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어떤 기념비/서동철 논설위원

    전국의 지방 관아는 일제강점기 대부분 헐리고 면사무소나 초등학교가 차지했다. 그래도 주변에 몇 개씩은 남아 있는 송덕비가 관아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 후기 유행처럼 세워진 이런 비석은 고을 수령의 선정(善政)을 기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악정(惡政)을 일삼은 수령일수록 송덕비도 컸다. 물론 진짜 공덕을 기념할 만해 비석을 세운 예외도 없지는 않다. 고을 수령의 송덕비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얼마 전 대관령에서 당황스러운 기념비를 봤다. 대관령 옛길 정상의 동해 바다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절묘한 자리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과 용틀임하는 조각의 지붕돌을 제대로 갖춘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석이었다. 그런데 층층이 쌓은 돌계단을 힘들게 올라 보니 힘이 쭉 빠졌다. ‘동해 영동 고속도로 준공 기념비’였다. 실제로 길을 닦은 근로자도 아니고 한국도로공사 감독원의 노고를 치하하는 비석이었다. 끝에는 1975년 당시 도로공사 사장의 이름을 새겼다. 당연히 감독원들의 노고도 컸을 것이다. 그럴수록 알맞은 크기의 기념물이 적당한 자리에 있어야 제대로 기념이 되지 않을까.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독도와 태극기/임병선 선임기자

    내 나라 내 땅 들어가는데 태극기를 쥐여준다. 그제(18일) 울릉도 저동항을 출발해 독도를 다녀오는 여행상품에 태극기도 포함돼 있다며 건넨다. 뭐지 이 어색함? 2시간을 달렸더니 그 어렵다는 독도 입도가 가능하단다. 울릉도 방문 두번째 만에 독도 땅을 밟는다. 경찰 간부인 듯한 셋이 계단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 것을 많은 이들이 부러움 반, 질시 반으로 쳐다보는데 어느 고교 졸업 30주년을 기념하는 무리가 플래카드를 펼치고 태극기를 휘저으며 함성을 질러 댄다. 태극기를 안 가져왔더라면 민망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사실 독도 입안 조금 전 50일 동안 갇혀 지내는 독도경비대 대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과자 등 간식거리이니 성의를 더해 달라는 선내 방송에도 시큰둥해 있었다. 그런데 20분 정도 관광객들의 접근을 티 안 나게 막느라 애쓰는 그네들을 보니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배 문이 닫혔는데 한 아주머니가 과자 상자를 들고 창밖에서 거수경례를 하는 부대원들을 향해 소리친다. “과자 맛있게 먹어요.” 과단성 없는 난 몸 둘 바를 몰랐고 그네들은 배시시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bsnim@seoul.co.kr
  • [길섶에서] 입식 테이블 유감/김성곤 논설위원

    어릴 적 아랫목은 항상 할머니 자리였다. 할머니는 손주들에게 그 곁을 내어주시곤 했다. 아랫목은 기름 먹은 장판이 구들장 열기에 익어서 짙은 갈색으로 바뀌고, 윗목으로 갈수록 색은 옅어진다. 그 노르스름한 색깔은 바닥의 온기와 어우러져 아늑함을 선사했다. 조리도 하고, 난방도 하는 온돌은 동북아 문화권의 상징이었다. 이런 온돌은 고려 중기에 아궁이를 밖에 두는 방식으로 진화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온돌과 함께 우리에게 자리 잡은 것이 좌식 문화다. 좌식 문화는 서로의 친밀도를 높여 주고, 열 이용 효율도 높은 편이다. 또 빗자루질과 함께 물걸레질은 필수다. 실내 공기질 측면에서 위생적이다. 다만, 허리와 다리 관절에는 무리가 간다. 외국인은 물론 노인과 장애인, 임신부에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요즘 많은 음식점이 입식 테이블로 바꾸고 있다. 방안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 집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지자체가 입식으로 바꾸는 업소에 비용의 일부를 지원하면서 가속도가 붙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요즘 바닥의 온기를 느끼며 어깨 부딪쳐 가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음식점이 생각난다. sunggone@seoul.co.kr
  • [길섶에서] 독거노인 ‘1004씨’/박건승 논설위원

