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수신제가/이동구 논설위원

    제대로 된 가장이라면 가정을 평안하게 꾸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 자신을 비롯해 아내와 자식의 행동거지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큰 결핍이 없어야 훌륭한 가정을 이뤘다고 할 것이다. 인사 청문회나 공직자 재산공개를 볼 때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인물들이 있다. 국가의 경제, 산업, 행정 등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후보자임에도 정작 자신의 가정 형편은 엉망인 경우를 종종 본다. 반대로 어떻게 축적했는지도 불분명한 재산을 너무 많이 가진 이들도 있다. 개중에는 부동산 투기 등 편법적인 축재가 탄로 나 망신을 당하는 인물들도 있다. 자식의 일탈로 국민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대신 사죄하는 공직자도 있다. 철이 들어 가는 것일까. 남편으로서, 부모로서 제 역할 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내세울 만한 업적도 없다.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알려 준다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하라는 가르침에는 한참 모자라는 삶이다. 국민을 대표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가끔은 부럽다. 적어도 그들은 수신과 제가를 이미 마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에….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길섶에서] 긍정과 만족/손성진 논설주간

    나쁜 일이 닥쳤을 때 이겨 내는 방법이 있다. 그보다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어쩌다 다치는 사고를 겪어도 “그만하기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가르침이다. 행복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다.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면 자신이 불행해 보이고 못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고 받아들임의 차이에서 행과 불행이 갈린다. 예순의 나이는 쉰을 보면 늙었지만 일흔을 보면 아직 젊다. 만족을 모르면 끊임없는 욕심에 시달린다. 수십억의 돈을 가졌더라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면 수백억을 부러워하고 더 큰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한다. 끝도 없는 욕심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탐욕의 늪에서 허우적댄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인생을 즐겁고 풍요롭게 한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소찬(素饌)과 막걸리 한잔도 고마워하라. 산해진미보다 더 맛있게 느껴지리라. 아프지 않고 두 다리로 어디든 갈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라.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벌초/진경호 논설위원

    “어 왔어?” “예.” 어제도 봤던 사람들처럼 인사를 나눈 사촌들은 곧바로 머리를 박았다. 대량학살의 시작, 잔디가 아니다 싶은 녀석들은 야멸차게 뽑혀 나갔다. 네 시간에 걸친 침묵의 학살이 끝나고 논산 어느 야산의 가족묘엔 주검(?)이 즐비했다. 뿌리째 뽑힌 놈, 완강하게 버틴 끝에 밑동만 내준 놈, 숨겨 놓은 가시 덕에 잎사귀 몇 잎만 잃은 놈…, 잡초들의 운명이 갈렸다. 알 길 없는 조상들 저승살이 대신 왜 잡초고, 왜 잔디며, 잡초는 왜 뽑혀야 하는지를 내내 하릴없이 물었지만 부쩍 게을러진 햇살은 언제나 그랬듯 답을 주지 않는다. 몰라 물은 것도 아니니 모를까 답할 까닭도 하긴 없었다. “가려고?” “예, 차 막혀요.” 1년에 한두 번 볼까 싶은 사촌들은 언제나 그랬듯 내일 볼 것처럼 인사하고 흩어졌다. 차가 밀린다. 라디오에선 언제나 그랬듯 벌초 행렬 때문이라는데, 늘어선 차들 붙잡고 물어보기나 한 걸까. 단언컨대 언제까지 그렇진 않을 듯하다. 세상만큼 추석도 변했다. 느슨한 관성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잡초 무성한 이웃 산소들이 눈에 밟힌다. 황금연휴다. 추석이 낀….
  • [길섶에서] 박물관 꼬마 손님/서동철 논설위원

    주중 낮 박물관에서는 휴일에는 보기 어려운 모습을 만난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아이들이 현장학습을 하는 풍경이다. 출산율이 바닥에 떨어져 아이 울음소리 듣기 어려운 나라가 됐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박물관을 찾아 재잘거리는 모습이 반갑다. 오래된 것이 모여 있는 장소에 아이들이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도 하고 있다. 엊그제는 한 지역 시립박물관에서 아이들과 마주쳤다. 유물이 부족한 것은 대부분 지역 박물관이 안고 있는 고민이다. 설명 위주로 되어 있는 전시를 돌아보자니 어른도 인내가 필요했다. 서너 살짜리 아이들에게 이런 박물관 관람이란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전국 지자체가 다투어 박물관을 짓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외지 관광객이 중요하겠지만 우리 동네 어린이 손님에게도 ‘서비스’가 필요하다. 평일의 지역 박물관은 사실상의 어린이 박물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연히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꼬마 손님을 위한 전시와 프로그램 개발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지역 사회에 공헌하는 최고의 문화 공간이 될 수 있다.
  • [길섶에서] 가을 남자/오일만 논설위원

