방어 호르몬을 허약한 농작물보다 더 많이 분사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살이는 이처럼 상대적이다. 정부 여당의 수상쩍은 국정운영이 계속되는 것은 이를 견제할 야당이 무능하기 때문이다. 야당이 깐깐하고 유능하면 정부 여당도 눈치를 보면서 인선하고 정책을 펴지 않을까.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네탓·내 탓/정기홍 논설위원

    비빔밥을 먹으려고 들른 집 근처 음식점의 분위기가 제법 시끄러웠다. 뒷좌석에 인근 직장인 남녀 몇 명이 앉았는데 3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가 유독 높았다. 우람한 체격에서 뿜어 나오는 말이 뒤통수를 쳤다. “그 친구는 시키지 않으면 안 해. ‘그 자료 어디에 있어’ 해야 슬그머니 꺼내놓는 다니까.” 일부 동료도 동의한다. 술자리는 늘 이렇게 소란스럽다. 이래야 술 맛이 나는 것인가. 우리는 누군가를 흉보는 사람에게서 같은 흠결을 발견하곤 한다. 경험칙상 그렇다. 그날 선배한테 ‘씹힌’ 그 후배는 나쁜 직장인일까. 그 여성은 평소 ‘나 잘났다’는 듯 후배를 대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후배는 “나는 무능하니까 잘난 너 혼자 해라”며 수동형 인간으로 변한 건 아닐까. 그 후배도 남 흉을 보고 다닐까. 남 탓 하지 말자고 말은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너의 탓부터 먼저 나온다. 흉보는 말 중에는 나에게 그대로 돌아올 법한 것들도 적지 않을 텐데….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그게 너였고 나였다. 나이를 웬만큼 먹은 지금이라서 보일까. 어엿 지천명도 중반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가게 이름/문소영 논설위원

    회사 근처 음식점 이름이 ‘마이 엑스 와이프 시크릿 레시피’다. 해석하면 ‘이혼한 아내의 은밀한 음식 조리법’이라는 상호다. 미인은 소박을 맞아도 음식 솜씨 좋은 여자는 소박을 피한다던 조선시대적 발상은 스파게티와 수제 햄버거를 파는 가게에는 적용되지 않나 보다. 하긴 미인 헬레네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그리스의 신들까지 편 갈라서 ‘트로이 전쟁’을 일으켰던 고대 유럽을 생각하면 음식은 미인보다 2차적인 선택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혼한 아내의 음식이 얼마나 맛있으면 전 남편이 찾아와서 요리를 먹고 간다는 것인지 메뉴를 샅샅이 훑기도 하고, 이혼한 사이에 음식을 핑계로 서로 만나도 되는 것인지 하는 윤리적인 문제를 들춰 가며 농담을 한다. 재미난 음식점 이름이 많다. 국숫집인데 ‘면사무소’가 있는가 하면, 울산중공업 근처의 방자구이집은 ‘외식 중공업’이다. 돼지고기 구이집으로 ‘탄다무라’(탄다, 먹어라)처럼 사투리를 불교진언처럼 비틀어 쓰는가 하면 ‘저8계 콧9멍’이란 코믹 상호도 있다. 음식을 기다리며 가게 이름을 곱씹어보게 한다면 손님 유치는 성공하지 않을까.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