    부도심의 우뚝 선 건물 뒤 후미진 곳에서 소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쓸쓸하면서도 외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운명이라고 여긴다. 자녀가 있어도 연락을 못 하는 사람들, 부양 능력이 없는 자식을 둔 탓에 지하방을 전전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기초생활수급자라고 부른다. 어쩌면 내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내년이 팔순인 김 노인은 뚝섬 ‘웅뎅이 마을’에서 5년 넘게 살아온 생활수급자다. 두 딸을 시집보낸 뒤 20여년을 홀로 떠돌았다. 주민증 앞자리 번호는 ‘××1004’. 천사처럼 살았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런 사이에 치매환자가 됐고 맞춤형 임대주택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5만원. 보증금의 70%는 정부가 빌려주지만 다달이 갚아야 한다. 그런데 걱정거리가 생겼다. 생전에 보증금 700만원을 다 갚지 못한다면? 사망하면 계약이 자동 해지되면서 더 이상 갚을 필요가 없어진다는 말을 듣고서야 얼굴이 펴졌다고 한다. 20년 넘게 얼굴 한번 보여 주지 않는 딸들이지만, 부은 보증금만큼이라도 물려줄 수 있어 다행이란 뜻일 게다. 두 딸에게 그런 아버지의 존재란 과연 뭘까.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
  • [길섶에서] 걱정탑/황수정 논설위원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는 데 누구나 방편 한 가지쯤은 있다. 어느 늦가을 이후 내 방편은 심산의 계곡에 있다. 어스름 저녁 백담사 앞을 흐르는 계곡의 돌탑 행렬은 그야말로 진경이었다. 길손들이 오며 가며 소원을 보태 올렸을 돌탑이 너른 계곡에 숲을 이뤘다. 가로질러진 다리 이름마저 수심교(修心橋)였나. 저녁 예불의 법고가 울리다 지쳐 멎도록 숨죽이고 서 있었다. 허튼 내 한숨, 섣부른 내 발소리에 누군가의 소망탑이 무너질까 걱정하면서. 잔걱정에 쩨쩨한 소망들이 하루에도 열두 번 들락날락. 물색없는 시름에 들볶일 때는 돌탑들을 문득 생각한다. 다른 듯 닮은 세상의 걱정이 얼마나 많던가. 동병상련의 위로. 소망탑들은 어쩌고 서 있는지. 때로 큰물이 져서 천 가지 걱정이 쓸려 가면 그 자리에 만 가지 소망이 다시 탑으로 쌓이고 있겠지. 걱정을 다루는 법은 무엇보다 요긴한 삶의 방편 아닌가 한다. 오고야 마는 걱정을 잘 달래서 돌려보내는 방법. 퇴로를 열어 두고 그저 흘러가게 기다리기를. 큰물에 덤비지 않아서 온몸을 씻기는 계곡의 돌탑처럼.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피자 두 판의 법칙/최광숙 논설위원

    취재원과 식사할 때 여러 명이 같이 하면 마음이 편하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다른 기자들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니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마음은 편해도 ‘영양가’는 없다. ‘떼밥’ 자리에서 취재원이 고급 정보를 흘릴 가능성은 별로 없어서다. 하지만 취재원과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되면 달라진다. 그 시간을 어떻게 알토란같이 활용해 기삿거리를 건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아진다. 마음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을 놓칠 수 없지 않은가. 회의도 그런 것 같다. 인원이 많이 참여할수록 분위기는 경직되고 형식적으로 흐를 수 있다. 반면 인원이 적어지면 평소 못한 이런저런 진솔한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인터넷서점에서 출발해 지금은 모든 것을 파는 ‘아마존’ 창업자인 제프 베이조스는 회의를 소집하면 이른바 ‘피자 두 판의 법칙’으로 불리는 규칙을 적용한다. 한 사람이 피자 두세 조각을 먹으면 8명 정도면 피자 두 판이면 된다. 회의도 마찬가지로 팀원 8명 이상이 회의에 참석할 경우 비효율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세계 최고 부자들은 분명히 남들과 다른 게 있다.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옛 사진/손성진 논설주간

    흔할수록 가치가 떨어진다. 사진에서도 들어맞는 말이다. 휴대전화로 쉽게 찍을 수 있는 만큼 요즘 사진의 가치는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 찍은 사진이 어느 파일에 들어 있는지 쉬 찾기 어렵고 잃어버리기도 한다. 기기를 잘못 다루다 많은 사진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사고를 친 적도 있다. 필름으로 찍었던 옛 사진들은 사진첩 속에 고이 들어 있다. 까까머리에 검정 교복 차림의 풋풋한 학창 시절 흑백사진들은 빛이 바래고 변색되었어도 그 자체가 귀중품이다. 사진은 타임머신처럼 저 먼 과거 속으로 이끌어 준다. 어느 잡지에서 1966년 부산 국제시장 앞 거리를 담은 옛 사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소달구지가 도로 가운데로 버젓이 다닌다. 예닐곱 살이었던 그 무렵 부산에 살았어도 잘 기억나지 않는 풍경이다. 디지털 사진은 찍는 것보다 보관하는 작업이 더 중요할 것 같다. 수천 장, 수만 장을 찍어 봐야 정리해 두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잘 나온 사진들은 돈이 들더라도 인화해서 아날로그 앨범에 넣어 두면 훗날 찾아볼 때 느낌이 다를 것이다.
  • [길섶에서] 손가락질/임창용 논설위원

