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행운의 동전/정기홍 논설위원

    서울 청계천의 동전 던지는 곳에서 지난 한 해 건져 낸 동전이 8000만원이라고 한다. 행운을 빌며 던져 본 동전들이다. 평소 지나며 무심했는데 액수를 접하니 적이 놀랍다. 복원이 완료된 2005년부터 모인 총액은 2억 3000만원에 이르고, 입소문을 타면서 투척하는 돈은 늘고 있다. 동전의 국적도 50~60개국이나 되는 모양이다. 일본 동전이 제일 많았는데 최근에 중국 돈에 1위 자리를 내놓았다. 특이한 것은 태국 돈이다. 2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대개 여행에서 남겨 온 동전일 것이다.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트레비분수에 동전을 던져 본 적이 있다. 여행 가이드의 말은 엄숙하고 장황했다. “분수대를 등지고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로….”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첫 동전과 두 번째, 세 번째 동전의 의미는…”이라는 설명에 귀가 쫑긋해진다. 첫 번째 동전이 로마를 다시 방문한다는 것인데, 다음은 사랑과 이별의 동전이라 세 번을 던져야 찜찜하지 않다. 가벼운 재밋거리이고 지나 보면 추억이 된다. 청계천 동전엔 얘깃거리가 없다. 소원을 빌고 이웃 돕기에 쓰인다는 것뿐이다. 트레비분수 동전 던지기가 괜히 샘난다. 개천변 빨래하던 이야기인들 어떤가 싶다.
  • [길섶에서] 겨울 냉면/서동철 논설위원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친구에게 냉면이 어떠냐고 했더니 좋단다. 얼어 죽을 지경인데 무슨 냉면이냐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다. 그동안 먹는 재미를 좀 가르쳐 놨더니 ‘슬슬 사람이 되어 가는 군’ 하는 생각에 흐뭇했다. 사실 냉면은 이렇게 몹시 추운 계절이 아니면 만들어 먹을 수 없는 겨울 음식이었다. 여름 같으면 줄을 서도 길게 서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한겨울에 손님이 그렇게 있겠느냐는 생각에 느지막이 도착했다. 그런데 냉면집에 들어서니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냉면 열풍이 불었다더니 젊은 사람도 많이 보였다. 당연히 삶은 돼지고기와 소주를 먼저 시켰다. 기름기를 적당히 뺀 제육과 시원한 냉면김치에 소주는 궁합이 잘 맞는다. 냉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도 이 맛에 따라나서곤 하는 동료도 있다. 소주 몇 잔에 군불이 지펴지듯 식었던 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진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친구와의 정담(情談)도 한겨울 냉면집 공기를 훈훈하게 한다. 냉면 그릇 바닥이 보이도록 차가운 육수를 모두 비우고 일어섰다. 앞서 냉면집을 나서던 이가 “어, 날씨가 더 추워졌네” 한다. 허허, 이 사람아 추워지긴…. 그게 겨울 냉면 맛이라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
  • [길섶에서] 담배 만상/정기홍 논설위원

    연초에 훌쩍 오른 담뱃값이 만들어 내는 풍경이 다양하다.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던 ‘까치담배’로 불리는 개비담배가 어느새 가게에 깔렸다. 한 개비가 무려 300원짜리다. 요즘 세상에 누가 사겠나 싶지만 가게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잊었던 추억거리가 귀환한 듯해 달리 반갑기는 하다. 꽁초를 찾는 빈곤층도 있단다. 담뱃값 인상이 그늘진 곳을 들춰내 기분은 씁쓸하다. 곰방대에 눌러 피우던 봉지담배 시절을 생각하는 게 나은 게 아닌가 한다. 연말에 담배를 듬뿍 사 놓은 골초들의 발품 판 무용담도 들린다. 출퇴근 때마다 두어 갑씩 사 재었다는 이야기다. 노력이 가상하다. 담배도 오래되면 맛이 떨어진다는데 골초들의 입맛을 맞춰 낼까 싶지만…. 반면 전자담배를 입에 문 군상의 금연 결기는 올해만은 ‘작심삼일’이 아닌 듯하다. 끊을까 말까 머뭇거리다가 담배를 챙겨 놓지 못한 이들도 적지 않다. ‘하루 물림이 열흘 간다’는 속담이 딱 어울려 보인다. 더 측은해 보이는 건 딴 데 있다.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려고 하루에 몇 번을 고층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직장인이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가수 김추자)’라던 끽연가의 호시절이 절로 생각날 만도 하겠다. 정
  • [길섶에서] ‘님아… ’의 공포/진경호 논설위원

