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마음의 이완/이순녀 논설위원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을 때마다 곤혹스럽다.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앉아 있는 자세도 영 불편하지만 목에 힘을 빼라는 미용사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힘을 빼려고 애쓸수록 뒷목이 더 뻣뻣해진다. 한쪽 손으로 손님 머리를 받치고 여러 번 헹구는 장면을 반복해야 하는 미용사의 손목이 얼마나 아플까 미안한 마음이지만 나도 방법을 모르니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최근에 시작한 필라테스 수업 시간에 가장 많이 듣는 말도 ‘어깨 힘을 빼세요’다. 어려운 동작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올라간다. 강사가 내 곁으로 와서 어깨를 꾹 눌러주면 그때서야 힘이 빠진다. 물론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원상회복이다. 오래전 수영을 배울 때도 몸에서 힘을 빼는 법을 끝내 터득하지 못해 중간에 포기했더랬다. 정작 힘을 써야 할 때는 저질 체력이면서, 왜 이렇게 불필요한 힘이 몸에 많은지. 과잉 긴장이 어디 신체에 국한된 문제일까. 마음에도 쓸데없는 힘이 켜켜이 쌓일 때가 있다. 훌훌 털어버리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이 집착 혹은 강박이란 멍에로 스스로를 옭아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몸이든 마음이든 긴장과 이완의 적절한 균형이 건강한 삶을 위한 필수 조건 아닐까 싶다. coral
  • [길섶에서] “아니오, 오늘이오!”/이지운 논설위원

    “부유한 죄수가 석방되면 으레 쌀 몇 말을 남겼고, 그날은 잔칫날이 된다. 죄수들이 밥을 짓고는 고사를 지내는데, 밥술을 떠서 형 집행실 너머로 뿌리면서 기도를 바친다.” 1878년 서울서 감옥살이를 했던 프랑스 선교사 펠릭스 클레르 리델의 묘사는 생생하다. “죄수 모두가 내일 아침이면 나가게 해 주십시오” 외치면, 죄수들은 “아니오! 오늘 저녁에 다 나가게 해 주시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시 고축했다 한다. 그들의 ‘오늘’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해가 지면, 점호가 이뤄지고 밖에서 굵은 빗장을 가로질러 걸어 놓은 뒤 쇠사슬로 얽어매어 잠근다. 옥졸은 마을로 자러 가면서 죄수들에게 “자지 말고 불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불이 나도 밖에서 문을 열어 줄 이는 없다. “죄수들이 하루 중 가장 슬픈 때가 문이 닫히는 순간이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신부는 회고했다. 다음 장면은 더 애절하다. “저녁을 먹는 때였는데, 옥졸이 어느 죄수에게 ‘나와! 목매러 가자’고 하니, 굶주림으로 애타게 기다렸던 밥인데도 모두 밥알 한 알도 삼키지 못하고 밥사발을 내려놓았다. 교수형은 소리 없이 집행된다. 사형수의 비명도 탄식도 들리지 않는다.” 참으로, ‘
  • [길섶에서] 어떤 결심/이동구 논설위원

    병원에서 석 달 가까이 아픈 곳을 치료한 후 다시 출근한 친구를 환영하는 식사 자리. 친구는 입원 중의 고충과 혼자 지내면서 떠올렸던 주변인과의 관계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는다. 지루함과 고통을 이겨 내고자 마음을 가다듬던 순간들의 기억도 무용담처럼 쏟아 냈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라는 이해인 수녀의 시(어떤 결심)를 소개했다. 힘들 때마다 떠올렸던 글귀라고 했는데 그의 처지를 잘 표현해 준 듯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들여다보기로 했다/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저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며 남은 시구를 마저 읊어낸다. 치료 과정은 힘들었지만 건강을 회복한 친구의 표정이 더없이 밝고 행복해 보였다. 친구의 얼굴이 한결 젊게 느껴진 것은 조명 덕만은 아니었다. 새 삶을 얻은 듯 자신감과 함께 회사, 가족, 친구 등 주변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더 깊어져 있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도 달라지고, 표정도 바뀐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 모습은 그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 [길섶에서] 손바닥 손오공/장세훈 논설위원

