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배신/서동철 수석논설위원

    10년째 살고 있는 파주에서도 북쪽의 옛 시가지에 괜찮은 중국집이 있어 종종 찾았다. 갈 때마다 탕수육을 주문했다. 바삭한 것은 물론 신선한 식용유를 쓰는 듯 깨끗한 모양새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탕수육을 시키면 직접 만든 군만두를 덤으로 주는데, 공짜라서 그렇겠지만 이것이 또 맛있었다. 한마디로 맛도 좋고 인심도 좋았다. 얼마 전 찾으니 2층 중국집의 1층 계단까지 손님으로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TV에 ‘짜장면이 맛있는 집’으로 소개되어 한번 먹어 보러 멀리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먹방(먹는 방송)의 위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짜장면이라니…. 입맛이 제각각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 TV의 ‘약발’도 다했겠거니 싶어 며칠 전 다시 갔지만 긴 줄은 여전했다. 휴가 나온 병사들이 즐겨 찾던 집이다. 동네 단골손님도 많고 배달 주문도 잦았다. 그랬지만 주인 아저씨의 낡은 배달 자전거도 지금 같으면 다시 탈 일이 없을 것 같다.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모습에 다시 발길을 돌리며 무언가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었던 시절 손님이라면 대부분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싶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
  • [길섶에서] 무관심/김성수 논설위원

    출근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열차가 들어오고 문이 열렸다. 앞에 서 있던 20대 여성이 갑자기 고꾸라지듯 넘어진다.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공간에 발이 빠졌다. 하이힐을 신었는데 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듯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어떻게 하지. 문이 닫히면 크게 다칠 텐데. 고민하는 사이 열차 안에 있던 젊은 남성 두 명이 먼저 움직인다. 한 명은 발을 빼주고 다른 한 명은 손을 잡아 일으켜 준다. 나도 그제야 구조 대열에 합류했다. 여성의 어깨를 뒤에서 부축해 줬다. 아침부터 운이 지독히 없었던 그녀는 창피한 것은 둘째치고 많이 아픈 듯하다. 양보받은 자리에 앉아서는 오른쪽 발목을 연신 주무른다. 더 적극적으로 먼저 도와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미안한 마음이 들며 며칠 전 뉴스도 생각났다. 심근경색을 앓던 서울의 한 60대 아파트 경비원 얘기다. 길에 쓰러졌는데 주변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끝내 사망했다는…. 거창하게 시민의식까지 들먹일 건 없다. 곤경에 처한 사람에겐 손을 내미는 게 인지상정이다. 결국은 무관심이 문제다. 김성수 논설위원 sskim@seoul.co.kr
  • [길섶에서] ‘지공족’의 가을/구본영 논설고문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오래 흘러온 강물을 깊게 만들다/…여고 2학년 저 종종걸음 치는 발걸음을 붉게 만들다” 고운기 시인의 ‘가을 햇살’의 일부다. 시구처럼 이 가을도 깊은 강물처럼 사색에 잠기게 해 놓고 잰걸음으로 우리 곁을 떠나갈 것만 같다. 가을은 이처럼 속절없이 깊어만 가는가. TV 뉴스에 비친 설악산은 짙은 단풍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봄, 여름 그토록 무성했던 푸른 잎들이 어느 새…. 이런 상념에 젖어 들 즈음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오래전 현업을 떠난 한 선배가 낙엽처럼 졌다는 부음이었다. 문득 선배가 생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앞으로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게 됐다는 뜻으로 “‘지공족’이 됐으니 축하해 달라”며 지었던, 착잡한 표정도. 선배가 남긴 농담의 여운 때문일까. 조간신문에서 정부의 고령사회 대책에 눈길이 갔다. 특히 지하철 등 공공시설의 무료 이용 연령이 현재는 65세인데 이를 상향 조정한다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정책을 바꾸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터. 그렇다 하더라도 노년을 가을볕에 반짝이는 단풍처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데 정책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
  • [길섶에서] 배려심/손성진 논설실장

