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비움/곽태헌 논설위원

    휴대전화가 나온 뒤에는 전화번호를 수첩에 기록할 필요가 없어졌다. 명함을 받으면 으레 자동적으로 휴대전화에 입력하는 게 습관 아닌 습관이 된 지도 꽤 오래됐다. 얼마 전 휴대전화에 새로운 번호를 입력하려다 실패했다. 이미 전화번호 입력 한도 1000명이 꽉 찼기 때문이다. 필요없는 것을 지우려고 저장된 번호를 순서대로 보기 시작했다. 최근 몇년간 만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전화통화조차 없던 사람들을 지워 나갔다. 앞으로 만날 가능성이 사실상 전무한 사람의 이름과도 이별을 했다. 과거 직책상 알았기 때문에 지금은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제외했다. 번호가 바뀐 탓에 특정인의 이름이 2~3개씩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불필요한 것을 정리하니 앞으로 좋은 인연으로 만나게 될 지인의 번호를 추가하는 데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 필요하지도 않은 이름과 번호를 저장하고 다녔던 셈이다. 어찌 보면 게으른 탓이고, 어찌 보면 욕심 때문이다. 비워야 새롭고 좋은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는 법이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길섶에서] 커피 한잔/최광숙 논설위원

    커피 하면 생각나는 추억이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지 싶다. 노총각이던 작은 외삼촌은 당시 귀한 커피를 즐겼다. 인스턴트 커피를 찾기 어렵던 시절인지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미제 커피였던 것 같다. 어느날 삼촌이 마시던 커피가 우리집에도 등장했다. 어머니는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 커피를 진하게 끓였다. 우리 형제들은 주전자 주변에 둘러앉아 프림도 없이 시커먼 한약재 같은 커피를 마셨다. 스테인리스 대접으로 쭉 들이켰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희한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동네 개울가에서 부르던 ‘커피 한잔’ 노래도 떠오른다. 큰오빠가 노래를 가르쳐 준다며 어린 나에게 따라 부르게 한 노래가 바로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봐도~”다. 그 노랫가락과 가사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걸 보니 오빠들과 노래 부르는 것이 퍽 좋았나 보다. 커피에 얽힌 추억은 이토록 진하건만 난 커피를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세계 11위 커피 수입국이란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선반/박홍기 논설위원

    아침마다 지하철을 탄다. 늘 붐빈다. 월요일엔 더하다. 선반을 쳐다본다. 곳곳에 줄줄이 신문이 올려져 있다. 주위 사람들이 신문을 읽는다. 몇 명은 또 올려놓을 거다. 오늘도 등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선반에 있는 신문을 수거하는 이들이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다. 가끔은 젊은이들도 있다. 처음엔 몰랐다. 나이가 지긋하고 허리마저 휜 분이 신문을 거둬 가는 게 안타까워 내려 드렸다. 누군가 혼잣말로 말했다. “안 도와 드려도 되는데.” 그분들의 밥벌이란다. 영역 다툼도 있고, 지하철 분위기를 해친단다. 그래도 냉정하다 싶었다. 아무리 생계형이라지만 노인인데….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 오가는 그들을 탓할 수 있을까. 선반엔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쾌적한 지하철을 위해 작은 배려, 다 읽은 신문은 수거함에.’, ‘다 읽은 신문은 선반 위에 놓지 마시고, 출구 옆 수거함에 넣어 주세요.’ 그렇다. 신문을 읽고 올려놓는 사람들이 더 몰염치하다. 귀찮더라도 들고 나가 수거함에 넣으면 될 것을.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생강나무/이춘규 논설위원

