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아무거나/임태순 논설위원

    동네 도서관에 갔다 자판기에 ‘아무거나’라는 음료수가 있는 걸 보고 머리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자판기에 있는 콜라, 사이다 등 음료수 중 하나에 아무거나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다. 목은 축여야 하는데 딱히 마시고 싶은 음료가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저절로 손이 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매출도 쏠쏠할 것 같다. ‘아무거나 심리’는 우리 주위에서 쉽게 발견된다. 직장에서 ‘오늘 점심 뭐 먹지’ 하면 돌아오는 답이 아무거나다. 그래서 아무거나를 파는 식당도 있다고 한다.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등 메뉴 중 하나에 아무거나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이다. 주관이 분명한 서양인들에게는 ‘아무거나 문화’가 잘 이해 가지 않겠지만 개인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는 우리들에겐 아주 익숙하다. 아무거나는 상대편 의사를 알 수 없어 불편하기도 하지만 때론 편할 때도 많다. 선택의 고민을 덜어주거나 사소한 것을 둘러싼 대립이나 갈등이 없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거라도 없었으면 우리 사회는 좀 더 각박하고 여유가 없지 않았을까.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봄마중/함혜리 논설위원

    매서운 한파가 이어진 겨울을 힘겹게 보낸 터라 봄이 오는 것이 무척 반갑기만 하다. 3월의 첫 주말을 그냥 집에 앉아서 맞을 수가 없어 신발 끈 동여매고, 배낭을 짊어지고 문경새재 옛길을 찾아 나섰다. 경북 문경과 충북 충주를 잇는 백두대간 옛길 문경새재는 조선시대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길이었다. 관리들의 행차가 이 길을 지났고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길에 오른 선비, 괴나리봇짐을 멘 보부상들도 문경새재를 넘었다.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3개의 관문을 차례로 지나는 코스가 지금은 평탄한 흙길로 잘 다듬어져 있어 사색하며 걷기에 딱 좋다. 아직은 봄이라고 하기엔 이르지만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뒤끝이 훈훈했다. 쭉쭉 뻗은 소나무가 일품인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산골짜기 응달진 곳 여기저기에 꽤 많은 눈이 남아 있었다. 언덕진 산길은 얼었던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푸석푸석 밟혔다. 자연은 어김없이 봄에게 자리를 내주면서도 할 말은 하는 듯했다. 춥고 힘든 겨울이 지난 뒤에야 찬란한 봄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간호사 도우미/최광숙 논설위원

    어느 날 한 병원에 한 간호사를 졸졸 따라다니며 허드렛일을 돕는 이가 나타났다고 한다. 병원 직원도 아닌데 갑자기 출연한 그 아줌마의 정체가 다들 궁금해졌단다. 알고 보니 간호사의 엄마가 딸에게 붙여준 이른바 ‘간호사 도우미’였다. 간호사로 취직한 어린 딸이 피 묻은 고름 등을 닦아내는 등 궂은일을 하는 것이 ‘무섭다’고 징징거리자 그 엄마가 집에서 일하는 가사 도우미를 딸의 직장으로 파견한 것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전해 들은 친구의 말을 듣자니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황당하다. 집에서 공주같이 자란 귀한 아이들이 병원에서 험한 일을 제대로 할 리 만무고, 그러다 상사로부터 한 소리를 들으면 부모가 더 흥분해 자식으로 하여금 사표를 쓰게 한다고 한다. 사표도 집에서 퀵서비스로 휙 날려 보낸다나. 철없기는 젊은 의사들도 마찬가지란다. ‘환자들이 이상하다’며 오랜 시간 전화통을 잡고 엄마한테 하소연하기 일쑤란다. 어찌하여 자식을 위해 뭐든 한다는 ‘헬리콥더 맘’은 갈수록 진화하는지 걱정스럽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일수거사’/육철수 논설위원

