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붉은 달/문소영 논설위원

    지난 8일 밤 붉은 달이 떴다. 황사로 하늘이 뒤덮인 4월도 아닌데 10월에 휘영청 밝은 달이 어떻게 붉은 달이 되었나 싶겠지만, 개기월식(皆旣月蝕) 덕분이다. ‘만월이 이미 다 좀먹었다’는 뜻이지만, 한자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요즘 세대에게는 토털 루나 이클립스(total lunar eclipse)라는 영어 표현이 더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개기월식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들어가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인데 만월에만 일어난다. 달 그림자에 가려진 태양은 검은 해가 되지만, 지구 그림자에 가려진 달은 붉은 달이 된다. 태양광이 지구 대기층을 통과할 때 굴절돼 주로 붉은빛이 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서양 민담에 따르면 블러드 문(blood moon)이라 불리는 핏빛 붉은 달이 뜨면 늑대인간은 더욱 포악해진다고 한다. 동양에선 정변 등 불길한 징조였으나 이제는 우주쇼에 불과하다. 붉은 달을 보려고 지난밤에도 야외에서 술을 마셨건만 빌딩에 가려 보지 못했다. 누군가는 붉은 달을 하현달이 뜬 것으로 오해해 사진도 안 찍었단다. 2011년 이후 3년 만의 월식을 놓쳤으니, 내년을 기약해야겠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
  • [길섶에서] 연포탕/문소영 논설위원

    따뜻한 연포탕이 그리운 쌀쌀한 계절이 찾아왔다. 연포탕은 세발낙지로 유명한 전남 영암군에서 낙지에 각종 양념을 넣어 탕으로 끓여 먹는 향토 음식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전 국민이 낙지 철이 되면 애용하는 음식이 된 데다, 특히 술꾼들이 좋아하는 안주이자, 속풀이 국이다. 연포탕이라는 이름은 19세기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 나온다. “10월에 두부를 가늘게 썰고 꼬챙이에 꿰어 기름에 지지다가 닭고기를 섞어 국을 끓인 것”이라고 기록했다. 즉 원래 연포탕은 두부나 닭 요리였는데 요즘 낙지를 주재료로 한 탕으로 바뀌었다. 연포는 낙지를 통째로 삶으면 낙지의 8개 다리가 마치 연꽃처럼 분홍으로 물들면서 퍼지는 모습 때문이다. 즉 낙지를 통째로 삶지 않고 미리 토막 내 끓이면 연포탕에 대한 배신이 되겠다. 간밤에 서울 종로구 서촌 세종시장에서 더덕의 사포닌이 거품으로 올라온 ‘더덕 막걸리’를 야외에서 마시는데, 쌀쌀한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밤 10시도 전에 자리를 파했다. 주당들은 후일을 기약했지만 미나리와 청양고추를 듬뿍 넣은 연포탕이 있었더라면 막걸리 추렴이 더 길어지지 않았을까 하며 아쉬워했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감방의 여배우 사진/문소영 논설위원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은 숟가락으로 십여년간 벽을 파내려 가 탈옥에 성공했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알 수 없는 죄수를 찾아 텅 빈 감방에서 교도관은 우왕좌왕했다. 미국의 섹시 금발 여배우인 리타 헤이워드가 반쯤 벌거벗은 대형 포스터로 구멍난 벽을 가려놓았기 때문이었다. 포스터를 확 걷어냈더니 대형 굴이 나타났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이 쓴 단편 연작소설 ‘사계’ 중 ‘봄’이 원작인데, 소설보다 영화를 더 즐겁게 봤다. 조금 다르지만 한국에서도 ‘헐벗은’ 여배우 사진 사건이 있었다. 징역 10년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 죄수가 2012년 교도소 거실에 수영복 차림의 여자 연예인 사진을 붙였다. 교도관이 이를 제거하라고 수차례 지시했으나 불응했던 이 사건은 법정으로 갔다. 각각 한 번씩 이겼으나, 대법원은 포스터를 떼라고 했다. 교도소 부착물 허용 기준은 교도소장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수컷의 본능’을 주장했다는 10년 형의 죄수를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너무 엄격하게 여배우 사진을 제한한 것은 아닌가 싶다가도 거실이라서 그랬나 반문해본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유쾌한 사기극/서동철 논설위원

