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부황한’ 꿈/문소영 논설위원

    허풍이 잔뜩 들어 있는 현실성이 떨어지는 상태를 ‘부황하다’라고 한다. 1940년대 이기영의 장편소설 ‘봄’에도 등장하는 단어이건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표준어가 아니고, 북한말로 돼 있다. 어릴 때는 대체로 부황한 꿈을 많이 꾼다. “대통령이 되겠다”거나 “아인슈타인 같은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겠다”고 한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평범한 성적이면 교사나 소방관, 공무원으로 낮아지고, 성적이 좋으면 판검사나 변호사, 정치인, 의사 등으로 정리되곤 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나서면서 미국인의 영웅인 케네디 대통령과 학생 때 백악관에서 찍은 사진을 공개하면서 ‘백악관의 주인’에 대한 오랜 꿈을 밝힌 적이 있다. 개항기 일본을 제국주의 국가로 전환한 배후에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이 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당시의 영토와 19세기 중엽 요시다가 그려 준 밑그림이 거의 같다. 일본 지식인 중에 ‘일본이 몸에 맞지 않는 대국의 꿈을 꾸는 바람에 곤란을 겪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조선시대 이래 ‘소국의식’에 젖어 산 한국은 어떤 나라가 되겠다는 야망도 없이 근시안적인 목표에 매달리는 것 같아 답답하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
  • [길섶에서] 새총의 추억/최광숙 논설위원

    어릴 적 오빠들과 함께 새총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 Y자(字) 모양의 나무가지를 꺾어다가 동생의 노란색 기저귀 고무줄을 끼워서 만든 새총 하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숲속에서 새총 놀이를 할 때는 솔방울을 총알 삼아 멀리 날아오르는 참새를 잡는다고 폴짝폴짝 뛰어다니곤 했다. 한창 장난기가 넘쳤던 오빠들을 따라 가끔 집에서도 새총 놀이를 했다. 2층 창문으로 치마 입은 언니들의 다리를 향해 빳빳한 종이를 여러 번 접어서 만든 총알을 쏘곤 했다. 성(性) 정체성도 없이 오빠들과 함께 뛰놀던 시절이니 나도 오빠들처럼 여성이 마치 나의 적군인 양 그들을 향해 같이 ‘공격’을 했던 것이다. 다들 실력이 없어 목표물을 적중하지 못해 안타까워했지만 그렇게 노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최근 새총을 이용한 범죄가 늘고 있다고 한다. 달리는 차에 쇠 구슬을 쏜다고 하니 새총이 흉기로 둔갑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을 해칠 정도의 위력을 가진 개량형 새총에 대해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던 새총이 이제 범죄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무서운 세상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해오라기/박홍환 논설위원

    [길섶에서] 해오라기/박홍환 논설위원

    얼마 전 청계천에서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날렵한 몸매에 키는 50㎝를 넘을까 말까. 목 뒤로 뻗은 한 가닥 흰색 깃이 일품이다. 찍어온 사진과 인터넷 백과사전을 대조해 가며 정체를 밝혀냈다. 해오라기. 백로과의 새로 10월경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철새였으나 최근에는 이 땅을 터전으로 삼는 텃새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같이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다니 볼수록 친근해진다. 그는 수표교를 지나 양쪽 천변이 비교적 울창한 부들로 뒤덮여 은신하기 딱 좋은 곳에서 항상 S자(字)로 몸을 굽히고, 흘러가는 청계천 물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발목을 물에 잠근 채 부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모습은 엄숙하기까지 하다. 숱한 물고기가 오고 가지만 미동도 않고, 그 상태로 10분 넘게 흡사 박제처럼 꼼짝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찰나의 순간, 부리를 물속에 처박아 마침내 한 마리의 피라미를 낚아챈다. 땡볕 속에서 10여분간 버텨낸 인내심이 자랑스러운 듯 득의양양한 표정까지 짓는다. 성공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그의 모습에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는다. 나는 지금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박홍환 논설위원 stinger@seoul.co.kr
  • [길섶에서] 어성초 엑기스/문소영 논설위원

