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설향(雪香)/이순녀 논설위원

    경북 상주에서 딸기 농사를 짓고 있는 대학 후배네 농장에 올겨울 첫 수확한 딸기를 택배로 주문했다.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한알 한알 정갈하게 포장된 딸기는 마트에서 파는 딸기의 두 배는 족히 될 만큼 컸다. 맛도 아주 좋았다. 대기업 부장으로 잘나가다 문득 “두 딸이 아빠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로 바쁘게 살아서 뭐하나” 싶어 몇 년 전 귀농을 택한 후배의 땀과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택배 상자에 동봉된 딸기 농부의 정감 어린 편지를 읽어 내려가다가 ‘설향’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멎었다. 후배가 재배하는 딸기 품종이란다. ‘눈의 향기’라니. 얼마나 어여쁜 이름인가. 후배는 “늘 첫눈 내릴 즈음에 첫 딸기를 수확하기 때문에 제게 눈은 곧 딸기”라고 했다. 3월 어미 모종을 심으면서 시작된 1년 농사의 결실을 알려 주는 전령이니 어찌 눈이 반갑지 않을까. 딸기 농부가 알려 주는 맛있는 딸기 고르는 팁. 울퉁불퉁 못생겼더라도 알이 큰 것을 골라야 실패할 확률이 낮다. 또 딸기도 후숙(後熟)을 하기 때문에 수확 후 하루 이틀 지난 딸기가 더 맛있다고 한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가지 않은 길/황수정 논설위원

    집 뒤편에 없던 길이 새로 났다. 아파트를 에워싼 잔디마당의 샛길이다. 멀쩡한 길을 놔두고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발길들이 한동안 마뜩잖았다. 가방을 메고 줄레줄레 뛰는 아이들이야 일분이 급한가 싶었다. 바쁠 것도 없이 오며 가며 잔디밭에 올라서는 발길에는 번번이 심사가 꼬였더랬다. 그러기를 몇 달. 어쭙잖은 발길, 조심스러운 발자국, 노련한 발소리…. 나 모르는 사이 얼마나 많은 발자국과 발소리가 지나고 또 쌓였던 것일까. 얼금얼금 흉 자국 같던 잔디밭 길이 말짱한 샛길로 다져졌다. 가로등 아래 말갛게 목선을 드러낸 오솔길이 되어 제법 운치마저 풍긴다. 몰라서들 버려두는 건지, 알고들 아껴 보는 건지 가지가 휘게 매달려 마르는 구기자 붉은 열매와 묘하게 빚어내는 겨울밤의 정취. 그 길을 이제는 고맙게 걷고 있다. 루쉰의 오래된 문장을 생각하며.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었고, 걸어가는 발길이 쌓여서 길이 되는 것이라는. 희망도 땅 위의 길과 같다는. 서툰 발길로 길 없는 길의 모퉁이를 돌다 문득 이마에 부딪치는 것. 희망은 정말 그런 것인지 모른다. sjh@seoul.co.kr
  • [길섶에서] 사랑의 연탄/최광숙 논설위원

    이번 주 강추위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춥다 해도 어린 시절의 매서운 겨울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외풍은 심하고 난방시설도 제대로 안 갖춰진 때라 실제 느끼는 체감온도는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이맘때쯤이면 집집마다 월동 준비를 했다. 어머니께서 연탄 100장을 창고에 들여놓은 뒤 겨우살이 준비를 끝냈다며 환한 웃음을 짓던 기억이 난다. 올해 연탄값이 19.6%나 대폭 인상돼 550원 하던 연탄 1장 가격이 650원으로 100원 정도 올랐다고 한다. 여전히 연탄을 사용하는 이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연말을 맞아 사랑의 연탄 나눔 활동도 이어지지만 태부족이란다. 과거 연탄 기부에 앞장서던 기업들이 최순실 파문 등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연탄값은 오르고 기부의 손길은 줄어드니 에너지 빈곤층의 설움만 커지는 계절이다. 더욱이 예전에는 모두가 추웠지만 지금은 반소매를 입고 한겨울을 나는 이들도 많으니 심리적 추위는 더 클 수 있다. 연탄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에게는 늘어나는 복지예산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대봉감/임창용 논설위원

