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광물권/오승호 논설위원

    엊그제 우연히 만난 한 군대 동기가 느닷없이 광물 자원에 대해 얘기를 늘어놓았다. 규소는 대개 산소와 결합해 SiO2로 존재한다거나 규소는 뛰어난 반도체로 실리카가 원료라는 둥…. 광물지도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증권사에 있을 때 혹시 자원개발 분야 업무를 맡았냐고 물었더니 “그런 적 없다”고 했다. 광산을 운영하던 아는 형이 있어서 10여년 전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난 2월에 증권사 임원직을 그만두고 광물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단다. 예전에 비해 얼굴이 까무잡잡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광물 개발을 위해 수시로 산을 누빈다고 하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게다. 대화가 무르익다 보니 강원도 삼척·고성 등에 3개의 광물권 등록을 했다는 것 아닌가. 군 동기회 모임도 열성적으로 참여하더니…. 도전정신이 대견스러웠다. 그는 회사를 캐나다 밴쿠버 증권거래소에 상장하는 목표를 세웠다. 프리미엄을 받고 광물권을 파는 것도 방법이지 않느냐고 했더니 손 놓지 않겠단다. 인생 이모작 준비를 단단히 했나 보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길섶에서] 백마강(白馬江) 단상/손성진 수석논설위원

    ‘니나놋집’ 분위기에 어울렸기 때문일까. 30여년 전, 대학생들이 민요풍의 옛 가요를 불렀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로 시작하는 ‘오동동타령’을 부르며 젓가락을 두드려댔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백마강’도 그런 노래다. 가보지도 못한 백마강이 친숙하게 느껴졌던 건 이 노래 때문이었다. ‘꿈꾸는 백마강’도 있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백제의 수도를 개성이라고 하는, 역사 공부가 부족한 아들과 부여 유적지를 찾았다. 부소산을 올라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의 물결은 가사처럼 고요했다. 달밤이면 더 좋았을 게다. 깨달은 건 나 또한 역사에 무지(無知)하다는 사실. 기껏 아는 게 삼천궁녀 이야기다. 여태 백마강이 금강의 지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금강 본류 부여 구간의 별칭이란다. 백마강의 유래도 처음 들었다. 당군(唐軍)을 이끈 소정방이 백마(白馬)의 머리를 미끼로 삼아 용으로 변한 백제왕을 잡아 죽였다는 전설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가을 배추농사/문소영 논설위원

    가을농사의 시작과 끝은 배추다. 김장용 배추 농사. 한반도 남부는 배추씨·무씨 파종이 아직 이를지 모른다. 하지만 겨울이 남부보다 보름 정도 빠른 서울·경기 북부에서는 8월 15일 전후로 배추씨와 무씨를 뿌려야 한다. 광복절은 도시 농부에게 그래서 아주 영광스러운 날이자 긴요한 날이다. 특히 추위에 약해 수확이 배추보다 빠른 무는 적기에 꼭 파종해야 한다. 김장용 배추는 여느 배추와 다르다. 흔히 ‘100일 배추’라고도 부른다. 8월 중순 씨를 뿌리고 12월 초 거두는 생육기간 때문이다. 김장 배추가 김치냉장고에서 1년 내내 묵은지로 오랫동안 좋은 맛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생육기가 긴 100일 배추의 단단한 육질 덕분이다. 60일 배추로는 어림없다. 또 속이 노랗고 고소한 맛도 따라갈 수 없다. 농사야말로 뿌린 대로 거두는 대표적인 일이라, 숨이 턱턱 막히는 8월의 가마솥 폭염에 밭을 정리하고 퇴비를 넣어주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최악의 시기에 준비해 최고의 결과를 얻어낼 기대감에 팍팍한 현재를 견뎌낸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중산층의 기준/문소영 논설위원

