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엄마손 김밥/정기홍 논설위원

    불황기에 눈길이 더 가는 게 서민들의 사는 모습이다. 집 근처 지하철 통로에는 오래전부터 30대 후반의 아주머니가 자리를 지키며 김밥을 판다. 이태 정도로 여겨지는데, 홀로 지키던 김밥 좌판이 요즘 문전성시다. 지난 토요일 아침 나절에도 젊은이들이 수월찮게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참 미련하다는 생각을 가졌을 정도였다. 유동인구가 많지 않아 하루벌이 삼아 나왔겠거니 했는데, 세월에 숙성된 김밥 맛이 이제서야 입소문을 타는 모양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다. ‘엄마손 김밥’이란 삐뚤삐뚤하게 쓴 간판(?)도 큼지막하게 다가왔다. 며칠 전, 그 옆에 60대로 보이는 할머니가 떡 좌판을 깔았다. 짐작하건대 김밥 아주머니가 손님을 끌자 손수 빚어온 떡을 팔려고 나온 것 같다. 몇 가지 상념들이 스쳐갔다. 불경기는 우리에게 밀려왔지만 언젠가는 밀려갈 것이다. 희망이란 단어에 따옴표를 꾹 눌러 찍어본다. 이 할머니에게도 ‘희망’은 있다며….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낙산/서동철 논설위원

    서울 대학로 뒷산인 낙산은 지명의 유래를 두고 몇 가지 설이 있다. 낙타를 닮아 낙타산이라고 불리다 낙산으로 굳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지만, 조선시대 소의 젖을 짜서 신하들에게 나눠주던 타락색(駝酪色)이라는 목장이 있어 타락산이 됐다는 이야기도 그럴싸하다. 하지만 한양 도성의 우백호인 인왕산(仁旺山)은 부처의 수호신인데, 좌청룡은 낙타나 소젖이라니 싱겁다. 우연히 낙산 동남쪽 기슭 창신동의 안양암에서 화강암 절벽에 새긴 관음보살을 봤다. 불교에서는 관음보살이 인도 남쪽 바닷가의 포탈라카에 살고 있다고 가르친다. 포탈라카를 음역한 보타락가(補陀洛迦)를 흔히 보타산, 타락산, 낙가산, 낙산이라고 부른다. 1909년 조성한 안양암의 관음보살은 옛 사람들이 서울의 낙산 역시 양양 낙산사와 같은 관음의 상주처로 여겼음을 알려준다. 안양암은 지금 한국미술박물관의 사찰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안양암과 마애 관음보살의 상징성이 대표적 달동네의 하나인 창신동을 문화적으로 재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중년 과로/정기홍 논설위원

    며칠 전, 살갑게 지내는 40대 후반의 공직자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근에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던 터라 온종일 충격으로 다가왔다. “뇌출혈이라면 필시 말이 어눌해지고, 심하면 팔과 다리 등 신체 장애가 온다던데….” 불길한 생각에 그의 동료에게 전화를 넣었더니 “사고 이틀 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겼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천운(天運)이었다. 뇌출혈은 대응이 늦으면 치명적이라는데, 사고 20여분 만에 병원으로 옮겼다니 다행히 대처가 무척 빨랐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평소 새벽 6시에 나와 오후 7시 30분까지 강행군을 한다. 월요일이면 새벽 4시 30분에 출근한다고 했다. 중년의 과로는 졸지에 건강을 송두리째 앗아갈 수 있다. 그에게도 며칠 전 과로에 따른 이상 징후가 있었다고 했다. 몸 관리는 평소에 해야겠지만, 사고 때 우왕좌왕하지 않아야 한다. 그의 직장이 안전행정부이니 장관께 ‘직원 안전’도 한번 챙기시라고 권해야 할 듯하다. 전화 속 그의 목소리가 아주 힘있게 들려 안도했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떠난 자리/최광숙 논설위원