    옛날에 권세깨나 있던 귀족들은 이름이 대여섯 개쯤 됐다. 어릴 때는 아명(兒名)을, 어른이 되면 정명(正名)을 가졌다. 이름 외에 자(字)·호(號)·함(銜)을 쓰기도 했고, 나라에 공이 크면 사후에 임금에게 시(諡)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며칠 전, 정년 퇴임한 뒤 소설가로 변신한 K교수와 저녁을 함께했다. 그는 한 달에 보름은 남쪽 섬에서 생활한다. 최근에 불교 관련 장편 역사소설을 써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분이다. 워낙 재담이 좋아 얘기를 나누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소설을 쓴 게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헤어질 무렵, 그가 몇 마디 툭 던졌다. “이번에 ‘호’를 하나 지었어요. ‘일수거사’(一水去士)라고…. 거~ 뭐, ‘한물 간 선비’란 뜻이죠.” 일행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작가의 길로 들어섰으니, 멋있는 호를 가져 풍치를 누릴 자격 충분하지…. 그런데 남자 불도를 일컫는 ‘거사’(居士)를 살짝 비틀어 갖다붙인 재치가 빛난다. 웃자고 한 농담이겠으나, 그는 호에다 ‘한물 갔다고 우습게 여기지 말라’는 뜻도 담았으리라.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길섶에서] 도심 추억찾기/정기홍 논설위원

    엊그제 오후, 번잡한 도심을 뒤로하고 종로통 뒷골목을 찾았다. 뒷길들은 회색빛 빌딩 숲을 포근히 안고서 저마다의 민낯을 내밀고 있었다. 종로 골목을 찾은 것은 제법 오래전 이곳에서 살았던 데다, 정작 ‘다듬이 소리’ 같은 추억이 그리워서였다. 북어국 2000원, 이발료 3500원···. 탑골공원 뒷골목은 아직 1970년대의 골목길 정취를 그대로 지닌 듯했다. 생선구이, 찌개 등을 파는 간이포장마차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언제부턴가 이곳을 많이 찾는 어르신의 주머니 사정과 고령을 고려한 맞춤식 가게가 하나둘 자리한 것이다. 최근에는 추억의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철 지난 노래를 듣는 ‘5080 라이브 카페’도 들어섰다고 한다. 발길을 옮긴 지 두어 시간, 한 음식점에 걸린 시구가 눈길을 잡는다. ‘져주고 속아주며 오늘이 행복하면 그게 행복인 줄 알고 산다네, 네 주머니 넉넉하면 나 술 한잔 받아주고….’ 김두한이 주름잡던 ‘우미관’은 흔적이 없지만 종로통은 세월을 한 보자기 안은 채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봄비 오는 날, 친구와 이곳에서 막걸리 한 사발 주고받아야 할 것 같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포트홀/박정현 논설위원

    아찔한 순간이었다. 얼마 전 새벽에 아이를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승용차에 상당한 충격이 전해졌다.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새벽 어스름에 서울시내 도로에 깊게 파인 구멍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 생긴 일이거니 했다. 그런데 주말에 서울 근교로 가족나들이를 나갔다가 또 비슷한 일을 겪었다. 밝은 대낮이라 도로의 큰 구멍을 발견하고 피했기에 망정이지 낭패를 볼 뻔했다. 주변에 이런 경험담을 얘기했더니 자신도 같은 일을 겪었다고 맞장구를 친다. 올해 폭설이 잦아 도로에 구멍이 늘어났다는 설명이다. 제설작업을 하면서 뿌린 염화칼슘이 도로에 스며 구멍이 생겼거나, 눈이 녹으면서 도로에 스며든 물기가 얼고 녹기를 반복하면서 균열이 생겨났다는 얘기다. 이런 도로 위 구멍을 전문용어로 ‘포트홀’(Pothole)이라고 한다. 전국적인 현상이다. 사정이 그럴진대 도로보수 작업을 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다. 도로 구멍도 구멍이지만 정작 메워야 할 것은 ‘행정의 구멍’이 아닐까. 박정현 논설위원 jhpark@seoul.co.kr
  • [길섶에서] 코다리/정기홍 논설위원

