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벚꽃 엔딩/이도운 논설위원

    내가 사는 이촌동에도 벚꽃이 활짝 피었다. 아침 출근길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꽃잎과 저녁 퇴근길 가로등 불빛이 스며든 분홍색 꽃잎이 모두 아름답다. 며칠 전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을 하다가 잔잔하면서도 귀에 꽂히는 노래를 들었다. 가사도 모른 채 벚꽃길을 오가며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노래 제목에 ‘벚꽃’이 들어 있었다. 계절에 어울리는 노래였다. 노래 중간에 나오는 멜로디언 간주가 특히 맘에 들었다. 누군들 살아가면서 벚꽃에 얽힌 추억이 없으랴. 결혼을 하고 처음 맞은 봄. 아내와 강변으로 벚꽃 구경을 갔다. 조금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다가왔다.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웃으면서 카메라를 건네줬다. 그는 ‘하나, 둘, 셋!’도 없이 그냥 딱 한 장 찍고 떠났다. 나중에 사진을 확인해 보고 깜짝 놀랐다. 꽃 구경 나온 신혼부부의 수줍으면서도 행복한 모습이 너무나 잘 담겨 있었다. 그는 사진작가였을까.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가운데 하나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은근과 끈기/구본영 논설위원

    출근길에 만난 목련과 벚꽃이 참 화사하다. 올해 이상기후로 도무지 봄이 올 것 같지 않아, 냈던 조바심이 무색해졌다. 더디 오는 계절이 참고 기다리는 미덕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문득 학창 시절 읽었던 국문학자 조윤제의 수필이 떠올랐다. 그는 한국 문학과 한국인의 생활 특질을 ‘은근과 끈기’라는 제목으로 압축했다. “‘은근’은 한국의 미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라고 했던 그의 묘사에 공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은근과 끈기라는 미덕이 점점 엷어져만 가는 게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조간 신문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으로 자살한 어린 학생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면서다. 더군다나 은근한 표현 대신 직설적인 막말이 횡행하는 세태다. 어느 개그맨은 10여년 전 내뱉은 막말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연예계 ‘잠정 하차’ 선언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여운이 남는 정중한 표현보다 무례하고 공격적인 언행으로 ‘단숨에 뜨려는’ 유혹을 뿌리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길섶에서] 농담/주병철 논설위원

    농담은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나 익살’로 풀이된다. 악의(惡意)는 없다. 영어의 조크(Joke)나 유머(Humor)에 해당한다. 반면 영어에서 조크는 사람을 기분좋게 하지만 나쁘게 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쓰여, 사람의 기분을 즐겁고 기쁘게만 하는 유머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의 농담은 정말 ‘그때그때 다르다’. 농담을 하는 사람의 의도가 중요하다. 대수롭지 않게 하는 농담이지만 사람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도 있고, 불순한 의도와는 달리 선의로 해석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농담을 외국에서 조크나 유머로 함부로 쓰다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절로 코웃음이 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농담은 수용자에 따라서도 차이가 난다. 그냥 농담으로 했는데 받는 사람이 불쾌하게 알아듣거나 오해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래서 농담하기 겁난다는 얘기가 나온다. 반대로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 ‘농담은 진실을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농담은 농담일 뿐.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명함 버리기/주병철 논설위원

    명함은 말이 아닌 글로 된 자기소개서다. 그래서 명함을 만들 때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넣기도 하고 색깔도 넣어 차별성을 강조한다. 요즘에는 간단·명료한 명함이 더 인기다. 근데 명함의 생명은 관리다. 명함을 아무리 많이 주고 받아봤자 관리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꼼꼼한 사람은 컴퓨터 파일에 잘 정리해 두지만 대부분은 모아 놨다 시간이 지나면 버리거나 한쪽 귀퉁이에 쌓아둔다. 극성스러운 사람들은 매년 파일을 보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명함을 재분류한다. 명함 리뉴얼을 하는 셈이다. 근데 나는 명함을 버리지 않는 편이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맺은 인정(人情)을 함부로 차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문제는 들춰보지도 않은, 먼지 묻은 명함 다발을 언제까지 보관할 것이냐이다. 그래서 요즘 정리 기준을 놓고 고민 중이다. 만난 지 오래됐고, 안 봐도 그만인 사람이 1차 정리 대상이 될 것 같다. 혹자는 “40대 중반 이후에 만난 사람의 명함은 필요없다.”고 충고한다. 고민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재래시장/주병철 논설위원

