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별것도 아닌 마광수/진경호 논설위원

    별것도 아닌 인생이 이렇게 힘들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사랑이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결혼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줄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이혼이 이렇게 복잡할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시가 이렇게 수다스러울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똥이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없네 -마광수, ‘별것도 아닌 인생이’에서 ‘별것도 아닌’ 마광수가 별것도 아닌 세상을 별나게 살다 갔다. 별것 아닌 마광수를 참 별나게 대했던 세상은 진작에 갔다. 인생, 참 별것 아니다.
  • [길섶에서] ‘왕따’의 친구/오일만 논설위원

    어느 청소년 상담 세미나에서다. 강연이 끝나고 한 학부모가 손을 들었다. 망설임의 표정이 역력하다. 어렵사리 입을 뗀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4개월 전에 한국에 돌아왔고 14살 중2 딸아이가 학교생활 적응이 어렵다는 하소연으로 이어졌다. 워낙 치열한 학업 경쟁 때문에 다들 여유가 없어선지, 전학 온 그 학급에서 누구도 딸에게 눈길을 주지 않더란다. 고민은 여기서부터다. 최근 방황하는 딸에게 손을 내민 친구가 생겼는데, 그 학생이 학교의 대표적인 왕따 학생이란다. 딸에게 친구가 생겨 좋아해야 하는데 사실 겁부터 났다고 한다. ‘그 친구와 다니다가 왕따당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었다. 상담자의 답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사춘기 예민한 시기, 누구와 사귈지는 딸에게 맡기라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간섭에 반감만 커진다. 대신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수 있는 부모가 있다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 혼란스런 사춘기, 그 힘든 여정을 혼자 겪는다는 것은 참으로 감내하기 버거운 일이다.” 깜깜한 시골길, 강아지 온기만 있어도 그 두려움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법인데...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일일 공부/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 한 권이 눈길을 잡는다. 몇 해 전 우연히 읽고 놔둔 ‘하루 한 편 삶을 바꾸는 고전 수업’이라는 부제가 달린 ‘일일공부’(장유승 저, 민음사)라는 책이다. 저자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방송됐던 한국과 동양 고전의 한 대목을 들어 시사 뉴스를 다룬 코너를 정리한 글이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어 좋았다. 특정 주제에 대해 짧지만 생각할 기회가 돼 더 좋았다. 길거나 전문적인 딱딱한 글들을 읽기 부담스러울 때, 그렇지만 뭔가 읽고 싶을 때,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 찾는 책들이 있다. 시집도 비슷하지 않나 싶다. 몇 년 전에 나온 정민 교수가 편역한 ‘우리 한시 삼백수’라는 책이 생각난다. 주변의 지인은 5언 절구, 7언 절구를 모아 놓은 이 책을 베개 옆에 놓고 잠자기 전에 꼭 읽는다고 했다. 시구든, 고전이든, 성경이나 불경의 한 구절이든, 지인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보내 준 글이든 아침에 일어나,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아니면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짬을 내 읽는 여유를 누려 보자. 그 정도는 자신을 위해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
  • [길섶에서] 결정장애/이동구 논설위원

    옷을 살 때 종종 난감함을 느낀다. 전시된 옷들을 열심히 골라 보지만 구입을 포기하기 일쑤다. 디자인은 마음에 드는데 가격이 비싸거나, 가격은 적당한데 별로 입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결국 옷은 대부분 아내가 결정, 구입하게 된다. 약간의 핀잔과 함께. 망설임은 일상이 되고 있다. 점심이나 술자리를 정할 때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짜장면과 짬뽕을 선택하기 어려워한다는 그 소심함이 생겨난 것. 간혹 좋아하는 노래의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 것도 같은 증세라 짐작하며 나날이 작아지는 존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흔히들 말하는 결정장애가 찾아 온 것이 아닐까 걱정이다. 선택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망설임이 있게 마련. 진로 문제, 주택 구입, 직장 등과 관련된 중요한 선택이라면 더욱 더 심사숙고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이를 진지하고 신중한 삶의 자세로 믿었지만 언제부턴가 “글쎄요”로 바뀌었다. 호불호(好不好)가 분명한 사람이 부러워지기 시작한 것. 감정 표현과 의사결정을 명쾌하게 하는 삶의 방식에 공감이 간다. 자신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르지만.
  • [길섶에서] 가수의 죽음/손성진 논설주간

