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가을, 노을/진경호 논설위원

    가을은, 어쩌면 노을의 계절이다. 아니 단언컨대 노을의 계절이다. 한낮 푸르다 못해 창백한 하늘은 그저 검붉은 절정으로 소용돌이치는 노을을 노래하기 위한 전주에 불과한지 모른다. 뜨거운 여름에 지친 해가 서둘러 제 집 찾아 먼 산을 넘을 즈음 노을은 하릴없이 빈둥대던 양떼구름, 비늘구름을 부르르 흔들어 대며 빨갛게 신열을 앓는다. 태양과 대지가 하나 돼 나누는 운우지정(雲雨之情)의 오르가즘일 수도 있겠고, 머잖아 캄캄한 어둠 속으로 스러질 모든 것들의 찬연한 저항일 수도 있겠다. 러시아 문호들에게 한없는 영감을 안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장엄한 노을에 몸서리친 적이 있다. 가끔 주말 들녘에 나가 맞는 우리의 가을 노을도 사실 이 못지않다. 미처 받아 적지 못할 만큼 수많은 시어(詩語)들이 은빛으로 반짝이며 쏟아진다. 가장 아름다울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삶의 석양을 탐욕과 시기로 일그러뜨리는 군상들이 많다. 노욕이다. 가을 저녁, 고개를 들어 노을을 꼭 봤으면 싶다. 다 타버린 노을이 캄캄한 어둠에 잠기면 비로소 하나 둘 셋, 별이 태어난다. 삶의 서사가 거기 있다. jade@seoul.co.kr
  • [길섶에서] 잊는다는 것/손성진 논설주간

    우리는 매일 기억을 저장하고 한편으로는 기억을 버린다. 기억을 버린다는 것은 잊는 것이다. 망각이다. 그리고 잊지 않는 힘, 즉 기억력은 조금씩 약해진다. 저장하는 기억보다 버리는 기억이 더 많아진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것은 잊는 것이다. 이별보다 슬픈 것은 잊는 것이다. 나 자신이건 타인이건 오래도록 기억되길 우리는 원한다.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최영미, ‘선운사에서’) 잊지 않는 힘이 점점 약해지는 나는 슬프다. 잊는 것보다 잊는 내가 더 슬프다. 슬프다기보다 서글프다. 내 궤적을 필름으로 몽땅 담는다면 얼마나 될까. 계산상으로 대략 평생이 700TB 정도 된다. 겨우(?) 그 정도인데 쇠약한 내 머리는 벌써 힘을 잃어 가고 있다. 다 돌지도 않은 필름을 되돌려 본다. 인생극화를 돌린다. 돌아가는데 중간중간 끊겨 있다. 어느 때는 내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관객이기도 하다. 나는 활짝 웃다가도 어느 순간 슬프고 화가 나 있다. 필름이 다 돈 지금 나는 더 슬프고 화가 나 있다. 아무리 해도 복구할 수 없는 끊긴 필름 때문이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돼지국밥/서동철 논설위원

    서울이 고향인 어머니는 돼지고기로는 국을 끓인 적이 없다. 자주 먹을 수는 없어도 국은 소고기였다. 물론 김치찌개에는 돼지고기를 쓰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서울을 비롯한 중부권 출신들은 자기네 집도 그랬다고 맞장구치기도 한다. 그러니 오래전 부산 여행 길에 ‘돼지국밥’ 간판을 처음 봤을 때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돼지국밥과 멀어진 계기도 있었다. 학창 시절 이웃 어르신 생신에 초대받았을 때의 이야기다. 밥상에는 검은 털이 숭숭 박힌 고기가 떠다니는 그야말로 돼지국이 올랐다. 취향에 맞지는 않았지만, 예의를 차리느라 단숨에 그릇을 비워 버렸다. 그러고 나서 다른 음식을 먹을 요량으로…. 그런데 어르신은 내 모습을 보더니 “그렇게 맛있어? 한 그릇 더 먹어!” 하시는 것이었다. 점심 때 만난 동료는 “가까운 곳에 괜찮은 국밥집이 생겼다”며 앞장섰다. 돼지국밥이었다. 물론 ‘돼지국 두 사발’의 트라우마는 떨쳐 버린 지 오래다. 깔끔하게 끓인 국밥이었다. ‘검은 털 돼지국’에 얽힌 이야기를 꺼내니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다. 추억이라는 양념이 들어가 더 맛있는 점심이었다.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호상(好喪)/황성기 논설위원

