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걸으면서/박현갑 논설위원

    자동차 보험 갱신을 앞두고 있다. 1년간 운행거리가 1만㎞ 이하면 이미 낸 보험료에서 일정액을 돌려받는 조건의 보험에 가입했는데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보험료 일부를 돌려받을 예정이다. 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주말에만 자동차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용할 만한 상품이다. 올해는 좀더 걸을 작정이다. 출근길이나 점심을 먹고는 10층 사무실까지 계단을 이용한다. 3분 남짓 걸린다. 마지막 계단을 내디딜 때쯤, 단거리 질주라도 한 듯 호흡이 가빠진다. 가쁜 호흡만큼 묘한 성취감도 생긴다. 걷기는 이동수단이다. 이동 목적만 생각하면 효율성에 얽매이게 된다. 자동차나 고속열차로 더 편하고, 빠르게 갈 수 없느냐는 것이다. 이 효율성을 포기하면 걷기 자체가 주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오른발, 왼발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평온함이 생긴다. 잡념은 사라지고, 희망을 마주한다. 한강변에선 발걸음을 멈추고 이름 모를 풀이나 나무들과 대화도 한다. “어젯밤 추위도 잘 이겨냈구나, 오늘도 그 푸름을 마음껏 발산하려무나” 하고 덕담을 건네본다. 이마의 땀줄기를 씻어내리는 시원한 강바람은 걷기가 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 eagleduo@seoul.co.kr
  • [길섶에서] 바다의 품/손성진 논설고문

    압도하는 바다의 광활함에 도취했었다. 안아줄 품이 그리울 때면 바다를 찾는다. 바다가 넓은 품을 벌린다. 바다는 나를 품고 나는 바다를 안는다. 어떤 잡념도 거추장스러운 무념무상의 세계. 서해의 어스름에 주홍빛 태양이 바다로 풍덩 빠지고 있다. 모네와 르누아르를 사로잡았을 빛. 그 다사로움에 삭막한 마음은 온기를 찾고 그 황홀함에 거친 피부는 윤기를 얻는다. 생선 내음 비릿한 선창가. 뱃고동 소리는 막 선잠 든 소라를 깨운다. 동백꽃 선홍색은 칼바람에 더 짙어진다. “점 찍은 작은 섬을 굽이굽이 돌아서 구십리 뱃길 위에 은비늘이 곱구나” 노래비의 한 구절이 가슴을 파고든다. 산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면 바다는 모든 것을 품어준다. 마지막 종착지 바다는 넉넉하고 자애롭다. 어떤 해악도 바닷속에서는 스스로 흐물흐물해진다. 인간이 뿌린 갖은 독물도 바다의 광대함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 밤바다는 전에 없이 폭풍우를 몰아쳤다. 무절제하고 간악한 인간이 인자한 바다를 마침내 노엽게 했을까. 다음날 바다는 평온으로 돌아갔다. 잠시 경고를 한 게다. 마냥 관대한 것은 없다. 오래도록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싶다면 인간이 뉘우쳐야 하지 않을까. sonsj@seoul.co.
  • [길섶에서] 성묘길/박록삼 논설위원

    도회지 사는 어린것들에게 성묘길은 소풍길이었다. 추석이면 누런 벼를 후두두 뜯다 혼나기도 하고, 야트막한 감나무 타고 올라가 터질 듯 익은 홍시 따 먹기도 했다. 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핏설핏 내린 눈조차 채 녹지 않은 산줄기 누비는 일은 신나기만 했다. 아비 손잡고 고조며 증조며 산길 곳곳 산소 오르내리다 보면 등배기에 땀이 촉촉이 뱄다. 서툰 몸짓으로 어른들 흉내 내 절한 뒤 무덤가에 앉아 조상님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 과일, 포, 과자 등속 집어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뿐이랴. 아비의 고향을 찾아 집집마다 돌며 촌수도 모르는 집안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맛난 것 얻어먹고, 운 좋으면 세뱃돈도 받았다. 성묘는 축제의 다른 이름이었다. 설이다. 세월이 흘러 아이는 아비가 됐고, 그 시절 아비처럼 어린것들 데리고 성묘한다. 아비 잃은 아이가, 언젠가 아비 잃을 아이에게 핏줄이 당김을 확인시키는 연례행사다. 여전히 아비 노릇 서툰 아비지만, 아이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핏줄의 숭고함을 몸으로 확인시키고, 할아버지 등 조상의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핏줄의 상실은 슬픔의 무게가 무겁다. 시간이 좀더 흐르고서 성묘길을 소풍길로 여기는 아이들과 함께하면 다시 유쾌해질
  • [길섶에서] 뒤돌아보기/이두걸 논설위원

