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기초의 중요성/구본영 논설위원

    지난 일요일 퇴근길에 모처럼 차를 몰다 가슴이 철렁했다. 녹색 신호등이 황색으로 바뀐 교차로에서 그냥 가속 페달을 밟으면서다. 백미러를 통해 다른 차들이 바로 뒤에서 생생 달리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대형사고의 확률을 줄이려면 평소에 교차로 도달 전 미리 속도를 줄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황색등의 점멸 시간을 늘리는 등 신호체계를 개선하는 것은 당국의 몫이겠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조금만 신경쓰면 할 수 있는 기초적인 일이다. 세계 자동차 업계의 패자인 도요타도 한순간의 자만으로 추락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기본기에 소홀하면 한방에 간다.”는 국내 대기업 인사의 인터뷰 내용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거창한 목표 달성에 앞서 하찮아 보이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는 게 개인이나 기업인, 공직자 할 것 없이 공통의 덕목이 돼야 할 듯싶다. 기원전 3세기에 이미 “태산에 부딪혀 넘어지는 사람은 없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작은 흙무더기다.”라고 갈파한 한비자의 혜안이 놀랍다. 구본영 논설위원
  • [길섶에서] 경적2/노주석 논설위원

    서울에선 운전을 하다가 1초만 지체해도 여지없이 뒤에서 “빵빵” 공격을 받는다. “왜들 이렇게 빵빵거려.” 일본에서 오래 산 지인이 투덜거렸다. 일본에서는 자동차 경적소리를 듣기가 어렵단다. 하긴 일본 출장길에서 한국처럼 신경질이 가득 담긴 경적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일본 운전자들도 경적을 울리긴 한다. 우리와는 용도가 사뭇 다르다. 왜 빨리 안 가느냐고 울리는 게 아니라 끼어들기한 차량이 양보해준 뒤차에 고맙다는 표시로 “빵”하고 부드럽게 한번 눌러준다는 것. 경적의 울림 속에 “고마워요.”란 뜻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일본식 경적의 용도가 부럽다. 필자는 2008년 7월 본 난에 ‘경적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스스로는 경적 울리지 않기를 운전습관화하고 있다. 세상은 달라진 게 없다. 더 급해졌다. 마구 울려대는 자동차 경적은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국제적인 조롱감이다. 지구상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배울 것은 배우자.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좋은 친구/함혜리 논설위원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들 한다. 친구를 잘 선택해서 사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모든 인생사가 그렇듯이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사귀어야 할 친구와 그렇지 않은 친구의 기준을 이렇게 정리했다.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견문이 넓은 사람은 유익한 벗이요 겉치레를 중시하는 사람, 아첨 잘하는 사람, 말만 앞세우고 성의가 없는 사람은 해로운 벗이다.” 좋은 친구는 쓴 소리로 허물을 지적해 주고, 절망했을 때 용기와 위로를 줘야 한다. 초기 불교경전에서는 이런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주기 어려운 것을 남에게 주고, 하기 어려운 것을 해 내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내고,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고, 남의 비밀을 지켜주고, 불행에 빠진 사람을 버리지 않고, 다른 사람이 망했을 때 그를 얕보지 않는 사람이다. 현란한 말과 글, 행동이 활개를 치는 요즘이다. 그래도 우리가 중심을 잃지 않게 잡아주는 보석같은 가르침이 있으니 참 다행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폭풍우/이춘규 논설위원

    한낮 남양주 예봉산 꼭대기에 이르자 사위가 저녁처럼 어두워진다.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빗방울이 후두둑 휘감겨 온다. 바람은 소름끼치게 거세지고, 빗방울은 굵어진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차디찬 폭풍우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다. 10m 앞도 안 보인다. 정신이 바짝 든다. 배낭이 비에 젖지 않게 방비한다. 작은 우산을 편다. 모자를 고쳐 쓰고 주능선을 따라 거친 길을 밟아 간다.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어 발 디딜 곳이 옹색하다. 중무장한 다른 등산객들도 묵묵히 제 길을 간다. 막바지의 겨울을 아쉬워하는 듯 모진 폭풍우는 한 시간 반 이상 계속됐다. 비 오는 날 숲 향기는 황홀하다. 주말 비 예보가 있어도 벼락 예보만 없으면 장비를 갖춰 어김없이 산에 오르는 이유다. 예전엔 비가 오면 등산객이 적었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숲 향기와 각별한 분위기에 젖어들기 위해서리라. 폭풍우가 잦아들자 봄이 오는 아우성이 들려온다. 새순들은 터질 듯하다. 서둘러 핀 들꽃들은 농염하다. 봄은 그렇게 지척에 와 있었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마음의 여유/구본영 논설위원

