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아버지의 독설/김성곤 논설위원

    아버지는 올해 연세가 여든아홉이시다. 쌀가마니도 거뜬히 드신다. 그 연세에 농사짓는 것을 자랑으로 아신다. 둘째 딸 집들이 때문에 서울에 오셨던 아버지가 주무시다가 호흡곤란과 어지럼증을 호소해 응급실에 모셨다. 며칠 전부터 기침과 가래로 걱정하던 차였다. 급성 폐렴이란다. 한나절 전만 해도 멀쩡하시던 분이 산소호흡기 차고, 의식이 혼미한 것을 보니 “노인은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마음에 다가온다. 닷새쯤 되니 차도가 있으셔서 호흡기 떼고 휠체어도 안 탄 채 링거만 꽂고 계신다. 그런데 어제 사달이 났다. 병실 안은 덥고, 답답해 밤에 복도에 있는 빈 병상에 누워 계시다 반대편 병실 분들과 다투신 모양이다. “홍시감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땡감도 떨어져. … 늙은이가 힘들어 거기 좀 누웠다고 쫓아내?” 독설이다. 몸이 불편하니 이해심도 적어지고 곳곳에서 부딪친다. 갈수록 자신과 가족만 안다. 몸이 좋아져 입이 열리니 좋지만, 옆 환자들에게 폐가 될까 조심스럽다. 요즘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면서 병간호를 한다. 아니 간호인지 감시인지 모호해졌다. 웃다가도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늙어 가는가…. sunggone@seoul.co.kr
  • [길섶에서] 작은 책방/황성기 논설위원

    서울 대학로에서 낙산공원으로 가는 오르막 초입의 책방 ‘슈뢰딩거’는 보통 서점에 비하면 조그맣지만 고양이 전문임을 감안하면 상상 이상으로 널찍하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책의 미래를 찾는 여행’을 읽고는 서울에 존재하는 작지만 기존의 상식을 깨는 독특한 책방들을 알게 됐다. 10평이 조금 넘을까. 책방에는 고양이 책으로 한가득이다. 우리나라에 고양이 책들이 이렇게 많다니 한 번 놀라고, 그런 책을 일일이 조사하고 수집해서 서점을 찾는 이들이 다시 찾아오게끔 콘텐츠 알찬 새 책으로 늘 갈아 끼운다는 책방 주인장의 말에 두 번 놀란다. 2년 전 책방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신설동에 문을 열어 이곳으로 가게를 넓혀 이사 오기까지 단 한 달도 적자를 보지 않았다. 동물병원에 물어보면 병원을 찾는 개와 고양이 비율이 지난해 초반을 기점으로 7대3에서 4대6으로 역전됐다고 한다. “고양이 인기에 관계없이 고양이와 책이 좋아” 시작했다는 주인장. 그의 목표는 책방을 기반으로 고양이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고양이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당찬 포부에 세 번째 놀랐다.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봄나무 아래/황수정 논설위원

    자꾸 생각나는 라디오 사연이다. 몇 년째 실직인 중년 아빠는 훗날 아이들이 꽃도 보고 열매도 먹게 몇 그루 과실수만은 꼭 물려주고 싶었다. 땅값이 거짓말처럼 싼 시골에 언젠가 손바닥만 한 과수원을 일구는 기적 같은 꿈이다. 꿈은 이자가 없으니까. 이태 전 봄에 사과며 복숭아 묘목 서너 그루를 덜컥 사고 말았다. 심을 땅도 없으면서. 주말농장 주인에게 통사정해 밭 둔덕에 묘목들을 겨우 앉혀서는 잘 키웠다. 그런데 지난가을에 농장이 개발돼 껑충 자란 나무들을 비좁은 집으로 데려왔다. 맹렬했던 겨울을 화분에서 용케 견뎌 준 나무한테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화분의 나무들은 그래도 봄이라고 힘껏 물오를 것이다. 사과 꽃이 벙글고 복숭아 꽃이 터질 것이다. 대견해서 어쩌나, 무연히 마음은 닳을 것이고. 무른 흙이 발밑에서 뭉클 부푼다. 뿌리를 있는 대로 뻗대고 가지마다 실컷 싹눈 틔우는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영광스럽다. 이 나무도 저 나무도 깊고 뜨거운 꿈이었을까. 화분의 그 나무들에 십년 백년 봄꽃이 피기를. 그늘이 없어도 길게 앉아 오늘은 꿈을 꾸는, 봄나무 아래. sjh@seoul.co.kr
  • [길섶에서] 슈퍼 에이저/최광숙 논설위원