    개끼리 친하면 견주, 즉 보호자끼리도 친구가 되기 십상이다. 6년 전 진돗개 믹스견 금순이 덕분에 보호자 부부와 친해져 술도 마시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는 사이가 됐다. 길에서 떠돌던 개를 관찰하다 안타깝게 여긴 부부다. 차 문을 열어 올라타면 키우고, 그렇지 않으면 인연이 아니라 했던 부부 차에 오른 개는 그날부터 금순이란 이름을 얻고 금지옥엽처럼 지낸다. 개가 기피의 대상이 된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금순 아빠’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상가에 갔다. 언제나 함박웃음을 짓는 금순 아빠는 나를 보더니 미소 짓는다. 미소에 끌려 나도 미소를 지었는데, 순간 아차 했다. 금순 아빠도 똑같은 생각을 한 듯 웃음을 거두고 상주와 조문객으로 마주했다. 금순 아빠의 작고한 부친은 92세, 금순 엄마의 살아 계신 부친은 86세이다. 금순 아빠 엄마는 두 집을 오가며 어르신 수발을 들었다. 쉽지 않은 간병이지만, 언제나 미소 가득한 금순 아빠는 힘든 내색 안 하고, 아버지와 장인을 모셨다. ‘호상’이라 생각했는데, 어떤 이는 “부모가 돌아가신 호상은 없다”고 한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싶다.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개조심/이순녀 논설위원

    아파트 단지 대신 단독주택이 훨씬 더 많았던 과거에는 대문에 ‘개조심’이라는 경고문을 붙인 집이 많았다. 반려견 개념보다 집을 지키는 경비견의 역할이 컸던 시절이다. 좀도둑이나 행상객의 방문을 막으려고 개가 없는데도 일부러 붙여 두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어쨌거나 이 경고문이 보이면 알아서 조심했다. 기자 수습 교육을 받을 때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얘기 가운데 하나는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아니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뉴스다”였다. 기사 가치의 희소성을 강조할 때 흔히 사례로 드는 내용인데 최근 며칠째 개 물림 사고가 주요 뉴스로 다뤄지는 걸 보면 이젠 수습 교육도 바뀌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반려견 논란이 커지면서 애견인들은 산책도 맘 편히 못 나간다고 한다. 맹견 안락사를 주장하는 비애견인의 독설에 마음을 베이기도 한다. 일부 견주의 몰지각한 행동이 자초한 안타까운 현실이다. 외출 시 목줄과 입마개는 주변인에게 ‘개조심’을 알리는 무언의 배려다. 이 간단한 매너만 지키면 비애견인, 애견인, 반려견 모두가 행복할 텐데 말이다.
  • [길섶에서] 낮잠/황수정 논설위원

