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하남시의 광주향교/서동철 논설위원

    하남역사박물관에서 보도자료가 이메일로 날아왔다. ‘하남 광주향교’ 특별전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향교는 조선왕조가 통치 이념인 유교 문화를 지역 곳곳에 퍼뜨리기 위한 국립교육기관이었다. 대개 읍치의 중심에 관아와 나란히 세워지곤 했다. 하남시에 광주향교가 있다는 것은 옛 경기도 광주의 읍치가 이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하남시는 서울 주변의 신흥 주거지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서울 강남으로 접근하기가 편리한 데다 산과 강이 어우러진 자연 환경도 뛰어나다. 더불어 하남시는 역사의 고장이다. 적지 않은 하남시 사람들은 한성백제의 하남위례성이 이곳이었다고 믿고 있다. 사실 한성백제는 몰라도 통일신라 시대 하남시는 한강 유역을 통치하는 중심지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광주읍치는 인조가 하남시에서 1636년 남한산성 내부인 당시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로 옮겼다. 1917년에는 오늘날 광주시청이 있는 광주군 광주면 경안리로 갔다. 서울 강남도 과거에는 대부분 광주 땅이었다. 그런 광주의 중심이 지금의 하남시였으니, 주민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 [길섶에서] 조천항 책방/김성곤 논설위원

    어깨가 닿을 듯 좁은 돌담길을 지나서야 만난다. 작은 나무 대문, 그 앞에 놓인 빈 의자, 문에는 학창시절 명찰처럼 아주 조그만 간판이 달려 있다. 제주 조천항을 낀 마을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책방 ‘시와 그림책’ 얘기다. 마당에는 꽃과 잔디, 빈 화분들이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어서 오세요.” 주인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서로 묻지도 물어보지도 않는다. 학교 앞 분식집만 한 책방에는 긴 책상 몇 개와 벽을 채운 책들뿐인데도 부족하지 않다. 시집과 그림이 곁들여진 동화에서부터 수필집까지…, 젊은 시인도 있고, 이상, 황동규, 고흐도 있다. 손님은 아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젊은 부부와 우리 부부뿐이다. 최근 제주에 다녀왔다. 횟집부터 애월과 함덕의 카페, 오름 오르기까지 나름대로 제주를 즐겼다. 아쉬운 것은 제주다운 게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파스타와 빵, 풍경 좋은 곳은 모두 카페다. 그러다 찾은 게 시와 그림책이다. 전화로 길을 물어야 할 만큼 꼭꼭 숨어 있다. 알고 보니 제주에는 이런 책방이 제법 많다. 편안한 분위기와 책장을 넘기는 손맛 때문인가. 모처럼 마주한 반가운 제주의 변화였다. 김성곤 논설위원 sunggone@seoul.co.
  • [길섶에서] 요코의 ‘사찰 순례’/황성기 논설위원

    ‘요코와 함께한 일본 사찰 순례’(종이와나무 펴냄)란 책이 사무실로 배달돼 왔다. 저자 나카노 요코가 보낸 것이다. 이 책은 일본판 ‘나의 문화 답사기’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불교 전문지에 1년간 한글로 연재했던 글을 묶어 냈다. 요코는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인 남편이 서울 특파원으로 발령 나면서 2011년부터 3년간 서울에 살았다. 한국 문화에 빠져 특히 사찰을 즐겨 찾으면서 한국인의 절 사랑을 체험한 그다. 요코가 2014년 오사카로 이주한 뒤 즐기는 일 가운데 하나가 일본을 찾는 한국인 친구들과 간사이 지방의 절과 박물관을 탐방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절을 함께 다니며 한국인 친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나의 마음도 따뜻해지고 행복해”져서 “이 행복함을 더 많은 한국분들과 나누고 싶어 책을 만들게 됐다”고 한다. 교토, 나라, 시가에 있는 사찰을 다뤘다. 잘 알려진 교토의 기요미즈데라, 나라의 도다이지 외에도 29개의 절을 엄선해 주변 볼거리, 답사 코스, 지도까지 세심히 담았다. 700만명이 일본으로 가는 시대다. 이 책 들고 일본 절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하다.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거절의 기술/이순녀 논설위원

