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남의 날/손성진 논설실장

    의과대학 교수로 있는 친구 M이 책을 냈다. 대학 다닐 때부터 틈틈이 쓴 글을 모았다는 산문집이다. ‘인생의 순례길에서 나를 만나다’란 의미심장한 제목이었으나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동안 책상에 놓아두다 읽어 보니 글 쓰는 일이 직업인 내가 부끄러울 만큼 글솜씨가 훌륭했다. 수필가를 뺨칠 정도라고 하면 친구는 물론 과찬이라고 하겠지만. 필력만큼 글의 내용도 좋았는데 50여 꼭지의 글 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끈 글이 ‘남의 날’이다. 이웃에게 무관심한 요즘 사회에서 1년에 하루만이라도 자기나 가족이 아닌 남을 생각해 주는 날을 만들어 보자는 배려심 넘치는 생각이다. ‘하루 외식 안 하고 그 돈을 모아 고아원을 방문하는 날’, ‘자동차 경적을 울리지 않고 양보하는 날’, ‘남의 논에 물을 먼저 대 주는 날’, ‘남을 위해 기도하는 날’…. 우리는 남을 위하기는커녕 남을 욕하고 남이 잘되면 배 아파 하기도 하는 속물 아니던가. ‘어버이날’, ‘부부의 날’처럼 ‘남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정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안 되어도 누구나 하루를 정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면 세상이 달라지리라.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
  • [길섶에서] 출근길 풍경/이동구 논설위원

    출근길은 누구에게나 일정하기 마련이다. 걷거나 지하철, 버스, 택시, 승용차 등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도 어제, 그저께의 그 길을 반복한다. 시간 또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독일 철학자 칸트의 시간처럼 정확하지는 못해도 아침마다 비슷한 방법으로 그 시간대를 이용한다.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 또한 거듭된 스침으로 낯설지가 않다. 전동차 안의 수많은 표정을 보내고 개찰구를 빠져나오면 김밥 파는 아줌마가 출근길 한쪽을 지킨다. ‘집에서 만들어 온 김밥’이라며 아침마다 몇 안 되는 손님을 기다리지만 먹어 본 적은 없다. 20여m쯤 떨어진 김밥 가게는 직장인들로 북적이는데도 사시사철 그 자리만을 고집하는 아줌마의 속내는 무엇일까. 전철역 계단을 오르면 검문하듯 막아서는 이들 또한 출근길에 익숙해진 이웃이다. 무심히 건네는 광고 전단지를 볼 때마다 고민에 빠지게 한다. 받자니 처리하기 귀찮고, 거절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전단지는 보지도 않은 채 청계천변 미화원에게 슬며시 밀어주고 총총히 걸어가는 출근길은 언제나 궁금증과 망설임이 함께한다. 내일 또 그 길을 기꺼이 되풀이한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마음의 간극/주병철 논설위원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다. 멤버 가운데 호형호제로 지내던 두 사람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인다. 분위기가 썰렁해진다. 두 사람의 언쟁에 모두 귀를 쫑긋 세운다. 내용인즉슨 형님뻘 되는 사람은 평소 동생한테 뭐든 내 일처럼 챙기고 도와줬는데 진작 어려운 일이 하나 생겨 부탁하니까 성의 없이 대하더라는 것이다. 동생뻘 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 밖인 걸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이다. 두 사람은 식사 도중에 말없이 가 버렸다. 남은 사람끼리 한잔 더 마셨다. 두 사람의 다툼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대화는 진지했다. 상대방에 대한 의지와 기대가 높은 데 따른 ‘마음의 간극’이라는 얘기가 주류였다. 귀갓길에 ‘마음의 간극’을 다시 떠올렸다. 누구든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전후 관계를 잘못 파악하거나 상대방을 너무 높게 또는 낮게 평가하면서 오해라는 게 생긴다. 그건 금방 풀릴 수 있다. 문제는 서로 상대방한테서 진정성을 발견하지 못할 때다. 이건 신뢰의 문제여서 고난도다. 나를 위해 상대방과 관계를 유지했는지 그 반대인지는 자신만은 잘 알고 있을 터다. 다음 모임 때 두 사람은 무슨 말을 꺼낼까.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
  • [길섶에서] 전철지교/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아이고, 이렇게 귀한 것을.” “작은 성의입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이른 아침 지하철 객실 안 훈훈한 인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그마한 난() 한 분을 정성스럽게 건네고 받는 두 노인. 경로석에 앉은 60대 후반과 70대 후반 노인의 공손한 대화가 예사롭지 않다. 늘 같은 객실, 같은 좌석에 두 노인이 나란히 앉아 가는 모습을 처음 목격한 건 6개월쯤 전이다. 아랫벌 노인이 연상 노인에게 일본어 책을 보여 주며 뭔가를 묻고, 연상 노인은 자상하게 일러주고. 몇 차례 같은 모습을 지켜보자니 일종의 즉석 일본어 교습이다. 우연히 만난 두 노인의 관계는 그렇게 지속된 듯싶다. 오늘 사연인즉 그간의 답례로 작은 난을 선사한 듯. 짧은 만남의 시간을 이용한 교습에서 싹튼 노인들의 정의가 고와 보인다. 생면부지의 남남끼리 우연히 같은 좌석에 앉아 나눠 온 인연이 난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했으니. 허리를 굽혀 인사를 건네고 급하게 객실에서 내린 노인. 건네받은 난을 들고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난을 한참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뭔가를 적는 노인. 그 수첩에는 어떤 내용이 들었을까.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
  • [길섶에서] 약방의 감초/구본영 논설고문