    대체로 남성들이 가을철에 민감한 감정 변화를 겪는다고 한다. 평소와 달리 감상적인 생각에 젖을 때가 많아지고 때론 허무감과 좌절감이 짙어 오기도 한다. 이런 변화에 대해 동서양의 진단은 다르다. 서양 의학에서는 호르몬으로 설명한다.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로 접어들면서 신체가 흡수하는 비타민D가 적어져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세로토닌과 엔도르핀의 합성이 저하된다. 더욱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저하되면서 남성들이 유독 가을철에 외로움과 쓸쓸함이 크게 느낀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음양의 이치로 설명한다. 양기가 가득 차는 봄이 오면 음의 성질을 지닌 여성들이 본능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반면 음기가 차는 가을엔 양기가 강한 남성들이 강하게 반응한다는 것이 주역의 설명이다. 동서양을 떠나 가을 남자들에게 유용한 것은 야외 활동이다. 햇볕을 쬐며 비타민D를 흡수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의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행복의 정복’의 저자 버트런드 러셀 역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외부 활동과 산책을 권하는 이유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아침 사람들/황성기 논설위원

    개와 함께하는 아침 산책에 늘 마주치는 분이 있었다. 회사 앞을 빗자루로 쓸고, 그날 준비를 했던 60대 초반의 남자다. 눈으로만 주고받던 인사가 어느 날부터 가벼운 얘기도 나누는 사이가 됐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일했던 곳은 중국인 상대로 보석류를 팔던 가게였다. 가게 앞에 장사진을 치던 관광버스의 유도와 정리가 일이었다. 6개월 전쯤일까. 사드 보복으로 “오는 중국인도 직원도 줄고 있다”는 얘기를 근심스럽게 했던 그가 한 달 전 아예 모습을 감췄다. 대신 비슷한 시각 편의점에 물건을 트럭에 싣고 와 공급해 주는 40대 남자와 친해졌다. 운전대에 얼굴을 묻고 자는 모습도 봤다. 얼마나 피곤하면 그럴까. “몇 시에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전날”이란다. 전날 밤 10시부터 물건 공급을 시작해 20군데를 돌고, 시외 물류기지에서 물건을 채워 집으로 가면 오후 3시. 그때부터 잠자리에 들어 다시 밤 10시에 나오는 생활이라고 한다. 짧은 산책이지만 ‘안녕하세요’는 기분 좋게 한다. 시간이 엇갈려 개를 귀여워해 주는 남자를 보지 못하는 날은 조금 걱정도 된다. 인지상정이겠지.
  • [길섶에서] 인연/이순녀 논설위원

    나이 들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 깊은 인연을 맺기가 쉽지 않다.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오히려 인연의 소중함을 소홀히 여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그릇이 작은 탓에 나와 결이 다른 낯선 이들을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익숙해서 편한, 오랜 교류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려는 성향이 강한 편이다. 일요일 밤에 즐겨 보는 예능 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서 뜻하지 않게 인연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짧게는 2박3일, 길게는 일주일씩 머무는 손님들과 민박집 주인 이효리 부부가 나누는 교감은 방송용 인연 그 이상의 따뜻한 정서적 공감대를 느끼게 했다. 한참 어린 후배 아이유와 이효리의 인연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이 아닌 아이유에게 쏟아지는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효리는 “이제야 후배들보다 뒤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연습하게 된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신이 너를 보내 주셨나? 나한테 그 연습 하라고? 너한테 진짜 고맙다.” 누군가에게 신의 선물 같은 인연의 경이로움을 새삼 되짚는다.
  • [길섶에서] 모르는 꽃/황수정 논설위원

