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눈물/최광숙 논설위원

    미국의 팝가수 마이클 잭슨 형제처럼 오스몬드라는 미국의 형제 그룹이 있다. 이 그룹의 막내 지미 오스몬드가 9살 때 불러 히트한 곡이 ‘나의 어머니’(Mother of mine)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사랑을 받은 곡이다. 얼마 전 ‘천상의 목소리’ 소프라노 신영옥이 부른 이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그의 노래는 부드러우면서도 가슴 깊은 울림을 준다. 왠지 모르게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귀가 편안하다. 아무리 그의 노래를 좋아하지만 노래를 듣다가 울게 될 줄을 몰랐다. 더구나 이 곡을 이번에 처음 들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에도 들었던 익숙한 곡이다. 마음이 허전한가. 나이 탓인가. ‘내가 어릴 때/당신은 내가 잘 자랄수 있도록 해야 할 바른길을 보여 주었습니다/ 당신의 사랑 없이, 제가 어디에 있을까요~’ 아무래도 눈물의 정체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 때문일 게다. 이제 힘들어도 내게 ‘바른길’을 안내해 주는 이가 없다. 내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야 한다. 가까이 어른이 안 계신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이제 점점 내가 어른 노릇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온다.
  • [길섶에서] 생일과 미역국/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상화 선수의 생일이 2월 25일이란다.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일이다. 이 얘기를 듣고 보니 ‘겨울 아이’ 이상화는 올림피안이 될 운명이었나 싶다. 이상화가 생일날 선수촌에서 미역국을 먹을지는 모르겠지만, 생일 하면 아직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에 미역국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아침잠 많은 식구들을 깨워 식탁에 앉아 미역국에 밥 한술 뜨며 주고받는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는 관성적으로 치르는 통과의례다. 몇 해 전 유난히 뜨거웠던 한여름. “너희 어머니 이렇게 더울 때 너 낳느라 엄청나게 고생하셨겠다. 미역국은 네가 먹을 게 아니라 네가 어머니 끓여 드려”라던 친구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건 낳아 주신 엄마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생일날 직접 미역국을 끓여 드릴 수는 없지만, 그걸 기대도 하지 않으시겠지만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로 대신한다. 어버이날에만 감사 인사 하란 법이 어디 있나. 생일, 내가 태어난 날이자 부모님이 낳아 주신 날이다. 김균미 수석논설위원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재회/진경호 논설위원

    신입 기자 채용을 위한 집단토론 시험에서 A를 봤다. 지난해 같은 자리에서 봤던 친구다. 30분의 짧은 시간이었으나 제법 기자의 소양을 보였던 친구, 그러나 그날 이후로 본 적이 없던 친구. 1년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A는 다시금 서울신문의 문을 두드렸다. 낯익은 얼굴은 A만이 아니었다. B도 있었고 C도, D도 있었다. 조는 달랐으나 모두 1년 전 A처럼 집단토론 시험에 참여했던 친구들이다. 결코 반가울 수 없는 재회, 눈을 맞출 수 없었다. 1년 넘게 취업의 문, 기자의 문을 두드리는 자신들을 알아보는 내 시선이 그들 가슴을 할퀼까 봐, 아는 체를 못 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도 나를 비켜 갔다. 서른 안팎은 됐을 텐데, 1년을 어떻게 보냈을까.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다 다시 서울신문 앞에 선 것일까, 아니면 어떤 방향이었든 발을 내디뎠다 멈추고 다시 길을 찾고 있는 것일까. 넷의 목소리는 1년 전보다 한결 작았다. 말의 날도 무뎌져 있었다. 조금은 지친 듯했고, 실패에 좀더 익숙해진 듯했다. 없었으면 좋았을 재회…, 그들에게도 이 겨울이 끝자락이길 빈다. jade@seoul.co.kr
  • [길섶에서] 강원도 치킨/서동철 논설위위원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장인 대관령면의 올림픽플라자 옆으로는 송천이 흐른다. 송천은 도암댐을 지나 아우라지에서 골지천에 합류한다. 조양강을 이룬 물줄기는 정선읍내를 지나 영월에 다가가면서 동강이 된다. 메밀전이 맛있는 고장을 관통하는 물줄기다. 평창올림픽의 본부 역할을 하고 있는 횡계에는 다른 ‘메밀전 문화권’에는 없는 먹거리가 있다. 바로 황태다. 송천 주변은 몇 해 전까지 황태덕장이 즐비했다. 지금도 현대적인 올림픽플라자와 옛날 방식 그대로인 100m 밖 황태 덕장의 조화는 절묘하기만 하다. 개인적으로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만든 메밀전과 황태구이는 그 자체로 맛있다. 그렇다 해도 메밀과 황태라는 강원도 대표 재료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새로운 먹거리의 개발은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라고 생각한다. 며칠 전 평창 여행에서 횡계 황태가스와 봉평 메밀닭강정을 맛봤다. 황태가스는 기대가 컸고 맛도 나쁘지 않았지만 다음에도 주문하지는 않을 것 같다. 메밀닭강정은 한국화한 미국식 치킨을 다시 평창화한 음식이 아닌가 싶다. 누가 봐도 ‘강원도 치킨’이다.
  • [길섶에서] 평창 유감/황성기 논설위원

