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칼럼
  • [마감 후] 청년이여 앞길을 바라보라/문경근 정치부 기자

    [마감 후] 청년이여 앞길을 바라보라/문경근 정치부 기자

    고당 조만식(1883~1950) 선생은 강서(江西) 사람이다. 평안남도 강서군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다. 무학산이 높게 솟아 있는 이곳은 ‘강서약수’와 고구려 때 그려진 ‘강서고분벽화’가 유명하다. 특히 약수가 명물이어서 조선시대 때는 팔도의 사람들이 속병을 고치려고 모여들었다.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고당은 평양 숭실중학교와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당시 마하트마 간디의 무저항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아 이를 사상과 민족운동의 기준으로 삼았다. 고당은 일제시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정주 오산학교에서 교장을 맡았다. 북한 김일성 통치 시절 오랫동안 2인자로 자리해 온 최용건이 오산학교 때 그의 제자였다. 최용건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을 지냈다. 고당은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향할 때 국내에 남아 일본에 저항했고, 조선물산장려운동 등을 이끌었다. 해방 후 1945년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됐다. 당시 38선 이북에서는 고당이, 이남에서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거두(巨頭)로 통했다. 고당은 소련군을 등에 업은 김일성과의 정치적
  • [2030 세대] 파도에 올라타는 두 가지 방법/김도은 IT 종사자

    [2030 세대] 파도에 올라타는 두 가지 방법/김도은 IT 종사자

    몇 년 전 발리에서 서핑을 배웠다. 해변가에서 몇 번 기본 연습을 한 뒤 코치는 나에게 운동신경이 좋다며 조금 먼바다로 나가서 연습해 보자고 제안했다. 코치와 함께 헤엄쳐 나간 바다 한가운데에는 세계 각국에서 발리를 찾아온 서퍼들이 모여 있었다. 나 같은 초보도 있었고, 선수급인 사람도 있었다. 한데 그날따라 유난히 바람이 불지 않았다. 어쩌다 오는 파도만으론 연습이 잘 되지 않을 것 같아 나는 코치에게 파도가 오는 곳으로 헤엄쳐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코치는 웃으며 파도를 기다리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다. 파도를 찾아 바다 이곳저곳을 헤엄쳐 다닐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바다 한가운데 보드 위에서 파도를 지켜보다 좋은 타이밍이 다가오는 순간을 잡을 것인지.  코치의 이 말은 불현듯 영어 낱말 ‘벌리어티’(velleity)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말 한 단어로 번역하기는 조금 어려운데 ‘행동으로 이어질 만큼 강하지는 않은 소망’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늘 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노력해서 그것을 성취해 내라는 가르침 속에서 살았기에, 노력하지 않는 소망이라는 개념이 무척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웠다. 바라기만 하고,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 [데스크 시각] 정치여, 예능을 내버려 두자/홍지민 문화부장

