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가스 밸브 강박/임창용 논설위원

    외출할 때 가스 안전 밸브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출근할 때는 물론 산책이나 쇼핑을 나갈 때도 의식적으로 가스 밸브를 확인한 뒤 집을 나선다. 정말 가스가 샐까 봐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아내의 불안을 덜어 주고 싶어서다. 아내는 잠긴 상태를 확인하지 않으면 밖에서 온종일 안절부절못한다. 함께 외출했을 땐 불안으로 인한 아내의 짜증이 애먼 날 향하기도 한다. 외출했다가 되돌아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간혹 확인을 빼먹는다. 아내의 가스 밸브 불안은 오래전의 작은 사고에 뿌리를 뒀다. 미국 연수 시절 쿡탑에 냄비 올려놓은 걸 깜빡하고 외출했다가 집을 태워 먹을 뻔했던 소동이다. 다행히 옆집 아주머니가 연기를 보고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불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다. 그 후 아내는 밖에 함께 있을 때마다 “가스 잠갔던가?”라며 초조해했다. 충격으로 인한 강박이 생긴 듯했다. 내가 직접 확인하면서부터 아내의 불안감은 사라졌다. 자기보다 꼼꼼하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가스 밸브를 점검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 듯하다. 진즉 내가 할 생각을 왜 못했을까. sdragon@seoul.co.kr
  • [길섶에서] 손풍기/김균미 대기자

    예년에 비해 비가 자주 내려 올해는 봄이 더디 가나 했더니, 그새를 참지 못하고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낮기온이 섭씨 30도에 육박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절로 날 정도다. 거리나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손이 여유가 없다. 한 손에는 휴대전화, 다른 한 손에는 손풍기가 들려 있기 일쑤다. 목에 걸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백팩이나 핸드백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더위를 쫓는다. 부채를 부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지만 손풍기가 부쩍 눈에 띈다. 며칠 전 출근길. 만원 버스에서 내린 한 젊은 남성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뭔가를 집어넣는다. 손풍기다. 흔히 보던 것과 달리 크기도 두께도 작고 얇아 보였다. 신형인가 보다. 골프공 크기의 손풍기부터 백팩에 내장된 휴대용 선풍기까지 다양하다. 손풍기 매출이 매년 급증하고 있단다. 휴대용 선풍기라는 뜻의 손풍기가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 수록된 게 2004년. 하지만 손풍기 종류가 다양해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손풍기가 소형화·기능화하면서 인기가 날로 높아지면 부채 부치는 손들이 줄어들까. 글쎄다.
  • [길섶에서] 에어포칼립스/박현갑 논설위원

    “집에 공기청정기 있어? 난 고객이 공기청정기를 구입하든 말든 열심히 설명해 줘.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거든.” ‘청정 공기 전도사’로 변신한 친구의 말이다. 금융업에 종사하다 인생 이모작에 나선 지 4개월 정도 됐다고 한다. 미세먼지 탓에 세탁기보다 더 팔리는 게 공기청정기란다. 미국 항공우주국 연구진들이 한반도 상공에 비행기를 띄워 우리나라 공기질을 조사했더니 맑은 날인데도 오염물질로 형성된 뿌연 먼지 띠가 자주 나타나는 등 공기질이 위험 수준이라는 영상도 보여 준다. 공기 오염으로 인한 재앙을 뜻하는 ‘에어포칼립스’ 상태라는 경고다. 미세먼지 1시간 노출이 담배 연기 1시간 노출과 같다는 ‘정보’도 던진다. “난 없어, 오래 살아라.” “장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게 중요해서 하는 얘기야”라는 친구의 일침이 귓가를 때린다. 맞는 말이다. 요즈음 ‘역세권’ 못지않게 ‘숲세권’이 인기다. 이동의 편리성도 중요하지만, 대기의 질이 그만큼 중시되는 시대다. 한 대 구입해 볼까. 소음이 정겨운 지하철역 주변으로 집도 옮길 마당이니.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 [길섶에서] 늦봄 풍경/손성진 논설고문