    부탁을 잘 들어주는 사람은 남에게 부탁할 때도 스스럼이 없다. 반대로 부탁하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은 타인의 부탁이나 요청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거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거절에 쉽게 상처받거나 좌절하는 사람은 자신이 거절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힘들어한다. 거절하는 순간에 상대방의 감정에 이입되기 때문이다. 취재나 인터뷰 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하는 일이 잦지만, 여전히 거절하거나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소심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모양이다. 인터넷에 ‘거절’을 키워드로 입력하면 수십 종류의 책이 검색된다. ‘거절당하기 연습’의 저자인 지아 장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거절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자신이 ‘100일 거절 프로젝트’를 실천해서 얻은 깨달음이다. ‘낯선 사람에게 돈 빌려 달라고 하기’처럼 거절당할 게 뻔한 요청을 하면서 내성을 키우는 것이다. “거절은 내 존재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제안에 대한 거절일 뿐”이라는 당연한 상식으로 일단 부딪쳐 보는 것. 그것 말고 거절의 기술이 달리 있을까.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멀어진 소리/황수정 논설위원

    나무 책상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글자를 적자면 따각따각 연필심 부딪는 소리가 좋다. 우르르 말발굽 소리를 날리고 마는 컴퓨터 자판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나무와 종이와 연필의 합주는 밤 깊어 주옥같아진다. 이십년 전쯤 살았던 길갓집이 자주 그립다. 산책로 초입이어서 발소리에 새벽잠을 깨고는 했다. 담벼락 아래 쉬어 가던 노부부가 있었다. 달팽이처럼 걷는 할아버지는 더 느린 할머니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두런두런 담을 넘던 말소리를 전부 불러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쉬지 않고 귀를 열어도 마음에 붙들리는 소리 한 가닥이 없다. 한밤중 무뚝뚝한 연필심 소리에나 고작 나는 내 마음을 듣다 만다. 오래전 노부부의 발소리를 떠올려야 진심을 다하는 마음을 겨우겨우 짐작만 한다. 잠귀를 열어 주던 청청한 소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전속력으로 부서지는 소음 말고, 깊이 머물고 오래 감돌아 맺힌 데 없이 순한 말과 소리들. 무당벌레 두 마리가 형광등을 밤새 뱅뱅거릴 눈치다. 길 잃은 녀석들이 반갑다. 왱왱대는 저 소리, 깜깜한 봄밤을 감돌아 오늘은 귀 맑혀 주는 소리.
  • [길섶에서] 실버영화관/이종락 논설위원

    며칠 전 서울 충무로에 들렀다. 명보극장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한극장, 서울극장, 단성사, 중앙극장 등과 함께 10대 개봉관이었다. 지금은 명보아트홀로 상호가 바뀌었다. ‘점프’ 등 뮤지컬 세 편을 장기 공연 중이다. 공연장보다 눈길을 끈 곳은 6층 하람홀의 실버영화관. 55세 이상은 관람료 2000원. 참 착한 가격이다. 존 웨인의 ‘철인들’(1969년작), 커크 더글러스 ‘셰넌도어’(1965년), 험프리 보가트 ‘사하라 전차대’(1943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더티 파이터’(1980년) 등이 상영 중이다. 200여개의 좌석이 거의 꽉 찼다. 젊은 세대에겐 영화 제목도, 배우들도 낯설다. 하지만 어르신들에겐 추억을 일깨우는 마법의 주문이자 ‘영원한 오~빠’들이다. 스크린에는 영화를 몰래 보기 위해 수업을 빼먹은 기억, 극장 앞 기도의 단속을 피하려고 교복을 갈아입고 입장한 추억들이 오롯이 배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계 초침은 움직인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추억은 떠나지 않고 코흘리개 시절, 까까머리 시절로 데려다준다. 실버영화관은 오늘도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jrlee@seoul.co.kr
  • [길섶에서] 자유의 송가/이두걸 논설위원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곡의 인기를 반영하듯 수많은 명연주가 존재한다. 다만 역사적 의의만 따지자면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1989년 베를린 연주가 앞머리에 놓일 것이다. 그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한 달 뒤 그는 서편과 동편에서 ‘베를린 축하 공연’을 가졌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 그리고 독일 등 2차 세계대전 참전국의 교향악단 단원들이 동참했다. 번스타인은 4악장에 인용된 실러의 시 제목 ‘환희의 송가’(Ode to Joy)를 ‘자유의 송가’(Ode to Freedom)로 바꿔 청중들에게 소개하고, 이듬해 발매된 실황 앨범의 타이틀로 썼다. 그는 특유의 역동적인 몸짓과 드라마틱한 해석으로 악단을 이끌었다. 탁월한 음악가이자 평생 자유와 반전을 주창한 지성인이었던 번스타인은 그로부터 10개월 뒤 폐암으로 눈을 감았다. 지난 12일 미국과 북한의 두 정상이 싱가포르에서 비핵화와 평화체제 보장 등을 합의하는 모습을 보며 교향곡 9번의 베를린 실황을 떠올렸다. 남과 북, 미국, 중국 연주자들이 함께 서울과 평양에서 이 곡을 함께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일까. douziri@seoul.co.kr
  • [길섶에서] 개우밥/임창용 논설위원