    [데스크 시각] 정치여, 예능을 내버려 두자/홍지민 문화부장

    기억에 남는 과거 예능 프로그램을 떠올려 보면 우리네 평범한 이웃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프로그램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인적도, 오가는 차량도 드문 어느 새벽 보는 사람이 없어도 횡단보도 정지선을 지키는 운전자를 찾아 인기 개그맨이 잠복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른바 ‘숨은 양심’을 만나 가슴 뭉클한 사연을 듣고 냉장고를 선물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독서율이 그리 높지 않고 지척에서 도서관을 만나기 쉽지 않던 시절 책을 읽자고 동네 도서관을 세우겠다며 거리로 나가 시민들을 만나던 프로그램도 있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요즘엔 유명인들이 육아는 어떻게 하고 집에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친구들하고 어떻게 노는지 등을 엿보는 프로그램이 봇물이다. 대세가 된 스타 관찰 예능을 즐기며 깔깔거리면서도 가슴 한 구석은 아쉬운 느낌이었다. 그런 허전함을 채워 주던 프로그램이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무작정 거리로 나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 보고, 마지막에는 상금을 걸고 퀴즈 승부도 벌인다. 본방 사수를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시청할 때마다 흐뭇한 웃음을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국립대를 줄인다고?/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국립대를 줄인다고?/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부쩍 한국에 대학다운 대학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질적인 측면과 양적인 측면 모두에서 그렇다. 여기서는 너무 적은 수의 국립대학 문제를 논하겠다. 한국에는 2021년 기준 426개 (전문)대학이 있다. 국공립은 57개교, 사립 369개교다. 학생수로는 재적 학생 295만명 중 63만명(21%)만이 국공립대를 다닌다. 국공립대는 해방 이후 19개에서 2020년 54개로, 거의 늘지 않았다. 사립대는 10개에서 285개로 폭증했다. 국가가 고등교육을 책임지지 않은 결과다. 이런 현황은 교육 선진국과 비교해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학은 압도적으로 국공립대가 많다. 한국고등교육 체제의 틀을 제공한 미국과 비교해도 기형적이다. 2019년 기준 미국의 (전문)대학생은 대략 1660만명이다. 공립대학 재학생은 1300만명(78%)이다. 미국 사립대는 1600여개로 숫자로는 공립대와 엇비슷하지만 학생수는 공립대가 훨씬 많다.  사정이 이런데도 수도권 집중 심화와 학령 인구 감소 등을 이유로 지난 10여년간 반강제적으로 국립대 통폐합이 이뤄졌다. 나빠지는 교육 여건에서 대학이 생존책을 모색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로 국립대 통
  • [세종로의 아침] 청와대 개방에 국민의 문화적 총량 모아야/손원천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청와대 개방에 국민의 문화적 총량 모아야/손원천 문화부 선임기자

    이제 몇 밤 지새고 나면 청와대가 일반에 공개된다. 국민들로선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또하나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걸 직접 목격하는 역사적 순간이 될 터다. 세상에 이렇게 유명하면서도 이렇게 덜 알려진 공간이 또 있을까. 관광업계에선 이미 초미의 관심사다. 코로나로 2년 내리 쫄쫄 굶어왔던 터라 더욱 그렇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구석이 있어서 말을 아낄 뿐이다. 청와대 개방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곳은 대통령직인수위의 사회복지문화분과위원회다. 청와대 운영 문제를 두고 관광업계 등 다양한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하고 있다. 그간의 과정만으로 보면 현재 청와대 운영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서울관광재단이다. 각종 자리를 통해 서울의 관광 노하우를 가장 많이 갖고 있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키고 있다. 차기 대선 호재로서의 휘발성을 고려하면 서울관광재단이 먼저 치고 나오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인수위의 인적 구성으로 볼 때도 서울관광재단이 매우 유력한 주자인 게 사실이다. 정부 쪽 실무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나 한국관광의 컨트롤타워를 자임하는 한국관광공사는 상대적으로 한발 물러선 듯한 모양새다. 관광공사의 경우 청와대 공간의 일부인 사랑채를 위탁 운영하는 데만 30명에 달하는 인력
  • [최광숙 칼럼] 국민을 지켜야지 왜 권력자를 지키나/대기자

    [최광숙 칼럼] 국민을 지켜야지 왜 권력자를 지키나/대기자

    최강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근 친여 유튜브에 출연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근황을 언급하며 “내 인생을 걸고 (조국 가족을) 지켜 주고 싶다”며 눈물을 보였다. 동양대 총장 상장 조작 등에 대한 법원의 판결 이후 부산대와 고려대에서 조민의 입학 취소 결정이 내려진 이후 조 전 장관이 “저희 가족 전체가 시련과 환란 상태에 있다”고 말한 직후였다. 최 의원은 로펌 근무 당시 조 전 장관 아들에게 로펌 인턴 확인서를 허위로 발급한 혐의 등으로 3개의 재판을 받고 있다. 자신에게 시련을 안겨 준 조국 일가를 원망할 법도 한데 그는 오히려 거꾸로다. 그 이유야 어찌 됐든 풍비박산 난 조국 일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그렇다 해도 요즘같이 나와 내 가족만 챙기는 세상에 남의 가족을 지키는 데 자신의 인생까지 걸겠다니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지켜 준다’는 말은 외부의 부당한 압력을 받거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힘없는 사람을 보호해 준다는 의미로 쓴다. 김부겸 국무총리는 지난 16일 세월호 8주년 추도사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우리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켜 준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법이다. 그런데 최근 이 말이 민주당에서 정반대의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권누리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권누리