    출근길에 수많은 전봇대를 지나치는데 그 전봇대는 뭔가 달랐다. 아랫부분에서 뭔가가 펄럭이는 것 같았다. 몇 걸음 내처 가던 길을 되짚어와 들여다보니, 개인이 손 편지처럼 쓴 전단이 붙어 있다. ‘어성초를 아침저녁으로 머리에 뿌리면 2~3개월 후 현재 머리카락이 2배로 늘어납니다. 효과가 없으면 반품받겠습니다’라며 휴대전화 번호까지 공개해 놓았다. 얼마 전 한 선배도 잠잘 자리에 어성초 엑기스를 분사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직접 과실주 담는 소주에 어성초를 넣어 3개월 정도 발효시키고서 분무기에 넣어 뿌린단다. “효과? 괜찮은 거 같아”라고 했던가. 탈모 방지가 중년 남녀의 주요 관심사다. 원래 머리숱이 없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가 생기거나, 어느 날 부쩍 빠지는 머리카락 때문에 노심초사한 사람들만이 그 고통을 안다. 어성초는 한 의사가 종편 등에서 발모팩이란 이름으로 소개했다가 올 4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행정지도를 받았다. 정부는 검증이 안 된 의학 시술이나 건강기능식품을 홍보·추천하는 의사인 ‘쇼닥터’를 제재하는 의료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폐단을 알아도 시도해 볼까 하는 마음이 살랑살랑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
  • [길섶에서] 소리와 소음 사이/황수정 논설위원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에게 서울은 시끄러운 도시다. 파리에서 오래 산 사회학자는 우리의 골목 소음이 유별나다고 한다. 트럭 지붕 위에 확성기를 달아 녹음기를 줄창 틀어 대는 소리를 서울만의 어떤 것이라 정의한다. 소음을 꼬집는 완곡어법이다. 폐가전 제품을 돈으로 바꾸라거나, 산지 직송 영광굴비가 왔으니 들여가라는 소리. 이방인의 시선에는 아파트 집집에 붙은 스피커도 이물스럽다. 아무 때나 흘러나오는 알림 방송은 이해 못할 소음이다. 내게는 불편하지도 성가시지도 않은 소리들이다. 집 안 잡동사니를 돈까지 얹어 거둬가 주면야 고맙다. 온 동네에 또박또박 육성으로 그날 할 일 단속해 주는 ‘전원일기’의 마을회관 스피커가 뭐 나쁜가. 그 양촌리 스타일의 관리사무소 방송은 여러 모로 편하다. 내 경우라면 버스 안의 일방통행 방송이 힘들다. 운전기사 마음대로 주파수 맞춘 방송을 꼼짝없이 들어야 하는 건 고역이다. 버스 안 곳곳에 TV 모니터를 달아 쭉정이 정보를 하루 종일 강요하는 경기도 버스라면 거의 최악이다. 그들을 바꾸는 것과 내 취향을 바꾸는 것. 어느 쪽이 빠를까. 말할 것 없이, 내 취향을 반성하는 쪽이 백 배 쉽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
  • [길섶에서] 찬밥/서동철 수석 논설위원

    밥을 지어 온 가족이 먹고 나면 많건 적건 찬밥이 남았다. 적어도 보온밥솥이 없었던 시절에는 그랬다. 어릴 적에는 새 밥에 뜸을 들이는 잠깐을 참지 못해 헌 밥솥 바닥 찬밥을 긁어먹었던 기억이 적지 않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후 식은 밥을 먹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서 쓰던 전기밥솥이 며칠 전 완전히 못 쓰게 됐다. 처음에는 압력밥솥이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기능은 잃어버렸다. 그래도 십 년도 훨씬 넘게 ‘따스운 밥’을 먹게 해 주었으니 명복이라도 빌어 줘야 할 판이 아닌가 싶었다. 덕분에 토요일을 집에서 보내며 점심으로 찬밥을 먹었다. 워낙 무덥다 보니 전자레인지에 데워야겠다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먹은 찬밥은 맛있었다. 역시 먹다 남은 호박전에 생선구이, 오이지는 찬밥과 잘 어울렸다. 요즘 TV를 켜면 이른바 ‘먹방’ 경쟁이 한창이다. 잘생기고 입담 좋은 젊은 셰프들은 벌써 스타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해진 셰프들의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어 보고 화면에서와 같은 감동을 한 적은 거의 없다. 따스운 밥을 기대했지만 찬밥을 먹고 온 심정이랄까. 엊그제 점심처럼 마음을 비우고 먹은 찬밥이 아니어서 그런가…. 서동철 수
  • [길섶에서] 불편한 동거/황수정 논설위원