    며칠 사이 스마트폰 알림음 소리가 조용해졌다. 알고 보니 친목 모임의 총무 격인 친구가 몸이 많이 아프단다. 모임 공지 사항은 물론이고 시정의 시시콜콜한 얘깃거리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전해 주던 그였다. 한창 일하느라 바쁠 때, 심지어 잠잘 때에도 울리는 알림음이 성가시게 느껴질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본래 간사한 게 사람의 기분이라고 하던가. 막상 새로운 콘텐츠 하나 없이 썰렁한 밴드를 열고 보니 그 친구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다. 프랑스 학자 막시밀리앙 링겔만은 수레를 끄는 말 두 마리의 힘이 한 마리 말이 끌 때 보여 주는 힘의 2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런 이른바 ‘링겔만 효과’는 인간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모양이다. 모임이든 직장이든 보이지 않은 곳에서 힘을 쓰는, ‘약방의 감초’ 같은 누군가가 있어야 그 사회가 제대로 돌아간다니 말이다. ‘밴드지기’ 격인 친구의 ‘헌신’이 그래서 새삼스럽게 고맙게 여겨진다. 그 친구인들 생업이나 가정이 없어 모바일 공간에 글을 올리고 있었겠나 싶다. 금명간 만사를 제쳐 놓더라도 문병이라도 가야겠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 [길섶에서] 평정심/최광숙 논설위원

    올해 중국 공산당 원로들이 줄줄이 타계했다는데 백세를 앞에 둔 이가 있다고 한다.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전 주석의 비서를 지낸 리루이(李銳·99세)다. 그가 건강 비결로 꼽은 것 중의 하나가 평정심(平靜心)이라고 한다. 스트레스가 많은 복잡한 세상이다 보니 그의 장수 비법이 가슴에 다가온다. 누구나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지내려고 해도 골치 아픈 일로 화가 날 때가 종종 있는 법이다. 달라이 라마와 함께 살아 있는 부처로 불리는 베트남 출신의 탁닛한 스님은 “화(火)를 안고 사는 것은 독소를 품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화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인생의 많은 문을 닫히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중생들은 솟아오른 감정대로 마구 화를 내고는 나중에 후회한다. 채근담(菜根譚)에서는 대나무 숲은 바람이 불면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지만 바람이 지나면 대숲은 결코 그 바람을 품지 않고 이내 고요해진다고 했다. 연못도 기러기가 지나가면 그림자를 비추긴 해도 그 뒤에는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단다. 마음이 복잡하고 어지러울 때 ‘대숲과 연못’ 같은 군자(君子)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
  • [길섶에서] 애주가의 변명/이동구 논설위원