    포크 가수 조동진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문득 그 시절을 떠올리며 아쉬워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리라. 그 시절이란 ‘행복한 사람’, ‘제비꽃’ 같은 고인의 명곡을 듣고 따라 부르던 수십 년 전의 아련한 젊은 시절이다. 나에겐 꽃이 피고 낙엽이 떨어지는 교정을 무심히 오갈 때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던 ‘행복한 사람’이라는 노래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별을 하고 이 노래를 들으며 소주잔을 기울였을 그때의 청춘들도 어느덧 육십을 바라보고 있을 게다. 세월은 유수처럼 흘렀다. 나이 듦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려 해서인지 시간의 흐름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지내 왔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가수들의 간헐적인 죽음이 그 시절로 되돌려 준다. 그래서 가벼이 스쳐 넘기지 못한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이라 했던가. 아니, 세월은 가도 옛날은 더욱 또렷해진다. 다만, 잊고 살 뿐이다. 나쁜 추억만 남은 게 아니라면 더러 주옥같은 그 시절의 노래를 들으며 회상에 잠겨 보는 것도 고운 석양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좋을 수 있다. 나에게도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자족하며.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잔혹/진경호 논설위원

    인터넷을 떠돌다 ‘충왕전’이라는 걸 늦게 알았다. 사슴벌레, 지네, 장수풍뎅이, 전갈, 사마귀, 장수말벌, 하늘소 등 한덩치에 한주먹(?) 하는 곤충들을 유리 상자에 넣어 싸움을 붙이고는 어느 쪽이든 죽음을 맞을 때까지 지켜보는 ‘놀이’다. 일본에서 한때 크게 유행해 진행자와 해설자까지 붙어 TV로 중계까지 했다니, 그들의 잔혹함과 옹색함이 새삼스럽다. 하기야 그들만 손가락질할 일도 아니다. 우리도 지방 어느 구석에선 여전히 투견과 투계가 벌어지고 피 묻은 판돈이 오간다. 전승무패의 복서 메이웨더와 종합격투기 선수 맥그리거가 벌인 3450억원짜리 격투에 세상이 들썩였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 도시 파에스툼에 그려진 벽화에 검투사가 나오는 걸 보면 싸우고 죽이도록 디자인된 인간의 유전자는 분명 인간이라는 운반체보다도 더 오래 지속될 것만도 같다. 궁금해진다. 인간의 이 ‘싸우고 죽이기’ 유전자가 언젠가는 인공지능(AI)에 이식되지 않을까. 그래서 수만의 로봇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간 검투사들이 목숨 걸고 피 흘리며 싸우게 되지는 않을까. 한낱 공상일까.
  • [길섶에서] 가전제품의 은퇴/황성기 논설위원

    10년 이상 써 온 청소기의 흡입이 신통치 않아 살펴보니, 이리저리 휘둘려 온 호스 부분이 찢어져 있다. 빨아들이는 공기가 샜으니 청소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은 물론이다. 애프터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다. “오래된 제품이라, 부품 판매나 수리가 안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라는 대답. 아무리 오래된 제품이라고 해도 수리를 안 해 준다니 어이가 없다. 테이프를 붙여 ‘연명치료’를 한다. 먼지를 모으는 종이봉투도 품절이라고 하니, 모터가 멀쩡해도 청소기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랬더니 습도가 높은 날이 지속된 얼마 전 TV가 갑자기 꺼진다. 여름철이면 같은 증상이 생겨 십수만원의 수리비를 들여 고쳤다. 기사를 불러 고칠까도 했지만, TV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 없어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니 다음날 배달되어 온다. 지난 30년간 2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했던 터라 오래된 가재도구가 없다. 10년간 동고동락한 TV의 은퇴, 곧 은퇴하는 청소기를 보면서 괜히 마음이 언짢다. 손에 익은 물건, 그리고 기억도 버리고 사는 게 인생이란 지혜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말이다.
  • [길섶에서] 건강검진/이순녀 논설위원