    중앙선 전철이 연장되면서 서울시민들에게 한결 가까워진 경기도 양평 양수리. 양수역에 내려 느긋하게 봄기운에 취해 본다. 이름 모를 잡초들이 앞다퉈 봄을 알린다. 앙증맞은 꽃들. 작은 꽃바다. 향기 질펀하다. 큰 풀에 묻혀 버리기 전 꽃을 피워 대를 잇겠다는 생존본능이 엿보인다. 종주에 7시간 안팎 걸리는 능선에 올라선다. 샛노란 생강나무꽃이 지천이다. 잎을 비비거나 가지를 꺾으면 생강 냄새가 난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수십번 종주했지만 처음 본다. 숲이 우거지면 감춰지는 탓에 그동안 몰랐던 것 같다. 헐벗은 나무들 사이로 키가 3m 남짓하다. 알싸한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연한 잎은 먹는다. 산수유 꽃과 구분이 쉽지 않다. 생강나무꽃 군락은 양수역에서 벚고개, 청계산을 지나 국수역까지 50리 가까운 능선을 따라 터널을 이룬다. 큰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기 전에 꽃을 피워 열매를 맺으려는 생강나무의 가쁜 숨이 느껴지는 듯하다. 생강나무의 옹골찬 생명력을 생각하며 해질녘에야 꽃터널을 빠져 나왔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 난 기르기/최광숙 논설위원

    지난해 선물 받은 귀한 난을 지켜 내지 못했다. 아주 작고 예쁜 난이었다. 그동안 번번이 실패했던 터라 이 난은 어떻게든 잘 키워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 어린 생명을 지키고자 평소 물을 잘 주고 사랑도 듬뿍 줬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래도 예전보다 신경을 많이 썼다. 그런데도 시들시들하더니만 병색이 완연해지는 게 아닌가. 회사 내 난을 잘 ‘치료’하는 ‘명의’를 찾았다. “살려 달라.”는 부탁과 함께 난을 명의의 사무실에 ‘입원’까지 시켰다. 상태가 좋지 않지만 한번 해 보자고 했다. 그 이후 영양제를 맞고 있는 난 화분 모습이 휴대전화로 날아왔다. 참으로 정성을 들여 치료해 주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뿌리가 썩은 일부 난을 솎아내고 다른 난을 이식하는 등 대수술까지 감행했지만 결국 그 난을 구하진 못했다. 그래도 명의는 달라도 달랐다. 내 마음을 위로하고자 다른 난을 하나 키워 보라고 선물하는 것 아닌가. 또 한번 생명을 해칠까 봐 거절했지만 한번 키워 보란다. “난도 연애하듯 사랑을 주고 살살 잘 다뤄야 합니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보톡스/최광숙 논설위원

    세월의 흔적 주름. 주름을 없애기 위한 여성의 몸부림은 가히 처절할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주름방지 화장품과 마사지 등에 들어가는 공과 비용도 적지 않다. 요즘에는 이도저도 필요없다. 보톡스 한방이면 주름은 저리가라다. 덕분에 나이를 종잡을 수 없게 됐다. 특히 여성 연예인 대부분은 보톡스의 힘을 빌리고 있는 것 같다. 얼마나 빵빵하게 보톡스를 맞았는지 보기 민망할 정도다. 거부감마저 생길 때도 없지 않다. 세월을 거슬러도 웬만해야지… 어디 연예인들 뿐이랴. 60대 중반인 지인도 전해들은 바로는 성형수술과 보톡스의 세례를 받아 예뻐졌다고 한다. 최근 즐겨 보는 드라마에 나오는 한 탤런트는 웃을 때 눈가의 잔주름이 안개처럼 퍼진다. 과하게 팽팽한 여배우의 얼굴만 대하다 그의 주름을 보니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진다. 돌아서 내 얼굴을 본다. 남들은 내 얼굴의 주름을 어떻게 생각할까? 영 자신이 없다. 솔직히 보톡스, 외면하기 참 어려운 묘약이지 싶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백발/박홍기 논설위원

