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편지 사건/최광숙 논설위원

    여고 3학년 때 일이다. 당시는 수능이 아니라 학력고사를 치렀는데 시험을 치르고 난 뒤 어느 날이다. 편지 한 통이 내 앞으로 날아들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다. 사실 편지 봉투에 내 이름 석자는 없고, 그냥 3학년 ○반 ○번 앞으로만 돼 있었다. 이래저래 미스터리한 편지였지만 ○반 ○번은 단 한 명밖에 없으니 수취인이 나인 것은 분명했다. 편지 내용인즉 “시험도 끝났는데 한번 만나보자.”며 데이트를 청하는 것이었다. 보낸 이는 인근 고교의 3학년 같은 반, 같은 번호의 남학생이었다. 장난 삼아 보낸 것인지, 작은 흑심을 담았는지 알수 없었으니 학교 선생님들은 혹여나 ‘연애편지’사건인가 싶어 난리가 났던 것이다. 결국 교무실까지 불려가 취조를 당한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수능철이 되면 그 편지 사건이 떠오른다. 시험 압박에서 벗어난 고 3의 객기 어린 행동이었으리라. 지금쯤 어느 여학생도 이름 모를 남학생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고 당황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다짐/주병철 논설위원

    얼마 전 병문안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 병실용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낯선 사람이 대뜸 “병원에 오면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건지.”라고 말을 건넨다. ‘병원에는 아픈 사람이 너무 많네.’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참이었다. 순간 멍했다. 이 사람이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예”라고 얼버무렸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서도 그는 중얼댔다. “병원에 오면 환자가 많고, 술집에 가면 술꾼이 많고, 노래방에 가면….” 초면에 만난 그 사람이 툭 던진 몇 마디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병원에 와서 아픈 사람들을 보노라면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 해두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경고성 메시지로 와 닿았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뜨끔했다. 올해는 나름대로 보람차게 보냈다. 올 초 시작한 금연 다짐은 초심을 잃지 않았고, 살을 빼겠다는 다짐도 약간은 이뤄진 것 같다. 그래서 내친김에 내년에는 술을 확 줄여볼 생각이다. 늘 하는 게 다짐이라지만, 제대로 다짐하면 실행되지 않을까 싶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거짓말/주병철 논설위원

    어릴 적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다 혼난 기억이 있다. 어느 일요일 아버지가 일보러 나간 사이 타지 말라는 자전거를 타다 그만 타이어가 펑크 나고 말았다. 자전거는 교편생활을 하는 아버지가 학교와 집을 오가며 타던 자가용(?)이었다. 펑크 난 자전거를 슬그머니 있던 자리에 세워뒀는데, 귀가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탔느냐고 묻길래 엉겁결에 “안 탔다.”고 했다. 거짓말의 대가는 혹독했다. 집에서 애들이 거짓말을 하다 엄마한테 들켜 혼나는 걸 가끔 본다. 애들을 불러 혼내주고 싶은 마음도 일지만 참는다. 애들은 애들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두 번의 거짓말은 정직함을 배우는 소중한 교육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얼마 전 거짓말을 하던 피의자에게 거짓말탐지기를 들이대니 사실대로 말했다는 기사를 봤다. 상식적인 사람이 거짓말을 끝까지 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애들이나 어른이나 잘못한 건 솔직히 털어놓는 게 상책이다. 요즘은 거짓말이 반성의 미덕도 아니지만 숨긴다고 숨겨지지도 않는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소녀 평화비’ 단상/구본영 논설위원

    일제 때 영문도 모르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순진무구한 소녀가 환생한 건가. 서울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세운 평화비를 처음 보며 가진 소회다. 이 ‘소녀 평화비’를 놓고 한·일 양국이 외교 갈등을 빚고 있단다. 일본 정부로선 날마다 일제의 부끄러운 과거를 일깨우는 소녀상이 껄끄러울 법하다. 하지만, 따져 보면 일본이 자초한 일일 수 있다. 1000회의 수요집회로 피해자들이 문제해결과 사과를 촉구했는데도 일본 정부가 성의 있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 않은가. 초겨울 삭풍에 떨고 있는 소녀상을 지나치면서 상념에 젖었다. 국가 간은 물론 가족과 친구를 포함한 인간관계에서도 갈등 해소를 위한 소통의 첫걸음은 경청이란 생각이 들었다. 코 고는 소리는 옆에서 자는 사람에겐 들리지만, 당사자는 모르기 일쑤가 아닌가. 문득 “타인의 결점은 우리의 눈앞에 있고 자신의 결점은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법”이라는 세네카의 명언이 떠올라 스스로를 되돌아 보았다. 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길섶에서] 한적한 사무실/임태순 논설위원