    중산층의 기준이 논란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조사에서 다수가 월급여 500만원 이상이라고 했단다. 연봉 6000만원 이상이다. 최근 정부·여당이 연봉 3450만원부터 중산층으로 삼아 증세한 조세개편안을 내놓았다가 동네북이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을 적용했지만, 국민의 중산층 감각과 괴리가 발생한 탓이다. 결국 대통령의 질타 하루 만에 연봉 5500만원으로 상향조정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지난해 각국의 중산층 기준이 화제였다. 프랑스는 ‘공분’에 참여하고 약자를 돕는 봉사활동에 꾸준히 참여할 것을, 영국은 불의·불평·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을, 미국도 사회적 약자를 돕고 부정·불법에 저항할 것 등을 기준으로 내세웠다. 반면 한국은 연봉 6000만원, 33평 아파트, 2000㏄ 자동차, 1억원 예금 등이 기준이다. 우리네 중산층이 돈으로만 환산돼 씁쓸하다. 중산층은 사회의 튼튼한 허리이자 정신적 버팀목이다. 청렴·강직한 딸깍발이 선비를 최고로 치던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변질된 것인지….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체리/최광숙 논설위원

    어릴 적 바나나는 구경하기도 힘든 아주 귀한 과일이었다. 서울에서 대학 다니던 큰오빠가 고항집에 내려 올 때 사 들고온 야구 글러브 같던 바나나송이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린 마음에 매일 바나나를 즐겨 먹는다는 원숭이마저 부러웠던 시절이었다. 수입농산물이 마구 쏟아지면서 이제 체리, 망고처럼 그림책에서나 보던 과일도 마트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 해도 이들 과일에 선뜻 손이 가는 것은 아니다. 싸지 않은 가격이 다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최근 남편과 헤어져 아이들을 홀로 어렵게 키우던,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한 30대 주부가 체리가 든 택배상자를 훔쳤다가 경찰에 잡혔다는 사연이 뉴스를 탔다. 아이들이 고등학생, 중학생이 되도록 한 번도 체리를 먹어 보지 못해 그 맛을 보여주고 싶어 그랬다니 가난이 죄이지 싶다. 배 곯는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감옥에 간 장발장이 떠오른다. 장발장과 달리 체리를 훔친 그는 검찰로부터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 안타까운 모정을 향한 법의 관용이 새삼 빛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무한도전 달팽이/진경호 논설위원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 / 뒤에 가던 달팽이가 그 말을 받아 말했다 / 걱정 마 그것들 모두 지구 안에 있을 거야 ‘달팽이의 생각’-시조시인 김원각. ‘그것들’ 중 한 놈을 어제 만났다. 지인과 마주한 식탁 위 샐러드 접시 안에, 팥알만 한 몸피와 색깔을 한 놈이, 팥알이 아니라고 항변할 양으로 두 눈 달린 더듬이를 쭈욱 빼 돌리고 있었다. 그윽한 조명이 내려앉은 접시 안에서 녀석은 음악을 타듯 느릿느릿, 그러나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사투였다. 온갖 향료가 뒤섞인 드레싱 소스에 풍덩 잠긴 채, 불에 덴 듯 맨살을 비틀고 비비 꼬았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급히 빈 접시로 옮겨 맹물 두세 숟가락으로 샤워를 시켰다. “유기농 채소라서요….” 녀석은 새 안주를 사례로 남기곤 종업원에게 이끌려 또 다른 여정을 나섰다. 시골 어느 밭에서 태어나 드넓은 채소 잎사귀 그늘 밑을 흙냄새 맡으며 어슬렁댔어야 할 녀석이 너무 멀리 왔다. 지구 안이긴 하지만…. 행운을 빈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길섶에서] 미신/문소영 논설위원

    ‘선풍기의 진화’ 이후 선풍기를 틀어 놓고 밀폐된 방에서 자면 죽는다는 주장은 미신(迷信)이라는 제보(?)가 들어왔다. 비싼 에어컨을 팔기 위한 가전사의 판매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여름마다 선풍기 주의보를 울렸던 일이 무색했다. 비위생적인 술잔 돌리기로 B형 간염에 걸린다는 세간의 상식도 미신이란다. B형 간염 백신을 대량으로 팔아야 하는 제약사의 전략이었다는 설명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고 백두대간에 쇠말뚝 등을 박았다는 이야기는 8·15 광복절 전후로 자주 들어오던 이야기다. 과연 쇠말뚝이 한반도 영웅의 탄생을 막았는지 그 진위를 따지기보다 그저 분노했다. 한동안 뜸하더니 최근 민족정기를 막고자 일제가 혈맥을 눌러놓은 목돌이 발견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기 전부터 이미 서양식 사상과 철학에 동화됐는데, 왜 이런 엉뚱한 일을 벌였을까. 풍수에 집착한 조선인의 감정을 악용한 심리전 아니었을까. 광복 68주년이다. 왜곡된 민족 감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말복/서동철 논설위원

