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통장의 환영 인사/황비웅 논설위원

    [길섶에서] 통장의 환영 인사/황비웅 논설위원

    얼마 전 이사를 했다. 폭염 속에 이사하려니 땀이 비 오듯 흘러 몇 곱절은 힘들었다. 이사하면서 나온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사 오셨나 봐요. 환영합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이사했는데 환영받으니 왠지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알고 보니 이사 간 아파트의 통장님이었다. 이웃끼리 인사를 주고받는 게 어색한 시대다. 특히 아파트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르고 산다. 이사한 뒤 떡을 돌리며 인사하던 관습도 거의 사라졌다. 인사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는 지역 주민들 속에서 반갑게 인사해 주는 통장님의 배려가 느껴져 이사로 얻은 피로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행정복지센터와 지역 주민을 연결해 주는 통반장들의 역할이 새삼 묵직하게 다가온다. 아이들과 뛰어놀다 어둑어둑해지면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마지못해 집에 들어가던 옛 시절이 그리운 요즈음. 이런 배려심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도 퍼지길 기대해 본다.
  • [길섶에서] 마을숲/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마을숲/서동철 논설위원

    농촌 마을에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주민 공동 토지를 판 돈을 나눠 가졌다는 며칠 전 뉴스가 마음에 남는다. 고령화한 주민들의 형편은 어려워지는데 공유 토지에 세금이 자꾸 나오자 이렇게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목돈을 손에 쥔 주민들은 기뻐했다고 한다. 마을 공유 토지는 대부분 땔감 확보가 목적이었다. 곳곳의 금송계(禁松契)는 공동으로 산림을 가꿔 생활에 필요한 목재를 얻는 주민 조직이었다. 마을 공동 토지는 더 있었으니 ‘모자라는 것을 채운다’는 비보(裨補)를 위한 조림지다. 꼭 풍수지리가 아니더라도 큰길에서 마을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을 옛사람들은 피하고 싶어 했다. 몇 년 전에는 다른 마을에서 비보숲 소나무들이 도시 아파트 조경용으로 팔려 나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번에는 마을숲을 산림청에 팔았다니 경관에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농촌공동체의 마지막 연결 고리마저 사라지는 모습이 당연하게만 여겨지지는 않는다.
  • [길섶에서] 품격 있는 자동차/이동구 논설위원

    [길섶에서] 품격 있는 자동차/이동구 논설위원

    성격이 좀 느긋한 편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말투가 느린 데다 걸음걸이마저 빠르지 않아서일 것이다. 운전할 때도 앞차와의 거리를 충분히 두고 천천히 운행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평소 행동이 느리거나 굼뜨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업무 약속 등에서 늦었던 기억이 없다. 가끔은 운전 중에 흥분할 때도 있다. 고속도로뿐 아니라 시내에서도 안전거리를 유지하는데 자꾸만 끼어드는 차량을 만나면 순간 화가 치민다. 특히 꽉 막힌 구간에서 한참을 줄지어 서 있는 판에 염치없이 무리하게 끼어드는 차량을 보면 욕설이 절로 튀어나온다. 물론 차 안에서 혼자만의 분풀이다. 요즘은 억대의 고가 차량을 흔히 볼 수 있다. 일견 품위 있고 고급스럽다. 하지만 고급차의 운전자가 창문을 열어 놓고 담뱃재를 털어 대거나 꽁초를 길바닥에 던지고 침을 뱉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고가의 차량이라도 품위 있어 보일 리 없다. 양보하고 배려하는 모습의 품격 있는 자동차를 자주 보고 싶다.
  • [길섶에서] 습관/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습관/이순녀 논설위원

    휴대전화에 새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했다. 좋은 습관 형성에 도움을 준다는 루틴 관리 앱이다. 매일 반복적으로 해야 할 일과 목표를 설정한 뒤 달성 여부를 점검하는 방식이다. 타인의 모범이 되는 삶을 뜻하는 MZ세대의 신조어 ‘갓생’이 유행하면서 인기를 끄는 앱이라고 한다. 작심삼일이 습관인지라 비교적 지키기 쉬운 루틴들을 골랐다. 아침에 눈 뜨면 물 한 잔 마시기, 스트레칭하기, 영양제 챙겨 먹기 같은 사소한 습관과 매일 5000보 이상 걷기, 하루 10분 이상 독서하기, 자기 전 명상하기 등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습관을 적절히 섞어 리스트를 만들었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낙관은 이르지만 지금까진 기대 이상의 효과다. 별것도 아닌데 매일 기록하는 재미와 성취감이 쏠쏠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습관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일이든 하게 만든다”고 예찬했다. 빅토르 위고는 “노력을 중단하면 습관을 잃는다”고 경고했다. 대문호가 남긴 명언에서 습관의 위대함과 어려움을 새삼 깨닫는다.
  • [길섶에서] 결심/이동구 논설위원