    대봉감을 처음 맛보았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십수 년 전 지리산 기슭에 터 잡고 살던 지인을 방문했을 때다. 그는 멀리서 온 손님을 대접한다며 차와 함께 흰 접시에 대봉감을 내왔다. 대봉감은 그 크기만으로도 날 압도했다. 아이 주먹만 한 홍시에만 익숙했을 때였으니까. 껍질을 살짝 벗기고 찻숟가락으로 속살을 떠먹으면서 ‘참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감사했었다. 며칠 전 퇴근하니 아내가 대봉감 세 개를 큰 접시에 담아 내놓는다. “이 귀한 걸 한꺼번에 내놓느냐”란 한마디가 나올 수밖에. 아내는 대뜸 “뉴스도 안 보느냐”고 핀잔을 준다. 15㎏ 한 상자를 2만원에 샀다면서. 세상에. 큰 것 하나면 한 끼를 때우고도 남을, 그 귀한 대봉감이 1000원도 안 한다고? 뉴스를 검색해 보니 농가들이 대봉감을 논밭에 쏟아붓는 사진들이 주르륵 달려 나온다. 재배농가가 는 데다 올해 풍년이 들어서란다. 기사엔 ‘경로당에라도 기부를 하지 그 아까운 걸’이라며 안타까워하는 댓글들이 달렸다. 농민들이 오죽하면 자식같이 키운 걸 버릴까. 공급을 줄여서라도 그 ‘귀함’을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 [길섶에서] 다이어리/김균미 수석논설위원

    2018년도 다이어리와 수첩이 책상 한쪽에 놓여 있다. 새해 다이어리가 생기면 휘리릭 대충 책장을 넘겨 본 뒤 공휴일과 가족 생일 등 기념일을 표시해 두곤 했는데, 스마트폰이 생긴 뒤로는 그나마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회사 다이어리는 회의 내용이나 지시 사항을 적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일 게다. 중간중간 지시에 대한 코멘트나 낙서를 끄적거리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잊어버리기 전에 메모해 두기도 한다. 다이어리에 적은 내용을 언제 다시 읽어 볼까 싶지만, 뒤적거리다 보면 잊고 지냈던 자신을 그 속에서 발견할 때가 많다. 이런 일이 있었나, 이런 생각도 다 했었나 싶다.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한 달, 일 년을 지내놓고 나면 뭘 했나 허탈해질 때가 많다. 이럴 때 다이어리를 들춰 보면서 뚝뚝 끊어진 기록 조각들로 마음의 빈 곳을 채우기도, 새롭게 마음을 다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종이 다이어리든지 컴퓨터든지 휴대전화든지 메모를 남기는 일, 많은 것이 자동화된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기록·메모 때문에 예기치 않게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있지만. 김균미 수석논설위원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결단/박건승 논설위원

    마땅히 잘라야 할 것을 제때 자르지 못해 훗날 화를 입는 일이 적지 않다. 이른바 ‘당단부단, 반수기란’(當斷不斷, 反受基亂)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말이다. 좀 심하게 말하면 싹수 없는 것은 재앙을 반드시 불러오니 자를 땐 인정사정 보지 말고 잘라야 후환이 없다는 것이다. 다사다난한 해를 보내면서 유난히 생각나는 단어다. 화(禍)와 혼란의 근원이라 보는 까닭이다. 3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문고리 3인방’ 등에 대한 인적 쇄신 요구를 거부한 이후 연쇄적으로 불거진 국정 농단, 국정원 사태, 박 전 대통령 강제 출당…. 파노라마의 연속이었다. 정치권도 피곤했겠지만 국민들 또한 에너지가 고갈할 지경이었다. 어디 인간사에만 한정되는 일이겠는가. 집 터 주변의 가시풀도 제때 제거하지 않으면 뒷날 집주인을 괴롭히지 않던가. 썩은 부위는 확실히 도려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성한 부위까지 썩게 만드는 법. 이 가르침만 깨달아도 올해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퇴영적 역사의 반복과 불행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당단부단, 반수기란’. 내일로 절대 미루선 안될 일이다. ksp@seoul.co.kr
  • [길섶에서] 글쓰기/손성진 논설주간