    일요일 출근길 자유로를 달리는데 소형 트럭이 급하게 앞지르기를 했다. 빨리 달리는 것이 걱정스러울 만큼 낡은 트럭이었다. “무슨 바쁜 일이라도 있나” 하면서 시선은 자연스럽게 트럭 적재함으로 옮아갔다. 처음에는 누런 털 빛깔이 닮아 송아지인가 했다. 다음 순간 송아지를 저렇게 마구잡이로 몰아 싣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였다. 그러고 보니 말복 전날이다. 차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트럭을 한동안 따라가야 했다. 복달임에 쓰려는 것이라면 저들의 삶은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돌렸다. 내가 먹은 것도 저런 모습이었겠지…. 개고기를 먹는다고 한국을 비난하는 프랑스 여배우의 목소리가 시끄러울 때의 일이다. 딸아이와 식당에 갔는데, 비빔밥이 맛있다는데도 기어코 보신탕을 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외국인들이 떠들수록 우리 문화를 지켜야 한다면서…. 기특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보신탕 먹겠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머리와 마음의 괴리 때문일까.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동네 이발소/박건승 논설위원

    10년 넘게 다니던 동네 이발소가 있었다. 고희를 훌쩍 넘긴 할아버지는 이발을, 몸이 약간 편찮아 보이는 할머니는 면도를 해주고 머리를 감겨주는 분담 방식이었다. 그러고 나서 노부부가 받는 돈은 8000원. 저녁 늦게까지 이발소 사인보드가 멈춘 것을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일요일·공휴일도 예외가 아니다. 10대에 시골에서 상경한 뒤 할아버지는 줄곧 이발소에서 일해 왔다고 했다. 그 이발소를 고집한 것은 요금이 싸다는 점 말고도 차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열번 가면 아홉번은 곧바로 머리를 손질할 수 있는 전용 이발소였던 셈이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길에 보니 표시등이 돌지 않았다. 근처 가게주인에게 물어보니 손님이 없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보일러 전문점으로 아예 문패를 바꿔 달았다. 허탈감이 든다. 삶의 소중한 것 또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안타까움에서다. 할아버지의 미소와 가위질 솜씨가 그리워진다. 이젠 어쩔 수 없이 이발소 대신 미용실을 다녀야 할 것 같다. 박건승 논설위원 ksp@seoul.co.kr
  • [길섶에서] 스님과 인조 소고기/서동철 논설위원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도가 지켜야 할 계율 가운데 첫번째가 불살생계(不殺生戒)다. 그러니 살생이 동반될 수밖에 없는 육식을 하면 당연히 계율을 어기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 불교에서는 비교적 육식에 너그러웠다고 한다. 동남아시아 불교에서는 탁발하여 발우에 담긴 고기는 먹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교경전 ‘마하승기율’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부처가 머물렀던 사찰 기원정사의 비구가 탁발을 나갔는데, 고기조각을 물고 날아가던 새가 발우에 그것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기원정사 장로들은 그 고기를 먹어도 파계는 아니라고 결론지었다는 것이다. 스님이 육식을 하건, 안 하건 특정 종교의 내부 계율일 뿐이다. 그렇다 해도 메뉴라고는 고기뿐인 식당에서 스님과 마주치면 내가 더 쑥스럽다. 소의 근육 줄기세포를 배양한 인조 소고기의 시식행사가 열렸다는 런던발 뉴스는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다. 살생의 결과가 아니니 스님들이 이 고기는 먹어도 되는 것일까. 소를 숭배하는 힌두교도는 또 어떨까. 과학기술의 발전이 오래된 종교에 새로운 정의(定義)를 강요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매미/정기홍 논설위원