    [길섶에서] 결심/이동구 논설위원

    몸무게를 확 줄인 지 얼추 3년은 지났다. 혈관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진단을 받은 후 결행한 다이어트가 나름 성과를 낸 것. 뚱뚱한 이미지를 일순간에 바꿔 놓았으니 친구들뿐 아니라 직장 동료들도 의아해했다. 몇몇은 갑자기 홀쭉해진 데다 얼굴 피부마저 쪼글쪼글해 보이니 큰 병이라도 생긴 게 아닌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까닭을 묻기도 했다. 30대 중반에는 하루 1~2갑씩 피워 댔던 담배를 뚝 끊었다. 이후 지금까지 담배 연기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덕분에 아들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 집에서 담배 연기에 노출된 적이 없다. 담배와 비만보다 건강에 더 해롭다는 술은 여전히 즐기고 있다. 대인관계와 정신건강을 핑계로 마셔 댄다. 먹는 횟수나 양이라도 줄여 보겠다는 결심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절박감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음주 습관도 자연스럽게 고쳐질 것이라 믿는다. 그런 날은 아주아주 먼 미래였으면 한다. 다만 금주가 너무 늦은 결심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 [길섶에서] 반려 미생물/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반려 미생물/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충동적으로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를 장만했다. 인생이 달라진다는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갔다. 환경에 해가 없는 미생물 처리 방식이라는 데에도 마음이 동했다. 그런데 상전도 이런 상전이 없다. 미물일지언정 생물인지라 죽이지 않는 게 관건이다. 처음에 튼실하게 키워야 ‘장수’한다는 말에 조석으로 들여다보며 멀쩡한 식빵을 먹이로 주기까지 했다. 행여 소화불량 걸릴라 과일 껍질조차 잘게잘게 정성스레 찢어 투입하는 손. 주객전도가 따로 없다. 편해지려 들였는데 되레 기계에 종속되고 있으니…. 기계가 아니라 미생물에 쏟는 정성이라고 애써 자위해 보지만 뒷맛이 쓰다. 그런데 관련 댓글에 ‘반려 미생물’이란 표현이 자주 나온다. 금지옥엽처럼 아끼고 보살피는 애정 앞에 ‘쪼개 넣기’ 따위는 견줄 바가 못 된다. 현대인의 고독은 미생물조차도 반려 대상으로 삼는 것인가. 하긴 생명이 없는 반려석(石)도 인기라는데, 하물며 생명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는 미생물이야.
  • [길섶에서] 보람/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보람/황성기 논설위원

    40년 가까운 오랜 지인과 SNS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다 노후 대책으로 화제가 옮겨졌다. 나보다 몇 살 적은 이 지인은 두 자녀 중 딸을 결혼시키고, 그 아래 아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에 좋은 직장을 다니며 효자이기까지 해서 큰 걱정이 없는 편이다. 아니 행복한 축이다. 게다가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몇 년은 더 다닐 직장도 있다. 정말이지 남들이 볼 때는 부러운 50대 후반이다. 그런데도 걱정이란다. 해외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사 먹고 해야 하는데 몇 년 뒤 정년퇴직하고 5년 뒤 연금을 타기까지 어떻게 버티냐는 게 그의 걱정이었다. 아무리 오랜 친구 사이여도 상대의 주머니 사정이야 속속들이 알 순 없다. 하지만 아이들 잘 키우고, 제 몸 하나 건강하면 뭐가 걱정이랴 싶다. 그래서 쓸데없는 조언을 한다. 아내 잔소리 견디고 푼돈 벌 수 있으면 좋고, 강아지 산책시키고, 가끔 좋은 사람들과 술 마시면 된다고. 눈높이만 낮추면 실은 걱정할 게 별반 없는 세상이라고.
  • [길섶에서] 새만금의 추억/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새만금의 추억/박현갑 논설위원