    시 쓰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듯이 글쓰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벌써 기자 생활 30년째인데 말이다. 다른 사람이 잘 쓴 글을 탄복하며 여러 번 읽어 보고 흉내도 내보려 하는데 역부족이다. 북송 시대 구양수의 3다론, 즉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란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중에서 ‘상량’이란 ‘헤아려서 잘 생각함’이란 뜻인데 사고, 생각(思)을 열심히 하라는 말일 게다. 거의 매일 글을 쓰니 셋 중에 그래도 다작은 해 온 편인데 내 글이 부족함은 다른 두 가지가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많이 읽고 그것을 토대로 생각을 더 하면 좋은 글이 나올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나름대로 하나의 원칙은 있다. 맛깔스럽게 글을 쓰는 것도 포장을 잘하는 것처럼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멋을 부리려 하지 말고 쉬운 표현으로 진솔하게 쓰는 게 내 방식이다. 화장을 진하게 한다고 언제까지나 본 얼굴을 감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글의 형식보다는 글의 내용, 다시 말해 그 속에 담긴 깊이와 진실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길섶에서] 자연인/서동철 논설위원

    휴일이면 TV를 켜고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다 결국 ‘나는 자연인이다’에서 멈추곤 한다. 온종일 적어도 하나의 채널에서는 언제나 이 프로그램이 나오다시피 하니 희한한 일이다. ‘리모컨 투어’의 종착지가 ‘자연인’인 사람이 나 말고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운치 있는 산장 주인이 아닌 한 ‘산에서 혼자 사는 남자의 이야기’는 화려할 수가 없다. 주인공 대부분은 뭔가 사연이 있거나, 건강에 문제가 있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사연과 심각한 건강 이상이 겹쳐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다. 그렇게 산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한 자연인들은 이제 도라지에 더덕, 송이버섯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두루 캐먹는다. 적어도 먹을 것만으로는 신선(神仙)이 부럽지 않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자연인’의 묘미는 맨 마지막 장면에 있는 것 같다. 혼자서 꾸려 나가는 산에서의 삶에 나름대로 적응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2박 3일 동안 동고동락한 개그맨 출연자와 헤어지는 장면에서는 진한 아쉬움을 드러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 자연도 좋지만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지….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개파라치 걱정/황성기 논설위원

    개와 개를 키우는 사람에게 요새는 수난 시대다. 9월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에서 발생한 ‘그 사건’ 때문이다. 지난주 일요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길 가던 할머니에게 한참을 혼나는 30대 여성을 봤다. 목줄을 하고 개와 산책하던 이 여성은 “왜 공원에 개를 데리고 오느냐”며 할머니에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여성은 “오늘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는다”고 했다. 여의도공원은 목줄을 하면 개의 출입이 가능하다. 남성보다는 여성 견주에게 시비를 거는 행인들이 많다는 얘기도 듣는다. 맹견 관리를 강화하는 동물보호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통과됐다. 맹견이 외출할 때 목줄, 입마개의 착용을 의무화하고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만시지탄이지만 안전한 사회를 위한 일보 전진이다. 내년 3월 22일부터는 ‘개파라치’도 시행된다. 목줄을 하지 않는 견주를 신고하면 1만~2만원의 포상금을 주는 내용이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개를 간간이 목격한다. 파파라치가 없으면 사회의 질서는 요원한 것일까. 내년 봄 견주와 개파라치 ‘대결’이 벌써 걱정이다.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자문자답/진경호 논설위원

    인터뷰를 했다. 직업탐방 동아리 활동을 하는 고교 1년생 넷이 찾아와 언론은 무엇이고 기자는 무엇인지를 물었다. 역할극이 이런 것이던가. 30년 가까이 질문 던지는 걸 주업으로 삼은 터, 어색했다. 인터뷰에 앞서 보내온 질문지 앞에서부터 손길은 밤길을 만난 듯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더듬었다. 인터뷰이가 돼 둘러싸여 앉은 동안엔 해맑은 아이들 표정에 입꼬리가 연신 올라갔지만 옷은 불편했다. ‘언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요?’ ‘기자생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요?’ ‘언론은 정치적 압박을 받나요? 해결할 방법은요?’ 초롱한 눈망울을 갖고 어떻게 이리도 묵직한 질문을 그토록 가볍게 던지던지…. 단언컨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답하는 건 국민 소통을 주제로 한 학술 세미나에서 말하는 것보다 몇 곱절은 어렵다. 태어나 기자를 처음 만나고 신문사를 처음 구경한 아이들이 달뜬 표정으로 돌아갔건만, 아이들이 던진 청정한 질문은 귓가를 떠날 줄 모른다. 언론은 뭐죠? 우리들에게 좋은 세상을 넘겨줄 수 있나요? 우리는 행복할 수 있나요? 인터뷰,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 jade@seoul.co.kr
  • [길섶에서] 신념/이순녀 논설위원