    며칠 전 지인의 집에서 술안주로 내놓은 코다리를 먹다가 무릎을 탁 쳤다. 도톰한 살점을 찢어 고추장에 찍어 먹는 맛이 오래전에 잊었던 식감을 되살렸다. 명태를 반쯤 말려 꾸들꾸들해진 그 맛이다. 요즘 출하 채비가 한창인 황태맛을 씹을수록 구수한 코다리의 맛에 비하겠는가? ‘값싼 입맛’에 길들여진 요즘, 코다리의 제 맛을 즐기기란 쉽지 않다. 음식점에서 내놓는 찜과 조림이 코다리 맛의 맥을 잇고 있지만, 양념을 듬뿍 찍은 코다리 맛과 비교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겨우내 잃은 입맛을 되돌려 주는 음식 가운데 코다리는 단연 최고로 친다. 무엇보다 황태처럼 바깥 겨울 날씨에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해 말린 코다리는 그중 최고의 맛일 게다. 올해는 동해안 어장에 명태 씨가 말랐단다. 수온이 높아지면서 어장이 북쪽으로 이동한 데다 어린 명태인 노가리를 남획한 탓이라고 한다. 국내산이 아닌들 겨울철 별미인 코다리의 맛을 앗아갈까. 이번 주말에 코다리를 안주상에 올려 보자. 애들의 간식거리로도 이만한 게 없을 것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말고기의 추억/오승호 논설위원

    어렸을 적 말고기를 먹었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요즘처럼 샤부샤부나 갈비찜, 육회 등 다양한 메뉴가 개발되기 이전이었다. 고기를 썰어 프라이팬으로 구워 먹었다. 말고기 스테이크인 셈. 그 당시 육질이 좀 퍽퍽하고 담백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말고기의 지방 함량이 소고기의 3분의1 수준으로 적기 때문일 것이리라. 오래전 술자리에 동석했던 제주 출신이 서울지역 호텔에서 말고기 전문 식당을 해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일본 관광객들과 국내 부유층을 공략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사업이 성공해 돈을 잘 벌고 있는지 수소문해봐야겠다. 유럽의 말고기 파문이 가라앉질 않는다. 독일에선 여당인 기독교민주당 간부가 수거한 문제의 ‘말고기 섞인, 다진 소고기’를 거둬 빈곤층에 제공하자고 제안해 찬반 논란이 벌어지고 있단다. 우리는 2011년 9월부터 말산업육성법을 시행하고 있다. 말고기 소비와 수출을 촉진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말고기 스캔들이 국내 마육(馬肉)산업에 타격을 주는 일은 없겠으면 좋겠다.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길섶에서] 이유 있는 차별/함혜리 논설위원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웬만하면 드러내놓고 성차별을 하지 않는 요즘이다. “여자가 감히!”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가는 간이 크다는 소릴 듣는다. 그럼에도 대 놓고 성차별을 하는 곳이 있다. 서울 중구 다동에 30년 역사를 자랑한다는 칼국수집으로 남자 동료 3명과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음식이 나왔을 때는 몰랐는데 다 먹고 나서 보니 내 그릇이 다른 그릇보다 크기가 작았다. 여자라서 작은 그릇에 담아 준 것이란다. 같은 양을 주면 여자 손님들은 다 먹지 못하고 남기기 일쑤다. 주인 입장에선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이 쓰레기가 되는 것이 달갑지는 않을 터. 그래서 내놓은 해법이 작은 그릇이다. 가격은 차이가 없다. 다 비울 자신이 있으면 보통 그릇에 달라고 하면 된다. 하긴 작은 그릇에 담아 나온 칼국수도 내게는 많은 듯했다. 이 집 칼국수는 싸고 맛있어 주머니가 가벼운 직장인들에게 인기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기다리는 사람들이 계단까지 빼곡했다. 여성들도 꽤 많았다. 이유 있는 차별에는 토를 달지 않는 법이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나비넥타이/최광숙 논설위원

    정치인 신익희 선생과 조병옥 박사, 김동길 교수와 ‘아폴로 박사’로 유명한 조경철 교수. 나비넥타이 하면 떠오르는 이들이다. 이들 외에 연예인이나 음악가 등이 아니면 주변에서 나비넥타이를 맨 이들을 보기 쉽지 않다. 그만큼 평범한 남성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매는 게 나비넥타이가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으로 불리며 대접받는 의사와 나비넥타이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자유로운 영혼의 아티스트들도 아니고, 평범을 거부하는 개성파들과는 거리가 먼 직업 아닌가. 그런데 나비넥타이를 매는 의사들이 늘어난다고 한다. 이유인즉, 한 대학병원 측이 넥타이가 병원균을 옮기는 주범으로 지목되자 병원 내 감염 예방을 위해 나비넥타이 착용을 권해서란다. 나비넥타이에 멋과 개성 외에 실용성이라는 덕목 하나가 더 추가된 셈이다. 사실 긴 넥타이는 식사할 때 음식물이 묻게 된다. 기름기까지 묻으면 세탁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의사만이 아니고 보통 샐러리맨 사이에서도 나비넥타이 열풍이 불었으면 한다. 순전히 주부 욕심이다.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출근길 까치/정기홍 논설위원

