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버스 예절/김균미 대기자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외출을 자제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면역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어르신들이 더욱 그렇다. 그러다 보니 지하철 승객이 눈에 띄게 줄었다. 버스도 마찬가지다. 확진환자가 이용한 것으로 공개된 버스는 소독을 철저히 마쳐 문제가 없다지만 그래도 주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신 주변에 자가용을 몰고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기업들이 늘면서 출퇴근 시간에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도 줄었다. 8일 서울시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월 첫째 주 평일 대중교통 이용객 수가 전주보다 34.5% 줄었다. 지난달 23일 감염병 위기단계가 심각으로 격상되면서 대중교통 이용객 수가 평일 30.9%, 토요일 48.5%, 일요일 53.3%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어쩐지 출퇴근할 때 버스가 많이 널널해졌다 싶더라니. 버스 안이 덜 붐비다 보니 다른 사람과 부딪치는 경우도 줄었다.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큰 소리로 휴대전화를 하거나 옆 사람과 말을 하는 사람도 덜 보인다. 대놓고 기침이나 재채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버스 안 변화다. 어렵사리 자리잡은 버스 예절, 도루묵이 안 됐으면 좋겠다.
  • [길섶에서] 봉인됐던 기억/전경하 논설위원

    오래전 남동생을 날벼락처럼 잃은 기억을 덮었다. 무심한 듯 소식 끊고 어디선가 잘 살고 있는 것처럼 여겼다. 사고 당시 만삭이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를 위한 방어였다. 그러면 덜 슬프고, 덜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망상이었다. 그렇게 눌렀던 슬픔은 예기치 않았던 일들에 비집고 올라와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다. 얼마 전 누군가 불쑥 동생 안부를 물어 왔다. 고등학교 친구라며 소식이 끊겼는데 뭘 하고 있냐고 물었다. 침묵이 흐른 뒤 대답하면서 무릎이 계속 꺾였다. 잘못했구나. 동생이 다양한 세상을 살았는데 나와 가족은 하나의 세상을 잊어버렸다는 뒤늦은 후회와 미안함이 밀려왔다. 세상은 참으로 얄궂다. 후배가 비슷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할 부모, 부모 앞에서 입술을 깨물며 슬픔을 삼킬 가족들. 지인들이 문득문득 느낄 허망함이 가족들은 감사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처참하다.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당사자의 억울함. 떠난 자에게 소중한 하루를 눈이 부시게 잘 살아야 한다고 이성은 되뇌는데 마음은 계속 허망해한다. 그래서 못난 사람이다. 한때 같이했음을 담담히 이야기할 시간은 올까. lark3@seoul.co.
  • [길섶에서] 마음의 다스림/손성진 논설고문

    다양한 상황과 맞닥뜨리는 삶은 요철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한 과정이다. 늘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수양이다. 수양 또는 수신이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마음을 갈고닦아 바르고 착한 품성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행위다. 수양이 부족하면 복잡한 세상사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일희일비한다. 또한 그릇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탐욕에 빠져 그런 결과 필요 없는 걱정으로 아까운 인생 시간을 낭비한다. 수양이 되면 좋고 나쁜 대소사에 쉽게 깔깔거리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잦은 감정 변화로 정신의 피로를 자초하지 않고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삼사일언(三思一言) 즉, 다른 사람에게 말 한마디를 해도 세 번의 생각을 거쳐서 할 만큼 매사에 신중해진다. 그러면 말을 해놓은 뒤에도 아무 탈이 없다. 수양이 모자란 사람들이 넘쳐난다. 바르고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그런 사회가 잘되기는 어렵다. 수양은 오직 자신의 몫이며 수양의 길은 멀리 있지도 않다. 고승이 면벽수도 하듯이 참선할 필요도 없고 하루 5분이라도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자신의 언행을 돌이켜보는 것으로도 가능하다. sons
  • [길섶에서] 요절(夭折)/박록삼 논설위원