    객지밥을 오래 먹은 탓일까. 삼복더위에도 더운밥이라야 개운하다. 밥솥이 비었으면 삼시 세 끼 굶은 빈속마냥 따끔해지고, 괜스레 허둥지둥 서걱거리는 마음. 햇반이라는 이름의 인스턴트 밥이 상비약처럼 밥솥 옆을 지킨다. 이쯤 되면 더운밥 강박증이다. 어느 집에서 햇된장을 뜨나 보다. 열린 베란다 창 너머로 된장국 냄새가 요란하게 건너온다. 맞불을 피우듯 나도 덩달아 아욱국을 끓인다. 두어 숟갈 된장을 풀어 바글바글 끓는 소리를 울려도 본다. 집된장 시늉을 제아무리 해봤자 사다 끓인 된장은 얕아서 발등도 잠기지 않는 맛이다. 이맘때면 아침 볕에 엄마가 열고 해넘이에 할머니가 꼭꼭 여몄던 된장독. “돈 주고 먹는 깨끼밥이 살이 되겠더냐.” 볕에 잘 익힌 햇된장 아욱국에는 식은밥을 말아도 쓰린 속이 잠잤다. 사립문 닫아걸고 먹는다는 아욱국에 햇반 한 덩이를 만다. 먹어도 먹어도 거꾸로 허기지는 맛. 쌉쌀한 아욱 뒷맛을 노오란 햇된장으로 뭉근히 달랬던 엄마 손맛을 꿈에서라면 만날까. 밥상머리에 길게 누워 낮잠 한숨 배부르게 자고 싶은 가을날.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우정/이동구 논설위원

    어릴 적엔 개를 무척 좋아했지만 성인이 된 후엔 기르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일종의 트라우마라고 할까. 애완동물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면 간혹 쓴소리도 해댄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사람과 동물 간의 우정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늙은 침팬지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에 노교수가 네덜란드의 한 동물원을 찾았다. 침팬지와의 작별 인사를 위한 방문이다. 젊은 시절 침팬지 행동 연구로 만난 인연이다. 까맣게 잊고 있을 줄 알았던 늙은 침팬지는 노교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던 침팬지는 노교수가 주는 음식도 먹고 끌어안으며, 한동안 기쁨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교수와의 옛 우정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수가 떠난 지 1주일 후 그 침팬지는 눈을 감았다. 차마 입에 담기도 싫은 인면수심의 사건들이 많은 시절에 접한 가슴 찡한 사연이다. SNS 동영상을 통해 이 장면을 본 지인들은 말한다. “침팬지의 우정이 사람 못지않다”고.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5분의 기적/최광숙 논설위원

    얼마 전 광화문 거리에서 일본인 여성 자원봉사자로부터 심폐소생술을 배웠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 양손을 깍지 끼어 손바닥에 힘을 주어 인형의 가슴 한가운데를 세게 압박하라고 했다. 분당 100~120회 속도로 가슴속 5~6㎝까지 힘차게 쉬지 않고 빠르게 누르라고 했다. 총 30회 실시하라는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숨도 차고 구부린 무릎, 손바닥도 아팠다. 최근 한 음악회에서 연주하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공연을 보러 왔던 의사 2명과 간호사 1명의 릴레이 심폐소생술과 자동심장충격기 사용으로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자신의 심장이 갑자기 멈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거리, 지하철 등에서 심정지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일을 보면서 심폐소생술 교육을 의무적으로 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싶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공장소의 눈에 띄는 장소에 반드시 자동심장충격기를 배치하도록 해야 한다. 심정지가 발생한 후 4~5분이 경과하면 뇌가 손상을 입는다. 골든타임 5분의 기적을 만드는 주인공이 돼 보지 않겠는가. bori@seoul.co.kr
  • [길섶에서] 거미줄 단상/오일만 논설위원

    요염하고 청순한 자태를 자랑하던 능소화가 지고 난 뒤였다. 여름 내내 아파트 화단에서 피고 지는 능소화의 매력에 취했던 터라 아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언제부터인가 화단 한 모퉁이에 진을 치고 있던 무당거미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 보니 제법 넓게 퍼져 있는 거미줄에 다양한 곤충들이 전리품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무당거미란 놈은 호랑이라도 잡은 사냥꾼처럼 제법 큼직한 꿀벌 앞에서 거만하게 앞발을 치켜세우고 있다. 막 걸렸는지 발버둥치는 꿀벌에게 거미란 놈이 일격을 가할 찰나였다. 어릴 적 같으면 후두두 거미줄을 치웠을 법도 한데, 문뜩 엉뚱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거미줄은 이 곤충에게 밥줄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먹고살겠다고 바동대는 생명체의 밥그릇을 뺏는 것은 몹쓸 짓 아닌가. 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꿀벌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이 또한 자연의 순리가 아니겠는가. 그들의 생존 법칙에 인간이 끼어들게 되면 이 또한 생태계 교란이 아닌가. 불운하게도 생존경쟁에서 패배한 꿀벌에게 조의(?)를 표한 인간은 밥줄이 걸린 출근길을 서둘렀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속초 유감/진경호 논설위원