    “밤새 무슨 일이 있었나?” 출근길이면 반기던 까치가 어제 아침엔 기척이 없었다. 지하철역까지 걷는 길에 어김없이 나타나던 놈이다. 까치의 아침 인사에 출근길이 가벼워진 것은 제법 오래됐다. 궁금해 뒤돌아보기를 두어번, “까까 깍~, 까까 깍~” 그 놈의 목소리다. “그럼 그렇지. 너와 나는 이심전심, 일심동체라···.” 까치 울음은 나에게 정겨움이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말에, 그가 우는 날이면 문 밖 인기척에 빼꼼히 내다보던 일은 살가운 추억이다. 가을녘 감을 딸 때면 “까치 먹을 것은 남겨 둬라”는 어른의 말씀에 맨 위 가지에 있는 감 하나는 꼭 남겨 뒀던 기억도 새롭다. 이게 겨우내 가지에 대롱대롱 달려 있는 ‘까치밥’이다. 길조(吉鳥)라 부르던 까치는 요즘 도심과 주택가의 말썽꾸러기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이 놈은 아침마다 저렇게 울어댈까. 밤에 우는 새는 님 그리워 울지만, 아침에 우는 새는 배고파 운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 출근길에 빵조각 하나 놓고 나올까, 하지만 이 놈의 거처를 알 수 없는 것을.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주례/진경호 논설위원

    지인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아차!’ 싶은 얘기를 들었다. 한 대학 선배 왈, “벌써 결혼식 주례석에 여섯 번 섰다”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인품도 갖췄고, 나이도 하늘의 뜻을 헤아릴 법한 터이니 주례 여섯 번이 어찌 무릎까지 칠 일인가 싶겠지만, 그는 ‘여성’이었다. 여성 주례! 주례 하면 으레 머리 벗겨진 남성이라는 통념의 포로가 된 나와 달리 선배는 이미 6년 전 마흔여덟의 나이에 또 다른 금녀의 벽을 깨고 나섰던 것이다. 아니, 선배를 주례석에 세우며 이 사회의 통념을 주저 없이 깨부순 6쌍의 젊은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을 뒤졌다. 내가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인지, 내가 아는 것보다 세상이 얼마나 더 빨리 변화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진보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주례를 섰다는 기사가 있고, 다른 몇몇 여성들 이름도 보였다. 그러나 흔치는 않았다. 혼례 사이트에도 여성 주례는 찾아볼 수 없었다. 허물어지기 시작했으나 아직은 공고한 벽 하나를 찾았다. 우리가 또 넘어야 할 산이 앞에 있다. 설레는 일이다. 진경호 논설위원 jade@seoul.co.kr
  • [길섶에서] 잔설(殘雪)/정기홍 논설위원

    “쓰레기가 왜 눈속에 있어?” 엄마 손을 잡은 꼬마가 잔설(殘雪) 더미를 지나며 한마디를 던진다. 상념 속에 지하철을 탔더니 이 녀석이 함께 탔다. 궁금증은 또 있었다. “엄마, 왜 문이 두개가 열려?” “응, 빨리 열리라고···.” 꼬마의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이 꼬마에게서 한수 제대로 배웠다. 올겨울, 큰눈이 많이 내렸다. 눈꽃 구경도 실컷 해 겨울다운 겨울을 지냈다. 그런데 최근 날씨가 풀리자 쌓아둔 눈더미가 그 속살을 드러낸다. 하얗던 눈더미를 누렇게 물들인 담배꽁초, 음식물쓰레기를 담은 봉지 등 우리의 ‘버려진 양심’들이다. 으슥한 골목 등에는 더 추한 모습이지 않은가. 오늘은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절기인 우수(雨水)다. 때마침 전국에 비 예보가 있다. 비에 씻긴 눈더미 자리에 내밀 ‘겨울 자화상’을 대면할 생각을 하니 영 개운찮다. 환경미화원들은 또 이를 치우느라 얼마나 분주할까. “쓰레기장은 본래 있었는가, 만들어진 것인가?” 조계종 교육부장인 법인 스님의 최근 ‘공’(空) 법문이다. 그는 만들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공, 즉 연기(緣起)라 했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5無’ 인생/함혜리 논설위원

