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가만히 들리는/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가만히 들리는/황수정 수석논설위원

    어느 글에서 읽었다. 남화의 대가인 의재 허백련을 벽안의 신부가 찾아갔다. 노화백은 조용히 일어나 그저 봉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봉창 너머 대밭에서 빗소리가 건너와 방안 가득히 들어찼다. 푸른 댓잎에 떨어져 구르고 튀는 빗소리. 그 방에 무슨 말이 소용 있었을까. 심심한 새벽, 머릿속에 조붓한 흙마당을 일군다. 너른 잎에 빗물 후드득대는 소리가 좋아 파초를 심고. 열두 자쯤 그늘 아래서 가랑비를 그어도 보고. 예전 어느 작가는 파초에 비 맞는 소리를 못 들을까, 서재를 짓고도 챙을 달지 않았다지. 잠자코 듣게 하던 소리들. 여무는 가을배추를 느리게 배추벌레가 뜯는, 물오른 뽕잎을 맹렬히 누에들이 갉는, 지붕 같은 토란잎들이 술렁술렁 몸을 흔드는. 물방울 떨어지듯, 실비 날리듯, 먼 파도가 달리듯 하던 그 소리. 틀림없이 있었던 그 소리들이 정말 그때 거기 있었을까. 전설이었나, 의심하는 귓등으로 아파트 풀숲의 가을벌레들이 크게 운다. 가만히 불을 끄니 더 환하게 운다.
  • [길섶에서] 길고양이/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길고양이/황성기 논설위원

    집 가까운 공원에서 길고양이를 만났다. 아직도 보송보송한 털로 봐서 6, 7월쯤 태어난 듯하다. 어미가 안 보이니 독립한 새끼인 모양이다. 세상의 쓴맛을 알 리 없는 새끼 고양이는 천진난만하게 키 작은 나무와 나무 수풀을 오간다. 해가 짧아져 저녁 식사를 하고 공원에 가면 어둑해진 상태인데, 이때가 고양이를 만나기 딱 좋은 시간이다. 하루는 풀깎기한 공원의 말라붙은 잡초를 장난감 삼아 이리저리 노니는 고양이가 보인다. 그 모습에 길 가는 사람 몇몇이 발을 멈추고 구경한다. 며칠이고 눈에 띄는 구경꾼이 있어 말을 거니 이 구경꾼 왈 고양이가 가여워 사료와 물을 주고 있단다. 공원 화장실 에어컨의 실외기 뒤에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사료통과 물그릇을 놓았다고 한다. 동물 해코지가 많은 세상에 누가 입양하면 어떨까. 구경꾼 아저씨에게 길고양이 구조 경험을 얘기했더니 관심을 보인다. 고양이를 키울 처지가 안 되는지라 이분이라도 고양이를 데려가면 좋으련만.
  • [길섶에서] 불청객 너구리/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불청객 너구리/박현갑 논설위원

    아파트 주민 안내판에 너구리 출몰을 알리는 전단지가 붙었다. 단지 내 산책로에서 저녁 산책을 즐기던 주민이 갑작스런 너구리 등장에 놀라 119에 신고했다고 한다. 너구리를 보더라도 가까이 다가가지 말고 모른 척하고 지나가라고 당부한다. 너구리 습성도 안내한다. 잡식성으로 먹이를 찾아 단지 내로 들어올 수 있으니 고양이밥 등 먹이를 밖에 두지 말라고 적혀 있다. 아파트에서 개, 고양이는 흔히 보게 되는데 너구리까지 등장했다니 놀랍다. 더 놀라운 불청객은 멧돼지다. 수도권의 산자락 아래 한 아파트에서는 멧돼지 두 마리가 단지 내 어린이 놀이터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1800만원을 들여 놀이기구를 재설치했다고 한다. 해 질 무렵 근린공원 입구에서 너구리를 본 적이 있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멀끔히 쳐다보다 발걸음을 옮기자 숲속으로 사라졌다. 자신의 서식지 환경을 파괴한 인간에게 섭섭한 감정이라도 생겼던 걸까? 녀석의 검은 눈망울이 다시금 떠오른다.
  • [길섶에서] 종이 퇴출2/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종이 퇴출2/안미현 수석논설위원