    삶에는 의미와 무의미가 무성히 뒤엉켜 있다. 딱히 의지가 개입하지 않은 부모 자식 등 가족과의 관계는 참으로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만들어진다. 반면 시험, 출세 등 강한 의지를 갖고 덤벼드는 일들은 쉬 성취되지 않기 일쑤다. 의미를 부여했으나 무의미한 결과를 낳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가 부재(不在) 뒤 강렬히 각인되는 경우도 많다. 미망과 무지, 탐욕으로 둘러싸였던 중세 암흑기를 극복하려는 시도였지만, 근대는 이성과 합리의 가치에 너무 경도됐다. 의미를 부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인간의 자만심은 거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흔히 ‘이단’이라 부르는 종교들이 21세기 들어 유독 더 많이 창궐하는 배경이다. 합리적 이성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삶의 문제들이 즐비하다. 거대한 우주 속 ‘창백한 푸른 점’ 지구 위에 사는 하찮은 존재들로선 더욱 강력한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삶의 비의(秘義)에 닿기 어려운 탓일지 모른다. 가장 행복해야 할 시기에 갑자기 떠나버린 후배 뒤에 남겨진 숱한 존재들은 한동안 허무함과 무기력함을 견디며 지내야 한다.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일상 속 많은 것에 나름의 의미를 담아 삶을 영위할 것이다. 문득 또다시 무의미해지더라도
  • [길섶에서] 나만 잘하면 된다/문소영 논설실장

    청결한 여성이란 신화의 그늘에서 깨끗한 척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명예 남성’이란 지칭에 걸맞게 살아왔다. 한 지인은 코로나19 덕분에 결혼 20년 만에 남편이 퇴근하자마자 샤워하는 꼴을 처음 보았다고 증언했다. 나 역시 그분의 남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코로나19 감염증으로 개인위생이 철저해지고 있다. 매일 마스크를 쓰고, 수시로 손을 닦는다. 마스크 없이 기침을 할 때는 옷소매에 입을 묻고 침방울이 널리 퍼지지 않도록 예절을 지킨다. 그 덕분에 2월 인플루엔자 환자가 1000명당 16.4명으로 집계됐다고 질병관리본부가 밝혔다. 1월 초에는 49.1명이었다고 하니 70%가 급감한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초연결 사회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코로나19 누적 확진환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전국 각지에서 확진환자가 나오는 상황을 지켜보자면 ‘데카메론의 시간’의 초연결을 새삼 깨닫게 된다. 중세에는 괴질이 생기면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대상이나 이방인을 찾아내 죽이거나 마을에서 쫓아냈다. 공포가 불신으로 확장된 탓이다. 그러나 초연결 사회에서는 중세처럼 행동할 수 없다. 문명은 질병과 동행해 왔다.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면서 ‘나만 잘하면 된다’를 되뇐
  • [길섶에서] 망춘(望春)/박홍환 논설위원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과 비가 내려 싹이 튼다는 우수를 지나 시간은 개구리가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을 향해 가고 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듯이 겨울이 가면 봄이 오기 마련이다. 자연의 섭리는 그런 것이다. 매섭지 않았던 겨울이었지만 새벽 첫 공기를 들이켜며 겨울을 실감했듯이 한낮의 온화한 햇살을 받으며 봄이 가깝게 왔음을 한껏 느끼는 요즘이다. 몸은 또 그렇게 계절의 변화에 적응할 것이다.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단언컨대 겨울이 있어서다. 생명을 거부하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은 가열차게 봄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눈밭을 뚫고 수줍게 올라오는 노란 복수초가 기특한 까닭은 시련을 극복한 희망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개나리는 봄을 기다린다는 뜻의 망춘(望春)으로도 불린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언덕길의 샛노란 개나리꽃 군락은 흡사 겨울을 물리쳤음을 자축하는 군무와도 같다. 코로나19로 나라가 꽁꽁 얼어붙었다. 겨울이 지나가지만 사람들은 온몸을 꼭꼭 싸맨 채 움츠리고 있다. 하지만 단연코 봄은 올 것이다. 혹독한 시련을 이겨 내고 꽃을 피우는 복수초나 망춘처럼 코로나19를 물리치고 따뜻한 햇살을 만끽할 봄날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그러자면 묵묵히 뿌리의 내력을
  • [길섶에서] 17년 전 사스/오일만 논설위원