    갈대가 우거진 아름다운 양수리 강변에서 배려심이란 말이 떠올랐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로서는 또 눈에 거슬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누가 막걸리를 마시고는 플라스틱 빈 병을 풀숲에 던져 놓고 가버렸다. 주변엔 다른 쓰레기들도 널려 있다. 몽환적인 물안개에 취했던 내 마음을 옥에 티처럼 상하게 한 일이었다. 산이나 강변을 다니면서 아무렇게나 버려 놓은 쓰레기를 보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먹고 난 병이나 비닐봉지를 가방 속에 넣어 집으로 가져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자연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치우는 부담을 주고 무엇보다 환경을 망치는 짓이다. 배려심이란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을 말한다. 물론 자연이나 무생물보다는 인간관계에서 더 중요하다. 특히나 약자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배려의 손길이 필요하다. 길을 가다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고, 불우한 이웃에게 적은 돈이라도 건네는 따뜻한 마음씨….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야말로 사회를 밝게 해줄 소중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책 주인께 드리는 글/송한수 기자

    헌 책 하나 샀습니다. ‘골목 책방’에 살짝 들렀죠. 서울 서대문구 성산로 영천시장입니다. ‘한석봉서천자문’(韓石峰書千字文)에 눈길이 꽂히지 뭐예요. 가물가물 자꾸 잊히는 한자를 떠올려서랍니다. 먼지를 떨고 펼치니 쪽지가 툭 떨어지네요. ‘2001년도 9월 23일(일요일) 오전 7시경 사망 어머니 제사 9월 22일(음 8·6)’이라 적혔습니다. 까만색으로 굵직하게 또박또박 꾹꾹 눌러쓴 모양입니다. 한 뼘쯤 되는 쪽지를 가득 채웠습니다. ‘집 063-823-7XXX’라고도 썼습디다. 주인장은 전라북도 어디에 살았던 듯합니다. ‘호남고속버스 6282-0600, 20분 간격’이라는 정보가 믿음을 굳혔습니다. 제법 연로하시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효성은 또렷합니다. 글씨만큼이나 말이지요. 두 번째 쪽지를 읽습니다. 내리사랑도 그득히 묻어납니다. 아드님 여자 친구 연락처까지 남긴걸요. 글쎄, 단박에 코끝이 찡해집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하긴 쪽지 갈피엔 가뜩이나 곰팡이가 피어오른 통에 더합니다. 머릿속엔 그리운 얼굴이 겹칩니다. 마음 깊숙이 사무칩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가을 길섶에서.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길섶에서] 돌아온 기러기 떼/이경형 주필

    가을비가 내린 뒤라 쌀쌀하다. 시베리아에서 언제 왔는지 수십 마리의 기러기 떼가 V자 대형을 지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날고 있다. 한강 하구를 끼고 펼쳐진 들판은 여기저기 추수가 끝나 검은 논바닥이 드러나 있다. 둑길을 지나 농로를 따라 걷는다. 수백 마리의 기러기 떼가 논바닥에 앉아 모이를 쪼고 있다. 낟알이나 벼 그루터기에 새로 나온 어린 순, 진흙 바닥의 작은 벌레들을 먹고 있을 것이다. 인기척이 나자 일제히 날기 시작한다. 순간 가을 하늘은 검은 기러기 떼의 군무로 가득 찼다. 기러기 떼는 조석으로 한강 개펄에서 들판으로 출퇴근(?)을 한다. V자 대형을 이루는 것은 선두 기러기가 힘찬 날갯짓으로 상승기류를 만들면 뒤따라오는 기러기는 이 흐름을 타고 에너지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V 편대로 날면 혼자 나는 것보다 71%나 더 멀리 날 수 있다. 선두가 지치면 대열 안으로 들어오고 다른 기러기가 선두에 나선다고 한다. 리더의 헌신은 조직을 살린다. 저마다 앞장서 봉사하겠다는 구성원의 의지가 충만할 때, 그 조직은 발전하기 마련이다. 이경형 주필 khlee@seoul.co.kr
  • [길섶에서] 기다림/황수정 논설위원