    회사나 대형 건물에서 현관문을 열 때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다. 유리창의 반사로 등 뒤를 확인하기도 한다. 혹시 뒤의 누군가를 위해 문을 잡아두려는 의도에서다. 감사인사를 기대하지는 않지만 가벼운 목례도 없이 지나치면 살짝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인간 자동문’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언제까지 문을 잡고 있어야 하나’ 망설일 때도 종종 있다. 이 습관은 오래되지 않았다. 5년 전 해외연수차 머물렀던 짧은 미국 생활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나도 남이 잡아놓은 문에서 몸만 쏙 빠져나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내 뒤의 이들은 이런 밉살스러운 행동에 얼마나 불쾌했을까를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진다. ‘선진국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강하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 난폭운전 등은 뉴욕이 서울 뺨친다. 소매치기가 옆 사람 주머니를 털어도 그냥 지나치는 게 파리나 런던의 일상이다. 그래도 체면과 명분을 중시한 전통이 사라지는 게 아쉽다. ‘옛것을 지킨다’는 보수(保守)를 자처하는 이들이 정작 배려할 줄도 나눌 줄도 모르면서 심지어 부끄러움조차 없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까울 뿐이다. 뒤주를 가난한 사람이 열어 배고픔을 면하게 하라는 의미로 써붙였다는 타인능해(
  • [길섶에서] 금니/황성기 논설위원

    거리를 지나다닐 때 ‘금이빨 높은 가격에 삽니다’라는 광고 간판이 눈에 들어온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이전까지는 전혀 의식을 못하다 늘 지나는 철물점 앞의 입간판에 떡하니 쓰여 있는 문구를 보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5년쯤 전인가 금이 간 치아 치료를 받으면서 금니를 해 넣은 터라 평생을 번쩍거리는 이빨을 지니고 살 거로 생각했다. 사는 사람이 있다면 파는 사람도 있다는 건데, 평생을 지니던 금니를 파는 것은 죽은 뒤일 것이라는 근거도 없는 결론을 내리고 지내 왔다. 금을 덧씌운 이빨이 살살 아파서 치과에 갔더니 신경 치료가 필요하다고 한다. 식당에서 주는 메뉴판처럼 사진 속 3가지 인공 이빨 후보를 보여 주더니 지금 씌워진 금은 떼야 한다면서 원한다면 가져가란다. 그제야 ‘금이빨’이 유통되는 그 길 하나를 알게 됐다. 늘 입간판을 세워 둔 가게에 가서 금니를 내밀었다. 익숙한 솜씨로 저울에 달더니 2만원을 주겠단다. 치료에 몇십만원 들어간 금니인데 고작 그 정도라니. 금니 시세를 알 리 없으니 별 저항 못하고 그냥 팔고 말았다. 사전을 보면 금이빨은 ‘금니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경험하지 않고는 알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 [길섶에서] 단식/이순녀 논설위원

    배고픔을 잘 참지 못하는 편이다. 공복이 길어지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진다. 건강검진 전에 해야 하는 금식도 매번 고역이다. 때문에 간혹 업무가 밀렸거나 속이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끼니를 거르는 경우 말고는 자발적인 단식은 엄두를 못 낸다. 최근 단식이 잇따라 화제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하나는, TV프로그램에서 다이어트 방법으로 소개한 ‘간헐적 단식’이다. 일정 시간에만 식사를 하고 그 외에는 공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체중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몸이 단식을 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FMD’(단식모방식단)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다른 하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릴레이 단식농성이다. 한국당은 조해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 임명에 반발해 지난 24일부터 국회 일정을 거부하고 릴레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단식 시간이 5시간 30분이란 점 때문에 논란이 일었다. 보통 식사 간격이 6시간이란 점을 감안하면 중간에 간식을 먹지 않겠다는 의미에 불과하다 보니 ‘딜레이 식사’, ‘웰빙 단식’이란 비판을 자초한 모양새가 됐다. 고도의 정치적 행위인 국회의원의 단식이 이렇게 희화화되고, 조롱당하는 것은 지켜보는 국민으로서도 민망한 노릇이다.
  • [길섶에서] 몸살/황수정 논설위원

