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봄비가 와서/황수정 수석논설위원
마당이 있으면 좋겠다. 팥시루떡처럼 부푸는 봄흙. 흙마당이 있으면 당장이라도 할 일이 있다.
시들까 얼까 겨우내 모셨던 화분들을 그 마당에다 맡길 것이다. 봄비가 오면 오종종 그 비를 다 맞히고, 봄비가 안 오면 목 말라도 좀 기다리라 하고. 하늘이 알아서 하시라, 내버려두고 나는 놀고만 싶다.
꽃씨를 묻을 것이다. 까만 씨앗들을 종지 물에 담가서는 싹눈 터지는 순간을 몇날며칠 곁눈질로 기다려야지. 나는 봉선화를 심었는데 백일홍이 대뜸 피어서는 백날을 지고 피고 지고 피고. 석 달 열흘을 마당을 돌 때마다 혼자 웃어 봐야지.
아, 꽃씨부터 챙겨 와야지. 오일장의 종묘상을 굳이 들러서는 십년째 정체가 궁금한 푸른새우꽃, 천일홍을 꼭 데려와야지. 마침 봄비라도 내리면 젖은 흙에 맨발이 미끄러지면서 씨앗들을 다 묻어야지.
한 발짝 걷지도 않았는데 딴딴해지는 내 종아리. 흙 한 삽 뜨지도 않았는데 힘줄이 돋는 발목. 봄비가 와서, 초저녁 쪽잠에 먼저 꾸는 한바탕 춘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