    나를 사랑하는 나의 신/권누리 나는 최선을 다해 최악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차갑게 튀기는 빛을 헤치며 걷는 숲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 환하고 포근한 풍경에 나는 꽤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 같아 꼭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 입 다물고 걸으면 금세 최악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곳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많았다. 너도? 너도 여기 있었구나. 신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엾게 봐 주셔서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 준 거야 우리는 몹시도 기쁜 마음으로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뜨거운 물로 잠깐 바짝 우려낸 차 하지만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최악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구나 그렇게 말했을 때 누군가, 더 나빠질 수 있을까? 이야기했고, 아니야, 우리는 이미 최악으로 와 있잖아, 그런데 여기보다 더 먼 곳이 있으면 어쩌지 그리고 저 멀리에서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최악으로 걸어오는 아는 얼굴들이 어른어른 보였다. 새벽 3시. 강 건너 아직 잠들지 못하는 집들이 있군요. 항상 같은 집 같은 창에 불빛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안쓰러운 느낌 들지요. 이 시각에 무얼 하시는지요. 심야 TV를 보시는지요. 시를 쓰거나 책을 읽으시는지요. 그냥 불면에 시달리는지요. 불면으
  • [마감 후] 환경보호는 ‘불편’하다는 프레임/명희진 산업부 기자

    [마감 후] 환경보호는 ‘불편’하다는 프레임/명희진 산업부 기자

    “손님, 일회용 컵은 매장 안에서 못 씁니다. 매장 컵으로 바꿔 드릴게요.” 지난 주말 서울 시내의 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직원과 손님 간의 작은 실랑이를 목격했다.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은 어르신에게 직원이 주의를 주자 어르신이 언성을 높이며 “손님이 좀 앉으면 안 되냐”고 맞받아쳤다. 직원은 규정 이야기를 꺼내다가 결국 일회용 컵에 담긴 커피를 가져다 일반 매장 컵에 옮겨 담았다. 벌컥 화를 내던 어르신은 구시렁을 멈추지 않고 컵을 받아 갔고, 일회용 컵은 2~3분도 못 돼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마스크를 쓴 직원의 눈에서 한숨이 읽혔다면 기자의 상상이 지나친 탓이었을까. 문득 오는 6월 10일부터 시행된다는 일회용 컵 보증금제 시행을 두고 앓는 소리를 내는 업계의 사정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50일 후부터 가맹점 수 100개 이상인 커피숍, 제과·제빵점, 패스트푸드점 등 3만 8000여개의 매장을 대상으로 일회용 컵 보증금제가 시행된다. 플라스틱 일회용 컵에 음료를 주문하면 300원을 추가로 내야 하는 제도다. 이른바 ‘자원순환보증금’ 명목이다. 현장엔 벌써 볼멘소리가 가득하다. 시행 초기 고객을 상대로 제도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하
  • [데스크 시각] 집무실보다 대통령 별장이 시급하다/김상연 부국장 겸 정치부장

    [데스크 시각] 집무실보다 대통령 별장이 시급하다/김상연 부국장 겸 정치부장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 청와대를 찾은 측근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만 구중궁궐에 가둬 놓고 재미는 당신들이 다 보고 다니지?” 노 전 대통령이 잘못한 일 중 하나는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를 없앤 것이라고 생각한다. 청남대를 주민들에게 돌려주겠다는 숭고한 약속 때문이었다면 대신 다른 곳에라도 대통령 별장을 새로 지었어야 했다. 제대로 된 나라 중 국가원수의 별장 하나 없는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할 것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대통령은 군부 정권도 아닌데 휴가를 군 휴양시설에서 보낸다. 인간은 365일 일만 하고 살 수 없다. 대통령도, 일용직 노동자도 쉬고 놀아야 재충전이 되고 업무 효율이 올라간다. 즐거운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콧노래가 나오고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게 호모사피엔스다. 별장도 없고 안가(安家)도 철거된 이 나라의 대통령들은 밤에 인터넷에 들어가 자신을 비판한 기사들을 보고 화를 품은 채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이런 날이 쌓이면 마침내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말을 내뱉게 된다. 대한민국 정치가 덜컹거릴 때마다 ‘제왕적 대통령제’ 탓을 한다. 하지만 조선의 제왕은 사실 전권을 휘두르지 못했다. 국왕은 사대부들이 정해
  • [안미현 칼럼] 어퍼컷과 계란말이는 이제 잊어라/수석논설위원