    89세 소녀 감성 강계열 할머니와 98세 로맨티스트 조병만 할아버지의 곰살맞은 사랑과 이별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불러낸 관객이 마침내 지난 주말 42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봄이면 들꽃을 따다 할머니 머리에 꽂아 주고, 여름이면 개울에 나가 물장구를 치고, 깊은 가을엔 쓸어 모으던 낙엽을 냅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던지며 장난을 치고, 겨울이면 쌓인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들고는 서로 제 눈사람이 잘났다며 티격태격하고…. 가슴 떨리는 사랑의 감정을 빚어내는 호르몬 옥시토신은 길어야 2년 남짓 나오는 게 고작이라는데 7년도 아니고 76년을 얼굴 맞대고 살아온 부부로서, 대체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 싶건만 아무려나 삶은 무엇이고, 사랑은 또 무엇인지를 묻고 찾는 행렬은 당분간 문 꼬리를 놓지 않을 모양이다. 불길한 예감은 절대 비켜 가는 법이 없다던가. 도무지 조병만 할아버지를 흉내낼 재간이 없는 터, 애써 영화를 외면했건만 기어코 오늘 아침 아내의 한마디가 뒤통수에 꽂혔다. “지금껏 당신은 화장실 앞에서 노래 불러 준 적 있어? 있냐고?”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길섶에서] 늙는다는 것/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우연히 TV에 방영된 1969년 작 영화 ‘시실리안’을 통해 뭇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프랑스 영화배우 알랭 들롱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이가 궁금해 찾아보니 1935년생, 올해 만 80세다. 서양의 원조 꽃미남 배우도 나이를 피할 수 없으니 늙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한가 보다. 학창 시절에 ‘해바라기’를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던 육감적인 외모의 소피아 로렌도 이젠 81세의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됐다. 여배우 중에는 젊었을 때의 환상을 깨지 않으려고 나이가 들어서는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깜찍한 외모를 떠올리며 올리비아 허시의 현재 모습을 보면 좀 충격적이긴 하다. 그래도 로렌이나 허시는 꾸준히 영화에 출연하며 늙어 가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팬들에게 보여 주었다. 불로장생(不老長生)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본연의 욕망이다. 과학자들은 노화를 일으키는 유전자를 찾아냈다지만 더 진전을 보지는 못하고 있다. 누구나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세상이 오면 그 자체가 재앙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자연의 섭리는 거스를 수 없으니 순응해 살아야 한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
  • [길섶에서] 과욕/서동철 논설위원

    TV 채널을 돌리다가 진천 보탑사를 다룬 프로그램이 스쳐 지나갔다. 1996년 창건된 보탑사는 불사(佛事)를 마무리한 것이 2003년이라니 역사랄 것도 없는 새 절이다. 하지만 새로운 큰법당의 유형을 만든 삼층목탑을 비롯해 과거의 재현에 머물지 않은 됨됨이가 인상적이다. 언젠가 찾은 보탑사에서 기억에 남는 전각의 하나는 와불(臥佛)이 있는 적조전(寂照殿)이었다. 부처가 열반한 쿠시나가라의 풍경을 벽화로 그려 놓아 사실성을 강조했다. 언제부터인가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는 표현을 가끔 대한다. 수행이 지극한 경지에 이른 고승이 앉은 상태로 입적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데 예부터 열반하는 부처의 모습은 보탑사처럼 누워 있는 상태로 묘사하고 있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부처가 오히려 경계했다는 좌탈입망은 누구의 가르침일까. 깨달은 척하려는 자의 과욕이거나, 스승의 명예를 높이려는 자의 무리수일 것이다. 깨달음 없는 자가 억지로 앉은 채 세상을 뜨는 것은 불교에서도 그저 좌사(坐死)라고 한다.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지만 새해 벽두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는 가르침은 고마운 일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개시(開市)/정기홍 논설위원