    이달 초 서울 을지로 지하차도에 주저앉아 더위를 식히는 외국의 스카우트 대원들을 본 적이 있다. 그땐 새만금에서 잼버리 대회가 열리는 줄 몰랐다. 개영 첫날부터 부족한 식사량, 불결한 화장실 관리 등 미숙한 운영에 폭염으로 온열환자가 속출하고 코로나19 환자까지 나오면서 새만금 잼버리를 알게 됐다. 새만금은 요즘 점심 때 빠지지 않는 대화 소재다. 영국과 미국의 조기 철수 소식에 정치권의 네 탓 공방, 2030 부산엑스포 개최에 미칠 영향 등 새만금 이후를 걱정한다. 지난달 극한폭우에 이은 폭염과 태풍 ‘카눈’의 상륙으로 새만금에서 수도권으로 영지를 옮기는 대원들을 태운 버스 행렬을 보며 사후 대응보다 사전 대비가 더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10대 때 해외 청소년들과의 교류 경험은 그 사람의 인생에 강렬한 추억거리다. 북미 인디언말로 ‘즐거운 놀이’라는 잼버리 참가 대원들에게 한국이 안전하고 즐거운 추억의 영지로 기억되길 바라 본다.
  • [길섶에서] 조용한 채팅방/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조용한 채팅방/임창용 논설위원

    요즘은 통화보다 채팅으로 소통할 때가 많다.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마다 많게는 수십 개에 이르는 단체 메신저 채팅방(단톡방)에서 쏟아내는 알림 소리가 신경 쓰여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무시하기도 어렵다. 자칫 관계망에서 소외될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카카오톡이 이용자들의 이런 고충을 덜어 주고자 지난 5월 ‘채팅방 조용히 나가기’에 이어 엊그제 ‘조용한 채팅방’ 기능을 추가했다. ‘조용히 나가기’는 채팅방에서 나가고 싶어도 ‘○○○님이 나갔습니다’는 문구가 표시되는 게 부담스런 이들을 위한 기능이다. ‘조용한 채팅방’은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서 메신저 활동을 하지 않거나 잦은 채팅이 부담스런 이들을 위해 채팅방을 숨기는 기능이다. 알림 기능이 꺼지고, 읽지 않은 메시지 개수를 알려주는 ‘배지 카운트’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모두 사용자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것이지만 왠지 상대를 속이는 것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다.
  • [길섶에서] 돌아가는 車 좌석/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돌아가는 車 좌석/안미현 수석논설위원

    오래전 일본 미술관에 들렀을 때 일이다. 무채색의 깔끔한 엘리베이터 안에 노란색 동그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설치미술인가 싶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노약자를 위한, 보이는 그대로 의자란 답이 돌아왔다. 뻘쭘하다. 그 이후 미국에서 맞닥뜨린 또 하나의 장면. 휠체어를 탄 승객이 아무 불편 없이 버스에 올라타고 전용 공간에 휠체어를 고정시켰다. 20년도 더 된 일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우리도 이제는 횡단보도에 그늘막이나 접이식 의자가 들어서고 있지만…. 일본 자동차 기업 도요타가 회전 좌석을 개발했다고 한다. 다리 힘이 약한 노년층이나 허리가 불편한 사람도 쉽게 차에 타고 내릴 수 있게 좌석이 90도 돌아가도록 고안됐다. 치마를 입은 여성에게도 편할 듯싶다. 고령 인구가 많아 일찌감치 시니어테크가 발달한 일본이지만 출발점은 ‘모두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민이 아닐까 싶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때가 누구에게나 온다.
  • [길섶에서] 초식/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초식/서동철 논설위원

