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후쿠시마의 한류/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후쿠시마의 한류/황성기 논설위원

    일본 후쿠시마 원전에 가려고 후쿠시마역 근처 렌터카 회사를 찾았다. 절차를 밟고 있는데 접수하는 직원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건다. 일행의 한국말을 듣고 용기를 낸 듯한 젊은 여성 직원. 어떻게 한국말을 하는지 물으니 한국 아이돌 그룹의 팬이라 중학교 때부터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발음도 정확하고 구사하는 단어도 자연스럽다. 후쿠시마에서 한국말을 들으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가수 김연자가 지난 1월 후쿠시마에서 공연을 했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일본 방영 20주년을 기념하고 후쿠시마 주민을 응원하기 위해 주일한국문화원이 준비한 무료 공연이다. 클래식 공연장을 대중 가수에게 빌려준 것도 이례적이었단다. 후쿠시마와 인근 현에서 관람객이 몰려 2000석을 가득 채웠다. 심지어는 공연의 자원봉사를 하겠다는 어머니를 돕겠다며 도쿄에서 자동차로 왕복 10시간을 달린 딸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 내 한류 분위기를 체감할 수 있었던 후쿠시마였다.
  • [길섶에서] 검박/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검박/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절집에서는 계란은 금기이지만 우유는 환영이라고 한다. 알은 생명을 낳지만 우유는 송아지를 낳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나. 사찰음식 전문가인 스님이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채식을 하는 스님들은 치즈를 무척 좋아해요. 따뜻한 죽에 치즈 한 장 녹여 먹었을 때의 즐거움이란…. 검박이 따로 없습니다.” 검박? 그랬다. 검박(儉朴)은 원래 이런 뜻이었다. 한자어 그대로 풀면 검소하고 소박함. 스님 말대로 우리 주변엔 ‘좀 모자라고 부족한 듯한 데서 오는 검박의 즐거움’이 적지 않다. 하도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인이 박이도록 듣다 보니 본디 말보다 신조어가 먼저 떠오른 게 영 씁쓸하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전화가 왔다. 두어 달 전에 직사각형 모양의 ‘돌화분 텃밭’을 분양한다기에 신청했는데 추첨에 뽑혔단다. “정말요?” 가뜩이나 큰 목소리가 한껏 올라간다. 누가 보면 땅을 분양받은 줄…. 이런 게 검박의 즐거움과 고마움 아니겠느냐며 혼자 배시시 웃는다.
  • [길섶에서] 뒤늦은 바람/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뒤늦은 바람/서동철 논설위원

    은퇴한 친구와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 “뭐 하느냐” 물으면 어김없이 “미드(미국 드라마) 보고 있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고는 “아직도 안 보고 있으면 인간문화재”라면서 TV에서 미국 수사 드라마를 보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결론적으로 요즘은 나도 틈만 나면 이걸 틀어 놓는다. TV 리모컨을 아무리 돌려도 그럴듯한 프로그램을 찾지 못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일이 없어졌다. 드라마 속에서 수사관들은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라도 시원스럽게 해결한다. 요즘 우리 강력 사건 수사에 대한 비판 기사를 읽노라면 기자들도 이런 수사 드라마의 영향을 받아 기사를 쓴 게 아닐까 싶어 혼자 웃는다. 물론 미국 드라마에서도 주인공들만 똑똑할 뿐 헛다리 짚는 수사기관도 많다. 인터넷에는 ‘이혼을 고민해야 하는 한심한 남편’의 대표적 사례로 나처럼 ‘안마의자에서 ‘범죄 수사 미드’만 보는 인간’이 지목돼 있다. 벌써 갈라선 사람 많겠다.
  • [길섶에서] 도서관 풍경/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도서관 풍경/이순녀 논설위원