    한 달여 전 전남 고흥의 소록도를 방문했다. 한센병 환자들이 겪은 아픔의 흔적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섬이다. 한센병박물관에서 본 ‘개우밥’을 잊지 못한다. 소록도에선 식기(食器)를 개우라고 불렀다고 한다. 개우밥은 미혼 환자들이 사는 독신사에서 공동취사를 할 때의 조리법이었다. 개인별로 배급받은 쌀이나 고구마 등 식재료를 모아 조리해 먹을 때 벌어지는 불공평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재료를 담은 개인 식기를 커다란 솥에 한꺼번에 넣어 취사를 한 것이다. 취사 후 자기 식기를 꺼내 먹으면 되니 아예 분쟁의 소지를 없앤 셈이다. 배급량이 부족해 배가 고팠을 테고, 그러면서 생긴 음식 분배에 대한 불만이 이런 조리법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재현된 개우밥엔 배를 곯던 환자들의 고한(苦恨)이 고스란히 담긴 듯했다. 소록도를 다녀온 뒤 식사하다가 가끔 개우밥을 떠올린다. 입맛에 맞지 않아 음식을 많이 남길 때 특히 그렇다. 집에서 아이들이 밥을 절반도 먹지 않고 남기면 안 하던 잔소리까지 한다. 하루 만에 꽉꽉 차는 음식물 쓰레기통. 개우밥은 요즘 더 필요한 듯싶다.
  • [길섶에서] 인어공주 신드롬/문소영 논설실장

    “나 인어공주 신드롬에 걸렸어”라고 하면 코웃음을 친다. “에리얼은 예쁜 10대 소녀예요”라며. 미간 주름이 선명한 50대 중늙은이가 감히 인어공주와 비교하냐는 비웃음이다. “물거품이 될 약속이라도 했어요”라며 걱정스레 묻는 사람은 그래도 의리가 있다. 지난 2월에 다쳐 휠체어를 거쳐 목발로 ‘4족 보행’하던 불우한 시절을 마친 지 한 달을 살짝 넘었다. 2족 보행은 산뜻하고 즐겁다. 아직 뛸 수 없다는 것이 한계이지만, 그런 불만을 입에 올린다면 천부당만부당하다. 주장하는바 ‘인어공주 신드롬’은 물고기 꼬리가 인간의 두 발로 바뀌었을 때, 인어공주가 겪었을 근육통이다. 목발을 버리고 2족 보행을 하던 첫날 종아리와 발목 근육통은 예상했다. 그러나 발바닥과 다섯 발가락의 미세한 근육들의 통증은 예측하지 못한 통증이었다. 통증은 발가락과 발바닥, 종아리, 발목 등을 아직도 돌아다녔다. 잊을 만하면 종아리에 근육통이 찾아온다. ‘인어공주 신드롬’이 극심한 때는 새벽에 침대에서 내려설 때다. 오른발을 방바닥에 내디딜 때,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끈질기게 찾아오는 통증, 그 통증. 문소영 논설실장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꽃물/김균미 대기자

    출근길 버스를 기다리며 무심코 사람들을 쳐다본다. 흰색과 검은색 옷차림 사이로 간헐적으로 짙은 푸른색 계통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눈에 띈다. 버스 안도, 버스 창 밖으로 스쳐 가는 거리에도 온통 흰색과 검은색 물결이다. 나 또한 그들 중 한 명이다. 무채색의 단조로움에 아침부터 기분이 가라앉는다. ‘월요병’을 안고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다. 밝은 색깔의 옷차림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튀기보다 무리 속에 묻혀 가길 원하는 속내를 보는 것 같다. 흑백의 거리를 훑고 지나다가 뭔가에 눈길이 머문다. 인도 한가운데에 길게 놓인 화분 속 꽃들이다. 노란색, 옅은 분홍색, 짙은 분홍색, 보라색이 도드라진다. 올봄부터 몇 달째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눈길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없다. 도로변 가로등 기둥을 에워싼 꽃들도 눈에 들어온다. 중앙차로 버스 정류장의 레일을 따라 가지런히 놓인 꽃 화분들도 이제야 보인다. 바쁘다고 놓치고 지나간 꽃들이 주위에 제법 많다. 거리의 꽃들이 무채색 도시에, 사람들 마음에 색을 입힌다. 여유라는 예쁜 꽃물이 들었으면 좋겠다.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삶이 녹슨들/박현갑 논설위원