    한 달쯤 전에 이 코너에서 ‘종이 퇴출’을 언급한 적 있다. 종이 생산을 위해 연간 수만 그루 나무가 베어지니 쓰지 않아도 될 종이나 아낄 수 있는 종이는 아끼자는 내용이었다. 화장실에서 쉽게 접하는 종이수건을 예로 들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도 있었다. 남에게 생각을 강요하지 말라는 지적 앞에서는 시선이 꽤 오래 멈췄다. 괜히 글로 뱉었다 싶어 후회도 됐다. 후회는 오래가지 않았다. 땀으로 흥건해진 얼굴이며, 더러워진 책상을 닦을 때면 종이수건을 여러 장 뽑아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실제 여러 장 쓰기도 한다. 그때마다 “몇 장 쓰는지 지켜보겠어”라는 지인들의 농 섞인 으름장이 떠오른다. 꼭 주변의 시선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뱉은 말이 양심을 구속한다. 그러다 보면 세 장 뽑으려던 손이 두 장에서, 혹은 두 장이 한 장에서 멈춘다. 한 사람이라도 동참했으면 싶어 쓴 글이 나 자신의 실천을 끌어올릴 때가 더 많다. 그것만으로도 됐다 싶다.
  • [길섶에서] 시(詩), 힘/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시(詩), 힘/서동철 논설위원

    그를 처음 만난 건 20년도 훨씬 더 넘은 어느 날이었다. 잠깐 문학담당기자를 하던 시절 문인들의 모임이었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우리 문단의 관심은 이른바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집중되어 있었다. ‘시를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는 심정으로 문학에 매달렸음에도 서정시를 쓰는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처음에는 서울신문 신춘문예 출신이어서 조금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애송이로 보였을 기자에게도 진심으로 대했고 대화를 나눌수록 따뜻한 천성이 묻어났다. 이후 그가 재직하던 시골 초등학교로 찾아가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지난 주말 그를 제천 리솜리조트의 문학 콘서트에서 다시 만났다. 오늘날 그가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시가 갖는 힘을 더욱 확실하게 깨닫는 자리가 됐다. 세상에 보내는 위로와 격려로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정상화한 시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풀꽃 시인’ 나태주다.
  • [길섶에서] 사라진 횟집/황비웅 논설위원

    [길섶에서] 사라진 횟집/황비웅 논설위원

    집 근처 단골 횟집이 사라졌다. 연어회를 좋아하는 딸애가 가끔 가자고 졸라 대던 집이다. 활어회를 시키면 매운탕도 저렴하게 추가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동네 맛집이었는데, 넓은 매장 안에 수조마다 그득하던 싱싱한 횟감들을 이제는 볼 수 없다니 못내 아쉽다. 횟집이 자리하던 장소에는 요즘 핫하다는 돼지갈비집이 오픈 준비 중이다. 코로나19 한파도 견뎌 온 횟집이 왜 사라졌을까. 예전보다 손님이 뜸해진 듯했지만 원인을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명멸해 가는 자영업의 숙명이라고만 받아들이기엔 뭔가 께름칙하다. 횟집 주인의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따른 풍평피해(風評被害·헛소문으로 인한 피해)일지도 모른다. 오염수 방류로 인해 횟집에 비전이 없다고 생각하고 업종 변경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최근 방류를 시작한 오염수가 해류를 타고 우리나라 동해안에 도달하려면 4~5년이 걸린다는데, 아무 영향이 없는 지금 내린 결정이라면 안타까운 일이다.
  • [길섶에서] 늦더위 보내기/이동구 논설위원

    [길섶에서] 늦더위 보내기/이동구 논설위원

    한적하게 바람이나 쐰다는 생각이었는데, 이맘때의 밭에는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덥다고 투덜대는 사이 들판은 이미 누렇게 변해 가고 있었고, 고추밭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복숭아와 포도는 더이상 견디지 못할 듯 위태롭게 달려 있었다. 지인 혼자서 해내기는 여간 어려워 보이는 게 아니니 일손을 보태지 않을 수 있겠나. 지인의 농장을 함께 방문한 일행 두 분은 어릴 적 경험 덕분인지 농사일이 제법 익숙해 보였다. 급히 털어 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쏟아낼 지경인 참깨를 정성껏 쓸어 담고, 지주대도 곧잘 뽑아 내며 밭일의 뒷정리를 척척 해냈다. 평생 한두 번 모 심고 벼 벤 게 전부인데 뒤늦게 가을걷이를 경험한 주말이었다. 비록 깻잎 몇 단 정리한 수준이었지만 농사일의 어려움을 실감할 수는 있었다. 그새 농장주는 참깨대를 베어 낸 자리에 배추 모종을 하나씩 하나씩 심는다. 김장용이라고 했다. 더위가 채 가시기도 전에 농부는 벌써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 [길섶에서] 포인트 적립/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포인트 적립/이순녀 논설위원