    지방의 한 아파트에서 층간 소음문제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안타깝고 충격적인 뉴스를 접했다. 당혹스러웠던 몇 년 전의 추억이 떠올랐다. 당시 어린 두 아이나 직무상 늦게 퇴근했던 필자가 세면장에서 내는 물소리 등 생활 소음을 아래층 이웃은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몇 번이나 목소리 높여 따지는 나이 지긋한 이웃 어른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한국적 문화는 남의 시선을 부끄러워하지만 소음에는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란 글을 읽었다. 서양보다 높은 담장을 쌓지만, 정작 창호지 너머 자식 부부의 은밀한 정담도 사랑방의 아버지는 못 들은 척했듯이 말이다. 소음 다툼을 깡그리 없애려면 방음 설계가 부실한 전국의 아파트를 모두 새로 지어야 한다. 그게 당장 어렵다면 마음의 여유와 아량이라도 필요할 듯싶다. 작은 불편과 잇속 때문에 걸핏하면 핏대를 올리는 각박한 세태다. “불이 꺼진다고 당황하지 말라. 대신 밤하늘 뭇별들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서양 현자의 말이 생각난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길섶에서] 사교(死敎)/육철수 논설위원

    신문을 읽다가 어느 단어에 눈길이 멈췄다. ‘사교(死敎)’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태교(胎敎)를 받듯 죽음을 앞두고는 사교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기분이 묘했다. 이렇게 쉽고 단순한 말을 쉰 살을 넘길 때까지 접하지 못한 게 오히려 이상했다. 이제서야 노년이 관심권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문일까. 하기야 최근 심기가 좀 복잡해졌다. 지난해 말 신체검사를 하고부터다. 골(骨) 밀도가 약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건강에 자신 있었지만 요즘엔 그래서 별 걱정을 다 한다. 계단을 내려갈 때 관절이 약간만 시큰거려도 소침해진다. 가벼운 소화불량에도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몸에서 일어나는 노후 징조에 참 예민해졌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사교’란 단어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직 관심을 가질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죽음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공포를 잊고 품위있게 생을 마친다고들 한다. 자연스러워야 할 생로병사조차 교육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한계인가 보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길섶에서] 담배꿈/박대출 논설위원

    담배 피우는 꿈을 꿨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피워댄 것 같다. 아침부터 찜찜했다. 금연 석 달째다. 금단 현상이 꽤 심했다. 이젠 극복한 줄 알았다. 담배 생각은 별로 안 난다. 그런데 꿈에서 피우다니.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했나. 미련이 남아 있나. 의지가 약한가. 자책까지 해본다. 불쾌감이 엄습한다. 마침 청년 역술가가 찾아왔다. 그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점심을 같이 했다. 꿈 얘기를 건넸다. 숨어 있는 욕망 탓인지 궁금했다. 대답이 예상외다. 좋은 거라고 했다. 재물, 돈, 명예 등을 뜻한다는 것이다.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아도 담배 꿈을 꾼단다. 사업가라면 이득을 보는 꿈이라고 했다. 월급쟁이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건데. 그래도 기분은 좋아졌다. 꿈은 실제와 반대라는 견해가 있다. 예시적 기능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느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좋은 게 좋다는 거다. 불쾌하게 생각하면 뭣하나. 아드레날린보다는 엔돌핀이 건강에 도움된다. 길몽으로 받아들이는 게 낫겠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길섶에서] 법정 스님 찻잔/함혜리 논설위원