    출근길. 휴대전화 속 온갖 메시지가 주인을 유혹한다. 지방선거 출마 후보들의 선거운동 정보에다 단톡방 메시지 등 헤아릴 수 없다. 사무실의 컴퓨터도 다르지 않다. 메일함을 열면 뉴스레터 등 홍보성 자료가 쭉쭉 올라온다. 스팸성 청소로 키보드 누르기가 바쁘다. 퇴근길 일상도 비슷하다. 디지털 기기와 함께하는 정보탐닉은 잠자리에 들 때까지 계속된다. 디지털 기술이 가져온 ‘연결사회’의 일상이다. 이용자 맞춤형으로 제공되는 콘텐츠는 잘 이용하면 지식 근력 키우기에 제격이다. 그런데 이용자를 마케팅 수단화하려는 ‘빅브러더’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단절사회’라는 부작용도 만만찮다. 온 가족이 모여 대화하던 ‘거실문화’ 대신 제각각 방에서 휴대전화만 만지작댄다. 나빠진 시력으로 가정불화도 생긴다. 정보 과잉을 제어 못 하는 ‘피로사회’의 흔적이다. 자유로운 사고를 위해 디지털 기기를 하루 몇 시간만이라도 멀리해 보련다. 정보 추구형 일상이 현대인에겐 최소비용으로 최대만족을 누릴 조건일 순 있다. 하지만 잠시 쉰다고, 저녁놀을 바라본다고, 삶이 녹스는 건 아닐 게다. eagleduo@seoul.co.kr
  • [길섶에서] 절대적 행복/손성진 논설고문

    불행은 상대적이라고 한다. 인간은 욕심의 동물이기 때문에 하나를 얻으면 둘을 갖고 싶고 둘을 가지면 열을 얻으려 한다. 하나를 가져도 충분하지만 둘을 가진 사람을 보면 상대적으로 빈곤을 느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역으로 행복도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를 가진 내가 하나도 못 가진 다른 사람을 보면 상대적 부유함,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참된 의미의 행복은 아니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처지에 놓였어도 행복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절대적 행복, 진정한 행복을 아는 사람들이다. 절대적 행복은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잘되면 칭찬해 줄 줄 알아야 한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면 안 된다. 불행이 닥쳐도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 더 큰 불행이 아니라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여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절대적 행복이 꼭 성인(聖人)의 경지는 아니다. 주변을 보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며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부터 시작하면 범인(凡人)도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어쩌다 전통/서동철 논설위원

    설렁탕이나 곰탕, 갈비탕은 당연히 전통 음식이다. 그런데 그런 이름과 조리법으로 정착된 것은 20세기 이후라고 한다. 그러니 역사는 길어야 100년 안팎에 그친다. 전통 음악도 마찬가지다. 우리 음악 문화를 대표하는 형식의 하나인 산조도 엄청나게 오랜 역사를 자랑할 것 같지만, 가야금산조를 시작으로 그 틀이 완성된 것은 실상 100년이 조금 넘었거나 하는 정도다. 그런데 삼베 수의가 일제강점기 시작됐다는 내용의 논문이 최근 나왔다. ‘죄인의 수의’였던 것을 일제가 모든 망자(亡者)에게 입혔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삼베 수의를 입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평생 죄를 많이 지었으니까…. 전통은 오래전부터 물려받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생각한다. 설렁탕이나 산조처럼 오래되지 않은 것도 많고, 심지어 오도(誤導)된 전통도 삼베 수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옛날 알던 것’을 무기로 내 말만 고집해선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마에스트로/이두걸 논설위원