    세파에 속절없이 흔들릴 때마다 바위처럼 단단한 신념을 지닌 이들이 부럽고 존경스럽다. “신념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목적”이라고 한 윈스턴 처칠에 따르면 ‘목적 없는 삶’을 사는 건 아닐까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간혹 신념이 지나쳐 남의 말을 무시하는 이들을 보면 당황스럽고 불편하다. 남이 반대한다고 신념을 꺾어서도 안 되지만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배척해서도 안 되는데 강한 신념이 독단으로 치닫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본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대로 신념이 감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신념에 차서 저지른 실수는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2차대전 때 일본 제국주의 정치선전에 앞장섰던 노(老)화가가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하는 말이다. 신념은 갖기도 어렵지만 올바르게 지키긴 더 어렵다. 잘못을 인정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들국화의 노래/박건승 논설위원

    초겨울이면 장소 불문 즐겨 듣던 전인권과 김광석의 노래를 두 해째 애써 모르는 척하며 지냈다. 그들 노래에 토라지기라도 한 것마냥. 비극의 가족사에 휘말린 고 김광석의 노래는 가슴만 더 후벼 파며 귓속에 아예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난 대선 때 안철수 후보 공개 지지로 곤욕을 치렀던 ‘레전드 들국화’의 전인권 노래를 듣는 것 역시 버겁다. ‘협량의 세월’을 살았다는 자책 탓인지 모르겠다. 전인권은 지난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상록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안 후보를 지지했다고 비판했던 일부 참석자들은 격려와 함성을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인권씨,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가 박근혜 정권의 연예인 블랙리스트 파문과 맞물려 현 정권에서 눈에 밟히는 이유는 뭘까. 그는 아티스트일 뿐이다. 숨어서 댓글공작이나 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다. 말 나온 김에 만추의 북한산 자락 밑 청와대에서 들국화식 통합의 노래판이라도 하나 벌여 보면 어떨까. ‘그대여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픔 뒤로하고…훌훌 털어버리고….’ 분열의 시대다.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길섶에서] 죽음과 사랑/손성진 논설주간

    매서운 바람에 나목들이 떨고 있는 초겨울 풍경이 쓸쓸하다. 이 겨울이 더욱 쓸쓸한 것은 한 지인의 황망한 죽음 때문이다. 병이 있음을 안 지 겨우 한 달 만에, 이순(耳順)을 몇 년이나 남겨 놓은 젊은 나이에 무엇이 그리 급한지 서둘러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썩 친한 사이는 아니었는데도 그가 죽기 얼마 전 나는 그를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잘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렸었다. 아까운 그의 나이 때문이라기보다 ‘왜 그동안 더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시간으로 보면 찰나다. 수명을 다 누리기 전에 누구나 짧은 순간에 삶의 경계를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은 허무하다고 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모든 의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귀결된다. “죽음에 직면할 때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자신에게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 예일대 교수인 철학자 셸리 케이건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매 순간 사랑하고 열심히 살라는 말일 것이다. 황망한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그늘막, 늘그막/황수정 논설위원

    옷깃 여며 종종걸음 하는 산책길에 실없이 생각한다. 낙엽 마르는 냄새를 왜 향수로 담지는 않나. 바스러지게 마르는 공기에는 운치보다 처연한 기운이 앞서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가을 들머리부터는 초목 마르는 냄새가 좋아 공원 길을 붙들고 샅샅이 걸었다. 제멋대로 한철 지낸 잡풀들이 우북하게 쓰러져 몸 말리는 초저녁이면, 퀭한 그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늘을 더듬던 큰 나무들은 말할 것도 없다. 더는 욕심이 없네, 빈 몸으로 여위는 냄새는 짠해서 어찔하고. ‘그늘막을 나무에 묶지 마시오.’ 여름에 걸렸을 귀퉁이의 팻말이 오늘에야 똑바로 읽힌다. 나는 어째서 ‘그늘막’을 ‘늘그막’으로 읽었을까. 양푼만 한 잎사귀로 여름 그늘의 절정을 보여주던 저 칠엽수 탓이다. 붉고 노란 낙엽을 낙화처럼 뿌리며 한 시절을 닫고 있는 저 왕벚나무 탓이다. 칠엽수와 왕벚나무를 온전히 사랑하는 방법. 팔월 한낮의 무성했던 그늘과 십일월 황혼녘의 강마른 잎을 똑같이 기억해 주는 것. 그늘막의 시절을 지나 순하게 엎드릴 때를 아는 세상의 모든 늘그막에 고개 숙여 인사를. sjh@seoul.co.kr
  • [길섶에서] 짚동/이경형 주필