    가끔 시간이 나면 동료와 함께 청계천을 따라 방산시장을 찾는다. 청계천변을 따라 걷는 운치도 있거니와 시장 내 음식을 맛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종종 가는 음식점과 달리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밖의 세계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손님을 부르는 가게 점원의 손짓이 밉지 않고, 끌려 들어가는 듯한 손님의 표정도 밝다. 재래시장에 묘미를 더해주는 건 아무래도 투박한 손길 속에 묻어 나는 삶의 지혜다. 이런저런 물건을 흥정해 살 때면 꼭 더 얹어주는 맛에 손님은 만족해 하고, 카드보다 현금을 내미는 손님에게 주인은 행복한 미소로 답한다. 서로 흡족해한다. 그리고는 또 오라고, 또 오겠다고 말한다. 시장의 하이라이트는 해가 저물고 불을 밝히면서부터다. 어디서 왔는지 시장은 금방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불나방처럼 순식간에 사람이 몰린다. 물건을 사고 팔고, 먹거리를 즐기는 시끄러운 소리에 시장은 활기가 넘친다. 이렇게 사람이 몰리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뭐든 싸고 맛있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을 찾는 진짜 이유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검색과 사색 사이/최광숙 논설위원

    바야흐로 ‘검색의 시대’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온통 검색하는 데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 그리도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일과 관련된 정보 검색도 있지만 맛집이나 인기짱 연예인의 프로필까지 뭐든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컴퓨터에 매달린다. 컴퓨터도 모자라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도 연신 두드린다. 어른과 아이 구분이 없고, 때와 장소도 따로 없다. 늦은 시간 지하철을 타도 승객 대부분의 손과 눈은 모니터를 향해 있다. 필자도 TV를 보다가 궁금한 사안이 생기면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의 인터넷 창을 열어 검색하는 데 시간을 보내곤 한다. 얼마 전 만난 한 전직 고위 관료는 “다들 검색하느라, 정작 사색은 하지 않는다.”고 걱정했다. 검색과 사색, 단 한 글자 차이인데 차원이 전혀 다르다. 손과 눈에 의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생각하는 시간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봄날 막 피기 시작한 개나리를 보면서도 검색에만 매달린다면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네 번째 부류/이도운 논설위원

    세상에는 세 가지 부류의 사람만 존재한다고 믿는 친구가 있다. 첫번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 두번째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 세번째는 담배를 피우지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겉으로는 이런 식으로 점잖게 분류하지만 그 친구의 마음 속 분류는 뉘앙스가 다르다. 첫번째는 정상인, 두번째는 비정상인, 세번째는 그 중간쯤으로 생각한다. 한때는 담배를 꽤 피웠던 그 친구. 회사 태스크포스에 파견 갔다온 뒤 담배를 딱 끊어버렸다. 태스크포스 사무실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런 사무실에서 회의할 때마다 참석자들이 담배를 피워대자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에게 세상에는 또 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해줬다.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담배 피우는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 두번째 부류가 세번째 부류로, 세번째 부류가 첫번째 부류로 바뀌어 간다면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첫번째 부류가 네번째 부류로 바뀌어 간다면 좀 더 관용적인 세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계량적 사고/주병철 논설위원

    “인간은 양이 아니라 질의 세계까지도 숫자로 나타내려 한다. 이젠 인간의 기능까지도 IQ라는 숫자로 측정해 내고 있다. 통계나 퍼센티지로 저울질하는 인간의 마음은 고깃간의 그 소고기처럼, 저울대 위에 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문필가가 쓴 글귀다. 사람이 얼마나 계량적 사고에 함몰돼 있는가를 말해준다. 얼마 전 어느 모임에서 이런 걸 경험했다. 호스트가 술잔을 계속 돌리길래 “나는 벌써 ○잔 이상 먹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권하길래 “나는 다른 사람보다 몇잔 더 먹었다.”고 했다. 대뜸 훈계가 뒤따랐다. 어떻게 술잔을 숫자로 셀 수 있느냐는 것이다. “술을 많이 먹었다.” “술이 취한다.”는 표현으로 하는 게 더 좋지 않으냐는 것이었다. 한방 얻어맞은 듯했다. 사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계량적 사고에 젖어 살아가고 있다. 술잔뿐이겠는가. 모든 걸 숫자로 인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이념적 성향도 숫자로 얘기하는 사회가 아닌가. 계량적 사고는 너무 각박한 듯하다. ‘감성적 사고’로 틀을 바꿔야겠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마음은 쓰기 나름/최광숙 논설위원