    TV 채널을 돌리다 1960년대 영화에 잠시 눈길이 멈췄다. 난로가 켜진 사무실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주판으로 열심히 계산하는 직원, 타이프라이터를 치는 직원 등으로 온통 북새통이었다. 차를 끓이는 여직원도 보였고, 차트에 글씨 쓰는 것을 보조해 주는 사람까지 있었다. 가끔 회사 내 구두미화원과 이야기를 나눈다. 프레스센터가 들어선 이후 줄곧 일을 해왔다고 하니 30년 가까이 된다. 돈도 꽤 모았겠다고 말을 건네자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사무실에 점점 사람이 줄어든다고 답한다. 고객 감소로 시장이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신문사도 옛날에 비해 지면은 많이 늘어났지만 인력은 큰 변화가 없다. 사람의 손을 거치던 일들이 디지털 기기로 상당수가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삼 일자리 늘리기의 어려움을 실감한다. 산업혁명시대에는 일자리를 빼앗은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요즘 디지털 파괴운동은 언감생심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탑정 저수지/최용규 논설위원

    탑정 저수지만큼 조사(釣士)들의 사랑을 받는 낚시터도 드물 것 같다. 예당 저수지가 낚시꾼 사관학교라면 탑정호는 강태공의 천국이다. 물낚시철이 시작되면 전국의 조사들이 토종 월척을 꿈꾸며 이곳으로 몰려든다. 비교적 사람 손이 덜 탄 치마바위. 마을 어귀에서 산을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명포인트다. 수심이 족히 10m는 되는 이곳에서는 해질 무렵 굵은 씨알의 토종붕어가 쑥쑥 올라왔다. 여름철엔 비닐 지붕을 치고 한달 이상 ‘장박’(長泊)하는 꾼도 더러 있었다. 탑정호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다. 개발은 치마바위의 낭만을 앗아갔다. 이젠 누구나 쉽게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됐지만 별이 쏟아지고 풀벌레 소리 가득하던 호젓함은 사라졌다. 자동차 굉음과 라이트에 그 많던 토종붕어도 정든 서식지를 버렸다. 주말, 지인들과의 탑정호 만남은 어떤 추억의 색깔일까. 내년 경제가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탑정 저수지가 우울한 초짜 조사들로 넘쳐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강태공은 ‘IMF 외환위기’때 확 늘었다.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길섶에서] 태권도 불꽃쇼/최광숙 논설위원

    태권도의 꽃은 송판깨기가 아닌가 싶다. 발차기로 송판을 와장창 깰 때의 멋진 모습에 다들 박수를 치기 마련이다. 어린 조카들 얘기를 들어보니 요즘 발차기로 송판깨기를 하면 송판 안에 미리 넣은 화약이 터지면서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불꽃쇼가 펼쳐진다고 한다. 아이들의 재미와 흥미를 더하기 위해서일 게다. 이젠 어린이들이 배우는 태권도 같은 스포츠에도 일상의 쇼가 필요한 세상이다. 점점 더 자극적인 요소로 사람들을 홀린다. 음식만 해도 맵고 짜다. 입에 불이 타들어가는 듯한 불닭이 나온 지도 꽤 오래다. TV에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은 너무 시끄러워 사람 혼을 쏙 빼 놓는다. 영화는 더하다. 욕지거리가 안 나오는 장면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험한 욕도 점점 강도가 세진다. 이런 세상에 어디 순하거나 물러터지거나 흐리멍텅한 것으로는 사람 눈길을 잡기 어렵게 됐다. 그럴수록 음식도 조미료를 넣지 않은 순하고 담백한 것을 찾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런 이들을 가까이하고 싶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전신 스캐너/이도운 논설위원

    지난 7일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국제공항의 출국장 보안검색 구역. 가방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고, 겉옷과 신발을 벗고, 바지 주머니 속의 소지품을 꺼내고 허리띠까지 풀었다. 검색대를 통과하려는데 인천공항에서 출국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검색대는 원통 모양이었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두 손을 들었다.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내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전신 스캐너였다. 신문과 방송에서 기사로만 봐 왔던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누군가는 나의 맨몸을 봤을 것이다. 보여 줄 것도 감출 것도 없었지만 잠깐 기분이 묘했다. 내 뒤로 전신 스캐너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저절로 눈이 갔다. 전신 스캐너가 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미국 내에서도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다는 보도가 기억났다. 그러나 이날 검색대를 통과하는 여행객들의 얼굴에서는 특별한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없었다. 1분이라도 빨리 검색대를 통과해 비행기를 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았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꿈/최용규 논설위원