    차를 즐기시던 법정 스님은 다기에 대한 안목도 뛰어났다. 차는 좋은 그릇을 만나야 비로소 그 차가 지닌 빛과 향기가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법정 스님은 지헌(知軒) 김기철 선생의 연잎 다완을 특히 아끼셨다. 때깔이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정성스럽게 손으로 빚은 까닭에 만든 이의 인품이 배어 있다고 칭찬하셨다. 이 찻잔에 ‘법정 스님 찻잔’이라고 이름이 붙은 내력이다. 지헌 선생과 법정 스님의 인연은 30년 전 시작됐다. 스님께서 서울 인사동에서 마음에 드는 다기가 너무 비싸 그냥 나오고 말았다는 글을 읽고 스님께 다기 한 벌 선물하고 싶다고 지인에게 지나가는 말을 했는데 어느날 지인이 스님을 작업실에 모시고 왔더란다. 차 문화에 맹문이었던 자신이 어엿한 다기를 만들게 된 것도 법정 스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고 지헌 선생은 말씀하신다. 오랜만에 선생께 안부전화를 드렸다. “법정 스님께서 보잘것없는 찻잔을 늘 곁에 두고 아끼셨다.”며 고마워하신다. 찻잔이 맺어준 인연이 참 아름답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인생 마일리지/구본영 논설위원

    중견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한 선배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첨부메일에는 아름다운 풍경의 동영상을 배경으로 음미할 만한 메시지가 담긴 글귀가 국·영문 대역으로 담겨 있었다. ‘인생의 비밀들’이란 제목의 일종의 명언 모음집이었다. 고희를 훌쩍 넘긴 선배가 컴퓨터를 이토록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니!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다가 그 비결을 알 만한 단서를 선배의 인사말에서 찾아냈다. “인생황금률의 법칙에 대박은 없다. 오직 마일리지의 법칙이 있을 뿐”이라는 말이 와 닿았다. 단숨에 뭔가를 이루려 하지 말고 배워서 조금씩 쌓아가야 한다는 권면이 아닌가. 손쉽게 한탕주의에 젖어들고, 그 과정에서 자주 큰 물의가 빚어지기도 하는 세태에 물들지 말란 뜻일 게다. 선배의 가르침을 접하며 끊임없이 뭔가 배우려는 열정이 살아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청년이라는 서양 격언이 생각났다. 그 바쁜 시간을 쪼개 후학들에게 마음을 쓴 노 선배의 정성이 새삼 고맙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길섶에서] 쿠데타/진경호 논설위원

    TV가 1대인 가정에서 채널 선택권은 권력이다. 보고 싶은 프로를 볼 수 있는 것만큼 분명하고 확실한 권력행사도 없다. TV 리모컨은 곧 홀(笏)이며, 케인(cane)이다. 지배권력의 상징, 왕의 지팡이다. 언제부턴가 리모컨을 빼앗기는 일이 잦아졌다. 공부하다 짬을 낸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슬금슬금 TV 앞에서 물러나는 일이 늘었다. 얼마 전부터는 TV 시청시간 제한대상에도 포함됐다. 아이 공부에 방해되니 TV 대신 책을 보라는 아내의 엄명이 떨어졌다. 자연스레 아이들이 TV를 볼 때 곁에 끼어서 보는 처지가 됐다. 여기까진 그래도 좋다. 아이들에게 얹혀서 보는 게 죄다 이름 모를 아이돌들이 신변잡담 늘어놓는 프로들이다. 하품만 나오건만 아이들은 연신 깔깔깔이다. 권력 상실을 넘어 문화적 소외, 세대 간 거리를 걱정할 판이다. 그 간극이 싫어 애써 웃어보려고도 하지만, 안 웃긴다. 한데 이건 뭔가.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웃는 게 아닌가. “저게 재밌어?” “응 재밌어.” 리모컨만 빼앗긴 게 아니다. 아내도 빼앗겼다. 쿠데타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길섶에서] 짝귀/김성호 논설위원