    가을 초입을 촛불처럼 밝히고 섰다 떠나는 꽃이 맥문동이다. 보라색 촛대 모양 꽃의 정체는 몇 년 만에야 알았다. 식물도감을 뒤지리라 마음만 먹고는 번번이 놓쳤다. 해를 묵히고 마음을 곰삭혀 마침내 통성명했던 나의 가을꽃. 공원 모퉁이에 일없이 서서 얼마나 득의에 찬 눈길을 주는지, 맥문동은 잘 안다. 저하고 나만 아는 애틋한 일. 혼자 오래 속 태우다 통성명한 꽃이 또 능소화다. 붉지도 노랗지도 못해 엉거주춤 수줍은 주홍꽃. 오가는 담벼락이 야단스러워지면 저런 요염한 꽃을 누가 내놓았나, 얼굴 본 적 없는 집주인이 다 궁금했다. 이름을 몰라 속정이 먼저 깊었던 꽃, 나의 여름꽃. 휴대전화로 꽃을 찍으면 대번에 이름을 찾아주는 장치가 있다니. 모르는 꽃이 없어졌다는 것은 그리울 일이 없다는 것. 맥문동, 능소화를 기다리지 않는 것. 나의 꽃이 없어지는 것. 억새와 갈대를 분간 못해도 괜찮다. 계절 어느 쯤에 발목이 잠겨야 억새는 만개하고 갈대는 만발하는지. 억새를 들추지 않고서 시월을 기다리기를. 갈대가 궁금해서 가을에 더 바짝 다가서기를. 한 줌 볕도 놓치지 않기를.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길섶에서] 긍정의 힘/최광숙 논설위원

    누구나 어둠보다 햇살을 좋아하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러모로 배울 게 많은 선배가 하는 말이 있다. “주변의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나한테 유리한 것만 봐.” 악조건이라고 포기하지 않고 그 속에서도 자신한테 도움이 될 만한 희망의 씨앗을 찾아내는 선배를 보면서 또 한 수 배운다. 그는 일하는 데 있어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유명하다. 최근 방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어린 시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수업료가 부담스러워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는 대신 철물점 점원으로 일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 힘겹게 보냈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의 이런 성격은 긍정적인 성정을 지닌 어머니에게서 왔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그는 “어머니가 한탄하는 소리를 단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항상 모든 일이 좋은 쪽으로 연결되리라 굳게 믿었다”고 했다. 간혹 어머니가 힘들어 보이면 그는 나중에 벤츠를 타고 모시러 가겠다는 말로 위로하곤 했는데 적어도 이 약속만큼은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성공의 내적 동인 중의 으뜸이 ‘긍정’이 아닌가 싶다.
  • [길섶에서] 우측보행/김균미 수석논설위원

    출퇴근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과 ‘신경전’을 벌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우측으로 걸어가다 반대쪽에서 좌측으로, 그것도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나 몰라라 걸어오면 짧은 순간에 결정을 해야 한다. 오른쪽을 고수할지, 왼쪽으로 방향을 바꿀지, 아니면 속도를 늦춰 상대방이 결정하도록 놔둘지. 우측보행을 고수하다 보면 상대방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트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상대방이 ‘직진’할 것 같아 먼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그쪽에서도 방향을 바꿔 얼굴을 맞닥뜨린 경우가 있다. 서둘러 오른쪽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상대방도 같은 생각을 해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민망한 경우도 가끔 있다. 우리는 1905년 우측통행을 실시했다가 1921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령으로 사람·자동차의 좌측통행을 정한 뒤 64년간 그대로 시행했다. 2010년 7월 1일부터 우측보행으로 다시 바꿔 만 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적응 중이다. 우측보행을 어겼다고 처벌받지는 않지만, 이는 편리를 위한 사회구성원 간 약속이다. 하기야 지키지 않는 약속이 어디 우측보행뿐이겠나.
  • [길섶에서] 가을 하늘/오일만 논설위원