    꿈을 꿉니다. 꿈을 저 깊은 심연에 감춰 둡니다. 찬바람 부는 어느 날 보름달 아래 고갯길에서 살짝 꺼내 봅니다. 10년, 20년 세월은 하염없이 흐르고 소년·소녀의 꿈은 신기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한 이들, 성공한 삶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고, 그 덕으로 훈장을 단 이들 가운데 훗날 회한이 사무치는 이도 적지 않을 겁니다. 꿈이 아닌 길을 갔다면 말입니다. 올해 대입도 종착역에 다가왔습니다. 절박한 심정에 꿈을 밀쳐 두는 이가 적지 않을 겁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대표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한두 구절이 생각납니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꿈을 향해 가는 길은 두려움이자 행복입니다. 영화 ‘드리머’(Dreamer)의 극적인 브리더스컵 승부가 떠오릅니다. 꿈은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을.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길섶에서] 천생연분/임태순 논설위원

    부부간 궁합이 맞아 잘사는 것을 천생연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천생연분이라도 항상 깨가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조그만 일로 티격태격하며 언성을 높여 싸우기도 한다. TV 오락프로에 출연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상대로 낱말맞히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주어진 낱말은 ‘천생연분’. 할아버지가 자신있게 ‘우리처럼 잘사는 걸 뭐라고 하지.’ 하며 낱말을 설명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웬수’라고 말해 시청자들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할아버지가 ‘아니 그게 아니고 네 글자, 네 글자로 뭐야.’ 하니 할머니는 더 큰 목소리로 ‘평생웬수’라고 답해 할아버지를 머쓱하게 했다. 작가 김홍신의 인생사용설명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결혼해서 한번도 싸워보지 않은 부부는 없을 것이다. 한평생을 살려면 고운 정뿐만 아니라 미운 정도 보듬고 서로 부족한 것은 채워주고 메워줘야 한다. 천생연분의 비법이다. 그러지 않으면 천생연분은 웬수, 평생웬수로 남고 말 것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망년회/주병철 논설위원

    연말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약속이 줄을 잇는다. 스마트폰 수첩에 빈 공간이 없다. 갑자기 날아든 번개팅에 한번 꿰맞춰 보려면 꽉 찬 공간을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 자주 만나는 사람은 올해 만남의 종결을 위해, 자주 보지 못했던 사람은 올해를 넘기기 전에 한번이라도 보고픈 마음에서 낮이고 밤이고 불나방처럼 모인다. 문제는 망년회 이후다. 한 해를 무사히 보낸 걸 자축하고 새해를 활기차게 맞이하자는 망년회의 뜻이 어디가고 몸을 망치는 망신회(亡身會)로 둔갑되기 일쑤다. 망신회로 만들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결국은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올해는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하고 넘어가자. 어느 문인이 쓴 글귀의 일부다.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잊을 것은 잊지 않고 꼭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니, 예를 든다면 원혐(怨嫌)은 크나 작으나 당연히 잊을 것인데 꼭꼭 잊지 않고, 은혜는 크나 작으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인데 영락없이 잊어버리니, 그것은 결국 자기를 잊은 것이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가수 MB의 인기/최광숙 논설위원

    캐나다 출신의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e)라는 가수가 요즘 우리 집안에서 인기몰이다. 그의 앨범 재킷이나 공연 비디오를 보면 그의 이름 첫 글자를 딴 MB가 곧잘 등장한다. 그래서 가수 MB로 불린다. 온 집안 식구가 그의 노래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2학년 조카까지도 그의 노래를 듣고 있자면 “흠, 마이클 부블레네.”하며 아는 체할 정도다. 그는 미국의 그래미상을 두 차례 받을 정도로 실력 있는 가수다. 젊고 잘생긴 데다 매력까지 철철 넘친다. 옷도 항상 검은색 계통의 정장에 넥타이를 한, 젊은 신사의 모습이다. 마이웨이(My Way)를 부른, 미국의 전설적인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를 연상케 한다고 한다. 그만큼 미국 등에서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 ‘슈퍼스타 K2’에서 결승전까지 올랐던 존 박이 최근 마이클 부블레가 리메이크한 곡인 ‘아임 유어 맨’(I am your man)을 가수 데뷔곡으로 불렀다고 한다.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으나 한국판 마이클 부블레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고로케/이도운 논설위원

