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종부(宗婦)/허남주 특임논설위원
결혼한 여성이 처음 만나는 어려움 중 하나는 엄청나게 큰 가족군이 생겼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제까지 몰랐던 새로 만난 가족에게 예의는 깍듯하되, 내 부모형제에게보다 더 사랑을 표현해야 하는 것은 때론 위선을 강요받는 기분이다.
결혼 초, 종가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날 여든의 종부 할머니는 처음 만난 나를 마치 오매불망 보고 싶던 막내딸을 대하듯 그렇게 반겨주셨다. 거칠어서 버석거리는 손으로 내 손을 마주 잡으며, “추운데 오시느라 고생했네, 고생했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에선 추워서 고생한 것이 아니라 낯선 집안의 새 식구가 되느라 고생했다는 격려와 이해의 마음이 읽혀졌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려 주는 손길이 너무나 따뜻했고 든든했다. 그렇게 가족이 됐다.
할머니와 나는 같은 성씨의 자손을 낳았다는 것뿐, 그후 다시 뵐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인연으로 가족의 윤리를 배웠다. 별말 없이, 투박하지만 진한 마음을 전하는 종부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hhj@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