    얼마 전 인터뷰 요청을 위해 한 고위공직자와 거의 10년 만에 통화를 했다. 마치 며칠 전 만난 이처럼 반가워했다. 80대를 눈앞에 둔 나이지만 젊게 산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고위공직자 역시 70대 후반인데 항상 유쾌하다. 그러니 부담없이 안부를 묻게 된다. 주변을 보면 나이는 많아도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보면 ‘슈퍼 에이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슈페 에이저란 생물학적 나이는 80세가 넘지만 기억력, 집중력 등 뇌의 기능이 25세나 다름없는 이들을 말한다. 슈퍼 에이저에 관한 연구에 참여했던 미국 노스이스턴대학의 리사 펠드만 배럿 심리학과 교수에 따르면 슈퍼 에이저들의 뇌가 일반 노인들보다 더 활성화된 부분이 있다. 흔히 ‘인지’, ‘생각’ 기능을 담당하는 영역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감정’, ‘정서’를 담당하는 영역이 더 활발하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과 소통을 잘하고, 다른 이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뛰어난 이들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뜻이다. 풍부한 감성에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것도 장수 비결 중의 하나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마스크/김균미 수석논설위원

    마스크의 물결이다. 미세먼지·황사주의보가 내려지면 거리도, 지하철도, 버스 안도 온통 두 눈만 보이는 사람들뿐이다. 흰색, 검은색 마스크. 일회용 마스크, 미세먼지·황사 전용 마스크. 다양도 하다. 안경에 김이 서려 갑갑해 잘 쓰지 않아도 주머니에 흰색 마스크 하나쯤은 넣고 다니는 게 습관이 돼 버렸다. 마스크를 환절기 어린이나 노인이 쓰는 것쯤으로 여겼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마스크는 더이상 감기 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마스크는 불편하다. 쓰는 사람도 그렇지만 보는 사람도 그렇다. 미세먼지나 황사가 없는데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과 종종 마주친다. 길거리에서 TV 화면에서. 운동모자까지 깊이 눌러 쓰면 두 눈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패션이려니, 사정이 있겠거니 지나치다가 혹시 유명 연예인인가 호기심이 발동한다. 뒤돌아보려다 그만둔다. 주책없다 싶기도 하고, 나와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하다. 얼굴을 가려야 할 이유는 사람 수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건강 때문에 마스크가 외출 필수품이 된 현실이 한없이 불편하고 화가 난다.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불똥/서동철 논설위원

    미투(Me Too) 운동의 진전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솔직히 피해자의 아픔에 절절하게 공감하고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겠다. 한국 사회에서 나 같은 중년 남자는 가해자가 되기는 쉬워도 피해자가 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다. 물론 직접적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피해자는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다. 잘나가는 영화배우가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찍어 놓은 영화가 애물단지가 됐다는 소식도 들렸다. 극장에 걸린다 해도 꼭 잘된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 영화이니 투자자의 피해는 운수소관으로 돌린다고 해도 다른 배우나 스태프는 임금이나 제대로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문인, 영화인, 방송인 등이 줄줄이 연루됐다고 해도 나에게는 피해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출근길 전화기에 저장해 놓은 ‘가을편지’에 손이 갔다. 세월이 가도 길이 남을 명곡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렇다 해도 이 화려한 봄날 뜬금없는 일이다. 의식하지 못하고 듣고 있는데 ‘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분의 가사가 아닌가’ 하는데 퍼뜩 생각이 미쳤다. 이 노래도 ‘끊어야’ 하나. 그렇게 나도 피해자가 됐다.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봄꽃 반란/진경호 논설위원