    새해 첫날 출근길에 지하철 상가에서 들린 큼지막한 목소리에 눈길을 돌렸다. “올해 첫 개십니다. 고맙습니다. 대박 나십시오.” 가방가게 주인은 30대 부부 손님에게 가방을 건네며 “나도 이 자리에서 대박 나겠습니다”라며 배웅했다. 이른 시간대의 첫 손님이니 개시는 그에게 다분히 남달랐을 법하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첫 손님 징크스’를 부적과 같이 여길 정도로 중시한다지 않는가. 개시하는 모습을 처음 본, 흔치 않은 경험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잠시 후에 색다른 장면이 기다렸다. 지하철 승강장을 한동안 거닐던 비둘기 한 마리가 지하철 문이 열리자 기웃기웃하더니 몸에 밴 듯이 슬며시 통로를 비켜 준다. “요녀석 봐라. 알 건 다 아네.” 짐짓 비둘기가 지하철을 타는 둘도 없는 경험을 하지 싶었는데 비둘기의 행동은 거기까지였다. 미물의 깊은 속내라고 생각을 돌려놓고 보니 마음이 포근해진다. 새해 첫날에 의미 없는 일이 있을까만 고개를 드니 주위가 퍽 활기차다. 자전거 하이킹을 가는 중년들, 손을 꼭 잡은 노년의 부부, 조잘대는 아이들…. 신년 벽두의 모습과 단상들이다. 연초에 좋은 일을 많이 만들어야 하겠다. 시작이 좋으면 끝도 좋단다. 정기홍 논설위원
  • [길섶에서] 2015년 의기양 ‘양’/문소영 논설위원

    2015년 을미년(乙未年)은 ‘양’의 해다. 십이간지에 존재하지만 한반도에서 양을 기르지는 못했다. 양 대신 염소였다. 그래서 민간에서 양띠를 익숙한 ‘염소띠’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툼한 털과 양젖, 별미인 양고기가 매력적이었지만 조선시대 중국에서 들어온 양은 7~8월 한반도의 장마철 습기와 더위를 견디지 못해 죽었다. 어린 시절을 염소띠로 살다가 어느 날 양띠로 정정하면서 화들짝 놀란 기억이 새롭다. 예수가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헤맨다’고 한 덕분인지 양에 대한 이미지는 순하고 착하고 보살펴 줘야 하는 존재다. ‘착한 양’이라는 이미지에 넌덜머리를 내는데, 친구가 양은 이미지와 달리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라고 주장해 솔깃한 적이 있다. ‘무더운 한여름에 양들이 꼭꼭 붙어서 지내는 것은 친구들이 시원한 게 싫어서 그런 것이고, 추운 겨울에 모두 떨어져 지내는 것은 친구들이 따뜻한 게 싫어서’ 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실체적 진실을 떠나 심통 부리는 모습에 낄낄거렸지만, 양의 행동 양식이 그렇다면 바보짓이다. 내가 잘되려면 남도 잘돼야 한다는 상식이 통해야 좋은 공동체다. 함께 의기양양한 2015년을 기대한다. 문소영 논설위원
  • [길섶에서] 한 해의 언저리/정기홍 논설위원

