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소주 한 잔/주병철 논설위원

    사회생활을 하면서 무의식 중에 ‘소주 한잔’이란 말을 곧잘 쓴다. 오랜만에 만났거나 처음 인사를 나누는 사이라도 끝 무렵에는 “언제 소주 한잔 하자.”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다소 어색한 관계라도 이런 말을 한 다음에는 분위기가 한결 나아진다. 일종의 ‘대화 촉매제’쯤 되는 셈이다. 처음엔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언제부턴가 남녀 가릴 것 없이 편하게 쓰는 말이 됐다. 사람에 따라 소주 대신에 “맥주 한잔 하자.”, “커피 한잔 하자.”고 얘기하지만 의미는 같은 거다. 물론 소주는 한잔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잔이 두잔이 되고, 한병이 두병이 된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잔 속에는 정감이 흘러 넘친다. 그걸 낭만이라고 할 때도 있었다. 요즘은 “점심이나 한번 하시죠.” “또 봅시다.”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소주 한잔의 넉넉함보다는 삭막한 일상의 빠듯함에서 비롯된 듯싶다. 소주가 독하다며 맥주와 섞어 마시는 폭탄주를 즐기지만 그래도 ‘깡소주 한잔’의 정취가 그립다. 한잔이 부담스러우면 반잔은 어떨까.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꽃의 생명력/최광숙 논설위원

    아파트 베란다 창가에 작은 화분 4개가 나란히 있다. 꽃을 좋아하지만 번번이 꽃을 살 수는 없기에 산 작은 화분들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오랫동안 예쁜 꽃을 즐길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1주일에 한 번만 물을 갈아줘도 되니 그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3~4주 되니까 시들기 시작했다. 점차 여위어 가는 환자처럼 비실비실한다. 물을 듬뿍 줘도 회생의 기미가 안 보인다. 결국 마음을 접고 버리려고 밖에 화분들을 내놓았다. 그런데 몇 주 지났는데도 죽지 않고 있다. 장마철에 베란다로 내리친 빗물을 받아 먹어서인지 언제부터인가 꽃도 다시 피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한놈이 오렌지빛 꽃을 꼬물꼬물 피우더니, 옆의 놈도 분홍빛 꽃망울을 잉태했다. 생명의 힘이 저토록 강하다니. 주인은 나 몰라라 포기한 그들의 삶이건만, 그들은 젖먹던 힘까지 내서 스스로를 살려낸다. 어떤 일이든 결코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저 작은 꽃들이 온몸으로 나에게 가르친다. 희망도 함께 밝혀준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시간/허남주 특임논설위원

    ‘만약 시간을 병 속에 담아둘 수 있다면….’ 지하철 내에 울려퍼지는 올드 팝송에 귀가 쏠렸다. 망설임 없이 팝송 CD를 팔고 있는 상인을 불러세웠다. 복제판이란 게 살짝 걸렸지만 꼭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던 짐 크로치의 노래를 흥얼거리니 시간의 태엽이 되돌아가는 것만 같다. 싱어송라이터였던 그는 사랑하는 노래로 인정 받고, 갓 태어난 아들로도 행복하던 때 이 노래를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왜 그토록 아쉬웠을까. 병 속에 시간을 담아뒀다가 나중에 함께할 것을 노래했지만 아쉽게도 이듬해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이 노래는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추억하며 카페를 운영한다던가. 이런 게 삶일까. 시간을 병 속에 담아두는 것보다 지금 잘사는 것이 좋다고 노래가 말하는 것 같다. 처서를 기점으로 하늘이 가을로 가득하다. 아껴두지 말고 이 가을을 지금, 마음껏 즐겨야겠다. 그런데 이 노래, 옛날엔 이렇게 슬프게 들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hhj@seoul.co.kr
  • [길섶에서] 그때 그 취재원/임태순 논설위원