    긴 장마 끝에 된더위가 왔나 싶었는데, 불청객이 하나 더 생겼다. 매미떼다. 얼마 전에 “매미소리가 시끄러워 운동 코스를 옮겼다”는 이의 말을 듣고 피식 웃어넘겼다. “고작 매미소리에 그리 예민해서야….” 웬걸, 며칠간 매미소리를 겪어 보니 그 시끄러움이 보통을 훨씬 넘어선다. 매미소리가 ‘여름연가’로 들리지 않은 지 오래지만 올해는 유독 드세다. 그도 생물인지라, 긴 장마에 목놓아 울지 못해 애간장이 탔던 것일까. 가장 시끄러운 왕(말)매미의 울음은 80~90dB(데시벨)로, 대형트럭이 지나는 소리 정도란다. 주택가의 낮 소음기준치가 65dB이고, 낮의 층간소음 상한이 58dB이니 음높이가 꽤 높은 편이다. 아프리카에는 기차소리와 비슷한 106~109dB로 울어대는 매미도 있단다. 매미 울음은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는 사랑의 소리라고 한다. 울음이 그들 누리의 ‘속삭임’이겠지만, 가뜩이나 전력난을 겪고 있는 올해 한여름 더위 먹은 나에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가치다. 슬프게도 ‘여름 전령사’ 매미가 정녕 도심의 공적이 된 것일까.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무간도’와 ‘디파티드’/문소영 논설위원

    ‘무간도’(無間道)는 불교의 18층 지옥 가운데 가장 낮은 층의 지옥으로, 죽지도 않고 영원히 고통을 겪는 곳이다. 2002년 나온 홍콩 누아르 ‘무간도’는 2006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리메이크해 ‘디파티드’(The Departed)로 새로 태어났다. 리어나도 디 캐프리오, 맷 데이먼 등이 출연한 이 영화를 주말에 TV에서 봤다. 2007년 아카데미영화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4관왕을 차지한 작품이다. 그런데 량차오웨이·류더화 주연의 원작 ‘무간도’와 같으면서 많이 달랐다. 마치 중국 만두 샤오롱바오가 서양으로 넘어가 이탈리아식 만두 라비올리가 된 것과 비슷한 차이라고나 할까. 원작을 번역하거나 재구성할 때는 보통 수용자의 이해를 위해 현지의 사정과 실정에 맞춘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의 변형은 불가피하다. 무간도에는 홍콩 경찰청만 나오지만, 디파티드에는 미국의 주 경찰청과 연방수사국(FBI)이 같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도 그 나라의 실정을 고려해 변형하게 된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대체 원형에서 얼마나 변형된 것일까.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다림질/문소영 논설위원

    30여년 전 친구에게서 어머니가 속옷까지 다림질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속으로 ‘시간이 남아도시나?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없으신 건가?’라고 생각하면서도, “필요하면 직접 다려 입어!”라고 친구에게 퉁을 놓았다. 나이 40이 넘어 어렵게 얻은 딸에게 연로한 어머니가 너무 지극정성이었던 거다. 돌아보면 우리 세대의 엄마는 늘 헌신적이었다. 그런 엄마들 뒷바라지 덕분에 대학도 가고 직장도 얻었지만, 그 엄마를 닮은 헌신적인 엄마는 되지 못하는 인생이 우리 세대의 아이러니다. 공주님처럼 살아서, 오히려 자녀를 종부리듯 하는 엄마가 돼 있기도 하다. 습도 90%에 가까운 장마철에 집안이 끈적끈적하고 입을 옷도 눅눅해 처박아 두었던 다리미를 잡았다. 세탁소에 맡길지언정 평소 안 하던 일이다. 다림질을 막 마친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으니 약간 따뜻하고 뽀송뽀송해 눅눅한 기분이 확 날아갔다. 친구의 어머니는 딸에게 쉽지 않은 세상을 뽀송뽀송하고 따뜻한 기운으로, 반듯하게 살기를 기원하며 다림질을 했을까? 다림질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다니, 너무 덥고 습한 날씨 탓이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복달임 팥죽/정기홍 논설위원

