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희망 예보/함혜리 논설위원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린다. 새해도 기록적인 엄청난 폭설과 한파로 시작됐다. 삼한사온은 사라졌고, 절기도 무의미해졌다. 또다시 한파가 올 것이라는 예보다. “어휴!”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 보니 아침 기온은 영하 10도 안팎인데 낮에는 많이 풀려서 영상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참 이상한 것이 아침에 나오는데 추위가 하나도 성가시지 않게 느껴졌다. 반나절만 지나면 풀릴 것이라는 희망 덕분이다. 겨울에 날이 춥고 눈이 많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축적된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일 테지만 한편으로는 기나긴 겨울을 무사히 나기 위한 방편으로 짜낸 지혜가 아니었을까 싶다. 추위를 녹이는 데 풍년의 희망만큼 효과적인 게 어디 있었을까. 인생도 희망을 주는 예보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잠시 힘들겠지만 조금 지나면 확 풀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역경이나 고난도 담담하게 맞고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농축산물 절도/이춘규 논설위원

    초등학생 시절 어느날 아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뒷집 한 아저씨네가 재산목록 1호 소를 밤사이 도둑맞은 것이다. 이전에 큰 절도사건이 없었던 마을이다. 그래서 아저씨 집 본채 옆의 외양간 경비 태세는 허술했다. 흙담으로 된 허름한 외양간은 고쳐지지 않은 채 그후에도 텅 비어 있었다. 소는 끝내 찾지 못했다. 아저씨는 소 도난 충격으로 웃음을 잃어 버렸다. 농축산물은 농민들에게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극진한 애정을 쏟는다. 농사 경험이 없는 도시인들은 절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다. 농축산물에는 농민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분신 같은 농축산물을 도둑맞으면 후유증은 상상외로 크다. 재기불능의 상처도 입는다. 양평 두물머리 인근에 농축산물 절도단 신고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수상한 차량이 나타나면 면사무소 등에 신고해 달라고 했다. 전국적으로도 농축산물 절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벼, 소, 인삼 등 농축산물 절도는 정말 나쁜 범죄다. 절도범들은 끝까지 추적, 엄벌해야 한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썰렁개그/함혜리 논설위원

    모임의 좌장이 퀴즈를 냈다. “아이스크림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죽었대. 왜 죽었게?” 아무도 맞히지 못하자 신이 난 듯 답을 말했다. “차가 와서”. 시쳇말로 썰렁개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가장 큰 나라는? 인도네시아(넷이야).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 히트작도 있었다. 옛날에 할머니가 과거 시험 보는 손자를 위해 천지신명께 기도를 했다. 그런데 정화수 대신 죽을 놓고 기도를 하기에 이유를 물어보니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잖니?”. 큰 고민 없이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썰렁개그가 열기를 더해간다. 최신 썰렁개그 한두 개 정도는 알고 있어야 대화에 낄 수 있을 정도다. 기억을 잘 못하는 사람들은 수첩에 적어서 갖고 다니기도 한다. 듣고 나면 씁쓸하고 얼굴이 화끈해지는 음담패설하고는 다르다. 박장대소를 할 만큼 우습지는 않지만 은근히 재미있다. 각자 아는 썰렁개그 한 가지씩을 내놓다 보면 모임의 분위기가 금방 화기애애해진다.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누군가 아무리 썰렁한 개그를 하더라도 열심히 웃어주자.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안중근의 글씨/노주석 논설위원

    예술의전당 안에 서예박물관이 있다. 음식점에 갔더니 3만원 이상 이용객에게 초대권 2장을 증정했다. 공짜 표를 손에 넣었지만, 딱히 갈 생각은 없었다. 글씨구경만큼 재미없는 구경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볼 일을 마치고 발길을 돌리다 ‘안중근의사 유묵전’ 포스터와 딱 마주쳤다. 안 의사가 나를 불렀다. 안 의사의 글씨는 국가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천하의 명필이다. 동양권에서 관리를 뽑던 기준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이었다. 전시된 34점의 유묵은 안 의사의 분신이다. 유묵 200여점 가운데 의사의 이름과 손바닥 도장이 찍힌 20점은 보물 제569호로 지정돼 있다.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 중장’ 신분의 군인이다. ‘동양평화론 서문’을 읽어보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와 대의명분을 알 수 있다. 자녀교육을 원한다면 대한국인(大韓國人)의 글씨를 보여주기 바란다. 수천명의 관람객이 각자의 글씨체로 정성껏 적어놓은 ‘안중근’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보는 순간 교육은 완성될 것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개념녀/이춘규 논설위원