    점심 때 돈가스 전문점으로 갔다. 돈가스와 함께 고로케를 주는 메뉴가 눈에 들어왔다. 고로케. 프랑스말 크로케를 일본 사람들의 발음으로 옮긴 것. 늘 기대 속에 주문을 하지만, 기대만큼 좋은 맛을 내는 집은 흔하지 않다. 계산을 하면서 종업원에게 물었다. “혹시 저희가 음식에 대해 코멘트를 하면 본사에 전달이 됩니까?” “해보세요.” “고로케 맛이 아주 훌륭하지는 않은 것 같네요.” 그 종업원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고로케는 안 먹어요.” 돈가스 전문점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북엇국집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려면 오전 11시 10분 전이나 오후 1시 30분 이후에 도착해야 줄을 서지 않는다. 후배 한 명이 지난 4·27 재·보궐선거 당시 강릉에 취재를 다녀왔다. 강원도지사 후보 선호도를 물으러 건어물 가게에 들어갔다. 서울신문 기자라고 하니 그 북엇국집을 잘 가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집에 북어를 공급하는데, 아무리 비싸도 좋으니 꼭 최상품을 구해 달라고 요청한다는 것이다. 식당에 사람이 몰리면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속정(情)/주병철 논설위원

    코흘리개 시절의 얘기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자식이 밖에서 놀다 다치거나 몸이 아파도 무심했다. 일언반구조차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안 일이지만 어머니한테는 자식이 왜 다쳤는지, 괜찮아졌는지 꼬치꼬치 물어보고 걱정하셨다고 한다. 드러나지 않은 아버지의 속정이었으리라. 주말에 야외로 나가면 도로 옆에 천막을 치고 사과, 배, 감 등 과일을 파는 노점상들을 종종 보게 된다. 무심코 지나치곤 했는데 요즘에는 차를 세우고 과일을 가끔 산다. 햇사과를 한아름 사서 들고온 적이 있는데 애들이 너무 좋아해 그 이후로 자주 그렇게 한다. 아빠의 속정이다. 얼마 전 기차를 타고 시골을 다녀왔다. 종착역에 이를 때쯤 연로한 할머니가 선반 위에 놓인 감 상자를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비싸지도 않고 무겁기만 한 이 상자를 왜 들고 왔는지 궁금한데 차창 밖에서 누군가 손짓을 한다. 아들 아니면 사위 같다. 기차로 들어오더니 감 상자를 어깨에 메고 나간다. 어머니의 속정이다. 속정은 우리네 마음을 이어주는 은근하고 진실된 끈이다. 주병철 논설위원 bcjoo@seoul.co.kr
  • [길섶에서] 요양보호사/임태순 논설위원

    결혼식장에서 퇴사한 선배를 만났다. 회사를 그만둔 지 꽤 오래됐지만 표정이 밝고 얼굴에 화색까지 돌아 보기 좋았다. 즐거운 일이 많은 것 같다고 인사를 건네자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다는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깜짝 놀랐다. 남자로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노인들의 뒷수발을 드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선배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사는 느낌이라고 했다. 병들고 약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돌보면서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되고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면서 보람과 기쁨, 위안을 함께 맛본다고 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너무나 고맙다면서 요즘에는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살아간다고 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느낀 애환은 홈페이지에 올려놓기도 한다. 글을 잘 봤다며 다음 글은 뭐냐, 이런 것도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느냐며 자신의 경험담을 알려주는 동료들도 있다고 귀띔한다. 그래서 기자시절처럼 무엇을 써야 할지 압박받지 않는다며 편한 웃음을 던졌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수험생 마케팅/곽태헌 논설위원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 3학년과 재수생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해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나자마자 수험생들에게 각종 할인 등 많은 혜택을 주는 것도 입시의 중압감에서 이제 조금이라도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매출을 늘리려는 상술이지만, 장삿속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 ‘착한’ 영업전략이다. 올해도 놀이공원, 패밀리레스트랑 등 수험생이 즐겨 찾는 곳에서 수험표를 지참하면 할인해 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 그제 ‘수능 수험생 할인 이벤트’라는 대문짝만 한 글자 옆에 더 큰 글씨로 ‘20% 할인’을 강조하는 신발 매장을 찾았다. 아들이 선택한 신을 들고 계산대에 갔다. 당연히 할인을 생각하고 있는데, 직원은 “이것은 할인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고객을 유혹한 ‘20% 할인’ 밑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콩알만 한 글씨로 ‘일부 품목과 브랜드는 제외’라고 적혀 있었다. 수험생과 학부모를 희롱하는 ‘착하지 않은’ 상술에 한 방 맞았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seoul.co.kr
  • [길섶에서] 남대문시장/최용규 논설위원

