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생각대로/박대출 논설위원

    출근길은 전단지와의 전쟁이다. 지하철 입구 계단은 주 전쟁터다. 주는 이는 둘로 나뉜다. ‘선수’들이 많다.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다. 전단지를 마구 들이댄다. 길을 막아서기도 한다. 그들을 물리치기는 쉽지 않다. 가끔 초보가 있다. 머뭇거리거나 부끄러워한다. 아침에 한 초보를 봤다. 길 가는 이가 외면하자 난감해한다. 괜히 안쓰러웠다. 그에게 물어봤다. 한 시간에 1만원 받는다고 했다. 시민 표정도 엇갈린다. 혹은 맥없거나, 혹은 활기차다. 전자는 주로 전단지를 피한다. 무표정한 모습으로 외면한다. ‘선수’가 막아서는데도 게걸음으로 빠져나간다. 귀찮다는 듯 인상을 쓰는 이도 있다. 부정이 엿보인다. 후자는 다르다. 여유와 배려가 읽힌다. 긍정이 깃들어 있다. 긍정의 힘. 요즘 화두다. 어릴 적 캠페인이 생각난다. 스마일운동이다. 일소일소 일로일로(一笑一少 一怒一)란 해석도 배웠다. 웃으며 전단지를 받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 일상은 어떨까. 생각대로 되지 않을까. 나한테 물어보는 말이다.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길섶에서] 제비 마을/이춘규 논설위원

    양평 들녘에서 5월 초에 만났던 제비들을 찾아갔다. 군무를 하던 근처에 집은 있을 터. 어렵잖게 길가 단층 슬라브 가옥 벽에서 제비 둥지를 찾았다. 어! 놀랍다. 제비집이 하나가 아니고 무려 6개다. 제비들의 마을이다. 쌍쌍이 알을 번갈아 품고, 그 후 새끼를 키웠다. 왜 이럴까. 일본에서 살 때다. 자매회사 1층 난간 4개의 제비집에서 제비부부들이 3년 연속 각각 알을 품고, 새끼를 키웠다. 도쿄만 근처로 습지·초지가 있어 집 재료와 먹이가 풍부했다. 양평 제비 마을도 산과 강, 친환경 농법의 논이 가깝다. 예전 제비들은 한 가옥에 둥지가 한 개였는데…. 한 집에 복수의 제비집을 짓는 곳이 증가일로다. 제비 마을 시대다. 환경오염으로 먹이가 감소해 살 곳이 줄자 먹이가 있고 안전하면 한 가옥에 여러 채를 짓게 된 걸로 추정된다. 새끼들이 옆집 어른 제비의 먹이를 보고 헷갈려하는 제비 마을이 안타깝다. 제비의 집단 거주 전환도 인간에 대한 자연의 경고인가. 환경을 복원해주면 제비들이 한가롭게 살 수 있을 텐데.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옛 편지/함혜리 논설위원

    가끔 책갈피나 책상 서랍 속에서 오래된 편지들이 나올 때가 있다. 지니고 있는 걸 보면 당시에는 꽤 의미가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다시 읽어 보면 별 내용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접어 책갈피에 끼워둔다. 추억은 버릴 수 없으니까. 이메일이 보편화된 요즘. 지우기, 비우기를 반복해도 ‘받은 편지함’에는 지우지 않은 이메일들이 꽤 쌓여 있다. 지난 이메일을 열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미국 LA에 사는 대학 선배에게서 받은 메일을 열어 봤다. 동문회 주소록에서 내 메일주소를 확인했단다. 무척 반갑다면서 월드컵 때문에 바쁠 테니 정신 좀 차리고 나서 자세한 안부를 전하라고 썼다. 독일 월드컵을 얘기하는 거다. 지금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고 있으니 그 새 4년이나 세월이 흐른 셈이다. 편지 아이콘에 화살표 표시가 없는 것을 보니 이 무정한 후배는 답신도 안 했던 모양이다. 많이 늦었지만 선배에게 답신을 보냈다. 속절없는 세월을 핑계대면서.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가정 안보/육철수 논설위원