    짝귀다. 등산용 모자를 얼굴까지 푹 내려 쓴 버스 속 50대 중반 남자. 없는 한쪽 귀를 가리려 눌러 쓴 기색이 역력하다.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릴 적 기억 때문이다. 그때 동네 아저씨도 그랬다. 짝귀. 낫을 들고 장난하다 실수로 한쪽 귀를 잃었다는데. 집 나간 아내를 못 잊어하다가 화풀이 자해를 했다는 말도 있었고…. 도통 말이 없던 짝귀 아저씨. 아저씨는 가는 귀를 먹어 잘 듣지도 못했다. ‘벙어리 아저씨, 벙어리 아저씨.’ 아저씨 뒤를 따라다니며 손뼉치고 놀려대던 철부지 녀석들. 나도 그랬었는데. 악동들의 놀림이 얼마나 야속하고 성가셨을까. 반복되는 조롱과 놀림에도 도무지 성을 내지 않던 짝귀 아저씨. 아니 초탈했던 것일까.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을 알아챘는지 짝귀 남자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미안하다. 쳐다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릴 적 기억이 자꾸 얹히는 통에, 그만 폐를 끼치고 말았다. 사라진 짝귀 아저씨. 사과라도 할 것을. 버스를 내리며 한쪽 귀의 귓바퀴를 꽉 눌러본다. 아주 불편하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세치 혀/김성호 논설위원

    오랜만에 입에 올린 말이다. 요강.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절까지 우리네 일상에서 흔했던 배출의 도구. 생리현상의 당연한 해결사였지만, 요즘에야 어디 쉽사리 볼수 있을까. 술 자리에서 눈치없이 입에 올린 원색적인 ‘지난 도구’ 요강 발언에 발설자도 섬뜩했다. 순간에 몰아치는(?) 시선이 그냥 미안하기도 하고. 그것도, 어렵다면 어려운 자리에서였으니. 그러려니 넘기는 동료들의 아량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미련한 세치 혀의 망발이다. 농담반 진담반. 농이면 농이려니 흘리면 편할 터인데. 진담이면 또 어떤가. 술좌석을 향한 후배의 뒤늦은 치근거림이 어렵다. 우리네 살아냄이 어찌 진실만 있으려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낙화유수도 좋겠고. 송곳니 세우고 앞뒤 따져보자는 옹찬 다툼에서야. 망발의 요강도 때로는 가뭄의 단비 격 청량제가 아닐까. 흐르는 강물처럼 식의 유유자적. 생지를 찾아드는 연어의 원천적 생존본능. 살다 보면 갈등의 간격은 어찌할 수 없을 터인데. 그래도 가끔씩은 세치 혀의 망발도 긴요하지 않을까. 김성호 논설위원
  • [길섶에서] 굿 구경/함혜리 논설위원

    지난해 이맘때쯤이다.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열린 서도소리 명창 박정욱씨의 철물이굿 구경을 갔다가 제대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박 명창은 분명히 “제가 무당은 아니지만 무당 흉내는 제대로 내거든요.”라고 했었는데 무대에서 펼쳐진 것은 굿, 그 이상의 것이었다. 굿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박 명창은 구수한 입담과 소리, 춤을 통해 흥과 긴장감을 적절하게 배치해 가면서 굿의 주역이자 굿판의 총감독 역할을 아주 근사하게 해냈다. 대형 걸개그림이 무대를 압도하고 화려한 의상도 볼거리였다. 그로부터 한 해가 흘렀다. 박 명창은 이달 말 남산 국악당으로 무대를 옮겨 올 한해의 복을 비는 철물이굿 판을 벌인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우리 현대 사회에서 음지로 사라져 가는 굿을 양지로 끌어내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그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복은 나눌수록 커지고 화는 풀수록 줄어든다고 했다. 모두가 하는 일이 잘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굿 구경이나 가야겠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발언대] 체불임금 안으로 곪고 있다/정석윤 공인노무사