    봄에 갔을 때만 해도 달랐다. 재래시장이 죽었다고 하지만 남문안장은 그래도 인파로 바글바글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했는데 600년 역사를 지닌 시장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 없지. 상자로 가린 숭례문을 곁눈질하며 장터로 들어선다. 왼쪽 첫 집에 눈길이 간다. 크리스마스 용품 천지다. 아! 연말이구나. 책상 앞에서 코 박고 있을 때, 달력에 ‘11월-NOVEMBER’ 아무 생각없이 스칠 때와 전혀 다른 감흥이다. 그런데 쓸쓸하다. 징글벨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한데 찾는 사람이 없다. 무슨 절간도 아니고…. 남대문, 아니 ‘숭례문시장’ 갈치조림 골목. 여기도 마찬가지, 손님이 없다. 밥(손님)보다 고추장(상인)이 많다. 좁은 식당에 손이 없다 보니 더 휑하다. 필사적으로 손님을 끄는 아줌마의 호객행위가 안쓰럽다. 마치 1990년대 초 순화동 골목을 연상시킨다. 불황의 골이 깊다. 4000, 5000원이 무서워 도시락을 싸오는 상인들이 늘었다 한다. 훈풍은 언제 불까. 중국 사람, 일본 사람이 몰려 와야 풀릴까. 시장 가야겠다. 자칫하다간 그들이 얼어 죽겠다.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길섶에서] 미하일 박 전시회/이도운 논설위원

    미하일 박. 60세. 카레이스키 5세. 시인, 소설가이자 화가. 1999년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났다. 특파원이었던 선배가 소개해줬다. 한 달간 시베리아를 함께 다녔다. 모스크바로 돌아와 그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아틀리에에 걸려 있던 그림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파란색 그리고 흰색만으로 표현한 고도(古都)의 우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미하일 박은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고 싶어했다. 내가 초대했다. 2000년 8월 15일이 포함된 주에 서울 갤러리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서울 갤러리 역사상 가장 많은 그림이 팔렸다. 지난 22일 밤 서울에서 미하일 박의 전시회가 다시 한번 열렸다. 숙명여대 아트센터 3층. 단독 전시회가 아니었다. 봉사단체 발대식에 포함된 부수적 행사였다. 그림은 벽에 걸린 것이 아니라 로비에 놓여 있었다. 안타까웠다. 서울에 있는 그 많은 화랑 가운데 미하일 박을 위한 공간은 없단 말인가. 집으로 돌아와 거실에 걸린 그림을 다시 바라봤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내가 가진 최고의 그림이다. 이도운 논설위원 dawn@seoul.co.kr
  • [길섶에서] 요리 실력/최광숙 논설위원

    평소 요리와 거의 담을 쌓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나도 앞치마 두르고 요리랍시고 열심히 부엌데기를 하던 때가 있었다. 미국으로 연수를 가 뉴욕에 터를 잡자마자 금융위기가 터져 생고생하던 시절이다. 가져간 달러도 없고, 달마다 한국에서 생활비를 받아 쓰는 처지라 어디 마음 놓고 외식하기가 겁났다. 고국 시간에 맞춰 밤마다 환율과의 싸움을 벌이며 한푼이라도 더 유리하게 환전하려고 기를 쓰던 때라 미식가의 꿈은 일찌감치 버려야 했다. 음식기행도 문화적 체험이라며 맨해튼 맛집 순례를 계획했던 나의 꿈도 한순간에 날아갔다. 대신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요리 실력이다. 아구찜, 해물파전, 닭볶음, 생태탕 등을 맛있게 요리하게 됐다. 크림소스·토마토 스파게티도 만들 수 있게 됐다. 같이 연수갔던 후배들도 가끔 집으로 초대했는데 다들 맛있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요리 실력은 다시 도루묵이다. 주중에 밖에서 먹고, 주말에만 밥을 해먹으니 실력이 늘리 만무하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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