    2002년 12월 중국 광저우 시내는 불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길거리에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수군댔다. ‘무서운 역병이 돌고 있다’는 소문은 ‘카더라 통신’을 타고 중국 전역을 떠돌았다.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당국과 언론은 침묵으로 일관한 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발병 사실을 숨겼다. 원인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사스를 이상한 병이란 뜻의 괴질(怪疾)이라 불렀다. 사스는 다음해 2월 민족 대이동으로 불렸던 춘제(설날)를 통해 급격하게 전파됐다. 당국은 연중 가장 큰 정치행사인 3월 양회기간에도 끝까지 함구했다. 이 괴질이 사방팔방으로 퍼져가도 당국은 그저 쉬쉬했고 흉흉한 민심은 분노로 돌변했다. 중국 당국은 2003년 4월 10일에야 사스 창궐 사실을 발표했다. 전년 11월 광둥성 포산에서 첫 발병 이후 5개월 만이다. 당시 봉쇄당한 베이징은 참혹했다. 치료도 받지 못한 사망자가 쌓였다. 시장과 백화점은 물론 모든 골목식당까지 폐쇄됐다. 자욱한 스모그 연기 속에서 음산한 불신의 공기가 퍼져 나갔다. 간혹 거리에서 마주치는 시민들은 불안에 떠는 표정이 역력했다. 17년 전 베이징 특파원으로 경험했던 그 참상을 2020년 2월 대한민국 서울에서 다시 본다.
  • [길섶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두려움/이종락 논설위원

    영화 버드 박스(Bird Box)는 2018년 넷플릭스가 선보인 오리지널 영화 중 가장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공개 일주일 만에 전 세계 4500만 이상의 시청자가 관람했을 정도다. 조시 맬러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 끔찍하게 변해버리는 괴현상에 닥친다는 설정이다. 보지 않으면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주인공(샌드라 불럭)은 눈을 헝겊으로 가린 채 두 아이를 지키고자 사투를 벌인다. 국내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이 영화를 떠올린다. 보는 것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회사에 출근하는 길에도 바이러스의 흔적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몇 번이나 뚫어지게 보게 된다. 지하철을 탈 때나 버스 의자에 앉을 때,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를 때도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도 일본에서 이런 공포를 경험한 적이 있다. 전자기파나 입자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물질의 성질인 방사능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원전 사고 때도 느꼈지만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만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 [길섶에서] 생필품의 변천/이지운 논설위원

    인터넷을 보니 “생필품 목록을 알려 달라”는 글들이 있다. 아니, 생필품(生必品)은 글자 그대로 아닌가 하다가도 생각을 고쳐 먹게 된다. “유학 가는 친구가 뭘 필요로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일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물품’은 저마다 사정과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고전적 의미에서라면 ‘사재기’ 목록에서 금방 찾을 수 있겠다. 쌀이든, 특정 작물이든 쌓아 두었다가 되팔아 큰 차익을 챙길 수 있는 것들이 대표 품목들이다. 다만 사재기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요즘은 공급이 넘쳐나는 데다 클릭 한 번이면 집 앞까지 가져다주니 과거의 ‘광풍’과는 양상도 많이 다르다. 출근길 서둘러 집에서 나온 발걸음을 ‘반드시’ 되돌릴 만한 게 있다면 단연 휴대폰일 것이다. 너무 시급한 상황이라면 가끔 지갑은 예외일 수 있다. 휴대폰은 실로 일상에 한순간이라도 놓기 어려운 존재가 됐다. 출근길 발걸음을 돌렸다. 잠시 고민했지만, 마스크 없이 지하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느덧 마스크가 사재기의 반열에 올랐다. 수급과 관리에 정부가 골머리를 썩일 만큼의 존재감을 갖게 된 것이다. ‘마스크 안보’라는 이도 있다. 역사에서 위로를 얻는 요즘이다. 사재기는 때가 되면
  • [길섶에서] 트로트 열풍/이동구 수석논설위원