    홑이불을 장롱에 들여놓은 지는 근 한 달 넘었다. 여러 달째 활짝 열린 베란다 창문만은 그냥 두고 버텼다. 가뜩이나 짧아진 가을이 닫힌 문 핑계로 줄행랑칠까 싶어서. 요 며칠째는 기어이 항복이다. 소낙비가 쩨쩨하게 한 줄금 다녀갔을 뿐인데 소매 끝이 차졌다. 창을 닫고야 구석 자리의 채반에 눈이 간다. 상자째 받은 생버섯을 어쩔까 궁리하다, 말려 보자 했던 게 보름쯤 전. 막 썰어 널고 두어 번 헤집었을 뿐인데 곱게 말랐다. 별것 없는 수고에 백배쯤 생광스런 모양새다. 닦달하지 않아도 챙겨 준, 가을볕의 공(功)이다. 호박오가리, 고구마 줄기, 가지, 토란대…. 후덕한 가을볕 아래서는 쪼그라져도 초라하지 않다. 또박또박 태양의 이력을 기억한 것만으로도 온 겨울 넉넉하게 해 줄 묵나물들. 식당의 곤드레밥이 시시해졌다. 쌉싸름한 마른 나물 대신 방금 돋은 듯 새파란 곤드레다. 비닐하우스에서 성질 급하게 불려 나온 맛은 영 어쭙잖다. 기다림의 내력이 없으니 애틋하지 않다. 삶에 덤비지 않기, 기다릴 줄 알기. 묵나물이라도 더 만들기로 한다. 시월의 잔광까지 아껴 쓰면서, 조율 안 돼 삑삑거리는 마음의 줄도 고르면서. 황수정 논설위원 sjh@se
  • [길섶에서] 가을 배 따기/이동구 논설위원

    요즘 한두 개씩 먹는 배 맛이 일품이다. 아이 머리 절반 크기에 단맛 가득한 배는 식후 입가심으로 더할 나위 없다. 예전엔 지역명이었지만 몇 해 전부터 황실배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맛에는 변함이 없다. 더구나 난생처음 아들과 함께 직접 수확해 온 것이라 맛과 함께 뿌듯함까지 느껴진다. 지난봄부터 배나무 한 그루를 배정받은 주말농장을 두세 번 찾았다. 배꽃이 핀 4월에는 아내와 함께 꽃가루를 붙여 주는 수분 작업을 했고, 유월 초 여름엔 종이 봉지를 씌워 주는 정도의 일손을 거들었다. 물론 작은 열매나 가지 등을 정리하는 솎아내기 등 작업 대부분은 농장주의 손길에 의지해야만 했다. 가을 햇볕이 제법 따가웠던 어느 주말, 아들과 함께했던 배 따기 작업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을 듯싶다. 둘 다 농사 경험이 없는 얼치기라 처음엔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배를 따고,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가져간 쇼핑백 두 개는 금방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나무엔 여전히 많은 배가 달려 있었지만 더이상 따지 않았다. 일한 만큼의 수확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아들 주머니엔 큰 배 두 개가 더 들어 있었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노인 인턴/손성진 논설실장

    70세의 인턴 이야기를 그린 ‘인턴’은 노인을 무조건 배척하는 세태 속에서 큰 공감을 얻고 있는 영화다. 젊은 여사장이 어머니에게 잘못 보낸 이메일을 지우려고 노인 인턴은 어머니 집에 침입해 컴퓨터를 켜서 지우는 방법을 선택한다. 디지털 세상이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유용함을 증명해 보였다. 풍부한 인생 경험은 젊은 사람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자산 아니겠는가. 나 자신 노후의 삶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일본은 우리보다 고령화 문제에 훨씬 먼저 부닥쳤다. 65세가 넘는 고령자가 3384만명이나 된다니 우리 인구의 3분의2다. 일본은 정년이 길기도 하지만 여든이 되도록 일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에 가 보면 택시 기사들은 대부분 노인이고 주유원, 톨게이트 직원도 거의 70세 전후의 사람들이다. 일본 기후현에 있는 금속부품 회사인 ‘가토 제작소’는 60세가 넘는 노인을 고용한 뒤 매출이 3배나 늘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주말에 노인들이 일하도록 한 결과다. 우리나라에도 일자리만 보장된다면 주말이 아니라 밤샘 작업이라도 기꺼이 할 은퇴자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나.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
  • [길섶에서] 심부름 교육/최광숙 논설위원