    대화를 나눌 때 “그거(저기) 있잖아”로 시작해서 “아 미치겠네”로 끝나는 상황이 부쩍 늘었다. 고유명사는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정작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지시대명사나 전혀 엉뚱한 표현일 때가 적지 않다. 흔히들 ‘중년 건망증’이라고 하고, 의학적으로는 ‘설단 현상’이라고도 불린다. 유엔이 2015년 새롭게 제시한 연령 분류 기준(0~17세 미성년자, 18~65세 청년, 66~79세 중년, 80~99세 노년, 100세 이상 장수노인), ‘40~50대의 뇌가 어느 연령대보다 가장 똑똑하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아무리 되뇌어 봐도 그다지 위안이 되진 않는다. ‘식물인간’을 ‘야채인간’이라고 하는 동년배가 있다고 해도 타박하고 싶은 마음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지시대명사를 남발해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 아내다. “저기 있잖아” 하면 “왜, 배고파?” 하는 식이다. 마음을 읽는 아내의 능력이 훨씬 뛰어난 것은 관찰력의 차이에다 그동안 함께 살아 온 경험치까지 쌓인 덕분이 아닐까 싶다. 지난 주말에도 비슷한 상황이 또 생겼다. 아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부처님) 손바닥 ( 위
  • [길섶에서] 방학(訪學)/전경하 논설위원

    쌍둥이 아들들의 고등학교가 여름방학 중이다. 방학이면 엄마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온종일 아이를 집에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뭐라도 시켜야 한다. 결국 학원이라는 정해진 답이 나온다. 고등학생에게 방학은 학문을 놓는 ‘방학’(放學)이 아니고 학원을 방문하는 ‘방학’(訪學)이다. 성적이 낮은 주요 과목을 공부하고, 중요 과목이 아니라도 대입에서 특기자전형을 생각하고 있다면 해당 학원에서 몰아 듣기를 해야 한다. 이런 특수를 노려 매 학기 기말고사가 끝날 즈음 학원의 방학 특강 알림 문자메시지가 폭주한다. 해외 단기연수 프로그램 문자도 빠지지 않는다. 방학 시작 전 아이와 의논해서, 때로는 강압적으로 방학시간표를 짜는 건 엄마 몫이 된다. 돈도 문제다. 듣는 시간도 듣는 과목도 많아지니 학원비는 2~3배로 늘어난다. 방학에는 학교급식으로 해결되던 점심도 워킹맘인 엄마의 몫이다. 다행히 아이들이 컸고, 음식배달앱도 많아져 예전보다 해결이 쉬울 거 같다. 물론 최소 주문금액과 배달비가 있으니 한 달에 10만원가량인 급식비 이상의 돈이 들 거다. 학원은커녕 점심도 못 먹을 아이들에 비하면 감사할 일이지만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할까. 방학은 어쩌다 가정 환경을 적나라
  • [길섶에서] 왜란/박록삼 논설위원