    ‘심오한 책을 읽더라도 가을 하늘에 취해 책을 덮는, 그런 마음으로 사세요.’ 요즘 가을 하늘은 학창 시절 어느 수필가의 말이 떠오를 정도로 눈이 시리다. 주말 산행길 나뭇잎 사이로 언뜻 비치는 하늘은 말 그대로 창공의 해맑음이 묻어난다. 살랑살랑 얼굴에 닿는 가을 바람까지 가세하면 행복감이 온몸을 감아 도는 느낌이다. 중국의 석학, 린위탕(林語堂)은 ‘진정한 독서인은 가는 곳마다 책’이라고 했다. ‘산과 물이 책이요, 바둑과 술도 책이고 발길 닿는 여행도 책이 된다’고 갈파했다. 심오한 철학서에 담긴 내용보다 대자연에서 배우는 삶의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남에게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독서도 경계했다. 책을 많이 읽어 박식한 사람이 되기보다 마음속 깊이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교양인을 당부한 것이다. 독서의 계절이 왔다고 억지로 책을 읽으려는 강박 관념 대신, 때론 가을 하늘에 눈길을 파는 마음 자세가 그립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소한 삶의 즐거움을 소중히 생각하고 인생을 ‘이승의 소풍’쯤으로 여기는, 그런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 [길섶에서] 경외심/이동구 논설위원

    곤충, 물고기, 야생동물들의 삶을 보여 주는 다큐멘터리 영상물은 볼 때마다 숙연한 마음이 든다. 놀랍고도 신기한 그들의 능력과 함께 희생적인 삶이 감동을 준다. 모기는 빗줄기를 피해서 날아다닐 수 있고, 못생긴 꽃등에는 초당 1000번 이상의 날갯짓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개미, 매미, 나비 등 우리 주변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곤충들도 사실은 엄청난 능력을 소유한 신의 창조물이자 지구를 공유하며 살고 있는 이웃들임을 일깨워 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식 사랑이다. 어떤 거미는 새끼 수십, 수백 마리를 머리에다 붙인 채 몇 개월을 참고 지낸다. 제주도 문섬 주변에서 서식하는 줄도화돔 수컷은 암컷이 낳은 알을 수정한 뒤 입안에 한가득 담은 채 생활한다. 그 기간 내내 먹이 활동을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모두가 천적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희생이다. 본능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삶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모성애, 부성애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물고기, 벌레 한 마리에도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세상에 하찮고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을 실감한다.
  • [길섶에서] AI 여행 ‘족집게’/김균미 수석논설위원

    2주 뒤면 열흘간의 추석 황금연휴가 시작된다. 해외여행객이 110만명이 넘고, 국내 호텔 예약률도 작년 추석 때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연초부터 일찌감치 예약을 마친 알뜰 ‘얼리버드’들이 적지 않겠지만, 뒤늦게 연휴 일정이 확정돼 여행 계획을 짜려니 숙소 예약도 쉽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여럿 있다. 혼자 훌쩍 떠나면 모를까, 아이들이나 어른들과 함께 가려면 더더욱 고려해야 할 게 많아 머리가 터진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을 때 옆에서 ‘되는 대로 해’라며 한마디 거들면 혈압이 오르기도, 맥이 풀리기도 한다. 이럴 때면 숙소부터 교통편, 식당까지 맞춤형으로 예약해 주는 ‘인공지능(AI) 여행 족집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AI가 경제적 사정과 여행 목적, 취향 등을 분석해 여행지와 여행 상품을 추천해 주면 얼마나 편할까. ‘여행 계획 세우는 게 그렇게 귀찮으면 아예 여행을 가지 말지’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AI가 대세라는데, 이 정도 도움은 받을 수 있지 않나. 아니면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인가.
  • [길섶에서] 할머니의 마음/최광숙 논설위원

    돌아가신 어머니한테는 죄송하지만 가끔 어머니보다 외할머니가 더 그리울 때가 있다. 어릴 적 할머니한테 받은 무한 사랑과 그에 보답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더 커서일 게다. 어머니야 직장 생활을 하며 용돈도 드리고 나름 효도랍시고 흉내라도 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대학 시절 돌아가셔서 용돈 한 번 못 드린 것이 못내 아쉽다. 결혼한 조카의 아이들 덕에 일찍 할머니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것이 고마운 것이 지나가는 아이들만 봐도 마음이 환해진다는 점이다. 꼬마들을 보면 자연 할머니 미소를 짓게 된다. 어느 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유모차에 탄 아이를 보고 말을 걸었다. 보통 다른 아이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거나, 아니면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펴 보이는데 이 녀석은 달랐다. 갑자기 눈을 흘겨보더니 나를 향해 침을 탁 뱉었다. 아무래도 엄마가 키우지 않고 남의 손을 많이 탄 아이인 듯했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을 넘어 적대심까지 보인 아이는 처음이다. 엄마는 아이의 이런 행동을 알고 있을까.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나선다’는 말이 있다. 이웃 할머니로서 뭘 해야 하나.
  • [길섶에서] 사장님/황성기 논설위원