    요즘 방송에서 보면 말문이 겨우 트여 의사소통은 되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부모가 난생처음으로 심부름을 시키는 모습이 종종 나온다. 꼬마들이 영 해낼 것 같지 않은 ‘도전’을 좌충우돌하며 용케 심부름을 해내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내가 그들의 부모가 된 것처럼 뿌듯하다. 어른들에게는 일도 아니지만 꼬마들에게 심부름은 어른들의 세상에 맨몸으로 뛰어들어 싸우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릴 적 심부름으로 잔뼈가 굵었다고 농반진반 말할 정도로 가족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해 봤기 때문에 잘 안다. 지금도 심부름을 잘못해 큰오빠한테 크게 혼난 기억이 난다. 약국에 가서 약 사오기도 쉽지 않은데 게다가 사온 것을 바꿔 오라고까지 하면 얼마나 난감하던지. 지나고 보니 심부름은 아이들이 커 가는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할 교육 과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오빠들의 만화 심부름, 은행이나 동사무소에서 돈 찾기와 각종 증명서 떼는 심부름, 이 모든 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공부였다. 하지만 요즘은 하도 이상한 일도 많아 아이들을 세상에 던져 심부름시키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신선한 답례장/주병철 논설위원

    집으로 청첩장 비슷한 게 날아왔다. 겉봉을 보니 청첩장이 아니라 얼마 전 딸 혼사를 치른 지인이 보낸 답례장이었다. 겉봉이 예사롭지 않았다. 근데 한 쪽이 아니라 무려 3쪽이다. 한 쪽처럼 접어 둔 것이다. 첫 단락은 늘 하는 인사말로 그저 그랬다. 눈길을 끈 건 그다음 단락부터였다. 하객들이 궁금해하는 게 많다고 해 몇 가지를 말씀드린다며 운을 뗐다. 사위의 이름만 얼핏 보면 일본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실은 이탈리아 출신이고 영국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딸의 대학으로 유학 와서 인연을 맺게 됐다고 했다. 사위의 부모는 어떤 일을 하는지, 사위의 아버지는 왜 못 왔는지 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딸의 웨딩드레스는 본인이 옷감을 떠 직접 디자인을 하고 재봉을 했단다. 가 보진 않았지만 하객들이 궁금해할 정도로 특이한 결혼식이 치러진 것 같다. 양가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하객을 위해 마련한 ‘찐 옥수수’를 포장하는 컬러 사진까지 넣어서…. 이런 건 처음이다. 열린 생각과 거리낌 없는 소신을 가진 그다운 시도다. 청첩장 못지않게 중요한 게 답례장이란 생각이 든다. 하객들을 위한 서비스이자 소통이다. 신선한 충격이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
  • [길섶에서] 다람쥐 밥/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집 가까이 있는 올림픽공원에 자주 가는 편이다. 토끼며 다람쥐 등 공원엔 아는 식구들이 꽤 늘었다.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동물들은 사람들과 아주 친하다. 먹을 것을 주고 쓰다듬는 사람들을 맴도는 녀석들은 꼬리를 흔들고 귀를 쫑긋대며 재롱떨기 일쑤다. 낯익은 토끼며 다람쥐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방문객 모습도 종종 눈에 띈다. 오랜만에 찾은 올림픽공원. 커다란 플래카드가 을씨년스럽다.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돌려줍시다.’ 도토리를 죄다 주워가 다람쥐들이 먹을 게 없단다. 묵을 쑤려고 싹쓸이하는 이들도 있다니, 해도 너무한 것 같다. 공원에 도토리가 얼마나 열린다고 가져다 묵까지 쑬 생각을 할까. 그 속 좁은 욕심이 얄궂다. 그래서인가. 그 신나게 뛰놀던 다람쥐며 토끼들이 별로 눈에 안 든다. 가만 돌이켜보니 올림픽공원 초창기부터 단골손님이었던 것 같다. 공원이 처음 생겼을 땐 토끼며 다람쥐들이 사람을 무서워해 도망 다니기 일쑤였는데, 이젠 가족처럼 친하게 지낸다. 녀석들이 먹이를 가로채는 사람들을 무서워해 도망 다닌다? 아무리 생각해도 슬픈 일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길섶에서] 괴짜 회장의 창의력/오일만 논설위원