    일본 신문사에서 일하다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재일교포 2세 신인하 기자는 평창동계올림픽을 취재하기 위해 지난 1일 한국에 왔다. 주된 취재가 피겨스케이트라 스스로 ‘계절노동자’라 부르는 그에게 동계올림픽은 빼놓아서 안 되는 대목이다. 강릉 호텔에 1박 28만원짜리 숙소를 정하고 날마다 미디어센터와 주요 경기장을 다니고 있다. 한 달 체재에 드는 돈은 1000만원. 언론사 소속이면 취재출입증, 비용까지 제공받지만 프리랜서이다 보니 출입증은 고사하고 티켓 구입에서 소소한 교통비까지 100% 자부담이다. 그래도 한국에서 열리는 30년 만의 올림픽을 보고 싶었다. 평창올림픽 대회 운영이 능숙한 점, 북한 참가로 올림픽이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점을 느꼈다는 신 기자. 한국인들이 올림픽을 즐기고, 스포츠 영웅을 존경하고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도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부터 한국에서 열리는 종합대회를 취재해 왔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 경기장을 오가는 셔틀버스가 정해진 운행 시간을 지키지 않아 취재에 애를 먹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아쉬워한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책동무/이순녀 논설위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가 타인의 흔적을 발견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책 속에 무심히 끼워진 대출확인증이다. 아마도 책갈피로 활용하다가 버리는 걸 깜박한 모양이다. 드물게는 두 사람의 대출확인증이 같이 끼워져 있기도 한데 그럴 때는 일부러 남겨 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보다 앞서 책을 빌린 이가 누군지 안다는 건 조금은 기이한 경험이다. 알 수 있는 정보라야 이름 석 자뿐이지만 같은 책을 골랐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반갑다. 특히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보석 같은 책일 경우 친밀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마음 잘 통하는 책동무를 찾은 기분이라고 할까. 전산 시스템이 도입되기 이전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는 대출카드를 일일이 손으로 작성해야 했다. 책 맨 뒷장엔 황토색 봉투와 흰색 대출카드가 어김없이 붙어 있었다. 릴레이하듯 누군가의 이름 뒤에 내 이름이 오르고, 또 내 이름 뒤엔 생면부지의 이름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 시절, 나와 같은 책을 공유했던 수많은 책동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떡국/임병선 선임기자

    설 연휴 전날 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베트남 학교에 화장실 지어 준 일에 대한 기사를 보고 연락해 와 알게 된 분이었다. 그분도 몇 년째 베트남 돕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연말에 노인들 영정 촬영 봉사를 했는데 회원 한 분이 쌀 한 가마니 내놓으셨어요. 가래떡 뽑아 떡국 대접했는데 남은 것 좀 나눠주려고요.” 우리 집 근처에 일터가 있는 그분은 전철역에서 기다리겠단다. “저희, 밥은 먹고살아요” 했더니 “뭘요. 아무것도 아닌데요” 그런다. 떡이 든 봉지를 받아드니 헤어질 때 “오래돼서 곰팡이 핀 게 있을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믐날 저녁 떡국을 쑨다며 봉지를 열어 본 아내 표정이 이상하다. 살펴보니 곰팡이 핀 떡살이 상당하다. “어휴 당신은, 뭐 이런 선물을…. 나 이거 버릴래요.” 화를 버럭 내고 말았다. 잠깐 토닥거리다가 부부가 나란히 가위로 곰팡이 부분을 도려냈다. 떡국 끓여 먹었는데 맛만 있다. 하지만 자꾸 그분 얼굴이 떠올라 목 넘김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bsnim@seoul.co.kr
  • [길섶에서] 설날 풍경/김성곤 논설위원