    초겨울 들판이 삭막해 보인다. 옛날엔 추수를 끝내면 탈곡한 볏단으로 짚동을 지어 논에 줄지어 세워 놓는다. 요즘은 흑·백 비닐로 볏짚을 감아 싼 ‘곤포 사일리지’들이 짚동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짚동은 짚단을 세워서 둥그렇게 쌓아 새끼로 묶어 짚단 3배 높이로 원통처럼 만든다. 벼 이삭들이 남아 있어 참새들이 모여들었다. ‘곤포’는 볏짚을 햇볕에 3~4일 말려 발효액을 뿌린 뒤 지름 1.2m, 무게 350kg 크기로 만들어 비닐랩으로 밀폐 포장한 것이다. 소의 조사료용으로 개당 7만원 선에 거래된다. 기러기 떼가 날아가다 일제히 논에 내려앉아 벼 그루터기를 쪼고 있다. 벼 베기, 탈곡, 볏단 수거가 모두 트랙터로 자동 처리되다 보니 논에도 기러기들이 먹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초가집이 많던 시절, 이때쯤 농촌에선 지붕에 햇짚으로 엮은 새 이엉과 용마름을 올린다. 저녁에는 짚동에서 볏단을 꺼내 물을 뿌리고 떡메질로 부드럽게 한 뒤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 농한기 벌이를 한다. 짚동 대신 곤포들이 널려 있는 들판 풍경은 분명 문명의 진보일 텐데 왜 삭막해 보일까. 이경형 주필 khlee@seoul.co.kr
  • [길섶에서] 사랑의 온도/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올해도 어김없이 서울 광화문광장을 시작으로 전국에 ‘사랑의 온도탑’이 세워졌다. 올해 사랑의 온도탑은 ‘사람 인(人)’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나눔의 주인공이란 의미를 담았단다. 사랑의 온도탑이 세워진 걸 보니 2017년도 한 달, 30여일밖에 남지 않았다. 나눔 캠페인은 내년 1월 31일까지 3994억원의 기부금 모금이 목표란다. 사랑의 온도탑 수은주는 목표액의 1%인 39억 9400만원이 모일 때마다 1도씩 오른다. 지난해에는 걱정과는 달리 108.1도로 100도를 훌쩍 넘었다고 한다. 며칠 있으면 연말 기부의 상징인 한국구세군의 빨간 자선냄비도 시내 곳곳에 등장한다. 크리스마스캐럴이 사라진 거리에 울려 퍼지는 구세군의 종소리는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고개를 들라’고 속삭일 게다. 경제적으로 각박해졌다지만 작은 정성이라도 나누는 건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과 스스로를 안아 주며 괜찮다 격려하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닐까. ‘연례 행사’면 어떤가. 사랑의 온기를 나누면 그것으로 족하지.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나목(裸木)/오일만 논설위원

    요사이 강풍을 동반한 추위 탓인가, 집 주변 은행나무들이 힘겹게 지탱하던 이파리들을 떨어냈다. 풍성했던 푸른 여름과 화려했던 노란 가을의 기억을 뒤로한 채 이제 나목(裸木)으로 겨울을 맞이한 것이다. 하루 밤새 휑한 뼈대를 드러낸 주변 나무를 보면서 문득 어릴 적 읽었던 신경림 시인의 ‘나목’이 떠올랐다.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무심히 지나쳤을 겨울 나무를 보면서 마음 밑바닥 저편에서 건져 올린 시인 특유의 인생관과 그 감성이 가슴에 와 닿는다. 복잡한 인연들이 희로애락의 파노라마 속에 사는 우리네 인생들. 말이 말을 낳고 그것이 다시 칼이 되어 서로의 심장을 찌르는 이 엄혹한 세상살이. 가끔은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 홀로 추위를 견디며 태양과 별빛을 관조하는 나목의 그 무위가 부럽기도 하다. 을씨년스러운 겨울을 실감케 하는 나목을 보면서 가끔은 그것이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내면의 가식을 벗고 차분히 응시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퇴직 선배의 충고/최광숙 논설위원

