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선배의 전화/이동구 논설위원

    아침나절 뜻밖의 고향 선배 전화로 기분이 좋아졌다. 선배지만 너나들이할 정도의 친한 사이라 가족들의 안부에서 주변 선후배의 소식까지 꼬치꼬치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실제 만나기라도 한 듯 한참 동안 수다를 떨며 그 선배와 지인들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멀리 있는 벗이 찾아 주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논어의 구절을 실감하게 한 전화였다. 점심 후에는 이따금 만나는 고교 친구 두 명이 찾아와 찻집에서 잠시나마 이야기꽃을 피웠다. 추석 명절 고향을 오가는 일정부터 친구들의 근황까지 다양한 대화가 이어졌다.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세상사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의 소식인지라 반갑기 그지없었다. 귀동냥만으로도 얼굴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친구나 회사 동료 등 지인들과의 관계가 점점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시구가 떠올라서일까. 주변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것이 꼭 나이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잊혀진 계절/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참 옷 가려 입기가 어렵다. 아침저녁으론 선선한데, 한낮엔 수은주가 30도 가까이 치솟는다. 널 뛰듯 요동치는 수은주에 장단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오늘 아침에도 옷장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이것을 꺼내보고 저것을 만져보고. 아마도 변덕스러운 날씨에 헷갈리는 심경들이 많을 듯싶다. 조금 두껍다 싶은 점퍼를 골라 입고 집을 나서는데 왠지 옛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어릴 적 이맘 때쯤이면 제법 찬 바람에 옷매무새를 다졌는데. 마을 뒷산 밤나무 사이로 번져오는 소슬바람도 꽤 삽상했고. 추석을 앞둔 동네 어른들의 가을걷이 몸짓들도 분주했었는데. 추수 끝 거둔 곡식이며 과일들을 돌려먹는 인심도 꽤 좋았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중추가절이 좋긴 좋은가 보다. 선물 나르는 배달의 물결이 벌써 요란하다. 도시 삶에 쫓기다 보니 고향의 삽상한 소슬바람을 잊은 지 오래다. 지금도 그곳에선 가을걷이가 한참일까, 나눠 먹는 정도 여전히 도타울까. 얼마 전 지나다 보니 마을이 많이도 변했던데. 가을 옷 한 벌 갈아입었을 뿐인데. 오늘 아침 참 많은 것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교황의 구두/최광숙 논설위원

    누구나 신는 구두. 하지만 그 구두의 모양은 제각각이다. 마녀의 코처럼 앞부분이 뾰족한 구두가 있는가 하면 젖살이 오른 아기 볼처럼 둥근 구두가 있다. 가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앞사람의 구두를 보며 그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할 때가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구두 한 켤레’ 등 구두 작품을 8개나 남겼다. 칙칙한 어둠 속의 낡아 너덜너덜해진 구두는 신발을 끌고 다니며 일한 누군가의 땀이 배어 있는 듯해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후세에 구두 그림을 놓고 철학자와 미술사학자 간에 논쟁이 벌어졌을 정도로 고흐의 구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적지 않다. 구두의 주인은 힘들게 노동했던 농부의 아내라는 철학자의 주장보다는 고된 예술가의 삶을 산 고흐의 자화상이라는 미술사학자의 주장이 더 일리 있지 않을까. 어제 쿠바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검은 구두 사진이 실린 신문을 봤다. 끈이 달린 아주 소박한 신발이다. 전임 교황은 빨간색 명품 구두를 신었다는데, 이번 교황의 구두는 고향 아르헨티나의 작은 구둣방에서 40년째 맞춰 신는 구두란다. 구두에도 신는 사람의 삶이 오롯이 담기기 마련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코스모스의 마음/이동구 논설위원