    왜소한 외모에 대학 졸업장도 별 볼일 없고 오직 열정 하나만 남달랐던 인물이 있다. 자전거로 45분 걸리는 호텔로 매일 찾아가 외국인들에게 말을 걸며 영어를 배웠다. 청년기는 실패투성이였다. 형편없는 수학 실력 때문에 대학 입시에서 두 번 낙방했고 졸업 후에는 월 12달러짜리 영어 교사를 지냈다. 서른한살 때 통역관으로 미국에 첫발을 디디면서 인터넷 세상을 처음 접했다. 34살 때 동료들과 7000만원을 투자해 알리바바를 차렸다. 그가 세계 최대 인터넷 회사의 마윈(馬雲·51) 회장이다. 중국 최고의 부호이자 전 세계를 호령하는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공부 대신 무협지에 심취했고 중국 무협지의 대가 진융(金勇)의 광팬이다. 스스로 무림 고수 풍청양(風淸揚)이라 불리기를 좋아한다. 그의 사업 승부수는 늘 관행과 통념에서 벗어난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내 창의력 원천은 무협지”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는 실패 없이 자란 엘리트와 창의력이 없는 공부벌레를 싫어한다.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야 성공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 우리도 이런 괴짜 회장이 나타나야 괄시받는 ‘잡초’들이 기를 펴고 살 텐데….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예산 사과/서동철 수석논설위원

    충남 예산이 과거의 대구를 넘어서는 사과의 고장으로 발돋움한 것은 벌써 오래전이다. 예산에 간다거나 갔다 왔다고 하면, 으레 “사과 맛이라도 보고 와야지”라거나 “사과 맛이나 좀 보고 왔느냐”는 인사가 뒤따른다. 지난 주말 예산은 글자 그대로 사과 천국이었다. 예당평야 너머로 이어진 느릿한 구릉길을 달리고 있으면 어디를 봐도 사과밭이다. 가지마다 수확 직전의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에 마음마저 넉넉했다. 지나치는 길손이 이럴진대 여름내 땀 흘린 과수밭 주인은 얼마나 흐뭇하겠나 싶다. 화암사 가는 길도 온통 사과밭이었다. 추사 김정희의 체취가 어린 곳이다. 길가로 내민 가지의 사과는 차창 밖으로 손만 내밀어도 딸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장난으로라도 따 간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예산읍내에 가로수로 심어 놓은 사과나무도 마찬가지였다. 예산역 앞에서는 전통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좋은 사과는 산지에서도 제값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조금 허술해 보이고 크기도 제각각이면 반의반 값이다. 한 보따리를 받아 들고 작은 놈으로 골라 깨물었더니 새큼한 단물이 입안에 퍼진다. 그래 이 맛이지….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말 빌리기/주병철 논설위원