    시대의 흐름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유행어의 생성과 소멸이 참 빠르다. 한 출판사 사장과 식사를 하는데 “개념녀들이 들고다닐 수 있는 책을 만들어보자.”고 사원들에게 주문했단다. ‘개념녀’라. 짐작은 가지만 익숙지 않다. 속물근성으로 꽉 찬 된장녀와 대비되는 개념의 여자란다. 속깊은, 교양 있는 여자 등등. 모 방송국 시사프로에서 군가산점 부활에 대한 인터뷰 중 남성이 군대에 가 있는 2년간 여성은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니, 남성에게 그에 따른 사회적 혜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여성을 개념녀라고 했다고 한다. 군복무기간 18개월을 3년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해 수많은 청년들의 원성을 산 ‘군삼녀’와 대비시켰다. 이후 개념녀는 정치·경제·시사 상식을 잘 알고 남자의 군대 얘기를 들어주는, 그리고 남자의 고민을 자신의 고민처럼 들어주는 여자 등으로 변하고 있다. 최근엔 주체적인 연기와 연애를 하는 탤런트 김혜수를 개념녀의 대표로 칭한다. 교양 있는 개념녀들이 좋은 책 많이 읽기를 희망한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표정/노주석 논설위원

    인간의 표정 3000가지를 촬영한 사진가가 있다. 나는 몇 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거울을 잘 보지 않는 탓에 알 도리가 없다. 감정표현에 무딘 편이다. 웃고, 울고, 화나고, 놀라고, 기뻐하고, 삐치고, 쫄고, 떨떠름해하고, 안타까워하고, 비웃고, 부럽고, 무섭고, 슬픈…. 그리고 무표정. 기껏해야 열 손가락 안일 것이라는 짐작과 달리 의외로 많다. 컴퓨터그래픽으로 가장 구현하기 어려운 것이 복잡미묘한 얼굴 감정표현이란다. 다윈은 “사람과 동물의 표정은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다.”고 설파했다. 표정도 유전된다는 게 최신 연구 성과다.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루오전’에 다녀왔다. 그림을 보기 전에는 루오의 색에 관심이 있었지만 보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등장인물의 표정에 마음이 끌렸다. 판화 속 인간군상의 표정은 흑과 백 두 가지로도 충분히 표현되고 남았다. 간교, 음험, 사악, 비열한 표정 앞에서 치를 떨었다. 가끔씩 이상한 표정 짓지 말라는 지적을 듣는다. 이 순간 내 표정이 궁금하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겨울 산행/함혜리 논설위원

    산악회를 따라 몇 해 전 겨울에 소백산에 간 적이 있다. 추위도 추위였지만 아이젠이 자꾸 벗겨지는 바람에 고생을 제대로 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산 너머에서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정상에서는 눈보라가 몰아쳐서 잠시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어찌나 긴장하면서 산을 내려왔던지 온몸의 근육이 뭉쳐서 며칠 동안 고생했다. 그날 이후로 겨울 산행은 아예 하지 않는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짜 산의 속살을 보고 싶다면 겨울이 제격”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같은 산이라도 겨울에 가 보면 나뭇잎이 우거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능선 위로 솜털처럼 줄지어 선 나목들이 이채롭다. 흰 눈이 쌓인 산을 뽀드득 소리를 들으며 오르는 기분도 색다르다. 칼바람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산은 또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겨울 산의 감동을 놓치고 사는 게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겨울이 다 가기 전에 장비 제대로 갖추고 겨울 산행에 재도전해 볼 참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반성/함혜리 논설위원