    집 앞 반찬가게에서 밑반찬 몇 가지를 골라 계산대로 갔더니 “포인트 적립금을 사용하겠냐”고 묻는다. 첫 방문 때 회원 가입이 귀찮기도 하고, 그래 봐야 얼마나 모이랴 싶어 망설였는데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반색하며 금액을 되물으니 3000원 조금 넘는단다. 기대보다 적은 액수에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그야말로 소소한 행복이다. 요즘은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포인트 적립이 기본이다. 동네 마트도, 카페도, 미용실도 포인트 혜택으로 고객의 발길을 붙들려고 한다. 우후죽순 생기다 보니 차별성은 사라지고, 계산할 때 으레 거치는 통과 의례쯤으로 여기게 됐다. 그러던 차에 이런 경험을 하고 보니 무심코 넘겼던 ‘축적의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인간관계에서도 포인트 적립이 있다면 어떨까, 엉뚱한 곳으로 생각이 튄다. 사소한 호의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일. 예기치 않은 순간에 그런 뜻밖의 보상이 주어진다면 무척 행복할 것 같다.
  • [길섶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황수정 수석논설위원

    못 보던 푸성귀 좌판에서는 덮어 놓고 봉지봉지 담아 온다. 새벽이슬, 밤안개 맞는 텃밭에서 구메구메 날라졌을 풋것들에는 욕심부터 난다. 좀 못생긴 것이 무슨 대수라고. 제 향기를 그대로 뿜는 것들이다. 이맘때는 이맘때의 냄새들이 둥둥 떠다녔다. 마루 끝에 걸터누웠으면 바람에 실린 것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눈을 감고도 훤했다. 장독 뚜껑마다 나란나란 쪼개져 널린 벌레 먹은 홍고추들, 우북하게 억세진 장독대의 들깨 대궁들, 수런수런 싱겁게 흔들리는 뒤꼍 수숫대. 절정을 지난 푸른 것의 끝물들이 제자리에 몸을 낮춰 체취를 떨치는 시간이다. 늦고추 말라서 칼칼한, 들깨 꼬투리 여문다고 꼬순, 수수알 영그느라 배릿한. 누구든지 “가을이다”라고 말하고야 말던 구월의 냄새. 말로 글로 다 할 수 없는 가을의 향기는 눈만 감아도 한달음에 달려온다. 말하지 못하는 모국어가 입안에서는 더 또렷해지는 것처럼. 때가 되면 그리운 것들은 어째서 늙지도 낡지도 않고 찾아 오시는지.
  • [길섶에서] 귀향/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귀향/황성기 논설위원

    10년 넘게 다니는 이발소의 사장님이 오랜만에 머리를 잘라 줬다. 남쪽 지방 섬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고향을 그리도 자랑스러워하는 분이다. 가끔씩 귀향이라도 했다가 돌아오는 날이면 머리를 만져 주는 그 짧은 시간이 모자란 듯 고향과 친구 얘기로 신이 넘친다. 오랜만의 이발에서 내가 먼저 고향 마을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한숨부터 내쉰다. 한동안 가 보지 않았다고 한다. 가더라도 육지에 머물며 고향 친구를 만났다 서울로 돌아온다고 한다. 섬마을을 꺼리는 것은 그가 다니던 초등학교, 중학교가 없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향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습에 울적해져서란다. “아버지의 회초리보다 더 아픈 건 늙고 병든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 넋두리한다. 그 말이 마음에 남는다. 아닌 게 아니라 비슷한 말을 지인의 아들이 했다는 얘기를 듣고 울컥했던 기억이 났다. 나 스스로도 사진에서 발견하는 낯선 모습에 놀라는데, 자식이나 후배들은 오죽하랴 싶다.
  • [길섶에서] “저 좀 봐주세요”/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저 좀 봐주세요”/박현갑 논설위원