    백발에 가깝다. 흰 머리카락이 검은 것보다 많다. 마음과 상관없이 나이 들어가는 것이 역력하다. 굳이 백발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염색이 좋을 것도 없고 해서 그대로 지낼 뿐이다. 한데 남의 눈은 다른 모양이다. 솔직히 신경 쓰이게 한다. 머잖아 오십이 되건만 아직도 남의 시선을 뿌리치지 못하는 탓인 듯하다. 언젠가 지하철을 탔을 때 젊은이가 “여기, 앉으세요.”하며 일어서는 게 아닌가. 순간 두리번거리는 척하려다 “괜찮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이럴 수가, 머리만 희끗할 뿐인데….” 황당했다. 그 후에도 두어번 지하철에서 ‘착한 젊은이’들을 만났다. 한번은 약국에 들렀을 때 바로 옆에서 의자를 오르내리며 장난치던 한 꼬마의 아버지가 하는 말, “할아버지 귀찮게 하면 안 돼.” “할아버지라니….” 흰 머리와 나이를 연결 짓는 문화라지만, 예기치 못한 일을 겪을 때 헛웃음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해 본다. “염색으로 변신을 꾀해 봐?” 그러다 바꾼다. “일단 그대로 살면서 나잇값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낫지.”라고.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마음꽃/김성호 논설위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등지고 누린 잠깐 동안의 여유. 며칠 전 남녘 마을의 매화 놀이는 딱 그것이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한나절의 상춘. 활짝 피었으면서도 다소곳한 매화는 역시 일품이다. 꽃송이에 얹어 피어나는 상춘의 웃음꽃들은 덩달아 기분 좋은 덤이고. 시름 많은 일상에서 걸러낸 촌음의 향락은 언제나 신선하다. 꿈에 본 듯한 매화마을의 기분 좋은 잔상이 너무 짙었나. 비 그친 동네 공원이 유난히 을씨년스럽다. 공원을 빙 둘러선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엔 아직 먼 것만 같고. 약한 바람도 그저 차갑게만 느껴지는데. 그래도 여기저기 자리 잡은 젊은 연인들의 살가운 다정함엔 봄기운이 완연하다. 드문드문 앉은 사람들 사이를 느릿느릿 오가는 할머니들. 몸보다 더 큰 폐휴지 수레를 미는, 등 굽은 노인의 얼굴이 창백하다. 보고 난 신문지를 달라는 요구엔 퉁명스러운 대꾸가 더 많고. 매화마을에 지천인 웃음꽃들과는 영 딴판이다. 봄은 마음으로 온다는데. 세상은 차갑지만 마음꽃이라도 활짝 피웠으면. 훈훈한 마음꽃들을.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습관/주병철 논설위원

    습관도 길들이기 나름. 1980년대 말 무렵까지 언론사에서는 원고지에다 글을 썼다. 반듯한 글, 삐뚤삐뚤한 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흘려쓴 글 등. 글씨체를 보면 누구 것인지를 금방 안다. 그렇게 친숙했던 원고지는 컴퓨터가 등장하고 나서 천대받기 시작했다. 컴퓨터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원고지는 계륵에 가까웠다. 컴퓨터 앞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서투름이나 미숙함보다 원고지에 수없이 썼다가 찢는 불편함이 더 컸으리라. 원고지의 추억이 아련해진 지금, 또 다른 ‘습관의 진화’와 씨름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랩톱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태블릿PC 시대가 도래했다. 문제는 습관의 진화가 도구의 진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 시간적인 여유도 따라주질 않는다. 나쁜 습관, 좋은 습관이 있듯이 습관의 진화도 과거형과 미래형이 있다고 한다. “과거(습관)와 싸우지 마라. 미래(습관)를 창조하라. 그러면 미래가 과거를 정리해줄 것이다.” 미래학자들의 고언에 문득 귀가 쫑긋해진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박홍기 논설위원

    폐지를 줍는 한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 깔끔한 차림의 할머니는 서울 종로구의 주택가에서 조그만 손수레를 끌고 있었다. 종이상자를 겹겹이 싣고서. 일흔은 족히 됐을 법했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분리수거가 워낙 잘 지켜지는 터라 종이상자나 폐지가 없지만 주택가엔 아직 일거리가 적잖다. 인심도 남아 있는 까닭에 종이상자 등을 차곡차곡 정리해 대문 밖에 내놓는다. 잘 가지고 가라는 듯이. 동네 분인 듯한 다른 할머니가 “뭘 그리 어렵게 해. 쉬기나 하지.”라며 인사를 건네자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 “어때, 집에 있으면 뭐하누. 돌아다니면 운동도 되고, 돈도 벌고, 한참 움직이면 밥맛도 좋고, 운 좋은 날엔 쏠쏠해.” 웬만한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서울의 한쪽에서는 폐지를 모으는 할머니들끼리 다투다 크게 다치는 사건이 일어날 만큼 삭막해진 세상에서. 그 할머니는 “좋아서 하는 일이야. 행복이 따로 있는감.”이라며 종이상자를 집어들었다. 정말이지, “행복이 뭐 별건감.”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자연/최광숙 논설위원