    점심 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시청앞 지하도를 나서는데 계단에 자그마한 체구의 할머니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면서 앉아 있었다. 할머니 앞에 놓인 분홍색 플라스틱 바구니가 눈에 들어왔다. 참 안됐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속으로 온갖 핑계를 대면서. ‘날씨도 춥고, 시간도 없고, 지갑 꺼내기도 귀찮고….’ 그 순간 ‘찰랑’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젊은 외국인 여성이 바구니에 동전 몇닢을 넣어준 뒤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머니 속의 지갑만 만지작거리다 그냥 지나친 내가 부끄러웠다. 한 사진작가가 들려준 인도 바라나시의 꽃 파는 소녀 이야기가 생각났다. 길에서 만난 소녀가 “나의 꽃을 사지 않으면 당신은 후회하고 말 거예요.”라며 간절하게 부탁했지만 갈길이 바쁘다며 뿌리쳤던 그는 지금껏 그 일을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잠시 멈추기를 주저하지 말고 자비를 베풀라는 그 얘기가 그제서야 진실로 가슴에 와닿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야~호/박대출 논설위원

    지난 주말 청계산에 올랐다. 103년만의 폭설이 내린 산은 맑았다. 백설을 모처럼 즐겼다. 산 아래의 불편함은 잠시 잊혔다. 발바닥엔 뽀드득 감촉이 와닿았다. 영하의 날씨에도 땀이 흘렀다. 내친김에 야~호를 외쳤다. 어릴 때 새벽 약수터 다니면서 배운 야~호였다. 백설에 매료돼 오랜만에 내질렀다. 묵은 때를 벗는 상쾌감을 맛봤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이런 무식을 일깨웠다. 산에선 야~호가 금지란다. 지리산 반달곰 15마리가 동면에 들어갔다. 야~호는 곰들을 깨우는 행위다. 자칫 깨어나 탈진할 수도 있다. 야~호는 야생 동물에 스트레스를 준다. 불임 원인까지 된다. 인간이 제생각만 하면 자연이 다친다. 뒤늦게 알았다. 동료가 위로해준다. 후지산에서 일본 사람들도 야~호를 외치더라고. 아파트 마당은 아직도 온통 눈이다. 출입문 쪽에 길을 낸 게 내가 한 일의 전부다. 응달이라 녹을 조짐이 안 보인다. 구내 방송에서 주민 협조를 구한다. 주말엔 잠시 짬을 내야겠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길섶에서]처음 그대로/함혜리 논설위원

    21세기의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면서 여느 때와는 다른 각오를 다졌건만 아직도 획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느니 생활 속에서라도 작은 변화들을 꾀하기로 다짐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법. 30분 일찍 일어나기, 아침에 기지개 활짝 켜고 5분 이상 스트레칭 하기, 세수한 뒤 거울 보고 활짝 웃기,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운동하기, 주말에 약수터 가기, 한 번 이상 붓글씨 쓰기, 가족들에게 자주 안부전화하기, 전화 친절하게 받기, 약속시간보다 5분 일찍 가기,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기, 내가 먼저 정답게 말걸기…. 노자의 도덕경에 신종여시(愼終如始) 즉무패사(則無敗事)란 말이 나온다. ‘마지막에도 시작할 때처럼 신중하면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란 뜻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의 마음가짐을 갖고 끝까지 주의를 기울이고 정성을 다하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얘기인데 그러질 못하니 뜨끔하다. ‘처음 그대로의 마음을 끝까지 잃지 않기’도 변화 목록에 추가해야겠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기숙학원/이춘규 논설위원

    수도권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가면 대학입시 ‘기숙학원’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경기도 남양주시 축령산 입구에는 D기숙학원이 있다. 양평군 양수리 인근에는 다른 D학원이 있다. 강화도에는 콘도를 개조한 J기숙학원이 있다. 20여년 전부터 생긴 기숙학원 열기를 실감케 한다. 기숙학원은 온갖 유혹으로부터 격리시켜 공부에 매진케 하는 환경을 제공한다. 오전 6시께 기상해 종일 공부다. 점호를 거쳐 밤 12시에 1차 취침, 이어 오전 2시 의무취침 식이다. 단체복도 입힌다. 휴대전화나 동영상 재생기 휴대는 금지다. 외박은 3주~1개월에 1회꼴로 허가된다. 불안한 부모가 원하면 인터넷을 통해 학생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곳도 적지 않다. 규율은 군대 이상 엄격하다. 강사들이 24시간 함께한다. 안쓰러울 정도지만 그래도 학생들이 모여든다. 막판 대학입시철 기숙학원들이 광고를 통해 재수생 유치 경쟁을 펼친다. 직영농장의 안전먹거리, 운동시설 등을 내세운다. 2011학년도 대학입시 열풍이 벌써부터 뜨겁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 1월의 성탄절/노주석 논설위원