    요즘 집안이 뒤숭숭하다. 다리가 수십 개 달린 벌레가 여러 번 출몰해서다. 아내와 아이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평화로운 가정에 외적이 침입한 중대 사태다. 며칠 전 둘째 딸이 안방으로 들어와 다짜고짜 “무서워서 잠이 안 온다.”고 했다. 얘기를 들어보니 지네가 쏜살같이 자기 방을 가로질러 침대 밑으로 숨었단다. 딸의 방으로 뛰어올라가 샅샅이 수색했으나 흔적이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거실 소파로 밀려나고 아내의 옆자리는 둘째 딸이 차지했다. 사흘 뒤, 아들로부터 또 벌레를 봤다는 보고를 접했다. 다리가 6개 정도면 손을 쓸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많아서 무서웠다는 것이다. 사내 자식이 겁은…. 다음날 현관 입구에서 문제의 벌레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절지류인데 지네는 아니었다. 썩거나 습기 많은 곳에 사는 벌레다. 집안 일부 구석의 불결함이 창궐의 원인인 것 같다. 일단 문밖으로 유도해 즉시 사살했다. 완전 소탕할 때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모처럼 가장으로서 안보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맞았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길섶에서] 인심/곽태헌 논설위원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대표적인 실세였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때에는 4년여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만난 김기섭 전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에게 들은 얘기를 지인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김 전 실장이 5·6공 시절 금융계의 황태자였던 이원조씨에게 ‘알고 지내던 1만명 중 1명만 찾아왔다.’고 말하자, 이씨가 ‘너는 인생 잘 살았다. 나는 10만명 중 1명만 찾아왔다.’고 말했다더라.” 15년 전 국세청의 ‘넘버 3’로 통했던 H씨가 별세했다. 고위 관료가 현직에서 별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국세청 직원들은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조문하고 ‘넘버 1’인 국세청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국세청장이 조문하고 곧 병원을 떠나기가 무섭게 직원들도 사라져갔다. 세상 인심은 이렇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門前成市)지만 정승이 죽으면 한산하다.’는 옛말이 맞다.”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박 원내대표의 말이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길섶에서] 월드컵 응원/이순녀 논설위원

    남아공월드컵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모레는 그리스를 상대로 우리나라 대표팀의 첫 경기가 있는 날. 운좋게도 출근 걱정, 등교 걱정 없이 맘껏 응원을 펼칠 수 있는 토요일이다. 전국 방방곡곡 거리마다 온통 붉은 물결로 넘쳐날 걸 생각하니 벌써 가슴이 설렌다. 4강 신화를 쓴 2002년 한·일 월드컵 이래 거리응원도 진화해왔다. 올해는 1박2일 응원과 3D 영상이 ‘신상’(품)으로 등장했다. 한강공원 난지캠핑장은 12·13일 이틀간 응원과 숙박을 겸한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코레일은 1박2일 응원열차를 운행한다고 한다. 찜질방, 펜션 등도 인기다. 3D로 월드컵 경기를 생중계하는 대형 영화관들도 많다. 응원은 단체 응원이 제맛이다. 아무리 재밌고, 훌륭한 경기라도 혼자서는 맥이 빠진다. 2002년 월드컵 때 외국에서 나홀로 TV를 지켜보며 느낀 외로움과 소외감은 지금까지도 회한으로 남아 있다. 우리 대표팀이 승승장구해 거리응원이 폐막 때까지 쭉 이어질 수 있길 기대한다. 이순녀 논설위원 coral@seoul.co.kr
  • [길섶에서]단잠/함혜리 논설위원

    생활리듬을 자연에 가장 가깝게 돌려 이른 아침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아침형 인간이라고 한다. 아침에는 집중력과 창의력이 좋아져 적은 시간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정설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침형 인간이라고 한다. 얼마 전부터 회사 근처의 헬스클럽에서 아침 시간에 요가를 하고 있다. 기상시간을 단지 1시간 앞당겼을 뿐인데, 그 작은 변화가 내게 가져다 준 선물은 기대 이상이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니 건강은 절로 좋아지고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뿌듯하다. 특히 저녁에 잠이 안 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베개에 머리를 대기만 하면 이내 깊은 잠에 빠진다. 잠이 달콤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됐다. 아침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날은 그냥 더 잔다. 그런 잠은 짧지만 더욱 달콤하다. 아침운동을 시작한 지 100일이 지났다. 습관이 될 때도 됐으니 나도 이제 아침형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솔직히 단잠의 유혹이 너무 강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선입견/김성호 논설위원