    출퇴근 때 이어폰을 통해 노래 듣는 게 습관이 됐다. 어림잡아 1시간 가까이를 그냥 물끄러미 앞만 보고 있거나, 눈을 감은 채 지하철과 버스 등을 이용하기가 너무 무료한 탓에 생겨난 자구책이라고나 할까. 덕분에 학창 시절에 즐겨 들었던 팝송을 비롯해 중국, 일본 가수들의 노래 등 다양한 음악을 듣고 있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앱을 누르기만 하면 갖가지 노래를 들을 수 있어 편하다. 따로 좋아하는 곡들을 찾지 않아도 평소 좋아하는 노래와 유사한 분위기의 노래들이 자동적으로 제공된다. 어쩜 이리도 내 맘에 꼭 맞춘 곡들을 들려주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흘러간 가요들을 듣다 보면 어릴적 추억이나 함께 지냈던 학창 시절 친구들의 얼굴, 웃지 못할 아픈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즐겨 부르시던 곡들이 들릴 때면 잠시나마 회한에 젖기도 한다.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도 단순해졌다.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특히 최근 몇 개월 사이 트로트를 주제로 한 몇몇 케이블 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꼭 봤다. 시청률 20~30%를 오르내릴 정도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다. “나이 들면 모두가 뽕짝을 좋아하게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실감하며 살고 있다.
  • [길섶에서] 코로나19와 애경사 풍경/장세훈 논설위원

    지난 주말 회사 후배의 경사와 가족의 애사가 있었다. 9년 열애 끝에 결혼을 한 후배의 결혼식 풍경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많은 하객이 혼주와 악수와 같은 스킨십은 생략했고, 마스크를 쓴 채 인사를 주고받아도 결례로 간주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결혼식장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좀처럼 보이지 않은 것도 단순히 기분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혼주와 인사만 나눈 뒤 황망하게 떠나는 이들도 적잖게 눈에 띄었다. 가족의 부음도 있었다. 응당 장례식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를 생략하기로 했단다. 코로나19가 생활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는 불안감이 큰 마당에 고인과 살아생전 인연을 나눈 분들을 모시기엔 부담이 더 크다고 여긴 것이다. 어머니는 형제를 잃은 슬픔에 장례식장조차 갈 수 없는 안타까움까지 더해졌다. 아니 갈 수 없는 나는 상주인 사촌형제에게 부득불 우겨 고인께 마지막 인사를 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코로나19도 마찬가지다. 애사든 경사든 달라진 풍경 이면에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도 깔려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씁쓸해하거나 서운해하지 말자. 코로나19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이다.
  • [길섶에서] ‘주5일 식당’/김균미 대기자

    지난 주말 오랜만에 딸과 뮤지컬 공연을 봤다.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장이 텅텅 빌 줄 알았는데, 마스크를 한 관객들로 객석이 꽤 찼다. 의외였다.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회사들이 몰려 있는 서울 강남의 역삼역 부근이라 그런지 주말 이른 저녁 시간대인데도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 많다. 아는 데가 없어 손님이 많은 곳을 골라 들어가려고 두리번거렸는데 손님 있는 식당이 별로 없다. 결국 휴대전화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TV에 소개됐던 식당을 찾아 나섰다. 테헤란로 건너 맞은편도 사정은 비슷했다. 큰길 바로 뒤인데도 영업하는 곳이 몇 군데 없다. 종업원들이 아예 의자에 앉아 손님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모습이 창 너머로 보인다. 한 1~2분 정도 더 걸었을까. 차가 빼곡하게 주차된 건물이 나왔다. TV에 소개된 바로 그 식당이다. 대기자 명단까지 있다. 그냥 갈까 망설이다 언제 또 오겠나 싶어 기다렸다 저녁을 먹고 나왔다. 오후 8시가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지나쳐 온 곱창집은 불이 꺼져 깜깜하다. 근처 다른 식당들도. 아까 그 식당은 일요일에도 영업을 한다는데. 부근 회사들 따라 주5일 식당이 자리잡아 가는 모양이다.
  • [길섶에서] 종이 분리수거/전경하 논설위원