    [발언대] 체불임금 안으로 곪고 있다/정석윤 공인노무사

    정부는 임금체불 관련 제도를 개선하면서 지연기간에 따른 이자를 사용자가 부담하도록 하는 한편 사용자에 대한 처벌은 근로자의 명시적인 의사와 다르게 공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소위 ‘반의사불벌죄’를 도입해 2005년 7월1일부터 시행하고 있다. 정책입안자들의 의도는 지연 이자라는 부담이 사용자에게 압박이 돼 임금을 조기에 청산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근로자에게 처벌여부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행사케 함으로써 사용자가 근로자의 요구를 더 쉽게 들어주게 되리라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사용자가 임금을 지급하지 않아 처벌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 수준은 솜방망이에 불과해 근로자는 다시 민사절차를 거쳐야 하는 등 근로자로서는 힘겨운 싸움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근로자들은 임금을 다 받지 못하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용자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진정 취하서를 써주고 임금의 일부라도 받아 가게 되는 실정이다. 사실 근로자가 진정을 취하하면서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의 표시는 본심과는 다른 것으로 민법 상 ‘비진의 의사표시’에 해당된다. 그리고 근로자가 노동부에 진정하는 것은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가 어려워서 최후의 수단으로 공권력의 도움을 받으려 하는
  • [길섶에서] 맘대로 감기? /진경호 논설위원

    그곳이 단골이 된 이유는 머리 잘 깎는 것 말고 따로 있다. 눈인사나 말 한마디에도 늘 고객을 앞에 둔다. 나설 때면 잘려나간 머리카락 이상으로 마음의 찌꺼기를 덜어 낸 느낌을 갖게 한다. 머리뿐 아니라 마음까지 개운하게 만드는 것이다. 웃음기 가득하던 스태프의 낯빛이 어둡다. 감기가 들었단다. 그래? 감기 좀 들었다고 시무룩? 아니다. 감기 걸렸다고 직속상관 헤어디자이너에게 야단맞았다는 것이다. 아니, 누군 감기 걸리고 싶어 걸리나? 그게 야단칠 일? 한데 이 야멸찬 디자이너 말은 달랐다. 감기, 걸려선 안 된다. 감기 걸리면 표정이 어둡고, 그런 모습은 고객 마음까지도 어둡게 한다. 그리고 그런 걸 따지기 전에 감기가 들도록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헤어디자이너로, 만족을 파는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성공할 수 없음을 스태프가 깨달아야 한다. 하루 10시간을 서서 일하는 고단함 속에서도 미소를 내려놓지 않던 힘을, 그렇게 문득 봤다. 그 사람 인기 없겠다고? 그곳의 스태프 서른 명이 못 배워서 안달이 난, 프로페셔널이다. 진경호 논설위원
  • [길섶에서]중독/이순녀 논설위원

    의지와 상관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상태를 일컫는 중독은 흔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게임 중독 등이 대표적이다. 엊그제 언론에 보도된 어느 게임 중독 부부의 행각은 끔찍함을 넘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온라인 게임에 중독된 이 부부는 생후 3개월 아기를 혼자 집에 놔둔 채 매일 밤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아기를 굶겨 죽였다고 한다. 천륜마저 까맣게 잊도록 하는 중독의 위험천만한 속성을 이처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백해무익한 이런 중독과 달리 나와 남을 위한 생산적인 중독도 있다. 책읽기 중독, 기부 중독 등이 그렇다. 최근 아이티 지진 구호를 비롯해 각종 봉사활동에 열심인 탤런트 김현주는 한 인터뷰에서 선행으로 얻는 행복에 중독되는 것 같다고 했다. 기부천사로 유명한 가수 김장훈도 돈이 없으면 대출 받아 기부를 할 정도로 기부 중독에 빠져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걸렸으면 싶은 아름답고, 멋진 중독이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개구리/이춘규 논설위원

    경기도 남양주시 농장의 연못에서 개구리 합창이 우렁찼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을 일주일 남겼는데도 봄기운이 완연하자 서둘러 나와 번식활동을 했다. 수백마리는 되어 보이는 대집단이었다. 다가서자 순식간에 물밑으로 숨어버리고, 비켜주자 다시 울어댔다. 개구리들은 봄이 올 기미만 보여도 연못이나 논 등 고인 물에 나와 일제히 알을 낳는다. 때이른 봄 알을 낳은 뒤 반짝 추위로 알들이 몇 차례 얼어죽어도 개구리 집단은 쉬지 않고 알을 낳는다. 종족 보존을 위해서다. 개구리는 번식력이 매우 강하다. 몸에 좋다며 동면개구리 남획이 계속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한민족은 개구리를 신성시하고, 복과 다산의 상징으로 여겼다. 삼국유사는 개구리의 예언적 능력도 기록했다. 개구리 소리는 지친 현대인의 영혼을 달래준다. 서울대공원에서도 벌써 목청을 돋우고 있다. 서울 청계천과 남산에서도 다시 개구리들이 숨쉰다. 삭막한 도심 곳곳에 개구리 서식공간이 더 늘어날 수는 없을까.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 꽃샘추위/구본영 논설위원