    지난 토요일에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다. 매년 미루고 미루다 연말에 가서야 허겁지겁 해치웠는데 올해는 여유 있게 하자 싶어서 서둘렀다. 당겨서 해 보니 좋은 점이 많았다. 연말에 비하면 검진자가 적다 보니 좀더 쾌적한 환경에서 검진을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기 싫은 숙제를 끝마쳤다는 홀가분함이 좋았다. 검사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검진을 받는 동안 언제나 그렇듯 후회와 불안이 수시로 교차했다. 지난번 검진 결과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조금 높게 나와 한동안 집에서 양파 주스를 만들어 먹다 중단했는데 혹시 이번에도 높게 나오지 않을까. 삼겹살을 덜 먹었어야 했는데. 계단 오르기라도 열심히 할 걸 그랬나?. 까마귀도 아니고 어떻게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검진 결과가 나올 때마다 1년치 헬스장 이용권을 끊고는 한 달에 두세 번 갈까 말까인 대책 없는 게으름, 너무 쉽게 식욕에 굴복해 버리는 나약한 의지. 건강도 공부와 마찬가지다. 꾸준히 준비해야지 벼락치기는 안 통한다. 열흘 뒤에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지 조마조마하다.
  • [길섶에서] ‘페북’ 불청객/박건승 논설위원

    이런저런 정보를 얻기에 페이스북만 한 게 없다. 명쾌한 논리와 신념의 목소리를 간혹 접할 수 있어 좋다. 연락이 끊겼던 옛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건 보너스를 받는 기쁨이다. 그렇다고 적극적인 ‘페북’ 이용자도 아니다. 기껏해야 ‘좋아요’를 누르거나 ‘멋집니다’ 정도의 댓글을 남기고, 좋은 사진과 글을 보면 동의를 얻어 공유하는 정도다. 절친과는 ‘페친’을 맺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입만 열면 ‘자랑질’하는 사람, 극단·편향적 이념의 소유자도 예외일 수 없다. 잊을 만하면 ‘어제저녁 무슨 고급 안주를 곁들여 몇 년짜리 코냑을 마셨다’는 따위의 사진을 올리는 이들, 특히 그런 몇몇 대학교수는 불편하다. 그들의 식도락을 탓할 자격은 없으나 그 시간에 제자들이 백수 신세로 거리를 떠돌고 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언짢다. 차라리 티라도 내지 말고 마시면 될 걸?. 앞으론 이런 부류와도 페친할 생각이 없다. 요즘엔 웬 ‘미군 병사’들까지 대여섯 명씩 가세해 친구 요청 건수가 열 개를 넘기는 날이 많다. 그렇다고 보는 족족 삭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페북을 대청소한 뒤 ‘페친 권리장전’이라도 만들어 띄워야 하나.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길섶에서] 오로지 지금/황수정 논설위원

    손 글씨를 쓸 일도 보여 줄 일도 드문 세상이다. 종이에 글씨를 써야 할 때는 무르춤해진다. 마음먹은 필치는 온데간데없이 각(角)이 뭉개진 글꼴. 내가 써 놓고는 내가 멋쩍다. 야무졌던 글씨체가 무너지니 속수무책이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 시간이 얼만가. 자판 탓만도 아니다. 잘못은 속도 강박이다. 펜을 잡으면 머릿속 회로는 자판의 속도로 손 글씨를 쏟아내라며 우르르 몰아붙인다. 글씨가 제 매무새를 다듬을 틈이 없다. 생활의 이력은 필체에도 깃든다. 동동거리는 조급증에 글꼴의 맵시를 뺏겼다. 삶의 빠듯한 동선을 들키나 싶어 누가 안 봐도 버릇처럼 민망해지고. 일없이 굴러다니는 공책에 묵혀 둔 만년필을 갖다 댄다. 속도의 폭력에 퇴행한 글씨에게 명예를 되찾아 주려 한다. 속력의 횡포에 주눅 들지 말 것. 지금 이 순간 쓰고 있다는 생각만 오로지 할 것. 가장 중요한 때는 ‘지금’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것. 제 발로 지금을 걷어찬 흔적. 망가진 손 글씨를 돌보며 한 수 챙긴다. 말로 퍼주고도 되로 돌려받는 줄 모르는 계산 착오가 삶에서 어디 손 글씨뿐일까.
  • [길섶에서] 사장님과 샐러리맨/최광숙 논설위원