    기타의 감미로운 선율을 느낄 수 있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면 타레가가 그런 명곡까지 만들었을까 싶었다. 1993년쯤인가 스페인 여행 중 안달루시아 지방의 그라나다에 있는 그곳을 찾고서야 이해가 됐다. 이슬람 국가도 아닌 곳에서 만난 이슬람 예술의 극치가 바로 알람브라 궁전이었다. 사람이 빚어낸 아름다운 건축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할머니 두분의 속삭임이 들렸다.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그들은 정원에 핀 꽃을 들여다보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의 현장에 와서 꽃구경에 열중하는 할머니들. 나이가 들면 최고의 예술품을 만나도 자연보다 위일 수는 없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 하지만 최근 일본 대지진 참사로 자연의 또다른 이면과 맞닥뜨리면서 겸허한 마음을 갖게 된다. 어마어마한 자연의 위력 앞에 처참하게 무릎 꿇지 않으면 안 되는 왜소한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이었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철옹성 까치집/이춘규 논설위원

    작은방 창문 옆 거대한 나무에 지난해 말 까치집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까치들은 이후 작업을 계속했다. 영하 10도를 밑돌던 혹한의 1~2월에도 정교하게 움직였다. 부리로 작업했다. 3월 초 형체가 완성됐다. 윗부분엔 지붕을, 출입구는 두개만 낸 철옹성이었다. 형체를 갖춘 뒤에도 보강작업은 때때로 이어진다. 좁디좁은 출입구로 드나들고 있다. 높이 70㎝. 폭 50㎝쯤 되는, 나뭇가지들로 구축한 요새다. 눈·비와 천적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안전한 이곳에서 새끼를 낳아 기를 터. 까치 가족은 작업을 하면서 우리 가족에 대한 경계는 거의 풀어버렸다. 3m 정도 곁에 서서 지켜봐도 도망가지 않고 제 할 일을 한다. 최근 수많은 까치집을 관찰해 봤다. 까치집 형태가 무척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됐다. 철옹성형이 많고, 지붕 없는 것도 있다. 천적·경쟁자가 있는 곳에는 철옹성 형태, 아닌 곳은 개방형태일 것이다. 유해조수로 전락한 까치의 급증 비결이 거기 있었다. 까치가 다시 길조가 되는 일은 없을까.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길섶에서] 흙비/김성호 논설위원

    쉬는 날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린 봄비. 봄비야 언제나 을씨년스럽게 마련. 가뜩이나 봄 같지 않은 봄에 쌓인 불만도 큰데 휴일의 봄비라니 거추장스럽기가 오죽할까. 엎친 데 덮쳤다고 황사주의보에 흙비 예보까지 떨어졌고, 출근길 우산을 챙기라는 아내의 당부도 유난스럽다. 꽤 올 것 같던 봄비가 한나절을 못 넘기고 그쳤는데. 짧게 내린 흙비치곤 사방에 깔린 잔해가 너무 또렷또렷하다. 여기저기 오가는 차들마다 흠뻑 뒤집어쓴 추한 황사 자국들. 모처럼 광을 낸 구두 코에 생긴 추상화도 못마땅하고. 방금 지나친 아가씨의 연분홍 코트 속 하얀 셔츠에 앉은 노란 얼룩도 밉기만 하다. 봄마다 찾아오는 불청의 재난, 흙비. 조선시대엔 잘못된 정치나 못된 사람의 득세도 흙비가 쏟아지는 원인으로 쳤다는데. 그 흙비가 이봄엔 그저 만만하단다. 거대한 지진, 쓰나미에 얹힌 신음소리에 가려진 탓일까. 개나리·유채꽃 대신 세상을 어지럽게 물들인 봄의 어긋난 전령들. 해맑은 웃음꽃들은 언제나 활짝 피려나.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도그마/김성호 논설위원