    연말연시와 설 명절, 밸런타인데이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기념일들을 딱히 챙길 사람도 없이 보내야 했던 까닭일까. 나도 모르게 신세한탄이 쏟아졌다. “이건 뭐 외로워서 살겠나. 부모님도 안 계신데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위로해 줄 애인도 없고….” 손가락 네 개를 꼽아가며 “있어야 할 사람이 내겐 아무도 없으니 나는 4무 인생”이라고 장탄식을 늘어 놓자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걱정도 없잖소. 4무가 아니라 5무가 맞아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가족들 때문에 걱정거리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태반 아닌가. 연로하신 부모님은 건강이 항상 걱정이다. 남편이나 애인이 있다면 사랑이 식지 않을까 신경이 곤두설 것이다. 자식들 또한 걱정 보따리다. 오죽하면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겠나. 그런 사람들한테는 나처럼 혈혈단신 홀가분한 게 오히려 부러울 수도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생각하니 가슴을 파고들던 허전함도 한순간에 싹 가셨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약속/오승호 논설위원

    저녁 약속 시간이 30분쯤 지났을까. 모임을 주선한 이가 휴대전화를 든다. “왜 안 와? 휴가 중이라고?” 오래전 잡은 약속인데, 상대방은 미안한 기색 없이 태연하다. 모임 총무가 또 다른 불참자에게 전화를 한다. 상황은 비슷했다. 지방 상갓집에 와 있어서 물리적으로 참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한 명은 몸이 아파 미리 불참 통보를 했단다. 여덟 명이 앉을 수 있는 방으로 예약을 했는데, 결국 다섯 명이 모임을 가졌다. 총무의 단골집이어서인지, 아니면 설 연휴 다음 날이어서인지 몰라도 음식점 주인이 나무라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입사시험 면접에 아무런 예고 없이 참석하지 않는 구직자들 때문에 기업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조별 토론식으로 이뤄질 때는 면접 일정이 차질을 빚기 쉽단다. 구직자의 40.4%가 회사에 연락 없이 면접에 불참한 경험이 있고,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이런 구직자들을 가장 싫어한다는 설문조사도 있다. 계포일낙(季布一)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려 본다. 새해에는 약속을 했다면 반드시 지킨다고 다짐해 보면 어떨까. 오승호 논설위원 osh@seoul.co.kr
  • [길섶에서] 족보 알기/정기홍 논설위원

    “족보책 갖고 와 앉아봐. 집안 뿌리를 그렇게들 몰라서야···.” 설 차례를 지내고 세찬(歲饌)을 먹던 중 사촌형의 족보(族譜) 이야기는 시작됐다. “총리 후보자가 집안 어른이 아니냐”는 누군가의 말끝에 족보가 설 밥상머리에까지 올라온 것이다. ‘하늘의 명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을 훌쩍 넘긴 나이에 ‘족보 일침’을 듣게 됐으니···. 족보 교육은 한 시간쯤 이어졌다. 큼지막한 종이 위에 써내려 가는 글엔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몇대 손(孫), 무슨 파(派) 등 어린 조카들에겐 생소한 단어들이다. 형의 열변 언저리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문중(門中)의 대소사를 자기 일같이 챙겨온 그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문중 사람을 모아 선조 유적지 탐방 모임도 이끌고 있단다. 최근 들어 명절이면 마을 어귀에 내건 ‘문중 자랑’ 플래카드를 자주 본다. 이번 설에도 ‘○○네 아들, ○○기관 5급 합격’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주로 학교에서 걸던 것을 문중에서 이은 것이다. 부모 고향을 찾은 코흘리개들이 이를 보고 어떤 희망의 홀씨를 담아 갔을까. 문중의 변신과 형의 문중사랑에 박수를 보낸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길섶에서] 손맛/서동철 논설위원