    살고 있는 아파트의 재활용품 분리수거는 매주 일요일이다. 지난 일요일 아침 8시 많은 주민이 주말 단잠에 빠져 있을 즈음 관리사무소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공책 등에 있는 스프링은 제거하고, 종이박스에 붙어 있는 테이프나 운송장 등은 떼고 종이 재활용품을 배출해 달라고 했다. 영수증이나 코팅된 광고 전단지는 재활용이 안 되니 종량제봉투에 넣어 쓰레기로 버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특히 기저귀, 음식쓰레기 등이 있으면 재활용품 수거 업체에서 가져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1년여를 이 아파트에서 살았지만 분리수거와 관련해 처음 듣는 방송이었다. 가끔 분리수거장에서 분리배출을 한 건지 쓰레기를 버린 건지 헷갈릴 때가 있었는데, 이제 도가 지나쳤던 모양이다. 그날 분리배출을 하는 동안 경비가 거의 옆에 있었다. 도와주는 것보다 제대로 하는지 보려는 계산이 더 컸을 거다. 평소보다 경비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당분간 매주 일요일에 그렇겠지. 분리배출을 제대로 하려면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익명성이 보장된다고, 종량제 봉투값 아끼려고 누군가가 쓰레기를 재활용품에 섞어 버리는 바람에 애꿎은 대다수 주민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런데 막상 당사자는 아무 신경 안 쓸
  • [길섶에서] 난분분(亂紛紛)/손성진 논설고문

    백의(白衣)의 무희가 춤을 추듯 눈발이 휘날린다. 올겨울은 눈을 영영 보지 못하고 지나가 버리나 했더니 헛헛함을 달래 주려는 듯 때늦은 눈이 행여 녹아 없어질세라 달음박질쳐 왔다. 바람 한 점 없던 아침나절에는 송이송이 살포시 내렸던 눈이 어느새 이리저리 휘몰아치며 난분분(亂紛紛)이다. 눈발은 거센 바람을 타고 좌에서 우로, 때로는 아래에서 위로 미친 듯이 내달리더니 갑작스레 방향 잃은 나비처럼 갈피를 못 잡고 공중을 떠돈다. “매화 옛 등걸에 춘절이 돌아오니/옛 피던 가지에 피염즉도 하다마는/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꽃 이름과 같은 기생 ‘매화’(梅花)가 지은 시조다. 춘설(春雪)은 사실은 늙은 기생 매화의 연적(戀敵)으로 사또의 마음을 훔친 새파랗게 젊은 기생이다. 시조가 가리키는 대로라면 춘설은 새로움, 젊음이다. 춘설을 바라보며 매화는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을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물러가야 할 매화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지 모르지만 춘설은 새 세상의 도도한 새 물결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훈훈한 봄날이 닥치면 춘설은 난분분, 그것도 아름답게 난분분하며 누구든 사로잡을 벚꽃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할 테니. sonsj@seoul.c
  • [길섶에서] 얼지 않은 화천천/박록삼 논설위원