    전철역 인근에서 얼핏 본 코스모스에 어린 시절 풍경이 비쳤다. 초등학교의 가을 소풍, 10리 남짓한 목적지를 향해 들판을 걷노라면 으레 만나는 코스모스 꽃길. 그땐 그 꽃길에 그리 정겨운 눈길을 주지 않았다. 가방에 든 청량음료 한 병, 과자 한 봉지, 그리고 삶은 달걀과 김밥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가을 길이었다. 코스모스를 보면서 추억을 떠올리는 청승은 불혹을 넘기면서 생긴 듯하다. 왠지 허전하고 쓸쓸한 느낌이 드는 초가을이면 파란 하늘과 함께 코스모스 꽃길이 자주 떠오른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라는 노랫말도 저절로 흥얼거리면서…. ‘신이 처음 만들어 본 꽃이 코스모스’라는 말이 그럴싸하다. 뭔가 어설프지만 ‘순정’이라는 꽃말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을 준다. 가을을 사랑한 시인 윤동주는 “코스모스 앞에선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진다”면서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고 고백했다. 가을 하늘을 보면 코스모스 꽃길이 생각나는 것은 여전히 간직하고 싶은 순수함 때문이라 위안해 본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게국지/서동철 수석논설위원

    안면도는 해산물과 농산물의 천국이지만, 또한 이 때문에 이른바 파인 다이닝(fine-dining)의 발전이 어렵다는 음식 전문가의 한탄을 들은 적이 있다. 신선하고 질 좋은 재료에 셰프의 창조 정신이 곁들여진 음식 문화, 혹은 이런 음식을 내는 레스토랑을 뜻하는 말이 파인다이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지역의 고품질 재료는 그다지 창조정신이 필요없는 기초적 조리법으로도 감동적인 맛을 선물하기 때문이란다. 요즘 같은 꽃게 철이나 찬바람이 불면 슬슬 시작되는 대하 철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싱싱한 꽃게는 쪄먹는 것을 좋아한다. 대하 역시 천일염을 깔아 놓은 냄비에 뚜껑을 덮고 익혀내기만 하면 훌륭하다. 우럭젓국은 그래도 약간의 손질이 필요할 것이다. 얼마 전 안면도에 갔더니 게국지 바람이 불고 있었다. TV 오락 프로그램의 영향이라고 한다. 게를 배추와 발효시킨 게국지는 지역 전통음식이지만, 재미로 먹었지 맛으로 먹은 기억이 별로 없기는 하다. 안면도 게국지는 제철 꽃게를 푸짐하게 넣었으니 그런대로 맛있었지만 전통 게국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새로운 조리법이 조상들의 음식문화를 밀어낼 날이 머지않았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
  • [길섶에서] 가을꽃/황수정 논설위원

    계절의 왕래가 에누리 없이 보이는 곳은 아파트 화단이다. 플라스틱 화분들이 철철이 호사한다. 바가지만 한 꽃송이에 목이 꺾인 수국이 여름내 텃세했던 자리. 어디서 데려왔는지 간들간들한 허리에 목덜미 낭창낭창한, 이번에는 분꽃이다. 영락없는 가을꽃. 기세등등한 봄 여름꽃들과 달라 좋다. 과꽃, 맨드라미, 백일홍, 소국 등속. 꾸민 것 없는 담벼락, 외진 장독대 옆 아무 데나 앉혀도 자리 타박하지 않는 가을꽃들. 어느 하나 대접해 달라 조르지 않는 무심함이 푼푼해서 좋다. 유약 곱게 두른 고급 화분하고는 애당초 짝 맞출 마음도 없는 족속이라 더 좋다. 저 분꽃의 까탈만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저녁 바람 쐬고 달빛을 받아야 피겠다고 고집이다. 달빛에 톡톡, 화로 속에 콩이 튀듯 피어나니 기적 같다는 꽃. 오므린 봉오리 속이 궁금해 화분째 사 볼까 저울질한다. 꽃을 보려거든 찬바람 나기 전에 어서 들여가라, 화분 두 개 묶어 단돈 만원. 근교 농원들이 안달 나서 반쯤은 협박이다. 길어지는 가을밤. 쓸쓸한 달빛에 혼자 조용히 피겠다는 가을꽃을 억지로 집 안에 들일 수야 없다. 가을을 베란다에 가둘 수야 없다, 나 좋자고. 황수정 논설위원 sjh@
  • [길섶에서] 잃어버린 신발/주병철 논설위원