    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12월25일이 아니다. 1월7일이다. 지난 성탄절 러시아인 후배 가족을 집에 초대했다가 알게 됐다. 달력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력과 달리 정교회를 믿는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에 따라 성탄절을 맞는다. 율리우스력은 그레고리력보다 매년 11분이 늦어 지금은 13일 정도가 차이가 난다. 그레고리력은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1582년 고안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원전 45년에 도입한 율리우스력으로 계산하면 부활절과 성탄절의 날짜가 달라지는 문제를 해소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정교회 신자들은 로마교황이 제정했다는 이유로 그레고리력을 따르지 않는다. 일상생활은 그레고리력을 쓴다. 러시안 후배는 연말엔 크리스마스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대신 1월1일부터 열흘 정도 신년 겸 성탄휴가를 갖는다고 했다. 음력과 양력이 혼용되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올 설날은 2월14일이다. ‘2월의 설날’이나 ‘1월의 성탄절’이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거소증/박대출 논설위원

    A는 재미교포다. 한국에서 비즈니스를 한다. 3년째 접어들었다. 적잖은 세금을 낸다. 그는 주민등록증이 없다. 주민등록번호가 자동 말소됐다. 거소증으로 신분증을 대신한다. 불편함이 하나 둘이 아니다. 휴대전화 신청부터 안 된다. 겨우 회사 명의로 개통시켜 쓴다. 집 전화는 그래서 달지도 못했다. 케이블 TV도 못 본다. 인터넷 쇼핑도 할 수 없다. 신용카드 발급은 처음부터 포기했다. 거소증 번호는 13개 숫자로 돼 있다. 앞은 6자리, 뒤는 7자리다. 주민등록번호와 체계가 같다. 그런데도 별로 쓸모가 없다. 개인정보 입력단계에서 막힌다. 인터넷도, 은행도 마찬가지다. 휴대전화 회사에, 케이블 TV 회사에 따져봐야 소용 없다. 어떤 때는 화가 치민다. 납세의무까지 다하는데 권리는 없다. 국민권익위가 권고안을 냈다. 이런 불편함을 덜자는 취지다. 어릴 때 고향 동네에 화교학교가 있었다. 없어진 지 오래다. 상당수가 한국을 떠났다. 상속문제를 비롯한 여러 불편함 탓이었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길섶에서] 호호호/노주석 논설위원

    지하철의 변신이 눈부시다. 시(詩)가 등장한 것이다. 비록 자투리이지만 지하공간을 문화화하려는 의미있는 시도라고 생각된다. 전에는 전차를 기다리며 멍하게 서 있기 일쑤였다. 요즘은 시가 적힌 스크린도어 앞으로 발길이 절로 향한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문학소녀 시절이 그리운 아주머니도, 시 읽을 시간이 없는 학생들도 기웃거린다. 소의 해가 지고, 호랑이해가 떴다. 일갑자 만에 돌아온다는 귀한 흰 호랑이기도 하다. 지난 연말 지하철 곳곳에 나붙은 포스터의 문구가 재미있었다. “올해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다음해는 ‘호호호’ 웃읍시다”. ‘소’도 나오고 ‘호랑이’도 나오는 재치있는 덕담이다. 호시우보(虎視牛步)라 했다. 소처럼 우직하게 걷되 호랑이처럼 매섭게 살피라는 뜻이리라. 지난해와 올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가 여럿 소개됐지만, 십이간지의 바통을 주고받는 두 동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유일한 성어가 아닌가 한다. 간과하지 말 것은 ‘호호호’ 웃기보다 쿨한 시각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착한 군인/이춘규 논설위원