    최근 점심 자리에서 낙마한 공직 후보자들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한 공직자가 불만을 토로했다.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느라 2주일가량 밤 늦게까지 일했단다. 쏟아지는 의혹에 대한 해명 자료를 만드느라 생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후보자가 갑자기 자진 사퇴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자신을 위해 그리 열심히 뛴 공무원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동안 고생했다 ”는 말 한마디 없었단다. 물러나는 이에게 무슨 경황이 있으랴.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사퇴 전날까지 아낌없이 도움을 받아놓고 뒤도 안 돌아 보고 나몰라라 내뺀다면 어찌 좋은 소리를 듣겠는가. 사람의 일면만을 보고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것은 물론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사람은 떠나간 자리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 만남이 소중한 만큼 헤어짐 또한 소중하다는 점이다. 들고 날 때의 처신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공직 낙마자들이 물러남의 미학만이라도 보여줬으면 동정이라도 살 텐데 이중삼중으로 씁쓸한 요즘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남편 렌털/오승호 논설위원

    경기가 불황일 때 웃는 업종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대여(렌털)사업. 렌털 시장 규모는 2006년 3조원에서 지금은 10조원대라고 한다. 렌털 수요는 정수기나 사무용품 등 전통적인 제품에서 텔레비전, 냉장고, 컴퓨터 등의 전자제품과 침대 매트리스, 피아노 등 악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소비 패턴이 소유에서 렌털형으로 재편되는 양상이다. 초기 비용 부담이 적고 관리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영향이 클 것이다. 욕구 충족을 위해 명품 가방이나 정장, 신발, 일상복까지도 빌리는 20~30대들도 적지 않다. ‘렌털 세대’, ‘무소유 전성시대’라는 표현이 나올 만하다. 미국에서도 20~34세를 중심으로 렌털에 의지해 생활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2008년 금융 위기로 경제적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상품 구매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 우리나라에는 남편 렌털도 있단다. 골드 미스들이 부부 동반 모임 등을 할 때 돈을 주고 남편 역할을 할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란다. 렌털 비즈니스가 너무 ‘진화’하는 것은 아닌지, 곰곰 생각해 보게 한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길섶에서] 나무노래/함혜리 논설위원

    많은 종류의 나무들을 마주하게 되지만 정작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몇 가지뿐이다. 우리 땅에 사는 나무들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식물도감 ‘한국의 나무’ 저자와 천마산에서 자연 탐방을 했다. 걸어다니는 자연백과사전과 함께하니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겨울눈으로 나무를 분간하는 법을 비롯해 등산하면서 자주 보았던 흰꽃이 피는 나무의 이름이 귀룽나무이고, 나무가 말라 죽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달려드는 게 하늘소라는 것 등등. 자연은 정말 풍요롭고 경이로운 교과서였다. ‘나무노래’라는 재미난 구전 동요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오자마자 가래나무/십리 절반 오리나무/ 낮에 봐도 밤나무 /목에 걸려 가시나무/ 깔고 앉자 구기자나무/ 그렇다고 치자나무’ 인터넷도, 식물도감도 없던 시절엔 이런 노래로 나무 구분법을 익혔을 것이다.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잠시 땀을 식히는 동안 나무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요즘 아이들이 이런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밥그릇 부처/서동철 논설위원

    가수 주병선이 1989년 발표한 ‘칠갑산’은 국악가요로는 유례없이 크게 히트했다. 지금도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로 시작하는 노래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칠갑산은 충남 청양의 명산이지만, 과거엔 그 첩첩산중에서 화전을 일구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노래 또한 화전민 어머니가 먹을 것과 바꾸어 어린 딸을 민며느리로 보내는 애끊는 사연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칠갑산 들머리에는 ‘콩밭 매는 아낙네상(像)’도 세워졌다. 칠갑산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장곡사가 나온다. 하(下)대웅전의 약사여래는 중생을 병고에서 구제하는 부처다. 그런데 이곳의 약사부처는 약사발 대신 밥그릇을 들었다. 포슬포슬 잘 지은 밥을 고봉으로 담았다. 약사여래가 조성된 14세기 중엽의 청양 사람들은 약보다 밥이 더 소중했을 것이다. 가난한 이웃에게는 끼니를 거르지 않게 하는 것이 곧 고통에서 구해주는 약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다. 밥그릇 부처에 담은 옛사람의 마음 씀씀이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진정한 호강/최광숙 논설위원