    요즘 버스를 타면 매일이다시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다른 가수보다 바리톤 김동규의 목소리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노래가 원래는 ‘봄의 찬가’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더니 “그걸 이제야 알았느냐”고 핀잔이다. 열심히 들었다. 1995년 시크릿가든이 ‘serenade to spring’(봄의 세레나데)으로 내놓으면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시크릿가든은 노르웨이 피아니스트 롤프 뢰블란과 아일랜드 바이올리니스트 피오뉼라 셰리로 이루어진 그룹이다. 그런데 뢰블란이 만든 이 연주곡은 1992년 노르웨이 가수 엘리자베스 안드레아센이 ‘Danse mot var’(봄에게 바치는 춤)라는 노래로 먼저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드레아센의 목소리는 매력 있다. 봄의 기운을 상징하듯 통통 튀는 가사의 라임도 인상깊다. 인간과 대지가 혼돈에서 벗어나 생명력을 되찾도록 하는 봄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이런 노래를 김동규가 부르면 영락없는 가을 정서로 탈바꿈하는 것이 신기하다. 물론 우리말 가사는 다시 쓴 것이다. 이런 ‘사기’는 당해도 기분 좋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
  • [길섶에서] 셀카봉/구본영 이사대우

    요즘 한국사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아이템은 단연 ‘셀카봉’이다.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도, 경기장에 나온 갑남을녀도 이것으로 소중한 순간을 남기느라 바빴다. 짧은 팔을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던 셀카 사진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게 했다. 한국사회에서 셀카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서비스(SNS)의 확산에 힘입어 확실한 자기 표현수단으로 자리 잡은 지는 오래다. ‘셀카봉’이 그런 셀카 열풍에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self+camera+봉’을 의미하는 ‘셀카봉’이란 신조어가 영어 셀피스틱(selfie stick)을 밀어낸 데서도 그 강도가 짐작된다. 셀카봉 덕분에 이제 여행지에서 쭈뼛거리며 옆 사람에게 카메라 셔터 한번 눌러달라고 부탁하던 일은 보기 어려워졌다. 낯선 타인과의 접촉 기회도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그래서 셀카봉 열풍이 과도한 나르시시즘과 외모지상주의 등 부작용을 빚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SNS에 자신의 멋진 모습을 올리려고 하루에도 수십 번 셀카 사진을 찍어대는 중독자들이 생겼다는 뉴스를 보니 기우만은 아닐 듯싶다. 구본영 이사대우 kby7@seoul.co.kr
  • [길섶에서] 투기/정기홍 논설위원

    재개발이 성해 투자 붐이 일 때 ‘준(準)복부인’이 있었다. 복부인이야 투기로 돈깨나 만진 아줌마이지만 이들은 숨은 존재였다. 동네 골목길의 물건을 찾아 훑는 아줌마 투기동아리쯤 된다. 돈 흐름을 잘 아는 은행원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아침 밥상을 물린 뒤 짬을 내 눈여겨보았던 곳을 찾아 나선다. 전문 투기꾼은 아니지만 골목 정보를 금방 알아내 소문이 퍼지기 전에 낚아챈다. 수시로 사업 진행 상황도 확인해 성공 확률이 높은 편이다. 아파트 한채 값을 번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집안일을 하면서 발품을 판 생활밀착형 투기인 셈이다. 의외이지만 투기(投機)란 단어는 본래 무소유의 깨우침을 강조하는 불교 용어다. ‘마음을 열고 몸을 던져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인데 지금은 ‘돈을 던져 기회를 잡는다’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집 근처에 대규모 마곡지구 개발이 한창이다. 출퇴근 때 원룸 투자를 권하는 전단을 자주 받는다. 투자를 할까 말까, 남을까 손해 볼까. 마음은 머뭇거린다. 부처님은 뭐라 할까. 물욕에 물들지 마라고 머리를 두어대 쥐어 박을까. 사는 게 지나는 찰나(刹那)이긴 하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연탄배달/문소영 논설위원