    ‘이번 정차할 역은 성내역입니다.’ 사라진 성내역이란다. 지하철 2호선 객차 속 안내방송이 생뚱맞다. 역명이 잠실나루역으로 바뀐 지 반년이 지났는데. 귀에 콕 박히는 성내역의 느닷없는 부활이 혼란스럽다. 내처 육성으로 흐르는 정정방송. ‘잠실나루역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기관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왠지 반갑다. 망각의 작용은 참 편리하다. 성내역에서 바뀐 이름 잠실나루가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었다. 안내방송 때마다 생경하고 듣기 거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성내는 자연스럽게 잊혔고, 이젠 귀에 거슬리는 이름이 되었으니. 말 그대로 살게 마련인가 보다. 아니, 빠른 전환의 흐름에 익숙한 탓일까. 그 순치의 속도가 놀랍다. 저기 그 노인이 또 보인다. 매일 아침 맞닥뜨리는 ‘좌측통행’ 할아버지. 이젠 오른쪽 걷기가 널리 퍼져 자리잡았는데. 마주치는 이들에게 화까지 내가며 좌측통행을 소리쳐 고집한다. 나름의 도그마일 터인데. 망각의 순치와 꺾이지 않는 도그마의 사수. 어느 쪽이 더 나은 걸까. 김성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청개구리/최광숙 논설위원

    엄마의 말에 반대로만 하던 청개구리. 우리 집안에도 청개구리가 있다. 7살짜리 개구쟁이 조카 녀석이다. 항상 청개구리 짓을 하며 말썽을 도맡아 피운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따따따’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비가 오네.”라고 비오는 창밖을 가리키면 “비가 안 오면”이라고 엉뚱하게 되묻는다. 출근길 나에게도 “이모, 안녕히 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한다. 이모 회사를 물어보면 ‘마포신문’이라고 골지른다. 마포의 우리집과 신문을 교묘히 합쳐 놓는다. 좋아하는 ‘치즈케이크’ 사줄까 하면 듣도보도 못한 ‘포도케이크’를 사달라고 조른다. 최근 초등학교에 다니는 그의 누나에게 띠를 물었더니 ‘원숭이띠’란다. 그 녀석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걸작이다. ‘초록띠’라고 우기는 것 아닌가. 태권도장에 다니는데 자신의 태권도 승급 띠 색깔을 갖다 붙이는 거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타고난 것 같다고 가족들이 결론을 내릴 정도로 매사에 삐딱한 조카. 반골 기질로 똘똘뭉친 그의 행보가 어디까지 갈는지….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이웃/주병철 논설위원

    6년 전 미국으로 연수 갔을 때다. 산도 물도 낯선 땅에 살림살이를 하려니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럴 때 옆에서 도와 준 이들이 교민, 위·아래층의 아파트 주민, 현지 연수생들, 대학교 관계자 들이었다. 낯선 이웃이었다. 이사 왔느냐며 묻는 인사에서 뭔지 모를 친밀감이 와 닿았고, 필요한 것이 뭐냐는 도움의 손길에서 넉넉한 인심을 느꼈다. 머나먼 타국땅에서도 이럴진대 우리땅에서야 오죽하랴. 유난히 이사를 자주 다니는 편이어서 그런지 이웃의 정에는 익숙해진 것 같다. 그래서 이사를 다녀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이웃이란 든든한 울타리가 있어서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사촌이 낫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대지진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나라 일본을 돕자는 온정의 손길이 지구촌 곳곳에서 밀려들고 있다. 가깝게 지내든, 그렇지 않든 이웃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은 눈물겹도록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이웃사촌, 이웃나라의 소중함이 새삼 느껴지는 요즘이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가족/최광숙 논설위원

    미국 뉴욕에 잠시 머물 때 자주 가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다. 그곳에 가면 벽에 쭉 걸려 있는 사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몇대 위의 선조부터 부모님까지 가족 사진들이다. 마피아 일가를 그린 영화 ‘대부’에서 보듯 이탈리아인들의 가족 사랑은 유별나다. 식당에 이런저런 가족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으면 십중팔구 이탈리안 식당이라고 보면 된다. 살던 아파트 근처에는 인도인들이 많아 공원이나 지하철 등에서 그들과 마주칠 기회가 많았다. 그들의 특징 중 하나가 3대(代)가 거의 같이 움직인다는 점이다. 아기가 탄 유모차를 끄는 젊은 부부 옆에는 항상 노부부가 있다. 인도인들도 이탈리아인처럼 전통적으로 가족을 중시하는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과거 우리도 저랬는데 싶어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핵가족 사회로 접어들면서 가족의 개념이 점차 축소되는 것 같다. 하늘이 내린 천륜이라는 부모와 형제들과의 인연도 저멀리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교통사고/박홍기 논설위원