    세밑 아침 햇살이 일찍 잠을 깨우더니 “남은 한 해 옹골차게 채우라”며 채근하는 듯하다. 자고 나면 놀래키게 한 모진 사고가 한둘이었나 싶어 햇살이 마뜩잖다. 국가정보원이니, 세월호니 가슴속을 후벼 판 사고로 비장(悲壯)한 한 해였다. “일도 일도 이리 많은가”라던 이웃집 아주머니의 말도 새삼스럽다. 그 이면에 끼어든 앙칼지고 추잡한 이해관계의 잔영도 많이 쌓인 터다. 서민의 찌든 일상사를 얼마나 더치게 한 지난 일들인가. 그럼에도 안부가 오가는 해넘이의 언저리다. 올 한 해 고마웠고, 내년엔 더 잘 살자고들 한다. 한 해를 보내는 이들의 손놀림이 겻불같이 온기로 다가선다. 돌이켜보면 크고 작은 사고에 비껴 서 몸뚱이 하나 온전히 간수한 것도 하늘이 내린 복인 한 해였다. 지인들의 오랜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왔다며 자족한다. 내년은 양(羊)의 해다. 벌써 순둥이 양이 천방지축 달려온 드센 말 앞에 “길 비켜라”라며 엉버티고 섰다. 내년은 올해의 액운을 훌훌 털어내고 ‘순하디 순한 세상’이 돼야 하겠다. 양을 잃은 뒤 우리를 고친다는 고사 ‘망양보뢰’(亡羊補牢)가 유독 와 닿는 연말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목수/문소영 논설위원

    호모 하빌리스, 즉 ‘도구의 인간’은 사냥을 하려고 돌도끼 등을 뚝딱뚝딱 만들거나 동굴 안쪽에 물감과 자신의 손을 활용해 그림을 그렸다. 정착생활이 시작된 1만 2000년 전 신석기 시대의 석기들은 구석기 때의 엉성한 돌무기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날카롭게 벼린 돌화살이나 돌칼 등으로 진화했다. 장기 거주를 위해 움집이나마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 이때가 아닐까 싶다. 조개 등을 쉽게 채집할 수 있는 강원도의 해안선을 따라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는데, 강원도 고성의 유적은 6000년 전쯤 그 해안선에서 내륙으로 걸어서 2~3시간 거리에 있는 산 아래다. 바닷바람을 피해 농사도 지었다. 움막을 짓고자 땅을 성형한 흔적들도 있다. 현대적 의미의 목수는 아니더라도 목수 일을 한 것이다. 국제 해비탯의 ‘사랑의 집짓기’에 참여해 직접 집을 지어 온 ‘세계적 목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세운 카터센터가 한국 대법원에 우편으로 “대한민국 현직 국회의원인 이석기 의원의 유죄 판결을 우려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1982년 설립 이후 처음인 한국 정치인 구명 요청이라는데, 영 신경이 쓰인다.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K팝스타/오일만 논설위원

    오디션 프로그램인 K팝스타 시즌 4가 한창 진행 중이다. 참가자들 대부분 간절한 사연의 가수 지망생들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장안에 화제를 뿌린 이진아도 이들 중 한 명이다. 1라운드에서 ‘시간아 천천히’를 불러 주목받았고 2라운드에 ‘마음대로’라는 자작곡으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새로운 스타 탄생이다. 그런데 이진아는 사실 가수 지망생이 아니라 인디 가수다. 홍대 길거리와 카페에서 노래를 불렀고 지난해 1집 앨범(보이지 않는 것)으로 데뷔했지만 본인 말대로 50장 정도 팔렸다고 한다. 재능은 있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무명 가수였다. 이런 이진아를 세상에 알린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심사위원인 박진영 양현석 유희열 3인이다. 이들은 한국 가요계를 쥐고 흔드는 엔터테인먼트사의 오너들이다. 가요계의 권력자들이 극찬을 하니 대중들은 주저 없이 호응한 것이다. 권력이 뭔가를 이루게 하는 영향력이라고 한다면 아주 제대로 쓰인 사례다. 실력 있는 리더들이 경쟁 시스템을 통해 이뤄 낸 우리 한류의 미래는 이래서 밝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설렁탕에 꼭 국수가 들어있는 이유 알고보니..