    1980년대 중반, 서울로 올라와 살던 첫 번째 집이 잠실의 아파트였다. 당시 서민용 13~17평의 아파트는 대부분 아궁이를 갖춘 연탄 난방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5층짜리 아파트에서 그게 가능했을까 신기하다. 나중에 연탄보일러로 바뀌었지만, 때맞춰 연탄을 갈아주지 못해 번개탄의 매운 냄새에 혼쭐이 나기도 하고, 불붙이기에 실패해 냉방에서 자기도 했다. 가을이 되면 부엌에 딸린 작은 광에 연탄을 200장 정도 들여놓았는데, 겨울을 날 채비가 끝난 터라 마치 큰 부자가 된 것 같이 흐뭇했다. 우주여행이 현실화하는 놀라운 세상이지만, 달동네 서민들의 난방은 여전히 연탄이다. 신문 1면에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연탄배달 사진은 아주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삭풍이 불어도 연탄 한 장에 방구들을 따뜻하게 하고 온 가족이 쉬는 모습을 상상하면 머릿속에 옥시토신이 쏟아지는 것처럼 온화해진다. 어려운 이웃에게 연탄을 선물하는 민간단체의 운동들이 적지 않다. 돈만 내지 않고, 직접 배달도 하도록 장려한다. 사랑은 행동하고 경험해야 더 커진다. 올가을 연탄배달로 땀 흘리는 사랑을 하면 어떨까.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미스킴 라일락/구본영 이사대우

    벌써 가을 초입인데 봄꽃 뉴스를 접하다니…. 이른 아침 조간신문을 뒤적이다 라일락에 대해 쓴 기사를 접하고 잠이 확 달아났다. 미 군정청 식물 채집가가 1947년 북한산에서 야생의 털개회나무 종자를 채취해 미국에서 원예종으로 개량해 이름도 ‘미스킴 라일락’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본래 한국 토종인지도 모르고 봄마다 코끝을 간질이는 라일락 향기에 취했나 보다. ‘수수꽃다리’란 예쁜 우리말 이름도 잊어버린 채 말이다. ‘미스김’도 아닌 ‘미스킴’이란 개량종 라일락의 호칭이 한국과 미국 사이의, 어중간한 국적을 말해주는 듯하다. 며칠 전 평창에서 생물다양성협약(CBD) 당사국 총회가 개막됐다. 생물주권 보호가 총회의 큰 이슈라고 한다. 토종 수수꽃다리가 미스킴 라일락으로 둔갑해 역수입되는 사례가 반복되는 게 우리에게 달가울 리는 없다. 문득 ‘생물주권’ 못잖게 우리네 인생살이에서도 ‘줏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화이부동(和而不同·남과 화합하되 자신의 바른 원칙은 지키는 것)이란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리면서. 구본영 이사대우 kby7@seoul.co.kr
  • [길섶에서] 마지막 번역 수업/문소영 논설위원