    [안미현 칼럼] 어퍼컷과 계란말이는 이제 잊어라/수석논설위원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법무부 장관에 조국 민정수석을 지명했을 때 많은 사람이 놀라고 당황했다. 중립성이 요구되는 법무장관에 사정권력이 직행하는 일은 거의 없다. 게다가 조국은 세상이 다 아는 ‘대통령 사람’이었다.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끓었지만 문 대통령은 끝까지 관철했다. 몇 년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와 사법개혁을 반드시 완수하겠다는 사명이 대통령의 귀를 닫고 눈을 가렸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법무장관에 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지명했다. “절대 파격이 아니다”라고 단언하는 당선인의 모습에서 3년 전 문 대통령의 고집과 독선이 오버랩된다. 다른 게 있다면 그때는 ‘사법개혁 완수’였고, 지금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저지’다. 더불어민주당의 검수완박 폭주는 비정상이지만 한동훈 맞불도 정상은 아니다. 당선인은 검수완박과 관계없다고 했다. 오직 선진 사법제도 구현을 위해서라고 했다. 그렇다고 치자. 선진 사법을 구현할 사람이 “영어 잘하고 독립운동가 같은” 자신의 심복밖에 없는 것인가. 더 걱정스러운 것은 장관 후보자들의 잇단 의혹에도 “나는 못 들었다”며 “언론이 취재해서 알려 달라”고 하던 당선인의 태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실패해도 위엄을 잃지 않는 사나이/미술평론가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실패해도 위엄을 잃지 않는 사나이/미술평론가

    돈키호테는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가 1605년과 1615년 두 권으로 펴낸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오십 줄에 접어든 소지주로 밤낮없이 책에 빠져 지내다 이야기 속의 기사들처럼 악을 평정하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이웃집 농부 산초 판사를 꼬여 집을 떠난다. 그가 만나는 세상은 가혹하다. 그러나 패배하고 두들겨 맞아도 돈키호테는 우아하고 점잖게 처신한다. 모든 실패는 자신을 시기하는 마법사의 농간 때문이라고 정신 승리를 거둔다. 그의 시종이자 길동무인 산초 판사는 정의 실현 같은 고매한 이상 따위는 안중에 없고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현실적 인간이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떠나지 않는 걸 보면 농사를 지으며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나날을 보내기보다는 이 기이한 모험을 즐기는 것 같다. 패배하고 구타당하는 주인공 돈키호테에는 작가의 삶이 투영돼 있다. 세르반테스는 실패투성이 삶을 살았다. 군인으로 출발했으나 전쟁에서 부상해 왼손을 영영 못 쓰게 됐다. 항해 중 이슬람 해적에게 나포돼 알제에서 5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으며, 간신히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 극작가가 되려 했으나 희곡은 쓰는 족족 실패했다. 중년이 된 세르반테스는 극작가의 꿈을 접고 세금 징수하는 일을 하게
  • [특파원 칼럼] 기로에 선 중국의 ‘제로 코로나’/류지영 베이징 특파원

    [특파원 칼럼] 기로에 선 중국의 ‘제로 코로나’/류지영 베이징 특파원

    지난달 5일 가족과 베이징 북쪽 순이(順義)에 있는 창고형 할인마트를 다녀온 뒤 파출소 전화를 받았다. 같은 날 코로나19 확진자 한 명이 해당 매장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동통신사 기지국에 스마트폰 동선이 파악된 수천 명이 관찰 대상자로 분류돼 2주간 자가격리 조치를 받았다. 집 앞에 센서가 설치돼 현관문을 하루 다섯 번까지만 문을 열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몰래 외출할 수 있지만 ‘통행증’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젠캉바오(健康寶)의 상태가 ‘비정상’으로 바뀌어 있어 동네 편의점조차 출입이 차단된다. 처벌 위험을 감수하고 밖에 나가도 바람 쐬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길고 지루한 격리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지 2주도 안 돼 또 한번 파출소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 특파원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 단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오피스타운에서 감염자가 여럿 나왔는데, 이번에도 기지국에서 기자의 스마트폰이 잡혔다는 것이다. 재차 집에 갇힐까봐 겁이 났다. “위치가 가까워 오류가 난 것 같다”고 여러 차례 설명하고 서약서까지 쓰기로 약속한 뒤에야 2주 자가격리를 피할 수 있었다. 한 달 사이 두 번이나 격리 소동을 겪은 뒤로는 사람들이 모일 만한
  • [2030 세대] 현실 도피적 투자에 대하여/김영준 작가