    사돈의 팔촌쯤 되는 친척 중에 스님이 계시다. 이런저런 집안 행사에서 가끔 마주치는데 밥을 먹어야 하는 자리에선 스님에게 미안해진다. 잔칫날 밥상에 고기며 생선이 가득한데도 다른 친척들이 “스님이 드실 게 없어 어쩌나” 하며 눈치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곡차(穀茶)도 권하며 스님이 아니라 그저 삼촌뻘 아저씨로 대한다. 불교계 인사가 참석하는 신문사 밖 회의에서도 식사 자리로 옮기면 스님에 대한 ‘먹거리 과보호’가 시작된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조명치’ 특별전 자료집을 들춰 보다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譚)에 나온다는 멸치 이야기에 눈길이 갔다. 북쪽 스님들은 동해의 작은 물고기를 초식이라 부르며 거리낌없이 먹는데, 객승이 찾았을 때도 흰 빛깔의 물고기국을 주발에 가득 담아 주었다는 것이다. 조상들의 지혜가 아닌가 무릎을 쳤다. 더불어 스님의 먹거리에 대한 절 밖 사람들의 간섭이 400년도 넘은 역사를 가졌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 [길섶에서] 매미 울음소리/황비웅 논설위원

    [길섶에서] 매미 울음소리/황비웅 논설위원

    “찌찌찌~. 찌이이이이~.” 아파트 방충망에 달라붙은 매미 소리가 별나게 시끄럽다. ‘여름의 예찬자’ 또는 ‘가을의 전령’이라고 불리는 매미 소리가 올해는 유례없는 폭염에 항의라도 하듯 더욱 우렁차게 들린다. 예전에는 주로 낮에 울어 대던 매미가 지금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새벽에도 울어 댄다. 어릴 적 매미 소리는 여름을 맞이하는 반가운 소리였는데, 어느새 천덕꾸러기가 돼 가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참매미가 많았던 옛날에는 매미 소리가 “맴~맴~매애애앰~” 하는 듣기 좋은 소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도심에서는 매밋과 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힘이 세고 소리가 큰 말매미가 다른 매미와의 경쟁에서 이겨 우점종이 됐단다. 매미는 7년 동안 땅속에서 살다가 한 달만 지상으로 나와 살다가 죽기 때문에 매미를 함부로 잡으면 벌받는다는 얘기가 있다. 다시 들어 보니 마치 남은 한 달이 아쉬운 듯 쩌렁쩌렁할 정도로 울어 대는 게 처량한 느낌마저 든다.
  • [길섶에서] 회춘/이동구 논설위원

    [길섶에서] 회춘/이동구 논설위원

    지인들이 농장을 방문하기로 의기 투합했다. 은퇴한 지인이 10년 가까이 주말마다 오고가며 혼자 힘으로 가꿔 온 농장이 서울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산자락에 있다. “농사일이 인생의 기쁨이요 삶의 철학”이라는 그는 30여종의 채소와 과일 등을 가꾸며 생활의 활력을 얻고 있다. 소출은 별로지만 여러 농작물을 심고, 수확의 기쁨을 맛보기 위한 텃밭 농사의 즐거움에 푹 빠져 있다. 텃밭 수준이라 해도 농사는 으레 사람 손이 많이 가는 법. 잡초도 뽑아야 하고, 수확도 제때 해야 한다. 농장 방문의 명분도 일손을 보탠다는 것이지만 세상 이치가 어디 그런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도착하자마자 바비큐 파티가 텃밭 관심을 눌렀다. 도시를 떠나 자연에서 술과 음식을 마주하니 얼마나 좋은가. 한쪽에 지펴 놓은 모깃불마저 달뜨게 했다. 한적한 곳이라 다들 금방 웃통을 벗어던지고, 젓가락 장단에 노랫가락을 뿜어낸다. 20대로 되돌아간 모습이었다. 여름은 역시 젊음의 계절, 낭만의 계절이다.
  • [길섶에서] 담력/이순녀 논설위원

    [길섶에서] 담력/이순녀 논설위원

    눈이 큰 편도 아닌데 어릴 적 겁이 많았다. 놀이공원에 가면 회전목마 정도만 즐길 뿐 바이킹이나 청룡열차는 엄두도 못 냈다.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돈을 내고 왜 저런 무서운 걸 타나’ 괜히 심통만 부릴 뿐이었다. 여름이 대목인 납량특집 공포물도 눈 뜨고 본 적이 없었다. 어른이 된 뒤에는 그나마 겁이 좀 줄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고 격변을 경험하면서 나름의 내공이 쌓였다고나 할까. 세상에 진짜로 무서운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깟 놀이기구나 좀비 영화 따위가 뭐라고.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다시 겁이 늘고 있다. 심약한 마음이 철갑을 두른 듯 단단해진 줄 알았는데 나이 들수록 담력이 쪼그라드는 것 같다. 달라진 점은 있다. 예전엔 어떻게든 공포심을 이겨 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이 또한 본연의 내 모습이라고 인정하고 나니 굳이 극복할 필요가 있나 싶은 게다. 스카이워크도, 패러글라이딩도 그림의 떡이지만 어쩌겠나. 그래도 재밌다고 소문난 드라마 ‘악귀’를 끝내 보지 못한 건 좀 아쉽다.
  • [길섶에서] 여름꽃/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여름꽃/황수정 수석논설위원