    아픈 역사를 다시 끄집어내 기억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최근 종영한 TV 드라마 ‘녹두꽃’을 끝까지 보게 된 것은 오로지 아들 덕이었다. 2~3년 전부터 역사에 부쩍 관심이 커진 초등 6학년 아들은 꼭 봐야 할 드라마라면서 두어 달 동안 금, 토요일 저녁이면 TV 앞으로 잡아끌었다. 술자리 약속은 최대한 줄이거나 서둘러 마쳐야 했다. 역사책 등에서 익히 본 뻔한 내용이려니 하며 시작했지만 마지막 회가 끝나자 나도 모르게 물개박수를 쳤다. 2만명에 가까운 처참한 죽음이 끊이지 않던 우금치 전투의 학살 장면에서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짐을 참지 못했다. 농민군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된 이들을 입체적으로 되살려낸 제작진의 노고는 감탄스러웠다. 우리네 역사 속 ‘왜란’(倭亂)이란 이름이 붙은 사건은 1592년 임진왜란 딱 하나였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 사건을 가리켜 ‘갑오왜란’이라 불렀다. 학계의 소수 주장을 전면에 쓴 것이다. 또 많은 누리꾼들은 최근 일본의 경제보복을 ‘기해왜란’이라 부르고 있다. 자발적으로 일본기업, 일본제품 리스트를 만들어 불매운동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이유다. 위기감은 125년 전 갑오농민전쟁, 42
  • [길섶에서] 잊어 가는 별/손성진 논설고문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헤는 밤’처럼 별을 하나씩 세어 보던 때가 있었다. 쏟아지는 별빛을 보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찌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누구나 그랬다. 한때, 별에 도취되었다. 별은 환상이고 꿈이었다. 소녀처럼 별을 가슴에 품었었다.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큰곰자리…. 그런 별자리 이름들이 도리어 생소하고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은하수의 찬란함도 언제부턴가 잊어버렸다. 잊은 게 아니라 보지 않는다. 고개를 들면 별이 있는데 보고픈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하늘을 보지 않고 땅만 보고 산 탓이다. 마지막으로 본 별의 기억마저 희미하다. 별을 보면 뜨거워지곤 했던 가슴도 식어 갔다. 별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설렘도 들뜸도 가라앉았다. 남은 것은 겨울 들판 같은 삭막함뿐이다. 밤하늘에서 잠시라도 별자리를 찾아볼 마음이 있다면 아직도 가슴에 뜨거움이 남아 있다는 뜻일 게다. 잊어버렸던 별을 다시 기억해 냈다. 별은 여전히 창공에서 빛나고 있다. 영롱함도 그대로다. 별빛은 지금도 그 먼 곳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별이 다시 가슴에 들어왔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도그 포비아/박록삼 논설위원

    아이가 세 살 때쯤이었을까. 주말 오후 모처럼 아비의 의무를 하느라 집 앞 놀이터에 함께 나갔다. 천방지축으로 뛰놀던 아이가 갑자기 안 보였다. 그러려니 하다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여전히 없었다. 식은땀이 뒷덜미를 타고 흘렀다. ‘안전 불감증’ 운운하는 아내의 불호령이 떠오를 만큼 여유가 생긴 건 30~40m 떨어진 아파트 건너편 동 뒤에서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빼꼼히 고개 내밀고 있던 아이를 찾은 뒤였다. 놀이터에서는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아이들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집에서 한바탕 잔소리를 들은 뒤 아이의 이유 없는 행동에 대한 자초지종 설명을 들었다. 며칠 전 동네에서 조그만 개 한 마리가 맹렬히 짖으며 아이에게 달려오자 아이가 혼비백산하며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개 주인은 멀찌감치 떨어져 싱글벙글하며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 뒤부터 몇 년 동안 아이는 개를 너무도 무서워했다. 길 가다가 맞은편에 개가 보이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거나 아예 뒷걸음질을 쳤다. 당시 개 주인에 대한 원망은 지금껏 쉬 가시지 않는다. 얼마 전 어느 아이처럼 아파트에서 폭스테리어에게 다리를 물려 끌려가는 일을 겪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
  • [길섶에서] 탈코르셋 선언/문소영 논설실장

    대중문화에 문외한인데 소셜미디어 덕분에 ‘설리’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설리는 걸그룹 ‘에프엑스’의 멤버로 드라마에도 출연하는 연예인이었다. 이 설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 중에 노브라(no bra) 사진이 논란이었다. 겉옷에 노브라 표시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 논란의 사진을 찾아보니 미세한 흔적이라 정말 열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건만, 남의 가슴팍을 그리 열심히 들여다보고 판단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설리의 문제는 ‘탈코르셋’이 되어 ‘남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꾸미지 않겠다’는 20대 여성들 사이에 사회적 운동이 되었다. 30~40년 전 소도시에서 노브라는 할머니들의 문화라는 자장(磁場) 속에 성장한 탓에 20대의 ‘탈코르셋’ 선언은 다소 충격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패션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여성의 의상에서 코르셋을 걷어낸 것이 약 100년인데 아직도 코르셋 논쟁인가도 싶다. 최근 설리는 ‘나에게 브라는 액세서리, 오늘은 액세서리를 하지 않았다’고 발언해 또 화제가 됐다. 설리의 그 생각과 자기 선택권을 존중한다. 설리의 선택은 길거리에서 무심코 침 뱉는 행위와 비교해 봐도 남에게 조금도 해가 되지 않는다. 최근에 화사라는 연예인의 노브라
  • [길섶에서] 토란잎 우산/황수정 논설위원