    올겨울 화천천은 제대로 얼지 않았다. 30㎝ 안팎의 두께로 얼어야 했는데 예년과 달랐다. 북방 찬바람 대신 훈훈한 날씨만 이어졌다. 미국 연방해양대기국(NOAA)은 올해 1월 지구평균기온이 141년 만에 가장 높았다고 했다. 산천어와 수달이 사는 청정 강원도에서도 깨끗하기로 소문난 화천군은 안절부절못했다. 산천어 축제의 개막이 계속 연기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은 탓이다. 널찍한 얼음 벌판에 2만개의 구멍을 뚫은 뒤 그 아래에 80만 마리의 산천어를 풀어놓고 낚시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진풍경이었다. CNN, BCC 등 외신에 소개돼 이른바 ‘세계 4대 겨울축제’라는 명성까지 얻었다. 몇 해 전 아이들을 데리고 간 적이 있다. 재주 없는 아비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시무룩해하는 아이에게 산천어와 회무침을 사서 먹였다. 올해에는 코로나19가 전 지구적 재앙으로 덮쳤고, 생명의 살상을 즐기는 축제라는 비판까지 더해져 고통은 더 커졌다. 지난 16일 끝난 산천어 축제는 작가 이외수의 “자갈 구워 먹고, 모래 삶아 먹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실존적 부르짖음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기후변화가 불러온 전 지구적 위기 앞에서 내가 옳네, 네가 그르네를 다투는 것은 참
  • [길섶에서] 디지털 격차/전경하 논설위원

    경기도 평택에 사는 엄마는 서울을 오갈 때 고속버스를 이용한다. 지하철을 무료로 탈 수 있는 나이는 일찌감치 지났지만 지하철은 오래 걸리고 불편해서다. 그날도 엄마는 늦은 오후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해 평택행 표를 샀다. 표를 받고 보니 승차시간은 도착시간으로부터 2시간 뒤. 주말도 아니었는데 한 시간 걸리는 거리를 2시간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속상해하는 엄마의 전화를 받는 순간, 다행히 나는 고속터미널에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가면서 휴대전화에 깔린 앱을 반복 실행하니 40분 뒤 출발하는 버스표가 떴다. 모바일 예매하고 현장 발권으로 엄마를 고속버스에 태웠다. 엄마의 휴대전화는 2G 폴더폰으로 들고 다니는 공중전화에 가깝다. 내 스마트폰은 언제나 쓸 수 있는 성능 좋은 컴퓨터다. 엄마는 “주민센터에서 스마트폰 활용법을 가르쳐 주는데 배워야지” 하고 다시 다짐한다. 배우면 반복 실행하면서 출발시간과 좌석을 고르고, 결제를 위해 카드번호 등을 입력할 수 있을까. 엄마 전화기를 최신 기종으로 바꾸고, 내가 예매해서 메시지로 보내는 상황이 될 거 같다. 기술은 발달했는데 엄마가 고속버스 표를 사기는 되레 어려워졌다. 기술 발달이 모두에게 좋지만은
  • [길섶에서] 비대칭 공포/박홍환 논설위원

    인체는 코밑 인중의 가운데 수직선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의 구조를 갖고 있다. 실제로는 척추선이 기준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동물, 하물며 곤충까지도 좌우 대칭이다. 혹스(HOX) 유전자 때문에 이런 경이로운 구조가 만들어졌다는데, 이 유전자는 6억년 전 인류와 동물의 옛 공통 조상들에게도 존재했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대칭 구조가 익숙하고 안정적인 것도 그래서인가 보다. 며칠 전 자고 일어나 두 눈을 비비며 거울을 보는데 생면부지(?)의 중년 남자가 떡하니 서 있다. 오른쪽 볼만 기괴하게 부어 오른 ‘짝볼 사내’는 어색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난치병인가 싶어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피로 누적으로 오른쪽 볼 피부 안쪽에 염증이 생겨 그렇다고 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개운하지는 않았다. 마스크로 비대칭 구조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만화영화 ‘마징가Z’의 아수라 백작은 좌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악(惡)의 화신이다. 헬 박사가 남녀 시신을 합쳐서 만들어 냈다. 유전과학자들에 따르면 혹스 유전자에 변이가 생길 경우 대칭 구조가 깨질 수 있다고 한다. 영화 ‘기생충’은 극단적인 비대칭 구조를 묘사하고 있다. 공포스럽기까지 한 이런 심각한 빈부격차를 만
  • [길섶에서] 영화 같은 삶/이종락 논설위원