    봄도 이제 막바지다. 봄날이 간다. 새색시 미소처럼 수줍었던 봄도 벌써 노년이다. 안창홍 작가의 빛바랜 사진 같은 작품이 어울릴 때다. 그래도 올해는 메마른 대지를 비가 흠뻑 적셔 주어 마음이 푸근하다. 이제 여름 맞을 채비를 할 때. 만산은 진녹색 마고자를 입은 듯 푸른 물결이 넘실댄다. 봄이 어머니 품같이 포근하다면 여름은 아버지 마음처럼 널찍할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저 넓은 바다처럼. 봄이 지나가는 황혼녘에 호숫가에 앉았다. 사실은 강물인데 너무 잔잔해서 호수 같다. 고요의 바다가 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속의 파도도 숨을 죽인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평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엔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세찰수록 몸을 더 펼친다. 바람이 혈관 속으로 스며든다. 한겨울 찬바람이 아니라 온기를 품은 늦은 봄바람이다. 계절이 오고 감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그만큼 우리는 여유 없이 살고 있다. 산을 바라보고 호수에 돌팔매라도 던져 보면 계절의 향이 수채물감처럼 온몸을 덧칠한다. 형형색색의 미각도 이때쯤이면 더 살아난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텃밭 실농(失農)/서동철 논설위원

    충청도 시골집 마당에 3년 전 차나무 묘목 세 그루를 심었다. 그런데 겨울이 한 번 지날 때마다 한 그루씩 잎을 피우지 않았다. 마지막 한 그루는 지난해 탐스럽게 자라 한 가닥 희망을 가졌는데 결국 길었던 지난겨울을 버티지 못했다.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 차나무를 추운 고장에 심은 것은 역시 무리였다. 추위가 닥치기 전 볏짚으로 차나무를 묶어 주라는 지난가을 옆집 할아버지 충고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재작년 열 포기쯤 심어 놓은 당귀는 탐스럽게 자라나고 있다. 상추에 조그만 당귀 이파리 하나만 올려도 쌈의 풍미는 깊어진다. 비가 내린 며칠 전에는 스물스물 마당에 퍼져 나가는 당귀 향내를 한껏 즐기기도 했다. 해마다 이것저것 심어 보지만, 그런대로 병충해를 견디는 것은 상추와 고추 정도다. 여기에 당귀가 더해졌으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잡초도 뽑지 않고, 비료도 주지 않는 그야말로 태평농법이다. 친구가 텃밭을 일군다며 시골 땅 350평을 샀다고 의욕을 보인다. 나는 “삼백오십 평은커녕 서른다섯 평도 농사짓기 힘들걸?” 하며 웃었다. 나는 열 평 텃밭도 해마다 실농(失農)이다.
  • [길섶에서] 사교육/황성기 논설위원

    사교육과 거리가 멀어진 게 10년 가까이 됐는데, 이 세 글자가 최근 생활의 일부가 됐다.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개가 있는 집에 훈련사가 방문해 원인을 분석하고 개를 기르는 사람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TV 프로그램을 한 번쯤 본 적 있을 것이다. 우리 집 개가 TV에 나올 만큼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어서 고민 끝에 ‘개 유치원’의 문을 두드렸다. 7년 전 개를 키우면서 앉아, 서, 기다려 같은 기본 동작에서부터 산책 때의 행동 요령까지 꽤 열심히 가르쳤다. 그렇지만 택배 초인종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든가, 낯선 사람에게 짖는 행동을 바로잡기는 어려웠다. 20개월 전 딱 한 마리 태어난 새끼는 두 번째라 방심했던 건지 거의 손길이 가지 않았다. 대도시에서 이웃이나 산책하며 만나는 사람, 다른 개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개 예절 교육은 불가피하다고 느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니는 ‘유치원’은 재미있게 놀아 주며 잘하는 행동을 더 잘하게 하는 곳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착한 도시형 개가 되기를 바라며 복습도 하는 나날이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수목장/이순녀 논설위원

    화장한 골분을 나무 주위에 뿌리는 수목장(樹木葬)은 고인의 영혼이 나무에 깃들여 상생한다는 섭리에 근거한 자연친화적 장묘법이다. 나무의 성장을 보며 고인을 보다 가까이 느낄 수 있고, 환경 훼손이 적어 관심을 갖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수목장을 처음 보급한 나라는 스위스다. 1993년 스위스 사업가가 영국인 친구의 부탁으로 화장한 재를 스위스의 숲에 묻으면서 시작됐고, 6년 뒤 ‘프리트발트’라는 공식 프로젝트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일부 사찰에서만 수목장이 운영되던 우리나라는 2004년 김장수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의 장례식이 수목장으로 치러지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모았다. 국내에서 수목장이 합법화된 건 2008년 5월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장례가 어제 경기도 곤지암 화담숲 인근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졌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라는 뜻의 화담(和談)숲은 생전에 새와 숲을 사랑했던 고인이 직접 조성한 생태수목원이다. 소탈한 성품과 정도 경영으로 존경받았던 고인이 새와 나무, 별과 달을 벗삼아 자연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길 위의 두 ‘화’/김성곤 논설위원