    며칠 전 지하철 1호선으로 이동하다 전동차 내 바닥 광고를 봤다. 서민금융진흥원을 알리는 래핑 광고였다. 전동차 출입문이나 전동차량 벽면에 붙은 광고물은 많이 봤으나 바닥 광고는 처음 봤다. 지하철은 대표적인 대중교통 수단이다. 그러니 광고 효과가 있을 게다. 역사 내 통로나 기둥은 물론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전동차 내 출입문과 천장에도 광고가 내걸린다. 하나같이 화려한 색상과 자극적인 문구로 “저 좀 봐주세요” 하며 시민들을 유혹한다. 오래전부터 전동차 내 바닥 광고를 예상했다. 스마트폰 사용이 일상이 되면서 지하철 풍경에서 고개 숙인 사람들을 빼놓을 수 없다. 자리에 앉은 승객 중 자는 사람을 제외하곤 대부분 휴대폰 이용에 여념이 없다. 서 있는 사람들도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바닥 광고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눈길이 가면서도 사람들의 발걸음에 치이는 광고물이라니 광고 효과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 [길섶에서] 양파/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양파/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어려서부터 양파를 먹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도 꽤 오랫동안 양파와는 거리두기가 이어졌다. 일단 맛이 없었다. 짬뽕 속에서 흐느적대는 양파는 영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식사 자리에 가면 꼭 양파를 요청하는 이들이 있다. 빈도상 거개는 ‘중년 아저씨들’이다. 저 냄새 나는 양파를 점심 때부터 와구와구 씹어 제끼는 분들을 보며, 고백하건대, 혐오스럽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언제부터인가 미친 듯이 양파를 먹기 시작했다. 일단 맛있다. 특히 냉장고에서 나온 양파는 그 어떤 과일보다 시원하고 아삭하며 달달하다. 며칠 전 점심식사 자리에서 “양파 리필”을 외치며 와구와구 씹어 제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했다. 그 식당의 누군가는 혐오의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으리라. 입맛이 변한 건지, 혈액 순환에 좋다는 말에 혹한 건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소소한 입맛조차도 함부로 단언해서는 안 된다는 거다. 하물며 사람과 세상일은….
  • [길섶에서] 옛날 영화/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옛날 영화/서동철 논설위원

    오래된 친구와 옛날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너 야한 영화 좋아했지” 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무릎과 무릎 사이’를 보고 친구들에게 열을 올렸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하기는 지금도 외국 것은 ‘사운드 오브 뮤직’, 한국 것은 ‘무릎과 무릎 사이’가 가장 인상 깊은 영화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1969년 가을 미국에서 개봉했다. 초등학생 시절 퇴계로 대한극장에서 봤다. 그런데 젊고 예쁜 마리아가 자식이 일곱이나 딸린 홀아비 폰 트랩 대령과 맺어지는 것을 왜 해피엔딩이라고 하는지 어린 마음에는 도무지 불가사의였다. 어쨌든 요즘도 TV 채널을 돌리다 나오면 끝까지 본다. ‘무릎과 무릎 사이’는 1984년 작이다. 야한 영화의 대명사지만 엄혹하던 시절 서양 문화에 압살당한 우리 문화에 대한 상징으로 보면 이후의 어떤 영화보다도 용감했다고 생각한다. 조금 전 우연히 눈에 들어온 누군가의 영화평에도 ‘수준급의 에로 영화’라고 적어 놓았다. 그러니 야한 영화를 좋아하는 게 맞다.
  • [길섶에서] 탕후루 만들기/황비웅 논설위원