    사실주의 영화는 현실을 최대한 있는 대로 표현한다. 현실에서 중요한 것, 본질적인 것을 추려 내 엮은 영화를 리얼리즘 영화라고 일컫는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은 “객관적 광학적 과정으로 생산된 사진의 미학이 벌거벗은 실재를 보여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화 ‘기생충’이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비결은 뭘까.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가 직면한 빈부격차의 화두를 기발한 스토리와 섬세한 연출력으로 전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인이 두려워하고 주목하고 있는 이슈는 중국 우한(武漢)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 여부다. 12일 현재 코로나19는 최소 25개국으로 퍼졌다.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과 세계인의 공포를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 ‘컨테이젼’을 최근 인터넷TV에서 봤다. 2011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지금의 상황을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그리고 있다. 홍콩의 박쥐 똥에서 시작해 돼지와 사람으로 옮아 가는 전염병의 경로가 코로나19와 무척 닮았다. 영화는 어느새 우리 삶을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모사(模寫)하는 단계에 온 것 같다. 같은 리얼리즘 영화인 ‘기생충’의 쾌거는 반갑지만, ‘
  • [길섶에서] 음모론/오일만 논설위원

    출퇴근길 마스크 행렬이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밀폐된 버스나 지하철에서 기침 한 번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이웃 중국에서 하루 100명 이상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사망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당연하다. 공포가 조성되면 늘 음모론이 판을 친다. 실체도 없는 가짜뉴스가 ‘카더라 통신’이 돼 소셜미디어에서 빛의 속도로 퍼진다. 신종 코로나 사태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러시아 방송이 제기한 ‘바이러스 미 군부 제조설’이 대표적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미국 군부와 제약회사의 공모에 따라 확산됐다는 음모론이다. 미 군부의 비밀 생화학무기팀이 바이러스를 제조해 퍼트리고, 제약회사가 이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도록 유도했으며, 그 배후엔 미국 정보기관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가만 있을 미국이 아니다. 한 상원의원이 문제의 바이러스가 중국의 생화학전 프로그램에서 유출됐을 것이란 의혹을 꺼내 들었다. 발원지인 중국 우한에 바이러스 연구 시설이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발끈한 중국이 ‘미친 소리’라고 항의했지만, 의혹은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증을 부추기는 불쏘시개로 공포를 악용해선 안 된다.
  • [길섶에서] 코로나의 비극, 생이별/이지운 논설위원

    목을 길게 늘여 뺀 학(鶴)의 모습처럼 ‘기다림’을 잘 묘사하는 것도 없을 것 같다. 기다림은 대개 고통이다. 학수고대(鶴首苦待)의 간절함도 괴로움(苦)으로 표현됐다. 생이별은 단장(斷腸)의 고통이라 한다. 이산(離散)은 그 하염없는 기다림 때문에 끝없는 고통일지 모른다. 기실 끝이 있는 기다림도 버겁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 초병(哨兵)에게는 더이상 시적인 표현이 아니다. 어둠 깊은 곳에서 동이 트기까지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지, 참으로 모질게 길다. 기어이 떠오를 해인 줄 뻔히 알면서도. 기다림을 부추기는 곳이 있다면 병상(病床)일 것이다. 병상은 외로움을 배양한다. 마음이 눅눅해진 노인의 병상은 더욱 그러하겠다. 해가 뜨고 한참, 점심을 마치고도 한참,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 눈은 TV를 보노라지만, 신경은 온통 병실문에 쏠려 있다는 걸 그 문을 드나들 때면 알게 된다. 병원, 요양원이 더 고요해졌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면회가 제한되더니, 어느새 전면 금지로 전환됐다. 당분간 오지 못하게 됐다고 고해도 실감하지 못하는 눈치들이다. 어차피 며칠에 한 번꼴이나 찾는 게으른 자식들이어서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은 더해 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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