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분신(分身)/이경형 주필
서울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 들렀다. 화폭은 산맥, 오솔길, 계곡, 숲, 들꽃, 밤하늘의 은하수, 메밀꽃밭으로 둘러싸인 외딴집 등 강원 산간 풍경들로 가득했다. 유화물감을 나이프로 찍어 켜켜이 쌓아 올려 캔버스 표면은 두툴두툴하기 그지없다.
작가는 “내 옆에는 늘 어린아이가 있다”고 했다. 그 아이의 얼굴은 산속 옹달샘에 어린 달님 같고, 여린 몸은 신새벽에 처음 우는 종달새의 몸짓을 닮았단다. “나는 늙어 가고 21세기 문명에 지쳐 정신 줄을 놓고 있는데, 아이는 나의 손을 끌고 별을 헤며 오솔길을 걷는다”고 했다. 작업의 영감을 그의 분신에게서 얻는다.
일상의 삶이 답답할 때, 나의 분신은 여행을 한다. 군불 땐 뜨끈뜨끈한 고택 온돌방에 누워 옛 선비의 미학을 더듬어 본다. “시를 짓는 것(詩法)은 차가운 샘물에 비견된다. 돌에 부딪히면 흐느껴 울부짖고, 못에 고이면 거울처럼 비치더라.” 조선 초기 학자 김시습이 관서 지방을 방랑할 때, 후학과 문답을 하면서 한 말이다. ‘시법’은 곧 글을 쓰는 것이 아닌가. 분신이라도 잠깐 여행을 하고 나면 머리가 맑아진다.
이경형 주필 khlee@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