    술보다 술자리의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면 믿어줄까. 학창시절 선배들이 풀어놓는 문학 언저리와 설익은 인생철학에 솔깃할 때에도 술이 있었다.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는 청마(靑馬) 유치환의 시를 읊어대던 선배를 따라다녔던 것도 술과 함께한 낭만과 멋이 있는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으로 기억한다. 중년의 술은 다르다. 분위기보다는 마셔야 하기에 술을 가까이하는 경우가 더 많다. 송강(松江) 정철은 계주문(戒酒文)에서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나 손님을 만나 거절하지 못하고 마시는 술이 많다”고 했다. 취하지 않고 오래 버티며 즐길 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새 소주 두서너 병쯤은 거뜬히 비웠던 호기는 사라지고 소주 한 병에 취기를 가다듬어야 하는 애주가로 변한 것도 당연하다. 요즘도 술을 즐긴다. 하루의 피로를 풀고 동료와 함께 정을 나눌 수 있기에 여전히 술자리가 좋다. 양은 크게 줄었지만 흥은 더 깊다. 석 잔 술에 도가 통하고 한 말 술에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이태백의 풍류는 아닐지라도.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기억과 추억 사이/주병철 논설위원

    태풍이 올 때면 으레 장마가 동반된다. 장마는 이래저래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예측과 달리 장마는 규칙적이지 않다. 지역마다 들쭉날쭉하다. 시간대도 다르다. 기상청이 곤혹스러워할 만하다. 비가 내리면 밖을 쳐다본다. 쏟아지는 비의 강도와 양을 보고 느끼는 게 있다. 상쾌함과 불편함이다. 땡볕에 비는 청량제다. 요즘 같은 때는 늦더위를 식혀 주고 기분 전환에도 좋다. 가랑비는 감성적이지만 폭우는 위협적이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비는 많은 걸 생각나게 한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다닐 때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진 다음 날에는 교실에 빈자리가 더러 생긴다. 학교에 와야 하는 친구들이 냇가에 물이 엄청나게 불어 건너기가 어려워 결석한다. 친구들은 안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부러워한다. 선생님도 빈자리에 묵묵부답이다. 다음날 서로 생글생글 웃는다. 반갑다고. 세월이 한참 지났다. 시골을 떠날 때만 해도 소 죽 먹이고 부모의 농사일을 거들던 친구들이다. 많이 바뀌었을 텐데. 그리움이 밀려온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이제는 누구도 불편하지 않을 다리도 놓았을 테다. 한번 가봐야겠다.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
  • [길섶에서] ‘맛집’ 유감/최광숙 논설위원

    얼마 전 방송에서 ‘맛집’으로 소개된 막국수집을 찾았다. 이 집은 기계로 메밀국수를 뽑는 것이 아니라 옛날 전통 방식으로 국수를 나무로 만든 분틀에서 뽑아내 가마솥에서 삶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여기에 주인장이 손수 담갔다는 동치미 국물까지 환상적이란다. 그런데 웬걸, 먹어 보니 이 맛도 저 맛도 아니다. 같이 간 이들도 “무슨 맛이 이러냐”고 나직하게 한마디씩 한다. 국수가 덜 익은 것 같기도 하고, 간도 안 맞고…. 주인장이 부랴부랴 “우리 집은 100% 순메밀을 쓴다”고 자랑을 했지만 맛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이미 끝난 뒤다. 그 집 벽면에는 한 곳도 아닌 여러 방송사에서 이곳을 찾았다는 증거물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유명 인사가 주인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사람 입맛이야 제각각이지 싶어 나중에 인터넷으로 그 집을 찾아보니 우리처럼 낭패를 봤다는 이가 적지 않다. 아무리 재료를 국산을 쓴들 맛이 없다면 맛집이 아니다. 하지만 방송사에서는 국수를 만드는 방식이 특이해 소개한 것 아닐까 싶다. TV를 켜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맛집’을 봐도 눈길이 가지 않고 씁쓸한 느낌만 든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게으른 음악/서동철 수석논설위원

    찻집이나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에 누군가 “무슨 작품이더라” 하고 궁금증을 표시할 때가 있다. 가끔 아는 척을 하면 ‘그런 걸 다 아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러면 ‘ 막걸리 좋아하는 사람은 서양 클래식 음악 좀 들으면 안 되냐’ 하고는 웃는다. 학창 시절 들은 것을 밑천으로 클래식 담당 기자를 꽤 했다. 그러니 다른 직업을 가진 술친구들보다는 많이 들었을 게다. 하지만 나이 들고 나서는 음악 듣기를 끊은 것이나 다름없다. 차를 몰고 장거리 출장을 갈 때나 라디오를 클래식 채널에 맞춰 놓을 뿐이다. 그럼에도 잘난 척 ‘약발’이 여전히 먹히는 것은, 몇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라디오는 물론 얼마 전 오랜만에 찾은 파주 헤이리의 음악감상실에서 흘러나온 레퍼토리조차 거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매일 새로운 곡이 쏟아져 나오는 대중음악 분야 전문가들은 존경스럽다.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아는 척이 불가능할 것이다. 회사 동료 여기자들에게 “클래식 좋아한다는 남자를 조심해야 한다”고 농반진반으로 조언한다. 나를 돌아보면, 오래된 얕은 지식을 평생 우려먹는 게으른 남자일 가능성이 크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
  • [길섶에서] 형제간의 우애/최광숙 논설위원