    청거북이 두 마리가 함께 산다.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집에 들인 지 5년. 녀석들 건사하는 일은 줄곧 내 차지였다. 새끼손가락만 했던 것들이 어느새 손바닥보다 몸피가 더 굵어졌다. 끼니 챙겨 주기에 꾀가 날 때마다 생각을 고쳐 먹는다. 상대가 누군가. 장수 운(運)을 주무른다는 영물, 거북이다. “너희들 배곯리지 않으려면 내가 하루라도 더 살아야지….” 노부부가 등 쓸어 주며 주고받는 드라마 속 대사를, 내가 해 놓고 내가 혼자 웃는다. 청거북 수명이 20년이다. 기실 웃을 형편이 못 된다. 애틋하지 못한 동거를 끝내고 싶은 마음, 진작에 굴뚝이다. 생태계를 뒤죽박죽 만든다니 한강에 방생도 못 하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는 영물을 산속에 갖다 놓고 돌아설 용기도 없고. 미국 미시시피 계곡이 고향이라는데, 떵떵대며 천수 누릴 녀석들이 천덕꾸러기다. 팔자에 없는 ‘거북 봉양’에 묶인 나는 또 무슨 죈가. 아마존에, 남아프리카에 있어야 할 피라니아, 발톱개구리가 엉뚱한 데서 발견돼 사람들이 기함한다. 키우다 버리는 죄, 불가에서는 무거운 업(業)이다. 한 치 앞을 못 내다본 환경부가 여러 사람을 참 딱하게 만든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
  • [길섶에서] 낙관주의/구본영 논설고문

    우리 사회가 바야흐로 늙어 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제 통계청이 발표한 ‘인구 현황과 전망’에서 읽히는 기류다. 15년 뒤에는 국민 4명 중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이라니 초고령 사회가 성큼 다가오는 느낌이다. 하긴 서울교동초등학교의 올해 신입생은 겨우 21명이었단다. 저출산의 심각성을 알리는 징후다. 1894년 개교해 우리나라 초등학교 최고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의 명맥이 자칫 끊길 판이니 말이다. 이런 출산율 저하 추세는 과다한 사교육비 등 자녀 양육에 따른 부담감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물론 그 근저에는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배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젊은이는 희망에 살고, 노인은 추억에 산다”는 프랑스 격언이 있다. 꿈을 먹고 살아야 할 청년 세대가 지나친 비관주의에 젖어드는 건 자신들의 인생을 위해서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독일의 어느 시인은 “요람과 무덤 사이에 고통이 있다”고 했지만, 영국 시인 브라우닝은 “가장 좋은 일은 미래에 있다”고 했다. 설령 삶이 고달프다 할지라도 우리네 청춘들은 비관보다는 낙관을 벗 삼는 게 좋을 듯싶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 [길섶에서] 원인과 결과/오일만 논설위원

    한순간이다. 최근 몸을 씻다가 순간적으로 목이 삐끗했다. 인체 206개의 뼈 가운데 고작 한 개가 문제 됐을 터인데 내 몸은 하루 종일 초비상이 걸렸다. 조금이라도 목 근육을 건드리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통증이 몰려왔다. 고개를 쳐들기도 어렵고 주위를 돌아보기도 힘겹다.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마음껏 두리번거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던 일인가. 의사의 진단으로는 목뼈가 갑작스런 충격으로 근육이 놀라 신경을 건드려 통증이 온다고 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끼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앞으로 조심하라는 경고음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직립 보행 이후 수백만 년간 자연에서 뛰놀던 사냥꾼의 후예가 어느 순간부터 책상 주위를 맴돌게 됐다. 정상적인 뼈대의 모양새가 뒤틀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잘못된 뼈대를 원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근육들이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병들이 생겨난다. 등이 굽으면 가슴이 좁아져 심폐 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고개를 숙이고 다니면 목뼈가 틀어진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 며칠 병원 신세를 지면서 새삼스레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정치인과 화안시(和顔施)/최광숙 논설위원