    출근길 한남대교 북단 고가차로 시작점. 다리 중간부터 고가차로행 1차선에서 가다 서기를 7~8분쯤 한 것 같은데 막판에 3, 4차로에서 비상 깜빡이를 켠 차들이 마구 끼어든다. ‘욱’하고 ‘화’(火)가 치민다. “끝까지 양보를 안 하고 밀어붙일까. 그러면 접촉 사고인데…. 에이 참자.” 운전을 하다 보면 흔한 일이다. 모임에서 끼어들기 양보 기준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버스는 사람이 많이 탔으니까”, “비상 깜빡이를 켰으니까…” 등등 가장 큰 호응을 받은 것은 운전자든 동승자든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그때는 대부분 양보를 한다는 것이었다. ‘로드 레이지’(road rage)는 보복이나 난폭 운전을 말한다. 원인도 여러 가지다. 본래 화를 잘 내는 사람도 있고, 얌전한데 운전대만 잡으면 헐크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뜻밖에 자기는 잘 지키는데 안 지키는 상대방 때문에 욱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떤 경우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망신은 기본이고, 처벌로 이어진다. 도로교통법 위반은 물론 때론 폭력행위로 처벌받기도 한다. 참자. 그리고 끼어들 땐 비상 깜빡이든 손이든 들자. 작은 예의가 도로 위의 ‘화’(禍)를 막는다. sunggone@seoul.
  • [길섶에서] 쫀드기 향수/박건승 심의실장

    가끔 동네 가게에 들를 때마다 쫀드기 한두 봉지를 집어 든다. 그때마다 그 공간에 같이 있는 가게 주인과 안사람의 눈빛이 달라짐을 느낀다.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그런 것 좀 먹지 말라는 안사람의 눈초리는 올라간다. 가게 쥔장은 그저 빙긋 웃는다. 어린 티를 벗지 못하고, 또 그것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우습다는 표정이다. 어린 시절 시골 아이들 사이에 쫀드기는 몹시 인기 있는 군것질거리였다. 줄줄이 뜯어 먹는 재미가 쏠쏠했고 불에 살짝 구워 먹는 맛은 더했다. 그것 또한 주머니가 ‘빈곤한’ 아이에게는 ‘꿈의 떡’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불황의 척도로 불린다. 경기가 안 좋을수록 쫀드기를 많이 찾는다는 속설이 그럴듯한 경제 이론이 되다시피 했다. 제조업체들이 때깔 나게 보이도록 주황 색소를 많이 쓰다 보니 불량식품의 상징이 돼 버리기도 했다. 가게에 쫀드기 사려는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다행이다. ‘쫀드기 경제’ 운운할 정도로 경기가 나쁘진 않다는 방증일 터다. 유해 공방이 재연되지 않은 것도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어릴 적 즐기던 것을 큰 부담 없이 복기할 수 있게 됐으니.
  • [길섶에서] 눈먼 봄/황수정 논설위원

    ‘딸기 체험’ 간판이 걸린 비닐하우스 길목이 북적댄다. 저런 시시한 일이 있는가 싶다. 돈으로 사는 체험이 별 게 아니다. 수경재배로 공중에 주렁주렁 매달려 익은 딸기를 겨우 따 보는 거다. 오뉴월 땡볕에 정수리를 지져 본 적 없는 딸기는 딸기가 아니다. 농담보다 싱거운 맛이다. 뒤란의 딸기, 담벼락의 앵두로 어릴 적 이즈막은 날마다 애틋했다. 봄볕 아래 애태우는 일이 세상의 일이었다. 햇볕에 잘 구슬리면 내일은 익고야 말겠지, 밥숟갈 놓으면 뒤란으로 담벼락으로. 숨은 열매들을 볕바라기로 꺼내 놓고 또 꺼내 놓고. 구름이 길게 덮치면 발을 동동 굴렀던 것도 같다. 그때 궁금했던 태양의 이력이 아직도 궁금하다. 햇볕이 하는 일은 만분의 일도 짐작 못 하지만, 푸른 딸기가 붉어 가던 감격은 자다가도 그립다. 해 지는 정류장에 학원 버스가 아이들을 풀어놓는다. 심심한 얼굴들에 봄날 저녁이 무너진다. 등 뒤의 노을보다 제 이마가 더 붉은 줄 아무도 모르고 있다. 고드름을 먹어 본 적 없는 적도처럼, 미풍에 졸아 본 적 없는 히말라야처럼. 어쩌면 좋은가, 저 눈먼 봄. sjh@seoul.co.kr
  • [길섶에서] 천가방과 버킨백/최광숙 논설위원