    손칼국수집에 다녀왔다. 감자를 썰어 넣은 멸치국물과 면발의 조화가 예술이었다.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회사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점심이 맛있는 날은 오후가 즐겁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의 특권일 것이다.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칼국수 면발은 지나치게 반듯하게 썰지 않아야 더 맛있는 것 같다. 기계에서 바로 나온 듯 일정하기보다 굵기와 너비가 조금씩 차이 나는 면발에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익산 미륵사터에서는 손맛과 기계맛의 차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동탑은 백제시대 9층 석탑을 1993년 복원한 것이다. 기계로 돌을 깎았는데 국수로 치면 동네 슈퍼에서 파는 마른 칼국수 같다고 해야 할까. 6층까지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서쪽에 백제 돌장이의 손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쌍둥이탑이 있어 더욱 대비가 된다. 2001년 시작된 이 서탑의 해체조립 공사가 12년째 이어지고 있다. 2014년 말에야 마무리될 것이라고 한다. 정교함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의 체온마저 머금은 서탑의 질감이 다시 드러나면 동탑은 더욱 초라해질 것 같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옛날 사진/함혜리 논설위원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닌 듯한데 머릿속에서 지워진 옛날 일들이 적지 않다. 전에 여행을 함께 했다고 하는 사람을 우연한 자리에서 만났다. 얼굴을 보니 낯은 익은데 무슨 여행이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메일로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을 전해 받아 보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가 그 속에 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의 내 모습이 어찌 그리 낯선지…. 타사 여기자들과 일본과 영국 단기 해외연수를 갔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을 보내준 이는 우리 일행의 인솔책임자였다. 사진에 박힌 날짜를 보니 1992년 8월.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여행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사진 속의 얼굴들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몇몇은 지금도 연락이 닿는다. 내친김에 그중 한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얘기는 하지 않고 그냥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 하자고 했다. 옛날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혹시 그때 일들이 하나둘씩 생각날지도 모른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길섶에서] 교복 치마/최광숙 논설위원

    찬바람이 쌩쌩 도는 영하의 날씨에도 입어야만 했던 교복 치마. 아무리 따뜻한 바지가 입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 중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어머니의 걱정이 컸다.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아이디어가 바로 검은 스타킹 안에 내복을 입히는 것. 쭉쭉 잘 빠진 다리도 아닌데 얇은 스타킹 안에 두툼한 내복을 껴입히신 어머니. 당신에게 그건 사랑이었다. 하지만 한창 외모에 신경써야 할 때인 어린 나에게 그건 ‘고문’이었다. 그래도 딸 자식의 중학교 입학이 그리 좋으셨던지 어머니는 집안에 처음 등장한 ‘여학생’으로 하여금 ‘패션쇼’를 하게 하셨다. 교복을 입은 나를 세워놓고는 “이쪽으로 돌아보라, 멀리 걸어보라” 하셨다. 주름이 두 개 잡힌 나의 교복 치마는 남학생 오빠들 입장에선 그저 멀찍이 바라만 보던 로망이었으리라. 항공사 여승무원들에게 치마를 입도록 강요한 것은 성차별이라는 입장을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놓았다고 한다. 여성의 상징이던 치마, 그것은 이제 성차별의 다른 이름이 됐다. 시대란 그렇게 변하는 것인가.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길섶에서] 막내 매너/임태순 논설위원

    동네 불가마방 입구에 평소엔 보지 못하던 팻말이 하나 걸려 있었다. 팻말에는 ‘막내 매너를 지킵시다’라고 적혀 있었다. 찜질방에선 문을 제대로 닫지 않고 나가는 사람이 종종 입초시에 오른다. 나가는 사람은 급한 마음에 문을 제대로 닫지 않고 나가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열 손실이 없는 게 좋다. 꼬리가 길다는 등 뒷담화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마 팻말은 이런 사람들에게 뒷마무리를 잘해 달라는 당부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도 ‘막내 매너’가 좋지 않으셨다. 방을 둘러본 뒤 나갈 때 방문을 완전히 닫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문 틈 사이로 추운 바람이 들어오면 뒤치다꺼리는 막내 동생 몫이었다. 막내 매너는 지하철에서도 중요하다. 전동차 찻간을 오가는 승객들의 꼬리는 길다. 뒷사람이 오는 줄 알고 연결통로의 문을 닫지 않기 때문이다. 문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면 경로석의 어르신들은 문을 닫고 다니라고 언성을 높인다. 집안에서야 막내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지만 지하철 등 공공생활에서는 막내 매너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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