    몇 달 전 쉬는 날을 이용해 잠시 회사에 다녀갔던 초등학교 3학년 조카가 일기장에 “이모는 회사에서 호강하고 있었다”고 쓴 것을 보고 한참을 웃었던 적이 있다. 웬 호강? 학교 교실 자신의 작은 책상과 비교해 책꽂이, 노트북이 놓여진 나의 큰(?) 책상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커피에 초코파이, 사탕과 같은 간식거리까지 봤으니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얼마 전 그 조카가 나의 손톱을 ‘꽃단장’해 줬다. 은빛 바탕에 황금빛의 크고 작은 물방울이 알알이 박힌 매니큐어 스티커를 내 손톱에 붙여준 적이 있다. 요즘 손톱에 매뉴큐어를 예쁘게 칠한 뒤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행인데 그 네일 아트의 ‘짝퉁’인 셈이었지만 그런대로 예뻤다. 주말 집에 놀러온 조카가 알로에를 사 왔다. 호기심이 많은지라, 책에서 알로에를 갈아서 마사지를 한다는 내용을 읽고 직접 실행에 옮기겠다고 나선 것이다. 덕분에 마사지 혜택을 받아보지 못한 푸석푸석한 얼굴이 조카 덕분에 뽀송뽀송해졌다. 호강이 뭐 별건가. 요즘 조카 덕분에 ‘호강’한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평범한 전관/최광숙 논설위원

    최근 광화문 사거리에서 한 전직 장관을 봤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운전기사가 딸린 관용차를 타고 다녔을 그가 도심 한복판을 홀로 걷고 있으니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수행 비서가 챙기고 다녔을 서류 가방은 이젠 그의 손에 들려 있다. 재킷 안에 검은 터틀넥을 입은 편안한 옷차림도 한결 자유로워 보인다. 일상의 시민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예전에 한 중진 의원이 동네 목욕탕만을 고집하는 이유를 말한 적이 있다. “잘나갈 때 호텔 사우나만 다녔다. 그런데 낙선한 이후 형편이 좋지 않은데도 선뜻 동네 목욕탕을 못 가겠더라. 훗날을 생각해 미리 대중탕을 다니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관직에서 벗어나면 그 이전의 삶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로펌 등에서 전관(前官) 예우를 받는 이들도 있지만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소소한 일상을 즐기며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며칠 전 본 그 장관도 또 다른 명예나 이익을 좇지 말고 동네 목욕탕을 다니는 보통 사람들의 삶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솔로 이코노미/오승호 논설위원

    점심시간 때 간혹 ‘혼자 밥먹기’를 시도한다. 현직에 있을 때야 뭇 사람들과 식사를 하지만, 은퇴 이후엔 그러지 못할 상황에 대비한 일종의 적응 훈련이다. 식사를 혼자 하면 외톨이가 된 느낌이고, 밥 맛이 없어 소화가 안 된다고도 한다. 이젠 그런 걱정은 덜 해도 되는 시대인 것 같다. 혼자 식당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단다. 혼자 식사하러 오는 손님 비율이 전체의 40%나 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1인 손님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도록 식당 구조를 바꾼다. 싱글족이 늘어나는 추세와 무관치 않다. 1인용 밥솥, 미니 냉장고, 과일 소포장…. 1인 가구를 겨냥해 제품을 판매하는 ‘솔로 이코노미’(Solo economy)가 성장세를 탈 기세다. 1인 가구의 전체 시장 규모는 8조원으로 추정된다. 침실만 혼자 쓰고 거실이나 주방, 휴식공간 등은 여러 가구가 함께 쓰는 셰어하우스(Share house)나 코하우징(Co-housing)이 우리나라에도 등장하고 있다. 1인 가구는 세계적 추세다. 우리나라도 25%를 웃돈다. 새로운 핵가족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을 넓히는 데 신경써야 한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길섶에서] 바람꽃/함혜리 논설위원