    영화 ‘레옹’에서 소녀 마틸다 역을 맡았던 미국 여배우 내털리 포트먼은 채식주의자로 유명하다. 육식을 하지 않을뿐더러 가죽 구두도 신지 않는다. 요즘 포트먼과 같이 친환경을 실천하는 ‘개념 스타’들이 적지 않다. 우리 여성들 사이에도 ‘에코백’이 유행이다. 하찮을 수도 있는 천가방을 너도나도 들고 다닌다. 어떤 여배우는 SNS에 천가방을 든 자신의 모습을 올려놓으며 개념 스타 대열에 합류하기도 한다. 값비싼 명품 가방을 들고 자신의 부와 명성을 과시하던 때와 비교하면 세상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대규모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권좌에서 밀려난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의 몰락에 부인 로스마 만소르의 부패도 한몫했다. ‘사치퀸’으로 불린 그는 한 개에 5400만원짜리 에르메스 버킨백을 색깔별로 수집했다고 한다. 자신의 돈으로 사도 눈총받을 텐데 나랏돈을 빼돌려 보석류와 그 백들을 사들인 것이다. 에코백으로도 충분한 이들에게 버킨백은 무거운 가죽 가방에 불과하건만 인간의 욕망은 끝도 한도 없나 보다. 그는 이제 버킨백도 없이 법의 심판대에 오를 일만 남았다.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분노 다스리기/임창용 논설위원

    퇴근길 버스를 탔는데 빈 좌석이 없다. 30분은 꼬박 서서 갈 판이다. 운 좋게도 앞에 앉은 사람이 일어난다 싶었다. 한데 두어 걸음 떨어져 서 있던 한 여성이 재빠르게 자리를 차지한다. 무안했는지 얼른 눈을 감는 여성. ‘틀림없이 어딘가 몸이 불편할 거야.’ 간혹 누군가의 염치에 어긋난 행위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하다. 미국 와튼스쿨 종신교수인 애덤 그랜트가 지은 ‘오리지널스’란 책을 읽은 뒤부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책에 따르면 사람들은 분노를 다스리는 두 가지 방법을 쓴다. 표면행위와 내면행위. 표면행위는 실제 감정과 달리 표정이나 몸짓을 가장하는 것이다. 승무원이 승객의 ‘진상 짓’에 속으론 부글부글 끓지만 미소 짓는 것처럼. 하지만 ‘손님이 비행 공포증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미소는 공감에 의한 진짜가 된다. 이런 게 내면행위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상대해야 하는 일상은 내면행위나 표면행위의 연속이다. 남다른 공감능력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 공감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 [길섶에서] 스승님과 선생님/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스승의 날이었다. 청탁금지법으로 선생님한테 카네이션조차 선물하지 못하는 현실을 둘러싼 논란이 올해도 어김없이 반복됐다. 씁쓸하다. 국어사전에 스승은 순우리말로 자기를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다. 선생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정의돼 있고. 일상생활에서는 스승님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이다. 대학 1·2학년 때까지는 스승의 날에 고등학교로 친구들과 함께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곤 했다. 사회에 나와서도 전화로 가끔 안부를 여쭙고는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뜸해졌다. 그러다 10년 전 담임선생님 부고를 접하고 황망하게 상가를 찾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뒤로는 연락하며 지내는 선생님이 없다. 정년퇴직을 하신 데다 연락처를 알지 못한다는 게 핑계 아닌 핑계다. 대학 때 교수님들도 마찬가지다. 신문사 들어와 선생님이라 부르며 만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인생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어른은 몇 분이나 될까. 인생의 스승, 선생님 한 분만 만나도 잘 산 인생일 텐데. 스승의 인연, 절로 맺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잊을 뻔했다. 김균미 수석논설위원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흙수저 풀/진경호 논설위원