    봄은,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으로는 그냥 가는 법이 없다고, 시인 안도현은 말했다. 허리를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만 제비꽃이 보이고, 제비꽃을 아는 사람 앞에 봄은 꼭 제비꽃 한 포기를 피워두고 간다고 했다. 그런 줄 알았다. 안 시인 말대로, 봐야 보이는 줄 알았다. 벚꽃이, 개나리만큼 부지런한 줄, 성질 급한 줄 몰랐다. 개나리에 진달래는 따라붙어도 벚꽃까지 이어붙인 노래는 들어 보질 못했고, 벚꽃은 너무도 화사하고 도도해 늘 개나리를 화동 삼아 한 발 뒤따라오는 줄 알았다. 올봄, 집앞 벚꽃은 그러하지 않았다. 개나리 따위에 봄소식을 맡길쏘냐, 같이 피었다. 기억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봄이 조화를 잃은 걸까. 그도 아니면 바빠진 봄에 행여 여름꽃 될까 놀란 봄꽃들이 마음을 고쳐먹은 걸까. 목련마저 젖살처럼 뽀얀 꽃잎을 후드득 떨어내기 시작한 걸 보면 아무래도 봄꽃들이 뭔가 떼로 작심한 듯싶다. 봄은 이제 오지 않는다. 그냥 스친다. 뿌연 하늘에 숨이 막히고, 우악한 여름이 더워 살짝 눈길만 주고 떠난다. 식목일도 3월로 옮길까 한다는데, 제비꽃 피울 겨를이나 있을지 봄이 안쓰럽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길섶에서] 꽃의 시간/손성진 논설주간

    산기슭엔 진달래며 산수유꽃이 흐드러지다. 화단에서는 매화꽃비가 내리고 자목련이 봉오리를 벌린다. 사진으로 만난 ‘명자꽃’은 더 특별하다. 생소하고 촌스럽지만 그 아름다움은 장미를 능가한다. 홍장미보다 더 강렬한 붉음에 눈이 시리다. “꽃샘바람 스러진 날/ 달려가다가 넘어진 무릎/ 갈려진 살갗에 맺혀진 핏방울처럼/ 마른 가지 붉은 명자꽃/ 촘촘하게 맺힌 날”(목필균, ‘명자꽃 만나면’) 절정의 시간. 만개한 꽃을 보고 있으면 슬프다. 눈부시다 못해 차라리 슬프다. 엄동의 인고에 비해 꽃의 시간은 너무 짧다. 저 화려함도 곧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절정은 희열인 동시에 슬픔이다. “때로는 나의 삶도 바람이 일고/ 냉기가 서려 가슴이 얼고, 서러움도 얼지만/ 가끔은 한 송이 꽃처럼 환희이고 희열일 때가 있다. / 그래서 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김도화, ‘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 꽃의 시간이 간다고 너무 슬퍼할 것은 없다. 곧 무성한 신록의 계절이 꽃을 대신해 우리를 위로할 것이기 때문이다. 매화꽃도 명자꽃도 내년에 또 우리를 찾을 것이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돼지감자 깍두기/임창용 논설위원