    가고 싶은 곳들의 공통점 하나는 ‘갈 수 없진 않지만 쉽게 가기엔 적당히 먼 곳’이 아닐까 싶다. 필자 눈으로 보면 서울 인생들에겐 속초가 딱 그런 곳이다. ‘속초 가고 싶다’는 말은 ‘떠나고 싶다’의 이웃말쯤 된다. 한데 이 ‘가고 싶은 속초’가 달라졌다.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뻥 뚫리면서 그만 ‘가기 쉬운 속초’가 됐다. 다시 말해 ‘별로 가고 싶지 않은 속초’가 됐다는 얘기다. 추석 연휴에 찾은 속초는 틀리는 법 없는 불길한 예감의 초정확성을 여실히 보여 줬다. 어느 한구석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바닷가 도시에 웬 닭강정인지 곡절은 모르겠으나 아무튼 무슨 닭강정집을 비롯해 맛집이라는 맛집 앞엔 죄다 수십m씩 줄이 늘어섰다. 속초관광수산시장은 차와 사람들이 뒤엉켜 온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관광’은 없고 ‘수산’은 서울 물가를 조롱하듯 턱없이 비쌌다. 밀려드는 손님을 주체 못하는 상인들의 달뜬 눈빛은 돈벼락이라도 맞은 양 마구 흔들렸다. 고속도로를 피해 화천, 양구, 인제를 넘은 ‘속초 가는 길’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정작 속초는 그러하지 못했다. 가기 쉬운 속초가 가고 싶은 속초를 밀어내고 있다. jade@seoul.co.kr
  • [길섶에서] 스마트폰 육아/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야, 밥 먹어. 아이, 착해.” “이모님, 팬티 좀 잘 입혀 주세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근처에서 소곤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휴대전화로 뉴스를 읽거나, 페이스북·카톡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게임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 시선에는 아랑곳없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소형 마이크에 대고 연신 뭐라고 얘기를 했다. 출근길에 몇 번 마주쳤던 30대로 보이는 ‘워킹맘’이다. 스마트폰 화면에 남자 아이가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집안에 설치한 폐쇄회로(CC)TV로 아이가 일어나 밥 먹고 노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데스크톱이나 노트북 컴퓨터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집에 두고 온 어린 자녀들이 잘 놀고 있는지 살피는 경우는 간혹 봤지만 스마트폰으로 아이의 상태를 ‘관찰’하는 ‘스마트폰 육아’는 처음 봐 낯설기도 했지만 가슴이 짠했다. 가정용 CCTV가 육아의 필수품이 된 지 오래라고 한다. 저렇게까지 하지 않고도 맘 편히 아이를 키울 수 있어야 ‘정상 사회’다. 발길도, 마음도 무겁다. kmkim@seoul.co.kr
  • [길섶에서] 황금 들녘/손성진 논설주간