    공원 초입의 둔덕 밭에는 풋것들이 오종종하게 들어앉아 있다. 옥수수, 토란, 들깨, 고추, 가지, 쑥갓, 방울토마토. 여러해 공터로 놀던 자투리땅을 어느 부지런한 손이 한 뼘 두 뼘 일군 시한부 텃밭이다. 꺼칠한 흙에서 무슨 수로 저 푸른 것들은 땅내를 맡았을까. 볼 때마다 신통해서 볼 때마다 처음 본 것처럼 가짓수를 일껏 헤아려 보고는 한다. 내 밭도 아니면서, 이 밭에서 내가 가장 아껴 보는 것은 토란이다. 촛농을 칠한 것처럼 빗물이 데굴데굴 미끄럼을 타는 재미나는 잎사귀. 어린 날에는 세숫대야만 한 토란잎으로 우산을 쓰고 싶어 여름비를 기다렸다. 솥뚜껑만 한 잎으로 양산을 써보자고 땡볕에 덤비기도 했고. 토란대를 귀하게 다독거리다 멀쩡한 잎사귀를 선물처럼 뚝 꺾어 주시던 손길. 알토란 같은 그날이 문득 생각나서 어쩌자고 나는 구월의 알토란국 한 그릇이 지금 까무러치게 먹고 싶어진다. 장맛비가 알맞게 오는 날, 우겨서라도 딸을 데리고 토란을 보러 와야겠다. 또닥또닥 보슬비, 우둑우둑 장대비가 토란잎에 듣는 낮고 높은 소리를 같이 들어야겠다. 가을 토란국은 여름비 소리를 섞어 먹어야 제맛인 것을, 눈 감고 귀 열면 목젖이 뜨끈해지는 그리운 맛 한 그릇쯤은
  • [길섶에서] 초복과 보신탕/이종락 논설위원

    모레(12일)는 초복이다. 중복은 22일, 말복은 8월 11일이다. 매년 낮이 가장 긴 날인 하지를 기준으로 세 번째 경일(庚日)을 초복, 네 번째를 중복, 입추 후 첫 번째 경일을 말복이라고 한다. 경일이란 육십간지(干支)인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중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날이다. 초복과 중복은 열흘마다 오지만 말복은 예외로 입추 열흘 뒤가 된다. 복날은 중국 진나라의 덕공이 음력 6월부터 7월 사이 세 번 여름제사를 지내며 신하들에게 고기를 나눠 준 데서 유래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삼복 중 궁중에서는 소고기와 얼음을 신료들에게 하사했다. 소고기를 못 먹는 농민들은 가축 중 농사와 관련이 없던 견공을 잡아먹었다. 특히 올 초복은 더위만큼이나 뜨거운 날로 기억될 듯싶다. 35개 동물시민사회단체 등이 ‘동물 임의도살 금지법’의 심사와 통과를 촉구하는 집회를 이날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진행한다. 영화 ‘배트맨’, ‘나인하프위크’ 등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킴 베이싱어 등 국내외 유명인들이 참여한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축산물 위생관리법 등 관련법이 규정하지 않는 동물의 도살을 원천 금지할 수 있게 된다. 이맘때면 으레 보신탕을 먹던 필자도 2년 전 반려견을 키
  • [길섶에서] 가마솥 지구/이순녀 논설위원