    얼마 전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낡은 내부를 고쳐서 재개관했는데 대형 서점 혹은 북카페를 닮은 세련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의자와 탁자의 모양도 제각각이었고, 한쪽에는 캠핑용 좌석까지 놓여 있었다. 실내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발소리도 죽여야 하는 정숙한 공간이 아니라 적당한 백색 소음이 허용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도서관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도서관을 찾지 않은 지 꽤 됐다. 소장용 책은 서점에서 고르고, 한번 읽고 말 책은 구독형 전자책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니 굳이 도서관에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남들은 다 아는 도서관의 진화를 나만 뒤늦게 알고 호들갑 떠는 건지도 모르겠다. 매년 4월 12일부터 18일까지는 도서관 주간이다. 한국도서관협회가 1964년부터 운영해 온 전통 있는 행사다. 올해는 도서관법 개정에 따라 정부가 도서관의 날(4월 12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한 첫해이기도 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서관과 다시 친해져야겠다.
  • [길섶에서] 누구의 봄이냐고/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누구의 봄이냐고/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금쪽같은 봄볕 아래 갸륵한 것이 봄풀이다. 꽃들이 차례도 없이 뒤죽박죽 피었다 두서없이 퇴장하니 더 그렇다. 꽃이 때를 잊었든 말든 제 시간을 지켜 봄풀들은 돋았다. 흙을 밀어 올리는 풀씨의 일이 꽃이 피는 그까짓 일보다 의젓하다면서. 오래전 작가 이태준은 우리말 ‘바다’가 세상의 모든 언어 가운데 바다를 표현하기에 으뜸이라 했다. 두 글자가 경탄음 ‘아’를 안고 있어 “바다” 하면 하늘까지 덮을 듯하다고. 내게는 ‘풀’만큼 풀답게 느껴지는 언어가 없다. 풀, 풀 하면 푸릇푸릇 풀물 냄새가 풀풀 풀려 나온다. 풀이 제 이름을 얻는 짧은 시간이 이즈막이다. 볕바른 언덕에 연둣빛으로 진격해 올라오니 흐뭇해서 ‘봄풀’. 여름비에 우북하게 뻗대면 그때부터는 잡초. 가을볕에 어수선하게 시들면 그저 덤불. 가장 낮게 제때를 지키는 절정의 한 시절. 봄을 데려오고 데려가는 것은 마음껏 소란한 꽃들만의 일이 아닌 것을. 자랑한 적 없는 풀밭에도 물어봐야지. 이 봄은 누구의 봄이냐고.
  • [길섶에서] 운(運)/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운(運)/황성기 논설위원

    운(運)은 누구나 받는 것인가? 가벼운 논쟁이 붙었다. 평생 운은 일정한 양이라는 ‘총랑형’과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노력형’의 대결. 총량형은 운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이가 들면 운이 바닥을 드러낸다고 한다. 노력형은 운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좋은 일이 생기거나 그러지 않을 때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공한 이들은 대체로 “운이 좋았다”고 한다. 겸손으로 들리지 않는다. 불운한 이들은 주어진 운을 쓸 데 없는 데 써서 그렇다고 하는데, 납득은 안 간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결과를 보고 운이 좋았나? 혹은 운이 없었나? 정도로 그친다. 운의 존재를 과신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그리 나쁜 일도, 그렇다고 그렇게 좋은 일도 생기지 않는 걸 보면 운이 다했나 싶다. 운이 남아 있다면 건강 쪽으로 돌리고 싶다. 건강도 저 하기 나름이다. 술, 담배, 짜고 매운 음식을 줄인다거나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게 동반되지 않으면 어려우니 말이다.
  • [길섶에서] 영상통화/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영상통화/박현갑 논설위원

    그리움은 이상한 감정이다. 보고 싶어 애태운 이를 만나는 순간 그리워한 만큼 행복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헤어지면 그 이상의 아픔이 달려든다. 그렇다고 가슴에 품고만 있기에는 위험한 감정이다. 어머니와의 영상통화가 그렇다. 핸드폰 사용법이 서툴러 혼자선 영상통화가 어렵지만, 여동생이 모친을 방문하는 날에는 하고 있다. 작은 핸드폰 화면으로나마 모친을 보는 건 직접 보는 것 못지않게 즐거운 일이다. 당신의 목소리가 경쾌하면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짧은 만남 뒤 마음이 아릴 때가 많다. 화면에 비친 당신의 얼굴 볼살은 예전과 같지 않고 이마 주름도 더 깊게 팬 듯하다. 식탁 위 널브러진 약봉지와 반쯤 남은 물컵, 식어 버린 국에 말라비틀어진 밥그릇,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보노라면 일상이 평온치만은 않았음이 느껴져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다음부턴 즐거운 얘깃거리를 준비해야겠다. 통화 시간도 늘리고 가족 간 릴레이 통화도 해야겠다.
  • [길섶에서] 벚꽃 엔딩/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벚꽃 엔딩/임창용 논설위원