    한 살 나이를 먹는 것은 간절한 일이 많아지는 일이다. 두서없이 입맛이 방정을 떤다. 그럴 때는 울렁거리는 마음 어쩌지 못해 제풀에 가라앉기만 기다린다. 이런 것들이다. 칼바람에 목젖이 따끔거리면 뜨물 숭늉 한 사발을 소리 내어 마시고 싶다거나, 입이 깔깔한 밥상머리에서는 싫도록 먹던 우리 집 섞박지를 한입만 깨물어 봤으면 한다거나. 곱게 내린 쌀뜨물로 누룽지를 살살 달랜 둥그런 맛, 김장독에 덤벙덤벙 던져놨어도 설핏한 살얼음에 정신 번쩍 들게 했던 섞박지의 쨍한 맛. 팔짝 뛰게 허기지는 맛이다. 질긴 몸살에 등짝은 꿉꿉해서 새벽잠이 깬다. 객짓밥 수십년인데, 몸살이 날 때마다 수십년째 울먹울먹 뜨내기가 되니 도로아미타불. 몸져누운 시간은 두고 온 곳에 다녀오기 좋은 시간이다.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 있겠냐는 시인의 말처럼, 쉬엄쉬엄 가라는 삶의 모퉁이. 풋잠 들었다가 배꼽이 벌떡 일어나게 먹고 왔다. 국간장에 참기름 두 방울이면 엎어진 깨소금통처럼 꼬숩던 흰죽 한 그릇. 주물럭 뚝딱 우렁각시가 살았던 오래된 그 부엌에서. 꼭두새벽에 환청이겠지. 어느 집 도마 소리가 저렇게 다정한지. sjh@seoul.co.kr
  • [길섶에서] 흰머리 발굴/문소영 논설실장

    최근 가르마를 왼쪽으로 바꿨다. 오른쪽 앞이마에 제비초리가 있어서 그쪽으로 가르마를 타는데, 머리 형태가 너무 납작해지는 듯해서 그랬다. 머리를 한 갈래로 땋거나 쪽 찐 머리를 할 때는 푸르스름하게 흰빛이 인상적인 반듯한 가르마가 정석이었지만, 현대에는 지그재그 가르마 등이 인기다. 미용실에서 들은 바로는 가르마를 수십 년 똑같은 방향으로 하면 그 부분이 햇볕과 공기오염,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탓에 머리숱이 적어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그재그 가르마를 추천했다. 젊은이들도 과도한 스트레스에 숱이 적어져서인지, 미용실의 추천 덕분인지, 무심한 듯 자연스런 가르마를 하고 다닌다. 그런데 가르마를 바꾸고 예상치 못한 물질의 출현에 충격을 받았다. 흰머리가 한꺼번에 무더기로 나타난 것이다.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나 노출됐다. 용케 머리숱에 가려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던 것이다. 정수리 기준으로 왼쪽은 흰머리 유전자가, 오른쪽엔 검은 머리 유전자가 몰려 있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모낭의 노화는 유비쿼터스 아닌가. 느닷없는 흰머리의 출현에 마음이 상하지만, 새치라며 뽑는 40대의 만용을 부릴 수 없었다. 듬성 머리보다는 흰 머리카락 한 올도 소중하니까.
  • [길섶에서] 배신감/김성곤 논설위원