    연일 치솟는 수은주 눈금에 숨이 턱턱 막힌다. 지난해에도 역대급 무더위였는데, 망각의 동물이라 그런지 그 시절을 어떻게 견뎠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니 어느 해의 폭염이든 개인적인 체감온도는 언제나 최악일밖에. 수치가 주는 위압감은 한층 공포스럽다. 지난 주말 서울과 인천의 기온이 7월 첫 주 기온으로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반도뿐 아니라 지구촌 곳곳이 이상고온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북미대륙 최북단 미국 알래스카주의 기온은 지난 4일 낮 32.2도까지 치솟아 기상관측 이래 가장 높았다. 인도는 50도에 육박하는 폭염으로 100여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독일·스페인·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의 기온도 40도를 넘나들고 있다. 그야말로 펄펄 끓는 가마솥 신세다. 지구온난화의 역습이 시작에 불과하다고 기후학자들은 우려한다. 그런데도 이를 음모론으로 보는 시각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국제협약인 ‘파리기후변화협정’을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올 초 워싱턴에 한파가 몰아닥치자 “기후온난화가 필요하다”며 조롱했던 트럼프가 지구촌 폭염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cor
  • [길섶에서] “자식 믿기, 부질없다!”/이지운 논설위원

    시대를 꿰뚫기에 고전(古典)이라 한다. 과연 그러한가. ‘팔반가’(八反歌)를 접하고 새삼 도전의식이 도진다. ‘명심보감’ 22번째 이야기로,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것이다. ‘아이가 욕하면 기쁘게 받고 부모가 노하면 반발하여 참지 않는다’, ‘아이들은 천 마디를 지껄여도 듣기 싫다 아니하고 부모는 한마디에도 잔소리가 많다 한다’, ‘아이의 오줌똥은 싫지 않으나, 늙은 부모의 침뱉는 것은 싫어한다’, ‘부모는 두 분이나 형제들이 안 모신다 서로 다투며 밀고, 아이는 열이라도 혼자 맡는다’, ‘아이는 배불러도 배고픈가 늘 묻고 부모는 배고프고 추워도 걱정하지 않는다’.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거부하기 힘들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700여년 전의 것인데, 문체만 바꾸면 바로 오늘자 신문 기사 제목이다. 그러다 옳거니 싶었다. ‘거리의 약방에 아이 살찌는 약은 있으나 어버이 튼튼하게 하는 약은 없다’ 한다. ‘장수의 시대 아닌가? 노인용 의약품과 건강보조식품은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하려는데, 이어지는 생각. 그 의약품과 식품의 직접 구매자는 대부분 노인인가? 그 자식인가? ‘부질없이 자식의 효도를 믿지 말라. 그대는 자식의 부모도 되고 부모의 자식도
  • [길섶에서] 홀로 즐기는 삶/이동구 논설위원

    혼자 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국민 10명 중 1명이 홀로 살고 있다니 그럴 수밖에. 30~40대뿐 아니라 50~60대도 부쩍 눈에 띈다. 최근 한 연구소는 이들 혼자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로 ‘외로움’을 지목했다. 혼자 사는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편해서~”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나 홀로 지내는 생활이 편해서 좋긴 한데, 외로운 것이 문제라는 것. 인생에도 총량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일까. 즐거움이 있으면 어려움도 있게 마련인가.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는 말이 이럴 때도 요긴하다. 조병화 시인은 “죽음도 따라가지 못하는 고독이 인생(‘외로우며 사랑하며’)”이라고 했다. 인간은 언제나 혼자이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판단, 결정하고, 결과도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고독한 인생’이라니…. “~흑싸리 한 장에도 담지 못할 풋사랑, 분접시 하나에도 차지 못할 행복을~ 인심이나 쓰다 가자.”라는 오래전 유행가의 가사가 떠오른다. 인생을 즐기라고 부추기는 노랫말의 의미가 심란하다.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게 즐기려고 노력하는 삶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함께하는 행복이 더 크지
  • [길섶에서] 헤어 스타일/장세훈 논설위원