    변산반도 국립공원을 유명하게 만든 것 중 하나가 변산바람꽃이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발견돼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 땅의 봄 소식을 가장 빨리 알리는 야생화다. 이달 초 내변산에 트레킹 갔을 때가 마침 개화기여서 바람꽃을 볼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누런 낙엽들 사이에 적지 않게 피어 있었다. 10㎝도 채 안 되는 풀 끝에 달려 있는 앙증맞은 하얀 꽃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났음을 생각하니 더욱 감동으로 다가왔다. 일주일 뒤 남양주의 천마산에서 비슷하게 생긴 야생화를 발견했다. 이건 ‘너도바람꽃’이란다. 알고 보니 풍도바람꽃도 있고, 꿩의바람꽃도 있다. 생김새는 모두 비슷하다. 바람꽃이 피기까지 최소 7년이 걸린다고 한다. 차가운 땅속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나와서 햇볕을 쪼이다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한 해를 기다린다. 이러기를 수차례 한 뒤에야 꽃을 피운다.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 우리에게 무한한 행복을 안겨 주고서 말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광화문 장터/최광숙 논설위원

    몇년 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연수하던 시절의 일이다. 일주일에 한번 학교 앞에는 장이 섰다. 농부들이 인근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을 가져와 파는 파머스 마켓이다. 학생들은 물론 주민들도 즐겨 찾곤 했다. 그때 처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재배한 식품인 ‘로컬 푸드’가 인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파는 야채나 과일 등은 농약을 뿌리지 않고 키운 것이어서 영 볼품이 없었다. 새가 쪼아 먹어 일그러진 사과, 들쭉날쭉한 크기의 당근이며 감자들…. 일반 시장에서는 상품성이 없어 도저히 팔 수 없는 ‘못난이’였지만 오히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믿음을 줬다. 집에서 직접 구워 온 빵과 쿠키도 그 소박한 맛과 멋에 순식간에 팔려나가곤 했다. 거기엔 진실이 있었다. 80년 전통의 미국 파머스 마켓에 비하면 우리 ‘도심장터’ 풍경은 여전히 낯설다. 그제 열린 활기찬 광화문 장터는 그래서 더욱 반갑다. 옷가지 등 쓰던 물건과 함께 자잘한 수제품을 파는 이들이 눈에 띄었다. 내친김에 신선한 우리 농산물을 믿고 사먹을 수 있는 ‘친환경 장터’로 한 걸음 진화했으면 좋겠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낙불가극(樂不可極)/정기홍 논설위원

    며칠 전 책장을 정리하던 중 빛바랜 노란 메모지가 툭 떨어졌다. ‘낙불가극’(樂不可極). 오래전 한 공직자가 장난기로 적어 건넨 것으로, 자료 꾸러미에 넣고선 잊고 있었다. 즐거움을 너무 누리지 말라는 뜻이다. 중국 고전 예기(禮記)의 ‘오불가장(傲不可長) 욕불가종(欲不可從) 지불가만(志不可滿) 낙불가극(樂不可極)’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는 하찮은 ‘곳’과 ‘것’에서 가끔 의미 있는 큰 발견을 한다. ‘낙불가극’도 비슷했다. 그와 알고 지낸 일상들이 사다리 타기처럼 이어졌다. 하잘 것 없고 작은 것도 추억을 반추하는 힘은 더 센 것 아닌가. 많은 것이 어기대는 요즘, 고사성어의 성수기다. 글쟁이들이 고사성어를 자주 인용하면 나라가 태평스럽지 않다고 하는데···. 새 정부의 고위 공직자 임명 작업이 한창이다. ‘낙불가극’은 당나라 대신 위징이 창업 공신들의 기강해이를 우려해 태종에게 상소한 내용에도 들어 있다. 박근혜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이 1년 후 어떤 사자성어로 짚어질지 궁금해진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점심 효도/임태순 논설위원