    며칠 전 일이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이 엉엉 울면서 “엄마, 나 교통사고 당했어.”라며 전화를 했단다. 깜짝 놀란 아내가 “괜찮냐.”며 묻자 “몰라. 아파.”라고만 했다. 곧 이어 가해 운전자가 “병원으로 데려갈 테니, 그리로 오세요.”라고 전화했다.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넜을 때 우회전하던 승용차에 받쳤단다. 그것도 초록 신호등에서. 운전자는 “급히 코너를 돌다가 그만…정말 죄송합니다.”라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다행히도 상처는 크지 않았다. 겉보기엔 팔과 허벅지, 얼굴에 긁힌 자국뿐이었다. 정밀 검사에서도 타박상 이외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지켰는 데도 사고를 당한 딸의 충격은 컸던 것 같다. “사고란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찾아오기도 한단다.”라는 위로도 겸연쩍기만 했다. 운전자는 보험처리 뒤 연락이 없다. 야속했다. 하지만 “그 아저씨, 많이 잘못했다고 했어.”라며 팔걸이를 한 채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딸이 대견하다. 그래, “다행 중에서도 천만다행”이라며 위안을 삼을 수밖에.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D라인 생각/김종면 논설위원

    여성의 아름다운 육체라면 우리는 으레 호리병 몸매를 떠올린다. 이른바 S라인이다. 아니 요즘은 X라인쯤 돼야 직성이 풀리는 몸매 마니아도 적지 않다. 조붓한 어깨 대신 단단한 사각어깨, 개미허리지만 복근은 근육질인 만만찮은 몸매가 새로운 지존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의 라인은 대부분 닦고 조이고 해 만들어낸 분재처럼 허망한 인조품. 왜 또 부질없이 ‘자연산 타령’이 떠오를까. 얼마 전 경기도가 주최한 저출산 극복 ‘경기맘 D라인 패션쇼’를 보니 자연이란 숭고한 말은 정말 포태한 여인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리우드 스타 데미 무어의 B라인 만삭쇼와는 또 다른 D라인의 도저한 육감(肉感)이라니…. 어쩌다 대한민국이 아이를 낳자고 외치며 임신부 패션쇼까지 여는 나라가 됐을까. 라인도 하도 많아 헷갈리는 세상. 날렵한 S라인이면 어떻고 둔중한 D라인이면 또 어떠랴. 무릇 곡선은 아름답다. 하물며 자연의 곡선이야 일러 무엇하리오. 이땅의 여성들이여, 부디 성형몸매 말고 D라인 좀 가꾸시라.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길섶에서] 침묵은 銀/박대출 논설위원

    TV를 틀면 온통 수다다. 집단으로 떠든다. 수명 또는 수십명이 등장한다. 요즘 오락프로의 대세다. 처음엔 생소했다. 시끄럽게만 들렸다. 마냥 채널을 돌린다. 리모컨을 열심히 돌리는 ‘컨돌이’였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재미있다. 소개하는 경험담들이. 지어낸 얘기들이 아닐까. 하지만 그뿐이다. 의심보다는 내용에 빠져든다. 언제부턴가 수다에 익숙해졌다. 경상도 출신 탓일까. 세 마디만 한다는 그 경상도. 다변(多辯)을 경박함으로 알고 자랐다. 침묵을 금()으로만 여겼다. 사내의 무거움으로 표현되는 줄 알았다. 나이가 늘어 말수가 늘었다. 다변까지는 아니지만. 딸아이는 여성 호르몬 때문이라고 놀린다. 어쨌든 가족과의 대화는 늘었다. 소통이라면 다행이다. 침묵도 표현이다. 그 자체가 의사 전달이 된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제3자가 읽기는 쉽지 않다. 멀리 있어도 알기 어렵다. 소통이 필요한 시대다. 대화가 소통을 늘린다. 이때의 침묵은 은(銀)이 아닐까. 박대출 논설위원 dc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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