    초등학교 때까지는 어머니가 손수 머리를 잘라 주셨다. 이른바 바가지 머리였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로 이발소를 찾았다. 소위 스포츠 머리였다. 머리를 아예 밀면 ‘반항’으로, 조금이라도 기르면 ‘겉멋’으로 학교에서 호되게 꾸지람을 듣던 때다. 머리 모양에 대한 선택권은 없었다. 성인이 되자 이발소로 향하던 발길을 끊었다. 미용실에서 유행에 따라 머리 모양을 멋들어지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머리가 그 머리였다. 결혼 후에는 아내의 단골 미용실을 따라다닌다. 머리 모양은 ‘아내 뜻대로’ 머리쯤 되겠다. 최근에 아내 요구가 하나 더 추가됐다. 나이를 먹으면서 모발이 가늘어지고 힘이 없어진 탓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내 표현으로는 웨이브만 살짝 줬다는) 파마 머리가 됐다. 머리 모양에 대한 변화 욕구는 젊은 시절에 많았는데, 정작 머리 모양을 바꿀 필요성은 중년 들어 커지는 게 아닌가 싶다. 할머니들의 뽀글뽀글한 일명 ‘라면 머리’나 몇 가닥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서 비어 있는 머리를 가리는 문어발 머리 등이 예전에는 도통 이해가 안 됐는데 요즘 공감이 간다. 머리 모양이 젊은 시절에는 개성의 표현이라면 나이 들어서는 어쩔 수 없는
  • [길섶에서] 반바지 출근/김균미 대기자

    ‘반바지 출근’ 허용 첫날인 지난 1일 경기도청의 관심은 ‘반바지 출근 1호’ 주인공인 민관협치과 소속 48세 주무관에게 쏠렸다. 언론에 난 사진 속 그는 무릎까지 오는 짙은 회색 반바지에 체크무늬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페이스북에 “어렵다 생각하지 말고 나부터 변해 보려고 한다”는 글도 올렸다. 앞으로 두 달 동안 몇 명이나 그의 뒤를 따를까. ‘공무원 반바지 근무’는 경기도가 처음은 아니다. 2012년 서울시에서 시작해 지난해 수원시에 이어 이달부터는 경기도와 경남 창원시에서도 실시한다. 아직 서울시청이나 구청에서 ‘반바지 공무원’과 마주친 적은 없다. 처음에는 낯설겠지만, 몇 해 전부터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반바지 차림의 남학생이나 젊은 직장인들처럼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파격이다, 전시행정이다. 의견이 분분하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본격적인 무더위를 앞두고 정부가 사무실 온도를 28도 이상으로 관리하는 상황에서 반바지 출근은 업무의 능률을 높이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보인다. 반바지 출근 허용은 그 자체보다 ‘TPO’(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자율적으로 판단하라는 메시지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자율과 배려의 ‘반바지 출근’이 보수적인 공
  • [길섶에서] 백종원의 양파 동영상/전경하 논설위원

    요리 전문가 백종원의 유튜브 ‘백종원의 요리비책’에서 양파 요리편을 봤다. 양파가 풍년이라 가격이 폭락하는 ‘풍년의 역설’에 양파 농가를 돕고자 찍은 동영상이다. 특히 양파 손질과 보관법을 알려준 동영상은 조회수가 하루 만에 100만회를 넘었다. 쉽게 무르거나 썩어서 많이 사두기가 꺼려지는 양파를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게 반가웠다. 양파 요리 영상을 만든 사람이나 본 사람들, 양파 소비 촉진 운동을 하고 있는 각종 기관과 유통업체 모두 고맙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종종 농산물 한두 종목은 풍년으로 가격이 떨어져 농부들의 속을 태운다. 이어 소비 촉진 운동이 벌어진다. 이미 씨앗은 뿌렸는데 풍년이 걱정된다고 해서 농부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농부로서는 정성껏 재배하는 게 답이다. 냉동·냉장보관 시설을 갑자기 늘릴 수도 없으니 참으로 해결이 어렵다. 소비 촉진 운동을 해도 먹는 양에는 한계가 있다. 한 시간 걸려 양파 캐러멜라이징 만드는 동영상을 보면서, 냉동해서 보관하는데 저걸 만들어서 파는 식품업체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품업체가 연구개발하면 풍년의 역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올 거 같다. 풍년에 농부가 산지에서 농작물
  • [길섶에서] 우주와 도솔천/손성진 논설고문