    [2030 세대] 현실 도피적 투자에 대하여/김영준 작가

    이제 주변에서 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진 것 같다. 주식이든, 코인이든, 부동산이든 무언가 하나는 투자를 하고 있고 당장은 투자를 하지 않더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아졌다. 좋은 현상이다. 투자를 불로소득이라 여기는 노년층의 생각과 달리 이제는 시대가 변했다. 노동소득만으로 나의 생애 소득을 충당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컨센서스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불로소득을 소리 높여 외치는 세대들이 국민연금 제도의 최대 수혜자란 점, 현재 투자에 관심을 가지는 세대들이 앞으로 국민연금에서 부담이 높아질 사람들이란 점은 인식의 차이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부분도 있다. 투자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높아지는 현상이 지속되다 보니 투자의 목적을 ‘일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두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투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은 좋지만 사람들이 탈노동의 수단으로 투자를 찾는 현상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노동소득을 보조하고 자산 증식 차원에서의 투자와 달리 탈노동으로서의 투자는 요구수익률이 훨씬 높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높은 위험과 변동성을 짊어져야 하는데 이 경우 운이 좋
  • [안도현의 꽃차례] 봄날, 실패의 목록들/시인

    [안도현의 꽃차례] 봄날, 실패의 목록들/시인

    초록이 하루가 다르게 북상하고 있다. 개망초, 지칭개 같은 풀들도 한 뼘 가까이 자랐다. 텃밭의 쪽파는 한 뼘 넘게 푸른 기세를 올리고 있다. 산비탈 귀룽나무는 제일 먼저 초록 잎사귀를 치렁치렁 펼치더니 벌써 꽃망울이 하얗다. 귀룽나무를 한 그루 캐 와서 담 넘어 심어 볼까 하다가 포기했다. 내 눈 앞에서 반드시 꽃을 봐야 하는 건 아니므로. 올봄에도 텃밭에 씨감자를 묻었고, 상추와 아욱과 고수 씨를 뿌렸고, 오이와 배추 모종을 심었다. 꽃이 꽤 화려하다는 서양 꽃 십여 종을 모판에 뿌려 놓았는데 새끼손가락 손톱만 한 싹이 올라온다. 하루에 두 번 물을 주는 일을 놓치면 안 된다. 여기까지 쓴 내용으로는 내가 시골 생활에 아주 잘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나무와 채소와 꽃을 심고 가꾸는 일에 제법 부지런하게 몸을 움직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마당과 텃밭에서 성공한 사례보다는 실패의 목록들이 더 많다. 작년엔 텃밭의 거름이 부족해 감자와 땅콩은 볼품이 없었으며, 방울토마토는 줄기를 제대로 잘라 주지 못해 땅에 떨어뜨린 게 더 많다. 흙을 손에 묻히는 즐거움은 컸으나 매번 소출은 변변찮았다. 주목 세 그루, 오죽 두 뿌리, 감나무 한 주, 장미 셋, 수국
  • [마감 후] 교육부 장관 후보자의 꼰대와 어른 사이/유대근 탐사기획팀장