    지난 8월 말에 시작한 주 1회의 번역공부가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있다. 어느 분야나 좋은 선생님을 만나야 제 길을 갈 수 있다. 호러·서스펜스 장르소설의 영어 번역가로 속도가 빨라 출판업계에서 ‘번역기계’라는 별명을 붙인 조영학씨는 안성맞춤 선생님이었다. 그가 제시한 ‘번역의 ABC’는 한국어의 어법과 어순, 표현에 맞게 번역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수동태 표현이나 지시대명사가 남발되면 안 된다. 또 ‘형용사+명사형’으로 번역하기보다 ‘부사+동사형’으로 번역해야 한국어법이라는 거다. 흔히 저자의 의도를 반영해 직역했다거나 번역자가 독자를 위해 의역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는 오로지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이 있다고 했다. 납득이 간다. 또 “영어책을 번역하면 한글책으로 분량이 30%가 늘어난다”는 출판계의 주장은 진실이 아니었다. 한글이 영어보다 비효율적인 언어인가 의심했는데, 번역자의 한국어 능력이 떨어지는 탓이다. 좋은 번역은 오히려 5% 정도 분량이 줄어든다. 영어번역 수업의 또 다른 묘미는 엉터리 번역 책마저 읽고 이해할 수 있다는 거다. 나이를 먹어 배우는 재미는 더 쏠쏠하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요령부득/정기홍 논설위원

    무릇 일과 행동엔 시말(始末)이 있다. 시작과 끝 간에는 잘잘못이 무던히 들고난다. 그런데도 잘못을 갈무리하는 건 미숙한 편이다. 세월호 유족과 대리기사 간의 집단폭행 건에 연루됐다는 모 국회의원의 입장이 이런 경우가 아닌가 한다. 단지 “내가 누군지 알아?”란 말로 시작된 사안은 간단히 끝날 것으로 봤지만 아물기는커녕 덩치를 키우고 있다. 의원은 “그런 적 없다”를 견지해 왔고 대리기사는 “발뺌한다”며 성이 단단히 나있다. 일상사에 꼬인 건 ‘더 가진 쪽’이 푸는 게다. 당사자는 국회의원과 대리기사다. ‘갑과 을’의 인식마저 깊다. 이런 점에서 의원이 일을 키운 것 같다. 여론도 의원에게 호의적이지 않게 흐르고 있다. 의원은 며칠 전 문자 메시지로 “사과하러 가겠다”고 운을 뗐다고 한다. 대리기사는 “진정성을 먼저 보이라”며 반응이 차갑다. 의원 자리보다 사태의 심각성이 더 커 보인다. 사태를 뒤에서 처리하려던 의원 측의 판단 미스다. 대리기사도 이게 서운했을 것이다. 매는 벌수록 더 고통스럽고, 지는 것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진정성 보따리’를 이고서라도 대리기사를 찾는 게 순리 아닐까.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사자성어 속의 가을/손성진 수석논설위원

    가을이 완연하다. 가을 경치는 단연 으뜸이다. 하늘에는 기러기가 날고 산은 붉게 물든(征雁紅葉·정안홍엽) 풍경을 볼 기대에 부푼다. 국화는 자태를 뽐낼 것이며 물은 비취처럼 푸른 빛을 띠리라(菊傲水碧·국오수벽). 가을 경치는 좋은 화제(畵題)도 된다. 비 갠 가을 산의 모습(秋山雨霽·추산우제), 계곡에서 솟아나오는 가을 안개(秋煙出谷·추연출곡), 가을바람 속에 내리는 가랑비(秋風細雨·추풍세우)는 상상만 해도 운치가 느껴진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지금이 글 읽기에 딱 좋은 초가을 날씨(新凉燈火·신량등화)이니 등불을 가까이해야 한다(燈火可親·등화가친). 가을은 기개의 계절이다. 마음이 매우 깨끗하여 남의 것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말을 추호불범(秋毫不犯)이라고 한다. 서리에도 굴하지 않고 외로이 지키는 절개, 오상고절(傲霜孤節)은 국화의 모습이다. 사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유래는 평화로운 풍경과는 정반대다. 시야가 탁 트인 날씨와 살찐 말을 이용해 흉노족이 침입하기 좋은 계절을 걱정하던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가.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노후의 공적(公敵)/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장모님은 사람이 너무 오래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끔 말씀하신다. 장수는 인간 본연의 욕망인데도 진담처럼 말하는 이유는 병에 대한 걱정과 자식들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 아닐까 한다. 파킨슨병을 앓는 아내를 30년 동안 돌봐온 70대 노인이 결국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을 기도한 사건을 봤다면 더욱 그런 생각을 했을 듯하다. 질병 없이 살다 죽는 건 인간의 소망이다. 건강하게 살다가 자신도 모르게 죽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문제다. 고통스럽고 치료가 어려운 병을 앓다가 힘겨운 여생을 마치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중에서도 암은 평안한 노후를 해치는 공적(公敵)이다. 발병률이 37%라고 하니 나이가 들수록 누구라도 암에 대한 공포가 커진다. 기자 생활을 같이한 대학 동기생이 암에 걸려서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며칠 전에야 들었다. 지인의 암 발병 소식은 최근에만 벌써 몇 번째다. 수년 전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이런저런 일에 손대더니 스트레스를 받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동기들이 십시일반 모금을 하자고 했지만 그것으로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알밤의 일침/정기홍 논설위원