    서울에 103년만의 폭설이 내린 4일 현장확인을 위해 걸어서 귀가했다. 오후 9시 태평로 사무실을 나서 남대문, 남산, 후암동 길을 지났다. 간신히 사람 다닐 정도의 길만 뚫려 있었다. 사무실이나 집앞 눈을 치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면도로는 차가 다니지 못했다. 조심조심 걸었다. 오후 10시 용산동2가 비탈진 이면도로. 수십명의 군인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취침점호가 끝나고 잠잘 시간인데. 제설용 플라스틱 삽과 빗자루 등으로 벌써 수십m를 깨끗이 정비했다. 전투복을 단정하게 입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다. 한참을 지켜봐도 요령 피우는 군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착한 군인들. 믿음직했다. 얼었던 몸이 스르르 풀렸다. 이들이 없었다면 1시간반 귀갓길은 온통 황량했을 것이다. 다설지역 고향마을 사람들은 “눈 온 날 집앞 길은 그 집 사람들의 얼굴”이라고 해 신경썼다. 길이 100m가 넘어도 식구들이 나서 수시간씩 눈을 쓸었다. 눈 치우기는 생활이었다. 왜 서울시민들은 제 집·가게앞 눈을 방치할까. 해결책은 없는가.
  • [길섶에서] 사제지간/함혜리 논설위원

    해남의 미황사에서 해넘이·해맞이 템플스테이를 했다. 폭설에도 불구하고 땅끝 마을의 미황사까지 새해를 맞으러 온 사람들은 60여명이나 됐다. 모든 일정이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컸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즐겁게 남들을 위해 봉사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새해 아침에 절 마당에서 만난 자원봉사자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여섯명의 젊은이들은 양산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친구들로 올해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도 많을 텐데 하필 절에서 자원봉사를 한 이유가 궁금했다. 중2 때 담임선생님이 미황사에서 자원봉사를 하는데 함께 하자고 권했기 때문이란다. 올해 30대 초반인 선생님에게 양산중학교는 첫 부임지였고, 그 해에 담임을 맡았던 제자들이라 각별한 애정이 여태껏 지속되고 있다. 좋은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 선생님과 그 뜻에 선뜻 따라나선 제자들. 모든 사제지간이 이 정도만 된다면 세상이 참 따뜻할 텐데.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작심/이순녀 논설위원

    새해 첫날, TV를 보던 남편이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흡연자의 폐를 찍은 사진이 화면에 나올 때였다. 지난해 경험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작심삼일 아니야?” 툭 던지고선 아차 싶었다. 담배를 끊겠다고 마음 먹은 게 어딘데 격려는 못해줄망정 비아냥거리다니…. 미안한 마음은 하루를 못갔다. 잘 참나 했더니 결국 담배의 유혹에 지고 말았다. 작심삼일도 아니고 작심하루였다. 그나마 담배 피는 횟수를 줄이려고 껌을 씹는 노력을 계속하는 게 다행이다 싶다. ‘그 마음에서 일어나서 그 일을 해치고, 그 일에서 일어나서 그 다스림을 해친다’(作於其心 害於其事 作於其事 害於其政)는 맹자의 말에서 유래한 작심(作心)은 심사숙고하여 마음에서 결정짓는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삼일을 못간다니 한번 굳어진 습관은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가. 그래도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리 작심삼일로 끝날지라도 작심을 멈추지 않는 것, 이것을 올해의 목표로 삼는 건 어떨까.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길섶에서] 배우의 죽음/손성진 논설실장

    학창 시절에 까까머리로 교복을 입고 극장에서 보았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감동은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마음속에 잔잔하게 남아 있다. 줄리 크리스티(라라역)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던 오마 샤리프(지바고역)의 우수에 젖은 애틋한 눈빛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오마 샤리프의 짙고 긴 속눈썹과 커다란 눈망울의 매력은 남녀를 불문하고 사람을 빨아들일 만큼 강렬했다. 얼마 전 그런 오마 샤리프의 부음 기사를 접했을 때 밀려오는 아쉬움은 나만 느낀 감정은 아닐 것이다. 더는 살아 있는 그를 볼 수 없다는 묘한 허탈감이다. 2008년 오마 샤리프와 같은 83세의 나이에 폴 뉴먼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의 푸른 눈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특히 많은 팬들이 슬퍼했다. 영화 속의 배역이 남기는 아련한 환상 때문에 배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더 커진다. 그래서 좋아하는 배우는 평생 늙지 않고 죽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가 보다. 그러나 어쩌랴, 인명은 유한한 것을. 배우는 가도 영화는 남아 있기에 다행스럽다. 오늘 밤 영화 파일을 구해 ‘닥터 지바고’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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