    [마감 후] 교육부 장관 후보자의 꼰대와 어른 사이/유대근 탐사기획팀장

    윤석열 정부의 초대 내각 인선이 마무리됐다. 장관 후보자는 모두 18명. 평균 연령은 약 60세다. 후보 시절 “30대 장관이 여러 명 나올 것”이라던 윤 당선인은 우리 나이로는 40대조차 없는 인선 결과에 대해 능력을 중심에 뒀다고 설명했다. 뭐, 좋다. 사상과 태도의 젊음은 생물학적 나이만으로 따질 수는 없는 것일 테니까. 다만 나이를 떠나 ‘꼰대’라면 곤란하다. 그런 면에서 눈에 띄는 인물이 있다. 김인철(65)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다. 언론의 초기 검증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면면은 교과서적인 꼰대에 가깝다. 영상 등으로 남아 있는 그의 발언과 행적만 두고 따져 보자. “내가 네 친구야, 내가 네 친구냐고?” 지난해 2월 당시 한국외대 총장이던 김 후보자가 학생들에게 내뱉은 말이다. 학생들은 사범대 학과 통합안에 반대하며 “김인철은 다섯 학과 체제 유지 보장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피켓에 쓰인 대로였다. 총장님은 ‘어린 것’들이 이름을 부르는 게 영 마뜩잖았나 보다. 언성을 높이더니 학교 관계자에게 “학생 이름을 적으라”는 꼼꼼한 지시도 잊지 않았다. 위계를 이용해 겁박하는 태도다. 공식석상에서 학생 대표에게 반말도 했다. 2020년 10
  • [데스크 시각] 거꾸로 갔던 ‘탈원전’/박상숙 부국장 겸 산업부장

    [데스크 시각] 거꾸로 갔던 ‘탈원전’/박상숙 부국장 겸 산업부장

    새달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가 에너지 기본계획을 다시 짜겠다고 한다. 2050년까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70%로 확대하고, 원자력 발전 비중을 6%로 축소하는 현 정부의 계획에 급제동을 건 것이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는 무리한 탈원전 조치와 장밋빛 신재생에너지 확대 전망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아우성에도 아랑곳 않고 ‘마이 웨이’를 질주했다. ‘그린 뉴딜’ 바람이 한창 일었던 2008년 당시 세계의 태양전지 시장을 호령하던 샤프의 일본 현지 공장을 찾은 적이 있다. 그해 태양광 사업 시작 50년을 맞은 샤프의 위용을 목격하고 난 뒤 “반드시 태양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창업자의 호언이 곧 실현되리라는 믿음이 커졌다. 그랬던 샤프가 주력이던 LCD 패널 사업 부진에다 태양광 시장에서마저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10년 전 맥없이 쓰러졌다. 백년 기업의 파산 소식은 공장을 직접 둘러봤던 터라 개인적으로도 충격이었다. 반세기 동안 태양광에서 ‘인조 유전’을 일구려던 샤프의 몰락은 신재생에너지의 세계가 그리 쉽게 오지 않을 것이란 전조나 다름없었다. 이후로도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효율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았고, 기존 화석 에너지를 대체할 만한 존재감은 여전히 미약하다.
  • [김택규의 문화 잠망경] 비대면 소통이 더 좋다/번역가

    [김택규의 문화 잠망경] 비대면 소통이 더 좋다/번역가

    호구지책이 강의이고 취미가 독서인 탓에 코로나 시대의 도래로 생활이 싹 바뀌었다. 강의를 하든 독서 모임을 하든 사람 만날 일이 없다. 집에서 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강의도 하고 독서 모임도 한다. 사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비대면 소통 방식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서로 마주 보고 침도 튀겨 가며 대화하는 게 진짜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의 요청이 들어와도 비대면 방식이라고 하면 다 거절했고 독서 모임도 대면 방식을 고수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수그러들 기미가 안 보여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독서 모임부터 비대면 방식으로 전환했고 중국어 번역강좌도 올봄에 새로 비대면 방식으로 개강했다. 처음에는 우려가 컸다. 과연 참여자들이 서로 마주하지 않고도 긴밀한 교감을 유지하며 소기의 학습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비대면 방식으로 바꾼 후로 독서 모임은 1년, 번역강좌는 두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의외의 결론을 얻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나도 사람들의 소통 양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비대면 방식의 ‘단맛’을 사람들이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번역강좌 첫날, 모니터에 9개의 낯선 얼굴이 뜨고 다들 자기소개를 마쳤을 때 나는 깨달았다. 그중 적어도 3명은
  • [세종로의 아침] 롱코비드, 코로나19의 짙고 긴 그늘/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롱코비드, 코로나19의 짙고 긴 그늘/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고교 동창 P가 지난 주말 한국 땅을 밟았다. 43년 전 목사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간 그는 당시까지 미국 동남부에 남아 있던 인종차별의 벽을 뚫고 자수성가했다. 아들딸 모두 시집·장가 보내고 안락한 노후를 맞는 듯했던 그는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퇴행성 뇌질환인 파킨슨병을 얻었다. 요양을 위해 조국에서의 일년살이를 계획한 그는 “이게 어쩌면 마지막 여행일 수도 있겠다”고 했다. 한국행은 우여곡절 끝에 이뤄졌다. 미국 국적인 그는 적법한 장기 체류를 위해 재외동포(F4) 비자를 현지 영사관에 신청하려 했지만 비대면 예약을 하는 데만 2주가 걸렸다. 마무리되지 않았던 호적을 정리하는 데만 여섯 달이 걸린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문을 좁힌 영사관 방문 절차 탓이었다. 결국 그는 미국에서 한국 비자를 받는 걸 포기하고 한국행을 감행했다. 일단 무비자로 입국해 법무부 외국인청에서 체류 자격을 변경하겠다는 요량이었다. 대행비 100여만원이 아깝지 않다고 했다. 15시간을 날아 도착한 인천공항은 3년 전 마지막 방문 때와는 모든 게 생소했다. 그때는 양국 간 비자 면제 협정 덕에 한결 수월했지만 이제는 ‘전자여행허가서’(K-ETA)를 따로, 그리고 미
  • [전의찬의 탄소중립 특강(8)] 이제 온실가스는 돈이고 경쟁력이다/탄소중립위원회 기후변화위원장