    밤새 집 밖 풍경이 바뀌었다. 어제만 해도 창밖으로 손을 내밀면 닿을 듯 넘실대던 벚꽃 물결이 온데간데없다. 잠결에도 봄비답지 않게 비바람이 제법 매섭다 했다. 나무 아래는 떨어진 꽃잎으로 온통 연분홍빛이다. 사나흘은 더 버틸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란 유재하의 노래 가사처럼 벚꽃 진 풍경이 쓸쓸하다. 올해는 유난히 벚꽃이 빨리 피었다. 밤새 내린 비로 낙화는 더 빨랐다. 평년 같으면 이제 본격적으로 꽃봉오리를 터뜨릴 때다. 여의도 윤중로, 송파구 석촌호수 일대에선 ‘벚꽃 없는 벚꽃축제’가 열리고 있다고 한다. 모처럼 ‘노마스크’ 벚꽃축제를 기대한 이들의 아쉬움이 클 듯싶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3월은 51년 만에 가장 더웠다. 일조시간도 평년보다 35시간이나 길었단다. 전국적으로 벚꽃 개화가 열흘 이상 빨랐다. 서울은 평년보다 14일 빠른 지난달 25일 첫 개화를 기록했다. 기후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 [길섶에서] 혼자 살아남은 매미/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혼자 살아남은 매미/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우연히 보게 된 중국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매미는 8일밖에 못 산대. 그런데 9일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매미가 있어. 이 매미는 행복할까, 불행할까.” 남들보다 오래 살게 됐으니 기뻐할 일이다. 그런데 주위에 아무도 없다. 그래도 혼자 살아남은 게 다행인 것일까. 드라마에는 8일로 나오지만 매미는 통상 일주일에서 한 달까지 산다고 한다. 날개 달린 성체로 변신한 뒤의 시점부터 계산해서다. 땅 밑에서 알로, 애벌레로 지내는 시간이 길게는 7년이다. 땅 속에서 7년, 땅 밖에서 7일인 셈이다. 인고의 시간은 길고 화려한 영광은 짧을 때, 종종 매미의 삶이 소환되는 이유다. 우리나라든 외국이든 장수하는 사람들의 삶을 추적하면 단골로 등장하는 비결이 있다. ‘소식’(小食)과 ‘관계’다. 적게 먹고 주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비록 혼자지만 9일째에도 삶을 누리는 매미? 아니면 8일째에 더불어 삶을 마감하는 매미?
  • [길섶에서] 사라진 재떨이/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사라진 재떨이/서동철 논설위원

    아버지는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가끔 내 차를 탈 때도 그랬다. 담배를 오래전에 끊은 내 차 재떨이에도 담배꽁초가 수북하곤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날 보니 쌓인 담배꽁초가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이후로 아버지가 생각나면 재떨이를 열었다. 아니 재떨이를 열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도 피웠으니 담배는 익숙했다. 하지만 요즘 산책길에 어디선가 날아오는 담배 연기는 친근하지 않다. 운전할 때는 불쾌를 넘어 불안할 때도 잦다. 앞차에서 불붙은 담배꽁초를 그대로 창밖으로 날리는 장면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차 안 재떨이가 요즘엔 없다. 불붙은 담배꽁초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현상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산불이 늘어나는 원인일지도 모른다. 음주운전자가 타면 시동이 걸리지 않듯 흡연 중에는 창문이 열리지 않는 차가 나와야 할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재떨이가 부활해야 산불도 줄어들려나.
  • [길섶에서] 나무를 심는 마음/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나무를 심는 마음/이순녀 논설위원