    꽃다발을 식탁에 모셔 놓고는 쩔쩔맨다. 시들지 않게 꽃을 지켜 줘야 한다는 생각에 영 서툴다. 어린 날 기억 때문인 것 같다. 여름꽃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는 꽃이었다. 여름 한낮의 마당은 조용했다. 뙤약볕 괴괴한 빈 마당에서는 여름꽃들이 번갈아 보초를 섰다. 고요를 먼저 깨는 것은 능소화였다. 대문을 감아 오르다 툭툭 떨어져 어린 우리한테 장난을 걸던 꽃. 바람 한 점 없어도 제 풀에 곤두박질쳐 심심한 오후를 달래 주던 꽃. 나란한 석류나무도 질세라. 초롱 같은 늦꽃을 토독토독 종일 엇박자로 떨구었고. 땡볕에 웅크려 졸던 호박꽃이 그제야 기지개를 펴는 해넘이 저녁. 뒤꼍 모퉁이에서는 도라지꽃, 부추꽃이 실낱같은 바람결에도 하얗게 몸을 일으키던 때. 봄을 데려와 그저 놀다 가는 것이 봄꽃이라면 여름꽃은 낮과 밤을 나눠 합주를 하는 고단한 꽃이다. 아득한 초저녁 졸음을 오늘은 쫓지 말아야지. 그 여름밤으로 건너가 보고 올까. 달이 밝은지 깨꽃이 더 환한지.
  • [길섶에서] 배우 C씨/황성기 논설위원

    [길섶에서] 배우 C씨/황성기 논설위원

    미국 배우 C씨가 신작 홍보차 서울 마포의 불고기집에 들렀다는 얘기를 듣곤 그에 대한 호감이 조금 더 늘었다. 그 가게는 단골은 아니지만 1년에 몇 차례는 가는 집이다. 매운 낙지볶음을 먹을 리 없을 테니 바싹불고기를 시켰을 것이다. 개봉 소식을 접하고 이른 아침 영화를 보러 갔다. 코로나 동안은 단 한 번도 가지 않던 극장을 거의 4년 만에 갔다. 러닝타임 163분의 영화는 시종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액션과 볼거리로 가득했다. 나이가 비슷한 C씨가 시즌별로 어떻게 늙어 가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영화 외적인 재미다. 빠른 달리기 장면에선 내가 숨이 찰 정도다. 스턴트를 거의 쓰지도 않는다는데 고난도의 액션 연기를 소화하는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코로나 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상당한 시간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역시 ‘영화는 극장’이란 말이 새삼스럽다. 몇 년 뒤 다시 새 시즌을 갖고 한국에 올 C씨. 그의 더딘 노화 속도가 기대된다.
  • [길섶에서] 공개된 일기/박현갑 논설위원

    [길섶에서] 공개된 일기/박현갑 논설위원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다. 등굣길에서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어머니 영정 사진을 들고 영구차로 가는 걸 봤다. 그날은 어버이날이었다. 안타까운 심정을 그날 저녁 일기에 남겼다. 당시 학교에서는 일기장을 검사했다. 일주일인지 한 달 간격인지는 기억이 흐릿하나 정기적으로 일기장을 제출해야 했다. 돌려받은 일기장엔 담임선생님의 소감이 적혀 있었다. 적색 수성펜으로 “참 잘했어요. 앞으로도 이쁜 생각 많이 키우세요”라고 적었던 것 같다. 선생님과의 짧은 교감이었지만 학생과 소통하려는 모습으로 기억된다. 요즘 초중고 학생들에게 일기장 검사는 사생활 침해다. 두발 자유화에 가벼운 화장도 허용하는 마당이니 언감생심이다. 학교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초등학교 교사의 일기장 일부가 언론에 공개됐다. “모든 게 다 버거워지고 놓고 싶다. 숨이 막혔다”는 내용에 교육계는 물론 정치권도 대책 마련으로 분주하다. 고인의 죽음이 공교육 정상화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
  • [길섶에서] 외동아이 교육/임창용 논설위원