    1980년대 후반 정부는 인문계 고교생들에게도 직업교육을 적극 권장했다. 부족한 기능인력을 충원하기 위해서였다.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직업훈련소에서 국비로 교육시키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충남 천안 근처의 노동부 산하 직업훈련소에서 만난 한 고교생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반에서 성적도 상위권이며 집안도 여유 있는 편이라는 그는 “직업훈련소로 오는 데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며 “빨리 취업해 돈을 모아서 공장을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직장을 다니다 부족한 것이 있거나, 필요성을 느끼면 대학에 가겠다는 말도 했다. 은행에서 시작된 고졸 채용 열풍이 확산되는 요즘 그가 더욱 생각난다. 과연 그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아니면 중도에 포기하고 대학에 갔을까. 우리 사회는 또 이러한 학생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학력 간 임금격차가 여전하고, 대학진학률이 80%대까지 치솟은 걸 보면 아마 그가 진로를 바꾸지 않았을까 싶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조카사위/최광숙 논설위원

    집안에 경사가 생겼다. 형제들의 결혼 이후 오랫동안 혼사가 없었는데, 오는 11월 둘째 오빠네 조카가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됐다. 어떻게 그런 좋은 신랑감과 인연을 맺게 됐는지 기특하고 대견하기만 하다. 박사학위까지 받고 좋은 직장에 자리잡은 예비 조카사위도 든든해 보인다. 게다가 반듯하고 예의바른 성품에 조카를 끔찍이 아끼는 모습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오빠와 올케 언니도 자기 자식보다 예비 사위가 훨씬 낫다며 대만족이다. 꼬맹이 조카가 다 커서 혼사를 앞둔 것을 보면서 여러 마음이 교차한다. 그 누구보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인물 덩어리’라며 예뻐하던 손녀딸의 결혼을 기뻐하실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온다. 이젠 부모님에 이어 우리 형제들의 세대가 점차 저물어가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게 됐다. 조카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느낀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그들이 앞으로 우리 집안을 이끌 기둥들이 될 것이다. 다른 집안에서 영입(?)한 새로운 인재들과 함께 말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연비(燃比) /최용규 논설위원

    “이번에는 평균 10㎞가 나오게 해야지.” 동네 셀프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고 동부간선도로에 진입한다. 직전에 계산했을 때는 ℓ당 9.1㎞의 연비가 나왔다. ‘중계동 집~동부간선도로~역삼동~남산도로~회사’. 이제 일상화된 출근 코스다. 역삼동 학원에 다니는 재수생 딸 덕(?)이다. rpm(분당 엔진회전수)이 2000을 넘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운다. 계기판에 자주 눈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조금 넘었다 싶으면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살짝 뗀다. 브레이크에 발이 자주 가는 상습 정체구간이 몇 군데 있다. 급정거, 급출발을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시내로 접어들면 신호등을 비롯, 기름 잡아먹을 요소가 한둘이 아니다. 며칠 후 계기판의 주행거리 숫자를 바라보지만 별로 흡족하지 않다. 휴대전화에 내장된 계산기로 두드려 본다. 10㎞!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내 차의 공인연비는 ℓ당 12.6㎞다. 차가 낡아서 그러려니 했다. 기름값이 올라 연비 좋은 차가 인기다. 그런데 공인연비가 뻥튀기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씁쓸할 따름이다.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길섶에서] 거침없이/허남주 특임논설위원