    동네 하수관 공사로 집 드나들기가 불편하다. 길이란 길은 온통 파헤쳐졌는데. 평소의 출입구를 봉쇄한 탓에 다른 쪽 문으로 난 먼 길을 다닌 지 달포째. 며칠 고생하면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빙 돌아다녔다. 불편함이야 조금 참으면 될 터. 그보다는 출근 때마다 출입구 봉쇄 사실을 잊어버리는 건망의 반복이 더 불편하다. 오늘 아침엔 잊지 않고 반대쪽 출입구 쪽을 향해 제대로 방향을 잡았는데. 아뿔싸. 오늘부터는 원래 출입구를 개방한단다. 반대쪽은 막고. 어리석다. 미리 알아 챙겼으면 이런 헛수고쯤이야 덜 수 있을 텐데. 미련한 선입견. 투덜거리며 내딛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다. 따져보니 엊저녁 아들녀석 일도 그랬다. 느닷없이 박박 깎은 삭발이라니. 반항? 투쟁? 가끔 엉뚱한 일을 벌여 놀라게 하는 사춘기의 녀석. 퉁명스러운 핀잔에 입을 닫곤 두문불출이다. 한참만에 말문을 연 녀석의 일성은 가상하게도 심기일전의 다짐이라는데. 속도 모르고 공연히 야단만 쳤으니. 미련한 선입견이다. 미안하다.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얼리 어댑터/구본영 수석논설위원

    트위터는 웹이나 휴대전화를 통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다. 미국에선 “세상을 바꾸는 140자의 마법”으로 불릴 정도로 이미 확산 추세다. 개인적으로 트위터에 가입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벌써 두 달째다. 공사 간에 이런저런 바쁘고 신경 쓰이는 일이 많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뤄 왔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이는 핑계일 뿐 기실은 낯선 환경에 선뜻 뛰어들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운 꼴이다. 트위터가 지난 6·2 지방선거전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젊은 층을 투표장으로 이끄는 데 꽤 기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런 소식을 듣고 스스로를 되돌아 보았다. 세상의 변화에 발빠르게 적응하는 ‘얼리 어댑터(early adaptor)’ 축에는 못 끼더라도 너무 뒤처져서야 안 되겠다는 조바심이라면 조바심이다. 하기야 인도 철학자 라즈니쉬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삶은 발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항상 열어두어라.”는 권면과 함께. 구본영 수석논설위원 kby7@seoul.co.kr
  • [길섶에서] 잡초/이춘규 논설위원

    늦은 봄 고향에 가 가족묘를 살폈다. 잔디에 섞여 웃자란 잡초들이 눈에 거슬렸다. 준비도 안 하고 가 맨손으로 몇 개 뜯어냈다. 보기에 한결 좋았다. 내친 김에 잡초를 모두 뽑고 잘라버렸다. 묘가 산뜻해져 뿌듯했다. 그런데 작업을 한 오른 손목이 따끔거렸다. 무심코 지나쳤다. 다음날 오른 손목 주변에 붉은 반점 50여개가 솟아났다. 접촉성피부염인 풀독이었다. 보기 흉했다. 가려웠다. 쑥을 이용해 며칠간 민간요법 치료를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5일이 지난 뒤에야 병원을 찾아 주사 맞고 처방약을 먹었다. 근무 중 졸림이 심하지만 겨우 나아간다. 풀·나무·열매는 스스로 못 움직이지만 해충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독을 지닌단다. 종족보전을 위해 성장기 때는 더 독하다. 나무들이 해충을 물리치려 뿜어낸다는 피톤치드는 일부 질환 치유 효과도 있다지만 유기농산물을 포함한 일반 식물의 인체 유해 독 함유 여부는 논란 중이다. 잡초도 정말 자기방어를 위해 독을 내뿜을까. 잡초라고 가볍게 다뤘다가 혼났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 당선자/육철수 논설위원