    밥상에 오른 깍두기 맛이 독특하다. 아삭하고 달큰한 게 평소 먹던 무 깍두기와 다르다. 어디선가 먹어 본 듯한 기억이 혀끝을 맴돈다. “어, 돼지감자 맛이네?” 아내가 놀란 듯 내 얼굴을 본다. 이걸 어디서 먹어 봤을까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어릴 적 이맘때 고향 집 울타리 아래엔 항상 마른 돼지감자 줄기가 엉켜 있었다.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다 출출하면 달려가 돼지감자를 캤다. 한겨울을 땅속에서 난 돼지감자는 약간 아린 듯 달곰하면서 시원했다. 개울물에 흙만 대충 씻어 낸 뒤 어적대며 씹다 보면 금세 속이 든든해졌다. 겨울이 막 지난 때 밖에서 놀다가 배고프면 언제든 먹을 만한 간식으로 그만한 게 없었다. 돼지감자를 뚱딴지라고 한다고 아내가 아는 척을 한다. 해바라기를 닮은 꽃은 예쁜데, 뿌리를 캐 보니 너무 못생겨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말이나 행동이 엉뚱한 사람을 놀릴 때 쓰는 그 뚱딴지다. 예로부터 돼지먹이로 많이 주었다고 해 생긴 돼지감자란 이름과 도긴개긴이다. 하나 이젠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으니 이만한 출세가 없다. 알싸한 깍두기 맛이 귀하게 느껴진다. sdragon@seoul.co.kr
  • [길섶에서] ‘서울숲’ 오후/박건승 논설위원

    ‘서울숲’ 아침은 싱그럽다. 알알이 이슬 맺힌 풀잎, 원앙이 짝을 지어 한가롭게 햇살을 즐기는 호수,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음악. 계절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다. 봄날 아침 코를 찌르는 푸르름의 향기는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한낮엔 백화(百花)가 난만(爛漫)하고, 둥근 달이 뜨는 밤엔 달빛이 벚꽃이랑 목련이랑 어울려 어지럽게 춤을 춘다. 그런 서울숲에 불청객 하나가 똬리를 틀었다. 숲 잔디가 사라지면서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치솟아 오르는 흙바람이다. 땅에는 꽃바람, 하늘엔 미세먼지-황사 바람, 허공에는 흙바람이 어울려 산다고나 할까. 시도 때도 없이 휩쓸고 지나가는 거센 모랫바람 앞에선 수선화의 청초함도, 목련화의 수줍음도 찾아볼 수 없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집에 돌아온 조카네 아이들의 몸에선 시커먼 물이 흘러내린다. 이쯤 되면 잔디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서울시가 눈총을 받는 건 당연한 일. 아이들을 씻기는 조카는 “미국 센트럴파크를 본떴다는 숲공원이 왜 이래요”라며 화난 표정이다. 어느 시인은 ‘새봄엔 어린 꽃잎이 처음 낳은 새벽이슬처럼 조금은 더 맑게 살 일’이라고 했는데….
  • [길섶에서] 유머/이순녀 논설위원

    최근 세상을 떠난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중에 하나가 뛰어난 유머 감각이다. “재밌지 않으면 인생은 비극”이라고 했던 그는 “선글라스를 끼고 가발을 써도 휠체어 때문에 나라는 게 들통난다”며 자신의 장애를 농담 소재로 삼기도 했다. 영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호킹 역을 맡았던 배우 에디 레드메인은 그의 부고에 “내가 만났던 가장 재미있는 사람을 잃었다”고 애도했다고 하니 그가 생전에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유쾌하게 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어느 자리든 유머가 있는 사람이 인기를 끈다. 아무리 진지한 주제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으로만 대화를 하다 보면 지치기 마련이다. 그럴 때 누군가 시의적절한 농담으로 웃음을 유발하면 금세 분위기가 반전된다. 문제는 유머의 수준과 타이밍이다. 지나치면 아니한 것만 못하다.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 선을 기가 막히게 잘 지킨다. 엉뚱한 ‘자학 개그’나 ‘아재 개그’로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고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저성장, 미세먼지/황성기 논설위원