    죽집을 지나다가 이맘때 솥단지에서 팔팔 끓인 팥죽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인들에게 “왜 한여름에 뜨거운 기운의 팥죽을 먹었을까”라고 물었지만 제대로 아는 이가 없다. 어린 때라 달콤한 팥죽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후딱 먹어치웠던 기억만 있다. 한여름 팥죽에 깃든 깊은 뜻은 모른 채···. 알고 보니 팥죽을 동짓날뿐 아니라 ‘복죽’이라 하여 삼복에도 즐겨 먹던 보양식이다. 몸의 피로를 풀고 약해진 소화기능을 보강해 준다고 한다. 동의보감에는 소갈증과 설사에 효험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궁중에선 복날에 팥죽을 쑤어 먹었다고 전한다. ‘복날 죽을 쑤어 먹으면 논이 생긴다’는 속설도 기(氣)를 보강하는 뜻일 게다. 팥죽을 겨울과 여름철 보신음식으로 삼은 선조의 지혜가 읽힌다. 올해는 중복과 말복의 간격이 10일이 아니라 20일 차가 난다. 달을 건너뛴다 해서 이를 ‘월복’(越伏)이라 부른다. 말복이 10여일 더 남은 셈이다. 복날 삼계탕집 앞에서 줄 설 게 아니라, 죽집에 들러 팥죽 한 그릇 후루룩 해치우는 것도 몸을 추스르는 방법이겠다 싶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지리산 종주/최광숙 논설위원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 5명과 지리산 종주팀을 꾸렸다. 하동 친구집에서 하루 묵은 뒤 구례 화엄사에서 노고단 길을 오르는 것으로 지리산 산행은 시작됐다. 쨍쨍 내리쬐는 무더위에 텐트까지 짊어지고 뱀사골을 거쳐 가파른 세석산장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고행이 따로 없었다. 지리산의 험하고 깊은 산세를 보면서 빨치산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은 것도 이해가 됐다. 힘들어도 천왕봉의 고지를 향한다는 마음 하나로 전진했다. 하지만 장터목 산장 못 미쳐서 갑자기 폭우를 만났다. 속옷까지 다 젖을 정도로 비바람은 세찼다. 예상치 못한 장마의 심술에 당초 3박 4일의 완주 코스는 이틀 더 연장됐다. 돌변한 자연 앞에 무력해진 우리들로서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떠내려온 흙과 넘쳐난 계곡물이 순식간에 등산길을 삼켜버리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무서웠던 기억이 새롭다. 최근 일본 등산길에 한국인 4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연 앞에 서면 한없이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절필/박현갑 논설위원

    초등학교 때다. 어버이날 등굣길에 장례행렬을 봤다. 내 또래 아이가 어머니 영정사진을 들고 있었다.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는 날, 영정사진을 안고 있는 모습은 그날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날의 단상을 일기로 남겼다.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담임 선생님은 칭찬 글을 남겼다. 이웃의 불행이 내 성장의 자양분이 된 셈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문인 217명이 절필 선언을 했다. 최근 표현의 자유가 무시되는 현실에 항의한다며 절필을 선언한 안도현 시인을 기소한 검찰의 공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행동이다. 안 시인은 지난 연말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가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소장하고 있다는 의혹을 트위터에 제기했다. 이후 검찰이 선거법 위반혐의로 기소하면서 절필을 선언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공감할 만하다. 하지만 절필은 아쉽다. 뚱딴지 같은 소리가 난무하는 세상일수록 작가의 펜은 더 빛을 발해야 하지 않나. 초등학생 시절, 일기를 쓰던 심정으로 나라도 써야겠다. 박현갑 논설위원 eagleduo@seoul.co.kr
  • [길섶에서] 뿌리의식/최광숙 논설위원

    휴가 때 고향에 다녀왔다. 사촌 결혼식 이후 2년여 만이다. 이제 고향에 머문 시간보다 서울에 산 시간이 1.5배나 길지만 여전히 서울은 타향일 뿐이라는 것을 이번에 새삼 느꼈다. 고향 땅을 밟으니 그간 타향살이의 고달픔을 맨 먼저 입맛이 알아챈다. 똑같은 옥수수이건만 고향 옥수수가 더 차지다. 내리 사흘 점심을 감자 옹심이와 감자 송편을 먹었는데도 돌아서면 또 먹고 싶다. 오랜만의 고향길이니 일가 친척들을 찾아 뵙는 것은 빠질 수 없는 일. 지난해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홀로 되신 작은어머니를 모시고 점심 식사를 했다. 이모를 비롯해 외삼촌 등 외갓집 식구들과도 회포를 풀었다. 70~80대 노인들이지만 조카들과의 만남이 반갑고 좋으셨던지 저녁 식사자리가 급기야 2차 술자리로 이어져 밤늦도록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모님 살아생전에는 몰랐는데 이제 철이 들었는지 친척들을 뵈면 나의 ‘뿌리’를 되새기게 된다. 그들의 얼굴과 삶 속에서 돌아가신 부모님도 만나게 되고, 나아가 현재의 나도 새삼스레 만나게 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자살씨앗’/문소영 논설위원