    어색하던 엘리베이터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아래층에 사는 갓난아기가 엄마와 함께 나들이를 가나 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사촌이지만 인사도 없이 지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갓난아기가 빵긋빵긋 눈웃음을 하며 옹알이를 하면 윗집 아저씨도, 옆집 할머니도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면서 마치 한가족처럼 된다. 불경에 무재칠시(無財七施)라는 말이 있다. 돈 없이도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 수 있는 7가지를 일컫는다. 그중에 으뜸이 부드러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화안시(和顔施)다. 둘째 말로 베푸는 언사시(言辭施), 셋째 따뜻한 마음을 주는 심려시(心慮施), 넷째 호의의 눈빛으로 남을 보는 안시(眼施), 다섯째 몸으로 돕는 신시(身施), 여섯째 남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床座施), 일곱째 남에게 쉴 공간을 마련해 주는 방사시(房舍施)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사퇴를 놓고 정국이 시끄럽다. 새누리당 회의에서는 육두문자 욕설도 오갔단다. 정치인 얼굴만 봐도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사람들이 많다. 웃는 얼굴로 국민들을 좀 편안하게 하는 것도 보시라는 걸 정치인들도 알았으면 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과공(過恭)은 장애/황수정 논설위원

    아무리 노력해도 내공이 쌓이지 않는 일이 있다. 점심 메뉴 정하기다. 뭘 먹자고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어 주는 사람이 고맙다. 요즘 한창 말 많은 ‘결정장애’는 아닐 거라고 내심 우겨 본다. 누가 결정해 줄 때까지 밥을 굶고 기다릴 만큼 중증은 아니니까. 선택을 힘들어하는 소비자를 겨냥한 큐레이션(Curation) 서비스가 날개를 달았다. 직장인들을 결정장애 증후군으로 몰아넣는 주범, 점심 메뉴를 골라 주는 모바일 앱이 단연 인기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투표를 맡겨 그날의 점심 메뉴를 정한다. 고민하는 수고 없이 정해진 대로 먹어 주면 되니 참 편하기도 하겠다. 실천할 것 같지 않은 망상 한 가지. 길치인 내 머리에 입력된 길로 운전할 때와 내비게이션의 비상한 도움을 받을 때의 시간차는? ‘닥치고 내비’의 뇌 기능 퇴화 장애와 맞바꿔도 좋을 만큼일까. 그러면 천만다행이다. ‘국민 앱’ 카톡의 배려 정신이 이만저만 아니다. 안 그래도 남녀노소 코를 박게 만들면서 실시간 검색 기능까지 보태줬다. 덕분에 결정장애자들은 빠져나올 일이 더 감감해졌다. 지나친 배려가 장애를 낳는 세상이다. 고맙지 않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약(藥)비/최광숙 논설위원

    요즘 장마철이라지만 비 오는 날이 적은 ‘마른장마’다. 그러니 장마로 해갈을 기대했던 농민들의 마음은 여전히 타들어 가고 있단다. 얼마 전 오랜 가뭄에 시달리던 차에 비가 내리자 TV 화면 속 한 노인이 “약비예요. 약비!”라고 외치는 것을 봤다. 얼마나 비를 기다렸으면 비를 ‘약’(藥)이라고 표현했을까. 단비, 금비라는 말도 부족해 약 같은 비라는, 농부의 말 속에 저수지 밑바닥보다 더 쩍쩍 갈라졌던 농부의 가슴속을 짐작할 수 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는 우면산 자락에서 텃밭을 가꾸는 재미로 말년을 보내셨다. 변변한 배수 시설 하나 없이 산기슭 자갈밭을 일궈 고추와 고구마 등을 심었다. 어느 해 비가 오지 않아 비쭉 나온 채소 싹들이 내리 쬐는 햇볕에 말라 타들어 갔다. 그래서 온 가족이 발벗고 나서 멀리 떨어진 약수터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 날랐던 적이 있다. 예전에는 재래 시장에 가면 물건 값을 흥정하기도 했는데 그 이후 부르는 대로 값을 주게 됐다. 조금이나마 농부의 심정이 되고 보니 시장에서 파는 농산물들이 허투루 보이지 않아서다.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은 왜 어려움을 겪어 봐야만 생기는 것인지….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
  • [길섶에서] 콩가루/황수정 논설위원