    풀에게도 팔자가 있을까마는 집 안팎 풍경만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먼저, 거실에 고이 들어앉아 밤낮으로 보살핌을 받는 풀이 있다. 이런저런 난초와 산세베리아, 스투키, ‘다육이’…. ‘금수저’들이다. 그런가 하면 앞마당으로 내쳐지긴 했으나 햇살과 바람, 비를 한껏 맛보며 갖가지 벌레들과 친구 먹은 풀들도 적지 않다. 주말 오후 집앞 화단에 쭈그리고 앉아 이 ‘은수저’들과 수다를 떨다 비루한 풀 한 포기에 눈길이 잡혔다. 화단 앞 아스팔트 도로를 비집고 올라온 녀석은 솜털이나 알아챌 5월 산들바람에도 바들거렸다. 아는 이도 없을 이름이 외려 수치스러울 잡풀들…. 고개를 돌려보니 계단 사이 틈새에도, 담벼락 모서리에도, 콘크리트 전봇대 허리춤에도 녀석들이 진작 있었다. 보잘 것은 애당초 제 잘난 사람의 눈맛일 뿐, 금수저 은수저가 따로 없을 존귀한 생명임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바람보다 먼저 눕는 풀이라 했나. 귀를 대면 거실과 화단의 ‘잡풀’을 향한 녀석들의 외침이 들린다. “네 따위들이 풀이라 할쏘냐.”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풀들이다. 그만 마음을 빼앗겼다. jade@seoul.co.kr
  • [길섶에서] 장수(長壽)/이순녀 논설위원

    1970~80년대 인기 TV 프로그램 가운데 ‘장수 만세’가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노래를 하고 아들 손자며느리도 함께 불러요”라는 주제가도 유행했다. 매주 일요일 아침, 3대가 모여 입담과 장기자랑을 펼치는 화목한 모습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최장수 노인은 124세 할머니였다고 한다.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의 도래가 멀지 않은 요즘이다. 미래학자 안네 리세 키예르는 2030년, DNA 생체 시계를 발견한 스티브 호배스는 2050년에 120세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빌 마리스 전 구글벤처스 대표는 심지어 “인간 수명을 500세까지 늘릴 수 있다”고 장담했다. 얼마 전 안락사가 허용된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한 104세 호주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선택은 ‘무병장수’라는 오랜 욕망의 실현을 목전에 둔 인류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그는 “병은 없지만 건강이 나빠지면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것 같다”며 안락사를 원했다고 한다. 얼마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새삼 되새긴다.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가는 5월/박건승 논설위원

    5월의 밤은 소동파에게 ‘훈풍이 산들산들 불어와 달빛마저 몽롱해지는 밤, 꽃향기에 마음이 들떠 그냥 잠을 청하기가 차마 아까운 밤’이었다. 그런데 올 이 시절 초 우리 날씨는 왜 그리 변덕이 죽 끓듯 했던가. 맑은 하늘에선 뜬금없이 우박이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만만불측(萬萬不測)했다. ‘꾼’들의 ‘입’ 또한 고약했다. 남북 정상회담 앞뒤로는 “세상이 미쳐 가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창원 빨갱이’란 듣도 보도 못한 황당한 허구가 나돌았다. 세상이 미쳐 가고 있다고? 5월의 말본새치고는 참으로 막되고 괴이하고 섬뜩하다. 피천득은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라고 했다. 노천명은 ‘머루순이 벋어 나오던 길섶 어디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활나물 젓가락나물 참나물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지 아니한가. 나의 사람아’라고 했다. 그 맑고 순결한 5월이 정점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어찌하랴. 더러운 입들이 자꾸 분탕질하는 이 5월을. 눈이 아프고 가슴이 먹먹하다. 속절없는 세월이다. ‘계절의 여왕’은 예를 갖추지 못한 그 누구도 탓함이 없이 지나가고 있으니.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무덤밭/서동철 논설위원