    회사 인근 식당에서 친구와 늦은 점심을 했다. 직장인들이 한번 다녀갔기 때문인지 식당은 한산했다. 건너편에선 젊은 부부와 노부부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 자연스레 시선이 갔다. 집안과 손자, 손녀들 이야기에 식사는 뒷전이었다. 아들 부부가 직장 근처 식당으로 부모를 초청해 점심 대접을 하는 자리였다. 평일 부모 초청 점심은 아주 좋은 ‘효도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소일하는 부모님으로선 자녀 또는 사위, 며느리 얼굴도 보고 시내로 소풍 가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자주 찾아 뵙지 못하는 맞벌이 부부들도 점심을 나누며 조금이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다. 추위가 한풀 꺾인 얼마 전 청계천을 거닐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 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개중에는 부부 또는 친구들끼리 마실 나온 어르신들의 모습도 적지 않았다. 아마 봄기운에 집 안에 있기에는 답답했을 것이다. 바야흐로 ‘점심효도’하기 좋은 계절이다.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명예회복/오승호 논설위원

    전직 공무원 A씨는 요즘 부인이 짜증을 낸다고 귀띔했다. 기분 전환을 위해 함께 해외 여행을 갔다 왔는데도 화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란다. 집안 사정이어서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지만, 남편이 억울한 일을 당해 공직 생활을 일단 중단하고 집에 있게 되면서 빚어지는 현상이 아닌지 추측해 본다. A씨는 금품을 받은 혐의로 사법처리된 이후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회복을 위한 마지막 단계를 남겨 놓고 있다. 3심에서도 무죄가 확정될 경우, 그동안 겪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실추된 명예는 누가 보상해 줄까. 금융인 출신 B씨도 명예회복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다. 2심에서 일부 유죄 판결이 나왔지만, 대법원에서 역전극을 기대하고 있다.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회사를 그만둬야 했지만, 반드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 복직한 뒤 사표를 쓰고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의도한 대로 일이 풀리길 빌어본다. 공공기관 물갈이 인사가 예고됐다. 의도적인 흠집내기나 모함, 투서로 멀쩡한 사람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길섶에서] 당산나무/함혜리 논설위원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내소사 경내에 들어서자 아름드리 고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수령이 약 1000년인 느티나무였다. 지름이 7.5m나 되는 밑둥에 새끼줄을 굵게 꼬아 만든 금줄이 둘러쳐져 있다. 고목에는 아직 새 잎이 나오진 않았으나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 끝에선 푸르스름한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나무 곁에 잠시 머물렀다. 묵묵히 서 있을 뿐이지만 넉넉한 존재 자체가 큰 위로를 준다. 기나 긴 세월 절마당을 지키며 얼마나 많은 소원을 들었을까마는 지친 기색도 없다. 소원 하나를 살며시 보태 본다. 내소사 일주문을 나서니 바로 앞에 고목 한 그루가 또 있다. 역시 금줄을 두르고 있는 이 느티나무의 나이는 700년.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 전날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내는데, 내소사 마당에 있는 할머니 당산나무 아래에서 먼저 지내고 일주문 밖 할아버지 당산나무 아래서 마무리를 한단다. 1000살 할머니 나무와 700살 할아버지 나무. 오랜 세월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아 온 나무들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병과 오진/정기홍 논설위원

    #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수주일째 계속된 선배의 쉰 목소리에 “병원에 가보라”고 했더니 “의사가 목이 조금 부은 정도라 한다”며 쓸데없는 걱정이란 말투다. 그의 자존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지상파방송의 목건강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다가 기분이 언짢아 채널을 돌렸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은 내가…”라며 뻐기던 그 선배는 요즘 병원에 자주 들러 진단을 받는다. # 병원을 다녀온 아내가 시무룩하다. “지방 병원의 오진으로 갑상선암 수술을 한 게 후회된다”는 한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서 “내 수술도 오진이었을까”하는 생각에 의사의 얼굴 보기가 싫었단다. 요즘에도 “수술 전에 몇 군데 더 다녀볼걸 그랬나”라며 낙심이 크다. 수술한 의사에 대한 불신이다. 50대의 두 건강 자화상이다. 의사가 들으면 초풍하겠지만 오진 사례는 심심찮게 들리고, 그 연유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경우가 있다. 의사도 사람일진대 오진(誤珍)과 과진(過珍)은 있지 않겠는가. 병원에 자주 가든, 주치의를 믿든 그게 건강하고 길게 사는 방편이라면 옳은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게 잘 안 될까.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횡재/서동철 논설위원