    영화 ‘대부 2’에서 대부 마이클은 친형 프레도가 배신했다는 이유로 그를 죽인다. 혈육까지 내친 비정한 동생 마이클이건만 어머니를 배려하는 작은 양심은 있었다. 형의 배신을 알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형을 건들지 않았던 것이다. 부모는 자식들이 우애 있게 지내길 바라지만 형제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조선시대 최고의 유학자 율곡 이이가 저서 ‘격몽요결’에서 “형제는 부모가 남겨 주신 몸을 함께 받았기에 나와 더불어 한몸과 같다”고 강조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이는 또 “형이 굶주리는데 아우는 배부르고, 아우는 추운데 형은 따뜻해서 어찌 편안하겠냐”고 묻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동기간에 재산이나 지위 등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이래저래 형제간의 불화가 있었을 게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그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 중의 하나가 그의 여동생이 전세금으로 쓴 1억원짜리 수표라고 한다. 여동생에게 1억원이나 선뜻 챙겨준 ‘통 큰’ 언니의 우애가 불법 자금의 명백한 증거가 될 줄이야 그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행복지수/오일만 논설위원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하지만 많은 사람이 불행하다는 생각에 갇혀 산다. 행복 자체가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데다 늘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경향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연구에 매달리면서도 딱 부러진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일치된 연구 결과는 낙천적인 성격이 행복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즉 행복은 50%가 성격에서 영향을 받고 40%가 후천적인 노력에서 비롯되며 소득은 10% 정도의 영향력을 미친다고 한다.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소득을 올리고 똑같은 활동을 하더라도 각자가 느끼는 행복지수가 천차만별인 것도 이런 행복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소득이 높아질수록 마음속의 기대치도 덩달아 높아진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게 되면 늘 시선은 더욱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소득과 성공의 크기가 커질수록 ‘현실 대비 만족도’는 늘 제자리이거나 후퇴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진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힘들고 어려울 때의 초심을 잊지 말고 쓸데없이 삶의 기대치를 높이지 말라는 충고일 게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건들 팔월/황수정 논설위원

    이맘때 풀 냄새가 좋다. 공원 길을 돌다 걸음이 멎는다. 여름내 온갖 잡풀들이 제 마음대로 활개친 통에 잔디밭은 숫제 풀밭이다. 삐죽빼죽 우북한 풀밭이 매끈한 잔디밭으로 되돌아가는 시간이다. 벌집이라도 잘못 건드릴까 풀 깎는 이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작업복을 뒤집어썼다. 중무장에 땀 흘리는 수고를 못 본 척, 고막 따갑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도 괜찮은 척. 베어지며 퍼지는 풀물 냄새가 좋아 한참 섰다. 일찌감치 쓰러져 눕는 여름의 잔해들. 모기 입 비뚤어지고 초록 풀이 울고 돌아간다는 처서가 코앞이다. 여름이 떠날 채비를 하면 가을은 소리로 온다. 온 여름 푸지게 누린 매미가 시간이 없다, 발을 동동 구르며 운다. 어제오늘 다르게 꺼칠해지는 칠엽수 이파리를 붙들고 찢어발기듯 운다. 자리를 내줘야 하는 마음은 서럽다. 기세등등 귀뚜라미가 처서를 등에 업고 온다 했으니. 옛사람들 말은 하나 버릴 게 없다. 어정 칠월, 건들 팔월. 더위 핑계로 어정어정 건들건들 여름이 다 갔다. “아주머니!” 등 뒤에서 불러세우는 말이 아직도 낯설어 도끼눈을 뜬다. 쏴 논 화살처럼 시간이 가고 있는 줄 잘 알면서, 뻔뻔한 심보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
  • [길섶에서] 수제 막걸리/최광숙 논설위원