    같은 사람이라도 처한 위치에 따라 처신이 달라진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럴 줄을 몰랐다. 오랫동안 지켜보던 한 대학병원의 의사는 평소 환자들에게 까칠하게 대했다. 교수까지 겸한 의사이다 보니 그는 전형적인 ‘갑’의 자세가 몸에 밴 듯했다. 그러던 그가 얼마 전 퇴직 후 개업을 해 그곳을 찾았더니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전에 보지 못했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진료하던 환자가 개업한 병원을 다시 찾아 줬으니 반갑기도 했을 터. 예전에는 뭘 물어봐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더니?. 게다가 그는 처음 마주하는 환자인 양 아주 기초적인 사안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오랫동안 진료를 받았어도 한 번도 듣지 못한 얘기들이다. 물론 ‘초치기’ 진료를 하는 대학병원과 개인병원이 다르긴 하지만 그를 이곳에서 처음 만났더라면 아주 친절한 의사로 여길 정도로 태도가 확 바뀌었다. 한 할머니도 “개업하더니 다른 사람이 됐네”라며 어리둥절할 표정을 지었다. 내 사업을 하는 것과 월급을 받는 것의 차이가 이거구나 싶다. 새삼 ‘주인 의식’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그다.
  • [길섶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서동철 논설위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가 번쩍 뜨였다. 소싯적에 즐겨 들었던 영국 클라리넷 연주자 레지널드 켈의 브람스 소나타였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에 육박하는 연주자가 모노로 녹음한 음원이니 요즘은 듣기가 쉽지 않다. 이 연주가 좋아 클라리넷을 연습한다고 동네를 시끄럽게 하기도 했다. 끝까지 비슷한 소리도 낼 수 없었지만?. 반가운 마음에 운전을 하면서 듣겠다고 USB에 다운받았다. 엊그제 절에 취재 가는 길, 기대를 안고 USB를 자동차의 음향기기에 꽂았다. 그런데 클라리넷 소리는 갈라져 음정을 잃었고, 피아노 소리도 뭉개져 나왔다. 기본형 자동차의 초보적 음향기기 탓이다. 돌아보니 어린 시절 큰형과 방을 함께 쓰는 바람에 ‘클래식 음악 고문’을 당하기 시작했다. FM도 아닌 AM 라디오가 하루 25분 내보내는 프로그램이 유일했다. 작은 휴대용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잡음이 절반을 넘었다. 그런데도 오래지 않아 그 ‘고문 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 ‘내 귀가 건방을 떠는구나’ 생각하며 USB를 다시 꽂으니 음악 소리는 갈 때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능소화 단상/오일만 논설위원

    올해 여름은 능소화(凌霄花)에 취해 살았다. 유난히 비도 많았던 여름, 아침마다 물기를 머금은 주황색 향연에 빠졌다. 능소화와 처음 대면한 것은 지난 겨울쯤일 것이다. 앙상한 가지 몇 가닥이 아파트 화단에서 1층 창틀을 휘감고 있었지만 정체를 몰랐다. 언제부턴가 볼품없이 말라 비틀어진 줄기에서 잎이 나더니 여름철에 접어들자 실로 놀라운 자태를 뽐내는 것이 아닌가. 풋풋하면서도 농염한 묘한 매력이 눈길을 끌었다. 인터넷을 뒤졌다. 한자부터가 특이했다. 능멸할 능(凌)과 하늘 소(霄)를 쓴다. 하늘을 능멸할 정도로 뻗어 오르는 기상 때문에 ‘양반꽃’이라는 별명도 있다. 꽃말은 그리움·기다림인데, 슬픈 사연이 있다. 궁궐에 살던 소화(霄花)라는 궁녀가 임금에게 버림받고, 그 넋이 꽃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시들어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활짝 핀 자태 그대로 꽃을 떨군다. 한껏 최고조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 순간 생을 끝내는 가인의 풍모가 있다. 매혹적인 꽃 속에 독을 품고 있다고 하니 궁녀 소화의 한(恨)이 아직 풀리지 않은 까닭일 것이다.
  • [길섶에서] 골무 낀 손가락/이동구 논설위원