    해거름의 슈퍼마켓 앞에선 떨이 판매가 한창이었다. 약간 모양새가 망가진 채소를 묶어 헐값에 팔고 있었다. 하지만 싸다고 샀다가는 물러 버릴 게 뻔한데, 한 단만 달래려니 젊은 상인의 눈치가 보여 망설였다. 그 순간, 한 할머니가 다가왔다. 누구 생일인지 케이크를 한 쪽씩 나누던 참, 할머니는 젓가락으로 케이크 조각을 뚝 떼어 먼저 내 입에 넣어주려 했다. 손사래를 쳤지만 할머니는 말없이 재촉했고, 결국 나는 케이크를 받아 먹어야만 했다. 결혼식에 가느라 오랜만에 옷을 제대로 차려입고 있었고, 그 가게는 처음 간 곳이었다. 거리에서 음식을 나눠 먹기엔 내 인상이 그리 수더분하지도 않고, 더욱이 배고파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의 거침없는 행동에 놀랐지만 마음이 푸근해졌다. 주눅들지 않고 그냥 마음을 주는 것, 그것이다. 어떻게 생각할까 주춤거리며 손 내밀지 못했던 것은 배려가 아니라 거절당한 후 상처받을 내 자존심을 염려한 이기심이었음을. 마음은, 인심은, 친절은 거침없이 주는 것이다.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hhj@seoul.co.kr
  • [길섶에서] 아내의 핀잔/주병철 논설위원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고 나면 뭔가를 꺼내 물과 함께 마시는 사람을 종종 본다. 처음에는 몸이 불편해서 그렇겠지 했는데, 그런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 같다. 주로 50대 중반을 넘긴 사람들이다. 궁금해서 그 사람들한테 슬며시 물어보면 별거 아니라며 웃는다. 건강관리를 위해 먹는 보조식품이라고 말한다. 위장약, 간보호제, 시력강화제, 혈관치료제, 비타민 등 종류도 제각각이다. 얼마 전부터 내 책상 주변에도 건강보조식품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주로 친구들이나 취재원들로부터 ‘참 좋으니 건강을 위해 먹어두라.’는 권유를 받고 사뒀던 것들이다. 50대 초반인데 벌써 이런 약에 관심을 두다니, 쓴웃음이 나온다. 최근 한 모임에서는 몸에 좋은 과일 얘기가 나왔다. 아내한테 그대로 전해줬다. 귀가 그렇게 얇아서 되겠느냐고 핀잔이다. 음식을 줄이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게 최고의 보약이란 얘기를 또 하지 않는가. 백번 맞는 말인데, 지켜지지 않으니. 건강보조식품부터 끊어볼까.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디지털치매/임태순 논설위원

    올 여름 유난스러운 비는 휴가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이틀째 강원도 깊은 산속까지 동행했던 짓궂은 비는 사흘째 되는 날 물러갔다. 반짝 해가 떠 이때다 싶어 등산화를 조여맸다. 아내가 혼자 가면 위험하지 않겠느냐며 만류했지만 물 한 병에 간단한 요깃거리만 챙겨들고 산행에 나섰다.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휴대전화로 연락하면 되지 않겠냐는 믿음에서였다. 등산로는 아직 물기가 흥건했지만 시원하고 상쾌했다. 숲길을 지나던 뱀이 인기척에 놀라 자취를 감출 만큼 산길은 호젓하고 한적했다. 이따금 휴대전화로 시간을 보며 발길을 재촉했다. 한창 걷다 보니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험해졌다. ‘생명의 끈’이 될 휴대전화를 살펴보니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산속이라 금방 소모된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휴대전화를 껐다. 아내 전화번호를 떠올리자니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단축키로만 통화한 탓이다. ‘디지털 치매’다. 유사시에 대비해서라도 가족이나 친구 휴대전화 번호 몇 개는 외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사랑이 미워질 때/김종면 논설위원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도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주요 장면은커녕 줄거리조차 잘 생각나지 않는다. 머리와 가슴에 온전히 남아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포레스트 검프’ ‘늑대와 함께 춤을’ ‘나라야마 부시코’…. 사회적 약자와 인디언 문화에 대한 관심,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집요한 천착 그런 것들이 아직도 이 영화들을 내 기억의 창고에 남게 만든다. 그런데 그렇고 그런 한국영화 하나가 불현듯 망각의 틈새를 비집고 떠오른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사랑이 미워질 때’란 통속멜로다. 클래식 애호가라도 한 번쯤은 옛날식 전파상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에 발걸음이 멈춰지는 법. 차갑게 외면받은 영화지만 한 조각 대사만큼은 울림을 남긴다. “일류는 쉬이 삼류가 되어도 삼류가 일류가 되면 다시 삼류는 되지 않을 거”라며 신랑감을 삼류에서 고르라는 충고다. 좀 모자라도 검프같이 우직한 자가 진짜 일류 신랑감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 ‘일류의 역설’을 나는 요즘 일본의 행태에서 똑똑히 본다. 독도 도발은 ‘삼류’로 가는 길이다.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길섶에서] 생일 단상/이용원 특임논설위원