    [길섶에서] 탕후루 만들기/황비웅 논설위원

    지난 주말 잠시 외출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딸애가 주방에서 뭔가 열심히 하고 있다. 꼬치에 바나나와 방울토마토를 꿰어 놓고 가스불에 그슬리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오랜만에 뭔가를 열심히 하는 게 기특해 그냥 지켜봤다. 알고 보니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 ‘최애(가장 좋아하는) 간식’이라는 ‘탕후루’였다. 만드는 법은 유튜브를 참고했단다. 딸애는 친구들은 다 실패했다면서 첫 시도였는데 성공했다며 엄청 뿌듯해했다. 중국의 길거리 음식인 탕후루는 딸기, 귤, 포도 등 과일을 꼬치에 꽂은 뒤 시럽처럼 끓인 설탕을 묻혀 만든다. 몸에 안 좋을 것 같아 맛보는 건 사양했다. 아닌 게 아니라 탕후루 때문에 어른들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집에서 만들다 화상 입고 병원을 찾았다는 기사, 꼬치들이 길거리를 점령해 골칫덩어리라는 기사들이 눈에 띈다. 그래도 아이들에겐 소중한 추억거리다. 나 역시 달고나 뽑기에 대한 추억이 없었다면 어린 시절이 얼마나 무미건조했을지.
  • [길섶에서] 풀벌레들의 시간/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풀벌레들의 시간/황수정 수석논설위원

    밤잠을 설칠 때 다녀온 곳들을 되짚는다. 산그늘, 구름 그림자의 장관을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보았다. 산들은 제 턱 밑에 제 그늘을, 구름은 제 발치에 까마득한 제 그림자를. 생각만 해도 등줄기가 식는다. 더 오래 떠오르는 것은 여름의 얼굴들이다. 땡볕 밭가에 큰솥을 걸어 종일 옥수수를 찌던 모녀. 딸은 옥수수만 꺾고 늙은 어머니는 장작불만 때고. 마치 전생에서부터 그랬던 것처럼. 폐식용유로 만든 못난이 빨랫비누를 고무 대야 가득 팔던 오일장의 할머니. “세상에서 제일로 때가 잘 빠져” 뻥을 치시다 제풀에 그만 이 빠진 잇몸으로 활짝 웃던. 기나긴 별들의 시간보다 하루살이 풀벌레의 시간을 더 좋아한다는 폴란드 시인의 시를 읽는다. 시를 읽다가 알 것 같다. 그냥 동그라미를 닮은 얼굴들이 왜 여름마다 또렷해는지. 산그늘은 별들의 시간을 살더라도, 동그라미 같은 얼굴들은 풀벌레의 시간을 살고 있으므로. 오늘 하루를 건너가고 있으므로. 밤 깊어 풀벌레들 소리 성큼 걸어온다. 가을인가.
  • [길섶에서] 그 흔한 호박잎이/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그 흔한 호박잎이/황수정 수석논설위원

    마트에서 호박잎을 들었다 놨다 한다. 비닐봉지의 호박잎은 시시하다. 호박잎은 한 잎 두 잎 쩨쩨하게 셀 것이 아니다. 넌출넌출 넝쿨이 온 동네 밥상을 감아 돌고. 여름 한철 끌어안고도 모자라 시월 한밤에 대뜸 늦꽃을 터뜨리고. 푼푼함도 오지랖도 그쯤이어야 호박잎이다. 호박잎은 밥상 가운데를 넘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덤’이었다. 해거름 텃밭을 들른 김에 손아귀 미어터지게 솎아 오는 것. 저녁밥 안친 김에 밥물 푸릇해지게 쪄내는 것. 호박잎 쪄낸 김에 냄비 바닥 눌어붙게 짜글짜글 졸이는 강된장. 덤에서 덤으로 부엌이 바빠진 저녁. 그러고도 호박잎쌈은 밥풀을 붙인 채로 밥상 아래, 반듯하지도 못한 양푼에. 누가 심었을 리 없는 호박잎들이 발 디딜 틈 있는 흙땅 어디든 줄기를 뻗치고 있다. 공원 벤치 옆에, 버스 정류장 가는 공터에.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뾰족해지다 말고 나는 둥그레진다. 세상의 모서리들을 덮어 주려고 염천 아래 아랑곳없이 호박잎들은 흔해 빠지게 푸르다.
  • [길섶에서] 건강검진/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건강검진/황성기 논설위원