    그제 일요일 하루에만 서울 인왕산, 충남 홍성 등 화마가 덮친 지역이 전국적으로 서른 곳을 넘었다. 봄철 산불 비상령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이즈음이면 화재가 끊이지 않는다. 메마른 바람을 타고 산등성이를 사정없이 휩쓸어 버리는 야속한 불길을 TV 화면으로 지켜보는 내 마음도 까맣게 타들어 간다. 순식간에 벌거숭이가 된 저 산이 언제 다시 울창해질까, 그 까마득한 세월을 가늠할 수 없어 맥이 풀린다. 산불 피해 지역의 산림 자원 상태를 원래 수준으로 되돌리는 데는 빨라야 20년이 걸린다. 야생동물이 살 수 있는 정도의 생태계 회복에는 35년, 토양 복구까지는 100년 넘게 소요된다. 우리나라 산불은 등산객 실화, 쓰레기 소각 등 대부분 사람들의 부주의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순간의 실수로 인한 대가가 너무 크다. 산을 무너뜨리는 것도 사람이지만 산을 다시 살리는 힘도 사람에게 있다. 나무를 심는 소중한 마음들이 모여 희망의 숲을 일군다. 마침 내일이 식목일이다.
  • [길섶에서] 어느 먼 봄날에/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어느 먼 봄날에/황수정 수석논설위원

    “아버지, 꽃들이 피었지요?” 수화기 너머 아버지는 “피었다”. “홍도화는요?” “피었고 말고.” 봄밤이 깊어 올빼미처럼 말짱해진 나는 시골집 마당 안부가 일일이 궁금하다. 선잠 깨신 아버지는 짧게 대꾸하다 그예 무질러 답을 하신다. “전부 다 잘 있다.” 잠결에도 아신다. 아버지 안부를 꽃밭 안부로 빙빙 두르고 있는 내 속셈을. 몇 해 전 아버지는 창고를 헐어 혼자 꽃밭을 만드셨다. 맨손으로 비빈 흙이 체로 쳐낸 쌀가루처럼 폭신거렸다. 홍도화 묘목을 들인 날에는 한밤중에 전화로 오래 자랑하셨다. 그 봄내 아버지 목소리는 들떴다. 봄마다 꽃이 핀다. 술 이름 같은 설중매에서, 막내이모 이름 같은 명자나무에서도. 희고 붉게 벙글어 마당이 환하겠지. 여름 가을 겨울 합친 것보다 봄의 생애가 길었으면. 긴 꿈을 꾼다. 아버지만큼 늙은 내가 치렁치렁 홍도화 가지 사이로 오래 앉은 꿈. 복숭꽃 하롱하롱 떨어지는 늙은 그늘 아래로 아버지가 봄마다 오시는 먼 꿈을.
  • [길섶에서] 불가항력/황성기 논설고문

    [길섶에서] 불가항력/황성기 논설고문

    휴대전화도 세월이 가면 기력이 떨어지나. 스마트폰으로 데이터를 주고받거나 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나 전화를 걸거나 받을 때 목소리가 상대방한테 멀게 혹은 작게 들린다고 한다. 전화를 쓸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아 큰 불편은 없다고는 해도 정확을 기할 대화도 때론 있는 법. 그래서 휴대전화 제조사의 애프터서비스센터를 찾았다. 테스트를 해 보더니 마이크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수리기사가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내 전화로 걸어서 대화를 했는데, 내 목소리가 잘 들리는 게 아닌가. 그 기사의 말로는 거주 지역의 전파가 약한 것 같으니 통신사에 중계기를 달아 달라고 하란다. 통신사에 문의했더니 아파트에서 동일한 민원이 있어 중계기를 달려고 했으나 전자파 발생을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관리사무소 말로는 중계기 설치 민원과 반대 의견은 팩트였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중계기 설치 반대를 철회하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다는 답변이다. 이런 게 불가항력인가.
  • [길섶에서] 욕망의 역동성/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욕망의 역동성/박현갑 논설위원

    유튜브에서 멋진 60대 퇴직자를 만났다. 35년간의 직장생활을 끝내는 날, 그는 할리데이비슨을 몰고 나타나 환송 나온 직원들을 놀래킨다. 제2의 사춘기라도 온 듯 청바지에 모자를 뒤로 쓴 그는 인생 2모작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도 잊지 않는다. 욕망의 역동성 안에서 머물면 노화를 늦출 수 있다고, 하고 싶은 일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해 보란다. 그가 도전하는 욕망 실현은 오토바이로 전국 일주하기. 큰맘 먹고 오토바이를 사고 2종 면허도 딴 건 준비 과정이었다.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생각해 본다. 자신의 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직이나 가족이라는 이름의 욕망 올가미에 걸려 내면의 욕망 실현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일상이 수두룩하다. 더 나은 삶, 행복을 위해서라며 스스로를 세뇌하고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지만 올가미 너머에 무지개가 있는지, 먹구름이 드리워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자유의지를 지녀야 무지개를 찾을 수 있을까.
  • [길섶에서] 가족 외식의 가치/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가족 외식의 가치/임창용 논설위원