    주말에 아내와 산책할 때의 일이다. 맞은편 건물을 검지로 가리키자 아내가 “손가락질 좀 하지 마라”며 팔을 탁 친다. 마침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던 것. 이전에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다가 아내의 제지를 받은 적이 있다. 아내는 가벼운 손가락질에도 질색한다. 얕보는 걸로 오해받아 말썽이 생길까 봐서다. 나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간혹 무심결에 손이 올라가 깜짝 놀라곤 한다. 지인 중에 대화 중 습관적으로 상대를 검지로 가리키는 사람이 있다. 손가락이 내 얼굴을 향할 때면 꼭 눈이 찔릴 것만 같다. 손가락질은 무언가를 가리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얕보거나 흉본다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인다. 특히 집게손가락으로 사람을 가리킬 때 그렇다. 손이나 주먹을 상대의 얼굴을 향해 내밀거나 흔드는 삿대질과 비슷하다. 국회에서도 의원들끼리 다툴 때면 ‘어디 감히 삿대질이냐’는 말이 자주 튀어나온다. 깔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화 중 상대방을 가리킬 일이 있으면 손바닥을 펴 위로 향하면 된다. 손은 제2의 언어란 말이 있다. 손짓에도 언어만큼이나 예의가 필요하다. 임창용 논설위원 sdragon@seoul.co.kr
  • [길섶에서] 패럴림픽 감동, 꼴불견/황성기 논설위원

    살아서 대한민국에서 패럴림픽을 볼 수 있을까. 티켓을 못 구하고 무작정 찾아간 강릉이었다. 지난 토요일 열린 아이스하키 한·일전. 경기를 보지 못해도 올림픽파크에서 분위기라도 느껴도 족하다고 생각한 그때다. 몇 마디 말을 나누던 단체관람 인솔자가 “티켓은 있느냐”고 묻길래 “없다”고 하자 “결석한 분이 있다”면서 주머니에서 천금 같은 티켓을 꺼내 준다. 생각도 못했던 ‘행운’에 몇 차례고 머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걸로 내 인생의 남은 행운을 다 써도 좋다고 생각했다. 압도적인 우세 속 4대1 한국의 승리. 생애 첫 패럴림픽 관전은 감동 그 자체였다. 퍽을 향해 맹렬한 스피드로 돌진하는 선수들, 팀을 떠나 선수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정승환 선수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환상적인 기량, 24개 슛 가운데 20개를 막아 낸 일본 골키퍼 61세의 후쿠시마 시노부의 노익장은 또 하나의 볼거리였다. 눈살 찌푸린 장면 하나. 국회의원들이 한국의 득점 때마다 비서에게 자신의 환호하는 장면을 촬영하게 하는데, 관중의 감동적인 시야를 가린다. 어디서나 꼴불견인 국회의원이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발자국/이경형 주필

    춘설이 살짝 내린 이른 아침, 둑 아래 강변길을 걷는다. 길바닥 위로 1~2㎝가량 눈이 쌓였다. 몇이서 나란히 걸었다. 강변의 얼음은 많이 녹아 있었다. 청둥오리들은 떼 지어 물살을 가르고 왜가리는 강가 돌무더기에 자리 잡아 아침 땟거리를 찾는지 물속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한 주 만에 만난 이웃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40여 분을 걸었다. 반환점인 두 번째 나무다리에서 왔던 길로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앞만 바라보고 올 때는 생각지도 않던 내 발자국을 발견했다. 눈 위에 선명하게 찍힌 나의 발자국들이었다. ‘팔자’(八字) 걸음에 수시로 부츠 뒤축을 끌면서 걸었다. ‘갈지(之)자’ 행보도 많았다. 문득 살아온 삶의 궤적을 떠올렸다. 지나온 삶을 지금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보듯이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다. 앞으로 걸을 때는 발자국이야 어찌 되건 관심이 없다. 비뚤비뚤한 걸음걸이인 줄도 모른다. 인생은 걸어온 길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물릴 수 없다. 그래서 옛 선현은 “하루에 몸가짐을 세 번씩 살펴보라”(一日三省)고 했던가.
  • [길섶에서] 카페 모퉁이/진경호 논설위원