    요즘 삭막한 세상이라고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일상에서 마주치던 이들과의 짧은 만남에서 행복 바이러스가 전해지기도 한다. 지하철을 타면 으레 한적한 노약자 칸에 가게 된다. 자리가 비어 있어도 서서 간다. 가끔 가방을 올려 놓긴 해도 앉지는 않는다. 간혹 젊은이들이 앉았다가 노인들한테 혼나는 것을 몇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씀씀이가 넉넉하신 어른들은 굳이 앉으라고 권한다. 며칠 전 책을 보던 한 할머니가 올려다보면서 자리를 가리키며 굳이 앉으란다. 돋보기 너머 눈짓이 너무 다정해 마음이 환해졌다. 다른 할머니도 “사실 젊은이들이 일하느라 더 힘들지. 우리 노인들이야 놀잖아.”라며 거든다. 앉아서 졸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면 얼마나 힘들까 안쓰럽다는 것이다. 똑같은 현상을 보고도 해석이 다르다. 어떤 노인들은 자리를 지키려 젊은이들이 조는 척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 할머니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봤던 것이다. 참, 마음이란 게 쓰기 나름인 것 같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친절한 전화/최광숙 논설위원

    얼마 전 신문 칼럼 필진 중 한 분에게 전화를 했다. 저쪽에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라고 한다. 혹 잘못 전화를 걸었나 싶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 아니냐고 묻자 맞단다. 교수님이 그렇게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 놀랐다고 하자, 오랫동안 공직에 있어 몸에 밴 것 같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고위 공직자들은 ‘갑(甲)중의 갑’이라고 불린다. 그런 만큼 친절이 그리 몸에 밴 사람들이 아니다. 그 또한 중앙 부처에서 차관까지 지냈으니 직접 전화를 받기보다 비서 등을 통해 받는 것이 더욱 익숙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의 친절함은 인품에서 비롯된 것이지 싶다. 직업상 전화를 많이 걸고 많이 받지만 보험사 등의 콜센터 안내원이 아니라면 그런 상냥한 전화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잠시의 전화 통화에도 짜증이 묻어난다. 몇분의 시간도 타인에게 내주는 것에 인색하다.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전화 한 통화로 남들을 기분 좋게 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지 싶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우산론/곽태헌 논설위원

    대기업 임원 A씨를 만났다. 얼마 전 A씨 위에는 새로운 임원 자리가 생겼다. “시어머니가 더 생겼는데 어떠냐.”고 했더니 “우산이 생겨서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새로 온 상사에게 자문도 구할 수 있고, 경험도 공유할 수 있으니 좋다는 얘기였다. 기댈 수 있는 상사가 생겼으니 괜찮다는 게 그의 요지.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었다. 기분이 다소 상했을 줄 알고 물어봤는데 말뿐이 아니라 표정도 그게 아니었다. 그런 질문을 한 게 멋쩍었다. 부담스러울 수도 있고, 귀찮을 수도 있는 직장 상사를 우산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마음먹기 나름이다. 가정에서의 시어머니, 직장에서의 상사를 어떻게 보려고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잔소리를 한다고 부정적으로 보면 나쁜 것만 보일 것이고, 과거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알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면 좋은 것이 보일 터.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이 훨씬 좋지 않을까.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길섶에서] 청계천 산책/이도운 논설위원