    2016년 7월 정명훈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음악감독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의 고소에 따라 피고소인 조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마침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악보에 눈길이 갔다. 확인해 보니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의 총보였다. 총보는 지휘자용 악보를 말한다. 검찰 조사 직후 일본 도쿄에서 공연이 예정된 곡이었다. 교향곡 4번은 워낙 유명한 데다 그 역시 포디움에서 여러 차례 선보인 바 있다. 개인사에서 흔치 않은 ‘엄중’한 시점에도, 거의 외우다시피 할 만한 곡에 대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는 열정이 그를 ‘마에스트로’의 자리로 이끌었을 것이다. 한때 ‘왜 훌륭한 오케스트라나 록밴드는 우리나라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지만, 요즘은 상대적 박탈감이 덜해졌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아시아 최고 오케스트라’로 도약한 서울시향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시향은 정 전 감독 이후 공석인 음악감독을 올해 내에 선임할 계획이다. 서울시향이 ‘21세기 지속 가능한 오케스트라’라는 목표에 걸맞은 훌륭한 ‘선장’을 초빙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douziri@seoul.co.kr
  • [길섶에서] 개구리 소식/황성기 논설위원

    이 세상에 태어나 숨 쉬고 움직이는 동물과 만나면 친근감이 앞선다. 아마도 개를 키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삶에 가까웠던 까치나 비둘기, 참새가 유해 조류로 분류돼 퇴치와 밉상의 대상이 된 지 꽤 오래다. 그래도 산책 길에 이 새들을 보면 해롭다는 생각보다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인간은 참 제멋대로인 동물이다 싶다. 아파트 단지 벽에 잃어버린 새를 찾는다는 방이 붙어 있다. ‘김밥’이란 이름을 가진 앵무새류의 새인데, 이름을 부르면 대답을 하는 새이니 ‘저희에게 가족 같은 김밥’을 보시면 연락해 달라는 새 주인의 호소가 사진과 함께 피눈물처럼 종이에 적혀 있다. ‘가족’이라 표현했으니 그 마음은 어떨 것인가. 집 근처 연못을 야밤에 지나다 개구리 소리에 깜짝 놀랐다. 개구리가 살 만한 곳이 아니라 처음에는 녹음기라도 틀어 놓은 줄 알았다. 몇 날이고 들렸는데 어느 날 동네 게시판에 ‘공지 사항’이 떴다.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와 연못의 물을 빼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지금은 소리가 안 들린다. 개구리가 채비를 차려 물 빠진 연못을 떠나는 장면을 상상하니 한편으로 섭섭하다.
  • [길섶에서] 비폭력 대화/이순녀 논설위원

    얼마 전 한 모임에서 ‘비폭력 대화’가 화제에 올랐다. 과문한 탓에 용어조차 생소했던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의도적으로 거친 말, 모진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언어폭력의 폐해는 대부분 인식한다. 하지만 무신경하게 내뱉는 공격적인 말로 마음을 다치게 하는 행위는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아이의 잘못을 지적할 때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냐”고 야단치면 아이는 “내가 언제 항상 그랬어?”라고 대들면서 갈등이 증폭된다.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폭력적인 대화의 한 사례다. 비폭력 대화는 미국의 마셜 로젠버그 박사가 창안한 개념이다. 언어 습관은 우리 각자의 삶의 태도에 기반한다. 상대방의 말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면서 내 의사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대신 연민과 배려, 공감의 자세로 상대방의 욕구와 나의 욕구가 무엇인지 차이 등을 찬찬히 들여다볼 때 비폭력 대화는 가능하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듣기 싫은 말은 남도 똑같이 듣기 싫은 법이다. 이 단순 명료한 진리를 실천하는 게 왜 그리 어려운 걸까.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건강보조식품/김성곤 논설위원