    식탁에 생선이 오르면 비릿하다고, 파전이 오면 너무 기름지다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그냥 지나갈 수 없다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맨 정신으로는 살 수 없다고…. 이런저런 이유로 ‘술맛’을 다시는 남편을 당해 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냉장고에는 늘 막걸리가 있다. 어느 날 택시를 탔는데 기사인 할아버지도 막걸리 예찬론을 폈다. 하루에 한 병씩 반주로 마신단다. 아픈 데 없이 건강한 게 모두 막걸리 덕이라고 했다. 자신의 부인이 잊지 않고 늘 밥상에 막걸리를 챙겨 주는 것도 그래서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대학교 선배분이다. 은퇴 후에도 노후에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막걸리 한 잔 사드시라고 거스름돈도 받지 않았지만 막걸리 건강론에는 끝내 동의할 수 없었다. 얼마 전 한 식당에서 서비스로 내 놓은 막걸리를 한 잔 받아먹었다. 식당 주인이 만든 것인데 시금털털하면서도 달짝지근해 오묘한 맛을 냈다. 목 넘김도 좋았다. 내년부터는 동네 식당에서도 막걸리를 빚어 팔 수 있게 된다고 하니 곧 이런 수제 막걸리도 시장에 선보일 것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좋은데 애주가 남편을 생각하면 벌써 걱정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걷기와 달리기 사이/주병철 논설위원

    좀 드물기는 하지만 아침에 눈을 일찍 뜨는 날은 가까운 공원으로 향한다. 하늘이 채 밝지 않은 시간대인데도 벌써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숫자는 분 단위로 불어난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아침의 활기찬 현장이다. 이들과의 동행에 내 몸도 덩달아 꿈틀댄다. 하지만 걸을 것인가, 달릴 것인가를 놓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땀을 내는 데는 달리기가 효과적이지만 예전 같지 않은 체력 탓에 자신이 없다. 일단은 걷는다. 걷기로 땀을 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출근을 앞둔지라 마음만 급하다. 이내 달리기로 바꾸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그러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경보도 해 본다. 40분 남짓의 운동으로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걸 확 느낀다. 걷기와 달리기 같은 기초운동은 뇌운동을 촉진시킨다는 하버드대 의대 교수 존 레이티의 ‘뇌, 1.4킬로그램의 사용법’을 체험하는 순간이다. 돌아오는 길에 욕심을 좀 내보기로 한다. 걷기로 체력을 보강하면 곧바로 달리기로 바꾸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스스로의 다짐에 헛웃음이 나온다. 의지만큼 습관화가 중요한데… .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
  • [길섶에서] 새로 생긴 핑계/이동구 논설위원

    지인들과의 전화 통화는 대개 3분을 넘기지 못한다. 특히 고향 친구들과의 통화는 “잘 지냈어, 휴가는, 가족들은 잘 지내시지…” 식으로 정형화된 느낌마저 든다. 대부분의 통화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조만간 한번 만나자~”는 말로 끝을 맺는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짧은 통화만으로도 서로 만난 듯 여기며 지내 왔다. 하지만 이젠 멀리 있다는 것이 만남을 미룰 수 있는 핑곗거리는 안 된다. 얼마 전부터 고향까지 2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KTX가 연결됐다. 덩달아 경조사에 참석을 바라는 연락이 잦아졌다. 꼭 찾아가야 하는 대소사(大小事)도 있지만 참석 여부를 결정하기가 난감할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솔직히 주말의 경우 찾아뵙고 친구 된 도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은 된다. 피곤함도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이젠 비용이 발길을 잡는다. KTX 이용 요금은 만만치가 않다. 왕복이면 15만원 선이다. 부조금과 부대비용 등을 합하면 고향길 한 번 왕복으로 한 달 용돈이 고갈될 지경이 된다. 고향 친구들에게 “한번 만나자~”라며 했던 빈말도 쉽게 하지 못하게 됐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이상한 반가움/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야, 반갑다.” 외마디 소리에 얹혀 등판에 ‘찰싹’ 떨어지는 불 같은 손바닥. 전철 개찰구를 들어서는 순간의 날벼락이다. “죄송해요, 고향 친구인 줄 알았어요.” 허리를 연신 굽히며 어쩔 줄 모르는 중년 아주머니. 뭔가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에 한마디를 던지려니 어물쩍 등을 돌리고 사라진다. 플랫폼에 발을 디디자니 멀리서 두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중년 남자. “어 아니네. 친구인 줄 알았는데, 많이 닮았네요.” 코앞에서 친구 아닌 얼굴을 확인하며 몹시 당황한다. 실망한 표정으로 머쓱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이 또 엉뚱하다. 참 이상한 날이다. 연거푸 이어진 이상한 만남이 개운치 않다. 왠지 허전하다. 슬쩍 떠올려 본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을까. 저렇게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반가움을 표시할 만한. 등을 후려치고 두 손을 흔들고…. 언제부터인가 각박한 인연에 너무 익숙해졌다. 만남도 허술해졌고. 세상이 그런 것일까, 내가 그런 걸까. 전동차가 달려 들어온다. 저 안에서 또 어떤 만남이 있을까. 그런데 아주머니 손맛이 왜 이렇게 매울까. 등이 많이 아프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아버지의 자식 배려/박홍환 논설위원