    가을에 수확하는 밤은 나에게 남다르다. 이맘때면 빠지지 않고 고향 형님댁을 찾아 주워온 게 밤이다. 종일 비탈을 오르내리며 줍다 보면 다리 근육이 풀리고, 허리마저 쑤셔 대는 통에 고통이 만만찮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통증은 없어지고 책상머리 일에 풀어질 대로 풀어진 다리 근육이 불끈해짐을 느낀다. 잃은 건강 되찾기라고 할까. 밤 줍기에 빠지면 찌든 만사도 훌훌 떨쳐진다. 그때만큼은 무릉도원이다. 함께하니 일손을 덜고 사이가 도타워지는 건 덤일 것이다. 올해는 시간을 내지 못해 같이하지 못했다. 아쉽던 차에 그제 형님댁에서 알밤 한 꾸러미를 보내 왔다. 어느새 밤 밭의 한구석에 떨어져 있을 녀석들이 눈에 선해진다. 토실한 이놈은 어디에서, 색깔이 진한 저놈은 언제 주운 것 등…. 모두를 삶은 뒤 일부는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가을과 겨울 간식용이다. 형님댁이 보낸 알밤이 별스러운 건 얼마 전에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저러한 뜻을 담아서 보낸 것이리라. 생각이 여기까지 닿으니 형만 한 동생이 없다는 옛말도 달리 와 닿는다. 말은 없지만 깊은 것이 남자들의 속내일 것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보톡스 미인/문소영 논설위원

    보톡스는 얼굴에 독을 주입해 근육을 마비시키고 그 덕분에 근육이 잔주름 없는 팽팽한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피부는 20대 중반부터 지구의 중력 때문에 처지기 시작하고 웃고 울고 화내는 등 감정 표현이 반영돼 나이에 맞는 주름을 얼굴에 만들어 나간다. 많이 웃는 사람의 얼굴이 묘하게 웃는 표정에 가깝고, 짜증을 자주 내는 사람의 표정은 짜증이 묻어 있는 이유는 누적된 주름이 내면의 상태를 그려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중년 이후 보톡스를 맞아 마비된 근육이 만들어내는 어색하고 뻣뻣한 표정은 젊음과 아름다움이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욕망을 표방한다. 외모가 우열과 성패를 가름한다고 믿는 외모지상주의, 즉 루키즘(lookism)이 아닐까 한다. 최근 서울 광화문의 커피점에서 눈부신 청춘인 20대 여성들의 대화를 엿듣게 됐는데, 보톡스 시술을 고려한단다. 우리 어머니들이 못난이 딸들을 격려하던 “내면의 아름다움이 최고”라는 주장은 “예쁘면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남성들 탓에 맥을 못 추지만, 거죽만 예쁘면 애정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이다. 내면을 사랑하시라.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어린 새뮤얼’의 기도/문소영 논설위원