    모든 것이 습관들이기 나름인 것 같다. 승용차로 출퇴근을 하다가 1년째 지하철로 출퇴근 중이다. 한때는 출퇴근 때 운전하며 차안에서 보내는 내 시간이 그리 소중하더니, 지금은 출근 때 지하철에서 보내는 45분여가 더없이 중요한 시간이 됐다.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고, 오늘은 뭘 쓸 것인지 구상도 한다. 게다가 손이 자유로워 지인들과 소셜미디어 소통도 하니 훨씬 긴요하다. 지하철을 타면 아예 빈자리는 생각지 않고, 노약자석 옆 벽에 기대어서 온다. 이것저것 신경 안 쓰고 속 편한 자리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노약자석에 앉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겨울에 꽁꽁 싸맨 어르신부터 분홍표식을 무릎에 놓고 얌전히 앉아 있는 임신부…. 때론 젊은 여성이 앉아서 열심히 화장을 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30대 남성이 아주 불편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머리에 손을 짚기도 한다. 그래, 몸이 아픈가보다. 행여 발이 부딪힐세라 떨어져 선다. 그런데 열심히 휴대전화로 유튜브를 보는 것 같다. “아닌가?” 공교롭게도 광화문에서 같이 내린다. 그런데 내리자마자 혼잡을 피해서 먼저 광화문역 계단을 쏜살같이 달려 올라간다. 나는 지금껏 광화문역 교보문고 쪽 28계단을 그렇게 빨리
  • [길섶에서] 골프와 정직/이종락 논설위원

    몇 년 전 50대 골퍼가 골프장 파3홀에서 친 공이 훅이나 왼쪽 장애물을 맞고 사라졌다. 이 골퍼는 그린 러프 주변을 서성이다 공을 찾지 못하자 또 다른 공을 슬쩍 꺼내 내려놓았다. 속칭 ‘알까기’를 한 것이다. 골퍼는 시야에서 사라진 공을 찾은 마냥 어프로치 샷으로 또 다른 공을 그린의 홀 가까이에 붙였다. 그런데 처음에 쳤던 공이 홀 안에 있는 게 아닌가. 장애물을 맞고 홀 안에 들어온 것이다. 홀인원인 셈이다. 하지만 속임수를 쓴 그 골퍼는 자신이 홀인원을 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다. 골프 애호가들은 골프를 통해 정직의 미덕을 배운다고 한다. 골프에는 심판이 없기 때문이다. 스코어카드도 원래 스스로 적게 돼 있다. 골프장처럼 정직을 배우고 양심을 키우는 데 안성맞춤인 훈련장도 없다.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광주지법에서 재판을 받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알츠하이머를 앓는다며 재판 출석을 거부할 무렵에 골프를 쳤다고 한다. 캐디가 헷갈리는 골프 스코어도 스스로 암산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이게 사실이면 그가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라도 재판에 못 나올 정도로 위중한 상태는 아닌 듯싶다. 골프를
  • [길섶에서] 화장실 전망/임창용 논설위원

    기사를 쓰다가 흐름이 막히거나 생각이 꼬이면 화장실에 간다. 배설을 해야 생각이 풀려서가 아니다. 사무실이 있는 10층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 화장실이다. 널찍한 화장실 통창 앞에 서면 길 건너 정면에 고풍스러운 벽돌 건물인 성공회 성당이 아늑함을 선사한다. 그 왼쪽으로는 덕수궁이 한눈에 들어온다. ‘명품 전망’이 따로 없다. 고궁의 나무들 덕분에 계절을 가장 빠르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덕수궁 뒤로는 높은 건물도 많지 않아 해질녘 노을이 황홀할 정도다.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고정하느라 피곤해진 눈과 머릿속이 호강하는 순간이다. 화장실은 예전에 집 뒤나 마당 귀퉁이가 제자리였다. ‘뒷간’이나 ‘측간’으로 불린 것도 그 때문이다. 통풍을 고려했겠지만, 건물을 지을 때 소외받은 것도 사실이다. 수세식으로 바뀌면서 지금은 방으로까지 들어오는 대접을 받지만, 위치는 여전히 창이 없는 구석자리다. 오피스 빌딩에서도 전망 좋은 방은 고위 간부들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수년 전 이곳에 화장실이 생겼을 때는 공간이 아깝다고 여겼다. 지금은 ‘참 넉넉한 배치’란 생각이 든다. 10층의 모든 근무자들이 명품 전망을 공유할 수 있어서다. 사무실을 배치하다 우연히 이렇게 됐겠
  • [길섶에서] 여권(旅券) 유감/김균미 대기자