    여든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는 요즘도 손수 운전을 한다. 낚시를 즐겨 다니는데 아무래도 차가 없으면 불편하다면서 몇 해 전부터 만류하고 있는 어머니와 자식들의 걱정을 뿌리쳤다. 얼마 전에는 아예 적재함까지 달린 RV 차량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어머니나 자식들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지만 어쩌랴, 당신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 교차로에서 다른 차량과 충돌해 크게 다쳤다고 한다. 한 달 넘게 입원 치료를 받았다는데도 그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하던 때였다. 문병 왔다가 혹시라도 몹쓸 병에 걸리면 안 된다면서 어머니에게 절대 자식들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그깟 메르스가 뭐라고.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문득 김현승의 시 ‘아버지의 마음’이 생각난다. 당신의 뼈가 으스러지고, 살이 짓물러도 줄에 앉은 참새처럼 걱정스럽게 자식들부터 생각하는, 그게 우리네 아버지들의 마음인가 보다. 자식을 거둬 보니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박홍환 논설위원 stinger@seoul.co.kr
  • [길섶에서] 아빠 자랑/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제1회 아빠 자랑대회’ 출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플래카드가 신선하고 고맙다. ‘우리 아빠 기를 살려주세요’ 플래카드 속 선동적인 문구. 누구의 발상일까. 나 같은 아빠의 아이디어일까, 아니면 세태 파악에 발 빠른 장삿속일까. 아무튼, 이 세상엔 기죽고, 고개 숙인 아빠들이 많긴 많은가 보다. 그런데 무슨 자랑들을 할까. ‘요리를 잘해요’, ‘잘 놀아줘요’, ‘잘생겼어요’, ‘돈을 많이 벌어와요’, ‘인품이 훌륭해요’, ‘힘이 세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는 자랑거리가 없다, 나는. 그래도 어느 구석에 우리 아이들과 아내가 내세울 만한 게 뭣이든 있지 않을까. 아니, 영 해당 사항이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이 더운 아침에도 잔소리와 타박만 무성했는데. 정류장의 플래카드가 유난히 커 보인다. 플래카드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길을 재촉하는 남자, 아빠들. 왠지 플래카드에 아빠들(?)의 시선이 유독 많이 쏠린다. 동병상련일까. 한참을 쳐다보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아빠들도 눈에 든다. 그 표정들이 묘하다. 나처럼 제 자랑거리들을 열심히 찾아보고 있는 것일까.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표정의 사회학/구본영 논설고문

    지인들이 보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 속에서 다채로운 이모티콘을 접한다. 코믹하거나 밝은 이미지의 이모티콘을 보면 심드렁했던 기분도 덩달아 얼마간 환해진다. 하긴 사이버 공간을 떠나 일상생활에서 짓는 실제 표정은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감염 효과를 일으키는 것 같다. 최근 미국에서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외려 짜증 나 보이는 표정을 비하하는 유행어가 등장했다고 한다. ‘무표정하고 뚱해 보이는 여자 얼굴’(RBF·Resting Bitch Face)이란 뉘앙스의 신조어다. 뉴욕타임스는 다분히 여성 비하적인 유행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싹수없는 표정을 짓는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성형외과를 찾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표정을 고치려고 성형 수술까지 하는 세태가 정상일 리는 없다. 다만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고 했다. 나 자신부터 이왕이면 밝은 표정을 지으며 생활하는 게 좋겠다 싶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설령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말이다. 문득 “40세가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명언이 생각난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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