    신경전달 물질 가운데 세로토닌이라는 게 있다. 뇌를 지배하는 이 물질은 자신만만한 말투와 행동을 하게 만든다. 운 좋게 권세를 얻은 사람은 세로토닌의 증가와 그 선순환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는 경우가 많단다. 거꾸로 운이 다하면 세로토닌이 말라버려 예전의 위엄은 사라지고 초라하게 변한다고 한다. 우위를 확보한 사람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신체신호’를 발신한다는 게 과학적 실험의 결과다. 심리학적 통설이기도 하다. 의식적으로 얼굴 표정을 관리하더라도 전화 받는 방식, 걸음걸이, 미세한 위압적 행동 등으로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십상이다. 주변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 역시 세로토닌의 요술 덕분이라고나 할까. 지방선거 당선자들이 결정됐다. 그들은 세로토닌이 퐁퐁 솟아날 게다. 하지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처럼 싹 달라져선 곤란하다. 선거운동하면서 유권자를 하늘같이 모시던 그 마음 부디 변치 마시길….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길섶에서] 함박꽃/함혜리 논설위원

    이맘때쯤 피는 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함박꽃을 꼽겠다. 화려하다면 화려하다고 할 수 있고, 소박하다면 소박하다고 할 수도 있는 넉넉한 꽃이다. 주먹만큼이나 굵고 탐스러운 꽃 송이가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것 같다. 마당 한구석에 한두 송이만 피어 있어도 집안 전체가 환해지는 느낌이다. 북촌의 한옥 마당에 함박꽃이 피어 있었다. 밤이어서 꽃잎을 살짝 오므리고 잠잘 채비를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흘러나오는 은은한 향기가 일품이다. 달빛에 비친 흰색 함박꽃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삼청동 감사원 앞뜰에는 연분홍빛 겹함박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탐스럽고 아름다운 꽃을 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조상들도 마당에 핀 함박꽃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이렇게 근심걱정을 덜었겠구나 싶었다. 함박꽃을 작약(芍藥)이라고도 하는데 ‘꽃이 아름다운 약초’라는 뜻이다. 몸의 병도 병이지만 마음의 약이 되기에 더 아름다운 꽃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버릇/김성호 논설위원

    이른 아침 출근길 전철. 매일 그 시간, 그 차량이다. 한결같이 같은 시간대, 같은 칸에 몸을 싣다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적지 않다. 몇몇 손님끼리는 가벼운 눈 인사도 나눈다. 이른 시간, 한적한 차량 속 몸짓은 아무래도 눈에 쉽게 들기 마련. 유별난 말과 움직임이 아니더라도 전철 속 이웃들이 가진 특징들이 이젠 빤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묵주 기도에 빠지는 50대 아주머니, 언제나 빨간 뾰족구두의 20대 초반 아가씨, 남 시선에 아랑곳없이 끼니를 허겁지겁 때우곤 코를 고는 30대 남자, 바쁘게 시선을 돌려 승객들을 뚫어져라 살피는 중학생…. 매일 아침 어김없이 반복되는 행동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런데 요 며칠 새 가죽 손가방 노인이 보이질 않는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가죽가방 속 수첩을 꺼내 뭔가를 쓰곤 하는 70대 할아버지. 흔들리는 차 안에서 한결같은 글쓰기가 특이하다. 열심히 펜을 놀리다가 눈이 마주치면 빙그레 웃던 할아버지의 버릇. 저들의 눈에 비치는 나의 버릇은 뭘까. 나만의 버릇이 분명 있을 텐데.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눈빛/함혜리 논설위원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눈에 독특한 빛을 담고 있다. 눈빛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하기도 한다. 포토저널리스트 스티브 매커리가 1984년 파키스탄에 있는 아프가니스탄 난민촌에서 촬영한 아프간 소녀의 눈빛은 두려움과 공포, 미래에 대한 암울함을 담고 있다.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집어삼킨 공포의 정체는 전쟁이다. 폭격으로 부모를 잃고 난민촌에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는 그녀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매커리는 17년 뒤 이 소녀를 다시 찾아 나선다. 30살이 된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던 열쇠는 강렬한 눈빛과 에메랄드빛 눈동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샤밧.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얼굴에는 고달픈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지만 눈빛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그녀의 아름다운 눈빛에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샤밧은 눈빛으로 세상에 말하고 있었다. 전쟁을 제발 멈춰달라고. 그래서 내 아이들이 미래와 희망을 갖게 해 달라고.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선거 공해/노주석 논설위원