    얼마 전 유효기간이 몇 달 남지 않아 여권을 재발급받았다. 폴리카보네이트(PC) 재질에 남색 차세대 전자여권을 발급받나 기대했는데 2020년부터라고 해 실망했지만, 여권을 신청하면서 간편함에 마음이 풀렸다. 한쪽짜리 여권 발급 신청서에 기재하는 내용이 매우 간단했다. 신청하고 근무일 기준 4일 만에 여권이 나왔다. 그런데 접수하다가 직원이 던진 질문에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용하고 있는 여권의 기재 내용 그대로 발급된다면서 영문 철자와 성(姓) 다음에 적힌 ‘누구의 아내’라는 문구를 들었다. 그렇잖아도 성 다음에 그런 표현이 왜, 언제부터 들어간건지 궁금하던 차에 빼달라고 했더니 변경신청서를 별도로 제출해야 한단다. 집에 보관 중이던 옛 여권들을 찾아보니 ‘ w/o ○’(1999년), ‘wife of ○’(2009년), ‘spouse of ○’(2019년)으로 기재 내용은 조금씩 바뀌었다. 그런데 여권에 굳이 결혼 여부를 기재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남성 여권에 ‘누구 남편’ 또는 ‘누구 배우자’라고 적힌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에는 적지 않으면서 여권에만 선택적이라도 표시하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다. 신분증
  • [길섶에서] 제2의 천성/박현갑 논설위원

    못 고치는 습관이 있다. 잠자리에 누워 스마트폰 보는 습관이다. 뉴스 보고 음악도 듣는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눈꺼풀이 내려오면서 휴대전화를 이마에 떨어뜨리기도 한다. 또 있다. 폭음이다. 술자리가 길어지면 술이 술을 마시는 순간이 온다. 고마운 습관도 있다. 구직 면접에서 절약정신을 강조한 면접생이 회사 전기를 함부로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가 합격했다는 얘기가 있다. 면접관이 입사도 안 했는데 어떻게 그러냐는 질문에 제대로 답을 못한 채 면접장을 나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사무실 전원 스위치를 내려 합격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잦은 술자리에 따른 건강관리를 위해 하루 2만보를 꾸준히 걸었더니 고혈압 등 성인병을 잊고 지낸다는 지인도 있다. 습관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이는 경험이나 학습이 반복된 행동양식이다. ‘제2의 천성’으로 불린다. 처음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엔 습관이 우리를 만든다는 말도 있다. 사회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반복하는 습관은 관습이다. 미풍양속이 좋은 관습이라면, 갑질은 악습이다. 정치인의 상습적인 거짓말도 악습이다. 악습은 없애고 미풍양속은 키울 ‘좋은 습관 배양술’은 없을까. eagleduo@seoul.co.kr
  • [길섶에서] 조약돌의 사연/손성진 논설고문

    겨울 바다에서 본 것은 바다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작은 조약돌이었다. 누구라도 귀찮다는 듯 무심코 밟고 지나가는 미물(微物). 그러거나 말거나 작은 돌들은 바닷물에 몸을 맡기고 밀려 들어갔다가 다시 파도에 떠밀려 나온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김새가 참 신기하게 제각각이다. 둥근 꼴, 세모꼴, 산(山) 모양, 하트 모양…. 바다에 이르기까지 조약돌에게는 무척이나 험난했을 여정을 고스란히 품은 형형색색이다. 어쩌다 산들에 있을 돌이 바다로 밀려왔을까. 조약돌의 근원을 알고 싶으면 시간을 거슬러 수천만 년, 수억 년의 지난 세월을 상상해 보아야 한다. 큰 암석이 천둥 번개에 쪼개지고 비바람에 부딪히며 닳고 달았을 것이다. 폭풍우는 작은 돌들을 산에서 들로 마침내 바닷가로 데려왔을 것이다. 도심의 잡초엔 어떤 녹초방화(綠草芳花)에도 없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씨앗은 바람만 불면 척박한 땅을 향해 무거운 몸을 띄웠을 것이다. 작고 하찮은 것들에도 저마다의 사연과 가치가 있다. 인고의 시간을 견뎌 내곤 마지막 정착지 해변에 도착한 조약돌엔 알지 못할 기품이 서려 있다. 그래서 가벼이 볼 수 없다. 사람을 볼 때도 그렇다.
  • [길섶에서] 늦봄, 평화를 심다/박록삼 논설위원