    1970~80년대 택시나 버스 운전석 근처에는 ‘오늘도 무사히!’ 라는 작은 그림이 매달려 있었다. 교통사고들이 잦았던 시절이라 운전자의 바람이 그랬던 것이다. 붉은 볼이 인형 같이 예쁜 금발 꼬마가 두 손을 모으고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맨바닥에서 기도하는 그림이다. 부자 되기를 꿈꾸며 걸어놓는 돼지 그림처럼 친근한 일종의 ‘이발소 그림’인데, 흔히 소녀의 기도로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 꼬마는 ‘새뮤얼’로 소년이다. 옛날 우리 집에도 감수성 예민한 언니가 어디서 샀는지 그 그림을 액자까지 해서 붙여놓았다. 매끈한 화법이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가 그렸나 싶기도 하겠지만, 영국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가 1776년에 ‘어린 새뮤얼’이란 제목으로 그린 일종의 종교화이다. 구약성서 ‘새뮤얼서’에 나오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다윗 두 왕을 축성(祝聖)했다. 그림은 어린 시절 부모가 제사장에게 그를 맡겼으나 그 사실을 모르고 혼자 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에 경황 없이 기도하는 모습이란다. 작품은 프랑스 몽펠리에 미술관에 걸려 있다고 하니, 생전에 그림을 직접 알현하긴 난망하고, 오늘도 무사히!를 간구해 본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
  • [길섶에서] 인심역습(人心逆襲)/서동철 논설위원

    인천 아시안 게임이 열리면서 이 지역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넘쳐 난다. 어제 아침에도 TV를 켜니 쫄면이며 물 텀벙, 세숫대야 냉면이 줄줄이 등장하고 있었다. 화평동 냉면 골목이라면 호기심에 가본 적이 있다. 별명처럼 세숫대야를 방불케 하는 그릇에 냉면이 담겨 나오는데 혼자 먹기에는 조금 벅찼다. 그런데 옆자리 여중생들은 한 그릇씩 비우고는 떡볶이를 어디로 먹으러 갈 것인지를 상의하고 있었다. 하긴 나도 저 나이 때는 어지간히 먹었지…. 이 집에는 ‘양이 많다고 나눠 먹으면 안 된다’는 글귀를 벽에 붙여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가끔 가는 부대찌개 집이 있다. 6000원으로 다른 집보다 싼데다 내용은 오히려 충실했다. 그런데 최근 7000원으로 올랐다. 질이 좋아졌겠거니 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건너편 손님 7명이 5인분만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래도 양이 부족하지 않으니 손님 탓을 할 것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인심 좋은 식당도 인심을 지켜나가기가 쉽지 않다. 화평동의 ‘경고문’도 이런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어느 공직자의 상/정기홍 논설위원

    “이번에는 합격했어요.” 전북 변산에서 공직 생활을 하는 50대 지인이 부처에서 주관한 공직자 봉사상을 받았다는 소식이다. 불과 며칠 전, 다른 지원 분야에서 떨어졌던 터라 기쁨이 더해 보였다. 아주 오래전에 이곳으로 발령을 받은 뒤로 해안가를 따라 올레길을 만들고 길가에는 지역의 특산 꽃인 상사화를 심고 가꿨다고 한다. 자신이 지은 시도 길옆의 푯말에 새겨넣었다. 그의 카페에는 수상의 이유가 된, 지역민과 함께 일궈온 소개 글로 가득하다. 그의 수상이 남달라 보인다. 늦게 정규직이 된 데다 그마저 특수직으로 뒤처진 면이 있었다. 수상으로 승진에서 유리해졌고 부상도 받았다. 척박한 자리를 묵묵히 지켜오면서 상사화와 같은 꽃을 늦었지만 예쁘게 피워냈다. 이런 게 ‘고진감래’(苦盡甘來)다. 무엇보다 ‘심사 불신’을 떨친 것이 값져 보인다. 수상은 ‘백 있는’ 지원자의 몫일 것이라 여겼다고 했다. ‘불일신자 필일퇴’(不日新者 必日退). 그의 카페에서 눈에 들어온 문구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퇴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지간히 자신을 채찍질한 듯하다. 아래위의 ‘자리 타산’만 하는 공직자들이 새겨야 할 사례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컴퓨터와 독서/구본영 이사대우