    할아버지를 따라 논두렁에 빙 둘러 콩을 심었던 기억이 난다. 이맘때쯤. 여름비 온 뒷날 논두렁 흙이 물러지길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움직이셨다. 씨알 고르게 소복이 담긴 메주콩이 됫박째 건네지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콩 농사에 단단히 한몫 맡았다는 요량에 어린 마음이 우쭐했다. 미끈거리는 논두렁을 맨발로 살살 균형 잡아 가며 할아버지와 호흡 맞춘 환상의 복식조. 할아버지의 작대 끝에서 두어 뼘마다 논두렁은 구멍이 뚫렸고, 어린 내 손은 발랑발랑 콩을 집어넣기 바빴다. 두세 알쯤, 구멍구멍에 밀어넣는 개수는 재량껏. 깨소금 재미였다. 할아버지는 콩이 들앉힌 논두렁의 구멍을 덮는 법이 없었다. 새가 쪼아 먹든 들쥐가 까 먹든 모른 척 그저 두셨다.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서 넘겨 배웠을, 양보와 아량이었을 터. 힘센 내 방식대로 다 털어 먹겠노라 우격다짐 않는, 그윽한 품위의 관성. 논두렁 콩밭에도 있었던 지혜가 없어 저 난리들이다. 청와대나 여당이 촌로(村老)의 논두렁보다 못하다. 대통령 한마디에 자기네끼리 드잡이로 날새는 집권당을 사람들이 ‘콩가루당’이라 부른다. 콩이 아깝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개량 한복/최광숙 논설위원

    김영삼(YS) 정부 시절 한 국회의원이 사석에서 세 부류의 사람들을 ‘경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첫째, 개량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 YS와 함께 평생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고생한 그도 개량 한복을 입는 이들을 과격한 좌파로 여기는 듯했다. 둘째,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姓)을 같이 쓰는 여성. 성 두 개 쓰는 여성들을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로 봤다. 셋째, 커다랗고 색깔 있는 알반지를 끼고 다니는 남자. 조폭이나 사기꾼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때는 웃으면서 들었지만 오늘의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진 얘기다. 특히 개량 한복은 생활 속의 일상복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최근 동네 아파트에서 개량 한복을 입고 나폴거리며 걸어가는 한 여대생을 봤다. 발목까지 오는 남색 치마 위에 잔잔한 꽃무늬 저고리를 받쳐 입었다. 그 모습이 풋풋한 여배우처럼 너무 예뻤다. 지난 3월 김기종씨가 우중충한 개량 한복을 입고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를 습격한 것을 보고 25년 전 그 의원의 얘기가 생각나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누가 입는가에 따라 급진 좌파처럼, 여배우처럼 보이는 옷이 개량 한복이라는 게 안타깝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
  • [길섶에서] 잡초/문소영 논설위원