    건강검진을 앞두고 언제나 가벼운 스트레스를 느꼈지만 올해는 한 달 전부터 신경이 쓰이고 스트레스 도가 예년과 달랐다. 내시경 검사가 두 개여서 그랬을까. 장을 비우는 검사 12시간 전부터의 의례가 너무 귀찮게 느껴졌다. 검진 당일 저녁에 ‘검진 스트레스’를 풀 겸 생맥주 한 잔까지 예약하며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마취에서 깨었더니 용종을 몇 개나 떼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일 저녁까지 금식에 1주일간은 금주라고 하지 않나. 1주일간 술 마실 일이 적지 않은데 청천벽력이다. 집에 돌아왔더니 피로가 급습한다. 금식해야 한다니 점심을 건너뛰고는 드러누웠다. 낮부터 시작된 비몽사몽은 해가 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외출해서 생맥주를 마실 상태가 아니어서 모임 불참을 알렸다. 세 끼를 굶은 터, ‘저녁까지 금식’ 지시를 무시하고 흰밥에 간장을 비벼 뚝닥 먹어 치웠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대단하지도 않은 내시경이 왜 이리 힘든지. 몸과 마음이 다 약해진 탓일까.
  • [길섶에서] 그림이 된 시/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그림이 된 시/이순녀 논설위원

    중장년 세대라면 1970~80년대 활동한 남성 듀오 유심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80년 발표돼 큰 인기를 끈 대중가요로 주옥같은 노랫말이 인상적이다. 어렸을 땐 그저 흥겨운 멜로디가 좋아 따라 부르곤 했다. 가사의 원작이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1969)라는 사실은 나중에 문학 수업을 들으며 알게 됐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밤이 깊을수록/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이렇게 정다운/너 하나 나 하나는/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전문) 시는 노래 이전에 그림으로 먼저 변주됐다. 시인의 절친인 화가 김환기는 1970년 완성한 점화 작품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을 붙였다. 호암미술관의 ‘한 점 하늘 김환기’ 전시장 한쪽 벽 가득 걸린 그림 앞에 서니 예전엔 어렴풋했던 시의 의미가 좀더 확연히 다가왔다.
  • [길섶에서] 목발 짚은 소나무/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목발 짚은 소나무/박현갑 논설위원

    요즘 아파트 단지는 주민들이 따로 공원을 찾지 않더라도 쾌적하다는 느낌을 갖도록 조경에 공을 들인다. 소나무 등 수목 식재는 기본이다. 인공폭포와 어린이 물놀이 시설도 있다. 도시정비사업 과정에서의 건설회사 간 수주 경쟁에다 도시민들의 자연스러운 조경에 대한 관심이 맞물려 나타난 결과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도 나무들이 많다. 그런데 모두 지지대가 있다. 옮겨 심은 수목들일 테니 초기엔 필요했겠으나 이식한 지 3년째인데도 지지대가 있다니 어색하다. 팽나무는 성인 두 명이 두 팔을 벌려야 닿을 정도로 우람한 몸통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쑤시개 같은 지지대를 두르고 있다. 기역자 모양으로 기울어진 소나무는 지지대가 필수다. 사람들에겐 좋은 조경수인지 모르나 불구자가 목발에 의존하듯 평생 버팀목 신세라니 그 운명이 서글프다. 근린공원에도 나무들이 많다. 태풍으로 쓰러진 경우를 제외하곤 지지대 없이도 잘 자란다. 아파트 조경의 진화를 기대해 본다.
  • [길섶에서] 연리근(連理根)/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연리근(連理根)/임창용 논설위원

    성남 서판교에서 청계산을 오르다 보면 국사봉 못미처서 ‘연리근’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자주 가는 곳인데도 볼 때마다 숙연해짐을 느낀다. 마치 두 사람이 핏줄로 연결된 듯 뿌리가 이어져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 수십 년간 서로 양분을 공유하며 자란 모습이 평생 한눈팔지 않고 백년해로한 부부를 보는 듯하다. 연리(連理)는 두 나무가 가까이 자라다가 서로 겹쳐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뿌리가 하나 되면 연리근, 줄기가 겹치면 연리목, 가지가 만나면 연리지란다. ‘연리’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낙천이 현종과 양귀비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장한가’에 나온다. 연리지가 되길 원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하고 한만 남겼다는 뜻의 구절이 있다. 연리근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길조로 여겼다고 한다. 소원을 들어 주고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이 있다. 부부의 사랑, 부모 자식의 사랑에 빗대 사랑나무로 불리기도 한다. 가족 관계마저 각박해지는 요즘 더없이 소중함이 느껴지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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