    소고기는 인간과 소의 공존과 역사를 같이하지만, 과거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특히 벼농사권에서는 소가 없어선 안 되는 수단이었으니 소를 잡는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조선 세종 시대에는 소나 말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을 두었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그러니 설렁탕이 조선시대 선농제(先農祭)에서 비롯됐다는 속설은 좀처럼 믿기 어렵다.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임금이 직접 소를 몰아 땅을 가는 의식을 치른 뒤 백성과 나눠 먹은 음식이 설렁탕이라는 것이다. 풍년을 기원하는 자리에서 소에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잡아서 국을 끓였다는 뜻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렁탕에는 1970년대 역사도 스며 있다. 토요일이 분식일이던 시절 설렁탕에도 밥 대신 국수를 말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식일이 폐지되고 나서도 국수맛을 못 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시내 단골 설렁탕집의 국수 인심이 좋은 것도 곡절을 겪은 탓인지 모르겠다. 이런 설렁탕이지만 요즘엔 누구도 흔쾌히 손들고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먹고 나면 만족하는 음식이 또한 설렁탕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설렁탕 유감/서동철 논설위원

    소고기는 인간과 소의 공존과 역사를 같이하지만, 과거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특히 벼농사권에서는 소가 없어선 안 되는 수단이었으니 소를 잡는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조선 세종 시대에는 소나 말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을 두었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그러니 설렁탕이 조선시대 선농제(先農祭)에서 비롯됐다는 속설은 좀처럼 믿기 어렵다.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임금이 직접 소를 몰아 땅을 가는 의식을 치른 뒤 백성과 나눠 먹은 음식이 설렁탕이라는 것이다. 풍년을 기원하는 자리에서 소에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잡아서 국을 끓였다는 뜻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렁탕에는 1970년대 역사도 스며 있다. 토요일이 분식일이던 시절 설렁탕에도 밥 대신 국수를 말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식일이 폐지되고 나서도 국수맛을 못 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시내 단골 설렁탕집의 국수 인심이 좋은 것도 곡절을 겪은 탓인지 모르겠다. 이런 설렁탕이지만 요즘엔 누구도 흔쾌히 손들고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먹고 나면 만족하는 음식이 또한 설렁탕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페이스북 단상/구본영 논설고문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개방형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접속하지 않은 지 꽤 오래됐다. 대신 밴드나 카카오톡 등 토종 폐쇄형 SNS를 주로 이용하는 편이다. 수많은 지인들이 전해 오는 글과 사진에 일일이 반응을 보일 만큼 부지런하지 않은 게 개방형 SNS를 끊다시피 한 이유라고 여겼다. 그러나 강준만 교수의 책에서 ‘부작위 편향’이란 용어를 접하면서 꼭 게으름 탓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즉 “가만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손실 회피 경향 때문이라는 대목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남에게 큰 상처를 주는 악플이나 댓글 논쟁에서 보듯 인터넷·SNS 시대에는 안 해도 될 일을 목숨 걸고 하려는 편향성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는 지적이 다소 위안도 됐다. 오랜만에 페이스북 계정에 들어가 봤다. 친구 맺기를 요구하는 지인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우정의 상업화’를 부추기는 게 SNS의 메커니즘이라지만, 물리적 거리나 바쁜 일상 때문에 자주 못 만나는 친구들에게는 좀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어떤 편향성을 띠기 일쑤인 사이버 공간에서도 적극성과 신중한 배려 사이의 중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구본영 논설고문 kby7@seoul.co.kr
  • [길섶에서] “외워라”/문소영 논설위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가입하라”는 보험광고나 “무조건 외워라”라는 자동차정비 광고는 이성의 합리적인 판단을 무력화하는 것 같아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 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외워야 행복한 삶이 보장된다는 사람을 만났다. 결혼 17년차로 웃음이 넉넉한 K증권사 지점장은 “배우자의 행동 패턴은 그냥 외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결혼해서 1~2년 만에 고쳐지지 않는 배우자의 습관은 평생 잔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으니 서로 행복하려면 상대의 행동 패턴을 외워서 대응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고도 했다. “고쳐서 새사람 만들겠다는 생각을 포기하라”고 강조했다. 다들 “맞다!”며 박장대소했다. 서로 다른 가풍에서 20~30년씩 살아온 성인의 행동이나 습관이 어떻게 쉽게 바뀌느냐는 말이다. 동료의 특성에 맞춰 대응을 조정하는 직장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영화 중 치약의 중간을 눌러 쓰는 남편을 고치려다 이혼한 여자가 전 남편의 새 아내에게 어떻게 견디고 있느냐고 묻는다. 새 부인은 “치약을 두 개 쓰고 남편의 치약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공존하기 위해 외우고 피해 가는 지혜도 필요한가. 문소영 논설위원 symun@seoul.co.kr
  • [길섶에서] 양현석, 춤꾼 리더십/오일만 논설위원