    ‘잡초와 전쟁을 벌여야겠어요.” 텃밭을 매일 기름칠하는 가마솥처럼 반질반질하게 관리한다고 정평이 난 이웃이 염려하며 지나갔다. 그 이웃의 텃밭은 잡초 제거가 끝나 푸른 것은 채소요, 붉은 것은 흙이라는 식의 조화가 있다. 그렇잖아도 맨손으로 잡초를 쥐어뜯고 있었는데, 고개 숙인 얼굴이 화끈거린다. 20평이나 관리하는 내 텃밭은 온통 푸르다. 40년 만의 가뭄이 지속하다가 지난주 장대비가 한두 번 쏟아진 뒤로 그리됐다. 모진 가뭄에 채소와 잡초가 모두 생장이 억제됐는데, 잠깐의 비로 잡초가 물 만난 고기처럼 퍼덕댄다. 낫으로 잡초의 뿌리 밑동까지 바싹 잘랐는데 언제 잘랐느냐는 식으로 자랐다. 제때 잡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잡초가 알곡보다 성장이 빨라 농사를 망치게 된다는 진리를 실감한다. 지난밤에도 장맛비가 찔끔 내렸다. 일기예보에 중북부에는 ‘마른장마’가 지속한단다. 한 친구는 ‘마른장마라니, 뚱뚱한 장마가 더 좋아요’라며 말장난을 건넨다. 찔끔 비에도 힘껏 자란 잡초의 뿌리는 한 톨의 흙먼지도 묻히지 않은 채 새하얗게 빛난다. 애벌레 같다. 잡초도 기회가 생기면 저리 힘껏 자라는데, 발전 없이 사는 국회의원이 태반이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
  • [길섶에서] 반려(伴侶)/박홍환 논설위원

    살아가면서 누구의 짝이 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마음이 통하는 동무와 함께라면 어딘들 못 가고, 무엇인들 못 할쏘냐. 함께 있으면 편안해지고, 떨어져 있으면 찾게 되는 게 짝이 되는 동무, 다시 말해 반려(伴侶)일 것이다. 배우자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겠다. 꼭 말로 의사소통을 안 해도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개나 고양이 등 동물들도 반려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다. 친구는 “얼마 전 너무 아파 집에서 배를 부여잡고 뒹구는데 아내는 TV 드라마에만 정신이 팔려 소파에 앉아 꼼짝하지 않고,강아지만 다가와 낑낑대더라”며 푸념 반 농담 반의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사실 집에서 반려동물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 배우자들이 많다고 한다. ‘진짜 반려’에 대한 믿음이 깨졌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반려(叛戾·배반하여 돌아섬)한 반려에 대한 앙갚음일까. 요즘 정치권을 보면서 반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때 너무도 돈독했던 정치적 반려에서 지금은 등을 맞대고 돌아선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모습은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정치권의 속설을 떠올리게 해 씁쓸하기만 하다. 박홍환 논설위원 stinger@seoul.co.kr
  • [길섶에서] 능소화 담장/황수정 논설위원

    능소화가 한창이다. 종 모양의 주홍 꽃송이를 매달고 여기저기 담벼락을 점령 중이다. 손톱만 한 여지만 있어도 휘감아 오르고, 골목의 발자국 소리가 궁금해 기어이 담장을 넘는 꽃. 소박한 여름꽃인 줄로만 알았는데, ‘양반꽃’이라는 별칭이 있다니 뜻밖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꽃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옛날엔 양반집 마당에만 허락됐다. 여염집에서 심었다가는 관가로 붙들려가 곤장을 맞았다. 영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닌 듯하다. 소설 ‘토지’에서 최참판댁 사랑의 담장에 피어 기세등등 권세를 대신 말했던 꽃이 저 능소화 아닌가. 서울의 북촌 한옥마을에도 많았다. 한철 빳빳이 고개 쳐들다가 미련 없이 뚝뚝 송이째 떨구는 꽃. 괴팍한 성질이 양반의 절개와 엇비슷이 닮았다. 출퇴근길 지나는 대학교의 정문 담벼락에 전에 못 보던 능소화가 만발했다. 공룡 같은 건물을 부드럽게 호령하는 자태가 참신하다. 그야말로 ‘안구 정화’다. 순한 먹거리의 ‘계절 밥상’에는 악착들을 떨면서 왜 도처의 콘크리트 담장은 두고만 볼까 생각한다. 철철이 꽃을 허락하는 ‘계절 담장’이 도시 미관용으로 어떤가. 이맘때라면 능소화만 한 게 없지 싶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망친 ‘하지 감자’/문소영 논설위원