    조선 후기의 작품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에는 골무를 ‘감투할미’로 묘사했다. 바느질을 위해 늘 곁에 둬야 하는 ‘여인들의 필수품’ 중에 골무는 주인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다. 고운 자수를 놓거나 바느질할 때 손가락을 보호하려는 것이니, 어느 집 바느질 바구니에나 한두 개쯤은 있었다. 요즘은 직접 바느질하는 주부들이 그리 흔치 않으니 가정 필수품으로서의 골무는 그 빛을 잃어 가고 있다. 골무는 이제 바느질 이외의 다른 용도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종이 등 서류를 많이 취급하거나 손가락을 쉴 새 없이 사용해야 하는 생산 현장의 근로자들은 고무로 만들어진 골무를 이용해 작업 능률을 배가시킨다. 그래서일까. 골무를 낀 손은 왠지 일을 더 열심히 하고 꼼꼼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도 한다. 아침 신문에 실린 대법원장 후보자의 골무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도 이 때문일까. 청색 고무 골무를 낀 엄지손가락으로 재판 서류를 움켜잡은 사진 한 장에서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가족들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던 우리 어머니들의 옛 모습이 떠올랐다.
  • [길섶에서] 대통령의 전역 선물/김균미 수석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일 42년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한 이순진 전 합참의장에게 ‘깜짝 선물’을 했다. 캐나다 왕복 항공권 2장이다. 긴장의 연속인 군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해외여행을 가지 못한 이 전 의장 부부를 위해 딸이 사는 캐나다에 함께 다녀오라는 문 대통령의 마음의 선물이었다. 대통령의 아이디어든, 참모의 아이디어였든 잔잔한 감동을 준 특별한 선물이다. 이 전 의장은 지난달 18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군 지휘부 초청 오찬 때 “42년간 마흔다섯 번 이사를 했고 동생들 결혼식에 한번도 참석 못했다”며 분단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살아가는 애환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 말에 감명받은 문 대통령은 송영무 국방장관에게 살짝 전역일을 묻고는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이 전 의장은 이임사에서 참모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한 뒤 아내와 자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목이 멨다고 한다. 공관병 갑질 논란으로 군 장성들을 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요즘, 명예로운 군인으로 물러날 수 있게 도와준 가족들을 떠올리며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 [길섶에서] 삼겹살/이동구 논설위원

    소주를 즐기는 편이라 삽겹살을 안주로 자주 먹는다. 다른 안주에 비해 취기를 조금이나마 더디게 하는 데다 값도 저렴해 좋아한 지 오래됐다. 혼술이든, 지인들과 함께 하든 ‘삼소’(삼겹살과 소주)는 단골 메뉴이다. 그 덕에 배는 남들보다 두 배 가까이 더 불룩해졌지만 여전히 멀리하기 힘들다. 저렴한 가격, 간편한 요리, 고소한 맛 등을 ‘삼겹살의 3대 매력 포인트’라 평한다. 가족 외식은 물론이고,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에도 최우선 순위로 올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죽 좋아했으면 요즘 직장인들은 삼겹살을 먹는 ‘삼겹살 데이’(3월 3일)를 따로 정해 놓기까지 했을까 싶다. 최근엔 삼겹살이 금겹살로 불린다고 한다. 야외활동이 잦은 여름철이라 삼겹살을 찾는 이가 늘어나 종전보다 값이 많이 올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AI(조류인플루엔자)에 이은 살충제 달걀 사태로 ‘치맥’(치킨에 맥주)마저 궁지에 몰리자 삽겹살의 인기는 기세등등이다. “세상사 모든 게 절정일 때 조심해야 된다”고 했는데, 삼겹살이라도 가격인상 등의 유혹을 잘 견디며 오래오래 가까이 있어 주었으면….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이등병의 전화/진경호 논설위원

    ‘나팔소리 고요하게 밤하늘에 퍼지면~ 이등병의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보내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이거 옛말이다. 이젠 문자를 보내고 통화를 한다. ‘아들입니다. 전화 주세요.’ 입대한 지 여섯 달 된 둘째도 문자를 애용한다. 잘 있다는 얘기 끝에 슬그머니 ‘면회 요청’이 따라붙기도 한다. 제아무리 군 생활이 편해졌다지만 그래도 신병은 신병일 터. 고달픈 일상에서 잠시 숨통을 틔울 수단은 그나마 면회 아니겠나 싶어 득달같이 달려간다. 많이 달라졌다. 에어컨 빵빵한 면회장엔 배달시킨 피자와 치킨, 탕수육과 짜장면이 테이블마다 가득하다. 죄다 아들 같기만 한 신병들은 저마다 부모형제가 들고 온 스마트폰을 움켜쥐고 친구들에게 ‘이등병의 문자’를 보내기 바쁘다. 부모의 눈길은 아들을 향하고, 아들 눈길은 스마트폰을 향한다. 부모 질문은 조심스럽고, 자식들 답변은 시크하다. 부대 밖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북한발 혼돈을 아들은 알까. “알아요. 뉴스도 보고….” 담담하다. “그래도 걱정 마세요. 괜찮을 거예요.” 대견도 하고, 든든도 하고, 걱정도 되고?. 그래? 그렇지? 그래야겠지… 꼭!
  • [길섶에서] 달맞이꽃 천지/이경형 주필