    아이들이 어릴 때만 해도 외식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입맛이 없거나 아내의 수고로움을 덜어 주고 싶을 때, 아니면 가족의 생일 등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의례적으로 했다. 물론 그때도 외식은 나름의 역할을 한 것 같다. 축하 의미를 담은 이벤트성 외식이 아니더라도 한 끼 맛있게 먹으면서 아내에겐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선사했으니까. 아이들이 다 자란 뒤로 외식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젠 맛이나 아내 배려를 넘어 대화를 위한 목적이 크다. 가치의 속성이 달라졌다고나 할까. 집에선 대체로 식사 시간이 짧다. 모처럼 모여 앉아도 대화는 금방 끝난다. 밥을 먹자마자 각자 방으로 흩어져 제 할 일에 바빠서다. 반면 외식을 할 땐 온전히 대화 시간이 보장된다. 대화가 주목적이다 보니 외식 장소도 쾌적하게 오래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정한다. 좀 부담이 되지만 그 이상의 가치가 느껴져서다. 어쩌면 다 커서 멀어져 가는 자식과 가까이 있고 싶은 부모만의 가치인 듯싶기도 하지만.
  • [길섶에서] 세로의 삶/박록삼 논설위원

    [길섶에서] 세로의 삶/박록삼 논설위원

    그의 속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엄마와 아빠를 차례로 떠나보낸 어린 마음이 무척 괴로웠고 외로웠을 테다. 나름 정성으로 돌봐 주는 이들이야 있지만 부모의 사랑을 대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친구조차 없다. 세상천지 오직 나 혼자만 남겨진 듯한 절대고독, 그런 심정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2019년 동물원 울타리 안에서 태어난 고작 만 세 살 얼룩말 ‘세로’의 삶에는 통제가 많았다. 고향이라는 곳은 아예 기억 속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아는 세상이라고는 오직 좁은 실내와 울타리로 둘러싸인 넓지 않은 마당뿐이었다. 지난주 어느 날 오후 세로는 세상 밖으로 나갔다. 차도와 주택가 골목을 유유히 뛰어다니다 마취총 일곱 발을 맞고 다시 동물원으로 돌아갔다. 세로에게는 요람이자 무덤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사춘기의 반항’ 정도로 포장하기에는 세로의 삶이 너무 기구하고 쓸쓸하다. 전국, 세계 각지 동물원에 ‘세로들’이 너무 많다.
  • [길섶에서] 이게 봄이지/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이게 봄이지/황수정 수석논설위원