    주말,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에 가볼까 하고 길을 나섰다. 경원선과 나란한 국도3호선을 타고 달리다 보니 신탄리역 앞에 막국수집이 보였다. 친절한 주인아저씨는 손님들이 막걸리를 따라주려 하자 “일할 때는 절대로 술을 안 마신다”며 손사래쳤지만, 낯빛은 벌써 불콰했고 결국 못 이기는 척 잔을 잡았다. ‘음주 제조’한 것이 틀림없는 막국수는 투박한 대로 순수한 맛이었고, 철철 넘치게 덤으로 담아준 사리에 마음까지 불러왔다. 우연한 횡재였다. 도피안사는 불사(佛事)가 한창이었다. 전쟁 통에 불타 버린 대적광전을 휴전 직후 이웃한 군부대가 나서 형편대로 복원했지만, 스님들은 흡족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주인인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은 가설 법당에 옮겨 모셔 놓았다. 흔치 않게 대좌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는 이 통일신라 철불은 조성한 내력을 꼼꼼하게 등에 새겨놓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불사 덕분에 옛 법당에선 수미단에 가려 있던 대좌의 아름다운 귀꽃과 신라인의 필치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기대하지 않은 횡재의 연속, 반나절 소풍에서 얻은 즐거움이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소극장 비빔밥/정기홍 논설위원

    서울 창덕궁 인근 북촌에서 소극장을 운영하는 후배가 얼마 전 극장 옆에 비빔밥집을 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소극장과 비빔밥이라…. 둘 간의 연결 고리를 찾으려니 생뚱맞은 구석은 있다. 그런데 “연극을 본 뒤 비빔밥으로 시장기를 달래라는 뜻”이란 그의 장광설을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후배의 이런 시도는 공연가에 드리워진 불황 때문일 게다. 공연을 보는 관람객이 제법 이어지고 있다니 그의 의도는 들어맞았다. 가족극을 주로 준비해 아이를 동반한 여성 손님이 많다고 한다. 공연과 음식을 버무린 그만의 ‘레시피’가 퍽 궁금해진다. 칠첩반상은 분명 아닐진대, 놋쇠그릇에다 비벼 먹던 ‘그때 그 맛’을 살렸을까. 며칠 전에 그가 “공연 보러 오라”며 목에 힘 실린 전화를 했다. 후배의 닦달이 무슨 뜻인지를 알기에 무심함을 탓해 본다. 그는 공연 수익금으로 기아대책 단체와 다문화가정에 후원도 한다. 요즘 서울 대학로의 유명 소극장들도 임대료 상승 등으로 꽤 어렵단다. 건물주가 나가라고 하는 곳도 여럿 있다고 한다. 후배의 이번 시도가 불황을 뚫고 지속됐으면 좋겠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소맥 자격증/최광숙 논설위원

    한 모임의 이른 저녁식사에서 예정에 없던 술이 등장했다. 한 참석자의 ‘소맥 자격증’ 자랑이 발단이 된 것이다. 흔히 술자리에서 폭탄주를 ‘제조’하는 이의 면허증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우스갯소리들을 많이 하지만, 실제로 그런 자격증을 보긴 처음이다. 비싼 양주가 아닌 소주를 맥주에 섞는 소맥의 자격증은 한 주류 회사가 마케팅 차원에서 만든 것 같은데 운전면허증과 비슷하게 생겼다. 얼굴 사진에 면허 번호, 이름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소맥 자격증을 취득하였음을 증명한다’는 주류 회사의 직인도 찍혀 있다. 결국 소맥은 ‘진짜’ 자격증을 가진 이가 만들어 돌렸다. 소주잔을 두 개 포개어 겹쳐지는 부분만큼의 소주를 맥주와 섞는 것이 그의 비법이었다. “무자격자의 술맛과 뭔가 다르다”는 칭찬이 쏟아졌다. 사실 술을 마시는 데 무슨 자격증이 따로 필요하겠는가. 술자리는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에 따라 흥이 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게다. 술잔이 넘치는 걸 경계하며 ‘계영배’(戒盈杯)를 만들었던 선인들의 절제 정신도 꼭 자격 기준에 포함돼야 할 듯싶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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