    그제 모처럼 나들이 길에 을씨년스럽게 진눈깨비가 쏟아졌다. 어느새 봄은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고 여겼지만, 성급히 꺼내 입은 얇은 봄옷 탓에 내내 한기를 느껴야 했다. 지난주 이어진 포근한 날씨에 안도한 게 불찰이었다. ‘꽃샘추위’란 또 하나의 통과의례가 남았음을 망각했던 셈이다. 어쩌면 혹독한 추위를 오래 견딘 장미에게 가장 진한 향을 선사한다는 자연의 섭리까지도. 절기나 날씨와 관련한 속설엔 선인들이 지혜가 배어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젠 됐다.’고 섣불리 마음을 놓아서도, 앞날을 무조건 비관해서도 안 된다는 점에서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도 정상을 코앞에 두고 돌부리에 채어 넘어지는 사례를 수없이 보지 않았던가. ‘피겨 여제’ 김연아의 당당하면서도 담담한 태도가 그래서 돋보였던 듯싶다. 금메달에 집착해 지나친 중압감으로 초조해하지도, 턱없는 자만심으로 들뜨지도 않는 자세 말이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길섶에서]체중감량실/이춘규 논설위원

    화장실 호칭은 세월이 흐르며 변했다. 예전엔 뒷간, 측간, 변소라고 불렀다. 똥간이라고도 했다. 어느 순간 화장실이 대세가 됐다. 일본에서는 손을 씻는 곳이란 뜻의 ‘오테아라이’로 불린다. 최근엔 영어의 일본식 발음인 토이레가 대세다. 예술작품 같은 화장실도 늘고 있다지만 많은 화장실은 여전히 기피장소다. 1980년대 말 설악산 백담사에 갔을 때 엄청나게 깊은 해우소(解憂所)는 퍽 인상적이었다. 옆의 맑디맑은 백담사 계곡물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해우소는 화장실의 불교적 표현이다. 근심을 풀어주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전남 조계산 선암사 해우소는 응가를 하면 바닥에 떨어지는 데 한나절이 걸릴 정도로 깊다나…. 회사 근처 식당에 ‘체중감량실’이란 안내판이 걸려 있다. 지하철 약수역 인근 식당에는 해우소라고 적혀 있다. 화장실, WC, 변소 등에서 약간 변화를 줬다. 왠지 거부감이 덜하고 신선했다. 봄이 지척이다. 일상에 작은 변화라도 주어보자. 우리네 삶이, 세상이 달라질 것이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줄반장의 추억/구본영 논설위원

    지난 연말 친목모임의 연락책을 맡았다. 소싯적부터 알고 지내다 서울의 하숙집에서 다시 만나 어울렸던 추억을 공유하는 친구 아홉이 회원이다. 회장이란 그럴듯한 타이틀이지만, 1년씩 돌아가며 맡는 감투 아닌 감투다. 학창시절의 줄반장이라고 할까. 격월로 등산하거나 저녁 먹는 모임이지만 막상 끌고 나가기가 녹록지 않다. 이해관계가 걸리지 않아서인지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모임을 알려도 회신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수고한다.’는 응답으로 마음을 쓰는 친구들이 여간 고맙지 않다. 문득 중학교 때 악동 친구가 생각났다. 그는 학급 임원을 맡자 몰라보게 헌신적으로 바뀌었다. 선생님과 급우들의 몇 마디 칭찬이 그렇게 만들었을 법하다. “어떤 사람이건 선량한 사람이라고 해주면 설령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앞으로 그렇게 되려고 한층 노력할 것”이란 명언이 있지 않은가. 나 스스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데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나 되돌아보았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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