    얼마 전 오랜 공직 생활을 마치고 퇴직한 한 선배를 만났다. 봉사활동 등을 하며 보람 있게 지내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후배들은 이구동성으로 ‘먹고 놀 수’ 있는 선배의 삶이 부럽다고 했다.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직장인들은 상반된 두 마음을 동시에 갖는 것 같다. 퇴직 후 뭘 먹고 살아야 하나라는 걱정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직장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꿈꾼다. 자신의 삶을 동경하는 후배들에게 선배가 얼마 전 있었던 일을 전한다. 그는 평소 1000여만원까지 급히 쓸 수 있는 마이너스 통장을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퇴직 후 그 서비스를 연장하려고 했다가 거절당했다고 한다. 직장이 없다는 이유였다.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한 자산가인 그이지만 “아무리 재산세를 많이 내도 직장인의 신용보다 못하더라”는 현실을 뒤늦게 깨달았단다. 조직의 울타리에서 있을 때는 몰랐던 현실. 조직을 나오니 찬바람 쌩쌩 부는 한겨울이 따로 없단다. 그도 일찍 명예퇴직한 것을 후회하는 눈치다. 선배가 후배들한테 신신당부하는 말이 압권이다. “삽으로 퍼서 들어낼 때까지 자리를 지켜라.”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두껍바위/서동철 논설위원

    부모님의 산소가 있는 시골 군(郡)에서 발행되는 신문을 얼마 전부터 받아 보고 있다. 그 고장과 관련된 문화행사에 갔다가 지역 신문 기자와 우연히 명함을 주고받은 직후부터 신문이 배달되고 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는데, 신문대금을 내라는 지로용지가 붙어서 오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계속 봐야 할지 고민도 없지 않았다. 얼마 전 이 신문을 넘겨 보다 ‘두껍바위’라는 제목의 기사에 눈길이 갔다. 마을의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기로 한 날 큰비가 내렸고, 약속을 지키려 불어난 냇물을 건너던 처녀가 급류에 떠내려가자 총각은 두꺼비 모양 바위가 됐다는 전설이다. 그런데 그 두껍바위가 사라졌다가 30년 만에 나타났다는 이야기였다. 경지정리를 하면서 간 데를 알 수 없던 두껍바위를 도로 확장공사 과정에서 다시 찾았다는 것이다. 전설은 면지(面誌)에도 담겼다고 한다. 마을에는 소중한 문화유산일 것이다. 이 이야기를 주요 기사로 썼다. 인간의 일이 아닌 것 같은 흉포한 뉴스만 넘치는 요즈음이다. 소박하지만 미소를 머금게 하는 기사들을 더 볼 수 있다면 신문값을 내도 될 것 같다.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탈‘호갱’의 길/진경호 논설위원

    자동차보험 갱신일을 앞두고 보험 가격 비교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일주일 넘게 ‘전화 폭격’을 맞았다. 이름과 생년월일, 전화번호를 입력하면 곧바로 시중 보험사 보험료를 한눈에 비교해 줄 것처럼 돼 있으나 실상은 딴판이었다. 불쑥 상담원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특정 보험사를 전화로 연결해 주고는 그만인 사이트가 있는가 하면 문자로 시중 다이렉트 보험사들 상담 전화번호를 알려 주곤 그만인 사이트도 있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에 동의한 죄로 시도 때도 없이 보험사들의 보험 가입 권유에 시달렸다. ‘보험견적 사이트를 통해 한눈에 보험료를 비교할 수 있다’는 기사를 수도 없이 봤는데, 대체 이게 무슨 현실이란 말인가. 기사를 다시 뒤지고, 전화로 확인 취재도 해본 뒤에야 손해보험협회가 운영하는 ‘보험다모아’와 일반사업자가 운영하는 ‘자동차보험가격비교사이트’의 차이를 알게 됐다. ‘한눈 비교’는 보험다모아에서만 가능하고, 나머지 사이트들은 각 보험사와 연결된 광고 사이트에 불과했다. 이걸 알려 주는 기사, 못 찾았다. ‘호갱’을 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jad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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