    둑길 가장자리 길섶과 비탈진 언덕을 따라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제방 여기저기서 군락을 이룬다. 밤이 되면 피기 시작하고 낮이 되면 지는 꽃, 그래서 달맞이꽃을 야화(夜花), 월견초(月見草), 야래향(夜來香)이라고 했던가. 밤이 되면 생기가 솟는 ‘밤의 꽃’은 강인한 것 같지만 실은 애처로운 존재다. 이른 아침 산책길은 청초한 모습을 간직한 달맞이꽃 천지다. 이따금 개망초의 하얀 꽃들이 드문드문 피어 있긴 하지만 무리 지어 피는 달맞이꽃의 위세에 눌려 빛을 발하지 못한다. 여름 내내 키가 자라 노란 꽃을 머리에 이고 있는 달맞이꽃은 소리쟁이, 진동싸리, 박주가리, 벌노랑이 등 다른 풀꽃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 들꽃도 저마다 절정의 시기가 있다. 4계절 공릉천변을 걷다 보면 이른 봄엔 민들레, 제비꽃, 꽃다지 등속이 그들의 세상을 구가하고 늦은 봄엔 애기똥풀이 왕성한 노란색의 군락을 자랑한다. 사람도 저마다 인생의 절정기가 있을 것이다. 들꽃도 사람도 절정기는 짧은 법이다. 그 절정기를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갈린다.
  • [길섶에서] 괌 위협 유감/황성기 논설위원

    미국령 괌에 대한 북한의 ‘포위 사격’ 협박을 놓고 전문가들의 내기가 한창이다. 중국 베이징의 지인은 “90%의 확률로 쏜다”고 장담한다. 일본에서는 “21~23일 사이에 쏠 것”이라는 정보가 돌아다닌다. 국내에서도 “쏜다”, “못(안) 쏜다”가 엇갈린다. 지난해 망명한 태영호 주영국 북한 공사 같은 이는 후자 쪽이라고 한다. 굳이 건다면 ‘못 쏜다’이다. 명운을 걸고 개발한 미사일이 미국의 미사일 요격망에 걸려 떨어진다면 몽땅 폐기해야 한다. 그런 리스크를 알고도 쏜다면 바보일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의 주역 고노 요헤이(80) 전 중의원 의장의 일본 가나가와신문 15일 자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어 처음 나간 외국이 괌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괌에서 사망한 일본군 유골의 수습 상황 조사가 목적이었는데 해골로 가득한 참상, 심지어 굶어 죽은 유해도 목격했다. 고노는 말한다. “이런 비참하고 어리석은 일은 절대로 안 된다고 다짐했다. 정치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모든 걸 걸어서 막겠다는 우리 정부의 의지, 그것이 정치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 [길섶에서] 피서지 식당/서동철 논설위원

    전라도 지역 출장을 많이 다녔지만 음식에 ‘배반’당해 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다른 지역에서는 금기인 역전이나 시외버스 터미널 음식조차 맛이 덜한 적은 있어도 인심이 사나웠던 기억은 없다. 그래서 전라도 지역 곳곳에는 마음속 단골 음식점이 몇 있다. 그런데 며칠 전이다. 회사 일로 전라도 해안 지역을 찾았다. 조개가 많이 나는 것으로 유명한 고장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주문을 했다. 마침 유명한 해수욕장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인지 가게가 메워지다시피 손님은 많았다. 간단한 음식을 시켜서 그랬겠지만 반찬은 딱 네 가지였다. 콩나물 무침과 미역 줄거리 무침, 무말랭이와 김치다. 가짓수 적은 게 문제가 아니라 전라도 솜씨가 아니라 서울식 구내식당 솜씨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맛이라면 멀지 않아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예외로 전라도식이었던 묵은지 한 가지로 밥을 먹었다. 전라도식, 서울식은 왜 따지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한 끼의 즐거움을 빼앗긴 셈이었다. 전라도 식당이 아니라 휴가지 식당이어서 그렇겠거니 스스로를 위로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