    [전의찬의 탄소중립 특강(8)] 이제 온실가스는 돈이고 경쟁력이다/탄소중립위원회 기후변화위원장

    우리나라는 2015년 1월 1일부터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를 시행하고 있다. 정부가 할당 대상 업체의 온실가스 배출 허용량을 설정하고, 대상 업체가 할당받은 배출량보다 더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거래시장에서 온실가스 배출권을 구매하고, 남으면 다른 업체에 배출권을 파는 제도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대상 업체는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고, 효과적으로 온실가스를 감축한 업체는 배출권 매각을 통해 수익을 올리게 된다. 감축 단가가 낮은 기업에서 온실가스를 많이 감축하도록 유도하고, 배출권 가격이 거래시장에서 결정됨으로써 시장경제체제를 활용한 대표적인 온실가스 대책이 ‘배출권 거래제’이다. 우리나라의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는 1기(2015~2017년)와 2기(2018~2020년)는 3년 단위로, 3기(2021~2025)부터는 5년 단위로 운영되고 있다. 할당 대상 업체는 685개(3기)이며, 평균 배출허용 총량(3기)은 6억 970만t으로 우리나라 온실가스 총배출량의 73.5%에 해당된다. 1기 및 2기 계획기간 온실가스 총거래량은 1억 7300만t이며 총거래금액은 약 4조 3000억원이었다. 배출권 평균 거래가격은 t당 2만 3914원이었으며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할머니 듀오/김영진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할머니 듀오/김영진

    할머니 듀오/김영진 목욕탕에 다녀오시나, 할머니 두 분 껍질 벗긴 삶은 계란마냥 하얗고 말간 얼굴로 서로 정담 나누시며 걷는다 동생, 이제 집에 가면 뭐 할랑가? 뭐 하긴요, 시장에나 갈라요 장에는 뭐 하러 갈라고 그란가? 영감 팔러 갈라 그라요 엥, 얼마에 팔라고 그란디? 오천만 원만 주면 팔라고 그라요 오메야, 팔릴랑가 모르것네 그란디 그 돈 받으면 어디따 쓸라고? 천만 원짜리 영감 있으면 바꿀라고 그라요 목욕 바구니 나란히 든 두 분 구부러진 등 위로 햇살이 깔깔깔 빛난다 목욕 가방을 든 해맑은 얼굴의 두 할머니. 봄 길 걸어가며 얘기 나누신다. 집에 가면 뭐 할 건가? 목욕탕에서는 서로 등 밀어 주고 요구르트도 먹고 찐 달걀도 먹고 세상 사는 이야기 참 좋았을 터였다. 집은 목욕탕보다 더 심심한 곳일지 모른다. 영감 팔러 시장에 간다는 답이 따른다. 평생 애를 썩인 영감은 오늘도 할머니의 속을 썩였을 것이다. 얼마에 파는데? 5000만원. 동무 할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팔리면 뭐할 텐데? 1000만원짜리 영감 있으면 바꿀 거다. 대화 속에서 메주 뜨는 눅진한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할머니는 장에 가서 속을 썩인 영감이 좋아하는 국을 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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