    YG엔터테인먼트 대표 양현석은 가수 박남정의 백댄서 출신이다. 중학교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했고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춤꾼이 됐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로 한국 가요사의 한 획을 그은 뮤지션이었지만 사업가로 변신해 수천억원대의 돈을 벌었다. 춤꾼이 사업으로 성공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출세가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인생관은 감동과 설렘이 기준이다. 설렘으로 간절함과 열정을 키웠고 열정을 채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니 성공의 길로 간 것뿐이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갔기에 이질적인 빅뱅과 2NE1을 세상에 내놔 히트를 쳤다. 학교 밖의 다양한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 영민한 그의 사업적 감각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성공 이면엔 밑바닥 인생에 대한 따뜻함이 숨어 있다. 단칸방의 고단함 어린 세월과 공고 출신의 비주류 인생이지만 눈물을 품을 수 있는 리더십이 있었다. 현재는 별 볼일 없지만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에 투자했다. 4년 동안 앨범 하나 못 낸 지누션을 끝까지 믿었고 대박을 친 지누션은 양현석에게 감사했다. 신뢰의 끈끈함, 이것이 성공 비결이다. 오일만 논설위원 oilman@seoul.co.kr
  • [길섶에서] 연말 세태/정기홍 논설위원

    “돈 좀 꿔줄 수 있습니까.” 생활정보지와 광고전단 배달 사업을 하는 가까운 일가(一家)가 세금 폭탄을 맞았다며 꼭두새벽에 연락을 해 왔다. 매출은 변함없는데 지난해의 3배가 부과됐다고 한다. 그러잖아도 그의 가계가 빠듯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형편이 여의치 못하니 가산 이자만 불어 간다는 것이다. 세무서 직원의 채근이 여간 아니란다. 세무 직원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할 뿐이라고 한다. “손님이 없어요.” 연말에 기업체 단체 손님이 찾던 음식점 주인은 가뭄에 콩 나듯 오는 손님에 답답함을 하소연했다. 그도 세금을 내고 나면 집안을 근근이 건사한다고 했다. 이어지는 굵직한 사건의 여파가 영향을 주고 있단다. “부도심 번화가도 반경 50~100m 안에만 장사가 되지 그 바깥은 파리만 날린다”고 했던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직후의 상황이 새삼 와 닿는다. 짤 만큼 짜내라는 세무 당국의 엄명에 생계형 사업자들의 어려움이 커 보인다. 서민 지갑에 돈이 있어야 소비가 살고 복지도 나아질 텐데…. 복지 확대가 정작 서민층의 발목만 잡은 채 그늘만 짙게 드리우는 연말이다. 정책과 시장이 거꾸로 가는 모습이 아닌가.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
  • [길섶에서] 어머니 밥상/손성진 수석논설위원