    저마다 봄은 다른 순간으로 온다. 문득 가던 길 돌아봤다면 그 순간이다. 헛것을 봤을까, 뒷걸음질로 올려본 나무에 터지는 꽃. 보따리가 풀린 듯 와르르 봄은 쏟아진다. 벽돌로 대충 꾸민 화단에도 꽃이 핀다. 회초리를 꽂았나 겨우내 볼품없던 묘목 가지에 알사탕만 한 꽃망울. 아, 너는 벚나무였구나. 석 자도 안 되는 어린 나무의 첫꽃도, 백살 먹은 왕벚나무의 백년꽃도 똑같이 봄꽃. 바람에라도 섞이면 어느 것이 첫꽃인지 백년꽃인지. 봄마다 나무가 늙는다고 꽃이 늙을까. 백년 늙은 나무에서도 첫마음으로 첫꽃이 피는 것. 이게 봄이지. 하늘 아래 첫마음들이 천지만지. 눈으로만 보는 벚꽃이라면 무슨 소용 있나. 세 끗짜리 화투장의 배경일 뿐이지. 만져야 봄이다. 어린 벚나무 발치에 쑥이 소복하다. 뾰족뾰족 연한 싹을 만져 보다 꺾지 않는다. 언 땅을 뚫고 나온 안간힘이 얼만데. 여기까지 다다른 노고가 얼만데. 못 본 척 그냥 둬야지. 발목 아래 봄이 흥건하게 고일 때까지는.
  • [길섶에서] 백자 ‘춘향이’/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백자 ‘춘향이’/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어두컴컴한 공간에 백자만 모아 놓은 풍경이 장관이라고 해서 가 보았다.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하는 ‘조선의 백자’ 전이다. 주말 예약은 뚫을 자신이 없어 평일 오전을 골랐는데도 사람이 많다. 음성 안내기를 귀에 꽂으니 ‘그 놈이 그 놈 같던’ 자기들이 저마다의 비밀을 드러낸다. 그네 타는 여자아이가 그려진 백자만 해도 그렇다. 학예사들이 ‘춘향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그 백자다. 뒷면에는 또 다른 여자아이가 긴 막대를 들고 서 있다. 그런데 앞뒷면 그림을 평면으로 펼쳐 놓은 디지털 화면을 보니 춘향이의 뒤통수가 위험하다. 긴 막대가 춘향이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으니…. 짓궂은 도공의 의도된 연출인지, 현대 기술이 만들어 낸 트릭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흥미롭다는 것, 그리고 전시가 공짜라는 점이다. 바로 옆 전시관에서는 ‘미술계의 악동’이라 불리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이 열리고 있다. 놀랍게도 이것도 공짜다. 이면의 배경이 뭐든 삼성의 문화 나눔에는 고개가 숙여진다.
  • [길섶에서] 윤이월/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윤이월/이순녀 논설위원

    설이나 추석 같은 전통 명절 말고는 일상에서 음력을 따질 일이 거의 없다. 그래도 음력으로 한 달이 더 보태지는 윤달은 좀 다르다. 이사, 묘지 이장, 결혼 같은 집안 대소사를 정할 때 윤달을 피하거나 선호하는 풍습이 남아 있기에 윤달이 든 해의 달력은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양력과 음력의 날짜 차이를 보정하는 윤달은 3년에 한 번 또는 5년에 두 번 정도 든다. 어느 달이 윤달이 될지는 그때마다 다르다. 올해는 2월이 윤달이다. 어제가 윤이월의 첫날이었고, 다음달 19일이 마지막 날이다. 직전 윤년인 2020년은 4월이 윤달이었다.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세워도 탈이 안 난다’는 속담 덕에 전국의 화장터가 북새통이라고 한다. 고인의 영면과 후손의 무탈을 염원하는 마음을 어찌 탓하랴. 내친김에 윤이월에 관한 속담도 찾았다. ‘윤이월 제사냐.’ 어쩌다 돌아오는 윤이월 제사처럼 자꾸 빼먹거나 거르는 것을 꼬집을 때 쓰는 말이란다. 정신을 더 바짝 차려야겠다.
  • [길섶에서] 착각/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착각/서동철 논설위원

    시골집의 전기가 끊겼다. 겨우내 돌아보지 못했더니 전기요금이 적지 않게 밀렸던 모양이다. 공과금을 내지 못하는 것이 위기 가정의 신호라는데 내가 그렇게 됐다. 윗집 아저씨도 계시고 하니 잘 설명하기는 했을 것 같지만, 그래도 면사무소 복지담당 직원이 찾아오기라도 했다면 민망하고도 미안한 일이다. 흙벽에 슬레이트지붕이었을 때는 각종 고지서를 툇마루에 던져 두면 됐지만, 세월이 흐르며 이제는 컨테이너 집이다. 나무상자로 우편함을 만들기도 했었는데, 그것도 비바람에 쓸모없게 된 지 오래다. 한전 지사에 전화하니 친절하게 대해 준다. 전기를 이어 줘도 다시 요금을 못 낼까봐 걱정이라고 했더니 웃으며 설명한다. 이메일로 고지서를 받고 은행자동이체로 요금을 내면 된단다. 도시에서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 시골집은 왜 옛날과 변함없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새로운 편지함을 어떻게 만들까 며칠이나 고민했으니 마음은 아직도 흙벽 시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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