    몇 년째 서울에 사는 육순 가까운 일본인이 미세먼지를 푸념하며 옛날 일을 들려준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도쿄 동네의 마을 확성기에서 “광화학 스모그 주의보가 내려졌습니다. 밖에서 노는 것을 삼가 주세요”라는 안내가 나오면, 어른들이 밖에 나가지 못하게 막는 바람에 속상했다는 추억이다. 벌써 40년 전 일이니, 대기의 질 개선에 노력을 해 온 지금의 도쿄에는 없어졌을 법도 한데 지난해에도 주의보가 발령된 적이 있는 것을 보면 선진국의 환경개선 노력에도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광화학 스모그는 공장이나 자동차 배기 가스에 포함된 질소산화물,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태양광(자외선)을 받으면 생기는 광화학 옥시던트를 가리키고, 미세먼지는 배기가스 등의 미세한 입자 그 자체를 뜻하지만 대기 오염물질이란 점에선 도긴개긴이다. “고도 경제성장기의 유소년 때 공해투성이 환경에서 질 나쁜 음식을 먹으며 살아온 우리 몸이 좋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는 이 일본인. 일본처럼 저성장에 접어든 우리이지만 언제쯤이면 대기오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한숨만 나온다. 이놈의 미세먼지.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개나리, 그 정열과 슬픔/김성곤 논설위원

    출근길 올림픽대로변 개나리꽃이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간다. 미세먼지다 황사다 해서 잊고 지냈던 봄을 개나리가 일깨워 준다. 딱히 좋아하는 꽃이 없지만, 굳이 꼽으라면 개나리를 꼽았다. 한철이지만 폭죽처럼 뻗쳐오르는 게 정열적이다. ‘개나리꽃을 국화로 했더라면…’ 했던 적도 있다. 꺾어서 물기 있고 양지바른 곳에 꾹꾹 꽂아 놓으면 자리를 잡고 순을 피운다. 개나리꽃 명소로는 가깝게 서울 성동구 응봉산이 으뜸이다. 봄철이면 산등성이가 온통 개나리로 뒤덮인다. 갑자기 개나리가 궁금해졌다. 알아보니 원산지가 한국이다. 학명도 ‘Forsythia koreana’이다. 해열이나 소염용으로 썼단다. 전설도 많았다. 그중 하나. 옛날 오두막에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와 개나리라는 이름의 딸, 그 밑 사내 동생 둘까지 네 식구가 모여 살았단다.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개나리는 동생들을 동냥으로 먹여 살린다. 하지만 추운 날 아궁이에 군불을 피우고 잠들었다가 그만 모두 목숨을 잃는다. 그해 봄 그 자리에 나무가 자라고 꽃이 맺히자 사람들은 개나리라고 불렀단다. 갑자기 정열의 자리를 슬픔이 채운다.
  • [길섶에서] 봄의 값/황수정 논설위원

    동네 앞 큰길가에 꽃 트럭이 왔다. 주먹만 한 플라스틱 화분에 새파란 움을 빼 올린 구근 화초들이 트럭 가득 좌우로 정렬했다. “봄이요, 봄. 하나에 이천원!” 탁탁 손뼉까지 치는 트럭 주인장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겨울을 건너온 안간힘이 얼만데. 수선화, 히아신스, 튤립, 이 싱싱한 이름들이 사방팔방 뿌리는 생명의 기운이 얼만데. 새벽잠 흔들어 달려온 트럭의 노고는 얼마이며, 늘씬하게 뻗어 나올 꽃송이의 황홀이야말로 또 얼만데. 고물 트럭이 단돈 이천원에 무슨 수로 봄을 데려왔는지 거짓말 같다. 본전 생각을 내가 종일 대신하고 있다. 남 먼저 계절을 개봉하는 것들은 제 몸값을 부풀려 부르지 않는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 생강나무꽃. 자잘한 꽃들이 부지런히 떼지어 봄을 몰아오는 사정을 안다. 커서 화려한 꽃들보다 앞질러 당도해야 벌이 찾고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까닭에. 어제는 가뭇없던 개나리가 오늘은 쏟아진다. 겨울을 먼저 이긴 것들이 기를 써 데려다 놓는 봄이다. 흥정하지 않았다고 봄꽃들에게 봄이 공짜일 리가. 봄은 한 번도 거저 온 적이 없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눈인사/최광숙 논설위원