    1년에 몇 번 어머니가 혼자 계시는 지방의 본가를 찾을 때면 밥을 두 그릇씩 먹곤 한다. 종류는 몇 가지 되지 않더라도 맛있고 깔끔한 음식 앞에서 식욕은 늘 솟구친다. 같은 재료와 양념을 쓰더라도 맛의 차이가 나는 것은 확실히 손맛 때문일 게다. 음식 솜씨가 시어머니를 따라가지 못하는 아내에게 살아계실 때 그 손맛을 전수받으라고 가끔 얘기하지만 말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단순히 어떤 양념을 얼마나 넣는 등의 레시피(조리법)를 배워 따라한다 해서 똑같은 맛이 나지 않는다. 그게 흉내 내기 어려운 손맛이다. 손맛의 비결은 맛있게 담근 간장, 고추장, 된장에도 있다. 장맛이 곧 손맛인 것이다. 어머니의 밥상을 그리워하는 아들에게 연로하신 어머니는 몇 가지 반찬을 만들어 택배로 보내 주시곤 한다. 며칠 전에는 어리굴젓, 총각김치, 콩잎 무침, 그리고 곰국까지 바리바리 싸서 부친 네 가지 반찬이 천 리 먼 곳에서 도착했다.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음식 앞에서 한동안 느낄 행복을 생각하면 절로 뿌듯해진다. 언젠가 그 맛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팥죽과 단팥죽/서동철 논설위원

    어린 시절 ‘팥죽할멈과 호랑이’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산골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동짓날 팥죽 한 그릇씩을 얻어먹은 알밤이며, 자라, 송곳, 맷돌이 할머니를 구해주었다는 내용이다. 잡귀(雜鬼)를 쫓는 효험이 있다는 붉은색의 팥죽을 동지(冬至)에 쑤어먹는 풍습의 근원설화쯤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핀란드 민속학자 안티 아르네(1867~1925)에 따르면 이 설화는 뜻밖에 거의 전 세계적인 것이라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서쪽으로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동북쪽으로 베링해협 건너 북미, 남쪽으로 수마트라와 자바에도 전파됐다고 한다. 가히 ‘팥죽 문화권’이라고 할 만하다. 동지를 앞두고 팥죽 판촉 행사가 요란하다. 그렇지 않아도 팥빙수와 단팥죽 집이 크게 늘었다. 이런 일본식 단팥죽이 입맛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식 팥죽집은 희귀해졌다. 최근 신당동 골목에 있는 팥죽집에 다녀왔다. 전통 방식의 순수한 팥죽 맛이 인상 깊었다. 요즘 추세면 이런 집주인은 조만간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부메랑/김성수 논설위원

    “악법도 법이다.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단호했다. 지난달 5일 기자들과 만나서 한 말이다.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사고를 낸 아시아나항공에 대해 과징금 부과로는 부족하며 운항정지 조치를 내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경쟁사 총수가 이런 속내를 드러낸 것은 이례적이었다. 당시 다른 외국계 항공사나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은 운항정지는 지나치다는 쪽이었다. 국내외 43개 항공사는 국토교통부에 아시아나항공의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까지 제출했다. 당연히 대한항공과 자회사인 진에어는 빠졌다. 지난달 13일 국토부가 아시아나항공의 인천~샌프란시스코 구간에 대해 45일간 운항정지 처분을 내렸다. 대한항공은 다시 발끈했다. “법에서 정한 최대한의 감경폭을 적용한 것으로, ‘아시아나항공 봐주기’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게 인생사라더니. 이번엔 칼끝이 대한항공을 향하고 있다. 조 회장의 말처럼 자식 교육을 잘못 시킨 죄로 대한항공의 인천~뉴욕 노선도 최장 30일간 운항정지를 받을 수 있다. 아시아나항공에 대해 “법대로 하라”는 자신의 모진 요구가 부메랑이 돼 돌아올지는 몰랐겠지만…. 김성수 논설위원 ss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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