    푸른 바다를 이웃해서 일렁이는 황금 들녘을 보았다. 농부의 땀이 녹아들어 빚어낸 누런 색깔은 금빛보다 더 찬란하다. 거센 해풍과 따가운 볕을 견디며 곡식을 일군 노고(勞苦)의 색깔. 나락은 영글수록 고개를 숙인다. 굽힘의 미학, 겸양지덕을 영근 벼는 품었다. 머리를 축 늘어뜨린 벼들이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것 같다. 굽힘, 곧 곡(曲)을 모르는 세상을 향해. 굽힘(曲)은 허물과도 통한다. 벼에게 허물이 있을 리 없건만 벼가 가르치는 것은 ‘사람들아, 제 허물을 알라’는 것이다. 자곡지심(自曲之心)이다. 몸속, 머릿속이 텅 빈 우리네. 그 봄, 여름에 정신을 영글도록 한 일이 무엇이던가. 수확의 계절에 늘 빈손이다. 그러면서 또 되풀이되는 게으름. 그래서 만물이 결실을 맺는 이 가을엔 부끄럽기만 하다. 어느 가을이면 영근 벼처럼 가슴이 충만해질까. 이제 저 들도 텅 빌 것이다. 곡식은 낟알을 떨어내야 하고 매서운 북풍이 벌판에 휘몰아칠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다. 봄이 오기까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가을은 그래서 쓸쓸한 것일까.
  • [길섶에서] 어느 경고문/황성기 논설위원

    서울의 어느 요양병원에 병문안을 갔다가 발견한 경고문. ‘병원 건너편 골목은 OO모텔의 출입구입니다. 환우님들께서 환자복을 입은 채 휠체어에 몸을 싣고 또는 서너 명이 무리를 지어 골목 입구에 서 계시면 모텔에 들어갈 손님이 들어가지를 못한답니다.’ 전철역에서 1분 떨어진 유흥가에 자리잡은 병원이라, ‘모텔과의 동거’가 불가피하다 주장하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병원 밖을 나갈 때마다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라는 뜻인지 아니면 아예 밖에 나가지 말라는 것인지, 환자의 인권보다는 같은 골목의 사업자를 우선하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다. 타인의 행동을 통제할 요량으로 써놓는 경고문은 섬뜩한 내용도 많다. ‘7명 이상 타면 엘리베이터 추락함’은 애교로 봐줄 수 있지만,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면 본인은 물론 집안 내 사고나 우환이 생깁니다’까지 다양하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는 어떤가. 지하철 화장실의 거울 등에 붙어 있는 문구인데 깨끗이 사용하도록 기분 나쁘지 않게 일깨운다. 뭘 하든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자전거/이순녀 논설위원

    중학생 때 자전거 타기를 처음 배우다 크게 넘어진 이후로 자전거는 늘 두려운 존재인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었다. 바구니가 달린 예쁜 자전거를 타고 동네 골목을 누비거나 강바람을 맞으며 자전거 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막상 자전거 앞에만 서면 간이 콩알만 해지니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오래 잊고 지냈던 자전거에 대한 욕망이 되살아난 건 ‘따릉이’(서울시 공공자전거) 때문이다. 버스와 지하철역에 나란히 놓인 연두색 바퀴의 자전거들이 예상치 않게 도전 본능을 자극했다. 출퇴근길 정장 차림으로 따릉이를 타고 이동하는 직장인들의 날렵한 모습이 어찌나 멋져 보이는지. 그리하여 긴 연휴의 며칠을 자전거 배우기에 투자했다. 마지막 기회다 생각하고 각오를 단단히 한 덕분인지 예전과 달리 용기가 두려움을 앞섰다. 몇 번의 좌절 끝에 한강 공원의 자전거 길을 혼자 달릴 수 있게 됐을 때의 희열이라니. 나이 들수록 자꾸 움츠러드는 나 자신에게 새삼 다짐한다. “뭔가 배우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 단지 게으를 뿐.”
  • [길섶에서] 이층버스/서동철 논설위원