    요 몇 년 전보다 ‘사장님’으로 부르고 불리는 빈도가 높아졌다. 택시를 타건, 집에서 택배를 받을 때건, 가게에 들어가건 과거 ‘손님’이었을 호칭이 ‘사장님’으로 바뀐 걸 부쩍 느낀다. 그뿐이랴. 일면식도 없는 상대를 부를 때도 ‘사장님’을 자주 쓰는 스스로를 발견하곤 한다. 옛날 같으면 택시를 타서 ‘기사님’으로 불렀을 것을, 이제는 100%에 가깝게 ‘사장님’이라 말을 건다. 바깥에서 생면부지의 타인으로부터 ‘전무님’, ‘부장님’ 혹은 ‘과장님’으로 불리거나, 식당 종업원을 ‘계장님’이라고 부르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하대의 뉘앙스를 대체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호칭이 사장님”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를 부를 때 ‘여보세요’, ‘저기요’, ‘손님’의 호칭을 ‘사장님’으로 뭉뚱그리는 암묵의 합의가 형성되고 뿌리내린 것 아닌가 싶다. 사장님으로 불리면 ‘나 사장 아니다’라고 고개를 저었으나, 이제는 하도 그런 일이 많아 당연한 것처럼 느끼고 저항도 하지 않는다. ‘사장님’이라 불리고 부르는 것, 언젠가는 수그러들 한때의 유행이라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의 호칭 인플레가 탐탁하지만은 않다.
  • [길섶에서] 고라니/서동철 논설위원

    몇 년 전 안동 하회마을을 찾았을 때다. 동네를 둘러본 뒤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 건너 부용대에 올랐다. 그곳에서 강변을 바라보니 고라니 한 마리가 목을 축이고 있는 것이었다. ‘동물의 왕국’ 같은 다큐멘터리에나 나올 법한 풍경을 현실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일행은 “이거 실화냐?” 하는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시 그런 유행어는 없었지만…. 이후에도 야생동물이 크게 늘었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이 사랑스러운 짐승과의 관계가 어색해졌다. 줄거리는 이렇다. 가끔 들르는 시골집 텃밭에 지난봄 고추를 심어 놓았다. 그런데 고추는 가뭄을 견뎌 냈건만 가을이 되도록 짜리몽땅한 그대로다. 새순이 나오는 족족 고라니가 잘라 먹었다는 게 옆집 아저씨 이야기였다. 엊그제는 배추 모종을 심었다. 김장 담그기에 너무 많을까 걱정하면서…. 그런데 돌보지 않아 사람 키보다 크게 자란 잡초 사이에 못 보던 것이 있었다. 고라니 배설물이었다. 아차, 온종일 땀 흘려 고라니 간식을 주고 온 꼴이 아닐까 싶었다. 먹기만 해 봐라….
  • [길섶에서] 아파트 이웃/손성진 논설주간

    며칠 전 아침에 이사 간 아파트 문을 나서다 옆집 사람과 우연히 마주쳤다. 어색함을 깨려고 나이가 엇비슷해 보이는 이웃에게 “안녕하세요. 새로 이사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그러나 무뚝뚝해 보이는 그는 별 반응이 없이 굳은 인상만 쓰고 있었다. 사는 곳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서는 이웃을 모르고 살고 있다. 하긴 나도 이사 오기 전까지 10년 가까이 살았던 연립주택에서 같은 층 4가구 중 한 가구는 알고 지냈지만 다른 두 가구는 모르고 지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웃사촌이란 말이 무색하다. 따져 보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등을 대고 사는데도 이웃끼리 모르고 지낸다. 그냥 모르고 지내는 게 서로 편한 모양이다. 어릴 적 주택에서는 이웃집에 놀러 가기도 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며 살았다. 그런 이웃 간의 정은 이제 다 사라졌다.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공동의 이익에는 무관심한 세태도 아파트 문화 때문이 아닐까. 인사라도 하고 지내면 친해질 텐데 그마저 인색하니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조그만 노력으로 정을 되살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 [길섶에서] 선운사 꽃무릇/이순녀 논설위원