    아침저녁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이 제법 소슬하다. 가을은 성큼 다가왔나 보다. 그러나 ‘독서의 계절’은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신문사를 떠나 출판사를 차렸던 지인이 엊그제 그 일을 접고 다른 일자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일까. 며칠 전 글로벌 기업 애플을 키운 고 스티브 잡스가 집에서는 어린 자녀들의 컴퓨터와 스마트폰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처음엔 아이러니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필자도 밤늦도록 컴퓨터에 몰입하는 청소년기 아들들과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인터넷이나 손안의 컴퓨터 격인 스마트폰을 무작정 금지할 수만은 없을 게다. 그러나 컴퓨터로 소비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책을 읽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터. 잡스의 사례에서 보듯 인쇄된 글씨의 향기, 즉 문자향(文字香)을 모르는 아이들이 안타깝긴 동서양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책갈피에 꿀을 발라 아이들의 독서 습관을 유도했다는, 옛 유대인 부모들의 지혜가 생각난다. 구본영 이사대우 kby7@seoul.co.kr
  • [길섶에서] 눈물과 정(情)/손성진 수석논설위원

    힘들게 살아온 가족일수록 눈물이 풍부하다. 함께 고생한 서러움이 이별과 재회의 순간에 북받쳐 오르기 때문이다. 눈물은 곧 정이다. 모국을 찾은 다문화 가정의 동남아 여성이 부모형제와 맞잡고 흘리는 눈물에서 그런 뜨거운 정을 느낀다. 30여년 전 입영전야에 친구들과 만취하고선 다음날 비틀거리며 입영열차에 올랐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어머니의 주저앉은 모습을 보았다. 얼마 전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는 아들을 배웅하러 다녀온 아내에게 눈물이 나더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냥 눈가가 젖은 정도였다고 말한다. 아들의 훈련소 수료식에 나도 같이 가보았더니 띄엄띄엄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이 보일 뿐 대체로 표정이 무덤덤해 보였다. 가족 간의 눈물이 점점 메말라간다. 정이 사라져간다는 뜻이다. 가난과 고생을 많이 겪을수록 눈물을 많이 흘리고 정은 돈독해진다. 동고동락, 동병상련의 애틋한 마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먹고살 만해지니까 우리의 감성은 무뎌졌다. 이별과 만남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세상은 삭막해졌다. 연인 간의 이별은 살인을 부를 만큼 살벌해지기도 했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9시 등교/문소영 논설위원

    특목고, 자사고에 진학하지 않은 평범한 공립 고등학생인 우리 집 10대 청소년은 자정이 넘어도 잠자리에 들지 않아 골칫거리다. 술 약속이 없는 저녁이면 반드시 밤 12시 전에 취침하는데, 10대 청소년에게 잘 것을 늘 간청해야 한다. 1970년대 방영된 미국 드라마 ‘월튼네 사람들’처럼 방의 전등 스위치를 꺼주면서 “잘 자라”는 정겨운 취침 인사를 하겠다는 의도이나 잘 이뤄지지 않는다. 인터넷 게임에 열을 올리는 10대는 자유로운 올빼미처럼 자정을 넘기길 원한다. 경기도 거주자인 탓에 추석이 지난 뒤부터 우리 집 10대도 오전 9시까지 등교한다. 30분이 늦어진 것으로 가족들의 오랜 생활 방식이 헝클어졌다. 10대는 등교가 늦어진 30분만큼 더 늦게 자려고 기를 쓴다. 아침 화장실을 사용하는 시간도 겹쳐져 북새통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초등학생은 오전 7시 15분에 등교용 스쿨버스를 타고 8시까지 등교한다. ‘9시 등교’가 학생의 수면권과 조식권을 보호한다는 논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취침시간을 두고 질풍노도의 청소년과 실랑이를 계속할 생각을 하니 독립운동도 아니고 이런 갈등이 웬일인가 싶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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