    그제 하지 감자를 캤다. 3월 중순에 씨감자를 넣어서 100일쯤 지난 6월 23일 하지 언저리에 캐는 감자를 ‘하지 감자’라고 부른다. 최근 주말 농부들이 ‘감자가 조막만 하다’고 한탄했지만 ‘내 감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근거없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캐 보니 겨우 너덧 살짜리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다. 쪄먹기에는 너무 작아 된장찌개용이다. 게다가 아무리 깊게 호미질을 해도 몇 개 찾을 수 없다. 도시농부 6년째에 감자 흉년은 처음이다. 탄저병 등 병충해로 고추농사를 망쳐도 땅속에서 자라는 감자는 늘 통통하게 여물었는데 40년 만의 가뭄에 주말 농부의 가슴도 멍들게 생겼다. 제주도 등에서 하지 감자가 쏟아져 가격이 내렸던 과거와 달리 요즘 감자 가격은 고공행진이다. 매년 하지 감자를 캐면 오빠네와 한 상자씩 나눠 먹었는데 올해는 빈손이라 망연하다. 아일랜드 농부들의 주식은 감자였는데 19세기 중반 감자 역병이 돌아 100만명이 굶어 죽자 살아남은 150만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던 기록이 떠오른다. 7년 연속 가뭄에 사람도 잡아먹었다는 17세기 현종 때의 ‘경신 대기근’도 생각난다. 가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
  • [길섶에서] 갈급증/최광숙 논설위원

    얼마 전 지인과 함께 돈가스를 먹었다. 맛있게 한다기에 기대를 했다. 돈가스 몇 조각에 모밀 국수도 나오고 점심 식사로는 적당했다. 먹을 때는 그런가 보다 하고 먹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먹고 난 뒤 입안이 개운치가 않다. 자꾸 목이 말랐다. 모밀 국수의 육수가 짠가 하고 물을 연신 들이켰다. 그런 증상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결국 잠자리에 들기 전 초콜릿으로 입가심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극적인 인공 조미료 탓인 것 같다. 외국에 사는 지인도 한국에 들어와서 한 유명 냉면집에 다녀오더니 나와 같은 증세를 보인 적이 있다. 그때도 범인으로 조미료가 지목됐다. 그 지인은 한국의 음식점만 다녀오면 어김없이 물이 먹히고 입안이 꺼칠꺼칠해진다고 했다. 그리 미식가도 아니고, 음식에 예민한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화학 조미료에는 민감한 편이다. 어릴 적부터 조미료를 멀리해서일 게다. 요즘 유명 셰프들이 방송에 나와서 요리할 때 보면 맛소금도 팍팍 치고 하는데, 그 맛소금에도 조미료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음식, 별로 먹고 싶지가 않다. 갈급증을 불러오는 인공 조미료, 안 쓰는 집 찾기가 어렵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
  • [길섶에서] 블루베리 2/문소영 논설위원

    “남의 땅 빌려서 농사짓는 주말농부 주제에 블루베리를 두 그루나 심었다고!”라고 선배 주말농부에게 꾸중 비슷한 것을 들었다. 한해살이 농부가 무슨 배짱이냐는 지청구다. 또 혹시라도 밭을 옮겨야 하면 그 나무의 생존을 위해 포기하고 그 자리에 남겨 둬야 할 텐데 아깝다는 안타까움이다. 다른 텃밭 주인은 뽑아낼지도 모르는데 그 생명을 어쩔 거냐는 닦달도 있다. 그래도 날씨가 쎄해서 봄이 아직 멀었는가 싶은 3월 중순 모종 가게에서 우연히 본 보랏빛 도는 흰 꽃이 다닥다닥한 그 예쁜 꽃나무를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텃밭을 시작하고서 가장 큰 고민은 수확이다. 토마토나 딸기, 참외, 감자 등은 언제 어떻게 수확하는지 알았는데, 들깨나 콩·팥 등의 수확 방식은 여전히 요령부득하다. 텃밭 여기저기에 팥과 콩·들깨가 자연발생적으로 나고 자라는 이유는 수확을 못 하고 내버려 둔 탓이다. 보랏빛 블루베리도 언제 수확할지를 몰라 손가락만 빨고 있는데, 지난 주말 아침 밭에 나가 보니 보라색을 가로지르며 벌레가 베어 먹은 자국이 또렷했다. 분한 마음에 상처 난 블루베리를 따 먹어 봤다. 완전 달다. 깨달음! 블루베리는 여름철 지금 수확하는 거다. 문소영 논설위원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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