    설 대목 장날 멀리 동네 앞 제방에 양손에 보따리를 든 동네 어른들의 실루엣이 드러나면 우린 모두 달려나갔다. 그중에서 장에 다녀오시는 어머니를 찾아내고 이기지도 못하는 짐을 들겠다고 우겼다. 그 속엔 바지와 점퍼 등 설빔…기대가 들어 있었다. 그 길은 서울로, 대전으로 돈 벌러 떠났던 우리의 삼촌, 고모, 형, 누나들의 귀성길이었다. 성공했든 못 했든 그들의 양손엔 꾸러미가 가득했다. 설날이면 그들은 친척집에서부터 이웃집까지 동네를 돌며 세배를 다녔다. 가는 집마다 한 잔씩 받아 마시면 점심 때쯤엔 거나해져 갈지자걸음으로 골목길이 좁아졌다. 우리는 풍년을 비는 어르신들의 풍장 대열을 따라다녔다. 마을 모정에서는 “모야~” 윷놀이 함성이 울려 퍼지고…. 그렇게 설날 해는 기울었다.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은 한 집 건너 빈집이다. 그마저도 설이면 역귀성으로 밤에 불 들어오는 집이 많지 않다. 아버지가 서울의 병원에서 눈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어서 올해 처음으로 부모님과 서울에서 설을 쇤다. 문득 떠오른 세시풍속이다. 김성곤 논설위원 sunggone@seoul.co.kr
  • [길섶에서] 희망가/박건승 논설위원

    왠지 마음이 허하면서도 뭔지 모를 기대감에 설레는 2월. 힘을 내고 싶고, 힘을 내야지 거듭 다짐하는 것도 매년 이즈음이다. 2월을 굳이 색깔로 표현하자면 약간의 잿빛이랄까. 그래도 머잖아 좋은 날이 찾아오리라는 믿음을 주기에 버틸 만하다. 황금 개띠 해의 유난스러운 둘째 달. 유례없는 강추위에 평창올림픽이다, 남북 단일팀이다 해서 여념이 없다. 어떤 이들은 영하 17, 18도의 추위를 절감하면서 고개를 저었을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은 입춘 추위가 풀리면서 벌써 봄을 고대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어디 날씨뿐이겠는가. 평창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전령이 된다면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시인 문병란은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틔운다’고 희망을 노래했다. 양광모 시인은 봄 맞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2월에)이틀, 사흘쯤 더 주어진다면/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나/2월은 시치미 뚝 떼고/방긋이 웃으며 말하네/겨울이 끝나야 봄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봄이 시작되어야 겨울이 물러가는 거란다’고(‘2월 예찬’).
  • [길섶에서] 안부/황수정 논설위원

    입춘이 지나니 잊었던 안부가 궁금해진다. 도다리 쑥국, 산벚꽃, 산매화, 보리밭. 앞섰다 뒤섰다 어디쯤 대열 맞춰 오고 있는지 귀 밝은 척해 본다. 짧은 해를 놓칠라 빨래를 너는데, 텔레비전의 광고가 요란하다. 빨래 건조기를 들여 배짱 편히 살라고 한다. 햇볕 한 줌에 절절매지 말고 언제든 전기열로 빨래를 들볶아 말리라는 얘기다. 살얼음에 결려 꾸덕꾸덕한 빨래를 할머니는 겨우내 할머니만의 방식으로 말리셨다. 어린 우리 옷가지는 특별 대접이었다. 쩨쩨한 볕에 온종일 맡긴 빨래를 해가 떨어질 즈음에는 마당 안쪽의 큰솥에 불을 지펴 뚜껑 위로 옮겨 뉘셨다. 가실가실해진 옷가지에서는 불내가 설핏했다. 부지런히 햇볕을 쫓아 겨울 빨래에 공을 들이기는 어머니도 같았다. 제 손으로 볕에 빚지고 안달한 것은 집안 내력이었을까. 날마다 도타워지는 새물의 봄볕에 하필이면 설이 돌아오는 까닭을 알 것 같다. 그리운 일들에 아무쪼록 긴 안부를 물어보라고. 두 여인이 떠난 고향집 마루에 끝물의 겨울볕이라도 들여놓고 올 것이다. 길게 창을 열어 깊숙이, 오래.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모국어/최광숙 논설위원