    지방선거일이 코앞에 다가오면서 출·퇴근길이 괴롭다. 아침, 저녁으로 아파트단지와 지하철역, 버스 정류장에서 후보자와 선거운동원들에게 시달린다. 점심시간 회사 근처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수막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선거공해라고 할 만하다. 이리저리 받는 명함, 전단이 손에 수북하다.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포기하고 승용차를 이용할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전단은 양반이다. 확성기와 LED 홍보판을 설치한 선거운동 차량은 거의 무법자 수준이다. 밤낮 없이 골목길까지 비집고 들어와 틀어댄다. 산책이나 운동하는 시민이 대부분인 청계천변까지 누비며 귀를 찢는다. 북한이 대북 심리전 재개에 왜 그렇게 민감해하는지 이해가 갈 정도다. 초조한 후보자와 선거운동원들의 마음도 헤아려 보지만, 효과는 의심스럽다. 잘 보지도 듣지도 않게 된다. 선거벽보와 미디어를 통해 충분히 파악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게 다 선거비용이라고 생각하면 걱정된다. 혹 당선 후 본전 생각을 하지나 않을까.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건망증/박대출 논설위원

    며칠 전 길에서 선배를 만났다. 도통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 선배는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하는데. 엉거주춤 반가움만 표시하고 돌아섰다. 가족들에게 이 얘기를 꺼냈다. 깜빡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푸념했다. 아내도 동조한다. 또 출산 핑계를 댄다. 고1짜리 딸이 아이디어를 냈다. 게임을 하자는 것이다. 치매나 건망증을 예방하는 게임이라고 했다. 웃고 말았다. 치매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다. 친구들도 건망증 얘기를 자주 한다. 나이 탓을 하기도 한다. 직장에서도 화제가 됐다. 예방 게임 생각이 났다. 그런데 무슨 게임인지 모르겠다. 아내에게 휴대전화로 물었다. 아내도 까먹었단다. 딸아이는 학교에 있고. 저녁에 물어볼 수밖에 없다. 다행히 얼마 전 읽은 글은 생각난다. 건망증은 대뇌 활동이 활발한 증거라고 한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연구 결과다. 조금 위안이 된다. 그래도 찜찜함은 여전하다. 오갈피, 꿀, 창출, 참깨. 건망증에 좋다는 음식들이다. 내친 김에 먹어볼까.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 [길섶에서] 쪽박바꿔줘/이춘규 논설위원

    5월 숲에서 온종일 휘~휘휘휘, 검은등뻐꾸기가 울었다. “옛날에 며느리가 밥을 많이 한다며 시어머니가 쪽박을 깨버렸다. 깨진 쪽박으로 밥을 하니 항상 모자라 며느리는 영양실조로 죽는다. 영혼이 새가 되어 ‘쪽박바꿔줘’라며 울었다.”는 슬픈 전설의 새. 별칭 쪽박바꿔줘다. 아침엔 숲 입구에서 야행성인 소쩍새가 울었다. “옛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살았다. 며느리를 미워한 시어머니는 솥을 작게 만들어서 밥을 하게 했다. 솥이 작으니 밥이 모자라 제대로 밥을 못 먹고 피를 토하며 죽어 소쩍새가 됐다.”는 소쩍새의 전설을 생각했다. 슬픈 새들이다. 숲의 끝 무덤가 할미꽃. 고약한 부자 큰손녀 집에 살던 할머니가 가난하지만 착한 작은손녀 집을 찾아가다 고갯마루에 쓰러져 숨진 뒤 되었다는 할미꽃. 조상들은 동·식물에도 인격을 부여하는 소프트파워가 강력했다. 전자산업이 하드웨어는 강한데 소프트웨어가 약해 문제란다. 민담, 전설, 설화로 동·식물을 대접한 선조들의 소프트파워를 되살려보자.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무재칠시(無財七施)/노주석 논설위원