    ‘모퉁이 카페’는 왜 그리 많을까요. 검색 포털에다 ‘모퉁이’를 물으면 ‘카페’가 주르륵 쏟아집니다. 모퉁이, 사전은 이렇게 말하네요. ‘구부러지거나 꺾어져 돌아간 자리’, ‘변두리나 구석진 곳’, ‘일이나 시간의 대목’…. 그렇군요.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게 할 모퉁이라면 차 한 잔의 여유를 내어 줄 카페로선 달리 설 자리도 없겠습니다. 서울 근교 한 ‘모퉁이 카페’를 찾았습니다. 들러 주면 좋고 안 들러도 그만이라는 볼품으로 황량한 들판에 나앉은 곳입니다. 탁자라고 서너 개뿐인 카페는 그러나 엄청난 반전을 담고 있습니다. 멀게는 19년까지 묵은 갖가지 사연들이 빛바랜 종이에 담겨 사방을 덮고 있는 겁니다. 천장에도 수천 사연이 부적처럼, 만장처럼 내걸렸습니다. 늙은 시인은 ‘차 한 잔에 향긋한 사랑의 밀어 녹여 마신다’고 했고, 젊은 엄마는 ‘아가야 잘~자라라’ 기도합니다. 감정선이 요동쳐야 나올 글귀들도 넘칩니다. 저마다 모퉁이에서 웃고, 울고, 떠듭니다. 여기 주인장, 뭐 하는 사람일까요. 무슨 사연이라서 이렇게 사람 냄새를 부둥켜안고 있을까요. 봄볕 내려앉은 모퉁이, 시간이 꾸벅꾸벅 좁니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길섶에서] 덤과 짐/김균미 수석논설위원

    물건을 살 때 주인이 덤으로 조금 더 얹어 주거나 다른 물건을 챙겨 주면 이를 마다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조금 더 주세요’라고 하지 않을까. 덤으로 뭔가를 더 받는다고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기분이 좋다. 주인의 후한 인심에 반나절 콧노래를 부르는 정도랄까. 재래시장에 갈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대형마트에서 대안을 찾는다. ‘1+1.’ 기분 좋은 덤이 짐이 될 때도 있다. 당장 필요하지 않아 구석에 밀쳐 놓고 잊는 경우가 왕왕 있다. 못 쓰고, 못 먹고 버리기 일쑤다. 받지 말 걸 후회는 그때뿐. 하지만 짐이 되지 않는 덤도 있다. 시간이 그중 하나가 아닐까. ‘덤으로 사는 삶’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큰 병이나 사고를 당했다가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 덤으로 사는 인생에 감사하고, 욕심을 덜 부린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큰일을 겪은 이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인다. 바닥까지 떨어져 보고, 끝을 본 뒤 얻은 깨달음일까. 다음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사람들, 매일매일을 덤으로 사는 사람들처럼 산다면 조금은 더 행복해질까. 덤과 짐은 한 끗 차이다.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현수막/서동철 논설위원

    며칠 전 찾은 경북 의성은 여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곳곳에 현수막이 수도 없이 걸려 있었다. 당연히 ‘마늘 소녀’의 평창동계올림픽 컬링 돌풍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장하다 의성의 딸들 수고했데이’ 같은 문구는 읍내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선수들의 고향 마을로 가면 ‘자랑스러운 봉양의 딸’이나 ‘자랑스러운 분토의 딸’처럼 세분화되기도 했다. ‘안경 언니’ 김은정 선수는 봉양면 분토2리 출신이다. ‘김원구·황정화의 딸 김선영 은메달 획득’ 같은 문구도 있었다. 안평면 신월리 주민들이 걸어 놓은 것이다. 올림픽이 아니더라도 농촌 마을 주변을 달리다 보면 ‘누구누구 자식이 이렇게 훌륭하게 됐다’는 현수막을 종종 만난다. 뜻밖에 얼마 전 서울에서도 그런 현수막을 봤다. 강남 지역이지만 단독주택과 다세대주택으로 이루어진 한적한 마을이었다. 어느 집 자식이 사법연수원인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우리 아파트 단지라면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었다. 최소한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니 부러웠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인스타그램/황성기 논설위원