    고등학교와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을 떠난 조카 둘은 한국말을 잘한다. 하지만 유치원 때 떠난 조카는 알아듣기는 하는데 발음은 영 시원찮아 마치 외국인처럼 한국말을 한다. 모국어도 오랜 기간 현지에서 습득해야 하는구나 싶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고려인 화가 안 블라디미르(90)씨가 보여 줬다. 얼마 전 ‘고려인 이주 80주년’을 맞아 제작된 한 방송의 프로그램에 나온 그는 또박또박 한국말로 말했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9살 때 연해주에서 우즈베키스탄행 기차에 올랐던 그는 북새통에 부모를 잃어버리는 비극을 겪고도 한국말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 감동을 준 것은 그의 조국애다. “나는 열렬한 애국자예요. 우리 민족을 사랑해요. 나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맺혔다. 고국은 고려인을 잊고 지냈지만 그들은 결코 고국을 잊지 않았다. 그 먼 곳에서 오랜 세월 모국어 등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 가는 그들에게 조국은 어떤 존재인가. 그들을 위해 조국은 무엇을 해야 하나. 고려인의 한국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혐핫’ 공감/임창용 논설위원

    점심 때 회사 동료가 순댓국을 제안한다. 잘 아는 집이 있는데 줄 설 각오를 해야 한다는 내 말에 동료가 ‘혐(嫌)핫’을 거론하며 평범한 순댓국집을 추천한다. 요즘 새 소비 현상으로 떠오른 혐핫은 널리 알려진 ‘핫’(hot)한 곳을 기피하는 소비 심리다. 괜찮다 싶으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만족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다. 업소 중에도 핫해지기 싫으니 인테리어나 음식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는 곳까지 생겨났다. 타인의 경험은 소비의 중요한 바로미터다. 대기 줄이 긴 식당 음식은 맛있어 보이고,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 책은 재미있을 것 같다. 한 해 수십만 명이 방문하는 여행 명소엔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버킷리스트에 담는 것들도 대개 남들이 열광하는 경험의 집합체다. 한데 남의 경험만 좇다 보면 결국 모방의 일상만 반복하기 쉽다. 남이 아무리 좋아해도 내가 만족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혐핫은 전통적인 소비 기준을 거부한다. 소비혁명인 셈이다. 트렌드를 추종하고, 거기 끼지 못하면 초조해하는 현대인들에게 혐핫이 자기 찾기의 모멘텀이 되었으면 한다.
  • [길섶에서] 어떤 ‘노쇼’/서동철 논설위원

    오기로 해놓고 오지 않는 것을 영어로 ‘노쇼’라고 하나 보다. 음악회처럼 티켓을 미리 팔았는데 손님이 오지 않으면 객석 분위기가 썰렁해지는 것 말고 주최 측 손해는 없지만, 예약한 손님을 무작정 기다릴 수밖에 없는 식당들은 고충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든 ‘노쇼’를 줄이자는 캠페인이 있기 전부터 예약을 ‘펑크’ 낼 상황이면 되도록 식당에 전화를 걸어 알려 주곤 했다. 그런데 가끔은 식당 주인들로부터 “전화를 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만큼 ‘약속을 어기는 손님이 식당 운영에 미치는 악영향이 큰 모양이로군’ 하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런데 며칠 전 강릉 여행길에 그런 짓을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 맛있다는 생선찜집에 예약을 했는데, 도착해 보니 통화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혹시 속초에 전화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껄껄 웃는다. 메뉴도 같고, 식당 이름도 같다고 했다. 같은 강원도니 당연히 전화의 지역번호도 같다. 속초 식당에 양해를 구했더니 뜻밖에 친절하게 받아준다. 하긴 속초로 갈 손님이 강릉에 예약하는 일도 잦다고 한다. 이런 ‘생쇼’가 있나.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리모컨과 AI/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얼마 전 집 인터넷과 TV 서비스 업체를 바꿨더니 음성인식 인공지능(AI) 셋톱박스를 설치해 줬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고 AI에게 원하는 채널이나 프로그램 이름을 말하면 음성을 인식해 명령을 이행한다. 어느새 소파에 앉으면 “○○야, TV 좀 켜줘”라며 AI를 ‘부리는’ 데 익숙해졌다.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게 훨씬 빠른데도 굳이 AI를 부른다. 손가락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으면 어떻게 숨은 쉬느냐는 타박도 흘려버린다. 그래도 아직은 리모컨이 더 편리하다. AI 스피커가 명령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사람들끼리 대화하는 와중에 자기 이름과 비슷하거나, TV 속 대사 중에 비슷한 발음만 나와도 찾았느냐고 묻는다. 두 개 이상의 명령에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답답할 때가 많다. 지금은 이래도 머지않아 AI가 가족 구성원에 따라 요일별 시간대별로 즐겨 보는 프로그램을 검색해 제공하고 추천해 줄 날이 오지 않을까. 리모컨이 사라지는 날. 편리해지긴 하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다. 이 기분은 뭘까.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시(詩)요일/진경호 논설위원