    지루성 피부염엔 호주산 해초류 ○○○○○, 술꾼이니 우루소데옥시콜산이 주성분인 간장약 ○○○, 비타민C, 아내랑 호주 여행에서 사온 프로폴리스, 홍삼즙, 양파즙, 유산균, 얼린 아로니아…. 식탁과 냉장고 한 귀퉁이를 차지한 건강보조식품이다. 40대 때부터 귀동냥으로 하나둘 추가하다 보니 한상 차림이 됐다. 요즘도 유혹과 마주한다. 집마다 비전(?)의 건강보조식품 한두 가지가 있다. “우리 집은 인진쑥 먹어요”, “해독엔 돌미나리예요.” 아내도 어디선가 분주히 듣고 돌아온다. 요즘은 스스로 제동을 건다. 부단히 챙겨 먹지만, 여전히 얼굴엔 붉은 화농이 주기적으로 자리를 잡고, 술 마신 다음날은 어떻게 해도 힘들다. 중세엔 담배를 치통, 두통, 관절염약으로 처방했고, 17세기 런던에서는 커피가 괴혈병과 통풍약으로 쓰였다. 설탕이 약으로 쓰인 때도 있었단다. 혹시 챙겨 먹는 건강보조식품도 미래엔 이런 유(類)의 것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그래도 우리 집 건강보조식품을 싹 쓸어버릴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이 정도를 유지하는 것도 한 상 가득 차려진 건강보조금 덕이 아닐까” 하는 미련 때문이다. sunggone@seoul.co.kr
  • [길섶에서] 트럼프 팔로잉/문소영 논설실장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자신의 게시물을 받아 보는 누군가를 ‘팔로어’(follower)라고 하고, 남의 게시물을 따라다니면 ‘팔로잉’(following)한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트위터 계정을 지난 1월부터 팔로잉하고 있다. 그는 주류 언론을 ‘패싱’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본인의 일정과 정책을 트윗하기로 유명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업무를 개시하는 미국 시간으로 오전 8~11시(한국시간 오후 9~12시)는 아주 따끈따끈하다. 북핵 관련 트윗을 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 외에도 미 관료 다수를 따라다닌다. 지난 1월에는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계정도 따라다니다가 그가 경질된 3월 13일 이래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으로 팔로잉을 갈아탔다. 공식 백악관 계정은 물론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 등도 따라다닌다. 최근엔 알림 기능도 켜 놓았다. 밤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일이 백악관에서 자꾸 발생하는 탓이다. 경제에서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감기몸살로 쓰러진다고 했는데, 요즘 한반도의 외교안보가 그렇다.
  • [길섶에서] 그리운 말씀/황수정 논설위원

    담벼락에 몇 년째 이름 모를 넝쿨 꽃이 피었다. 꽃송이를 찍으면 정체를 밝혀 주는 휴대전화앱이 있다지만 모른 척했다. 애면글면 다녀가는 꽃에다 함부로 통성명하자는 건 염치없었다. 고집을 꺾어 오늘은 휴대전화에 물어본다. 아무리 찍어 봐도 먹통. 모란이 아닌데, 모란이라고 우긴다. 얼마나 눈 밝아야 천길 계절의 속사정을 알까. 고향 집에는 내가 아는 꽃만 피었다. 모를 새 없이 이름을 가르쳐 주던 어른들이 언제나 곁에 있었다. 오종종하게 모여 붙은 이것은 물앵두 흰꽃, 가시 찔려도 울지 않는 저것은 탱자 흰꽃, 소복소복 고봉밥을 엎어 놓은 그것은 조팝나무 흰꽃. 봄밤에 누우면 온 동네 향기가 먼저 달려왔다. 뒷집 천리향 봉오리 터졌네, 건너집 치자꽃 그새 폈네, 천날만날 뿌리를 걷어내도 향기 한번 오달지네 저놈의 아카시아. 눈 감고 만리를 보던 할머니 옆에 누우면 나도 천리쯤 봤다. 만리를 건너 주시던 말씀 속에 반나절만 잠겨 보고 싶다. 고까짓 꽃 이름 몰라도 일없다, 마음 녹여 푼푼히만 살거라. 뾰족한 모서리 둥글려 주던 그 오래된 말씀 안에서 쪽잠 한숨만.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사리와 법력/이종락 논설위원

    조계종 원로의원인 속초 신흥사 조실 무산 스님이 어제 우리 곁을 떠났다. 속명이 ‘조오현 시인’으로 유명한 스님은 시조시인으로도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신흥사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금강산 건봉사에서 다비식이 이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같이 있던 지인이 툭 묻는다. “스님의 사리는 몇 개나 나왔을까.” 사리는 다비한 후에 나온 영롱한 색깔의 작은 구슬 형태의 물질이다. 석가모니의 사리는 8만 4000부분으로 나눠져 여러 나라의 사리탑에 안치됐다. 사리는 불자들의 숭배 대상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사리 신앙이 유별나다. 지인의 그 질문은 이런 우리 불교 문화에 익숙한 탓이리라. 사리 숫자와 법력이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의학적으로도 증명된 게 없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불교신자들은 스님이 열반한 후 사리를 얼마나 남겼나에 유달리 관심이 많다. 마치 법력의 크기를 재는 듯하다. 더 중요한 것은 스님들이 남긴 가르침일 텐데. 무산 스님은 중생의 이런 아둔함을 경계해서인지 “화장해서 흩뿌려라”고 했다. 무산 스님은 중생의 사리 집착을 두고 “억!” 하고 또 꾸짖었을 것이다. jrlee@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