    지난주 사설을 쓰지 않던 날, 오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청계천을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보는 것이었다. 오후 1시58분, 청계광장을 지나 청계천 입구로 내려갔다. 평일이었고, 아직은 쌀쌀함이 남아 있는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청계천 산책의 가장 큰 즐거움은 차가 없는 길을 걷는다는 것. 2008년 12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핀란드의 생태 도시 ‘에코 비키’를 방문했을 때도 가장 인상적인 점이 자동차를 마을 입구에 세워놓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 없는 거리에서 마음 놓고 걷고, 뛰노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로움인지 우리는 잊고 살고 있다. 한 시간을 걷자 청계천과 정릉천이 합류되는 지점에 다다랐다. 이정표를 보니 5.7㎞를 걸어왔다. 서울숲까지는 5.5㎞. 내친김에 계속 걸었다. 서울숲 입구에 도착하니 4시 5분. 다리가 아팠다. 그러나 작은 목표 하나를 이뤘다는 뿌듯함이 더 컸다. 인생이라는 것이 크고 작은 목표들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 아니겠는가.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말귀/주병철 논설위원

    국내 굴지의 모 재벌 총수는 아랫사람에게 지시할 때 “그거, 그렇게 해.”라고 말하곤 한다. 더러는 “그거, 어떻게 됐어.”라고 불쑥 묻는다. 그럴 때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는 임원은 곤혹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답변이 시원하고 명쾌하게 나올 리 없다. 임원 중의 한 사람은 재벌 총수의 얘기를 참 잘 알아듣는다. 그래서 남보다 한발 먼저 총수의 의중을 간파하고 흡족한 답을 내놓는다. 재벌 총수의 표정과 감정 등을 보면 ‘그것’의 의미와 의도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윗사람의 말이 논란이 될 것 같으면 ‘그럴듯한 해석’을 달아 진화하기도 한다. 덕분에 그는 여전히 재벌 총수 옆에 있다. 남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는 총기를 말귀라고 한다. 근데 말귀라는 게 선천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상대방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정성과 노력, 신뢰가 쌓여야 가능하다. 여러 사람이 같은 얘기를 들어도 말귀의 수준은 다르다. 말귀도 사람의 능력 가운데 하나로 봐야 할 것 같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늦은 후회/임태순 논설위원

    화상으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아버지는 어린 아들, 딸을 고아원에 맡기고 외진 곳에서 숨어 살았다. 자녀들은 어느 날 나타난 아버지에게 배신감과 실망감에 등을 돌렸고, 그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녀들은 문상객이 아버지는 화장을 싫어했고 뒷산에 묻히길 원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으나 귓전으로 흘려 버리고 화장을 했다. 장례를 마친 뒤 아버지의 짐을 태우다 빛 바랜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장은 어린 애들 울음소리 때문에 당신을 구하지 못했다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평생 밤마다 불에 타는 악몽에 시달려온 만큼 화장만은 하지 말아달라는 자식들에 대한 당부로 끝을 맺었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통곡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5년 전 아버지를 떠나 보낸 친구가 “생전엔 소중함을 잘 몰랐는데 요즘 아버님 생각을 하면 가슴속 깊이 허전한 마음을 많이 느낀다.”며 보내온 이메일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빛나는 이류/최광숙 논설위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느 세계에나 일류, 이류, 삼류는 있기 마련이다. 누구나 일류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여성들이 열광하는 명품 백도 다 일류 상품을 들면 자기 인생이 일류로 비춰질까 하는 속내가 깔려 있다. 일류를 지향해 살기에도, 그렇다고 깡그리 무시하고 살기에도 우리 삶은 너무 복잡하다. 최근 한 방송에서 배우 차인표씨가 연기력에 있어 스스로 이류라고 해 놀랐다. “누구나 최민식·송강호처럼 되기는 어렵다. 나 같은 이류도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톱스타이면서 자신의 약점을 흔쾌히 인정하는 모습에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력도 없으면서 일류인 척하는 이들에 비해 그는 그야말로 ‘쿨’했다. 딸 둘을 입양하고, 가난한 어린이와 탈북자들을 돕는 그의 사연을 들으니 진정성이 느껴졌다. 어쭙잖은 일부 연예인 소셜테이너와는 사뭇 달랐다. 사실 그의 연기는 별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열심히 실천하는 일류 스타임에 틀림없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악수와 포옹/이도운 논설위원