    꽤 오랫동안 우리 삶에 분단은 너무도 당연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했지만, 바라는 건 북한의 붕괴였다. ‘북한과 공존’은 상상 바깥 영역이었다. 늦봄 문익환 목사(1918~1994)가 1989년 첫날 새벽 지은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시에서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며 노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낭만적 통일운동가의 치기로 치부됐다. 그는 그해 3월 상상을 행동으로 옮겼다. 김일성 북한 주석을 만나 포옹했고, 논쟁했고, 격려했다. 남북, 해외 모두 화들짝 놀랐다. 돌아와 7년형을 선고 받았고, 공안정국 한파가 몰아쳤다. 하지만 늦더라도 봄은 그리 찾아오는 법. 분단과 냉전에 길든 이들의 가슴 속에 평화의 씨앗을 뿌렸다. 민간 통일운동의 물꼬 또한 서서히 열렸다. 꼬박 30년이 흘러 이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한반도 평화는 그가 꿈꾸고 퍼뜨린 세상이다. 남북과 북·미 정상이 만나는 길은 그가 곳곳에 박아놓은 이정표를 따라간 걸음이다. 더이상 전쟁 위협은 한반도에 없어야 하리라. 오는 18일은 문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25주기 되는 날이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기다리며 구름 위에서 덩실거릴 듯하다. “것
  • [길섶에서] 좌우명/이순녀 논설위원

    귀감이 되는 인물을 인터뷰할 때 좌우명(座右銘)을 항상 물어본다. 그 사람이 지향하는 가치관, 삶의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간 숱한 명사들에게 좌우명을 질문해 왔지만 정작 나는 좌우명이 없다.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을 만한 명언은 세상에 차고 넘치나 좌우명으로 정하고 난 뒤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아직은 없어서다. 좌우명의 유래는 두 가지다. 중국 제나라의 환공이 가득 채우면 엎어지는 술독을 항상 자리의 오른쪽에 두고 가득차는 것을 경계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한나라의 학자였던 최원이 자신의 행실을 바로잡기 위해 글을 지어 자리 오른쪽 쇠붙이에 새겨 놓았다는 설이다. 어느 쪽이든 실천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주 취임 때 언급한 ‘춘풍추상’(春風秋霜)이 화제다. ‘자신에겐 가을 서리처럼 엄격히, 타인에겐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대하라’는 뜻의 고사성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2월 각 비서관실에 이 액자를 선물하면서 “공직자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좌우명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었다. 늘 스스로를 경계하고, 행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길 바
  • [길섶에서] 맛집/황성기 논설위원

    일요일 새벽녘 선잠에 뒤척이다 TV를 켰더니 맛의 달인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나온다. 푹 고아 잘게 찢은 소고기가 고명으로 얹힌 국수인데 탄력이 있어 보이는 면발, 고기 육수와 더불어 그 새벽에 그렇게 맛깔나 보일 수 없다. 요리 전문가들의 극찬과, 지극히 성실해 보이는 주인장을 보고는 믿음의 심리가 발동한다. 맛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이 급해진다. 이른 아침잠을 깨 기다리고 기다리다 오전 9시 30분쯤 전화를 걸었더니 일요일인데도 가게 문을 연다고 한다. 평소라면 TV에 나온 ‘맛집’은 청개구리 심보처럼 머릿속에서 지우거나 발걸음을 거꾸로 하는데 이 가게는 예외였다. 10여㎞ 차를 몰아 가게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55분인데도 이미 자리가 없다. 10분쯤 줄 서고, 자리에 앉아 10분을 더 기다려 나온 국수는 상상했던 맛과는 약간 달랐지만, 동네 국숫집으로는 보통 이상이겠거니 싶다. 20평 남짓한 가게는 TV를 탄 덕분인지 정말이지 분주했다. 밀려드는 주문, 조리, 설거지, 서빙까지 주인 가족들이 총동원된 것 같은데도 숙련되지 않은 모습이 안쓰럽다. 그런들 어떠랴. 모처럼 맛집 선택에 실패하지 않고 새벽잠 설친 보람 있게 맛나는 국수 한 그릇 잘
  • [길섶에서] 몸의 기억/김성곤 논설위원