    출강하는 대학의 제자들에게서 내 생일 전날 저녁에 찾아뵙겠다는 연락이 왔다. 3년째 이어지는 ‘행사’여서 예상하고 있던 터. 물론 그러라고 했다. 선생의 생일이 뭐 그리 큰일이라고 잊지 않는 제자들이 고마운 건 어쩔 수 없다. 어려서는 부모형제, 친구들에게 생일 축하인사와 선물을 받는 일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나이 들고 결혼해 자식을 키우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태어남을 축복 받기보다는 나에게 삶을 주신 부모께 감사 드리는 일이 앞서야 한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우리 3남매는, 생일을 맞으면 어머니를 집으로 모시고 3남매 가족 모두가 함께 식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그런데 올해 내 생일에는 그런 자리가 없다. 어머니가 수술 후 4주째 입원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회복이 빨라 퇴원을 눈앞에 두었으니 오는 11월 형 생일에는 다같이 즐길 수 있겠지. 나이 드신 어머니 앞에서 맞는 생일은 더욱 행복해야 할 텐데… 어쨌건 요 며칠 마음이 착잡하다. 이용원 특임논설위원 ywyi@seoul.co.kr
  • [길섶에서] 손톱/허남주 특임논설위원

    손톱이 잘 찢어진다. 손톱이란 딱딱해서 깨어지게 마련인데, 내 손톱은 늘 상처가 나고 쭉 찢어질 정도로 약하다. 그래서 손톱 밑 피부가 드러나고 때론 피가 날 정도로 아프다. 손톱처럼 마음도 잘 찢긴다. 작은 말에도 상처가 나고, 그 아프고 쓰라린 생채기는 오래도 간다. 손톱처럼 마음도 좀체 강해지지 않는다. 허세를 앞세워도 속으론 별 효과가 없다. 그런데 문득 손톱이, 내 약한 손톱이 오히려 옷의 올을 뜯기도 하고 결 고운 가죽가방에 흠집을 남기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약한 손톱이 가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상처받는 마음에 몰두하느라, 내 예민함이 남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 건강하지 못한 탓에 어릴 때부터 특별대우를 받았을지 모르고, 늘 아픈 나를 위해 동생은 하고 싶은 말을 참아줬을지도 모른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약함이 피해를 줬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해진다. 약해서 찢어지는 손톱에서도 배운다.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hhj@seoul.co.kr
  • [길섶에서] 할머니 운전기사/최광숙 논설위원

    고령화 시대가 실감나는 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이 드신 어른들을 종종 만날 때다. 최근 삼청동 가는 길에 택시를 탔다가 깜짝 놀랐다. 65세 할머니 운전기사다. 핸들을 잡은 지 3년 됐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남들은 퇴직할 나이가 지나서 시작한 운전이다. 목표는 70세까지 운전대를 잡는 거란다. 아프지 않고 일하니까 자식들이 좋아한다며 집에서 놀면 뭐하냐고 반문한다. 경제력이 있으니 가끔 자식들에게 용돈을 주는 기쁨도 있다고 한다. 그 전에 만난 70세 할아버지 운전기사도 기억에 남는다. 2~3년 전에 암 수술을 하시고도 거뜬히 택시기사로 일하는 ‘젊은 기사’였다. 일하지 않으면 오히려 아프다는 그들. 노인에게 일은 단순한 노동의 의미를 뛰어 넘는다. 삶에 활력을 주고, 몸과 마음의 건강까지 챙겨준다. 그들이 행복한 노년을 지내도록 일자리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다가온다. 활기차게 사는 ‘젊은’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맨발걷기/최용규 논설위원