    요즘은 드물지만 신발을 잃어버린 뒷얘기가 심심찮게 대화의 소재가 된 적이 있었다. 주로 음식점이나 상가(喪家)에 들렀다 생긴 일들이다. 이럴 때 주인이나 상주는 참 난감하다. 새로 샀거나 애착을 가진 신발이라면 당사자는 말은 못해도 언짢은 표정을 감추질 못한다. 하지만 상황은 오래가지 않는다. 자신의 신발로 착각했거나 취중에 실수로 바꿔 신은 사람은 다음날 같은 장소에 나타난다. 더러 비싼 신발을 고의로 훔쳐가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은 ‘참 재수가 없다’고 투덜댄다. 대신 새 신발을 사 신는 핑계가 된다. 남의 신발을 신고 간 사람은 ‘정신을 놓고 다닌다’는 주위의 핀잔을 듣는다. 하지만 자신의 느슨한 마음가짐을 다잡는 계기가 된다. 최근 정치권의 유력 인사가 행사장에서 누굴 만나기 위해 실내로 잠깐 들어갔다 나왔는데 신발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보스(?)의 복을 좀 받으려고 누군가 신발을 훔쳐갔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이래저래 마음이 아픈 보스의 고통을 신발에 날려보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
  • [길섶에서] 반가운 두꺼비/이경형 주필

    언덕배기에 심은 돼지감자 풀섶에 뭔가 움직임이 있어 들여다보니 두꺼비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두꺼비라 반가웠다. 몸길이가 한 뼘이 넘어 보이는 듬직한 놈이었다. 작은 돌기들이 촘촘히 솟아 있는 갈색 피부에 검은 줄무늬가 눈가에서부터 등줄기 옆으로 힘차게 흘러내렸다. 밭고랑 두 개에 심은 김장 배추의 큰 이파리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배추 속을 헤집어 보니 초록색 벌레들이 아침밥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몇 마리를 잡아내다가 포기해 버렸다. 귀찮기도 하거니와 너희도 먹고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밭들은 20여년 동안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 벌레가 많다. 옛날 농부들은 콩을 심을 때, 작은 구멍에 콩알을 3개쯤 넣고 살짝 흙을 덮는다. 까치나 산비둘기들이 한두 알 쪼아 먹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사람들은 더 많은 소출을 얻기 위해 화학 비료와 농약을 마구 뿌린다. 인간의 탐욕은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남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이치다. 삼라만상은 있는 그대로 조화를 이룬다는 천뢰(天?)의 뜻이기도 하다. 이경형 주필 khlee@seoul.co.kr
  • [길섶에서] 제철 음식/구본영 논설고문

    아파트 화단에서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온 데이지와 과꽃이 더없이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조석으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제법 소슬하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서 철 지난 여름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광화문 인근에 사무실이 있는 후배가 오랜만에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몸에 좋은 제철 음식을 함께 맛보자는 제안이었다. 새우구이와 꽃게탕, 그리고 전어구이 등 구체적 메뉴까지 거론하면서. 참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다. 하긴 계절의 변화에 잘 맞춰서 좋은 게 어디 음식뿐이랴. 세상 모른다는 철부지의 어원이 ‘절부지’(節不知)란 말이 있다. 한마디로 ‘계절을 모른다’는 뜻이다. ‘철없다’는 우리말도 아직 익지도 않은 과일을 미리 따 먹듯 사리 분간을 못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제 국정감사장에서 어느 국회의원이 경찰청장에게 모의 권총을 쏴 보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무슨 연유이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철없는 ‘갑(甲)질’이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도 철 지난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환절기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 [길섶에서] 무림의 고수/주병철 논설위원

    어떤 분야든 무림의 고수(高手)가 있다. 외공과 내공을 겸비한 사람이다. 요즘 말로 지존, 달인, 종결자 정도 된다고나 할까. 고수는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는다. 겸손함의 미덕은 기본이다. 최근 이런 사람을 만났다. 여럿이 있는 자리에서였다. 그냥 밥값을 내러 왔다는 농담을 하기에 웃어넘겼는데 알고 보니 참석자 중 한 명인 전직 장관의 ‘사회 친구’였다. 이 사람은 대화의 장에 끼어들지도 않고 조용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너무 심심해하는 것 같아 한마디 하라고 권했다. 뜻밖이었다. 청산유수처럼 말문을 열었다. 모임에서 갑론을박했던 정부의 각종 경제·금융정책은 물론 글로벌 시장의 전망 등을 속 시원하게 풀어낸다. 뭐하시느냐고 물었다. IT 분야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다 지금은 조그마한 회사를 운영한다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단다. 모두 말문을 닫아 버렸다. 전직 장관이 실토했다. “내가 이 친구 도움을 많이 받아요. 무림의 고수지요. 그동안 조언도 받고 현장 지식도 많이 들려줘서 큰 덕을 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화답한다. “과찬의 말씀인데, 누구를 알아주는 그 사람이 진정한 고수 아니겠습니까.” 모두 한바탕 웃었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
  • [길섶에서] 참스승/김성수 논설위원