    서울에서 제법 떨어진 수도권 신도시에 살고 있다. 일터가 있는 광화문을 오가는 광역버스는 출퇴근 시간에는 길게 줄을 서야 하지만 낮에는 빈차로 다니다시피 한다. 배차 간격이 짧지 않음에도 무작정 버스를 늘려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기 어려웠던 이유다. 얼마 전부터 이층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70명이 넘게 타는 이층버스가 지나가면 긴 줄도 단번에 사라진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호기심이 적지 않았다. 앞차 한두 대를 그냥 보내더라도 이층버스를 타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사이에 달라졌다. 이제 이층버스가 정류장에 다가오면 줄은 두 개로 나뉜다. 이층버스 아닌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새로운 줄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안전을 최우선으로 천천히 달리는 이층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면 뒤차에 추월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유는 그것뿐이 아니다. 런던이나 홍콩의 이층버스는 여행자의 로망이다. 서울시티투어 이층버스도 타 보고 싶다. 그런데 좌석을 늘리는 데만 초점을 맞추어 비좁은 출퇴근용 이층버스에서는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 [길섶에서] 친척 붕괴/박건승 논설위원

    최근 나온 여론조사를 보니 2008년엔 88%가 ‘친척은 편안한 존재’라고 여겼던 것이 올해는 56%로 곤두박질쳤다. 한국인 절반이 ‘친척은 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9년 전보다 ‘불편한 존재’로 여기는 비율이 훨씬 높아졌다. ‘친척 범위’도 삼촌, 이모 등 ‘4촌 이내’를 꼽은 사람이 절반에 육박했다. 친척 범위가 좁아지고 친척과의 교류가 줄어들고 있다는 증좌일 게다. 왜일까. 사촌들은 친척 어른들에게 “결혼도 묻지 말라, 시험도 묻지 말라, 취업도 묻지 말라”며 ‘잠수’를 타 버린다. 명절증후군은 며느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김 서방, 직장은? 연봉은? 아이는?…” ‘처월드’로 고민하는 사위들은 모처럼 처가 식구와 대면해도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다. 멀어진 듯 보이지만 그래도 마음 가는 것이 ‘친척’ 아닌가. 어른들이 나설 차례다. 조카 대학과 직장, 그리고 사위 연봉이 궁금하더라도 참아 넘기자. 대신 격려하자. 가뜩이나 결혼절벽, 저출산 시대를 맞아 사촌들까지 서먹서먹하게 만드는 건 죄악이다. 명절증후군이란 화두만 던져 놓고 오불관언한 것이 언론이었다. 이제 갈등을 조장하는 일은 그만두자.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길섶에서] 대추나무 아래/황수정 논설위원

    시골집 마당에서 올려다보는 가을볕에 눈이 따갑다. 그래도 대추 터는 일은 알토란만 같다. 장대로 대추나무 가지를 살살 후리면 대추 알들은 아파 죽겠다며 엄살이다. 울고 싶던 차에 뺨 맞고는 떼굴떼굴 배를 잡고 구른다. 떨어지는 그 소리, 야단스럽다. 후두둑 장대비였다가 똑똑 낙숫물이었다가. 굵은 대추 알에 정수리를 쥐어박혀도 흔감하다. 가을 바보가 되고야 만다. 딸아이가 사방팔방 튄 대추를 줍는다. 하나 먹어 볼 생각은 없이 반반한 씨알만 재미 삼아 줍더니 금세 손을 턴다. “멀쩡한 것들이 널렸는데.” 혀를 차면서 나는 아이가 줍다 만 대추를 줍는다. 반쯤 벌레 먹은 것들까지 아까워서. 남은 대추 알은 어머니가 마저 주우신다. 약 오른 풀 모기에 발목을 뜯겨 가며 구부린 등을 펴지 않으신다. 벌레가 옴팡지게 파먹어 씨만 퀭한 것도 호호 불어 곱게 담고서는 “잘 견뎠네, 익어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네.” 삶을 쓸어안는 품만큼, 인생의 깊이만큼 대추를 줍는다. 팔월의 상처, 구월의 노고를 헤아리려면 나는 한참 멀었는가 싶다. 늙은 대추나무 아래로 가만히 그득하게 고이는 시월의 저녁.
  • [길섶에서] 밤하늘/이경형 주필