    텃밭에서 옥수수 두 자루를 수확했다. 옥수수가 과연 열릴 것인지 걱정이 컸던 만큼 기쁨은 두 배였다. ‘씨앗을 뿌리면 수확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닌가’라고 물으면 세계 씨앗 시장의 현실을 모르는 것. 씨앗 시장에 나오는 종자들은 더 이상 농부의 것이 아니다. 1만 2000여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농사를 지어 온 농부들은 훌륭한 종자를 보관했다가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미국의 몬샌토 같은 다국적 종자회사의 등장으로 2세대 생식능력을 제거한 종자가 판매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생식능력을 없앤 잔혹한 터미네이터 기술의 산물, 이른바 ‘자살씨앗’이 주범이다. 번식력을 원천적으로 제거해 버렸으니 자살씨앗의 2세를 뿌리면 수확을 망친다. 씨를 뿌리지 않아도 텃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들깨는 잎을 얼마든지 뜯어 먹을 수 있지만, ‘씨’를 수확할 수는 없는 것이 그 사례다. 지난해 딴 옥수수가 딱딱해 먹지 못하고, 버리기도 아까워 겨우내 말렸다가 올봄에 씨를 뿌렸다. 그런데 자살씨앗의 운명을 물리치고 강력한 생명력을 피워냈다. 어찌 기쁨이 두 배가 아니겠는가.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선풍기의 진화?/문소영 논설위원

    멀쩡한 에어컨을 두고 국가적 절전에 동참하고자 올여름 두 대의 선풍기를 샀다. 7월 초에 산 선풍기는 앞발을 가지런히 모은 듯한 버튼식. 미풍과 강풍이 있는 평범한 것이다. 일주일 전에 새로 산 선풍기가 어제 도착해 조립해 보니 리모컨으로 작동하고 ‘수면풍’이라고 해 바람이 스스로 세졌다 약해졌다 했다. 잠이 스르륵 들 것만 같다. 한 달도 안 된 사이에 비슷한 가격대의 선풍기 기능이 너무 다르다 보니 ‘선풍기의 진화’가 아니냐며 희희낙락했다. 그런데 이 선풍기를 자랑했다가 곧 바보가 됐다. 수면풍은 이른바 ‘자연풍’이라는 이름으로 수년 전부터 판매됐던 것이고, 선풍기가 리모컨으로 작동된 지도 오래됐단다. 오히려 “요즘은 날개 없는 선풍기가 최신 유행이야”라며 구박까지 한다. 옆에서도 거든다. “에어컨도 놀라워. 디자인이 아름다운 데다 동상에 걸릴 정도로 시원해.” 에잇! 5만원짜리 ‘진화한 선풍기’를 발견했다고 어제 저녁만 해도 즐거웠는데, 괜히 자랑했다. 기술의 진화가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사정을 내처 몰랐더라면 바보 같은 즐거움이 일주일은 갔을 텐데.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다찌?/손성진 수석논설위원

    휴가를 이용해 경남 통영의 ‘다찌집’에 친구들과 갈 기회가 생겼다. 과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온갖 싱싱한 해물들이 차례로 나온다. 생선회, 바다고동, 문어, 해삼 초회와 내장, 보리새우, 전어구이, 성게알, 삶은 게, 개불 …. 산해진미란 이런 것일까. 특히 미더덕 회는 처음이었다. 다찌는 통영만의 독특한 술 문화다. 메뉴판에는 술 종류와 가격만 적혀 있다. 안주 값은 따로 받지 않고 술값에 포함돼 있다. 다찌집을 처음 찾는 사람은 세번 놀란다고 한다. 저렴하고 푸짐하고 맛이 좋아서다. 맛있게 먹으면서도 다찌라는 이름 때문에 꺼림칙했다. 주인도 어원을 알지 못했다. 친구는 선술집이라는 뜻의 일본어 ‘다치노미’에서 나왔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렇지만 다찌집은 일본 음식과는 거리가 멀고 일본인들이 오지도 않으며 서서 먹는 곳도 아니다. 궁금증을 풀려고 인터넷을 찾아보다 기분이 더 상했다.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한국 여성을 가리키는 은어도 ‘다찌’라는 것이다. 다찌집, 지금이라도 이름을 바꿔야 해!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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