    할머니는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5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위중해지신 할머니를 집에서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구급차에 함께 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후 어머니가 “점쟁이가 그러는데 집 밖에서 객사(客死)한 할머니의 원혼을 풀어 드려야 집안이 잘된다고 하더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객사’라는 말을 들어 보기도 어려워졌다. 관혼상제 같은 통과의례는 완고해서 좀처럼 변치 않는다고 했는데 사회 변화에는 장사가 없다. 내가 사는 파주에는 율곡 이이를 모신 자운서원이 있다. 곁에는 율곡의 가족 무덤도 있다. 흔히 율곡과 부인 노씨의 무덤이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의 그것보다 위에 자리 잡은 것이나, 율곡 부부의 무덤이 앞뒤에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개인적으로는 율곡의 큰누나 매창과 매부 조대남은 물론 시아버지 조견과 시어머니 이씨의 묘소가 이곳에 어울려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더 신기하다. 사돈이 함께 잠든 무덤밭이라니…. 조선 중기 사람들의 거칠 것 없는 자유로움이 놀랍다. 지금도 쉽지 않으니 관습의 변화가 유연하게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전쟁과 평화 사이/황성기 논설위원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에 들른 월드컵공원은 여유로움으로 가득했다. 잔디밭의 나무 그늘에서 음악을 틀어 놓고 와인을 마시며 담소하는 젊은 여성들, 아이들과 캐치볼을 하는 가족들, 휴양림에서나 설치할 법한 큰 텐트를 쳐놓고 3대로 보이는 대가족이 간이의자 등에 앉아 도심 속 숲을 즐기는 광경이다. 한 달이면 두 차례 정도 찾는 공원이지만 그날은 평소와는 달리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 표정이 유난히 밝아 보였다. 어린이날의 대체공휴일인 지난 7일 오후 서울 명동. 사람 물결이 예사롭지 않다. 중국인 관광객이 줄었다지만 그 대신에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온 외국인들로 북적거린다. 아이스크림을 넣은 붕어빵에 꿀을 얹은 ‘허붕’을 비롯해 생소한 길거리 음식을 먹으며 명동을 유영하는 듯 거니는 사람들에게서 느낀 것은 평화였다. 전쟁이 날 것처럼 비상식량을 챙긴다는 흉흉한 소리가 나돈 지난해였다. 나만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한반도에 더 전쟁은 없다’는 한마디야말로 이 땅에 살고, 찾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여유로움을 준 건 분명한 듯싶다.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차 안의 두 여자/김성곤 논설위원

    그녀는 참 고집이 세다. 자기주장을 끝없이 반복한다. 순발력도 뛰어나 변화무쌍하다. 내비게이션 속 그녀 얘기다, 지난 5일 아침 8시. 부모님이 계신 전북 완주를 향해 출발했다. 도착해서 점심 먹고, 쉬다가 저녁때 올라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외곽순환고속도로에 차가 가득하다. “그렇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낀 5월 연휴지….” 마음이 급해졌다. 용인~서울고속도로를 타자. 중부고속도로로 가자는 아내의 주장은 무시했다. “왜 저 여자 얘기만 들어.” 그때는 “내비게이션 속 그녀 목소리가 더 젊다”며 서로 웃었다. 그런데 그곳도 주차장이다.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내비게이션은 줄곧 빠른 길로 인도하지만, 거리는 그대로다. 화성까지 4시간. “내 얘기 안 듣더니 잘한다.” 대꾸가 궁해진다. 내비게이션이 빠른 길만 찾다가 수도권을 맴도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말이 사라진다. 8시간 만에 시골집에 도착했다. 두 노인네가 환하게 웃으시며 맞는다. “차 밀리면 돌아가라”던 말씀은 잊으신 모양이다. 올라올 때 물었다. “여보, 어디로 갈까.” “고속도로….” 그래 앞으론 그녀 말고 아내 말을 따르자. 돌아오는 길 말이 살아났다.
  • [길섶에서] 대발견/손성진 논설주간

    걸어도 끝이 없이 물안개 앞을 가리는 봄 길엔 이팝나무, 명자나무 하양 빨강 꽃잎이 밟고 가라는 듯 후드득 떨어진다. 따라가고 따라가다 보면 저 뭉게구름 맞닿은 어딘가에 내 건조한 정신을 누일 짙푸른 바다가 있을 것이다. 길섶에 클로버 군락이 점점이 새하얀 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참 희한한 날이다. 눈을 부릅떠도 한 번도 찾지 못했던 네잎 클로버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만으로 희한하다고 할 수 없다. 오잎 클로버, 육잎 클로버가 눈에 띄는 게 아닌가. 무슨 대발견인가 싶어 찾아보니 실제로 오잎, 육잎 클로버가 있단다. 온난화로 인한 돌연변이라나. 가녀린 갈대 나부끼는 둑에 앉아 뱀 등처럼 느릿느릿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고즈넉한 강변 풍경에 마음은 여유로워진다. 눈을 감고 그 여유로움에 몸을 실어 흘러가 본다. 푸른 바다가 눈보다 살갗에 먼저 다다라 간질인다. 바다가 내 품 속에 들어온다. 눈을 뜨니 금빛 저녁 햇살이 저만치서 손을 내밀 듯 다가온다. 저렇게 맑은 하늘과 눈부신 황혼을 본 적이 있었던가. 네잎, 오잎, 육잎 클로버와 함께 책갈피에 담아 두고 싶었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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