    공직에서 물러난 지인이 자서전을 보내왔다. 책을 읽고 그분을 다시 보게 됐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굽어지고 휘어진 손을 치료하지 못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장래 희망을 ‘농부’에서 ‘공무원’으로 바꿨다는 것도, 수업 시간엔 선생님 설명에 집중하고 필기는 나중에 빨리하려고 중학교 때부터 양손으로 필기를 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초등학교 때 밤송이 가시에 찔린 왼쪽 눈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고3 때 시력을 잃고 방황한 얘기도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한창 맛을 들이고 있을 때라 절망감이 더 컸다고 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학교도 안 가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이 찾아왔다고 했다. “‘불요파불요회’(不要?不要悔)라는 말이 있어. 젊어서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나이 들어서는 지나간 날에 대해서 후회하지 말라는 뜻이야.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을 거야. 그게 인생이야.” 선생님은 쉼 없이 흐르는 어린 제자의 서러운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며 그렇게 다독였다고 한다. 제자는 선생님을 따라나섰고 마음을 다잡은 덕에 차관까지 오를 수 있었다고 했다. 참스승은 위대하다. 김성수 논설위원 sskim@seoul.co.kr
  • [길섶에서] 추어탕의 추억/이동구 논설위원

    어릴 적 살던 집 앞 작은 개울. 봄부터 가을까지는 물놀이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겨울엔 얼음판이 돼 주었던 놀이터였다. 바로 위 형에게는 붕어, 장어 등을 잡을 수 있는 체험장이기도 했다. 전날 오후쯤 개울가 수초 속에 놓아둔 통발(대나무 어구)을 아침나절에 올리면 미꾸라지가 한가득 꿈틀거리고 있었던 장면은 눈에 선하다. 점심때 회사 선배와 셋이서 찾은 추어탕 집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입지적인 장점도 있겠지만 걸쭉한 탕 맛이 예사롭지 않은 탓이다. 추어 튀김에 반주라도 곁들인다면 몸 기운과 기분은 황홀지경이다. 냉면으로 달랬던 무더위를 막 보낸 지금쯤의 추어탕은 가히 보약에 버금가는 느낌이다. 서울 도심엔 유명한 맛집이 꽤 있다. 정치인, 연예인, 작가 등 이름깨나 알려진 인사들이 자주 찾는다면 단박에 맛집으로 뜨기도 한다. 음식 맛과 함께 아름다운 기억들이 곁들여진다면 잊지 못할 명소가 된다. 유명한 추어탕 집 가운데는 북한의 저명 인사들도 기억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어릴 적 먹었던 추억 때문이리라 짐작된다. 추어탕이 때로는 ‘추억탕’이 되기도 한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건망증/서동철 수석논설위원

    돌아가신 어머니는 깜빡깜빡 잊으시곤 하는 일이 종종 있어 자식들로부터 불평을 사기도 했는데 이제 내가 그런 지경에 접어들었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건망증이 화제로 떠오르기에 끼어들었더니 선배가 “네 나이에 벌써 그러는 건 건망증이 아니라 건방진 것”이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적도 있다. 광역버스를 타는 출근 시간이 한 시간 남짓 된다. 길다면 길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벌써 내릴 때가 가까워지곤 한다. 그런데 버스 안에서는 ‘굿아이디어’라고 무릎을 쳤는데, 막상 사무실에 도착해서 기억을 되살리려 하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메모를 해 놓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메모한 종이를 어디 두었는지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어제 아침에는 버스 운전기사가 손님 한 사람이 요금 카드를 찍지 않은 것 같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순간 혹시 내가 아닌가 슬금슬금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수’는 내키지 않았다. 요금을 안 냈다면 무안하겠지만, 낸 것으로 확인된다면 더욱 창피하다. 그럴 만큼 요금을 냈는지 안 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릴 때 카드를 대보니 내가 ‘범인’은 아니었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
  • [길섶에서] 하루의 진화/주병철 논설위원