    [길섶에서] 외동아이 교육/임창용 논설위원

    얼마 전 동네 식당에서 외식을 할 때의 일이다. 옆 테이블에서 부모와 함께 온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큰 소리로 장난을 치자 주위의 눈총을 의식한 듯 엄마가 아이에게 “좀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다. 한데 아빠인 듯한 남성이 대뜸 “여기가 도서관이야?”라며 외려 부인을 타박한다. 아이는 아빠의 ‘지원사격’에 힘을 얻은 듯 더 큰 소리로 장난을 쳤고, 식당 주인은 분란이라도 일어날까 모른 체하는 눈치였다. 요즘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욕을 하거나 폭행을 하는 사건이 속출하면서 ‘교권 보호’가 사회 이슈가 됐다. 교권 침해를 막기 위한 법제 손질 움직임까지 일고 있다. 사회 분위기가 아동학대 방지나 권리 찾기에 편중되면서 아이 인성교육과 사회성 키우기엔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특히 외동아이가 많아지다 보니 부모의 과잉 보호가 버릇없는 아이 양산에 한몫하는 듯하다. 하지만 아이의 작은 소란 방치가 욕설과 폭행, 범죄로까지 커질 수 있음을 부모들이 마음에 새기면 싶다.
  • [길섶에서] 종이 퇴출/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길섶에서] 종이 퇴출/안미현 수석논설위원

    골프장 샤워실에서 동반자들에게 수건을 한 장 이상 쓰지 못하게 엄명해 독재자라는 핀잔을 듣는다는 누군가의 글을 보고 피식 웃었다.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다. 화장실에서 종이수건을 두세 장씩 뽑는 사람을 보면 목구멍이 근질거린다. “한 장으로도 충분한데….” 상대가 편하다 싶으면 기어코 입 밖으로 뱉는 오지랖도 서슴지 않는다. 가끔씩 종이수건을 뭉텅이로 뽑아 손 한번 쓱 닦고 버리는 사람을 보면 뒤통수를 때려 주고 싶은 유혹마저 느낀다. 얼마 전 삼성전자 사장은 임직원에게 ‘종이 없는 사무실’을 만들자며 회의자료 출력이나 문서 보고를 지양해 달라고 주문했다. 삼성전자가 하루에 쓰는 복사용지만 13만장이라고 한다. 복사지만 아껴도 1년에 2만 그루 나무를 살릴 수 있다. 아직은 디지털보다 종이 문서가 더 편한 ‘연식’인지라 종이수건이라도 아껴 ‘출력’의 가책을 덜어 보려는 심리기제가 작용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신음하는 지구를 위해 동참할 수 있는 건 동참해야….
  • [길섶에서] 보궤불식/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보궤불식/서동철 논설위원

    경기도자박물관의 ‘신양제기’(新樣祭器) 특별전을 재미있게 봤다. 제사는 천지신명에게 기구(祈求)하는 의례이니 여기 쓰는 그릇은 특별전 부제처럼 ‘하늘과 땅을 잇는 도자기’가 분명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보(簠)와 궤(簋)였다. 보궤라고 붙여 쓰곤 한다. 보는 겉이 둥글고 속이 사각인 반면 궤는 겉이 사각이고 속은 둥근 형제 그릇이다. 보궤불식(簠簋不飾)이라는 일종의 사자성어를 눈여겨본 적이 있어 나의 흥미를 좀더 자극했나 보다. 청렴하지 못한 공직자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라 한다. 용인 서리가마에서 출토됐다는 11세기 보궤는 보기 드문 고려백자다. 장식성을 배제한 특유의 우유 빛깔 그릇에서는 종교적 엄숙성과 순수성이 교차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윗사람이 예의로 아랫사람을 대하면 아랫사람도 정도를 지켜 보답한다’는 의미가 보궤불식에 담겨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세상에 박물관은 많고, 모르는 것은 훨씬 더 많다는 깨우침을 얻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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