    사람의 성격이나 성품 등을 판단하는 잣대 가운데 하나가 말이다. 주고받는 말 속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대충 분간해 낼 수 있다. 주변에 말이 많은 친구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툭툭 던지는 말에 친구들이 경망스럽다고 핀잔을 준다.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럴수록 더 살갑게 다가온다. 그냥 웃음이 난다. 악의나 복선이 없다. 더러 친구 간 껄끄러운 얘기도 스스럼없이 총대를 멘다. 그럴 땐 모두 ‘약방의 감초’라고 치켜세운다. 간사한 게 사람이다. 또 다른 친구는 말수도 적을뿐더러 여간해서 입을 열지 않는다. 남의 얘기를 듣기만 한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크렘린 같은 사람’이란 별명이 있다. 답답하기도 하고 경계하기도 한다. 근데 남의 말을 끝까지 경청해 주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 말이 새나가지 않아 신뢰하는 친구도 있다. ‘말 빌리기’를 좋아하는 친구도 있다. 뭔가 알고 싶어도 대놓고 묻지 않는다. 다른 친구를 통해 알음알음 알아낸다.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뗀다. 말은 안 해도 알고 싶은 건 다 알려고 하고, 알아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친구들은 내공이 깊은 친구라고 말한다. 근데 그게 좋다, 나쁘다 등의 평은 안 한다. 주병철 논설위원 bc
  • [길섶에서] 아파트에 산다는 것/최광숙 논설위원

    어느 날 아파트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 인기척이 없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반바지 차림의 낯선 남자가 이상하게 쳐다볼 때까지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내 집을 못 찾고 남의 집 문을 두드릴 줄이야. 우리 아파트가 3, 4라인인데 아마도 그전 1, 2라인의 아파트를 간 것이지 싶어 부지런히 3, 4라인을 향해 걸었다. 걷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 가만 보니 살고 있는 아파트를 지나 5, 6라인에 간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연거푸 두 번이나 헛발질을 하다니. 다리 힘이 빠지면서 갑자기 어질어질 현기증이 일었다. 하늘을 쳐다보니 아직도 푸르다. 밤이 아닌 게 속상하다. 한잔 술이라도 걸쳤으면 마음이 편할 텐데 말짱한 정신이 오히려 민망하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의 미로에 빠져 갈팡질팡한 하루가 새삼 아파트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마냥 가지런히 진열대에 놓여 있는 것 같은 아파트. 잠깐 한눈팔면 내 집을 코앞에 두고도 헤매는, 무서운 곳이다. 요즘 방송에서 텃밭 딸린 전원주택을 보면 눈길이 한참 머문다. 영혼이 깃들지 않은 아파트의 삶을 청산하고 싶은 마음, 어디 나뿐일까. 최광숙 논설위원 bori
  • [길섶에서] 벼 반, 피 반/이경형 주필

    가을 바람이 삽상하다. 동이 틀 무렵,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은 냉기까지 품었다. 저 멀리 산 능선 위로 붉은 해가 치솟는다.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 길을 걷는다. 고개 숙인 벼들이 추수를 기다린다. 달포 전만 해도 볏논은 초록색 한가지였지만, 이제는 논마다 색깔이 다르다. 올벼는 노란색에 갈색이 감돌고, 찰벼는 더 검어 보인다. 일반 볏논도 가까이서 보니 색깔이 다 달라 보인다. 대부분의 논은 잘 영근 벼 이삭으로 황금빛 단색이다. 반면 ‘벼 반, 피 반’의 어떤 논은 노란색 벼의 1층과 벼보다 한 뼘 정도 키가 큰 갈색 피 이삭으로 색깔이 시루떡처럼 2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 볏과에 속한 피는 이삭이 패기 전까지는 벼와 구분이 잘 안 된다. 김매기를 할 때도 키 큰 놈은 대개 피이므로 제거해야 한다. 옛날에는 피도 죽을 쒀 끼니를 때우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껏 새 모이로 이용된다. 수확의 계절이 오자 부지런한 농부의 볏논과 게으른 농부의 ‘벼 반, 피 반’ 논의 차이가 이렇게 나는 것인가. 아니면 온전한 볏논 농부는 제초제를 사용하고 ‘벼 반, 피 반’ 농부는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둔 탓일까. 이경형 주필 khlee@se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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