    페이스북으로부터 가입 9년이 됐다는 메시지를 어제 받았다. SNS에는 몇 군데 가입해 있지만, 활동을 하는 것은 두 곳밖에 없다. 페이스북은 ‘친구’를 맺은 이들이 올린 사진이나 글을 보는 데 그친다. 정 댓글을 달고 싶은 마음을 누르지 못하면 한두 글자 써 넣는데 그조차 상대방이 부담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꺼려진다. 스스로 기록은 올리지 않으면서 남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도 들지만, ‘친구’ 계정이니 하면서 날마다 체크하는 게 중요한 일상의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인스타그램은 시작한 지 1년 조금 지났는데, ‘활동 제로’의 페이스북과 달리 20건 정도 사진도 올리고, 사진설명도 짤막이 달았다. 사진이라 해 봐야 피사체는 사람도 풍경도 아닌 동물이다. 대부분의 ‘친구’가 한국에 살지만, 개중에는 홍콩, 아일랜드, 호주, 일본, 독일, 이탈리아에 사는 이들도 있다. 이국의 풍경을 가지 않고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게 여간 재밌지 않다. 열심히 서울 풍경이나 동물을 찍어 외국 ‘친구’들에게 보여 주는 기브앤드테이크를 해야 하지만 사진 찍는 기술도 못 미치고, 부지런하지도 못해 늘 미안할 뿐이다.
  • [길섶에서] 사과(謝過)/이순녀 논설위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살면서 잘못과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그로 인한 피해가 오롯이 나에게 한정된다면 자성(自省)으로 족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와 분노를 야기한다면 반드시 사과가 뒤따라야 한다. 인생에서 치명적인 건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거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자기합리화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사과다. 나의 언행이 옳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부터 어렵다. 상대방이 당한 피해보다 내 입장에서 항변하고 싶은 유혹에 곧잘 넘어간다. 그래서 자꾸만 단서를 붙인다. “기억나지 않지만 마음 상했다면 미안하게 생각한다”, “사실관계가 어떻든 제 불찰이다” 같은 나쁜 사과문이 나오는 이유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처럼 진심에서 우러난 사과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지 않고,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미사여구로만 포장한 사과는 오히려 화를 키울 뿐이다. 각계각층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하면서 가해자의 사과가 잇따르고 있지만 아직까지 피해자가 진정으로 인정한 사과는 못 본 것 같아 안타깝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대보름 즈음/황수정 논설위원

    김장김치며 묵은 것들에 어지간히 물릴 때도 됐건만 내 입맛은 눈치가 없다. 묵나물들에 저절로 눈이 가고 손이 간다. 하나에 하나를 더 얹어 준다니 말린 고구마순을 몇 봉지나 또 쓸어 오고야 말았다. 고약한 습벽을 아무래도 나는 못 고치겠다. 돌이킬 수 없어진 입맛에 아득해질 때가 이 무렵이다. 정월 대보름께면 배부른 달만큼 푸진 것이 묵나물이었다. 말린 고구마순, 가지, 토란대 등속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주까리, 뽕잎 같은 귀한 묵나물들이 집안 어디에 숨었다 나오는지 한꺼번에 떠들쳐 나왔다. 찬물에 우려내느라 장독대에 떠벌려진 양은 함지들은 정월 보름밤보다 언제나 먼저 환하게 밝았다. 콩가루 범벅으로 쪄내 국간장에 조물조물 무친 묵나물찜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내가 잊었으니 내 딸은 기억할 일마저 없다. 정수리에서 대보름달이 휘영청해도 기억할 무엇이 없는 아이에게 나는 문득 미안하다. 게으름을 털고 오늘은 말린 고구마순을 찬물에 담근다. 담그니 부푼다. 시간이 부풀고, 기억이 부풀고, 멀리 그리운 맛이 부푼다. sjh@seoul.co.kr
  • [길섶에서] 봄비/박건승 논설위원