    ‘문경이라. 그래! 아이와 함께 새재(조령)를 걷자.’ 여름 휴가지가 대야산 휴양림으로 정해졌을 때 참 잘됐다 싶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旨亨)과 문경새재 흙길을 걷는 모습을 상상하면 할수록 즐거웠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지난 2일 오후 조령관(3관문). 몇 발짝을 떼자 신작로 흙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이 밝지 않다. 궂은 날씨 탓인지 숙소로 어서 돌아갔으면 하는 눈치다. 아침밥을 시원찮게 먹은 아이다. “저 밑에 내려가면 음식점이 있는데 거기서 점심 먹자.”고 꼬드겼다. 맨발이 한 둘이 아니다. “밥 먹고 우리도 맨발로 걸을까?” 응답이 없다. 식사 후 아내가 맨발걷기를 제안했다. 뜻밖이다. “지형아 신 벗고 걸어봐 얼른…” 아이는 좀처럼 신을 벗지 않는다. 득달같이 볶아대자 울기 일보직전이다. 그러던 아이가 신을 벗겠단다. 표정은 영 아니다. 집으로 돌아와 물었다. 왜 그랬어? “맨발로 흙길 걷는 것은 처음이야.” 나는 흙구덩이에서 컸지만 아이는 생소했던 거다.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길섶에서] 닭백숙/임태순 논설위원

    강원도 정선 계곡에서 휴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인근 음식점을 찾았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메뉴판에 황기백숙이 눈에 띄었다. 무더위 보양식으론 제격이라는 생각에 주저없이 주문했다. 1시간 뒤 닭백숙이 푸짐하게 한상 올라왔다. 아내와 난 땀을 흘리며 부산하게 손을 놀렸지만 딸은 그러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여름철 최고의 음식은 백숙이었다며 권했지만 반응이 별로였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닭백숙을 먹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막국수, 곤드레 나물밥 등 보양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음식점 주인에게 물어보니 닭백숙 주문이 예전같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하기야 프라이드 치킨 등 하루가 다르게 신세대의 입맛에 맞는 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마당에 닭백숙이 끼어들 틈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푸드 스타일리스트까지 나올 정도로 음식문화가 발전하고, 살찌는 것을 걱정할 정도로 영양과잉의 시대에 보신탕·닭백숙 등 여름 보양식도 뒷전으로 물러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미스 코리아/이도운 논설위원

    언제부터인가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 왔던 행사다. 바빠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의 눈치도 보여서. 안티 미스 코리아 페스티벌의 박옥희 추진위원장은 주례선생님인 이경형 선배의 부인이다. 올해는 달랐다. 꼭 관심을 가져야 할 두명의 후보가 참가했다. 지난해 정치부장 시절 인턴을 했던 L.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그녀는 국회도 나가고, 검찰도 나가며 열심히 배웠다. 얼마 전 두 가지 기쁜 소식을 전했다. 하버드대학원에 합격했고, 미스 워싱턴 진으로 미스 코리아 대회에도 나간다는 것. 또 다른 후보는 정치부에 함께 근무했던 선배의 딸 Y이다. 어릴 때 몇 번 본 기억이 있다. 미인인 엄마와 롱다리인 아빠를 닮았다. 이후 공직자가 된 아버지를 따라 해외를 많이 다녔는데 미스 남가주 선으로 뽑혀 대회에 참가했다. 오랫동안 미스 코리아들은 박제품 같았다. 부스스한 사자머리, 떡칠한 화장, 어색한 웃음, ‘초딩’ 말투… 이젠 달라졌다. 가장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딸들의 모습을 미스 코리아 대회에서도 보게 된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만신(萬神)/곽태헌 논설위원

    어제 아침 신문에 대학 합격을 기원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실렸다. 201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100일 앞두고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합격기원 타종행사’가 끝난 뒤 학부모와 수험생들이 보신각 종에 손을 대고 기원하는 모습이다. 수능에서 좋은 점수가 나올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염원을 읽을 수 있다. 수능이 다가올수록 절을 찾고, 교회를 찾고, 성당을 찾는 학부모들은 늘게 마련이다. 수험생을 둔 부모들은 자녀에게 도움만 된다면, 평소에 믿는 종교와는 상관없이 모든 신을 믿고 찾는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수험생이 있으면 가족의 모든 스케줄도 수험생 위주로 될 수밖에 없다. 대학 가는 데 사실상 모든 것을 걸다시피 하는 우리의 현주소다.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수험생과 부모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한다. 기대치나 욕심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수험생의 부담도 덜어주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 눈높이를 낮춰 보는 것은 어떨까.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길섶에서] 녹즙 아줌마/주병철 논설위원