    가끔 카카오톡으로 주변 사람들의 근황을 챙겨 본다. 조카는 프로필 사진에 자신의 꼬맹이 삼남매의 귀여운 모습을 수시로 올린다. 덕분에 큰애는 스케이팅을, 둘째는 분홍빛 발레복을 입고 발레를 배운다는 것을 알고 혼자 ‘할머니 미소’를 짓는다. 배밀이를 하던 막내도 이제 두 다리로 잘 걷고 있다. 아이들의 커 가는 모습을 카톡으로 보는 셈이다. 친구는 남편 환갑을 맞아 부부가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을 사진으로 올려놨다. 나도 환갑을 향해 다가가는구나 싶어 잠시 서글퍼진다. 과거에는 손편지로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소통하는 세상이다. 사랑을 담아 꾹꾹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수고로움 대신 휴대전화만 들면 외국의 친구와도 수다 삼매경에 빠질 수 있다. 세상이 편해지니 그것도 귀찮아진다. 카톡의 짧은 인사도 머뭇거릴 때가 있다. 그렇다 해도 그리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표현은 안 해도 보고픈 마음에 카톡 사진에게 나 홀로 눈인사로 대신하니 말이다. 그리움이 더 쌓이기 전에 가까운 이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봄을 맞아야 하지 않을까.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바닥 신호등/임창용 논설위원

    며칠 전 운전 중에 횡단보도에서 사고를 낼 뻔했다. 정지선에 멈춰 있다가 신호가 바뀌어 출발하는 순간 한 청년이 갑자기 차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 열중하다가 신호등이 바뀐 것을 모르고 차로에 내려섰던 것이다. 거리에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른바 ‘스몸비족’이다. 스몸비는 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다. 스몸비족은 눈을 화면에 고정한 채 고개를 숙이고 걷느라 정면이나 주변 상황은 놓치기 일쑤다. 횡단보도에서 스몸비족끼리 부딪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황당한 사고가 잦다 보니 유튜브엔 이런 장면들만 모은 동영상이 여러 개 올라와 있을 정도다. 스몸비족을 겨냥한 광고물도 많이 생겼다. 원룸이나 화장품 매장 광고부터 공연 홍보 포스터까지 다양하다. 길거리나 지하철역 계단에는 스티커 광고물이 많이 붙어 있다. 얼마 전에는 대구의 거리 횡단보도에 ’바닥 신호등’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매립된 LED 전구가 적색이나 녹색 빛을 내는 신호등이다. 스몸비족의 시선을 쫓아가서라도 신호등을 설치하겠다는 경찰의 행정 서비스가 눈물겹다. sdragon@seoul.co.kr
  • [길섶에서] 기억/김균미 수석논설위원

    대학 친구가 지난 주말 딸을 결혼시켰다. 친구 중에서 가장 먼저 사위를 봤다. 친구들끼리 만날 때는 세월이 멈춘 듯 옛일을 화제 삼아 수다를 떨곤 했는데, 신부 부모석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친구를 보면서 한꺼번에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나이가 들었구나. 그런데 그것도 잠시. 대학 졸업하고 피로연에서 처음 마주친 친구와 손을 맞잡고 “어쩌면 그대로니”라며 반가워한다. 그래 놓고 금방 무안해진다. 기억을 호출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과거는 언제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두세 살 때 기억까지 난다는 사람도 봤지만, 가물가물하다. 내 기억 저 너머에 남아 있는 부모님의 모습은 언제까지일지 머리를 쥐어짜 본다. 더 어릴 때는 어땠지,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 곁에 계시는데 뭐하러. 가만 놔둬도 지금이 곧 과거로, 기억으로 저장되고 추억으로 남을 텐데. 다시 생각을 지금 여기로 돌려세운다. 옛일을 후회하거나, 앞일을 걱정할 때가 많다. 그러다 오늘을 소홀히 하곤 다시 후회한다. 다짐해본다. 그때 거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다라고.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마침표/진경호 논설위원