    약속이 없는 휴일에는 잠을 푹 잔다. 일러야 아침 9시쯤 눈을 뜬다. 정신을 차려 이것저것 살피고 챙기다 보면 금방 점심때다. 오후 들어 바깥나들이라도 잠깐 할라치면 저녁이 기다린다. 잠들기 전까지는 관심 있는 TV 프로에 눈길이 머문다. 잠자리에 들 때쯤이면 귀중한 하루를 뭘 하고 보냈는지 자문한다. 별로 한 게 없다. 하루를 그냥 그렇게 보낸 거다. 시간만 소비하다 보니 정작 생산적 시간은 없을 수밖에. 평일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들어가는 날은 하루가 빡빡한 듯하다. 이런저런 일로 다음날 늦게 일어나면 그날의 하루는 너무 짧다. 허둥대기만 하고 실속이 없다. 물리적 시간은 몸 상태에 따라 하루가 길었다 짧았다 한다. 나이에 따라 길고 짧음이 차이가 나는 건 물론이다. 여하튼 시간불변의 법칙에서 벗어날 순 없다. 하루를 다시 생각한다. 양적인 하루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나. 하루는 평생을 사는 날 중의 아주 작은 점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점의 진정한 의미를 너무 낮춰 본 게 아닌지. 하루는 하기에 따라 매우 달라진다. 의미 있는 하루, 무의미한 하루, 보람찬 하루, 잊고 싶은 하루 등등. 하루의 진화를 꿈꾼다. 주병철
  • [길섶에서] 고고성(呱呱聲)/황수정 논설위원

    동네 마트에서 붉은 고추를 상자째 판다. 반쯤 헐어 놓은 종이상자 안으로 한 뼘치 홍고추들이 나란히 쟁여져 있다. 방금 밭을 떠나온 듯 잔뜩 매운 약이 오른 태깔이 싱그럽다. 어설픈 보약보다 낫다는 가을 햇살. 값진 걸 놓칠세라, 볕자리 골라 가며 아침저녁 널어 말리겠다 수고를 자처하니 야무진 손끝들이다. 김장철은 저만치 먼데. 물색없이 기억이 건너간다. 어린 날, 홍고추는 대문 밖 금줄에 걸리는 징표였다. 어느 아침 할머니는 분주했다. 용왕님께도 칠성님께도 빌어, 그렇게 고대했던 손자를 얻던 날. “제일 붉고 제일 실한 놈으로 한 주먹 따오거라” 하셨던 것이 저 홍고추였다. 채마밭으로 빗속을 달리던 어린 내 발의 기억이 그대로다. 안방문 너머로 들었던 막냇동생의 첫 울음소리. 고고성(呱呱聲)의 강렬했던 기운에는 언제나 저릿해진다. 새끼줄에 훈장처럼 걸던 홍고추, 박물관에나 걸릴 이야기. 우리 출산율은 세계 꼴찌 축이다. 사는 일 힘들어, 낳고 기르는 본성을 다쳤다. 가을 하늘은 고추잠자리들 독차지다. 뭐가 더 있어야 하나, 짝짓기에 여유작작이다. 우리 모습이 박물관에 보낸 옛날만 못해진 것 같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남자의 눈물/이동구 논설위원

    퇴직한 선배가 점심 중 “잘 알고 지낸 인사가 큰 병에 걸려 너무 안타깝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회사일로 오랫동안 정이 들었는데 남의 일 같지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회사는 서둘러 후임자를 물색하는 등 이용 가치를 다한 부속품쯤으로 취급하는 것 같다”며 애써 참았던 눈물 자락을 훔쳤다. 얼마 전 전철에서 본 장면이 오버랩됐다. 러시아계로 보이는 40대 후반의 남자가 전철을 타자마자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열두세 살쯤 돼 보이는 작은딸이 아빠의 불룩한 배를 감싸 안자 아빠는 옆에 서 있던 큰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코끝이 붉어진 아내는 손수건으로 남편의 눈 주변을 몇 번이고 닦아 주며 속삭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가족이 얼마나 그립고, 보고 싶었을까 짐작돼 가슴이 아렸다. ‘남자는 태어나 세 번 운다’는 말은 한참 틀린 것 같다. 남자들도 가족, 동료, 이웃의 아픔에 언제든지 눈물짓는다. 대부분 숨어서 울 뿐이다. 작가 최인호는 죽음을 앞둔 두려움에 “알코올 솜으로 탁자의 눈물 자국을 남몰래 닦았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남자의 눈물이 더 뜨겁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통과의례/서동철 수석논설위원