    광대한 우주 속에서 나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일까. 138억년이란 시간과 지금도 확장되고 있다는 무한성의 공간. 우주의 시작은 언제이며 끝은 어디인가. 그 경계를 넘어갈 수는 있는 것일까. 우주 진화에 대한 전문서적에 도전한 것은 막연하게 궁금증을 풀어 보고자 하는 무모함에서 비롯됐다. 10의 마이너스 35승 초. 150억 광년. 불교에서 말하는 찰나와 억겁이란 이렇게 상상 불가인 시공(時空)을 뜻하는 것일까. 잔뜩 벼르고 있었던 터였기에 2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끝까지 읽은 심정은 절망에 가까웠다. 다만 우주 속에서 인간이란 미물(微物)의 영역을 새삼 자각했다. 그 속에서 날뛴들 언제 저 천상 세계, 춘향이가 말하던 도솔천(兜率天)에 닿을 수 있단 말인가.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어요?” 그래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우주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위에 있다. 우리는 지구라는 별의 표면에 발을 붙이고 머리는 탁 트인 우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우주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잠잠하던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여름 추위/박록삼 논설위원

    한 동네 살던 김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더위를 안 탔다. 봄가을은 물론, 한여름 폭염에도 좀체 더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집에 에어컨 따위를 둘 리 없었다. 어려웠던 시절 탓도 있지만, 나중 에어컨이 대중화되고 돈이 충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삼복더위 중에도 낡은 선풍기 하나 게으름 부리며 돌아가는 게 전부였다. 여름 외출 때는 정장이나 점퍼 차림만 고집했다. 밖에서 돌아와 정 덥다 싶으면 깡마른 몸에 찬물 몇 바가지 붓고 가만히 앉아 책을 보거나 하는 걸로 끝이었다. 식솔들의 더위 타령과 원성은 호들갑이라는 말로 물리쳤다. 떠나기 전 두어 해 동안 김 노인은 여름에도 아예 추위를 탔다. 사시사철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지냈다. 발이 삐죽 튀어나왔는가 싶으면 침대 곁 아내에게 담요 덮어 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더위에 지친 아내가 슬쩍 선풍기라도 틀라치면 얼른 끄라고 성화를 부렸다. 마른 몸은 더욱 말라갔고, 그의 아내 또한 더위와 간병에 시달리며 함께 말라갔다. 그가 떠난 뒤 그의 여름 추위는 아내에게 옮겨왔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마음 편하다며 30도가 훌쩍 넘어가는 여름 한낮의 더위 앞에서도 늘 홑담요 한 장을 곁에 뒀다
  • [길섶에서] 오래된 골목에서/황수정 논설위원

    여행을 하더라도 속살 같은 골목을 들여다보지 못했으면 반쪽짜리라고 생각한다. 내밀한 사연들이 골목 안쪽에는 있으려니와 손질되지 않은 일상의 풍치를 대면하는 즐거움이 각별하다. 제주의 창창한 바다보다 둘레길 외진 동네의 저녁 골목이 내게는 아끼는 장면이다. 석양 아래 돌담 골목을 둥글게 따라 걷다 만났던 밀감나무 집. 까만 돌담 너머로 잘 익은 밀감이 가지마다 점점이 백열구처럼 불을 켜던 골목. 늦은 저녁상을 차리는지 낮은 부엌에서는 달강달강 쉬지도 않고 그릇이 부딪던 소리. 하마터면 나는 물 한 그릇 달라고 대문을 밀고 들어갈 뻔했다. 출퇴근길에 아껴 보던 옛 동네의 골목길이 뭉텅뭉텅 잘려 나간다. 고층 아파트가 밀어오니 속수무책이다. 어깨가 비뚜름해도 제 할 일 다했던 전봇대, 해가 지면 눈이 침침해지던 외등. 저녁 찬거리였겠지, 골목 텃밭에서 풋배추 한 움큼 솎던 손길, 알감자의 흙을 탈탈 털어 뒷짐 지고 걷던 발길. 갈 데는 있을까, 짐자전거가 기대어 쉬던 늙은 참나무는. 날마다 모퉁이가 깨지는 골목길이 섭섭하고 섭섭해서 발길이 붙잡히는 저녁. 골목의 하늘에 오늘은 귀퉁이 깨진 눈썹달도 말고 둥글고 둥근 달이 밤새도록 떠 있기를. sjh@seou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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