    달이 눈부시다. 한가위가 며칠 지나 보름달로 충만하지는 않았지만 백색으로 빛났다. 달의 얼굴은 온통 곰보다. 크고 작은 분화구가 달 표면에 즐비하다. 360 배율의 천체망원경에서 눈을 떼자 안과에서 안구 사진을 찍은 후처럼 섬광에 노출된 눈 망막에 거뭇거뭇한 것이 끼어 있는 것 같다. 절구질하는 토끼 형상도 달 표면의 높낮이 때문에 그런 음영으로 보인 것이다. 과학이 설화와 함께 동심도 앗아 간다. 추석 연휴에 천문대를 찾아 가을 밤하늘을 훑었다. 해설자는 붉은 레이저 포인터로 밤하늘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별자리를 설명했다. 밝은 별들은 쏟아질 듯하고, 희미한 별들은 바람에 가늘게 떨렸다. 크고 작은 별들이 서로 얽혀 별자리 신화들을 이어 간다. 가을 밤하늘 한가운데서 동서남북으로 큰 사각형을 그리는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별자리가 가장 빛난다. 한여름밤 대삼각형을 이루던 직녀(거문고자리)·견우(독수리자리)와 데네브(백조자리)의 세 1등성도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별자리도 계절이 바뀌면 다른 별자리에 밤하늘의 왕좌를 넘겨준다.
  • [길섶에서] 잠 잘자는 복/최광숙 논설위원

    주변을 보면 의외로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학창 시절에는 잠이 너무 많아 어머니가 깨워 주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했던 A씨는 성인이 된 이후 잠 못 이루는 밤으로 고생한다. 안정되지 않은 직업과 불규칙한 생활을 원인으로 꼽는다. 반면 B씨는 정시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샐러리맨이다. 그런데도 수면제의 도움을 받아야 잠드는 생활을 한 지가 4, 5년 됐다. 그동안 과중한 업무와 직장 상사와의 불화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예민한 성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불면증이 된 것 같다. 그들이 잠을 잘 자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은 옆에서 보기에 딱할 정도다. 피곤해 곯아떨어지도록 열심히 움직여도 보고, 피톤치드가 나온다는 베개와 수면 안대도 사용해 보고 백방의 노력을 다하지만 여간해서 나아지지 않는 모양이다. 얼마 전 ‘삶의 행복지수’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것이 꿀잠이라는 영국의 한 설문조사를 봤다. ‘잠을 잘 잔다’는 이들의 삶의 만족도가 가장 높다는 얘기다. 돈이나 소득보다 사람의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잠. 푹 잘 수 있는 것만도 큰 복(福)이다.
  • [길섶에서] 전직 대통령/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지난 토요일자 신문들에 미국의 전직 대통령 세 명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미 뉴저지주의 한 골프장에서 열린 프레지던츠컵 대회장을 찾은 이들의 표정이 어쩌면 그렇게 편안할까. 46년생 동갑인 빌 클린턴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소속 정당과 정치 성향은 다르지만 은퇴 후 형제처럼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칠십이 넘은 두 전직 대통령 사이에서 50대 중반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아직 ‘청춘’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존경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다. 양말 모으는 게 취미인 그를 위해 지난 4월에도 캐릭터 양말을 사들고 휴스턴 자택에 병문안을 다녀올 정도로 부자 못지않게 사이가 각별하다고 한다. 미국 전직 대통령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이나 대통령도서관 개관식 같은 행사 정도다. 물론 지진과 허리케인 등 대형 재난이 터졌을 때 함께 모금활동을 한다. 얼마 전 카브리해를 강타한 초강력 허리케인 ‘어마’ 때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아버지 부시와 지미 카터까지 전직 대통령 5명이 모두 나섰다. 부럽다. 정말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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