    슬그머니 다가와 넌지시 앉았다. 아는 척하지도 않았고, 모른 척 내치지도 않았다. 무심한 듯 고개 돌려 눈 한 번 맞췄고, 이내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다. 창비의 시 앱 ‘시(詩)요일’ 얘기다. 아니, 시 얘기다. 뭘 타고 왔는지 문득 스마트폰 창에 날아 앉았고, 시나브로 ‘시요일’이 날려 보낼 시 한 닢을 기다리는 중독이 일상에 얹어졌다. 시는 읽는 걸까, 보는 걸까. 혹시, 잠기는 건 아닐까. 읽는 것도, 보는 것도 아닌 잠기는 것, 마음을 내려놓고 추억을 길어 내고 상상에 날개를 다는 것…. 타인의 시선을 훔치고, 그렇게 훔친 시선에 살짝 마음을 데이고, 그렇게 데인 마음에 기분 좋은 몸살을 앓는 것…. 작가 이기주에겐 미안하지만 그가 쓴 ‘언어의 온도’가 해를 넘겨 베스트셀러 상단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현실은 슬프다. 말과 글에 상처 입은 세상의 신음이 그 책을 떠받치고 있다. 칼질, 도끼질이 난무하는 저 핏빛 댓글난을 시로 씻으면 어떨까 싶다. 하루하루가 시요일일 권리가, 아픈 우리에겐 있다. 그 무슨 말라비틀어진 소리냐 싶다면 당장 거울 앞으로 달려가 누가 서 있는지 보길 바란다. 그를 위해 울길 바란다. jade@seoul.co.kr
  • [길섶에서] 형식과 마음/손성진 논설주간

    매년 늦은 가을에 고향에 가서 선조의 시제를 지낸다. 그런데 시제를 진행하면서 절차를 누군가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적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젊은 세대는 시제 자체에 관심조차 없는데 어른들은 “제물을 여기에 놓아야 한다”, “술은 이렇게 따라야 한다” 하며 까다롭게 절차를 따진다.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것으로 언쟁이 붙는 일도 자주 본다. 유교적 풍습 때문이다. 제사는 밤 11시가 지나서 지내는 게 맞는데 퇴계 이황의 후손이 생활 편의상 저녁 시간으로 바꾸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유학의 거두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풍습을 버렸는데 일반 가정에서야 어떠랴. 그래도 집에서 지내는 제사의 시간이나 순서, 제물의 위치를 멋대로 바꾸지 못한다. 선조에게 죄를 짓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형식과 틀에 얽매여 살고 있다. 돌아가신 조상은 “너희가 편한 게 내가 편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데 말이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가짐일 터이다. 형식과 절차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조상을 섬기고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 [길섶에서] 잔 돌리기/황성기 논설위원

    얼마 전 여행 다녀온 일본의 고치 지방은 규슈 옆 시코쿠란 섬에 있는 4개 현 가운데 하나다. 일본 근대화를 주도한 인물 사카모토 료마가 태어난 곳이다. 일본의 고령화가 일찍이 시작된 곳으로, 대책 또한 일본에서 빨리 도입된 인구 75만명의 조그만 현이다. 기후가 온난해 우리의 프로·아마추어 야구단이 겨울 전지훈련으로 찾기도 한다. 친구 몇 명이 있어 고치에서 머무는 동안 저녁 식사에 술이 빠지지 않았다. 재미난 광경을 봤다. 술잔 돌리기다. 우리의 음주문화에서 거의 사어(死語)가 돼 가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데 놀랐다. 일본에서는 ‘헨파이’(返杯)라고 하는데 도쿄 같은 대도시는 물론 대부분 지역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고치에 잔 돌리기가 남은 이유가 재밌다. 이곳 사람들 말로는 남쪽의 태평양을 뺀 북동서가 산으로 둘러싸인 폐쇄성 때문이라고 한다. 결정적인 게 ‘주량으로 인간성을 재는’ 이 지역 습성을 꼽는다. 고치에서 배운 잔 돌리기 예법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닦아 건네는 것만은 실례라고 가르쳐 준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밤이 깊어 가는 것을 잊은 며칠이었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봄 마중/이순녀 논설위원