    노자는 도덕경에서 “물은 능히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갈파했다. 물은 일정한 모양이 없다. 둥근 사발에 담으면 둥글게 변하고, 네모난 접시에 담으면 네모가 된다. 물은 변화를 밥 먹듯 하지만 본질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공직을 떠나 정치에 몸담은 선배의 말이다. 물을 닮고 싶은 심정이 절절하게 읽혔다. 정치란 역시 만만치 않다고 여겼다. 또 석가모니의 ‘무재칠시(無財七施)’ 가르침을 전했다. 좋은 말 한마디로도 얼마든지 베풀 수 있는 언시(言施)나,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심시(心施)를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라고 했다. 비록 빈털터리일지라도 가능한 나눔이요 베풂이기 때문이란다. 이제야 철이 드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나는 20년 넘게 선배의 부드러운 말과 따뜻한 마음씀씀이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여전히 모난 말을 달고 산다. 마음도 팍팍하다. 지천명(知天命)에도 철 들긴 글렀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길섶에서] 미치광이풀/이춘규 논설위원

    1000m 안팎의 높고 긴 능선 종주 길. 8시간 이상, 13차례 종주하면서 계절별로 수많은 야생화들을 음미하고 촬영해 놨었다. 능선의 야생화들은 다 봤다고 자만했다. 아니었다. 조금 과장하면 숨막히게 아름다운 암갈색 꽃을 봤다. 한복 입은 고운 여인의 자태다. 군락도 네 군데. 내려와 이름을 확인하고는 또 놀랐다. ‘미치광이풀’이라고 했다. 미친풀, 독뿌리풀이라고도 한다. 자태와 달리 으스스한 이름뿐이다. 짐승이 먹으면 미쳐 날뛰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잎에 신경을 흥분시키는 성분이 있다. 뿌리는 독성이 있다. 약용이라고 한다. 소량으로는 진통효과도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독초, 미치광이풀이다. 다 안다는 자만과 고운 이름을 떠올렸던 경박함을 야유한 미치광이풀. 어른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귀하게 크라며 돼지 등 험한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름과 모습이 함께 예쁜 꽃도 많지만 전혀 다른 꽃도 있다. 사람·사물을 이름이나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낭패 보기 쉽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 사투리/김성호 논설위원

    길 모퉁이의 찻집 여주인은 경상도 억양이 거세다. 오래전 시골서 상경, 서울 생활에 맞추느라 무던히 애를 썼다는데. 불쑥불쑥 터지는 사투리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놀림삼아 말투를 바꿔주려 들면 정색하곤 태도를 바꾼다. 같은 말이라도 이왕이면 사투리 아닌 방언이라 해 달라니. 사투리가 싫긴 싫은가 보다. 군 복무시절 경상도 출신 후임병이 그랬다. 아무리 교정을 시켜도 번번이 ‘쌀’이 아닌 ‘살’이다. 놀림삼아 얼차려도 줘 봤지만 그때뿐. 후임병의 입에서 쌀은 어김없이 살로 되살아나곤 했으니. 말투의 멍에는 정말 벗기가 버거운가 보다. 남자 직원들만 있는 어느 직장의 해프닝.“야유회에 여승(여성)을 동반하자.”는 경상도 출신 팀장의 제안이 있었는데. 누구의 공이었을까, 야유회에 비구니가 환히 웃고 나타났단다. 혀에 익은 말 버릇이야 쉽사리 버릴 수가 있을까. 말은 적게 하고, 신중히 들으라 해서 입은 하나요, 귀는 둘이라는데. 군 시절 뭣하러 얼차려까지 줬을까. 지금도 여전히 ‘살’일 텐데.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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