    고창 선운사는 원래 봄철 동백꽃으로 유명하지만 가을에 피는 꽃무릇의 아름다움도 이에 못지않다. 보통 9월 중순부터 10월 초순까지 붉은빛의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꽃무릇은 잎이 없는 꽃대 위에 꽃만 달랑 핀다. 꽃과 잎이 한시에 나지 않는 특징 때문에 상사화(相思花)와 헷갈리기 쉬우나 상사화는 여름꽃이고, 꽃의 색깔도 엄연히 다르다. 때가 이르다는 걸 알면서도 선운사로 발걸음을 재촉한 건 일말의 성급한 기대 때문이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 볕에 혹여 서둘러 꽃을 피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쉽게도 꽃무릇의 향연은 볼 수 없었다. 꽃무릇 군락지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판이 없었다면 무심하게 지나쳤을 만큼 잠잠했다. 그런데 가만, 자세히 보니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듯 팽팽히 허리를 곧추세운 초록색 꽃대들이 시야에 확 들어왔다. 그래, 너희도 안간힘을 쓰는구나. 저절로 삶이 열리는 건 아니구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그때를 제대로 맞으려면 치열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세상사의 당연한 이치가 새삼스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 [길섶에서] 복고(復古)의 계절/박건승 논설위원

    서울 소공동 하면 예스러운 고급 양복점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도 몇몇 곳이 복고의 명맥을 잇는다. 태평로의 옛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 별관이 헐리면서 대한성공회 본당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볼 수 있게 된 것도 다행이다. 오래된 것을 보는 반가움에서다. 동네 인근 숲공원 가는 골목길에 복고풍의 양복점 하나가 생겼다. 상호가 그냥 ‘양복’이다. 격조가 있다. 언제 어디선가 봤던 모습이다. 골목 일대가 카페와 브런치 전문점으로 바뀌어 가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지나칠 때마다 눈길을 떼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꽤 오래전 살았던 읍내에는 업종별 대표집이 한두 곳씩 있었다. 극장, 중국집, 이발소, 그리고 양복점이 그랬다. 요즘엔 복고술집과 복고다방이 새 창업 아이템으로 뜬다. 서울시는 ‘고고댄스’ 공연을 선보였다. 그때가 좋아서 복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잊지 않고 싶어서 기억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복고는 자신과 친숙한 추억의 가치를 찾는 일일 게다. 어쩌면 우리는 추억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모른다. 퇴근길에 70, 80년대의 올드팝 CD 모음집이라도 하나 사야겠다.
  • [길섶에서] 알고 보면 다른 것/황수정 논설위원

    출근길에 방화대교 아래를 지난다. 차를 달리다 보면 하필 그 언저리에서부터 막히고는 한다. 싱겁게 솟은 다리 아래를 우물쭈물 지나게 되는데, 어감도 그렇거니와 방화대교는 상쾌한 이름일 수 없었다. 그렇게 빼딱한 눈으로 근 십년 가까이. 다리에 조그맣게 붙은 한자 이름표를 문득 보았다. 꽃을 곁에(傍花) 두었다니. 이 심심한 다리가 세상에나 꽃자리였다니. 지난날의 노방에는 꽃나무, 들꽃이 지천이었겠다는 말이지. 심심한 다리를 이제는 건성건성 지나지 못하고 있다. 구절초, 쑥부쟁이, 개망초. 성질 급한 가을 풀꽃들은 그새 어깨를 섞어 아침 바람을 탄다. 저 손톱만 한 꽃들이 힘 모아 다리를 세워 이름을 붙였으려나. 머리 위에 다리를 이고 저희끼리 등을 쓸며 피고 지고 했으려나. 매듭 없는 생각에 꼬리를 물리다 보면 지루했던 길이 지루하지 않다. 시시했던 것들이 시시하지 않다. 알고 보면 다르게 보인다. 세상의 안쪽에는 온갖 무늬들이 제 몫의 도랑을 파고 앉아 있다. 그 무늬들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심심하다, 못생겼다고 말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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