    사흘 춥고, 나흘 따뜻한 ‘삼한사온’은 옛말. 칠일은 삭풍 몰아치고, 칠일은 미세먼지 자욱한 ‘칠한칠미’가 올겨울 대세다. 쨍하게 춥거나, 숨 막히거나 둘 중 하나. 어차피 피할 수 없을 바에야 한파가 닥치면 깨끗한 공기에 감사하고, 미세먼지가 불어오면 추위가 꺾인 걸 위안 삼는 게 삶의 지혜일 터다. 자연은 이렇듯 완강한데 어느새 절기는 봄. 입춘(立春)이 내일이다. 말이 좋아 봄의 길목이지 입춘 전후의 추위는 소한, 대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성싶다.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 ‘입춘에 장독 깨진다’, ‘입춘 거꾸로 붙였나’ 같은 속담이 공연히 생겨나진 않았을 게다. 요 며칠 날이 좀 풀렸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혹한이 몰려온다는 소식이다. 다음주 중반까지는 영락없는 냉동고 신세. 그래도 마음은 벌써 봄 마중으로 달음박질친다. 꽁꽁 얼어붙은 회색빛 도시에 머지않아 따뜻한 봄볕이 내려앉아 온 세상이 생동감으로 새롭게 피어나는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입춘이란 두 글자가 마치 주문(呪文)처럼 조금만 참으라고, 조금만 버티라고 응원해 주는 것 같다.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아무나 살이’/박건승 논설위원

    살다 보면 자녀들에게 좋은 소리만 할 수 없는 법. ‘이건 하지 마’ 아니면 ‘이렇게 해’ 따위의 혹독한 잔소리를 어지간히 해댔다. 아들딸의 앞날을 위해 부모라는 이름으로. 녀석들은 용케 따라 줬지만 그들이 받았을 답답함과 숨 막힘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좋은 대학 들어가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고, 돈 많이 벌어 가정을 꾸리는 게 그간 성공의 공식이었기에. “성공엔 관심 없어! 난 ‘아무나’가 되련다”가 화두인 시대에 ‘2030’들은 외친다. “적당히 돈 벌고 좋은 사람들과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게 성공한 삶”이라고. ‘성공하지 못하면 불행’이란 편견을 거부하고 평범한 삶이 가장 행복한 것이란다. “(어른들은 억울하면 출세하라지만) 억울한데 왜 출세를 해야 하죠? 전 행복할 건데요”를 외치는 당당함이 부럽다. 더 치열하게 살고, 더 높이 올라가는 삶을 당연시하는 부모들로서야 허전함을 어찌할 수 없다. 부모들은 묻는다. “그렇게 정성껏 키워 놨더니 니 편할 대로만 사는 게 행복하더냐”고. 그러자 아들딸은 또 묻는다. “그 많은 성공을 어디다 쓰려고요. 그래서 행복하십니까”라고.
  • [길섶에서] 도루묵/황수정 논설위원

    오래된 까탈이 민망해질 때가 있다. 먹지 못했거나 않았던 음식을 아주 오랫동안 잘 먹었던 것처럼 먹고 있는 순간이다. 장례식장의 국밥이 이즈막에는 그렇다. 허기가 져도 문상 자리에서는 좀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죽음의 비감은 언제나 차갑고 낯설어 식욕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국밥이 맛있다. 흰밥 한 그릇 꾹꾹 말아 비우고, 일회용 접시에 쪼그라진 마른반찬에도 입맛이 다셔진다. 소심한 입맛이 갑자기 언죽번죽해졌을 리는 없다. 시간이 저절로 그려 주는 삶 안쪽의 무늬들이 있다. 생의 질서에 줄 서는 순간은 오고야 만다. 알배기 도루묵 한입에 딸아이는 기겁을 한다. 미끈거리는 도루묵 알이 내게는 언제부터 감쪽같이 겨울 별미였을까. 톳나물의 오돌거리는 맛, 물미역의 물컹거리는 맛. 오돌거려도 겉돌지 않고, 물컹거려도 비켜나지 않는 그 맛에 입맛 길들이자고 매달린 적 없다. 가만히 두면 그렇게 되는 일들이 많다고. 기를 쓰지 않아도 삶의 쌈지를 채워 주는 것들이 있다고. 도루묵의 위로가 오늘은 밥상에서 조근조근.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말라고.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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