    미국 유학시절, 강의실에서 클래스메이트들과 마주칠 때마다 어떻게 인사를 할까 망설이곤 했다. 눈웃음, 손 올리기, 악수, 안부 묻기, 포옹…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에게는 눈인사와 ‘What´s up’ 같은 간단한 인사말이면 됐다. 중국인 릴리, 타이완 사람 제시카와는 한국말, 중국말로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남학생인 피트, 제이슨과는 악수, 그리고 가끔씩 프로야구 선수들이 주고받는 복잡한 손동작을 하기도 했다. 팀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크게 싸운 뒤 친해진 크리스틴과는 오랜만에 만날 때 서로 포옹을 하곤 했다. 내가 느끼는, 그리고 상대방이 느낄 것 같은 친분의 정도와 상황에 따라 인사법이 달라졌던 것 같다. 요며칠 TV 뉴스를 보니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는 좌우로 포옹을,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과는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이 정상들 간의 심리적 거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약속 중독증/주병철 논설위원

    예방의학 전공인 의사 A씨는 인생은 중독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한 중독이란 게 세상을 열심히, 그리고 보람차게 사는 데 불가결한 요소다. 뭐든 미쳐야(중독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걷기중독을 으뜸으로 여긴다. 건강을 지키는 데 그만한 게 없고, 자신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걷는다고 한다. 걷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걷기예찬론의 ‘착한 중독자’쯤 된다. ‘나쁜 중독자’도 있다. 저녁 무렵만 되면 술친구를 찾는 40대 직장인 B씨가 정신과 의사 C씨를 찾아 상담을 했다. C씨는 B씨의 정신상태를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발악’이라고 진단했다. 술을 줄이고 새로운 취미를 가지라고 충고했다. 혼자서 뭔가를 즐길 수 있어야 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수긍이 간다. 그러고 보면 직장인들은 술 마시는 저녁 약속이 많다. 대인 관계가 잦은 직종의 사람들은 약속(술)중독증에 걸려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의학적으로 약속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일주일에 몇 번 정도면 괜찮을까. 취미생활은 뭐가 좋을까.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초등교 입학/최광숙 논설위원

    조카 두 명이 이번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막내 오빠네 늦둥이와 여동생네 막내다. 집에서 하는 짓들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들. 제대로 학교 생활에 적응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 앞선다. 궁금해하던 차에 휴대전화로 사진을 보내왔다. 학교 강당에서 열린 입학식에 수많은 애들 틈에 서 있는 오빠네 조카를 보니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다. 다행히 한눈 팔지 않고 선생님을 향해 눈길이 꽂혀 있다. 교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동생네 조카는 약간 얼떨떨한 표정이다. 가방도 교실바닥에 내려놓지 않고, 여전히 어깨에 메고 있는 것으로 봐 긴장한 것 같다. 엄마를 향한 눈빛에는 “어디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여동생은 벌써부터 점심시간 밥 푸러 가고, 학부모 연수모임에 참석하는 등 학교에 들락날락하고 있다. 학교에서 엄마와 마주치면 씩 웃어주는 아들이 하루빨리 학교 생활에 연착륙하라는 뜻일 게다. 이제 새로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조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청첩장/곽태헌 논설위원

    요즘 청첩장이 많이 오는 것을 보면 봄은 봄인가 보다. 가족들을 위로해 줘야 할 상가에는 가능한 한 가지만, 결혼식장에는 웬만하면 가지 않고 지인에게 ‘봉투’를 전달하는 편이다. 휴일 선약이 있거나 일요일 근무하는 날이 겹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축하할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갈 필요가 있느냐는 소극적인 생각도 결혼식장을 다소 멀리하게 된 요인이다. 결혼식장에는 가지 않더라도 청첩장에 쓰인 문구는 꼭 읽어 본다. 친지와 친구를 초대하는 문구를 보면서 요즘 젊은이들의 재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색다른 재미다. ‘씩씩한 군인과 싹싹한 기자가 만났다.’는 후배의 청첩장 문구도 기억에 남는다. 어릴 때 옆집에도 살면서 친동생처럼 지냈던 고종사촌이 청첩장을 보내왔다. 신랑과 신부의 이름을 딴 4행시를 통해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눈길을 끈다. 모든 부부들이 청첩장의 문구처럼 힘들고 어렵더라도 밝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약속과 다짐을 지킨다면 이 세상은 보다 더 좋아질 터.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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