    아침 하늘이 모처럼 푸르다. 흰 구름까지 춤을 춘다. 바람은 차갑지만 햇볕이 짱짱해 눈부시다. 대지도 제법 눅었다. 땅을 만져 보니 보드라운 흙살이 손끝을 간질인다. 2월 끝자락에 부슬거리며 내린 첫 봄비 덕분이리라. 꽃을 재촉하는 비란 뜻의 최화우(催花雨). 그러고 보니 봄의 두 번째 절기인 우수가 지난 지도 열흘이 지났다. ‘봄비 잦은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봄비가 자주 오면 풍년이 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마을 지어미들의 인심이 후해진다는 뜻이다. 아무 소용없고 도리어 해롭기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른다. 우리 조상에게 잦은 봄비는 보탬이 안 되는 존재였던 셈이다.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이란 노랫말에서 보듯 봄비는 더할 나위 없는 서정적 소재였는데도 일상사에선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요즘처럼 미세먼지로 온 국민이 고통받는 현실에서 그만큼 고마운 존재가 또 있을까. 구질구질하다는 이유로 더이상 봄비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놈의 봄비는 왜 이리 시도 때도 없이 오나”라고 버릇처럼 되뇔 일도 못 된다. 우리 모두에게 생명수인 까닭이다.
  • [길섶에서] 더치페이, 더티페이/김성곤 논설위원

    점심을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젊은이들이 카드를 든 채 줄을 서 있다. 요즘은 일상화된 ‘더치페이’다. 문득 얼마 전 모임에서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피곤한데 영업이 끝나면 맥주나 피자를 먹으러 가자고 해 놓고 계산은 매번 더치페이예요. 시급 7500원짜리 아르바이트 직원의 사정을 모르나 봐요. 안 갈 수도 없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동네 프랜차이즈 치킨집에서 일하는 지인의 아들 얘기다. 점장이 데리고 간 볼링도 더치페이란다. 내기를 해 아르바이트 직원이 게임비로 몇만 원을 낸 경우도 있단다. 이쯤 되면 더치페이가 아닌 ‘더티 페이’(Dirty Pay)다. 더치페이는 원래 대접한다는 의미의 ‘더치 트리트’(Dutch Treat)였다. 그런데 식민지를 놓고 경쟁하던 영국이 네덜란드 문화를 비하하려고 ‘Treat’를 ‘Pay’로 바꾸면서 더치페이가 돼 우리에게 전해졌다. 그 매니저와 점장은 아르바이트 직원에게 경험도 전하고, 친목도 다지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시급에 목매는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점은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 뒷맛이 씁쓸했다. 김성곤 논설위원 sunggone@seoul.co.kr
  • [길섶에서] 인생의 사표(師表)/손성진 논설주간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 서글프다. 따르고 본받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 주변에 몇이라도 있다면 어두운 혼돈의 세상에서 한 줄기 빛으로 여기며 기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눈에 띄는 사람들이란 죄다 잘난 척하고 이기적이며 부귀영화, 입신양명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만의 자괴감 탓일까. 인물에 관한 외고(外稿)를 청탁받아 쓰면서 숨은 진주 같은 선각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우리가 모르는 작은 위인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언젠가 조용히 세상을 관조하며 자기 자리에서 할 일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인물들이 더 널리 알려져서 정신적 추종자들이 생겨나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질만능주의와 물욕이 범벅이 돼 공공선(公共善) 의식은 실종되다시피 한 세상을 정화시켜 줄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의 사표(師表)가 되어 줄 사람을 찾아서 그 길을 좇는다면 세상은 훨씬 더 밝고 살기 좋게 변모할 터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큰 별 옆에 작은 별들이 모여 지구를 환하게 비추듯이.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인상(人相)/임창용 논설위원

    엊그제 지하철 역사에서의 일이다. 20대 중반의 낯선 여성이 환하게 웃으며 길을 막는다. “인상이 참 좋으세요.” 이달 들어 벌써 세 번째다. “아, 지금 바빠서요”라며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하자 따라붙으면서 잠깐만 시간을 내달란다. 겨우 여성을 따돌렸지만 마음은 개운치 않다. ‘왜 나만 자주 표적이 되는 거지? 내가 그렇게 어수룩해 보이나? 다음부턴 더 단호하게 대해야지’라는 생각이 이어진다. 1980년대 후반 대학 졸업 후 한동안 길거리 검문의 단골 표적이 됐었다. 시국사건이 많던 시절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검문에 걸려 신분증을 꺼내야 했다. 취업한 지 꽤 되었는데도 그랬다. 한번은 경찰에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골수 운동권 학생처럼 보여요?” 20대 초반의 전경은 의외의 답변을 했다. “아니요, 왠지 검문에 잘 응해 주실 것 같아서요”라며 죄송하다고 했다. 결국 타고난 인상 때문에 길거리에서 단골 표적이 되었다는 얘기다. 순순히 신분증을 보여 주고, 포교 여성을 잘 따라갈 것 같은 인상. 스스론 제법 야무지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들의 판단이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sdrag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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