    주중 아침이면 사무실에 빠지지 않고 들르는 사람이 있다. 녹즙 배달 아줌마다. 2년쯤 됐다. 음료를 건넬 때는 한마디씩 한다. 술 냄새가 진동하면 ‘왜 먹느냐.’고 핀잔을 준다. 받아만 놓고 먹지 않을 때는 ‘돈이 아깝다.’고 말한다. 가끔 간과 심혈관에 좋다며 다른 음료를 권하기도 한다.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다. 그런데 몇달 전 자신의 고3 아들을 위해 신문 구독을 하면서부터는 대화가 한 토막 늘었다. 신문 기사 얘기다. ‘오늘 아침 기사가 좋았다.’, ‘누구 이름이 많이 보이더라.’ ‘이런 기사는 너무 재미없더라.’는 등등. 신문기사 모니터 같다. 새벽에 출근할 텐데 언제 저런 걸 다 알고 있을까. 아마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에서 비롯된 듯하다. 배달원은 고객한테 최상의 서비스를 해야 하고, 구독자는 신문에 대해 평가도 하고 지적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성스러운 배달원이자 적극적인 구독자다. 배달이 끝나면 호두과자를 구워 판단다. 정말 프로의식이 대단한 것 같다. 배울 점이 많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물 웅덩이/허남주 특임논설위원

    폭우로 인해 아스팔트 곳곳이 움푹 파였다. 조심해도 바퀴가 새로 생긴 웅덩이에 빠져 차체가 쿨렁댄다. 출근길 앞차가 보행자의 바지에 물을 튀긴 모양이다. 중년 남성이 물 웅덩이를 손짓하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신호가 바뀌고, 뒤차들은 경적을 울리고 섰는데도 화난 남성의 항의는 계속된다. 비상등을 켜고 겨우 앞차를 빠져나왔다. 운전자가 사과하지 않은 탓인지, 사과에도 불구하고 출근길에 바지를 흠뻑 적신 남성이 화를 삭일 수 없었던 까닭인지 모르지만 딱하긴 마찬가지다. 나도 진흙물을 튀기며 지나간 차 때문에 무척 속이 상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물폭탄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소식 앞에선 화를 냈던 일마저 살아 있어서 겪는 소소한 일상의 호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조금 앞서 갔으면 내가 항의를 받는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운전석에 앉으면, 아니 삶의 현장에서는 물웅덩이를 지날 때처럼 먼저 남의 처지를 생각해야겠다. 그것밖에는 답이 없는 것 같다. 허남주 특임논설위원 hhj@seoul.co.kr
  • [길섶에서] 장화/최광숙 논설위원

    장마철이 계속되면서 장화족 대열에 합류했다. 비와 관계없이 젊은 여성들이 알록달록 예쁜 장화를 신고 다니는 것이 패션 트렌드가 되자 나도 이참에 장화를 마련한 것이다. 남대문 시장에 갔다가 발목까지 오는 검은 장화를 샀다. 다리가 짧으니 굳이 긴 장화는 거추장스러웠고, 색깔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해서다. 요즘 날개 돋친 듯 잘 팔린다는 브랜드 장화에 비하면 가격도 착하기만 했다. 드디어 비가 오자 장화를 꺼내 신었다. 신발 젖을 일이 없으니 출퇴근 길이 걱정이 없다. 1만원의 행복이랄까, 신발 하나로 자연을 극복하게 되니 마음이 뿌듯하다. 하지만 최근 폭우에 장화는 제 역할을 못했다. 길이가 짧아 비가 세차게 내리치자 장화 안으로 빗물이 들어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장화를 버리고 또다시 선택한 것은 구멍이 숭숭 뚫린 아쿠아 슈즈다. 가격도 몇천원으로 싼 데다 고무신같이 못생겨도 신기 그만이다. 올 여름 폭우에 새로운 시도가 계속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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