    연말·연초 네팔 히말라야 토롱라 패스를 넘었다. 2013년 이후 세 번째 네팔 방문이다. 트레킹 중 화제는 ‘막살기’였다. 고도가 3000m를 넘어서자 하나둘씩 두통, 설사 등 고산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평소 술 마구 먹고, 체력관리 제대로 안 했다는 이른바 막산 사람 가운데 ‘고산증 프리’가 제법 많았다. 반대로 국내서 산 좀 탔다는 사람들이 맥을 못 춘다. 알다가도 모를 고산증이다. 토롱라 일대는 해가 지면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난방이 안 되는 로지는 물을 쏟으면 금세 얼어버린다. 세수, 면도, 목욕은 고사하고, 먼지 묻은 옷을 입은 채 침낭에 들어가 그냥 잤다. 고작 물티슈로 닦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아내나 동료로부터 나는 냄새를 맡지 못했다. 출발 전 체질상 기관지가 약한 데다 감기 기운이 있어서 감기약을 한 보따리 지어서 갔다. 그렇게 막살았는데 약 쓸 일이 없다. 새벽에 영하 20도를 밑도는 토롱라를 넘으면서 발에 동상은 걸렸지만, 기침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데 뿌듯한 기분으로 인천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니 갑자기 잊고 있던 기침이 나오기 시작한다. 춥지도 않고, 미세먼지도 별로라는데…. 내 몸이 예전의 기억을 되살린 것인가. 닦고, 씻고
  • [길섶에서] 한솥밥/황수정 논설위원

    할머니는 혼잣말을 잘하셨다. 봄비 마당에 냄비만 한 두꺼비가 엎드렸어도 대문을 활짝 열어 “다치지 말고 가거라”, 가을 저녁에 반쯤 썩은 그까짓 대추알을 주우면서도 “익어 오느라 고생하셨네” 하셨다. 뜨거운 허드렛물 한 바가지도 그냥 쏟는 법이 없었다. “뜨겁소” 하고는 셋쯤 헤아렸다 물을 흘려보내셨다. 도랑의 개미들은 날쌔게 몸을 피했을까, 물이끼들은 깨금발을 들었을까. 걱정 많은 나는 이별할 일이 겁나서 인연을 엮지 말자, 기를 쓰는 편이다. 우리집에 어쩌다 백일 된 강아지가 왔다. 마뜩잖던 첫 마음이 날마다 녹아내린다. 볼일 급해지면 엄지만 한 꼬리를 감아 뱅뱅 도는 모양은 말 그대로 ‘똥 마려운 강아지’. 화분의 화초를 뜯어 물고서 콩콩 짖을 때는 그야말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식은 농담들이 농담이 아니었네, 뜨겁게 숨 쉬는 일이었네. 녀석이 새벽잠을 깰까 발소리를 죽인다. 방문 찌걱대는 소리 천둥 같아서 돌쩌귀에다 콩기름을 먹인다. 진밥 된밥 한솥밥을 먹는 일은 허름한 내 발소리가 누군가의 그리움이 되는 일. 발소리 기다려 턱 괴고 잠귀 열어 놓는 일. 그 풋잠이 미안해서 발꿈치를 들고 걷는 일. 잊었던 마음이 등불을 들고 걸어 나왔다.
  • [길섶에서] 적멸(寂滅)/이두걸 논설위원

    “이○○님 순환기내과 진료예약이 1월 4일(금) 09시 40분 있습니다.” 며칠 전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선친(先親)의 병원 예약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다니던 병원에는 부음 소식을 따로 전하지 않았으니 환자의 부재를 알 리가 없다. 오래전부터 선친은 거동이 불편했다. 매일 아침 출근길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언덕배기는 중학생 아들의 부축을 받고서야 오를 수 있었다. 베트남 정글에서 모기를 쫓는다고 머리 위로 들이부은 고엽제는 천천히 신경과 면역체계를 갉아먹었다. 몇 해 전부터는 운전대도 놓아야 했다. 입원과 통원치료를 반복하는 사이 갓난쟁이 손주들은 어느새 당신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다. 지난 주말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찾았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그곳을 찾은 유일한 이유는 ‘고요하게 꺼진다’는 뜻의 ‘적멸’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등산로에는 염불과 목탁 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불자(佛子)들은 서너평 남짓한 공간에서 간절한 표정으로 합장한 채 절을 올리고 있었다. 순간 부러웠다. 마지막 순간에 삶의 의지와 체념 중 무엇을 선택했을까. 석양을 뒤로한 채 다리를 절뚝이며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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