    고무신은 편한 신발의 대명사처럼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집에서 고무신을 신었던 적이 있다. 동네 구멍가게 가는 데는 고무신만큼 좋은 것이 없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편해 보이는 고무신도 새것을 신으면 조금만 걸어도 발뒤꿈치가 아파 오는 것이었다. 통증을 참아내고 까진 뒤꿈치의 상처가 아물 때쯤에야 편해졌다. 초·중·고 시절 새 운동화를 신으면 언제나 발이 아파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신발에 발을 맞추는 기간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이후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신발장에는 십년이 훨씬 넘도록 신은 적이 없음에도 먼지만 쌓여가는 구두도 있다. 유명한 브랜드라지만 내 발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지금도 새 신발은 그리 편치 않다. 집 주변 공원을 걸을 때 신는 운동화가 있다. 6~7년은 잘 신었는데 엊그제는 뒤꿈치가 아파 오는 것이었다. 뒤꿈치를 감싸는 천이 해지면서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이 운동화도 처음에는 한동안 어색했다. 새 운동화를 사면 비슷한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신발조차 내 것으로 만들려면 통과의례가 필요하구나 싶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
  • [길섶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동구 논설위원

    전철을 기다리며 아들에게 “할아버지 제사가 있으니 큰집에 함께 가자”고 했더니 흔쾌히 응했다. “아빠랑 단둘이서 여행해 본 지도 오래된 것 같다”는 그럴싸한 이유도 덧붙였다. 순간, 아들이 언제 이렇게 많이 컸나 하는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엄마에 비해 아빠와는 대화하고 놀아 본 기억이 별로 없다는 의미였기에…. “자식이 태어나면 사람은 바보가 된다”는 유대인 속담이 있다. 그래서 소중하게 간직했던 전 재산도 아들이 자식을 가진 후에야 물려준다고 한다. 재산을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교훈이겠지만 자식만큼 귀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한때 ‘바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다. 딸 바보, 아들 바보 등 많은 바보들은 주로 아빠들을 지칭했다는 기억이 떠올라 아들에게 더욱 머쓱해졌다. 오전 내내 아버지를 떠올려 봤다.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어서인지 희미해진 기억조차 별로 없다. 경제적인 능력도, 이렇다 할 재능도 남겨 주신 게 없다. 한 가지 또렷한 기억은 다섯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셨다는 것뿐이다. 자식 바보였음에는 분명했다. 오늘 큰집에 갈 땐 아들 손을 꼭 잡고 바보 아빠가 되고 싶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
  • [길섶에서] 고향길/주병철 논설위원

    늘 그랬듯이 아침에 스마트폰 달력의 일정을 챙긴다. 죽 보다가 눈길이 머문다. ‘추석연휴’라는 메모다. 한참 전에 적어 놓았을 텐데.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든다. 친구들한테 ‘카카오톡’으로 추석 일정을 물어본다. 예상했던 대로다. 답이 없다. 하지 않던 짓에 놀랐을까, 아니면 너나 알아서 하라는 뜻일까. 생각에 잠긴다. 추석이나 설날 때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께 절을 드리지 못한 적이 더러 있다. 양가 부모님 가운데 각각 한 분이 돌아가신 뒤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저런 핑계로 내려가지 못한 자책감에 사로잡힌다. 용돈을 보내 드리고 수시로 안부 전화를 하는 걸로 면죄부를 받아 왔다. 혈육들이 옆을 지키고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소홀했다면 변명이라도 될까. 찜찜하다. 자식 된 도리가 아닌 것 같다. 기억의 테이프를 몇십 년 전으로 돌린다. 참 재미있고 정이 넘쳤다. 고단한 먼 거리를 달려 찾아간 고향집 가족들이 늘 반갑고 고마웠다. 늦은 밤까지 자식을 기다리던 부모와 혈육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명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핑계를 대지 말자. 그래도 만날 수 있을 때 자주 만나야지. 마음은 벌써 옛날 고향집에 가 있는 것 같다. 주병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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