    독자로부터 소담한 수필집이 날아왔다. 칼럼니스트이고 시인인 성귀옥님이 고령화시대의 이야기, 자신의 이야기이며 노인의 이야기이고, 실은 우리 모두의 것인 이야기를 한없이 겸손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마흔 개의 칼럼과 마흔 개의 시에 담아 성기석이란 필명으로 낸 책이다. 안 아프신 곳이 없는데 늘 하시는 말씀은 “괜찮다”뿐인 어머니 아버지, 요양병원으로 찾아간 어머니가 용변을 보시려 하자 화급히 간병인부터 찾는 자식들, ‘죽이 식지 않을 거리’를 훌쩍 넘겨 흩어진 가족들, 노인 자리에 대신 앉은 컴퓨터, 풍요한 물질 속에 더 곤궁해진 100세 시대 우리….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동네가 필요하듯 한 어르신을 보살피는 데도 온 동네가 필요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저출산 대책의 핵심은 고령화 대책에 있다.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네요 / 삶의 고비마다 찍어 온 / 수많은 쉼표 물음표 느낌표 / 그 모든 과정이 /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였군요.”(성기석 시 ‘잘 가세요’) 결국은 마침표 하나인 것을, 우린 지금도 너무 많은 의심의 물음표와 분노의 느낌표, 좌절의 쉼표를 찍는다. 삶의 낭비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길섶에서] 도심의 냉이/손성진 논설주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이 무어냐고 물으면 홑씨가 자신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깃털보다 가벼운 몸체를 바람에 얹어 맘 내키는 대로 떠돌거나 먼 곳으로 훨훨 날아간다. 민들레 홑씨는 지난 계절에도 사방으로 길을 잡아 흩어졌다. 질퍽한 논두렁엔 민들레 새순이 벌써 지천이다. 거센 폭풍에 몸을 실었던 홑씨는 도심까지 날아들어 척박한 땅을 비집고 단단히 터를 잡았다. 보도블록 틈새에 뿌리를 내린 그 어기참이란! 민들레를 닮은 냉이도 도심으로 날아들었다. 고층건물 화단 회양목 아래 음침한 곳에 홑씨를 안착시켜 꿋꿋이 뿌리를 내렸다. 인간의 나물거리가 되는 운명을 피해 저 속으로 숨었을까. 볕도 안 드는 나무 밑엔 숭고한 생명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삶이 너무 무겁다고 고민하고, 어떤 이들은 가볍다고 서러워한다. 같은 분량의 햇살이나 빗방울이 한 사람에게는 코끼리처럼 힘들고, 다른 이에게는 홀씨처럼 가볍다. … 버려진 쇳덩이 속에서 햇빛을 짤랑거리며 핀 냉이꽃. 우리의 삶도, 죽음도, 사랑도 꼭 저만큼 숭고하고 경건했으면 좋겠다.”(‘냉이꽃’, 김수우)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욕심/이순녀 논설위원

    지난주 출근길이었다. 은행 직원들이 판촉 행사로 작은 화분을 나눠주고 있었다. 멀쩡하던 화분도 내 손에 들어오면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흑역사’를 잘 알기에 마땅히 사양했어야 했는데 그날따라 봄날 같은 아침 햇살에 마음이 부풀었는지 냉큼 받아 들고 말았다.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매일 물을 주며 정성을 기울이길 며칠. ‘이번엔 잘 키워 보리라’ 다짐했건만 아니나 다를까 이파리들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었다. 그 와중에 꽃봉오리 두세 개가 망울을 터트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소중한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게 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변명할 여지 없이 내 탓이었다. 살다 보면 능력 밖의 일인 줄 알면서도 욕심을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좋은 의미에선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으로 볼 수 있지만 상당수는 무모한 오기로 판명 난다. 예전엔 부딪쳐 보기 전에 포기하는 걸 비겁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더 나은 내가 되겠다는 과욕에 빠지지 않는 것,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의 의미를 곱씹어 보곤 한다. 화분 하나에 생각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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